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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95화


1430화

두두두두!

지금 막 한 대의 마차가 소드 팰러스 영역에 진입했다. 수많은 기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바로 그 문제의 황금마차다.

거칠 것 없이 맹렬히 달리던 마차는 소드 팰러스 영역에 들어선 후 조금씩 그 속도를 줄여 나갔다. 당연히 마음 급한 기사단의 선택은 아니었다. 속도가 줄어 먼지가 잦아들자 황금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창밖으로 상체를 내미는 검후.

그녀는 그리웠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주변 풍광을 눈에 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감금되어 있었을 때는요.”

“쉐어 가든 때?”

문득 꺼낸 말에 이드가 반응했다.

“가끔, 정말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다시는 이 그리운 풍경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호오~ 우리 위대하신 검후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어?”

긴 시간 감금되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검후가 그랬다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고고한 검이었고, 철혈의 여황이었으니까.

딱 한 번, 라울이 감금된 검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검후는 위대한 검후였다.

그런데 사실은 속에 감춘 약함이 있던 것이다.

“저도 평범한 여자라고요.”

“…….”

신분부터 시작해서 삶의 과정과 그녀가 이룬 업적까지, 도대체 평범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평범을 주장하다니. 도대체 양심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기가 막힌 이드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이런 이드의 반응에도 검후는 그저 집으로 돌아온 것이 즐거운지 얼굴 가득 따뜻한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 쌓아 둔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모습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말을 몰던 스폴이 촉촉한 눈으로 코를 훌쩍였다. 그녀뿐 아니라 검후의 목소리를 들은 기사들 모두가 그렇다. 이드는 이런 모습이 참 신기했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이 철의 여인들이 검후만 관련이 되면 말랑말랑한 소녀 감성이 되어서는 눈물을 찔끔거렸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검후 한정으로는 너무 약한 은색 기사단이다.

“봐요.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지 않아요?”

한껏 감성이 폭발한 듯 세상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검후. 이드는 그녀의 손짓을 따라 창밖을 살피고는 무심코 진심을 말해 버렸다.

“내가 볼 땐 앞서 지나온 폴랑 영지하고 크게 다를 것도 없는 풍경인데.”

“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어떻게는…… 사실이잖아.”

눈을 부라리는 스폴에 이드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마주 쏘아 주었다.

정말이지 검후의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사들이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검후가 안타깝다며 혀를 찼다.

“이럴 때 보면 이드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구나 싶어요. 같은 걸 봐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사람인데.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그렇게 사실만 말하면 여자들에게 인기 없어요.”

“모르는 여자들의 관심은 필요 없거든! 나는 라미아와 일리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드,

그에 검후의 반응에 동감하며 혀를 차던 라미아와 일리나의 눈빛이 금방 사랑스럽게 돌변한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또 여자를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드는 참 신기한 사람이에요.”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신기한 동물 취급이냐? 아니, 애초에 내 말이 틀렸으면 말해 보라니까.”

당연히 틀렸다는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나온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폴랑에서 소드 팰러스로 영지의 경계를 넘었다고 해서 주변 경관이 달라진 건 딱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무슨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니고 같은 제국 안에, 그것도 이웃한 영지가 아닌가. 오히려 경계를 기준으로 환경이 극적으로 바뀐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곳이 있다면 어쩌면 관광 명소로 유명해졌을지도?

그렇게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황금마차는 이동을 계속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하나의 대화가 끝이 나면 누군가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내 들었다. 곧 도착할 소드 팰러스를 앞에 두고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느닷없이 변화가 찾아온 것은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매달렸을 때쯤이었다.

“스폴 경. 손님이 오시는 모양이에요.”

황금마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가리킨 이드의 말에 스폴이 일체의 망설임 없이 외쳤다.

“기사단 정지! 적의 접근이다! 경계 위치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금마차가 부드럽게 정지하고, 기사단이 마차를 중심으로 방진을 짰다. 겹겹이 다섯 단계로 이뤄진 방진은 물 샐 틈 없이 마차로 향하는 길목과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검후는 순식간에 방진을 형성한 기사단의 움직임에 만족하고는 저 멀리 언덕 너머를 살폈다. 그녀의 기감 안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드의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요?”

“규모랄 건 없어. 말에 탄 기사 하나거든.”

“설마 마르텔이?”

은색 기사단과 자신을 향해 단기필마로 나올 인물이라면 마르텔 말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기는 했다.

“블러디 혼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마르텔은 아니야. 연락관도 아니고. 그리고 혼자지만 혼자도 아니야.”

“・・・・・・ 지금은 퀴즈를 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에요, 이드.”

드디어 배신자의 무리와 대면하게 된 상황에 그러고 싶으냐는 듯한 검후의 말에 이드는 억울함을 표했다.

“아니, 퀴즈 같은 게 아니라니까. 말 그대로야. 이쪽으로 달려오는 두 무리가 있어. 앞서 달리는 건 하나. 그 뒤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달려오는 무리의 인원은 넷. 아, 그중 한 명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네.”

“누구죠?”

“클라인 백작. 소드 팰러스의 전 총관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신 모양인데?”

어두워지던 검후의 안색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클라인 백작이 함께하는 이들이라면 그 정체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

그럼 그들이 쫓고 있는 단기필마의 기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말없이 눈빛으로 던지는 질문에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곧 도착할 테니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면 될 것 같은데?”

“혹시 자살 특공 같은 건 아닐까요?”

마차에 딱 붙은 스폴의 말이었다. 긴장했던 그녀는 적이 하나라는 말에 긴장을 풀었다가, 마르텔이라는 이름에 이를 악물더니, 클라인 백작이라는 단어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마르텔이 아니라는 소리에 의심은 커졌다. 은색 기사단과 검후를 향해 단기필마라니. 더욱이 거리를 두고 클라인 백작과 세 명의 기사가 추적 중이라면 아군도 아니라는 소리가 아닌가.

중요 인물 경호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스폴로서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를 가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던가. 겨우 자살 특공 따위에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뭉친 마나가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 무엇보다 아무리 멍청해도 검후를 상대로 자살 특공 같은 게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

그런 과감함이 있다면 거북이처럼 웅크릴 것이 아니라, 벌써 검을 들고 뛰쳐나왔어야 옳다.

“무슨 말을 하는지 직접 들어 보자고, 곧 언덕 위로 모습이 보일 거야.”

그리고 잠시 후.

이드의 말대로 언덕 위로 검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아 갑옷이 번쩍였다. 그러자 그에 자극받은 듯 은색 기사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조용하고 은밀한 살기를 흘려 내기 시작했다.

비록 하나뿐인 상대지만, 스폴을 통해 그가 아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눈앞에 둔 그녀들에 있어 아군이 아니라면 적일 뿐이었다.

그렇게 기사단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며 단기필마의 기사는 계속 말을 달려왔다.

언덕을 내려온 그가 기사단 앞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십분. 그 십분 동안 기사단 내부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후, 상대는 기사단이 만든 방진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냉기가 흐르는 눈빛과 조용하지만 선명한 살기. 그에 더 다가가는 순간 공격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런 상대를 보며 쉴라가 앞으로 나섰다.

“소속 불명의 기사는 정체를 밝혀라.”

“소드 팰러스의 기사, 코랄 콘라드가 명성 높은 은색 기사단장님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소속을 물었다.”

“기사로서 소속된 곳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마르텔 경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쏴아아-

마르텔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북풍한설과 같은 냉기가 불어닥쳤다. 그건 진짜 바람이 아닌, 은색 기사단이 뿜어내는 유형화된 살기였다. 히이이잉!

그걸 마주한 말이 기겁을 해서는 날뛰기 시작했다.

코랄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말을 진정시켰다.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도 내심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은색 기사단의 실력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하나라면 몰라도, 그도 둘 이상의 은색 기사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기사단 전체의 살기를 마주하니,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마침 말이 날뛰어 주지 않았다면 흐르는 식은땀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날뛰는 말을 겨우 안정시키고는 흘러내린 식은땀을 몰래 닦으며 애써 당당한 표정을 하고 섰다.

그 모습을 본 쉴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럼 그대를 마르텔 경의 기사로 보면 되겠군. 그래서, 용무는? 혹시 선전 포고인가? 아니면 자살 특공? 그것도 아니면… 혼자서 우리를 막아 보겠다는 만용?”

“하나같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절대 그런 용건으로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극단도 이런 극단이 없다. 창백하게 질린 코랄이 두 손을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배신의 충격은 꼭 검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만큼이나, 그리고 어쩌면 그녀 이상으로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은색 기사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안타깝군.”

“……저는 마르텔 경의 명령으로 검후를 뵙고 그분께 마르텔 경의 편지와 전언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흐음. 일단 목표에 접근한 후 마나 폭탄을 터트리는 형태의 자살 특공인가?”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싶은 것일까. 코랄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동시에 빈기사단이 아닌 소드 팰러스에 속한 한 명의 기사로서 쉴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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