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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66화


1401화

검왕이 죽으면 안 될 이유?

‘그딴 게 있을 리 없지.’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찾아보면 검왕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검후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반대로 검왕을 죽여야 할 이유만 한 보따리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검후의 대답이 조금 늦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가 내놓을 대답은 하나뿐이다.

“없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검왕을 살려야 할 이유 따윈 없어요,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 부인의 말대로 죽여야겠어요. 검왕을!” 예상대로의 대답.

그에 이드는 곧장 준비하고 있던 말을 던졌다.

“그럼 검왕에 대한 처분은 어떤 식으로 하실 것인지?”

“가능한 한 빠르고, 확실하게, 그리고 최대한 잡음이 나지 않도록 처리해야겠죠.”

잠시 망설였던 미련이라고는 흔적도 없는 단호함.

검왕만 앞에 있었으면 재판에서 형의 집행까지 하루만에 끝내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드는 이 변화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과정은 복잡하더라도,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과단성은 손끝으로 사람을 부리는 지배자들의 특징인 동시에 미덕이기 때문이었다. 무림 대문파의 수장들도 저랬다.

“물론 그 전에 황제의 제가를 먼저 받아야겠지요. 검왕의 처분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온전히 황제에게 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것도 빼놓지 않는 검후의 발언.

이드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같이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의미가 없다.

검후 앞에서 기가 죽어 꼼짝도 하지 못하던 황제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런 황제가, 검후의 말에 반대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께선 반대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것이랍니다.”

그거야 군주의 힘과 권력이 약할 때 이야기.

힘과 권력이 충분한 군주에게 정치란 길이 잘 든 사냥개처럼 참 다루기 쉬운 것일 뿐이다. 그리고 현 제국 황제의 입장은 분명하게 후자에 속했다. 황제가 결정을 내린다면 그건 그대로 실행이 될 일이었다. 그 대상이 아무리 검왕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 결정이 내려지는 건 둘째치고, 일단 검왕부터 먼저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라울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스폴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일단 잡아 놓은 다음에 끓일지 구울지를 결정해야 해요. 괜히 소란만 피웠다가는 그사이에 물고기가 다 숨어 버린다니까요.” 

“하아~ 스폴, 검왕은 물고기가 아니잖니……

뜬금없는 낚시 이야기에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제 이마를 감싸 쥐는 쉴라.

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을 잊기도 전에 라울이 스폴의 발언을 지지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스폴 경의 비유는 아주 정확합니다. 황궁에서 검왕의 처분에 대한 것이 공식적으로 논의되는 순간, 검왕도 바로 그 소식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검왕은 즉시 잠적해 버리겠죠. 스폴 경이 말한 물고기처럼 말입니다.”

라울은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주장에 딱히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앙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검왕이다.

그런 만큼 공사 구분 없이 친분이 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 중 누가 검왕의 위기를 귀띔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의문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과연 그런 멍청한 인간이 있겠습니까? 황제께서 공식적으로 검왕의 죄를 언급하신다는 것은, 그에 대한 처벌을 결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검왕에게 경고를 보내는 위험을 감수할까요?”

이드는 쉴라의 의문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검왕의 처벌을 결심한다면, 당연히 그 죄를 밝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급되는 검왕의 죄는 무엇 하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없다. 오히려 너무 무거워 하나하나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죄목이다.

굳이 다른 걸 따질 필요도 없다.

검후를 향한 공격. 황족 시해.

그 하나만으로 검왕은 충분히 죽어 마땅했다. 제국 땅에서 사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큰 잘못이었으니까.

사실 검후가 눈치를 주지 않아도 황족을 보호해야 할 황제 입장에선 이 하나만으로도 검왕을 죽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당연히 대신들에게도 이 사실을 공개할 터였다. 명분이 있어야 검왕의 처분에 대한 반대를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이런 중대한 사실을 밝혔음에도 검왕을 두둔하고 나선다면?

그건 제정신이 아닌, 그냥 미친놈인 거다.

쉴라가 말한 경고를 보내는 일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다.

황제 앞에서 검왕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 정도의 미친 짓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밝혀지는 순간 정치 생명과 실제 생명에 아주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다줄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과연 닳고 닳은 대신들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경고를 보내려고 할까? 그것도 그 시점에서 이미 모든 걸 잃고 제국의 적으로 규정될 검왕을 위해서? 정상적인 상황 판단이 가능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라울은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꽁지에 불이 붙은 인간이 한둘은 아닐 겁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검왕을 위해서?”

“쯔쯧. 틀렸습니다, 쉴라 경. 그때 움직이는 인간들은 검왕을 위해서가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죠.”

“자기…… 자신?”

라울의 말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느낌에 쉴라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검후가 지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라울이 말하는 바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울의 말은 이어졌다.

“검왕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거대하지만 단순합니다. 왕이죠.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혼자서 이제부터 내가 왕이다. 이런다고 왕이 되겠습니까? 땅이 있어야 하고, 백성이 있어야 하고, 따르는 신하들이 있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죠. 과연 그걸 혼자서 할 수 있을까요? 아뇨. 불가능합니다.”

라울은 스스로 묻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행정의 신이다. 검왕은 검왕이 아니라 행정왕이라고 불리며 세상 모든 관리의 우상이 되어야 할 일이다.

당연히 라울의 말처럼 검왕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그게 가능한 인간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명분이 되어 줄 강력한 지지 기반도 함께 마련하면 더욱 좋고,

그런 의미에서 평소 교분이 있는 제국의 귀족들과 대신들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검왕에 포섭된 반역자들이 있다는 것이로군요.”

“뭐, 반역이라기보다는.. 독립이죠. 대견하게 봐야죠.”

“흥, 바벨에서 독립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면 그때도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건가요?”

“물론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하나하나 열과 성을 다해서 쓰다듬어 줄 겁니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인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머리카락인 걸까?

혹시?

“음? 제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쪽은 걱정 없이 풍성한 것 같다.

그렇게 쉴라가 속내를 감추는 사이, 일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네요. 이 넓은 제국 대신에, 한 뼘의 땅도 없는 검왕과 손을 잡을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요. 제가 아는 인간의 욕심은 아래를 향하는 법이 없는데 말이에요.”

“반대예요, 일리나.”

라미아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욕심이 작은 게 아니라, 너무 커서 나온 선택이에요. 와이번의 꼬리보다는 독수리의 머리가 되고 싶은 욕심.”

“흐음.”

라미아의 말을 가만히 곱씹는 일리나.

이드는 그 모습에 입이 썼다. 아무래도 엘프인 일리나에게는 단숨에 이해하기 힘든 비유였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와이번의 꼬리 쪽이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원초적인 체급의 차이랄까.

왕국을 방문한 제국의 백작을 공작이나 후작이 나서서 접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그런 이성적인 계산보다 감성적인 법이다.

검왕의 협력자들도 그렇다. 그들은 제국의 이름 없는 귀족보다 왕국의 대귀족으로서 이름을 남기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운 것이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검왕과 한데 묶어서 날려 버리죠.”

스폴이 말했다. 평소 그녀다운 속 시원한 발언.

그에 검후가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네 말대로 했으면 좋겠구나.”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나 그렇게 묻기에는 마음에 많이 복잡해 보이는 검후의 모습에 스폴이 감히 묻지 못했다.

살짝 무거워지려는 분위기.

그에 짝하고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한 라울이 다시 말했다.

“어차피 대부분 처분할 명분도 애매한 놈들입니다. 반역으로 몰릴 만한 짓은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굳이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인가요?”

“그런 놈들의 특징이, 겁이 많다는 겁니다. 놈들은 검왕의 입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두렵겠죠.’

황제가 사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그저 작은 가능성이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더라도, 검왕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순간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마법이 있기에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는 방법은 결국 하나다. 검왕이 잡히지 않도록 해서, 그의 입이 열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말이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이었다.

무엇보다 이건 반역도 아니고, 황족 시해도 아니다.

깊은 친분으로 인한 한순간의 실수.

귀족원이 잘 나서 준다면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으로 어찌어찌 넘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라울의 이야기를 들은 쉴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검왕의 죄를 공식화하는 것은 검왕이 돌아온 후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아무래도 오늘 황제를 만나야 할 것 같구나.”

검후가 어깨를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 스폴이 재빨리 뒤로 가 검후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드는 창문 너머 황궁을 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음?”

“영혼의 관이 무너졌으니까요. 검왕도 별다른 의심 없이 얌전히 소환에 응해서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그랬지요. 아, 어쩌면 그 일을 알리기 위해 검왕이 먼저 연락을 해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황제를 봐야겠어요. 쉴라.”

“네. 검후님. 바로 황제께 연락을 올리겠습니다.”

검후의 부름에 쉴라가 즉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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