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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92화


1427화

수십 명이 들어서도 여유로울 만큼 넓은 소드 팰러스 내성의 대전.

오늘은 그곳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모여든 이들이 하나같이 건장해서인지 대전은 평소보다 한층 좁아 보였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은 대전의 상석과 중앙을 향해 있다.

상석엔 금과 비단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자가 하나 자리했다. 의자의 주인은 지금 소드 팰러스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검후. 그녀가 사라진 뒤 짧은 기간 검왕이 의자를 사용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주인이 없다.

그리고 그보다 한 계단 아래. 강철로 만든 세 개의 의자 중 오른쪽 것에 마르텔이 앉아 있었다.

현재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열두 명의 인원이 마르텔을 향한 상태였다.

그들이 앉은 의자는 원래 대전에 없던 것으로, 임시로 준비되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크다.

원래부터 의자란 권위의 상징과도 같다. 수십 명이 서 있는 중에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의자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피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다름 아닌 이들이야말로 지금 이 자리를 만들어 낸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의자에 앉은 코랄이다. 심지어 그의 의자 위치는 마르텔과 세 번째로 가깝다. 그건 그만큼 그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뜻.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코랄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아니, 크다 말다 할 것도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난밤.

그는 파렐의 목을 과감하게 베어 버리는 파격을 보이며 사람들을 규합, 마르텔을 찾아가 사태의 책임과 대책을 강요해 긍정적인 답을 얻어 냈다.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의지하게 된 계기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세 번째 순위에 있는 의자다.

아무리 위기의 순간이라고는 하나, 수백의 인물들에게 한순간 인정받는 게 어디 쉬운가. 그나마 코랄이 평소 쌓아 온 이미지가 있어 가능하긴 했지만,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이 모습을 칼모레가 보았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분명 코랄에게 적당히 자리를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이끌어서 마르텔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로써 코랄의 임무는 이미 성공했다. 즉, 지금까지 코랄이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전력 보존을 위한 탈출 준비가 한창인 자리였다.

하지만 어떤가. 코랄은 몸을 빼긴커녕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물론 코랄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지금 상황은 결단코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주도권을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열하나 중 욕심 많은 몇 명에게 떠넘기고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너무도 간단하게 중간에 차단당하고 말았다.

‘그래. 마치 내 의도를 뻔히 알고 있다는 양……..’

코랄은 자신의 퇴로를 차단한 인물, 마르텔을 곁눈질했다.

사람들의 애원에 답한 마르텔. 하지만 그 후 그의 모습은 사람들이 여태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어젯밤 이후 그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심지어 여태 삼검왕의 좌에 앉은 이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르게 보면 그는 상징일 뿐, 상황을 이끄는 이들은 여기 앉은 열두 명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대전에 모인 사람 중 감히 그를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게 변했다 해도, 삼검왕과 블러디 혼이라는 위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코랄로서는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그때 저작자가 날 보고 있던 건 착각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의심 없이 몸을 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마르텔이 아니라도 쉽게 몸을 빼긴 어렵게 되었다. 이미 너무 많은 주목을 받아 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보라. 

“코랄 경? 코랄 경.”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고 있다. 자신을 향한 부름에 곧 정신을 차린 코랄이 미안하다는 표시를 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정숙하시오! 여러분의 답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소. 하나하나 풀어 갑시다. 일단 중요한 소식이 들어왔으니, 그것부터 확인해 봅시다.”

“자, 들으셨을 거요! 정숙하시오! 거기, 팔 경! 좀 닥치란 말이오!”

무력을 쓰는 인간들이 모인 자리다. 덕분에 중간에 거친 말이 좀 오가기는 했지만, 소란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어느 정도 무리 없이 대화가 가능해지자 코랄이 움직였다.

“감사하오. 그럼 도란도프 경이 가져온 소식을 살펴봅시다. 도란도프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고맙소.”

이름이 불린 잿빛 머리 중년의 기사가 열두 개의 의자 끝에 섰다. 동시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잦아들었다.

“일단 조금 전에 들어온 소식을 알려 드리겠소. 현재 황금 마차는 폴랑 영지를 지나고 있다고 하오. 곧 소드 팰러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거요.”

“폴랑이면 바로 옆이잖아.”

“아니, 언제 거기까지? 아직 하루 더 시간이 있는 게 아니었나?”

“미치겠군. 빠르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죽음이 지척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고성이 나왔다. 그중에는 도란도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따지는 이도 있었다.

“황금 마차의 위치를 당신이 직접 확인한 거요? 지금까지 이동 속도를 계산하면 폴랑을 지나고 있을 리가 없단 말이오.”

“분명 일리 있는 의견이오. 도란도프 경은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 줄 말이 있소?”

코랄의 물음에 도란도프가 입이 마르는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직접 확인한 건 아니오. 여기 있는 이들 중 황금 마차에 가까이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소.”

“……..”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다. 황금 마차 앞에서 그들은 고개도 들지 못할 죄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중에도 몇몇은 마르텔을 향해 절로 눈을 돌린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

“그나마 다행인 일은, 소문이 제법 정확하다는 거요.”

“이상할 정도로 빠르기도 하고.”

누군가 덧보탠 말에 여기저기서 질끈 눈을 감거나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 이틀 사이 들어오는 소문의 속도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전달하는 것 같다고 할까.

눈치가 빠른 몇몇은 그 배후에 검후 혹은 검왕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그들마저 그 의도까지 읽어 내진 못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기분이 더럽고, 이후 벌어질 일이 두렵다. 무엇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현실이 싫었다.

그렇게 그들 몇몇이 눈을 감은 사이, 도란도프의 말이 이어졌다.

자신들이 검후에 대항할 대책을 세우고, 내성을 요새화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벌어진 일에 대한 설명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전해진 설명에 따르면, 황금 마차의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오. 밤에도 힘차게 대로를 달렸다고 하오.”

“여태 매번 영지에 들르지 않았소? 그럼 쉬지도 않았다는 말이오?”

“전혀 휴식하지 않았소. 중간에 몬스터들이 길을 막아섰다가 기사단의 칼에 순식간에 갈가리 찢겨 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던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순간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더군.

“・・・・・・ 은색 기사단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흐흐흐.”

누군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에 많은 이들이 그와 닮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은색 기사단이라면 당연히 그럴 만하다. 그들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안다. 친분의 깊이가 다르긴 하지만, 은색 기사단에 동기가 있는 기사들도 많았다.

한때 그들의 자랑이기도 했던 은색 기사단.

그런데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자랑이었던 은색 기사단을, 지금은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황금 마차에 대한 소문이 소드 팰러스에 닿은 후 스스로에게 수백 번을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답이 없는 질문을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까. 의자에 앉은 이들 중 하나가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질문이 하나 있소. 황금 마차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요.”

“정확하진 않지만, 소문을 종합한 결과로는 전날 정오부터였던 것 같소.”

“대답 고맙소.”

끄덕.

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란도프가 사람들 사이로 물러났다. 그에 급히 질문을 던져 좌중의 분위기를 적절히 끊어 냈던 기사, 로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도란도프 경이 가져온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동이 황금 마차에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오.”

“그렇겠지요. 정오부터 속도를 올렸다고 하니. 그 시간이면 충분히 우리 소식을 접하고도 남았을 거요. 다시 말해, 황금 마차의 눈과 귀가 이미 소드 팰러스 안에 있다는 의미겠지.”

웅성웅성.

“정숙하시오. 그리고 소엘. 그건 이미 예상한 일이잖소.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지. 따지고 보면 동지들을 제외한 소드 팰러스의 모든 인간이 황금 마차의 눈과 귀가 아니오.”

“누가 그걸 모르나. 내 말은, 우리 의도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는데. 더 줄었어!”

그들은 내성을 요새화하며 그 작업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티를 냈다. 우리가 이런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아 달라는 표시였다.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황금 마차의 도착을 늦추는 것.

우리는 쉽게 죽지 않으리라고 항변함으로써 검후가 협상을 요구해 오길 바랐다.

사실 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들과 검후,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드 팰러스의 수많은 동기와 선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검후의 애정과 사랑을 알기에 던진 도박 수였다.

뭐, 결국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오히려 황금 마차의 속도를 높이는 부작용까지 동반하면서.

“결국 싸워야 하는가.”

“……”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꺼낸 말에 사람들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그런 중에,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던 마르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황할 것 없다. 검후께선 원래 그런 분이시다. 물러섬이 없으시지.”

“・・・・・・ 이번엔 다르길 바랐습니다.”

“그런가? 난 변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좋은데.”

지금 상황에 그게 할 말인가.

좌중에 선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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