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63화
1398화
시작은 라울이 꺼낸 한마디였다.
“검왕은 어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서재의 공기가 잠시 멎었다.
쉴라는 라울을 노려봤다.
존 워스의 죽음으로 조금 가벼워지긴 했지만, 검왕이란 이름은 여전히 검후에게 있어 상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울이 그런 사실을 몰라서 언급했을까.
이드는 찻물을 들이켜며 라울과 검후를 살폈다.
“그라면…… 아마 지금쯤 국경을 넘고 있을 수도 있겠군.”
쉴라의 걱정과 달리 검후는 검왕이라는 이름에도 덤덤하게 반응했다. 대신 라울이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벌써 말입니까? 그에겐 마법사도 없었습니다만?”
영혼의 관에서 국경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먼 거리를 하룻밤 만에 다녀온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미아, 그리고 초인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보통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려도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검왕이라면 말보다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단거리 기준이고,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무엇보다 검왕이 그렇게 빠져나가면 남은 기사들은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의문에 대해 검후는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없다면 다른 곳에서 구하면 그뿐. 나는 그만큼 수완이 좋은 인간은 본 적이 없거든.”
“아무리 수완이 좋아도…….”
이게 단순히 수완이 좋다는 말로 넘길 일인가?
라울이 막 그렇게 따지려고 할 때였다.
바사삭!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들리며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라울은 소리가 들린 쪽을 힐끗 돌아본 후 다시 말을 골랐다. 뭐,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크흠. 검후의 말씀대로 ‘수완’이 좋은 검왕이 무사히 빠져나갔다면, 지금 마스는 머리끝까지 약이 올라 있겠습니다.”
바삭!
“철판을 깔면서까지 얻으려던 보물이 사라졌잖나. 그들이 목격한 범인은 검왕뿐이고. 마스의 분노를 온전히 혼자서 받아 내야 할 텐데. 꽤나 고생할 거야.”
그러나 현실은 말과 달리 고생을 하는 정도로 끝이 나면 다행인 상황.
와사삭!
“……마스에서는 제국에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검후는 라울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랜 경험이 본능적으로 그의 말이 옳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반대로 라울은 철저히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한 분석에서 나온 자기 생각을 펼쳤다.
“마스 국왕의 성향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려 할 겁니다.”
바삭! 바사삭!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심각한 예고. 하지만 그 와중에 들려오는 쿠키 씹는 소리에 긴장감이 오르질 않는다. 그건 라울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는 검후 역시 마찬가지.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긴장감에 비례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 든 짜증과 부끄러움을 느낀 이드는 조용히 스폴의 옆구리를 찔렀다.
“음?”
바삭. 바사삭. 꿀꺽.
“왜요?”
무아지경으로 쿠키를 학살 중이던 스폴이 입에 든 것을 빠르게 씹어 삼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단맛에 취해서 그런가. 어쩐지 맹해 보이는 눈빛에 입가에 묻어 있는 쿠키 부스러기가 더해지자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눈치를 줘도 알아차리질 못한다. 쉴라를 놀리는 일은 그렇게 귀신같이 눈치를 채는 사람이.
하지만 그냥 넘기기엔 이미 검후와 라울의 눈이 이쪽을 향한 상태. 내심 한숨을 쉰 이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 스테이크를 그렇게 먹고도 그게 또 들어갑니까?”
“당연한 소리를. 이건 스테이크가 아니고 쿠키잖아요.”
바사삭!
“……디저트 배는 따로라는 겁니까?”
“디저트가 아니라 쿠키요. 푸딩이나 빵을 하나로 퉁치는 건 말이 안 되죠.”
바사삭!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방실방실 웃으며 답하는 스폴에 이드는 검후를 힐끗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은 절대 기분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긴, 이해는 간다.
메뉴별로 따로 존재하는 배라고? 그야말로 새로운 종의 출현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끄러움은 검후의 몫이 된 것 같고.
이드는 그런 검후를 위해 스폴에게 응징을 가했다.
“그러다 살찔 겁니다. 뚱뚱해져서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느려질 겁니다.”
“……비웃어도 돼요?”
“……..”
스폴로부터 불쌍하다는 눈길을 받은 이드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했다. 여자에게 무게만큼 좋은 공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스폴의 반응을 보면 그녀는 여자 이전에 기사였던 모양이다.
기사들의 수련 양을 생각하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수련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처럼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저절로 빠지는 것이 바로 기사들의 몸무게다.
자기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욱 열심히 먹어야 했다. 쿠키 정도로 살찔 일이 없다는 말이다.
“혹시 제가 먹는 모습이 흉해요? 그래서 보기 싫으시다든가.”
한발 늦게 스폴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물론 그것도 그녀가 이드와 제법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단 아무래도 진지한 이야기 중이라…….”
다시 한번 눈치를 주자 그제야 검후와 라울을 알아차린 스폴이 양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그 모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던 것일까.
붉어졌던 검후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스폴.”
“죄송합니다. 검후님.”
“사과할 건 없다. 먹으라고 가져다 둔 것이니까. 그보다, 맛있니?”
“제가 딱 좋아하는 당도였어요.”
・・・・・ 그래서 정신없이 드셨구만.
“그랬구나. 그럼 많이 먹으렴.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검후의 허락에 꾸벅 고개를 숙인 스폴이 내려놓은 쿠키를 다시 들고서는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쿠키를 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다람쥐처럼 소리 없이 갉아먹고 있다.
이드는 과연 스폴의 눈치가 어디 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검후가 먹으란다고 시끄럽게 먹으면 그거야말로 눈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그것도 검후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
그런 의미에서 스폴의 판단은 나름 훌륭했다. 뭐, 애초에 조용히 먹었으면 문제 될 일 자체가 없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소음 하나를 차단한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앞서와 같지는 않았다.
다시 시작된 대화에선 어쩐지 긴장과 무게가 실종된 듯 보였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게, 사실 생각해 보면 심각할 것도 없었다. 검왕이 곤란을 겪는다면 즐겁게 구경하면 그만이고, 마스가 검왕을 걸고넘어지며 제국에 항의를 퍼부어도 그 역시 당장 검후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
“황제가 고생을 하겠지만, 이번 일엔 황제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황제도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검후의 발언은 분명 그런 의미였다.
어쩌면 그건 검후가 마음에 숨겨 두었던 황제에 대한 실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완의 마탑이라는 불분명한 자들에 대해 은밀하게 후원을 하고 있었다니. 물론 그게 자신에게 보고를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솔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검후 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다만 검왕의 존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는 확정적인 불안 요소가 될 겁니다. 어쩌면…….”
슬쩍 말꼬리를 흐리는 라울.
하지만 그런다고 그 뒤의 말을 알지 못할 검후가 아니었다. 그녀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마스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겠지. 그리고는 중요한 순간 제국을 배신하겠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불쾌한 기억을 상기시켜 드린 것 같군요.”
“흥, 이 정도로? 어차피 자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싫어도 계속 자극되는 일이야. 그야말로 새삼스러운 소리지.”
지금이야 서로 편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검후는 라울에 의해 감금되어 있던 처지였다.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없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검후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라울은 달랐다.
“하하하. 이거 더욱 최선을 다해 검후님께 감동을 드려야겠다는 결심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절 보실 때 그때의 기억이 아닌, 감동했던 기억이 떠오르도록 말입니다.”
“……나는 당장 그 능글맞은 소리만 줄여도 만족해.”
검후는 당당하게 웃는 얼굴에다 면박을 주고는 창 너머 높이 솟아 있는 황궁을 보았다.
“제국이 마스를 상대로 전쟁에 패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황제께 검왕이라는 불안 요소를 확인시켜 드릴 필요는 있겠지.”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조국이고, 자신의 핏줄이었다.
검후는 그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길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키운 제자에 의해서 말이다.
“안심하십시오. 전쟁이 시작된다면 저희 바벨은 약속대로 제국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럼.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었나?”
“하. 하. 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냈던 라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재에는 다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한 이야기의 흐름은 신기할 정도로 마스의 대전과 닮아 있었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검후와 라울이라는 것도 그랬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국왕과 안데르 재상이 떠오를 정도였다. 당연히 검후가 국왕이고 라울이 안데르 재상의 포지션이다.
다만 대전과 확실히 다른 점도 있었다.
바로 눈치를 보고 있는 신하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조금 전 주의를 받은 스폴조차 그 일은 이미 기억에 없는 듯 지극히 편안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 편했던 것일까.
아니면 갉아먹을 쿠키가 다 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폴이 무심코 한마디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과연 검왕과 마스가 손을 잡는 것이 가능할까요?”
“왜? 불가능할 것 같니?”
“네.”
“어째서?”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스폴에 검후가 재밌는 답을 기대한다는 듯 스폴을 보았다.
“마스가 검왕의 손을 잡아 주기에는 검왕의 목표가 너무 크니까요.”
“검왕의 목표가 뭔데?”
“새로운 기사의 나라의 왕이요. 검왕의 목표가 그거잖아요.”
지금 이 자리에 검왕의 야망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검후를 배신한 순간, 검왕의 야망은 공인된 것과 같았다. 설마 겨우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배신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새로운 기사의 나라의 왕이라.”
검후는 스폴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