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4화
1429화
걱정하지 말라며 마르텔이 꺼내 놓은 말에 코랄은 기가 막혔다.
‘용맹한 죽음은 개뿔!’
간단히 말해 명예롭게 죽길 원한다는 말인데.
배신자의 최후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냔 말이다. 그야말로 낭만적인 헛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문제는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임무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용맹한 죽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말로는 친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임무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 재를 뿌릴지 누가 아는가.
특히 말없이 입가에 띄워 놓은 저 흉흉한 미소. 코랄의 눈에는 그게 어떤 협박보다 무서운 악마의 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절의 말을 틀어막아 버릴 정도로 무서운.
이는 결코 과한 우려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가 마르텔이면 몇 번이라도 마땅했다. 그에겐 그만한 힘과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코랄은 결국 마르텔이 건네는 주머니를 얌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이 주머니를 들고 검후를 찾아가 만나야 했다. 그것도 혼자서!
상상만으로도 위가 쓰려 왔다.
과연 검후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검후의 눈에 든 적이 없으니 자신을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아마도 배신자들의 대표 정도로 비치지 않을까?
‘어쩌면 앞에 선 순간 목이 잘릴지도 모르지.’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어쩐지 가슴에 넣어 둔 주머니가 묵직하게 심장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본인들의 궁금증 해소에만 열을 올려 댄다.
“코랄 경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마르텔 님이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십니다.”
“코랄 경. 부디 검후께 우리 마음을 잘 전달해 주시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분을 대놓고 배신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우리는 검후께 검을 든 적도 없어! 억울하다고!”
“무엇보다 같은 소드 팰러스 식구끼리 피를 봐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을 꼭 강조해 주세요.”
“아량을 베풀어 우리 실수를 눈감아 주시기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대대손손 충성을 다할 겁니다.”
“같잖은…….”
하나같이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에 코랄은 역겨움이 치밀었다.
마르텔은 이들을 쭉정이라 했지만, 다시 보니 쭉정이도 되지 않는 쓰레기가 아닌가. 이런 멍청하고 안이한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이야.
“뭐라 하셨소?”
“아…… 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 책임이 너무 커 말이 헛나왔습니다.”
“이해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곧 검후를 뵈어야 할 텐데. 혹 동행이 필요하다면 제가 추천할 사람이 있습니다만.”
자기 제자라도 딸려 보낼 생각인가? 그래서 일이 잘 풀리면 공을 나눠 가지려고?
코랄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혼자 움직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일단 준비를 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코랄은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때, 한 노기사가 코랄의 등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코랄 경이라고 했지? 마음이 급한 건 알지만 잠시 멈춰 보시게.”
“…….”
“이럴수록 예의를 차려야 하네. 자네는 특사야, 우리를 대표한 사람이면 복장을 바로 할 필요가 있어. 검후를 뵐 때 걸치고 갈 정복과 기사 갑주를 준비해 주겠네.”
“하아…… 정중히 거절하죠!”
왜 멈췄을까. 잠시 멈춘 짧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헛소리다.
등 뒤에서 예의를 모른다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 것일까. 노골적으로 말해 자신의 임무는 살려 달라고 빌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뻔쩍뻔쩍하게 잘 차려입고 가야 한다고?
‘미친 늙은이. 미치려면 곱게 미치든가. 이러니 마르텔이 내게 일을 맡겼지.’
이쯤 되니 코랄은 어째서 마르텔이 저들이 아닌 자신에게 주머니를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정도로 멍청하다면 삽질도 그냥 삽질이 아니라, 대형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용맹한 죽음은 고사하고 개죽음이 확정되었으리라.
잠시나마 저 멍청이들의 대표가 되어 저들을 이끌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친 코랄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검후를 만나러 출발하기 전에, 준비할 것과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랄은 마르텔에게서 받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 놨는지 알아야 대처를 하지.”
막말로 임무의 성공을 위해 가져간 주머니에, 빈기사단이 현재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해 적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하여 코랄은 망설임 없이 주머니를 뒤집었다.
덜그럭!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검과 얇은 편지 봉투 하나가 끝이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주머니에 넣어 두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내용물. 코랄은 먼저 검을 살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수수한 검집과 달리, 거울처럼 반짝이는 검신을 보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명검이었다. 아마도 이 검의 주인은 마르텔. 무슨 의도로 이걸 검후에게 보내려는 것일까.
“알려진 것과 달리 빌어먹게 어려운 인간이야.”
코랄은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 검후와 마르텔 사이의 사연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검왕과 존 워스 말고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여 대충 검을 내려 둔 그는 이번에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미 코랄이 열어 보리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봉투 입구는 아무런 봉인도 되어 있지 않았다.
봉투 안에 든 것은 세 장의 편지였다.
제법 긴 내용이 담긴 편지를 모두 읽은 코랄은 자신이 걱정하던 내용이 없음에 안도하는 한편, 더욱더 심란해진 눈으로 편지를 노려보았다.
“이 인간이・・・・・・ 노망이 났나.”
“누가?”
“당연히 위대한 블러디 혼 마르텔 님이지, 누구겠습니까?”
혼자뿐인 방 안에서 갑자기 나타난 질문이었지만 코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태연한 대답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한 사람. 칼모레였다.
그의 눈이 코랄의 상태를 살피고는, 뒤이어 손에 든 편지와 검으로 이어졌다.
코랄은 그 모습에 말없이 편지를 건넸다. 역시 말없이 편지를 건네받아 그 내용을 읽어 내리던 칼모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이게 뭐야?”
“인생 막장에 이른 노인의 추억 소환?”
“・・・・・ 도저히 부정할 말이 없군.”
코랄의 말대로였다.
편지에는 마르텔의 추억이 적혀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검후와 함께 했던 즐겁고 슬펐던 사건 사고들에 대한 넋두리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는 용서를 비는 말도 없었으며, 용맹한 죽음을 부탁하는 말도 없었다. 그저 두 노인의 지난날을 추억하는 담담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내용이기에 더욱 그 목적에 대해 짐작이 어려웠다.
도대체 마르텔은 무슨 목적으로 검후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혹시 자신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암호라도 들어 있는 것일까.
“모르겠군. 모르겠어.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이야? 이건 또 뭐고?”
“뭐긴 뭡니까. 똥 밟은 거지.”
편지를 탁자에 내려 둔 칼모레의 질문에 코랄은 지난밤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코가 꿰였다는 거네?”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 상대가 마르텔 님이었지 않나. 자넨 기사단과 임무의 성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문제는, 이 편지의 내용이야. 이야기를 들었더니 이 편지의 목적이 뭔지 더 이해를 못 하겠거든. 진짜 노망이라도 났나?”
물론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 노망이라니,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건이 지금 갑자기 발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암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럼 폐기합니까?”
“아니, 그대로 전달해.
“……알겠습니다.”
코랄은 내심 혀를 차며 편지를 봉투에 담았다.
칼모레의 말은 곧 마르텔이 준 임무에 대한 수행을 허가한다는 뜻이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 상황이 변할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이젠 꼼짝없이 검후를 대면하게 생겼다.
주머니에 검과 봉투를 집어넣은 코랄은 곧 자신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대전 앞 노기사가 말하던 예의 때문이 아니었다. 검후가 자신의 목을 치려 한다면 최소한 반항이라도 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검후가 용맹한 죽음을 허락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희 임무는 괜찮은 겁니까?”
“오히려 좋아. 마르텔 님이 지정한 시간이 내일 새벽이라면서? 아마 대부분의 눈이 그쪽을 향할 거다. 우린 그때쯤이면 소드 팰러스의 영역을 벗어나 있을 것이고.”
“안심입니다.”
“다행이지. 다만, 문제는 너다. …… 괜찮겠나?”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이대로 검후를 대면한 순간, 목이 잘릴지도 몰랐다. 설령 운이 좋아 검후가 살려 보낸다고 해도, 과연 마르텔이 그를 놓아줄까.
놓아주지 않을 경우, 코랄은 마르텔이 말하는 ‘용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별로 개운치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기사단과 임무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걸 각오쯤이야 옛날에 끝났으니까요.”
새삼스럽게 과거의 다짐을 꺼내는 코랄의 눈빛은 담담했다.
기사에게 죽음이란 친구보다 가까운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과연 그렇게 감정을 정리하는 코랄은 알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용맹한 죽음’을 원하는 마르텔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칼모레는 그런 코랄의 어깨를 손을 올렸다.
“미안하다. 기사단을 향한 자네의 충성심은 주군께 반드시 전달하겠다.’
“흐, 제 걱정 이전에 살아서 빠져나갈 걱정이나 하십시오.”
끌끌거리며 웃는 코랄에 칼모레가 마주 웃었다.
잠시 후, 코랄은 자신의 말을 타고 소드 팰러스를 빠져나갔다.
칼모레는 그런 코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붕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코랄을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임무가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미 임무를 성공한 코랄을 이렇게 잃게 될 줄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다.
“쯧, 술이 당기는군.”
동료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일은 매우 입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