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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30화


1365화

같은 시각.

일리나와 검후가 걱정하는 라미아는 탑주의 연구실에 있었다.

현재 그녀는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감정을 담아 쿵쿵 구르는 발에 단단한 청석이 쩍쩍 깨져 나갈 정도다.

“이런 빌어먹을 개자식! 어떻게 된 게 이것들은 하나같이 골치 아픈 사고만 치는 거야! 개같은 혼돈의 파편! 빌어먹을 존 워스! 아악~ 짜증나!”

보는 사람이 있음에도 뱉어 내는 욕설에 거침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그녀의 감정이 좋지 않다는 증거.

라미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문제의 대상을 노려 보았다.

연구실의 천장을 뚫고 높이 솟은 녹색의 기둥,

바로 바이트 타블렛이다.

이번 영혼의 관 습격 작전에서 이드와 자신이 혼돈의 파편과 더불어 최우선 목표로 했던 물건.

사실 당연히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면이 있다.

영혼의 관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현 대륙 기준. 자신과 일리나, 그리고 이드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바이트 타블렛은 미완성의 아티팩트였다.

마법의 특성상 완성된 후라면 간섭하기 어렵지만, 미완성 상태에서는 허술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바이트 타블렛 탈취를 어렵지 않게 생각한 까닭 중 하나였다.

아무렴 세 개의 바이트 타블렛 중 하나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완성이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런데 이런 확신이 보기 좋게 틀렸다는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완성된 형태의 바이트 타블렛으로!

“존 워스, 그 인간이 나선 시점에서 혹시나 싶었지만…… 어떻게 나쁜 예감은 이렇게나 틀리는 법이 없는 건지. 신님, 원망스러워요!” 

그들의 운명을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는 신으로서는 ‘갑자기?’라고 할 만큼 엉뚱한 화풀이가 아닐 수 없겠다.

라미아는 그렇게 짜증을 하늘로 날리는 한편,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등장한 눈앞의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명예 후작 부인의 성깔이 대단하시구만.’

라미아의 이런 변화무쌍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라울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도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 앞에서 이렇게 거침없는 모습을 내보일 줄이야.

외부인이 있으면 보통은 조심을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혹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보다 더 진하게 그의 마음을 채우는 존재는 이드였다.

‘명예 후작은 도대체 이런 부인을 어떻게 컨트롤하고 사시나? 혹시 잡혀 사는 건가?’

권력자 중 의외로 공처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라울은 이드 일가의 먹이 사슬 관계가 궁금했다.

물론 이드가 알았다면 ‘불쌍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라고 했을 거다.

일리나와 검후는 물론이고, 아군의 머릿속에서도 지워져 있는 라울이었으니까. 그리고 당당히 사실을 밝혔을 거다.

내 앞에 있을 때의 라미아는 언제나 봄바람을 몰고 오는 천사와 같다고.

뭐, 최근 욕구 불만 때문에 가끔 심술을 부려서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살살 눈치를 살피던 라울이 은근히 말문을 열었다.

“심기가 많이 상하신 듯한데. 상황이 많이 심각한 것입니까?”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시죠?”

“대충 짐작은 합니다. 저걸 보고 어떻게 전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거라면 넌 아웃이야.

그런 눈빛에 라울이 씁쓸하게 웃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상황의 심각성은 너무도 선명했다.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바이트 타블렛.

그것은 그저 녹색의 아름다운 기둥이 아니었다.

기괴하고 음산했다.

바이트 타블렛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바이트 타블렛에 반쯤 잡아 먹힌 상태로 들러붙어 있는 미라 때문이었다. 미라는 바이트 타블렛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이는 가시나무에 휘감겨 있었다.

마치 바이트 타블렛이 미라를 잡아먹는 것 같았다.

인간을 잡아먹는 아티팩트라니.

그야말로 저주받은 물건이지 않은가.

하지만 진짜 소름 끼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미라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이 생긴 그것이, 저 모습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라울은 지금도 선명하게 그것의 생명 반응을 감지하고 있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

“그런데 마법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아서 말입니다. 정확히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 태도, 나쁘지 않네요.”

거대 조직의 간부로서 모른다는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외부인 앞에서.

그렇기에 라미아는 순수하게 라울의 그런 자세를 칭찬했다.

그에 대단 보답으로 친절히 설명을 해 줄 생각이었지만, 방해자가 있었다.

“타・・・・・・ 탑주? 세상에, 어떻게!”

부관주를 쫓는 과정에서 사로잡은 영혼의 관 소속의 마법사들이었다.

미라를 눈앞에서 본 그들은 거의 넋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으허…… 허허허헝!!”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대체 누가 탑주를!”

누구는 충격에 말을 잃었고, 누구는 목 놓아 울고, 또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며 분노했다.

눈앞의 현실에 대한 각자 방식대로의 반응.

하지만 그들에게 공유되는 하나의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신이었다.

저 미라가 탑주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탑주를 저리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상태의 탑주가 부관주를 전장으로 보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존 워스가 저런 탑주로부터 부탁을 받고 부관주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영혼의 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왜 자신들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단 말인가!

의심과 혼란과 억울함이 뒤섞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법사들의 뛰어난 머리는 수많은 가정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머리를 채우고, 가슴으로 넘쳐흐르자 화를 참지 못한 마법사 하나가 벌떡 일어나 라미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험……!”

“이게 다 네놈들…… 켁!”

라울의 경고와 달려들던 마법사가 뒤로 나자빠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눈이 뒤집혀 쓰러진 마법사의 입에서는 하얀 이빨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그와 함께 느릿하게 내려가는 라미아의 주먹.

‘못・・・・・・ 봤다.’

라울은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보는 일과 안목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자신이 그녀가 언제 주먹을 뻗었는지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엉거주춤 뻗어 내던 자신의 빈손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경고는 고마웠어요, 자작님.”

그러거나 말거나 라미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둔 주먹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흉기에 묻은 피를 닦는 것일까.

그 모습이 묘할 정도로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하하하. 이것 참 민망하군요. 크흠. 일단 이자들은 묶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당장은 여기서 바로 움직이기 곤란할 것 같으니까요. 봉인구가 있으면 좋지만 없으니. 이렇게 하죠. 클로브 바인드!”

마법이 사용되자 한 뼘 넓이의 붕대와 같은 것이 마법사들의 몸을 꼼꼼히 휘감았다.

그 모습은 흡사 미라 혹은 대형 애벌레 같았다.

“잠시만 멈추시오. 내 할 말이. 읍읍읍!”

“협조하겠소. 협조할 테니……읍읍! 읍읍읍!!”

그에 급히 말을 꺼내는 자들도 있었지만 라미아는 이 모든 시도를 무시했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몸이 묶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꿈틀거리는 이들을 골라 혈을 제압했다.

만약의 사태까지 사전에 차단하는 꼼꼼함이랄까.

“지금 점혈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아까 보았던 정권도 그렇고. 고위 마법사로서 무공까지 익히시다니. 진심으로 대단하십니다.”

“에이, 별거 아니에요. 그저 기본기만 익힌 건데요.”

별거 아니라며 겸손을 보이는 라미아.

하지만 눈꼬리가 아래로 향한 것이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말이 겸손임을 누구보다 라울이 잘 알고 있었다.

현대 대륙에서 기초 마법 이론과 함께 무공에 대한 기초 지식은 귀족의 기본 소양으로 취급된다.

당연히 한 조직의 간부인 라울은 그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에 따르자면 점혈이란 절대 기초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공에 대한 깊은 배움이 있어야 하는 기술로서, 검기 정도는 능숙하게 다룬 이후에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걸 기초로 취급하면 많은 무인이 화를 낼 일이지만.

“이드의 아내로서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죠.”

“과연…….”

저렇게 말해 버리면 할 말이 없다.

일반적인 무가도 아니고 무려 마인드 마스터의 가문이다.

저 집구석이라면 점혈 따위 정말 기초로 취급될 수도 있다.

라울은 어쩐지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 같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혹시 일리나 명예 후작 부인께서도 마법을?”

“아니요. 일리나는 검이 전문이에요.”

“아, 역시…….”

특이한 경우는 라미아 뿐인가.

그렇게 결론지을 때였다.

“정령술은 무공만큼 열심히는 아니거든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집구석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충격적인 사실을 내놓는다.

정령술이라니.

그 얼마나 귀한 인재란 말인가.

더욱이 정령술의 비교 대상이 무공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확인한 일리나의 무공은 실로 굉장했다.

더욱이 검후는 일리나를 오히려 자신보다 높게 평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 기준이라면 무공보다 못하다 해도 정령술 또한 대단한 실력일 것이 분명한데.

‘역시 마인드 마스터의 일족과는 확실히 줄을 이어 가는 것이 옳아!’

라울은 혹시나 하고 계획하고 있던 몇 가지 일들에 대해 조용히 수정에 나섰다.

그런 라울의 모습에 라미아는 바이트 타블렛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 아무래도 저 물건을 처리할 때까지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서요. 부관주에 대한 추적은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거든요.”

“으음.”

라미아의 말에 라울은 이마를 매만졌다.

솔직히 라미아 덕분에 부관주를 추적하는 과정은 매우 쉬웠다.

라미아와 함께 공간 이동으로 넘어온 후 마커를 통해 부관주의 위치를 확인해서 추적에 나섰고, 결국 탑주의 연구실 앞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미아와 라울의 추적을 확인한 부관주는 전투를 포기, 즉각 마법사들을 데리고 영혼의 관을 탈출했다.

당연히 라미아와 라울은 그녀를 잡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몇몇 마법사를 생포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부관주의 생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이 사용한 이동 계열의 초인기가 발생시킨 공간 진동수의 크기를 보면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라미아는 고민하는 라울에게 추가 정보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아주 가깝지는 않은 거리겠지요. 무엇보다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를 모르는 이상, 추적은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관주의 생포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반해 포기가 빠르시네요?”

“포기가 아니라 정확한 상황 판단입니다. 그리고 아주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라미아는 그 말과 함께 애벌레 신세가 된 마법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라울을 확인하고는, 엄격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비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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