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4화
1359화
허공을 가로지른 검은 선이 성벽을 때렸다.
끄끼이이익-
단단한 성벽은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비명을 질렀다.
철과 철이 서로를 긁어 대며 갈려 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건 검의 비명이었다.
굳건한 듯 보이지만 버티기 힘들다는 표시.
우지지직!
한계는 곧장 나타났다. 검은 선이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성벽이, 아니, 성벽을 이루고 있는 검이 뒤틀리며 찌그러졌다.
제일 앞에 선 검의 벽이 무너지자 그 속에서 2차 검의 성벽이 나타났지만, 그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선도 움직였다.
끼기기기기기-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 위로 갔다가 다시 좌측으로
그야말로 중구난방.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검은 선은 성벽 위를 무자비하게 가로질렀고, 그 흔적이 늘어남에 따라 1차 성벽, 2차 성벽이 차례차례 벗겨졌다.
“후훗.”
“……쯧.”
이런 결과에 이드는 웃었고, 존 워스는 혀를 찼다.
특히 이드의 미소는 시원했다. 본래 막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쉬운 법. 이드는 브레스의 강도를 높여 무차별 난사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생각 없이 아무 곳에나 마구 쏜 건 아니다.
성벽의 붕괴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허점을 핀 포인트로 노려 브레스를 뿜었다. 그때마다 적중당한 성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천검의 요새가 아무리 견고해도 이런 속도로 구멍이 뚫려서는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존 워스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성벽을 쌓고 있던 존 워스의 검식 천검의 요새가 변했다.
촤르르륵!
마치 허물을 벗듯 파괴된 성벽이 순식간에 분리되어 이드를 노렸다.
수백의 검영이 화살이 되고, 검식이 되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은 당문의 만천화우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 어검술.
더욱이 이 공격은 어디까지나 뒤잇는 초식을 위한 연계기일 텐데도 이러한 위력이라니.
혼돈의 파편이 대단한 건지, 무공의 가능성이 대단한 건지.
이드는 삐쭉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는 검결지를 엮었다.
그렇게 검결지와 일라이져가 허공을 격하고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쩌렁!
몽글몽글한 무형기류의 강기무 속에서 붉은 태양처럼 뇌정화가 떠올랐다.
파아아앗!
구름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뇌정화에서 빛이 뿜어졌다. 빛줄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라이져의 검강.
빛줄기로 변한 검강은 쏟아지는 천검의 요새의 파편을 어느 하나 흘리는 것 없이 모조리 요격해 냈다.
당연하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세상을 비추는 빛을 피할 수는 없는 법.
하나 핵심은 따로 있었다. 노려야 할 것은 여전히 성벽 뒤에 선 존 워스,
이드는 즉시 브레스의 출력을 상승시켰다.
건곤으로 나뉘었던 두 손이 교차하며 무극신기가 일어났다.
그에 따라 흑진주의 형태가 원뿔형으로 변했다. 꼭짓점이 길게 뒤로 뻗어나며 이드의 손에 닿았고, 아랫면은 넓고 평평하게 펴지며 삼 미터 정도로 커졌다.
그에 따라 그 안에 비치는 용의 얼굴 또한 커졌고, 브레스 역시 증폭되었다.
콰콰콰콱!
그건 마치 수돗물이 폭포수로 변한 것 같은 커다란 변화였다.
작은 점이 면이 되었다.
그로 인해 그 앞을 막고 있던 성벽이 와장창 무너졌다.
수천 자루의 검이 겹친 성벽? 뭉치면 강하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야말로 헛소리였다.
2차, 3차, 4차 성벽이 순식간에 뚫렸다. 그건 마치 물먹은 종이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쉬워 보였다.
그리고 곧 존 워스에게 닿기 직전.
까까깡!
높이 솟은 성벽이 일거에 무너지며 그 형태가 변했다.
넓게 펼쳐졌던 성벽이 좁게, 좁게 모여들어 더 이상 성벽이 아니게 변했다. 그것은 두꺼운 원형 기둥이 되어 브레스를 막았다.
브레스의 강력함을 힘의 집중이라는 기본기로 막아 낸 것.
물론 이런 대응도 혼돈의 파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초식에 투입되는 내력의 양에서부터 대응 불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양측의 힘이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브레스의 정체.
브레스와 수만 검영이 충돌한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 그것은 압축과 팽창의 끝없는 교차였으며, 그 근본에는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저런 것까지 무공으로 가능했었나?”
살짝 기막힌 듯한 표정이 된 존 워스.
그에 이드는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서는 턱을 치켜들었다.
“직접 무공을 배워 놓고 그런 것도 몰랐나? 여태 헛배웠군. 기회가 된다면 내가 진짜 무공을 가르쳐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거라는 게 아쉽군.”
“그렇겠지.”
오늘 이곳에서 누구 하나는 죽게 될 테니까.
이드는 짧은 시간 존 워스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거기에는 서로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투쟁심.
“흐압!”
“큽!”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시작된 공격.
비어 있는 두 손이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퍼퍼퍼펑!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오가는 주먹과 손 그림자 사이로, 귀가 따가운 폭음과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손과 발을 교차하는 이드와 존 워스,
그 옆에서는 브레스와 수만의 검영이 서로를 갉아먹고, 또 태양 빛을 닮은 검강과 검의 형태를 한 검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두 개의 손을 가진 인간이 삼면에서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전투.
결국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도 탄식과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저런 게・・・・・・ 가능한 거였어?”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저런 것이었다니.”
“정신 차려. 네가 익힌 무공과 명예 후작님의 무공은 달라.”
은색 기사단은 대체로 감격한 얼굴로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까마득히 높은 목표를 꿈꾸기 시작했다.
“미친! 내가 아는 무공은 저런 게 아냐. 저건 차라리 마법이잖아! 저게 어떻게 무공으로 가능한 건데!”
“암, 불가능하지. 불가능해!”
“도대체…… 우리가 오늘 감히 어딜 덮치려던 거였지?”
플레타 부대의 초인들은 새삼 경악하고 불안해했다. 라미아의 보호막을 넘어서도 전해지는 대기의 떨림과 살 떨리는 마나의 폭류. 그건 플레타 부대의 초인들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공포’였다.
앞서 영혼의 관에 발을 들인 후 보았던 전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니. 영혼의 관이 아니라 그들이 초인으로 각성한 이후 이런 전투는 단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사람이 저런 괴물 같은 파괴력을 뿜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단언할 수 있었다.
저기서 오가는 가장 작은 단위의 손짓 하나라도 부대원 중에서 제대로 막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자 새삼 깨닫게 되는 무서운 사실 하나. 과연 자신들만으로 영혼의 관에 대한 작전을 실행했다면, 그 결과는?
오늘 이 밤에만 벌써 몇 번째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런 생각이 강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대장을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존 워스라는 현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것이 삼검왕이라면…… 바벨은, 그리고 초인은……”
끝장이다.
갑자기 덮친 무력감에 절망한 것일까. 누군가가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감상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막았다.
하지만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생각이던가. 묘한 무력감이 자리에 있는 모든 초인에게 번지려던 찰나.
“쯧쯧, 못 봐 주겠군. 무슨 병신같은 헛소리들이냐!”
“하, 하지만 대장…….”
“닥치고 잘 들어! 우리가 누구냐!”
“프, 플레타 부대입니다!”
“그래.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상승의 부대! 그게 우리다. 차라리 죽더라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게 플레타 부대란 말이다!”
다행히도 ‘죽으면 실패이지 않나?’ 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등을 돌린 채 고함을 지르는 플레타의 말이 절대 그러한 뜻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놈들이, 지금 죽는 게 두려워서 징징거려? 그런 놈은 필요 없으니까 썩 꺼져 버려!”
“……”
“흐흐, 그래, 다행히 그런 병신은 없는 모양이군. 그럼 겁먹지 말고, 정신 차리고 다시 봐라. 저기 싸우고 있는 게 철벽의 검왕인 것 같으냐? 아니다.”
“……”
“저건 철벽의 검왕이 아니라, 그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다. 저런 것이 철벽의 검왕이었다면, 그런 철벽의 검왕을 키워 낸 검후를 우리 바벨이 잡을 수 있었을까?”
“……아.”
“멍청이들아.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조용한 탄성에 플레타가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뻔뻔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야말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이 멍청한 놈아.”
“대장. 저기 검후도 계신데…….”
라울과 오탄이 동시에 플레타를 갈궜다. 그러나 플레타는 당당했다. 그리고 뻔뻔했다.
“그게 뭐? 이 새끼들아, 내가 없는 말 했냐?”
“아니오. 있는 사실을 밝힌 것이 무슨 죄겠소. 내가 그대들의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지. 그러니 계속해도 좋소.”
“역시 검후께선 통이 크십니다.”
“부하들에게 가르침을 내림에 있어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자만과 오만뿐이지.”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플레타를 검후는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그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발언이긴 할지라도, 부하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
검후는 그런 플레타의 행동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소한 잘못은 추후에 용서를 받으면 된다. 부하를 이끄는 자로서 가장 필요한 점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후가 본 플레타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반면,
“저게・・・・・・ 무공이라고?”
플레타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저건 철벽의 검왕이 아니다.”
“그럼…….”
“철벽의 검왕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그냥 괴물이다.”
‘이 새끼야?!’
정체를 밝히는 건 둘째 치고, 그럴 듯한 이름도 없는 ‘그냥 괴물’ 발언에 사람들은 한결같은 눈빛으로 플레타를 노려보았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검후였다.
그녀는 언제 따뜻한 눈길을 보냈냐는 듯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 후였다. 마치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말이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니 우리와 같은 급에 놓고 무력해할 이유가 없다. 드래곤을 앞에 두고 무력감을 느끼는 놈은 없다.”
“없기는 왜 없냐! 넌 그냥 닥쳐라 좀!”
그냥 괴물 발언을 시작으로, 점점 삐딱선을 타는 플레타의 말에 도저히 참지 못한 라울이 그의 말을 끊었다.
드래곤을 상대로 무력감을 느끼는 게 어때서?
무력감이라는 것이 꼭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만 오는 것도 아닌데. 역시 이놈은 생각이 너무 단순하다.
‘무엇보다 저 철벽의 검왕은 그냥 괴물로 넘어간다고 쳐도, 그 괴물과 맞서고 있는 명예 후작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아마, 버럭 고함이나 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