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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16화


특별한 미사여구가 끼어 있지 않은 간결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적은 팩스였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사무실 안은 묵직한 침묵에 잠겨 들었다. 방금 전까지 일고 있던 소동도 멎었기 때문에 그 침묵은 더욱 무거운 느낌을 전해 주었다. 디엔은 그런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엄마의 품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엄청난 소식이다. 드래곤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드로서는 파괴되었다는 에드먼턴이란 곳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때 선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던 세르네오가 천천히 움직여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소리에 본부 가득 내려앉았던 침묵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전화를 한 곳은 다름 아닌 군이었다. 군에 팩스 내용을 알린 세르네오는 다시 본부에 있는 최고 써클의 마법사를 불러 들였다. 팩스 내용에 따라 그녀 나름대로 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사무실 밖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세르네오에 의해 전해진 소식에 가디언들 대부분이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왔다. 순간 모든 소리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열려진 창문으로 밖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아~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설쳐 대는 거야?”

이드는 알 수 없는 블루 드래곤을 욕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데도 격한 분노의 감정은 그리 크게 솟아나지 않고 있었다. 그레센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드래곤이 하는 일은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향을 닮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기억 속에 그래이드론이라는 드래곤의 기억이 남아 있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이드와 마주 앉으며 라미아가 말을 이었다.

“그 드래곤이 이번에 몬스터를 움직인 녀석일까요?”

“모르지. 그런데…. 저번에 카르네르엘에게 듣기엔 얼마간 세상을 살필 거라던데…. 그게 아니었나? 아니면 정말 미친놈인가?”

이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블루 드래곤의 갑작스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드래곤들이 제 맘에 내키는 대로 행동하긴 하지만 이유 없이 많은 생명을 빼앗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블루 드래곤은 무슨 일로 그런 일을 한 것인가. 이드는 카르네르엘을 한번 찾아가 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드는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아, 라미아. 너도 주위에 탐지 마법을 설치해 놔. 혹시 그 미친놈이 이곳으로 오면 미리 알 수 있도록 말이야.”

“네, 알았어요.”

이드는 라미아가 자신의 말에 가만히 눈을 감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뜻 귀에 익은 기척이 빠른 속도로 이드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숙. 사숙. 저 오엘이예요.”

상당히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에 이드는 드래곤에 대한 소식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사숙, 급해요. 제이나노가 쓰러져서 사람들에게 업혀서 돌아왔어요.”

이드는 전혀 뜻밖의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는 방안으로 가만히 서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다 방 밖으로 나서며 오엘을 향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사람을 치료하다 그냥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요. 지금 병원으로 옮겨져 있을 겁니다.”

오엘의 대답을 들은 이드는 급히 발걸음을 가디언 본부 내의 병원을 향해 옮기기 시작했다.

본부 내 병원은 요즘 상당히 바쁜 상태였다. 출동이 잦은 만큼 다치는 사람이 많은 탓이었다. 하지만 포션과 마법들 때문인지 병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없는 가디언들의 병원이었다. 이드는 급히 병원으로 들어서며 오엘의 안내를 받아 제이나노가 누워 있다는 병실을 찾아 들어갔다. 병실은 1인실이었다. 병실 한쪽에는 제이나노의 것으로 보이는 사제복이 걸려 있었고, 침대엔 제이나노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이드와 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제이나노의 얼굴은 평소와 같지 않게 어두워 보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축 늘어진 모습은 보였지만 그늘진 얼굴을 보이지 않던 그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드는 제이나노의 표정을 바라보며 오늘은 참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로의 방송에 블루 드래곤의 갑작스런 등장과 폐허가 되어 버렸다는 도시, 거기에 제이나노까지. 이드는 전음을 사용해 오엘을 내보낸 후 제이나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쓰러졌다더니… 괜찮은 거야?”

“네, 조금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괜한 걱정 끼쳐 드려 미안한 걸요.”

이드는 그렇게 대답하는 제이나노의 목소리가 어쩐 일로 무겁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흐음… 괜찮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무슨…. 고민 있어?”

“그렇게 보여요?”

제이나노는 이드의 말에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아… 평소의 표정과는 다르게 많이 어두워 보이거든. 무슨 일이야? 뭐, 말하기 곤란한 일이야?”

“휴~ 그런 건 아니고요. 단지…. 하아~ 제가 어떻게 쓰러졌는지는 알죠?”

여러 번 한숨을 내쉬던 제이나노는 좋은 말 상대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해 나갔다.

“제가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 사람은 병이 든 내상 환자라 신성력을 온몸으로 가득 퍼트리고 치료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묘한 편안함 같은 게 느껴졌어요. 마치 제가 리포제투스 님께 드리는 기도에 빠져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그런 기분만 느낀 것이 아니라. 묘한 목소리도 들었어요.”

“목소리?”

“아, 아니… 꼭 목소리라기보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는데. 이미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분의 목소리였죠. 리포제투스 님의 목소리.”

“무슨….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거야?”

이드는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평소엔 사제 같지 않은 제이나노지만 명색이 몇 명 있지도 않은 대사제였다. 그리고 그런 그인 만큼 충분히 신의 음성을 접할 수 있는 문제였다. 헌데 신의 음성을 듣고서 기뻐해야 할 그가 이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신언의 내용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신이 하는 좋지 못한 소리는 결코 그냥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 네. 정확한 내용을 아직 알 순 없지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큰 혼란이 올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또한 그것은 균형을 위한 혼란이며 예정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저희들에게 가만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균형을 위하나 예정된 혼란이라고?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인가? 아니면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린 블루 드래곤? 이드는 제이나노가 말한 예언에 가장 가까운 단어 두 가지를 생각해 내 보고는 곧 머리 한곳으로 치워 버렸다.

“그런데 ‘저희들’이라니? 그 말은 우리 일행을 보고 하는 말이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리포제투스 님의 또 다른 대사제를 보고 하는 말이에요. 희미하긴 했지만 저 외에도 두 분이 더 있었거든요.”

이드는 제이나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우선 자신만 알고 있던 사실을 자신에게 말한 덕분인지 조금은 어두운 기운이 가신 듯 보였다.

“그럼 그것 때문에 그런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드의 질문에 제이나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음성을 접한 사제가 그 음성에서 좋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 아직 그분의 말뜻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란 건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걱정스러워요.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이드는 그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신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며 익숙해진 하엘을 통해 어떤 사람들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제이나노의 문제도 뭔지도 알 수 있었다.

“흠, 흠… 내 말 들어봐. 내 생각엔 네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갑작스런 이드의 말에 제이나노가 고개를 들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니?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제이나노는 이드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보기엔 말이야. 네가 너무 쓸데없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신언, 그러니까 신탁을 받아서 네 마음이 무거운 건 알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네 탓도 리포제투스 님의 탓도 아니라는 거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진다면 다른 신들을 모시는 사제들에게도 신탁이 내려질 텐데, 그럼 앞으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사제들 책임인가. 아니지.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넌 그분의 말씀대로 네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네가 가진 힘과 능력에 맞는 일을. 바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런 일을 말이야. 내가 아는 사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사제란 실신한 마음으로 자신이 믿는 신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일 뿐이라고.”

이드는 제이나노를 보며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해 주었다. 평소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신탁을 받고 갑자기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신탁이란 것이 신의 말이고 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좋을 것이 없다. 이드는 자신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제이나노를 보며 병실을 나섰다. 병실 밖에서는 오엘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녀의 모습에 꽤나 걱정했나 보다 생각하고는 자신과 제이나노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해주며,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드는 세르네오에게도 제이나노가 받은 신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나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쫙 가라앉은 가디언 본부의 분위기에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을 먹은 이드와 라미아는 무거운 가디언 본부의 분위기를 피해 디엔과 오엘을 데리고서 오랜만에 공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는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디엔과 오엘을 데리고서 가디언 본부를 나와야 했다.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었다. 블루 드래곤의 소식이 있은 다음 날 프랑스 정부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고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물론 소식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결과가 나온 시기가 나빴다. 지금처럼 블루 드래곤에 몬스터까지 날뛰는 상황에선 가디언과 군, 정부가 힘을 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조사 결과를 터트리면 정부와 가디언들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 되면 몬스터를 막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때문에 가디언 측에선 완전한 증거를 찾아 놓고도 터트리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그날 밤. 프랑스의 라로셸이 엄청난 수의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아 도시의 반이 불타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사상자의 수는 말할 것도 없었고, 파견 나가 있던 가디언들과 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정말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좋지 않을 소식들만이 들려왔다. 다행히 사흘째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조용했다. 하지만 가디언 본부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무겁기만 했다. 특히 예민해진 가디언들은 가벼운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서, 그날 역시도 이드와 라미아는 공원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블루 드래곤에 의해 다시 미국의 한 도시가 공격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드와 라미아는 오엘을 데리고서 가디언 본부를 나와 버렸다. 몬스터의 공격과는 상관없이 질식할 것만 같은 가디언 본부의 분위기에 질려 버린 때문이었다.

세르네오에겐 너무 갑갑하다며 잠시 몬스터의 움직임이나 살펴보고 오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그녀 역시 이드가 주위의 분위기를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조심해서 갔다 오라고만 할 뿐 말리지는 않았다. 제이나노는 이드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말에 그대로 남아 사람들을 치료하던 일을 계속할 거라고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본래의 밝은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다만 이들이 떠날 때 디엔이 울먹인 덕분에 디엔을 달래 놓고 나와야 했다. 거기에 더해 디엔이 걱정된다며 라미아는 특별히 디엔에게 직접 만든 스크롤을 하나 쥐어 주고 나왔다. 무서운 괴물이 많이 나타나면 찢어 버리라고 당부를 하고서.

“후아~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마치 어딘가 갇혀 있던 느낌이었는데….”

이드와 라미아는 뭔가 후련한 얼굴로 뒤로 돌아 군이 경비를 서고 있는 파리 도심을 바라보았다. 위협될 적이 없는 두 사람에게 점점 긴장감이 높아져만 가는 파리와 가디언 본부는 갑갑하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오엘은 그런 두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각은 이드와 라미아보다는 가디언 본부의 가디언들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드와 라미아의 생각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이드와 나란히 서 있던 오엘이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이제 저희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글쎄. 자세히 계획을 세우고 나온 게 아니라서…. 뭐, 이왕 나온 것 세르네오에게 말했던 것처럼 몬스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이드는 즉흥적으로 생각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갔다. 오랜만에 넓은 곳으로 나왔으니 좀 걷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이드의 팔을 붙들고 가던 라미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이드와 오엘을 바라보며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카르네르엘을 찾아가 보는 건 어때요? 마땅히 찾아갈 곳도 없잖아요. 그리고 찾아간 김에 블루 드래곤과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대해 물어봐도 좋을 것 같고요.”

“흐음.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저도 좋은 생각 같은데요.”

세 사람이 모두 의견에 동의하는 것으로 일행들의 목적지가 간단히 정해졌다. 세 사람은 그날 하루 종일을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서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 보자는 이드의 의견에 따라서였다. 하루 종일을 걸은 일행들은 텅 비어 버린 작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어 그곳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했다. 헌데 이상하게 일행들은 이곳까지 오면서 한 마리의 몬스터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몬스터가 나타나는 파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세 사람은 주위의 모든 몬스터가 파리로 몰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 볼 수 있었다. 라미아의 마법으로 그날 밤을 침대에서 못지않게 편하게 자고 일어난 세 사람은 라미아가 그려 낸 거대한 마법진 위에 섰다. 어제 밤 미리 의견을 나누어 두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런던의 항구까지는 곧바로 텔레포트해서 가고,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리에버로 가기로 말이다. 한마디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여정이었다.

“텔레포트!”

런던 항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록 전국적으로 몬스터가 들끓고 있는 통에 평소보다 손님과 화물이 반으로 줄긴 했지만, 여타 지역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활발하고 시끄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물자의 수송과 사람들의 이동은 다름 아닌 이 배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때아닌 볼거리에 항구의 수많은 시선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다름 아닌 매표소 앞. 허공중에 갑자기 생겨나 그 크기를 더하고 있는 빛 무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빛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또는 겁먹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빛은 한 순간 자신의 힘을 다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가렸다.

“우웃…. 왜 이곳에선 텔레포트를 하기만 하면 허공인 거야?”

이드는 그렇게 외치며 급히 손을 뻗어 두 여성의 허리를 잡아채며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아직도 런던에서 구한 텔레포트 좌표가 허공 사 미터 지점에서 열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일행이었다. 땅에 내려서며 주위를 둘러본 이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자신들을 향해 있는 주위의 수많은 시선들 때문이었다. 이드는 텔레포트해 온 곳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자신들이 구경거리가 된 듯한 느낌에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매표소였다. 이미 이곳은 한번 들러 본 적이 있었다. 장소가 확인되자 이드는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지 않던 기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드님. 뭐 하시는 거예요. 저희 안내려 주실 거예요?”

“아, 참. 미안.”

주위의 시선과 장소를 살피느라 깜빡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라미아의 목소리에 이드는 급히 두 사람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풀었다. 아마, 자신이 두 여성을 안고 있음으로 해서 더욱 시선을 끌었던 게 아닐까. 그제서야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던 두 여성은 주위의 시선에 이드 못지않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는데, 수백 쌍에 이르는 눈길이 자신을 바로 보고 있다고. 무안해 하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경 줄은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조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시선을 피하자고 자리를 옮길 수는 없었다. 이드들이 텔레포트해 온 곳은 다름 아닌 매표소. 배를 타려면 이곳에서 표를 꼭 사야 하는 것이다.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주위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매표소 쪽으로 다가갔다.

후다다닥…

매표소 앞에 형성되어 있던 줄이 세 사람이 다가섬에 따라 흩어져 버렸다. 꼭 무슨 흉악범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이드를 포함한 세 사람의 얼굴이 일명 흉악범이란 자들의 얼굴과 비슷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대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능력자라는 말이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이나 무공, 특수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 줄을 서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버렸다. 이드들의 앞으로는 세 사람만이 남아서 표를 사고 있었다. 이드는 그들과 흩어진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옆에 서 있는 오엘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니 평소처럼 서 있는 그녀였지만 내심 주위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하거스 씨들이나 보고 갈까?”

매표소 앞에 서 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표를 사고 옆으로 사라졌다.

“아니요. 다음이에요. 몬스터 때문에 이렇게 바쁜 때라면 가디언 본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두 번째 사람이 표를 사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것도 그렇네. 그럼 카르네르엘을 만나 본 다음에 들르기로 할까?”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이 표를 사고서 이드들을 한번 돌아보더니 옆으로 빠져나갔다. 이드는 자신들 앞으로 더 이상 사람이 남아 있지 않자 매표소 앞으로 다가갔다. 매표소는 투명하고 두툼한 플라스틱의 창을 사이에 두고 매표소 직원과 손님이 마주 볼 수 있도록 해 놓고 있었다.

“여기. 리에버로 가는 배가 언제 있지요?”

시간을 잘 맞추어 도착한 것인지 리에버행 배는 한 시간 후에 있었다. 출발할 때 조금만 늦장을 부렸어도 다음 날 오후까지 기다려야 할 뻔했다. 우연찮게도 일행들이 탈 배는 리에버에서 이곳 런던까지 일행들이 타고 왔던 배였다. 세 사람은 이곳으로 이동할 때 워낙 시선을 끈 것을 생각하고는 항구를 구경하는 등의 일은 하지도 못하고 그냥 배에 올라야 했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한 시간이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배의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이드들은 갑판에 나와 멀어져 가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항구의 한쪽. 그곳엔 방금 전까지 세 사람이 타고 있었던 여객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지금 일행들이 타고 있는 배는 한 시간 전에 올라섰던 배가 아닌 그것보다 더 큰 여객선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을 십 분 앞둔 시점에서 타고 갈 배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유는 갑작스럽게 승객이 몰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이드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같이 몬스터가 출몰하는 상황에서는 바다 위라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한 척의 배에 몇 명의 가디언들과 용병들이 항상 같이 승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승객들은 그런 가디언들을 믿고서 배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드들이 텔레포트라는 엄청나게 눈에 띄는 마법을 사용해서 사람들 앞에서 나타났고, 리에버행 배에 올랐다. 그것은 곧 사람들에게 이 배에는 배를 지킬 만한 능력자들이 타고 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탑승자들이 생겨났고, 자연히 그에 따라 배도 더 큰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드들은 생각지 못한 행운에 기뻐하기만 했다. 바로 1급의 객실이 특급의 객실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이드는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참 편안하다고 느꼈다. 시원한 바다 내음도 좋았지만 안정적이고 편안한 배의 느낌도 좋았다. 아마도 저번의 배보다 그 덩치가 크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덩치가 큰 만큼 이 배에는 꽤나 많은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예로 지금 이드가 라미아와 오엘을 데리고 와 있는 식당을 들 수 있었다. 이 배에는 식당이 1층과 2층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1층은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며 주로 간단한 요리들을 판매하고, 2층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깔끔하고 다양한 요리들을 판매한다. 덕분에 양쪽 식당을 사용하는 가격의 차이는 상당하다. 그리고 지금 이드들은 2층의 식당으로 올라와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전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드와 라미아인 만큼 가격보다는 맛을 찾아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 두 명의 웨이터가 세 사람이 주문한 요리들을 가지고 나왔다. 배에서의 요리이기 때문인지 주로 해산물이 많았다. 세 사람이 주문한 것이지만 그 양은 상당히 많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적당히 허리를 숙여 보인 웨이터가 돌아갔다. 이드는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있는 연어 샐러드를 한껏 찔러 가려 했다. 아니 찔러 가려 했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눈에 거슬리는 얼굴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이, 우리들 왔어.”

서로 잘 아는 듯한 인사였다. 그의 말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정장의 여성이 살풋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쉿, 조.용.히. 항상 말하지만 조용히 좀 해요. 여긴 식당이라구요.”

“헤헤… 원래 목소리가 큰 걸 어떻게 고치라고?”

“그렇지. 넌 원래 그게 작은 목소리지. 그런데 이곳에만 오면 유난히 더 커지는 것 같단 말이야.”

식당 안을 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요리의 맛을 음미하는 데는 충분히 방해가 되는 소음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항의를 하지 못했다. 소음의 주원인인 남자들의 허리에 매달린 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 세 명의 남자들은 이드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숙, 저 사람들 저번에 그….”

오엘도 그들의 얼굴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이드는 그런 오엘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번에 배 위에서 연기했던 그 용병들인 것 같다. 근데 저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이드는 저번처럼 좋지 않은 뜻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살폈다. 용병들은 처음 봤던 때와 별 차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입고 있는 옷만은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물론, 안의 내용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들 곁으로 못 된 남자 둘은 그들 용병보다는 어린 나이로 보였는데, 한 명은 용병들과 같은 검사였고, 나머지 한 명은 길다란 은빛 막대 형태의 로드를 들고 있는 마법사였다. 그 중 마법사로 보이던 청년이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정신이 나가 버렸다. 처음부터 그들을 살피던 터라 그의 표정 변화를 확실히 알아본 이드는 가만히 그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라미아가 있었다. 그 마법사 청년은 마침 그쪽을 바라보던 라미아와 눈이 마주쳤던 모양이다.

‘쯧, 대충 이해는 간다만….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으면 별로 보기 좋지 않아.’

라미아가 이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자신의 물 잔을 두드렸다.

티잉.

마치 은제 수저로 두드린 듯한 맑은 소리가 일어났다. 그 충격에 물 잔 위로 수 개에 이르는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이드는 그 중 제일 큰 물방울을 찾아 손가락으로 튕겼다. 순간 이드의 손가락이 닿음과 동시에 가벼운 내공의 작용으로 물방울이 응집되며 핑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물 잔이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옆에 앉은 오엘만이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사숙, 독점욕이 강하시네요. 순간에 허공을 날아간 물방울은 그대로 마법사 청년의 미간을 두들겼다.

“앗! 따거….”

마법사의 갑작스런 외침에 그때까지 카운터에 앉은 여성과 장난스런 말싸움을 이어 가던 네 남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타트. 왜 그래?”

“스읍…. 아니 그게 갑자기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해서…. 응?”

정말 눈물이 찔끔할 정도로 따끔한 고통에 이마를 문지르던 타트라는 이름의 마법사는 손에 느껴지는 물기에 이마에서 손을 떼 보았다. 과연 그의 손에는 조금이지만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가 손을 뗀 사이 그의 이마를 바라본 또 다른 청년은 조금 붉게 물든 타트의 이마를 볼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타트가 문질러서인지, 아니면 무엇엔가 물려서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뭔가 물린 것 같진 않아. 괜찮아. 근데 뭘 멍하게 있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냐?”

검사 청년은 타트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멍하니 있다 벌에 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라미아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이드라는 벌에 쏘였으니까. 타트는 자신의 친우의 말에 마음속이 뜨끔하는 느낌에 급히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었다. 부정하는 그의 눈이 어느새 라미아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검사 청년과 용병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 시선을 쫓았다. 그들의 눈동자 안에 이드들이 담겨짐과 동시에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물론 이유는 각자 달랐다. 검사 청년의 경우 앞서 타트와 같은 이유에서였고, 세 명의 용병들은 자신들이 좋지 못한 짓을 할 때 걸려 그야말로 뼛속 깊이 스며드는 고통을 맛본 것이 기억이 나서였다. 그런 그들의 귓가로 방금 전 말장난을 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들의 정신을 깨웠다.

“흐음…. 확실히 남자로서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이지?”

“아, 흐음… 흠.”

그녀의 말에 검사 청년과 타트라는 마법사는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 보였다. 하지만 워낙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세 사람과는 달리 세 명의 용병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로 좋지 못한 인연으로 한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여간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이미 자신들을 발견한 것 같지 않은가.

‘쳇, 어쩔 수 없구만. 앞으로 사흘 동안 방에서 안 나올 것도 아니고. 까짓 거 가 보자.’

세 용병 중 리더로 보이는 짧은 스포츠 머리의 남자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라 나머지 두 명의 남자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아니, 그들이 저 아름다운 여성이 끼어 있는 일행을 안다는 사실에 놀라며 두 명의 청년도 급히 그 뒤를 쫓으며 여성을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멜린 씨. 저희 객실에 계신 스승님께 가벼운 정식 하나 부탁드릴게요.”

멜린이라 불린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카운터를 보고 있는 그녀로서는 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 네. 헌데 예약한 오늘 배에 오르면서 주문해 둔 요리가 있을 텐데요.”

오고 가는 손님들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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