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17화
“흐음… 의외네요. 이쪽으로 오다니. 더구나 나쁜 일로 오는 것 같지도 않구요.”
이드는 오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포크를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려놓았다.
“처음 봤을 때 그런 짓을 하긴 했지만… 뿌리까지 완전히 썩은 것 같진 않았었어.”
자신들이 불리한 것을 알고서도 자신들의 이름을 생각해서 칼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던 그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보게 되는군. 잘 있었나? 그리고 거기 두 분 아가씨분들에겐 저번의 일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소. 그때는 미안했소.”
스포츠 머리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라미아와 오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상당히 성격이 털털한 사람인가 싶다. 별로 좋게 보지 않던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여 버리자 라미아와 오엘은 적잖이 당황한 듯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진짜 사과를 받아 주었다기보다는 얼결에 고개만 끄덕인 꼴이었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입 꼬리를 살며시 말아 올리다 그들 다섯 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물었다.
“저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아, 그러지 말고 여기 앉으시겠어요?”
이드는 그들을 그냥 세워 둘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테이블은 세 사람이 앉아 있기에 딱 맞은 크기라 앉고 다른 사람이 앉고 싶어도 앉을 만한 공간이 없다. 그런 사실을 말하고 나서야 알았는지 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모습에 스포츠 머리의 남자가 자리 옮기길 권했다. 사과의 표시로 점심을 사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별로 거부할 생각이 없었던 이드는 그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 걸요?”
이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연어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먹고는 싶었지만, 저들 다섯 명의 요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자신의 요리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아, 뭐… 이른바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드는 직감적으로 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이 자네와 대치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지? 그때 우리가 용병으로서의 이름을 지킨다고 자네에게 대들다 깨졌잖아. 그런데 그때 거기에 이 배는 물론이고 영국에서 운용되는 절반의 선박이 속해 있는 회사의 중역이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가 한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일자리를 주더군.”
“이 배에서요?”
“그렇지. 자네도 들어봤겠지? 혹시 모를 해양 몬스터를 대비해 배에 능력자들을 배치한다는 사실.”
물론 들어봤다. 설사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몬스터가 날뛰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 세 분이?”
“뭐, 그렇게 됐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확실히 용병으로서 이런 좋은 일거리가 없을 것이다. 해양 몬스터의 공격이 잦은 것도 아니니, 몬스터의 공격이 없는 동안은 편하게 이 대형 여객선에서 머물며 지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의 눈에 여전히 라미아를 향해 눈을 힐끔거리는 두 젊은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자연히 이드는 두 사람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봐서는 거친 용병 같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용병이라면 이제 막 용병이 된 신참 중에 신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이드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라미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어지간히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검사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영국 가디언에 소속된 나이트 가디언 베르캄프 베르데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둘이며 고향은 버밍험이고, 키는 187센티미터, 몸무게는 71킬로그램입니다. 양친은 현재 런던에 살고 계시며, 여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분들과 강한 검사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드는 물론이고 용병들의 황당함을 담은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자기 소개를 하랬더니 아주 자기 자신에 대한 프로필을 전부 공개하고 있다. 어지간히 자신에 대해 알리고 싶었나 보다. 이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타트라고 불린 마법사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도 저렇게 요란스레 자기 소개를 할까 싶었다. 친구와 친구는 닮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그의 자기 소개는 조용했다. 보통 사람들의 자기 소개와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베르캄프와 대비되어 확실히 기억될 듯도 했다. 과연 마법사답게 머리가 좋은 것 같다.
“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지만, 여객선에 있는 특실 중 한 객실에 저희 선생님이 계십니다. 원체 사람이 많은 곳에 다니시기 귀찮아하셔서 이번에도 나오시지 않으셨죠. 고위 마법사가 되면 성격이 특이해지는 건지. 스승님은 6써클을 마스터하셨죠. 기회가 된다면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스승의 실력을 입에 올리는 타트였다. 베르캄프와 같은 배짱은 없어도, 뒤에 든든한 빽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알리는 것 같았다. 6써클 마스터라. 대형 여객선이라 승선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영국 가디언 측에서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이군…
딸깍.
라미아와 오엘이 식사를 마쳤다. 종류는 많지만, 양이 적어서 그런지 남자들이 떠들어 대는 사이 식사가 끝나 버린 모양이었다.
“이드님, 식사도 대충 끝났으니… 저희들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있을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좀 더 있어요. 이드의 말에 두 청년의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응, 그래, 그럼.”
라미아는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분명 뭔가를 달라고 하는 모습인데…. 하지만 라미아가 뭘 바라는지 짐작하지 못한 이드가 그녀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뭘 달란 말이야?
“우리 방 열쇠요. 오엘의 방보다는 2인실인 저희 방이 쉬기에 더 편할 것 같아요.”
쿠웅.
순간 두 청년은 자신들의 심장이 그대로 멈추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우리 방이라니, 우리 방이라니, 우리 방이라니이….. 하지만 이번에도 그 두 사람에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라미아와 오엘은 이드에게 열쇠를 건네받자 용병들과 가디언들에게 간단히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나갔다. 그때까지 두 청년은 가슴속으로 우리 방이란 단어만 되새기고 있었다. 우리 방이란 단어의 충격에 라미아와 오엘이 나가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들의 상태를 눈치챈 한 용병이 나직이 혀를 내차며 그 두 사람을 대신해 이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라미아 양이 우.리.방. 이라고 하던데… 자네 둘 같은 방을 쓰는 건가?”
쫑긋쫑긋.
그 물음에 지금까지 라미아의 말을 곱씹던 두 청년의 시선이 이어질 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며 쫑긋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이드의 대답에….
“네, 어쩌다 보니까 같이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잠만 같이 자는 거니까.”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쫑긋 솟아 있던 두 사람의 귀는 축 늘어진 개의 귀 못지않게 축 쳐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은발의 천사와 같은 미녀가 한 순간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린 느낌. 바로 두 청년이 지금 심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에 놓여졌지만…. 결국 이 인분은 그대로 남아 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이드와 라미아, 오엘은 다음 날 저녁 식사 때까지 가디언이라는 두 청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 세 사람은 목적지인 리에버에 도착한다.
밤바다. ‘고요함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두 잠드는 시각의 밤바다는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하다. 바람도 잠자고, 파도도 잠이 든 밤바다는 그 무엇보다도 고요한 어머니 같은 침묵을 가지고 있다. 침대에 누운 이 두 사람도 어머니의 고요함에 기대어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 주가 넘게 같은 방을 사용해서인지 이드도, 라미아도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라미아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이드의 팔과 그런 이드의 가슴 위에 편하게 걸쳐진 라미아의 팔과 다리. 서로 너무도 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이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다에 이 두 사람의 잠을 방해할 것은 없을 것이다.
반짝
가만히 잠들어 있던 이드의 눈이 한 순간 반짝 뜨여졌다. 그런 이드의 눈동자엔 단 한 줌의 잠의 기운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운기조식을 금방 끝마친 듯한 청명한 눈은 혹시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드가 깨어난 것은 그의 본능에 의해서였다. 잘 단련된 육체와 본능은 깊은 수면에 들어 있으면서도 미세하게 흐르는 한 줄기 살기를 잡아내고 이드의 정신을 깨웠던 것이다.
후우우우우
이드는 갈무리해 두었던 기운을 풀었다. 한 순간 웅후하면서도 너무도 자연스러운 기운이 넓게 퍼져 나 이드와 라미아의 머리카락을 살랑하고 흔들었다. 그렇게 퍼져 나간 기운은 순식간에 넓은 여객선을 뒤덮고 더 멀리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진 그물 같은 기망(氣網)을 통해 인간 아닌 어떤 존재가 배 주위로 모여들어 배를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다 기망을 통해 느껴지는 그 존재들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이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이드의 가슴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살풋 들리며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소곤거리는 듯했다.
“타겟 인비스티가터…”
라미아가 시동어를 외움과 동시에 그녀의 손 위로 묘한 느낌의 마나가 회오리치며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은 몬스터였다. 인간형의 푸른 비늘을 가진 몬스터였다. 세로로 갈라진 초록의 동공과 상어의 이빨과도 같은 뾰족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몬스터가 물갈퀴에 갈고리 같은 손톱이 갖추어진 손으로 천천히 새하얀 벽을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드의, 정확히는 그래이드론의 지식 속에 기록되어 있는 몬스터의 한 종류였다.
“써펜더.”
꽤나 위험하고, 많은 수가 한꺼번에 공격하며, 번들거리는 퍼런 비늘이 맛이 없는 몬스터. 이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라미아가 개어 놓은 겉옷을 걸쳐 입으며 일라이저를 손에 들었다.
“가서 오엘을 깨워서 갑판으로 내려가.”
라미아도 겉옷을 걸치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님은 어쩌시게요?”
“어쩌긴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야지.”
“하지만…. 어느 객실을 사용하는지 모르시잖아요.”
이드와 같이 방문을 열며 물었다. 이드는 그녀의 물음에 가볍게 미소로 답하고는 특실의 문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튀어나오겠지.”
푸화아아아악
순간 폭풍이 몰아치는 기세로 엄청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의 중심엔 이드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이런 가공할 만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데 전혀 지쳐 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라미아는 이드의 기류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바로 옆 방. 오엘의 객실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두드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방문에 닿으려는 순간 문이 활짝 열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열린 문 뒤로는 잔뜩 몸이 굳어 있는 오엘이 가슴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그녀는 이드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온몸이 저릿저릿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라미아는 그런 오엘의 손을 부여잡고 갑판으로 향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라미아와 오엘이 막 계단을 내려갔을 때쯤 복도 여기저기서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소리에 뿜어 내고 있던 기운의 태반을 갈무리해 내고서 라미아와 오엘이 나갔을 갑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발길을 육십대의 짱짱한 노인이 가로막고 섰다. 그런 노인의 얼굴은 방금 전의 오엘 못지않게 딱딱히 굳어 있었다. 마법사인 만큼 주위에 퍼지는 마나의 기운을 더욱 정확하게 느꼈던 때문이었다. 그런 노인의 손에는 그의 것으로 보이는 금색의 막대와 같은 모양의 로드가 들려 언제든 마법을 시전할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뭐… 뭐냐. 네 놈은….”
마법사는 잔뜩 긴장한 모양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노인의 의문은 그의 제자인 타트가 뛰어오며 풀어 주었다.
“스, 스승님. 이 기운은….. 어? 이드 군?”
“흐음… 네 놈이 이드라는 놈이냐?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런 무지막지한 기운을 뿌리는 거냐?”
노인은 호통을 치면서 바득 이를 갈았다. 방금 전 이드의 기운에 자신이 얼마나 놀랐었단 말인가. 또 이런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자 노인은 이드가 굉장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자 놈이나 후배 놈들의 실력이 급성장하고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숨어서 배우며 몇 십 년을 배우고서야 이런 실력을 가졌건만, 제자 놈이나 후배 놈들은 당당히 드러내 놓고, 그것도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배우고 있지 않은가. 은근히 질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차에 이드를 보았으니….. 지금까지 쌓였던 질투가 이드를 향해 터졌다고 할 수 있었다. 육 써클의 마법사인 자신을 놀라게 한 그 마나의 폭풍은….
“몬스터가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깨워야지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 뭐? 타트.”
노인은 이드의 말에 의아해하다 곧 자신의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몬스터라는 말에 주위를 살피라는 뜻이었다.
“그럼 큰 소리를 치면 될 것이지….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기운을 뿜는단 말이냐?”
이드는 그 노인의 말에 그를 지나치며 대답했다. 써펜더들이 갑판으로 올라온 것이 느껴졌다.
“그럼 사자후라도 터트립니까? 이 여객선의 모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도록? 도망갈 곳도 없는 이곳이 혼란스럽도록요?”
“스… 스승님. 엄청난 숫자예요.”
이드는 등 뒤로 들리는 타트의 말에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이 여객선의 갑판은 중앙 갑판과 전방 갑판의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갑판을 나누는 것은 커다란 식당 건물이었다. 그 식당 건물의 아래로 터널 식의 통로가 나 있고 그곳으로 전방 갑판과 중앙 갑판의 통행이 이루어졌다. 이드가 중앙 갑판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라미아가 사방으로 화이어 볼과 화이어 애로우를 날리며 갑판 위로 올라서려는 써펜더들을 떨어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다가 바로 밑에 있는 상황이어서 이기 때문인지 라미아의 마법에 맞아도 다치기만 할 뿐 죽는 몬스터는 없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라미아를 멈추게 했다.
“잠깐 그냥 둬. 녀석들이 올라오도록.”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타트의 말에 바로 쫓아온 건지 갑판으로 나오던 노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런 노인의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세 명의 용병과 베르캄프가 뛰어나오는 모양이었다.
“제 말은 놈들이 완전히 갑판 위로 올라온 후에 공격하자는 겁니다. 올라오는 와중에 공격하게 되면 놈들이 떨어지면서 공격하던 힘이 많이 줄어들게 되니까요.”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막 갑판으로 올라온 한 마리의 써펜더에게 일라이저를 휘둘렀다. 그와 함께 붉은색으로 물든 한 장의 꽃잎이 나풀거리더니 써펜더의 미간을 뚫어 버렸다. 난화 십이식이었다. 지금처럼 다수의 적을 사용할 때 적합한 것이 난화 십이식이었다. 그때였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여객선의 모든 전등에 불이 들어오며 칠흑 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작은 빛을 뿌렸다. 이드는 배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짐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사자후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마법사와 용병을 깨웠던가. 만약 사람들이 써펜더를 보고 혼란에 빠질 경우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드는 자신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갑판에 고개만 들이밀어도 마법을 사용해 떨어트리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가 아마 이 마법사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숙. 전방 갑판에 놈들이.”
“아찻, 깜빡했다.”
이드는 깜빡하고 있던 전방 갑판을 생각해 내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 갑판에는 이미 상당수의 써펜더가 올라왔는지 전방 갑판과 통해 있는 통로를 통해 놈들이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통로 중앙 부분에 배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긴 하지만 밤이라 잠겨 있는 때문인지 놈들은 다른 곳으로 새지도 않고 중앙 갑판으로 달려왔다. 이드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오엘을 비롯한 용병들과 가디언이 뛰어들었다. 써펜더는 해상 몬스터인 주제에 물 밖인 갑판에서도 재빠른 속도로 움직여 가며 갈고리 모양의 손톱으로 일행들을 공격해 들어왔다. 배의 선체에 갈고리를 박아 넣으며 기어 올라왔으니 그 강도와 날카로움은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한번 잘못 걸리면 그대로 잘려 나가고 뜯겨 나가게 될 것이다. 거기에 빛을 받아 반질거리는 그들의 피부는 마치 유리처럼 칼을 미끄러트리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물론, 다양한 보법과 검기를 사용하고 있는 이드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래, 한꺼번에 몰려와라. 화령인!”
이드의 기합과 함께 일라이저의 검신으로부터 붉은 칼날들이 써펜더를 향해 날았고 여지없이 써펜더들의 몸 한 부분을 부숴 놓았다.
“위드 블래스터.”
푸화아아악.
라미아의 목소리에 맞추어 묵직한 공기의 파공성과 함께 한쪽 갑판에 몰려 있던 일곱 마리의 써펜더가 한꺼번에 바다 저 멀리로 날려 가 버렸다. 그리고 그런 이드와 라미아 사이로 오엘과 용병들 원형으로 모여 사방에서 날뛰는 써펜더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뿌우우우우우웅
묵직한 뱃고동 소리가 울리며 대형 여객선의 거체가 움찔했다. 밤새 거의 서 있다시피 하던 여객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 여객선 선장의 판단일 것이다. 이미 올라온 써펜더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직 바다 위에서 올라갈 기회를 보는 써펜더들을 떨쳐 버리자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잘만 될 경우 이 써펜더들은 쉽게 떨칠 수 있을 것이었다.
우우우웅
한꺼번에 출력을 최대로 올렸는지 여객선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갑판에서 써펜더들을 상대하고 있는 일행들에게까지 들려왔다. 하기사 이런 몬스터들의 모습을 본다면 엔진에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빨리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쿠우우우웅
“어엇!!”
“갑자기 왜.”
꺄아아아아악…… 우와아악…..
빠른 속도로 주위에 있는 써펜더들을 베어 가던 이드들은 갑자기 배의 선체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과 함께 배의 선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며 다급성을 발했다. 한 순간 배가 전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갔다. 그리고 그것은 선실 안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련히 승객들의 것으로 보이는 비명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다행히 여객선은 그 큰 덩치답게 금세 그 중심을 잡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엔진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배 또한 전혀 앞으로 나아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어라. 제길….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
용병 중 한 명이 배가 기우뚱거릴 때 쓰러진 써펜더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으며 씹어 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긴장감의 보답이라도 되는 듯 그때 다시 한번 뭔가 배의 선체에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묵직한 소리가 배의 철제 선체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 충격은….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도 함께 가지고 왔다.
“으아악. 살려줘. 배가, 배가 가라앉을 거야.”
벌컥.
중앙 갑판과 전방 갑판을 이어 주는 통로에 있는 문이, 지금은 전방 갑판에 있는 써펜더들이 중앙 갑판으로 지나오고 있는 통로가 되어 버린 곳에 있는 문이 경박한 남자의 비명과 함께 열.려.버린 것이었다.
“저, 저런 바보 같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문 닫아. 이 자식아!!”
“끄아아아악…..”
하지만 문을 열었던 남자는 그런 이드들의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써펜더의 갈고리 같은 손톱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간 때문이었다. 그런 남자의 목은 이미 반쯤 잘려 나가 피를 뿌리며 그 속의 허연 목뼈까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몬스터들 코앞에서 열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손 쓸 틈도 없이 두 마리의 써펜더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꺄아아…. 악…”
“으아…. 도망쳐. 괴물, 괴물이다.”
이드는 연이어 급히 신법을 사용해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 있었다. 수십 년 이상은 된 거목과도 같은 굵기를 가진 유백색의 그것이 바다에서 튀어나와 정확하게 전방 갑판과 통하는 통로를 막아 버린 것이었다. 정말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쿠우우웅
이드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정체 불명의 물체를 따라 길게 시선을 옮겨 본 후에야 눈앞의 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문어의 다리였던 것이다.
“제, 젠장. 크라켄까지 나타났어.”
“이 놈이야. 지금 우리 배를 잡고 있는 게…..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끝장이야. 이봐요. 마법사 영감님. 빨리 어떻게 좀 해 봐요.”
등 뒤로부터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켄의 출현에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크라켄이란 해양 몬스터 중에 가장 강한 다섯 가지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가진 바 힘과 크기는 결코 작은 게 아니기 때문에 여타한 배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반응은 당연한 듯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크라켄보다 배 안으로 들어갔을 써펜더들이 더 문제였다. 이드의 귀로는 두꺼운 갑판을 격하고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생생했다.
‘칫, 가로막으면…. 잘라 버리고 들어가면 되는 거야!!’
이드는 눈앞에 놓인 크라켄의 다리를 바라보며 일라이저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일라이저는 붉은 빛의 검기를 버리고 은백색 찬연한 검강으로 휩싸여 있었다. 삼 미터 정도로 쭉 뻗어 나 있었다. 그 정도의 검강이라면 눈앞의 크라켄의 다리 정도는 간단하게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강이 크라켄의 다리에 닿기 직전 이드의 그런 행동을 저지시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있었다.
“않 돼!! 당장 멈춰.”
타트의 스승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또 왜 그러십니까? 안쪽에서 써펜더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구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만약 그 다리를 잘라 버리기라도 하면, 배에 달라붙어 있는 크라켄이 날 뛸 거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배가 뒤집어져 버린다.”
이드는 그의 말에 눈앞에 있는 크라켄의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일라이저를 내려야 했다. 대신 배의 난간 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이드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때, 중앙 갑판에 올라온 써펜더를 거의 처리한 용병들은 곧바로 선실 안으로 뛰어갔다. 선실 안이 모두 이어져 있는 만큼 크라켄이 막고 있는 통로가 아닌, 일행들이 나왔던 곳으로 해서 돌아 들어갈 생각이었다.
배의 난간에서 시커먼 밤바다를 바라보던 이드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대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드는 바닷물에 닿음과 동시에 자신의 몸 주위로 두터운 호신강기를 쳐 공기를 가두고 바닷물을 막았다. 이드의 몸은 여객선에서 떨어진 속도 덕분에 순식간에 십여 미터를 잠수해 들어갔다. 밤의 바다는 너무도 어두웠다. 가끔 여객선의 빛이 반사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빛만으로도 여객선의 배 밑바닥에 붙어 있는 거대한 크라켄의 윤곽은 대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이면 좀 더 좋을 것이다.
“라이트.”
파아앗.
이드가 시동어를 외움과 동시에 바닷물 속에 큼직한 빛의 구가 생겨나 사방을 밝혀 주었다. 그제야 열 개의 다리로 여객선의 몸체에 달라붙어 있는 거대한 머리의 크라켄을 볼 수 있었다. 놈은 갑작스런 빛이 당황스러운지 온몸을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 놈을 잠시 바라보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둥근 원을 만들어 보였다. 저 놈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여객선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고 한방에 끝을 내자니 자칫 잘못하면 여객선의 바닥에 구멍이 뚫어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드에게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알맞은 무공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쓰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무공이었다. 그저 장난스레 만들어 두고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무공. 여객선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서 저 크라켄을 떼어 낼 수 있는 무공.
“산도 묶어 둘 수 있으리라. 12대식 원원대멸력(猿圓大滅力)!!”
이드의 외침과 함께 둥글게 모여 있는 이드의 손으로부터 찬연한 금광이 발해졌다. 손에서 일어난 금광은 하나로 모여 작은 빛의 고리를 만들었고, 그 고리는 곧장 크라켄의 머리를 목표로 날아갔다. 처음엔 이드의 손이 만든 고리만 하던 빛의 고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엄청난 속도로 그 크기를 더해 결국 크라켄의 머리에 다다랐을 때는 그 크기가 크라켄의 머리만 해져 있었다. 이드는 크라켄의 머리가 빛의 고리에 가두어지자 서서히 둥글게 말고 있던 손을 조이기 시작했다.
“원원대멸력 박(縛)!”
이드의 손이 줄어듦에 따라 크라켄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빛의 고리도 그 크기를 줄여 가기 시작했다. 처음 어느 정도까지는 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황금빛 고리가 제 놈의 머리 크기의 반으로 줄어들자 슬슬 고통이 느껴지는지 여객선을 붙잡고 있던 다리 중 하나로 머리의 고리를 밀어 내려 애를 썼다.
‘그건 그렇게 쉽게 벗겨지는 게 아니지. 어서 빨리 배에서 떨어져라.’
이드는 빛의 고리의 크기를 더욱더 줄였다. 크라켄의 머리 크기의 삼 분의 일까지 줄어들었다. 그제야 놈도 굉장히 고통스러운지 여객선을 잡고 있던 대부분의 다리를 거두어들여 머리를 매만졌다. 그런 모습이 꼭 삼장법사의 머리띠에 꼼짝하지 못하는 손오공처럼 보였다.
‘좋아. 거의 다 떨어졌으니까 어디 맛 좀 봐라.’
이드는 순간 천천히 줄여 가던 손 안의 원을 확 줄여 버렸다.
끼에에에에엑
한순간에 덮쳐 온 고통이 너무 심했는지 놈은 자신의 몸에 붙은 열 개의 발을 모조리 사방으로 쫙 펴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덕분에 여객선은 놈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객선에서 떨어진 녀석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인지 천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손을 꽉 쥐어 버리면 놈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니라 손 안에 놈의 뇌로 생각되는 딱딱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걸 깨 버리면 저 크라켄은 확실히 죽는다. 하지만 굳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이드였다.
“원원대멸력 해(解)!”
작게 줄어들었던 이드의 손이 다시 원래의 크기를 찾았다. 그에 따라 빛의 고리도 커지더니 종내엔 사라져 버렸다. 크라켄은 빛의 고리가 사라졌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충격이 생각 외로 심했던 모양이었다.
‘너 다음에 다시 나한테 걸리면 그때는 정말…. 터트려 버릴 거야.’
이드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내심 내뱉으며 쌍장을 발아래로 뿌렸다. 손바닥 전체로 몰캉한 느낌이 일며 묵직한 반탄력이 전해져 왔다. 이드는 그 반탄력에 의지해 그대로 수면 위쪽을 향해 상승해 올라갔다. 수면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던 이드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수면이 은은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서히 새벽이 밝아 오는 모양이었다.
“이거, 이거…. 물속에서 보는 일출도 생각 외로 멋진걸.”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바다 속에 몸을 눕히고 점점 붉은 기운을 더해 가는 해수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