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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2화


1347화

잠시 탑주의 상태를 살핀 존 워스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고문의 현장이 비치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사람들은 아래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구도가 달랐다. 아래층 화면의 중심이 부관주라면, 지금 화면의 중심은 이드다. 뻔한 소리지만 그렇게 조정한 이는 존 워스였다.

그들 혼돈의 파편에 있어 관심을 두고 신경 써야 할 존재는 오로지 이드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에 비하면 부관주의 가치란 먼지와 같다.

그렇기에 이드가 화면에 비친 순간부터 존 워스의 눈은 이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화면 너머에 있음에도 이드를 향한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열기를 태우는 중이다.

“내……딸 …….”

그리고 그 순간을 방해하는 탑주의 잡음.

무언가에 대한 흥이 깨어진 것일까. 열기가 가신 존 워스의 눈가에 마땅찮은 기색이 어린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부관주에 대한 걱정이라니. 본인 생각부터 하는 것이 어떻겠소?”

“부관・・・・・・ 주를…….

“그럼에도 그녀가 살길 바란다면 한시라도 빨리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시오. 부관주를 죽이고 살리는 건 탑주 하기에 달렸소.”

“으아아…….”

분함일까. 간절함일까.

복잡한 심경이 담긴 탑주의 힘없는 울부짖음에 존 워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위로인 듯 조롱인 듯 건네는 한 마디.

“뭐, 너무 걱정은 마시오. 그라면 쉽게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웃긴 일이지. 고작 그만한 전력으로 이드를 막으려 하다니. 아니, 이건 부관주를 욕할 일이 아닌가? 그녀는 탑주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말이오.”

탑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비꼬는 말이지만 틀린 점이 없기 때문이다.

존 워스는 반응이 없는 탑주를 무시하고 화면 속 부관주를 차갑게 비웃었다. 지금의 결과와는 너무도 다르게 당당하게 이드 앞으로 나서던 모습이라니.

존 워스는 그 순간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자신감으로 홀로 당당히 앞에 섰을까.

그리고 노림수가 발각되어 싸움이 시작되던 순간.

초인 마법과 초인기를 사용해 거인으로 변해 이드를 공격하는 순간에는 존 워스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분수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똥개와 와이번의 싸움도 이보다 어이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당시 부관주가 보였던 진지함이란 차라리 코미디였다.

애초에 이드가 받아 주지 않았다면 성립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만약 이드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어땠을까. 존 워스에겐 과거 이드를 상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은 몸짓 하나조차 치명적이지 않은 것들이 없던 무공들.

의지를 가지고 천지가 좁다며 용틀임하던 십이대식의 의형강기.

그중 하나만 제대로 꺼내 놨어도 부관주와의 전투는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으리라.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존 워스는 오히려 의아해했다. 이드는 왜 부관주를 상대로 싸웠을까?

“날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존 워스는 빠르게 자문자답했다.

처음부터 뻔히 정해진 답이었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자신이 아니라 소멸한 메르시오를 제외하고 남은 혼돈의 파편.

그런 자신들 중 하나가 나오길 바란 것이다.

뿌드득,

아마도 이드와의 전투는 피할 수 없으리라. 상상만 해도 끓어오르는 투기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봉인에서 깨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나 마음이 들뜬 적이 없었다. 자신들은 우주 섭리의 한 구성 요소로서 그저 기계적으로 작동될 뿐일 텐데.

“이게 살아 있다는 것인가. 새삼스럽군.”

어쩌면 상대가 이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원의 인이 선택한 주인.

동시에 메르시오가 떠올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완성된 차원의 인의 주인인 이드와 싸워 패하게 된다면 더 이상 부활의 기회는 없다. 패배와 동시에 차원의 인으로 흡수되어 섭리의 일부로 돌아간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것은 인간이 말하는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죽음. 하지만 존 워스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는 기대로 매우 즐거웠다. 이드와의 싸움이 기대되었고, 설령 패하더라도 창조주가 정해 놓은 법칙을 따르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들은 존재의 근간에 새겨진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 내 조바심을 생각해 좀 더 힘을 내 줬으면 좋겠소. 탑주.”

그렇지 않으면 불만이 쌓인 심술로 이드가 아닌, 자신이 부관주를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끊어 낸 말이지만,

부관주에 대한 애타는 마음으로 여태 들리지 않던 존 워스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느아아아……!”

쿠쾅!

탑주가 안간힘을 쓰는 순간, 바이트 타블렛이 움직였다.

계속 어긋나기만 하던 톱니 하나가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거친 소리가 나더니, 촤르륵 하고 바이트 타블렛 표면에 새겨진 마법의 문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에 존 워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스트랄 레벨 5를 넘었나. 이제 완성이 코앞인데…………… 남은 문제는 탑주가 끝까지 잘 견뎌 주느냐인가.”

마치 직접 연구에 참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바이트 타블렛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읽어 낸 존 워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 탑주가 있었다.

앞서 예상했듯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얼굴과 손을 비롯해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미라처럼 바짝 메말라 있었는데, 초록의 가시나무가 이런 그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또 말이 가시나무지, 여기에 달린 가시는 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레이피어처럼 길고, 바늘처럼 날카로운 가시는 탑주의 팔다리는 물론 천추, 흉추, 경추의 척추 라인을 따라 두개골을 뚫고 정수리에까지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가시나무가 뻗어 나온 곳은 다름 아닌 바이트 타블렛이었다. 세 개의 바이트 타블렛 중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는 바이트 타블렛에서,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 나온 가시나무 줄기.

그렇다면 바이트 타블렛은 어째서 자신을 만든 탑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그냥 보면 고문과 다를 것이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 수 있다. 초록의 가시나무 안을 핏물처럼 흐르고 있는 미약한 빛줄기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몸에 박힌 가시를 통해 탑주와 바이트 타블렛이 직접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탑주는 바이트 타블렛을 원래의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완성해 나가는 중이었다.

생각만 하면 오류가 자동으로 수정된다. 수정된 부분을 고치기 위해 마법진 수정을 위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생각만으로 모든 과정이 이뤄지니, 이런 속도가 나는 것도 당연.

그야말로 대형 마법진이나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꿈에서도 그리는 작업 환경일 것이지만.

다만 성능이 좋은 만큼 부작용 또한 분명했다.

당장 미라나 다름없는 탑주의 몰골만 보아도 신체에 엄청난 부담이 걸리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부관주가 탑주를 만나고 돌아간 지 고작 두어 시간이다. 그 짧은 사이에 탑주는 미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부관주가 찾아왔을 때 탑주도 평상시의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나던 눈은 흐렸고, 다크서클은 턱까지 내려왔으며,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피로와 집착에 다듬지 못한 옷과 머리는 엉망이었다.

초인 마법이라는 새로운 계파를 창시하고 그 아래 수백의 마법사를 거느린 탑주에게서 볼 수 있는 위엄과 카리스마, 그리고 하늘에 닿은 지성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멋진 모습을 대신해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두르고 있었다. 그 정체가 비록 정상적이지 못한 집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멋진 모습도, 추한 집착도 없다.

그저 힘없이 사용되어 죽어 가고 있는 노인이 있을 뿐이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꼴을 한 탑주.

과연 그는 지금 스스로의 이 비참한 몰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누군가 탑주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었다면 당혹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거지?’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기 위한 작업 중에도 머릿속 한쪽을 차지한 짧은 의문에 대한 답을 탑주 본인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존 워스가 탑주를 기절시킨 후에 이렇게 만들어서?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탑주의 비참함이 덜하지 않을까.

진실은 그런 본능적인 의문에 답할 뇌 용량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탑주의 뇌는 그 능력의 99%를 오로지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 쏟아붓고 있는 상태였다. 남은 1%도 죽어 가고 있는 신체의 각 기관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되고 있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

이런 중에도 부관주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숭고했다. 그 마음은 진짜 부모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라고 할까.

지금 탑주가 부관주를 살리기 위해 존 워스의 말을 따르는 것은 비유하면 이런 거다. 고주망태 상태로 만취한 상태에서 6클래스 프로즌 패더의 임계 공간 좌표를 계산할 때의 난이도.

그야말로 본능에 새겨진 부성애가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그런 일이었다. 과연 이 모습을 부관주가 보았다면 기뻐할까, 슬퍼할까.

답이야 뻔하지만, 지금 탑주에게는 그런 뻔한 답을 떠올릴 능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불쌍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꼴을 만들어 낸 존 워스에게 그런 인간적인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다.

“탑주.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까지 얼마나 남은 것 같소?”

“으어…….”

“쯧, 대답 하나 듣기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군.”

말과 달리 냉막한 표정을 유지한 존 워스가 탑주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두개골에 박혀 있는 가시 속을 흐르는 빛의 흐름이 느려지며 탑주의 눈빛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으・・・・・・ 살려 주시오.”

그리고 생각할 능력을 돌려받은 탑주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애원이었다. 분노도, 의문도 아니었다.

살고 싶다는.

죽고 싶지 않다는.

어찌 보면 목숨을 걸고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을 목표로 하던 탑주가 내놓기에는 구차해 보이는 애원이었지만.

달랐다. 그의 애원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소. 그러니 부관주를. 영혼의 관을 살려 주시오.”

“그건 탑주 하기에 달렸소. 완성까지 얼마나 남았소.”

“……30분.”

“30분이라. 이상하군. 탑주가 부관주에게 약속한 시간보다 늘어난 게 아니오? 이 사실을 알면 부관주가 실망하지 않겠소?”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호오?”

“이건 내가 원하던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과는 다르오. 목적지를 바꾸었으니, 도착 시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요.”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이 있소. 하지만 탑주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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