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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26화


“흐음…. 후루룩… 음… 차 향이 그윽한 게 좋은걸…”

“…. 창고 안에 더 좋은 차도 있었지… 이젠 없지만!!”

따끔따끔. 이드는 잔뜩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찔러 대는 카르네르엘의 말투에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깔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말만 하면 저런 식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다. 죄를 지었으니 잠자코 벌을 받아야겠지. 이드는 조용히 찻잔을 다시 들었다. 현재 세 사람은 처음 이드와 라미아가 찾아 들어왔던 바로 그 작은 동산 안의 레어 같지 않은 레어의 원형 홀에 돌아와 있었다. ‘여기선 이야기할 곳이 없어. 다! 부숴졌거든.’이라는 칼을 품은 카르네르엘의 말에 더 이상 벤네비스 산 속의 레어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르네르엘은 이곳으로 이동되어 오자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원형의 탁자와 의자, 그리고 차를 꺼내 놓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거실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처럼 탁자를 꺼내 놓으니 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바닥에 깔려 있는 잔디가 정원에 나와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좌우간 보석이 부숴진 일 때문에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을 줄 알았던 이드에게 의외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가시 돋친 한마디, 한마디에 그 의외라는 생각은 순식간에 얼굴을 돌려 역시라는 단어로 바뀌어 버렸다. 쫀쫀한 드래곤 같으니라구.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한번 들어볼까? 무슨 급한 일이기에 남의 집에 함부로 처들어 와서는 물건까지 부수고 난리를 부린 건지. 자, 이야기해 봐. 내가 아주 잘 들어 줄 테니까.”

퍽이나 잘 들어 줄 태도다. 느긋하게 몸을 의자 깊이 묻고서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은 정원에 경치 감상하기 위해 나온 귀족 아가씨의 모습이다. 거기에 저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는 보고 있는 이드로 하여금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게…

‘라미아. 네가 이야기해. 내가 말하면 듣지도 않고 한 귀로 흘려 버리지 싶다.’

이드는 라미아에게 설명을 넘기고는 카르네르엘과 마찬가지로 의자 깊이 몸을 묻으며 찻잔을 들었다. 라미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언뜻 보면 무슨 동네 꼬마들 심술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하기사 첫 만남 때부터 은근히 그런 기운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드의 사정을 듣고 이드를 드래곤으로서 인정한 카르네르엘과 대화 도중에 은근히 그녀를 놀리기까지 했었던 이드였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정말 동네 꼬마들 간의 심술일지도. 라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이야기 거리들을 하나 둘 꺼내 놓았다. 지금 현재 전 세계에 출연하고 있는 몬스터들, 특히 그 선봉을 서고 있는 보통의 몬스터로는 보기 힘든 벼락 오우거라던가 사람 이상의 지능을 가진 듯한 바질리스크에 대한 일과 제이나노가 받은 리포제투스의 신탁의 내용. 또 이유 없이 하나의 도시를 뒤집어 버린 블루 드래곤에 관한 일. 그리고 카르네르엘 본인이 너비스 마을에서 했었던 예언과 비슷한 이상한 말에 대한 것까지. 카르네르엘은 그런 라미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블루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약간 관심을 보이며 몇 가지를 물었을 뿐이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모습에 확실히 그녀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죠?”

“으음… 이 녀석 맛은 별로지만 향은 정말 좋단 말야….”

엉뚱한 말이다. 카르네르엘은 라미아의 물음에 전혀 상관없는 말로 대답하고 나왔다. 하지만 라미아도 이드도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석에 대한 것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찻잔을 향한 눈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음… 하지만 역시 창고 안에 있던 게 더 좋았는데…”

…. 어쩌면 단순한 심술일지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주는 건 쉬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막 그녀에게 답을 재촉하려던 라미아와 이드는 카르네르엘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건이라면? 이미 보석에 대해서는 보상해 준다고 했잖아요.”

이드의 말에 카르네르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그 모습은 어려 보이는 외모와 어울려 투정 부리는 소녀처럼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핏, 내가 지금 농담하는 줄 알아? 내 조건은 지금부터 들을 이야기를 인간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 지켜 준다면 내가 이야기해 줄게.”

그거야 어렵지 않다. 이미 이번에 파리에 갔다 오면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끼어들지 않기로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카르네르엘에게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걸 전해 주기 위해 나갈 것도 아니고, 행여 급한 일로 나가게 된다 해도 말해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이미 최대한 이번 일에 영향을 주지 않기로 생각하고 있는 두 사람인 것이다.

“약속해요. 절대 우리만 알고 있도록 할게요. 자, 그럼 이야기해 줘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르네르엘은 그 대답에 자세를 바로 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우리들 드래곤들뿐이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애매모호한, 신관에게나 내려 주는 그런 신탁이 아니라 자세한 설명을 들었지. 물론 직접 들은 것은 로드뿐이지만, 우리 모두 그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어.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인간들과 유사인간 족들을 공격하는 건 신의 농간이야. 신이라 불리는 그들이 꾸민 일이란 거지.”

“….. 신?!?!”

이드와 라미아가 동시에 되물었다.

“그래. 신. 이번 일은 신이 주관한 일이야. 너희도 보면 알겠지만 지금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혹여 마왕이라도 나오지 않는 다음엔 말이야.”

“신이라니…”

“그들이 로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번 일에 대해 미리 알려 왔어.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 기간 동안 함부로 나서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 그들도 신이란 이름에 걸맞은 존재이긴 하지만, 중간계에서 우리들 드래곤이 미치는 힘 또한 결코 그들이 무시할 정도가 아니거든. 우리들 중 엉뚱한 생각으로 나서는 존재가 있다면 혹여라도 그들의 일이 잘못 틀어질 수가 있으니까.”

확실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중간계에서의 드래곤이란 존재는 신도 악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만약 드래곤이 작정하고 그들의 일을 방해하고 나서자고 한다면, 그들의 일 중에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럼 너비스에서 나온 이유도… 신의 부탁 때문에?”

신의 개입이란 말에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라미아가 카르네르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그런 거지. 꼭 유희를 중단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중간에 유희를 그만둘 순 없어.’ 라고 외치며 유희를 계속하다가 어떻게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일찌감치 떨어져 있자는 거지. 몇십 년 이어질 일도 아니니까.”

이드는 별것 아니란 듯이 대답하는 카르네르엘에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몬스터를 날뛰게 하는 것이 조화와 균형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럼 몬스터를 움직이는 이유는요? 조화와 균형이란 말을 듣긴 했지만… 무엇에 균형을 맞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흐음… 그건 말이야. 쯧, 이건 인간의 입장에선 좀 듣기 고약한 말이거든…”

이드는 이 말이 자신을 의식한 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듣기엔 고약한 말. 확실히 카르네르엘은 자신을 드래곤으로서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인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뭔가 순수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많은 부분이 달라져 버렸다. 가장 큰 요인은 그레이드론이 자신의 머릿속에 남긴 것들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이 죽어 가는 일이 일어나도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면 덤덤하기만 했다.

“전 상관 말고 말해 봐요. 어차피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죽어 가도 나서지 않기로 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나서겠어요?”

그 말에 카르네르엘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차를 들었다.

“흥, 누가 너 때문에 말을 끊었다니? 착각은… 흠흠… 좌우간 지금의 세계는 신들이 생각하는 균형에 맞지 않아. 사실 내가 봐도 그 균형이란 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지. 지금의 인간이란 종족들과 몬스터, 그리고 여러 다른 종족들. 균형이라 바로 종족 간의 균형을 말하는 거야.”

카르네르엘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너희도 알지만 지금까지 봉인이란 장벽으로 인간들과 다른 여러 종족들은 따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쳐졌지. 하지만 여기엔 엄청난 차이가 있어. 따로 떨어져 있는 동안 몬스터와 유사 종족들은 숫자만 달라졌지 크게 달라진 점은 찾아볼 수 없어. 어느 정도 신의 손길이 닿아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했어. 신의 영향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과학이라는 무절제하고 파괴적인 엄청난 힘까지 손에 쥐고 있어.”

이드와 라미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세계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과학이란 이름의 기술 덕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사 종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몬스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이미 만나 보았던 엘프들, 인간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그들조차도 그레센의 엘프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 속에 마법과 정령의 초자연적이고 조화로운 힘은 존재하지만 인간들이 가진 차가운 철에 의한 과학의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인간들로부터 과학이란 것을 받아들이면 될 테지만, 조화와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의 특성상 크게 변화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확실히 비교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레센에서는 엘프들과 인간들의 생활이 크게 차이가 없었다. 아니, 몇몇의 경우엔 오히려 인간들이 못한 생활을 하는 상황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는 오히려 엘프들이 못한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뭐, 이런 결론이 인간의 시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엘프가 못하다는 것뿐이니 한 옆으로 치워 두더라도, 인간이란 종족과 다른 여타 종족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카르네르엘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 그럼 그렇게 엄청난 인구에 과학의 힘을 가진 인간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지금이야 몬스터에 익숙하지 않아서 사상자가 많이 나온다지만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서 과학으로 몬스터에 대응할 수 있고, 마법에 대해 연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후에 어떻게 될 것 같아?”

카르네르엘은 두 사람을 향해 질문을 던지듯 몸을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곧바로 카르네르엘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에 나서겠지.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멸종되거나 극소수만이 살아남게 될 거야.”

확실히 그럴 것이다. 인간이 몬스터를 물리칠 힘을 갖게 된다면 모든 몬스터를 몰아낼 것이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인류에게 위험하기만 한 존재들을 살려 둘 리가 없다. 아마 지구상에서 몬스터의 씨가 마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이미 산과 들에 살던 맹수들이 지금은 보기 힘든 희귀 동물이 되어 버린 상황으로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다.

“또 이 종족들도 배척될지 몰라. 어쩌면 노예처럼 생활하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 세상에 노예가 없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인간이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존재. 특히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과 집착은 대단하잖아?”

이드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인간을 사고파는 게 인간이란 종족이다. 지금도 사람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범들이 있다고 들었다. 또 그렇게 납치된 사람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 나간다. 헌데 보통의 인간들보다 월등히 아름다운 엘프들을 그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까? 그 문제에선 고개가 저절로 저어진다. 그레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곳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레센이건 지구건 간에 살고 있는 인간은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엘프들이 당하고만 있진 않겠지만,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일은 꼭 엘프에 해당하는 일만은 아닐 거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많은 종족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겠지. 자, 그럼 이 상황에서 신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들이 보기엔 인간이나 여타 이 종족, 몬스터들이 그저 중간계에 사는 똑같은 생물일 뿐이란 점을 기억하고 생각해 봐.”

무슨 일인지 확실히 이해가 됐다.

“이미 결과가 보이는 일이니 애초에 그 싹을…. 아니, 그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이드는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더 이상 인간의 일에 관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르네르엘의 말 중에 틀린 말이 없기에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은 과학의 힘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파괴와 살인을 주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뭐… 그런 거지. 누가 보더라도 지금 인간들이 가진 힘은 너무 크거든. 그것이 물질적인 면뿐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때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를 생각하던 라미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번에 바질리스크가 인간을 천적이라고 말한 게…”

“그래. 신들의 농간이지. 쉽잖아. 일부러 지시할 필요도 없어. 몬스터들. 그중에 특히 그 능력이 뛰어난 상급이나 특급 몬스터들에게 약간의 힘과 함께 머릿속에 ‘인간은 적이다!’ 라는 확실한 생각만 주입해 주면 끝나는 일이니까. 더 이상 간섭하지 않더라도 몬스터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확실히 신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몬스터 역시 그들의 창조물. 조금만 간섭하면 쉬운 일일 것이다. 이드는 푸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카르네르엘의 말 중 틀린 게 없었다. 이드도 인정하는 부분들이었다.

“… 꼭 이렇게 해야 돼요?”

“다름 아닌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야. 그들로서는 가장 좋다고 선택한 것일 테고. 또,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거든. 인간들이 가진 지금의 문명은 몬스터나 여타 종족들이 따라가기 힘들어.”

카르네르엘은 이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비웠다. 두 사람이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모두 다 했다는 뜻이었다.

이드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신들의 결정에 의해 인간들이 죽어 간다는 것에 대한 반감도 일었고, 종족 간의 균형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결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편으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일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은 잠시였다. 이미 이번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상관하지 않는다. 이드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는 위에 떠올랐던 잡념들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생각들은 라미아에게도 흘러 들어갔고, 라미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 라미아의 표정엔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귀여워하던 디엔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카르네르엘은 두 사람의 그런 생각을 대충이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인간에 대한 첫 유희를 나갔던 너비스 마을에 결계를 쳐 주었다. 그것이 이드와 라미아와는 다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쓴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썰렁해져 버린 분위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슬쩍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꿔 줄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럼 궁금해하던 것도 다 풀렸으니… 어때. 이번 기회에 다른 드래곤을 만나보는 건? 내가 저번에 소개해 준다고 했었잖아.”

“카르네르엘… 말고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겠어? 모두 다는 아니지만 꽤 많은 수의 드래곤이 로드의 레어에 모여 있거든. 이번 일도 있고, 이 세계를 돌아본 의견도 나누기 위해서 모였지… 만, 실제로는 수다 떠는 자리지. 이미 너희들에 대한 것도 내가 말해 놨어. 덕분에 내가 다른 드래곤들의 주목을 좀 받았지. 모두들 한번 보고 싶어 하는데…”

이드는 그녀의 말에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별로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드는 라미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후 카르네르엘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고맙긴 하지만 지금은 별로… 다음에 시간 되면 그때 만나 보도록 할게요.”

“칫, 마음대로 해. 애써 신경 써 줬더니… 흥이다.”

이드의 거절에 그녀는 뾰로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모습에 마주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어에 들어온 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 문득 떠오른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가볼게요. 시간도 오래된 것 같고… 또 기다리는 사람도 있거든요.”

“마음대로 해. 올 때도 내 허락 같은 것 없이도 잘… 자, 잠깐만!”

퉁명스레 대답하던 카르네르엘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라미아가 뒤져 봤던 두 개의 문 중 보물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이어 뭔가 무너지는 듯 와장창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가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오는 카르네르엘의 손에는 그녀의 얼굴 만한 크기의 투명하고 깨끗한 수정구가 들려져 있었다.

“받아.”

뭔가 하고 바라보고 있던 이드는 망설임 없이 훌쩍 던져 올려진 수정구를 얼결에 받아들었다. 수정구는 그 크기와는 다르게 너무 가벼웠다.

“이건…”

“연락용 수정구야. 다음에 볼일 있으면 그걸로 불러. 괜히 쳐들어와서 남의 물건 부수지 말고.”

“에헷, 고마워요.”

“고맙긴… 다 내 레어의 안전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참, 부서진 보석에 대한 배상은? 언제 해 줄 거야?”

막 몸을 돌리려던 이드는 그 말에 라미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알기로 자신들에게 보물이 있긴 하지만 카르네르엘에게 건네줄 정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모든 경제권은 라미아가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미아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찻잔이 놓인 탁자 위에 한 아름 조금 못 되는 보석을 자신의 아공간에서 쏟아냈다.

“… 모자라잖아.”

확실히 보석에 대해서는 드워프 이상의 전문가라는 드래곤다웠다. 한번 쓱 쳐다 본 것만으로 보석의 가치와 양을 정확하게 계산해 버린 것이다.

“나머진 다음에 줄게요. 다음에…”

방긋 웃으며 말하는 라미아의 말에 카르네르엘은 조금 찝찝한 느낌을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의 보석을 내놓고 다음에 준다는데, 지금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쩨쩨한 드래곤밖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나머지는 다음에 받기로 하고 나가자!”

카르네르엘은 그 말과 함께 외부로 통하는 동굴로 걸어갔다. 생각도 못한 그녀의 행동에 이드와 라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을까. 앞으로 걸어가던 카르네르엘은 날카로운 눈으로 이드와 라미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냐? 너희들이 들어오면서 마법을 해제해 버렸잖아. 또 하나는 부숴 버렸고. 다시 설치해야지. 그리고 로드의 레어에 있다 날아온 거니 다시 가 봐야지. 여기 혼자 남아서 뭐 하게. 빨리 따라 나와.”

“네….”

다다다 쏘아지는 그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가만히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마법의 복구는 간단했다. 마법 생물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드래곤이 나서서 하는 일이니 오죽하겠는가. 순식간에 동굴 가운데 있던 마법을 복구시킨 카르네르엘들은 동굴 입구 부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 참. 한 가지 깜빡하고 이야기 안 한 게 있는데.”

입구를 봉인해 두는 마법을 걸고 있던 카르네르엘은 마법을 시전하다 말고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전해 들은 이야기 중에 마지막에 나온 이야기인데 말이야. 이번 일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었어.”

“변수라구요?”

“응. 잘못하면 이번 일이 신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었어. 삐딱선을 탈 거란 말이지.”

잠시 후 레어의 입구가 완전히 봉해지고 카르네르엘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드와 라미아 역시 다시 산을 올라 소풍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이미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그 자리에 은백색의 빛을 뿌리는 달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카르네르엘의 얼굴을 볼 일이 아니면, 벤네비스에 올라오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은은한 달빛에 물든 산길을 이드와 라미아는 감상하듯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카르네르엘의 이야기로 좋지 않았던 표정은 어느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은은하고도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만약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을 것 같았다. 다만…

“취익… 이, 인간… 멈춰라… 취익…”

이 소리만 없었다면 말이다. 오랜만에 이드와 좋은 분위기에 취해 있던 라미아의 손이 조용하고 무섭게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손 앞으로는 붉은 빛 한 줄기가 돌아다니며 하나의 마법진을 완성해 내고 있었다.

콰콰콰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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