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0화
1395화
대신들은 혼란했다.
국왕의 말은 검왕이 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럴 수가…… 있나?’
‘없지, 없어. 지금 상황에 검왕이 왜 그런 짓을 하나?’
‘그 인간이 야망이 큰 건 알지만, 지금은 몸을 사릴 때라고. 박박 기어도 모자랄 판인데?’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검왕이 그런 생각이라고 한들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 있나?”
‘그러니까 말이야. 어쨌든 그는………..?
각자 성격에 따라 흘러가던 생각이 점차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사건의 주도자 중 하나입니다. 어찌 그런 자를…………….”
“그렇습니다. 그의 손에 희생된 제2 수도 기사단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룻밤 사이 검왕에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다 못해 이가 갈릴 지경이다. 영혼의 관 붕괴와 검왕이 관련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 제2 수도 기사단이 통째로 날아갔다. 그들의 희생으로 검왕의 목이라도 베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날아간 기사단을 다시 꾸리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야 할지 상상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나올 판에, 검왕이라고? 더욱이 타란 백작이 의심을 덧붙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분명히 이번 영혼의 관 습격의 주범중 하나이지 않은가.
물론 그 죄를 물어 마스가 좋을 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검왕이 남에게 이용당할 사람이냐는 것이다.
‘어림도 없지.’
‘기사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뱀의 혓바닥을 가진 놈을, 어떻게?’
‘역시 위험해. 자칫 이쪽이 역으로 당할 위험이 크다.’
당연히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면 검왕도 마스와 손을 잡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제국과의 전쟁을 앞에 둔 마스는 아무리 좋게 봐도 너무도 불리한 상황.
정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손을 뻗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럼에도 손을 뻗는다면, 아마 뼈의 골수까지 빨아먹을 작정으로 접근할 것이 뻔했다. 검왕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인간이고 말이다.
“그는 믿을 수 없기에 위험합니다.”
안데르 재상은 이런 상황을 짧게 압축해서 던져 놓았다.
위험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닌, 믿을 수 없기에 위험한 인간. 이런 작자들은 언제 등을 찌르고 배신할지 모른다.
실제 검왕은 검후의 등에 칼을 꽂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데르 재상이 국왕의 말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재 매우 위태로운 입장에 놓인 그가 굳이 모험을 하려 하겠나이까. 그렇지 않아도 그는 지금 검후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바짝 몸을 엎드린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왕이 직접 국경을 넘어온 것이 그 증거다.
존 워스가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는 말도 있지만, 안데르 재상은 그 말을 비웃었다.
얼마나 검왕을 하찮게 여기면 그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아무렴 사고 수습을 위해서라지만, 기사, 하다못해 정찰병을 써도 될 일에 검왕이 직접 나서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더욱이 마스의 국왕와 대신들은 쉐어 가든의 사건을 통해 검왕이 검후를 배신했다는 정황에 대해 알게 된 상태.
그러자 검왕의 행동이 달리 보였다.
‘그는 지금 황제에게 애원 중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검후가 자신을 배신자라고 말할 때, 조금, 아주 조금만 자신의 사정을 보아 달라고.
‘교활하고 지혜로운 인간이지. 멍청한 놈이라면 하루하루 피를 말려 가며 목이 떨어지길 기다릴 텐데. 이 작자는…….’
그런 생각에 안데르 재상은 재심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 인간을 이용해 먹는 건 위험하다. 더욱이 자신들은 이미 한번 그에 대해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건 검왕의 배신을 처음 알았을 때였다.
대형 사건에 마스는 이를 이용할 방법을 궁리했고, 끝내 포기하고 방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제국이든 검왕이든 어느 쪽으로도 손을 내밀기에 마스의 입장이 애매하다는 게 이유다.
특히 검후가 자국의 땅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제국으로부터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스가 방관하는 사이, 검왕도 일단 살아남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물며 그러기 위해 이런 하찮은 일에도 직접 나섰다. 그런 자가, 가장 큰 공훈을 세울 수 있는 전쟁을 허투루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미친 듯 마스의 병사들을 썰어 댈 것이 분명했다.
안데르 재상은 그런 결과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활약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재상의 목소리에는 강력한 확신이 담겼다.
‘그렇지. 나라도 살려만 준다면 개같이 구를 자신이 있다고.’
‘백 번 천 번인들 못 구를까. 반역을 저지르고도 살 수 있다는데?’
물론 황제를 향해 직접 검을 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검후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다. 그녀에 대한 배신은 황제를 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반역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는 말이다.
보좌를 꿈꾸고, 실행으로 옮긴 후 실패하고도 죽지 않을 수 있다고?
‘그런 조건이라면 나도 한 번?’이라고 욕심을 부려 보지 않을 귀족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마스가 그를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그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오히려 원한을 가지지 않으면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내 생각은 다르다. 내 생각이 옳다면 검왕은 오히려 고마워할 것 같은데?”
국왕의 말에 안데르 재상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런 확신을 가진 발언이라니. 자신이 무엇을 놓쳤단 말인가.
잠시의 고민 뒤 안데르 재상이 고개를 숙였다.
“・・・・・・ 어리석은 신이 전하의 가르침을 바라옵니다.”
국왕은 망설임 없이 가르침을 청하는 재상의 모습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신 앞에서 제 할 말 다 하고, 고개를 숙임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 신들이 부족하여…….”
문득 고개를 돌려 던진 질문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대신들. 그 모습에 내심 혀를 찬 국왕이 안데르 재상을 보며 말했다.
“역시 재상의 목을 자를 수는 없겠어. 저 모자란 작자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나. 그러니 은퇴를 좀 미루게 좀 많이!”
“…..”
면전에 대놓고 모자라단 말을 들었지만, 대신들은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국왕과 안데르 재상의 대화를 전혀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데르 재상보다 빠르게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물론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왕이 가진 힘 때문이겠지만.
“대신들에게는 경험이 필요할 뿐이옵니다. 제가 저들보다 많이 가진 것은 오로지 경험뿐이옵니다.”
“흐흐. 경험을 쌓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니 하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그대의 경험을 저들에게 잘 전수해 보든가.”
“하아…….”
경험의 전수가 말처럼 쉬웠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국왕은 조용히 한숨을 쉬는 안데르 재상을 보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까드득.
“왜 검왕이 고마워할까? 실로 간단하다. 이유가 저기 있지 않나.”
말과 함께, 전면을 향해 턱을 들어 올리는 국왕.
평소에는 대신들이 그 앞에 모여 있지만, 지금은 그의 분노를 피해 모두 몸을 피한 상태. 대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한 명. 아니, 하나였다. 수정구, 바로 타란 백작의 모습이 떠올라 있는 수정구였다.
타란 백작이 이유라니? 대신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하지만 머리 좋고 눈치 빠른 자들은 국왕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옳거니 하고 무릎을 두드렸다.
“전하의 뜻이 옳습니다.”
“멍청한 신이 이제야 전하의 혜안을 알겠나이다.”
그들은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국왕을 칭송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오지 않는 답에 남은 대신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국왕이 그들을 위해 안데르 재상을 돌아보았다.
“말해 보겠나?”
“검왕이 타란 백작을 일부러 살려 두었습니다.”
“흠. 조금 길게.”
“하아. 이런저런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면 검왕은 자신을 목격한 목격자를 모두 죽여 입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하지요.” 재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왕은 타란 백작을 저와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마치 자신이 다녀갔음을 알아 달라는 듯이!”
“……아!”
“그랬구나!”
그제야 한발 늦게 터지는 바보 같은 소리에 국왕은 대놓고 혀를 찼다. 그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는 자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
“쉬페이 자작.”
“예? 예. 저, 전하.”
“안데르 재상이 하지 못한 다음 말은 그대가 한번 해 보라.”
주르륵.
국왕에 지목당한 자작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국왕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피할 수 없는 일. 자작은 내심 눈물을 좍좍 쏟아 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다시는 대전으로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동시에 그와 가까이 있던 대신들은 필사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눈치는 있다는 증거. 자작은 답을 찾기에 성공했다.
“아, 아마도 재상께서는 검왕이 전쟁을 바라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려 한 듯하옵니다. 하옵고 검왕은 그런 자신의 뜻을 타란 백작을 살려 보내 전하께 알린 것이・・・・・・ 아닐지?”
“그것이 다냐?”
‘여기서 뭐가 더 나온다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국왕의 말에 자작의 발가락이 와락 오그라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더 이상의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작의 모습에 국왕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재상을 보았다. 자작이 내놓지 못한 답을 내놔 보라는 뜻이다.
“답하기 전에, 타란 백작에게 몇 가지를 물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후후. 허락하지.”
국왕의 허락을 받은 안데르 재상이 타란 백작을 향해 돌아섰다.
마침 고개를 들고 있던 타란 백작은 국왕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대전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백작도 들었을 것이니. 자, 답해 보게. 검왕과 있었던 일에서 보고하지 않은 것이 있나?”
“……있습니다.”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은 침묵 속에서 타란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보고에 거짓은 없습니다.”
“알고 있네. 대충 어떤 상황이었을지 예상도 되고, 그러니 말해 보게.”
“……예.”
곧이어 타란 백작의 입에서 전투가 멈춘 후 검왕과 나눈 이야기가 모두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안데르 재상이 말했다.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대담하게도 검왕은 야망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란 백작을 통하여 무엄하게도 전하께 거래를 요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