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6화
1431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은색 기사단장이 이렇게나 꽉 막힌 인간일 줄이야.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이다.
말이 통해야 무슨 말이라도 하지.
은색 기사단장에 있어 자신은 무조건 암살자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는 말은 무조건 암살을 위한 거짓이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했다.
자신은 사실만을 말했다. 그런데 그걸 쉴라가 해석하면 돌고 돌아 암살이었다.
마치 인과역전의 벽을 상대하는 것처럼 막막하다.
‘이래서야 검후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지.’
검후에게 목이 잘릴 것만 걱정했지, 설마 검후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힘으로 밀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실력에 자신이 없지는 않지만, 은색 기사단장을 상대로 비벼 볼 정도로 자만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코랄은 스스로의 실력을 매우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더욱이 문제는 쉴라만이 아니다. 당장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기사들.
쉴라를 경험해서 그럴까.
어쩐지 처음보다 그녀들이 이루고 있는 방진의 벽이 더욱 높고 두꺼워 보였다. 새처럼 날개가 돋아나도 저 방진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 물러날 수도 없다.
코랄은 검집을 빼서 바닥에 박아 세우고는 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걸치고 있는 갑옷도 모두 해제하겠습니다. 저는 진실로 마르텔 경의 전언을 전하려는 것뿐입니다.”
“흐음, 그럼 하는 김에 배 속도 갈라 보여 줄 수 있겠나?”
“…..”
설마 배를 가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코랄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의심도 이 정도면 피해망상, 정신병이다.
아무리 배신의 충격이 커도 그렇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마나 폭탄이라도 하나 들고 올 걸 그랬나.’
그랬다면 억울하진 않았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빈 기사단이 검후에 대한 암살을 계획에 넣지 않은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마르텔이 검후의 암살이 목적이냐는 말에 적극적으로 부정하긴 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텔과 쭉정이들을 내성에 몰아넣어 검후를 유인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만 이 의견은 발언과 동시에 폐기당했다. 위험성과 부작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내성과 함께 검후를 날려 버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소드 팰러스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할 희생자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선후배와 동기들이다. 그중에는 차후 자신들을 지지해 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획이 실행될 경우, 지지자는 사라지고 오로지 분노하는 적만 생길 뿐이다.
재기의 기회를 노린다면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죄 없는 희생자가 발생하는 순간, 검왕은 효웅으로도 불리지 못하는 저열한 악당이 될 뿐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복귀가 불가능하게 된단 말이다. 그건 검왕을 따르는 빈 기사단도 절대 바라지 않는 일.
그런데 지금 쉴라를 마주하고 있으니, 그 결정이 얼마나 옳은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병적일 정도로 의심을 품고 있어서야, 어떤 함정을 준비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병적인 의심을 뚫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빈 기사단의 계획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해서 제 결백을 증명하고 싶지만, 임무 때문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검후를 뵙는 것은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저 대신 마르텔 경의 전언을 쉴라 단장님께서 검후께 전해 주십시오.”
검후를 볼 수 없다면 최소한 마르텔의 전언이라도 전해야 한다.
코랄은 말과 함께 마르텔에게서 건네받았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혹시 그것도 마르텔 경이 전하라 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안에 든 건 오래된 검 하나, 그리고 검후께 전하는 편지입니다. 지금 보여 드리죠.”
코랄은 말과 동시에 주머니에서 검과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또 의심을 받을까 싶어서 빈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좀 믿으라고.
하지만 이런 코랄의 노력은 의미가 없었다. 쉴라는 애초에 그런 코랄의 행동에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코랄이 들고 있는 오래된 검을 향해 있었다.
코랄 또한 이런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검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마르텔 경이 내어 줬다고?”
“전언과 함께 검후께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이 검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코랄이었다.
하지만 쉴라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된 검을 복잡한 감정을 담아 말없이 바라보더니, 문득 손을 뻗어 검을 건네받았다.
“이건 내가 검후께 전하도록 하지.”
너무도 쉽게 나온 허락의 말.
더욱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검을 받아 가는 모습에 코랄은 오히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농락하듯 끝없이 의심할 땐 언제고, 진짜 마나 폭탄을 설치했을지도 모르는 검은 저렇게 의심 없이 받아 간다고?
“죄송합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묻습니다만. 도대체 그 오래된 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막 돌아서려던 쉴라가 코랄을 바라보았다.
굳이 이 검이 가진 의미를 알려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반대로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다.
“코랄 경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대가 마르텔 경의 전언을 가져왔다면 그대 역시 저들 무리에 속한 배신자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겠지. 그렇다면 그의 죄악 역시 모르지는 않을 터.”
“…….”
예고 없이 민감한 문제를 언급한 쉴라에 코랄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쉴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코랄을 무시하고는 오래된 검을 들어 보였다.
“이것은…… 검후께서, 이제는 배신자가 되어 버린 제자들에게 처음 무공을 가르치시던 날 내리신 검이다.”
다시 말해 사승 관계의 상징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지 한 사람의 기사라면 모를 수가 없다.
코랄은 대답을 마친 쉴라가 기사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검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런 깊은 의미를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자 의미를 알 수 없던 편지의 내용도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좋았던 과거에 대한 추억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이런 의미였나.’
추억만 가득한 편지, 그 속에 암호가 든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추억을 들먹이며 검후의 마음이 약해지길 바라는 저열한 수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함께 받은 검이 그러한 의미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건 추억 소환이 아니라 정리의 의미라고 봐야 했다.
감성에만 호소하기에는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게다가 황제가 개입한 이상, 개인적인 문제로 끝낼 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검후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이 잘리는 일은 없겠군.’
그건 일종의 직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직감은 현실이 되었다.
“검후께서 그대의 접견을 허락하셨다. 나를 따라와라.”
방진 사이를 지나 나타난 것은 스폴이었다. 코랄 역시 그녀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검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흥, 기사가 검을 손에서 내려 두는 것은 죽을 때뿐이다. 원한다면 지금 죽여 주지.”
서늘한 시선을 받은 코랄은 내심 욕설을 뱉었다. 사람은 바뀌었지만, 말마다 꼬투리를 잡히는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말투는 은색 기사단의 특징이기라도 한 것일까?
“검을 가져가도 되는 겁니까?”
“설마 네 검이 나와 단장을 넘어 검후께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코랄은 땅에 박아 두었던 검을 얌전히 허리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스폴의 뒤를 따랐다.
‘따끔따끔하구만.’
방진을 지남에 따라 기사들이 쏘아 내는 살기에 피부가 따가웠다.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부가 아렸다. 방진으로 인해 하나로 이어진 기사들의 내력에 의해 발생한 기초적인 의기상인이었다.
만약 코랄이 이대로 일 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야 했다면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코랄은 피를 보기 전에 방진의 중심에 있는 황금마차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마차의 내부는 무언가 방해를 받은 듯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 바로 뒤에 앉은 검후의 모습은 반대로 너무도 선명해서 눈을 찌르는 듯했다.
마차와의 거리는 십 미터.
코랄은 그 자리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미천한 기사가 감히 영원히 빛나는 검의 주인이신 위대한 검후를 뵈옵니다.”
진심을 다한 찬사.
코랄은 문득 자신의 마음이 소란스러움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검후에 대한 찬사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기사로서 검후를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주군을 위해, 그 존경의 대상을 향해 검을 드는 입장이 되어 버렸지 않은가.
“일어서도 좋다. 그대가 마르텔로부터 이 검을 받아 왔다지.”
검후의 말에 똑바로 선 코랄.
그제야 검후가 무릎에 올려 두고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후가 자신이 전달한 검을 양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그 검의 의미는 쉴라 단장께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런가. 그래. 마르텔이 전하라 한 것은 또 없나?”
“전언과 편지 하나가 더 있습니다.”
“편지부터 보겠다.”
검후의 결정에 코랄이 편지를 스폴에게 넘겼다. 스폴은 편지 안을 먼저 살핀 후 검후에게 건넸다.
부스럭.
검후가 편지를 펼쳐 들었다.
그녀가 편지를 읽어 내리는 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