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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5화


1350화

“끄으으…… 크으윽!”

힘껏 깨문 이 때문에 턱이 파도친다.

따깍!

그러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이 조각이 피를 타고 흘러나온다. 이에 부관주는 더욱 단단히 턱을 조였다.

라울은 이런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지독하군.”

설마 이렇게나 버틸 줄이야.

중간중간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답을 듣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강단 있던 모습과 달리 고통에 약한 모습도 보였다. 그렇기에 듣고자 하는 모든 정보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탑주에 대해 느리고, 부실하게 답하던 혀가 결국에는 멈추고 말았다. 라울은 멈춘 혀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 부관주의 살을 가르고 뼈를 갈아 냈다. 마법사의 나약한 육신으로 감당하기엔 버거울 정도의 충격.

그럼에도 부관주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앞서 고통에 무너지던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라울은 즉시 고문의 강도를 올렸다.

그러나 부관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정신을 놓지 않고 고통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육신에 가해지는 부담은 배가 되었고, 그만큼 한계도 빠르게 다가왔다.

한계를 넘는 순간 부관주는 죽는다. 그녀를 살펴 바벨로 돌아가려는 라울의 입장에선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고문이 중단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라울에게 불리한 대치였다.

한쪽은 죽일 생각이 없는 반면, 다른 한쪽은 죽음으로 지키려 했으니까.

아무렴 마음가짐부터 이렇게 달라서야.

하지만 내심 고개를 저은 것과 달리, 라울은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탑주에 대한 부관주의 충성심에는 경의를 표하오. 하지만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소?”

“흐으… ・흐으…….”

“내겐 아직 부관주를 괴롭힐 방법이 많이 남았소. 어쩌면 그러다 부관주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런 사고는 피해야지 않겠소?”

“절대・・ 절대……..”

말할 힘이 없는 것인지, 무어라 더 이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라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

그것만으로도 부관주의 뜻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죽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

이런 충성심이 눈에 밟힌 것일까.

한걸음 뒤에서 심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검후가 말했다.

“심문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자작?”

“옳게 보셨습니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일 테지요.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법사가 이렇게나 끈질기다니 말입니다.” 어찌 보면 마법사를 얕잡아보는 말,

그에 비올라가 참지 않고 곧장 들이받았다.

“거, 말씀 함부로 하시네. 마법사의 끈기야말로 지상 최강인데 말입니다.”

‘아무렴, 끈기 하면 우리라고! 죽어서도 마법을 연구하는 건 마법사뿐이란 말이지!’

그에 상관의 말이라 듣고만 있던 마법사들이 내심 비올라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만 라울은 비올라의 이런 반응을 무시했다.

그가 말한 ‘마법사’ 중에 라미아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정신은 지킬 것이 있을 때 강해지지. 검이나 마법이 정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네.”

“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검후의 말에 라울이 쓰게 웃었다. 잘 알기에 포기하는 것이니까.

검후는 이런 모습에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물러날 때를 잘 알았던 것 같군. 갇혀 있던 날 찾아올 때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관계가 무너지기 직전에서는 귀신같이 발을 뺐으니까 말이야.”

“…….”

검후가 감금당하고 있던 때의 이야기에 라울의 눈이 흔들렸다.

이 시점에 왜 그때의 이야기를.

아무리 사죄를 했다고는 하나,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검후 뒤로 보이는 은색 기사단의 눈초리가 대번에 살벌하게 변한다.

하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라울이 아니다.

헛기침 한 번으로 눈길을 떨친 라울이 오히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하.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게 제 심문의 핵심입니다. 무조건 강하게 밀어붙여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요. 오히려 진실은 물러날 때 비로소 드러나더군요.”

“그래. 그때도 딱 지금 같은 얼굴이었지.”

“어이쿠. 자꾸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지금 자작이 한 낯짝이 보기 싫으니까 그러지.”

새초롬해진 검후의 눈초리를 라울이 슬그머니 피했다.

도저히 좀 전까지 부관주의 어깨뼈를 갈아 대던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

어떻게 피와 고통을 앞에서 태연히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싸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섬뜩한 공포를 느꼈을 장면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라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런 것이 바로 전투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관주를 죽일 생각이 없는 만큼, 라울은 나름대로 손에 사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했다.

이런 점에선 검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기회만 되면 라울을 괴롭히는 그녀였지만, 결코 그의 손속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나선 까닭도 부관주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탑주에 대한 부관주의 충성심에 감동한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아쉽게 되었군. 결국 탑주의 마법서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초인 마법서.

부관주를 침묵하게 만든 이유였다. 탑주의 모든 지혜와 초인 마법의 정수를 담아 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마법서.

존재 자체가 미확인인 물건이지만 라울은 분명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 방대한 초인 마법을 전부 머리에만 담아 두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과 마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글로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마법서란 마법사의 상징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에 부관주는 결사의 침묵으로 답했다. 그녀의 이런 침묵은 곧 마법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렇기에 검후는 단호하게 심문의 중단을 결정한 라울을 내심 다시 보았다. 누구보다 마법서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을 그가 이렇게 쉽게 손을 떼다니 말이다.

“글쎄요. 전 아직 기회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지금 제 손에 마법서를 대신할 사람이 들어왔으니까요. 굳이 안달할 필요가 없지요.”

“흐음, 방금 그 말은 그냥 듣고 넘기기 곤란한데? 부관주가 누구 손에 들어갔다고?”

쉭쉭.

 “정정하지요. 검후님과 바벨의 손입니다.”

눈앞에 주먹을 흔드는 검후에 라울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바벨이 이 작전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검후와 이드가 없었어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또 그 공을 무시할 수 있을까?

무시하는 순간 애써 사죄하고 개선해 놓은 관계가 몽땅 무너진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악화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탑주 다음으로 초인 마법에 정통할 것이 확실한 부관주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원래 모험이란 보물을 얻기 전보다 얻은 후가 더 위험한 법이다.

“좋아. 부디 지금 그 말을 잊지 말기를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라울이 다짐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이미 다른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해야 부관주가 가진 초인 마법을 바벨이 조금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이런 속내를 겉으로 비치지 않은 상태로, 라울이 부하 마법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에 따라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이 부관주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포션이 뿌려지고, 회복 마법이 쏟아졌다.

피가 멈추고 쩍 갈라진 근육과 피부가 달라붙었다.

남은 것은 피딱지와 선명한 붉은 자국뿐.

그에 따라 부관주도 겨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사들의 조치는 이어졌다.

구속구를 통해 부관주의 마법을 봉인했다.

연이어 마나와 초인력에 대한 봉인까지 더해졌다.

초인기에 대한 조치는 초인들이 맡았다.

부관주를 초인으로 봐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초인기를 사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기 때문에 처한 조치였다. 이러한 과정을 눈을 떼지 않고 살핀 라울이 오탄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자네라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부관주는 어쩌면 이번 습격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일지도 모른다.”

“저희 플레타 부대의 명예를 걸고 부관주를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오탄 역시 라울과 같은 것을 보고 들었다.

생각의 범위는 달라도, 부관주를 이용하면 바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오탄의 표정은 실로 진지했다.

그에 라울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오탄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그의 말을 신뢰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렇게 뜨거운 믿음의 시선이 오가는 모습에,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있던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보면 플레타 부대의 대장이 라울 자작인 줄?”

“저도 순간 착각했다니까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라미아.

하지만 진짜 불만인 사람은 당사자인 플레타였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대 대장은 난데, 왜 기분은 너네가 내고 있냐? 특히 오탄! 너 이 자식! 나보다 라울이 더 좋으면 글로 소속을 옮기든가!” 

미운 네 살도 아니고, 추태가 따로 없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부대의 명예를 내걸었던 오탄으로서는 기운이 빠지다 못해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라울만 있을 때라면 또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외부인들도 많지 않은가. 도대체 자신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대장을 만났나.

“하아…… 진짜 확 옮겨 버릴까 보다.

“이 자식! 너 옮기기만 해봐! 죽는다!”

옮기랄 땐 언제고, 이젠 옮기면 죽는단다. 어쩌란 말인가.

오탄은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러 덮었다.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이다.

“이 자식이 대답 안 해? 넌 죽어서도 우리 부대 부대장인 거야! 알아듣냐?”

“알았어요, 알았어. 대신…… 대장이 다른 부대로 옮겨 가면 안 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대장은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합니까?”

“이게 아까부터 말대꾸를!”

“악악!”

어느새 의미 없는 주먹질을 주고받기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이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울은 벌써 자리를 떴고, 부하들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로하고 라울이 검후와 이드 들을 보고 말했다.

“절대로 바벨의 부대는 저런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놈만! 저 플레타 놈만 이상한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라울의 입매가 불쌍할 정도로 부르르 떨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바벨이라는 조직도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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