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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29화


“흠, 군은 잠시 좀 빠져주겠나? 난 여기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여기 아가씨와 일행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건 일행이 끼어들 일이 아니지 않아?”

이드는 눈앞에서 한껏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사내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꽤나 잘 차려 입은 옷차림에 허리에 매달려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롱소드. 거기다 볼만하다 싶은 얼굴을 가진 20대 초반의 사내. 디엔이 이드와 라미아가 떠난 후 딱 한 번밖에 본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길래 오랜만에 시내 구경이나 시켜 주려 나섰던 세 사람이었는데, 눈앞의 이 인물이 복도 한가운데서 자신들을 막아선 것이다. 아, 정확하겐 라미아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그리고서 한다는 말이 ‘오~ 이렇게 아름다운 여신의 미소를 가진 아름다운 레이디는 제 평생 처음이군요. 잠시 제게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를…’이라는 아주 옛스러운 멋이 풍기는 느끼한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물론 라미아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거절을 해 버렸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마치 그레센의 귀족을 보는 듯해서 직접 나섰다가 위와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파리 가디언 본부에 있는 가디언들과 용병들이라면 자신들을 모를 리 없을 테고, 이런 일을 하지도 않을 텐데…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주위의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의 눈엔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긴 데 대한 기대감만이 반짝일 뿐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의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사 매일 일에만 시달리는 그들에게 이런 구경거리가 어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아~ 전부 다 루칼트 같은 사람들이야.’

이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앞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조금 질겨 보이는 이런 사람에겐 뭔가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게 확실하다.

“죄송하지만 계속 끼어들어야겠네요. 아쉽게도 전 라미아의 일행이 아니라 영혼의 반려자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다. 라미아라면 죽어서까지 이드의 소유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대충은 예상했다는 모습이다. 그에 반해 옆에 서 있는 라미아의 입가로는 방글방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드는 그 미소에 이번에 자신이 한 말로 또 어떤 장난을 걸어 올지 슬그머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의 반려라… 후훗… 그게 어때서? 결혼을 했다는 말도 아니지 않아?”

이드는 그 말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을 보기보다 질긴 녀석이다.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물러나야 정상 아닌가?

“말귀가 어두운 것 같군요. 그 말 뜻을 모르는 건가요?”

“훗, 그런 말뿐인 약속이야 언제든 깨지는 것 아닌가. 또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라고. 내 이름은 엔케르트 파시. 너에게 라미아 양을 건 결투를 신청한다.”

“아?”

이드는 이어지는 그의 황당한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어눌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뿐 아니었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대부분의 가디언들과 용병들이 이드와 같은 반응을 보이거나 키득거리며 엔케르트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를 향해 그 뜻이 애매모호한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엔케르트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지 자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사나이라면 당연히 응할 거라고 생각한다. 라미아 양 당신께 내 용기를 바치겠고. 자, 모두 수련실로 갑시다. 모두 이번 결투의 증인이 되어 주시오.”

그 말과 함께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수련실로 걸어가 버렸다. 이드는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며칠간 이곳에 머무를 텐데 그때마다 저 이상한 남자를 피해 다닐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이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런 이드의 옆으로는 뭔가 재밌는지 라미아가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구경거리를 위해 수련실로 몰려가는 사람들 중 선한 눈매를 가진 한 사람이 이드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것이었다.

“여~ 멋진 결투를 기대해도 되겠지? 이드 군.”

“아, 틸. 한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드의 뒤를 이어 라미아와 디엔이 틸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틸은 상당히 좋아 보이네요. 다른 가디언들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던데…”

확실히 그랬다. 다른 가디언들과는 달리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에 생동감 넘치는 얼굴이 피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드의 말에 틸은 씨익 웃어 보이며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당연하지. 싸우고 싶은 만큼 싸울 수 있는데. 피곤이라니… 나는 오히려 환영이라구.”

이드는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렇죠. 틸이 밥보다 싸움을 좋아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하하하… 그렇지. 밥보다 더 좋아하지. 그런데… 재밌는 녀석한테 걸렸더군.”

틸은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수련실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틸의 얼굴엔 재밌는 구경거리에 대한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이드는 그 미소를 외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주위에 있던 가디언들과 용병들은 모두 수련실로 달려갔는지 주위엔 이드 일행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저는 별로 재미없어요. 그런데 저 사람 누구예요? 상당히 정신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여기에 도망 온 높으신 자리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란다.”

“도망이요?”

라미아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래. 정확하게는 피난이라고 해야 되나? 아니… 도망이 더 정확한 말이려나? 너희들도 밖에 몰려와 있는 사람들 봤으면 알겠지만 파리에 있는 사람들 중 꽤나 많은 수가 여기 가디언 본부 근처로 피난 와 있는 실정이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꽤나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 쪽에서도 그런 사람들까지 무시하진 못하거든. 가디언의 힘이 강하다고는 해도 정부와 완전히 손을 놓고 지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좌우간 그런 식으로 본부에 들어와 있는 녀석이 꽤 있어. 저 놈도 그 중 한 녀석인데… 쩝, 어디서 배웠는지 약간의 검술을 배우고 있더라고… 꼴에 실력은 좋아서 가디언들과의 대련에서도 몇 번 이긴 경험이 있지. 그때 상대한 가디언들이 피곤해서 대충 상대한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야. 덕분에 가디언이라면 아무리 예뻐도 쉽게 말도 못 걸 놈이 기세등등해서 너한테 싸움을 건 거지.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네가 저 녀석 군기를 확실하게 잡아 봐. 그렇지 않아도 누가 나서긴 나서서 저 놈을 떡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거든.”

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바라보기만 하던 가디언 본부 식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그 일을 맡기려고 일부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겁니까?”

“… 오랜만에 좋은 구경거리잖냐.”

이드는 그 말과 함께 멋쩍게 씨익 웃어 보이는 틸의 모습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수련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련실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 주요 원인인 엔케르트에 대한 분노가 슬금슬금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련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많은 가디언과 용병들이 이드가 다가오자 자연스레 길을 열어 주었다. 수련실 안에선 엔케르트가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서 있다 이드가 들어오자 자세를 풀었다.

“좋아. 용기가 있군. 도망가지 않고 결투를 응한 걸 보면 말이야.”

‘결투 좋아하네… 여긴 네 버릇 고쳐 줄 훈련소야.’ 이드는 시끄럽게 뭐라고 떠들어 대는 엔케르트의 말을 다 흘려 버리고서 양손에 암암리에 공력을 약간씩 실어 보냈다. 첫 인상부터 좋지 않았던 상대라 가볍게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몸속을 두드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며칠간 고생 좀 하겠지.

‘…잘하면 너비스로 돌아갈 때까지 보지 않을 수 있을지도.’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이드의 양손에 모여 있던 내력의 양이 저절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오랫동안 눕혀 놓고 싶은 이드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드의 행동을 전혀 알지 못하는 엔케르트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드를 부르고 있었다.

“자, 와 봐. 어디서 들어 보니까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에게 세 번의 공격할 기회를 준다던데… 기회를 주지 어디 한번 때려 봐.”

엔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쫙 펴 보였다. 마치 맞아 줄 테니 때려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엔케르트를 제외하고 이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저게 죽으려고 악을 쓰는구나.’ 좋아, 내가 세 대 정도는 확실하게 때려 주지. 이드는 사용하려던 내가중수법을 풀고 주먹을 단단히 쥐고서 엔케르트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직 이드와 주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좋죠. 그럼…”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어서 엔케르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내뻗었다. 그 주먹의 속도는 결코 빠른 것이 아니었다. 엔케르트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먹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저런 주먹이라니. 그는 이드가 매직 가디언이거나 스피릿 가디언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훗, 그런 솜주먹… 내가 세 번 다 맞아 주…’ 하지만 그게 그의 생각의 끝이었다. 천천히 움직인 주먹에서 날 소리가 아닌 터엉! 이라는 소리와 함께 엔케르트의 몸이 붕 하고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사고 능력은 그대로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 이드는 허공에 뜬 엔케르트의 몸에 두 번의 주먹질을 더 가해 주었다. 덕분에 엔케르트의 몸이 수련실의 한쪽 벽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이드였다. 부운귀령보로 튕겨 나가는 엔케르트의 몸을 따라잡은 이드는 내가중수법의 수법을 머금은 손바닥을 엔케르트의 가슴 위에 슬쩍 올렸다가 그대로 아래쪽으로 내려꽂아 버렸다.

쿠우웅

날아가던 엔케르트의 몸은 수련실 내부로 은은한 충격음을 발하며 사지를 활개 친 모양으로 수련실 내에 뻗어 버렸다. 그런 그의 눈은 어느새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풀려 있었다. 일순간에 연달아 가해진 강렬한 충격에 혼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자기가 뿌린 씨앗. 불쌍할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이드는 한쪽에서 짝짝짝 박수를 치고 있는 디엔의 손을 잡고서 라미아와 함께 수련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수련실 안은 조용했다. 이드는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에 한쪽 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순간, 수련실 안으로 환호성이 흘러 넘쳤다. 오래 끌지는 않았지만 속 시원하게 손을 잘 썼다는 내용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아 확실히 좋은 씨앗을 뿌려 놓지는 못한 놈인 것 같았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엔케르트는 이드의 바람대로 아직 일행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상도 내상이지만 네 대를 연이어 얻어맞고 기절해 버린 것이 창피해서 쉽게 나오진 못할 것 같았다. 좌우간 그 일 이후로 조용히 디엔과 놀아 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헌데 그런 엔케르트와 더불어 제로와 몬스터 놈들도 조용하기만 하다. 보통 때는 며칠 간격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고 하더니, 어째 자신과 라미아가 기다린다 싶으면 잠잠한 것인지. 이드는 뻐근한 몸에 크게 기지개를 펴며 내심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끄으응~ 이거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또 저번처럼 되는 것 아니야?”

이드는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저번에도 그랬었다. 이드와 라미아가 그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을 때부터 저들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었다.

“헤에~ 설마요. 게다가 이번에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저희 쪽에서 직접 찾아가 보면 되죠. 저번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잖아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여기서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제로에게 함락된 도시 중 아직 제로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도시에 있는 제로의 대원을 만나보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 제로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때는 제로의 분위기상 찾아가서 묻는다고 쉽게 답해 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제로 쪽에 깊은 반감을 가지게 만들 뿐인 듯했다. 해서 이드와 라미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로 쪽에서 직접 움직이는 걸 기다렸다가 그들을 따라가려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변해 버렸다. 지금까지 조용하던 제로가 갑자기 몬스터를 돕는가 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제로라는 이름이 가진 명예를 무너트리듯 보호하고 있던 도시까지 몬스터에게 떡 하니 가져다 바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몇몇 제로의 대원들은 여전히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움직이는 것인지 예측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그 도시를 보호하고 있는 제로의 대원을 찾아가더라도 저번과는 상황이 다를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오엘에게서 연락이 왔었어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 뭐라고 연락이 왔는데? 하거스 씨들은 잘 있고?”

그 말에 라미아가 조금 굳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괜찮지만, 피렌셔 씨는… 한쪽 다리를 잃었대요.”

이드는 그 말에 가만히 피렌셔라는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기로 손바닥만 한 소검 열 자루를 현란하게 다루던 수수한 모습에 성격 좋은 사람이었다.

“치료는? 수술과 신성력이면 잘려 나간 다리도 충분히 소생시킬 수 있을 텐데.”

“몬스터 뱃속에 들어가 버린 후라서 어쩔 수 없었대요.”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망이 없다. 뱃속으로 잘려 나간 부위가 들어가는 직후 몬스터를 죽이고 뱃속을 갈라 다리를 꺼낸다면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몬스터를 잡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벌써 소화가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소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다. 그 많은 몬스터 중에 어떻게 그 한 마리를 찾아내겠는가.

“안됐군. 그럼 이제 가디언은 그만두는 거야?”

이번의 질문에는 라미아는 살짝 웃으며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의족을 달았대요. 게다가 마법으로 특수 처리한 덕분에 사람의 다리와 똑같이 움직인대요. 아직 뛰는 건 무리지만.”

사실 현대의 의학 분야는 마법과 신성력이 나타나면서 엄청나게 발전했다. 접합 수술의 경우도 다리를 접합하더라도 이어지는 여러 번의 수정을 위한 수술이 필요하지만 신성력으로 그것을 바로잡아 주면 끝나는 문제인 것이다. 의족이나 의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없을 때도 조금은 어색하지만 사람처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의족을 만들었었다. 거기에 마법이 더해지면서 더욱 사람의 다리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사용되는 영구 마법을 새겨야 한다는 점 때문에 극소수의, 피렌셔처럼 부상당한 가디언 정도만이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찌 되었든, 피렌셔에겐 잘된 일인 것이다. 이어서 이드는 라미아로부터 하레스들의 최근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설명들이 끝날 때쯤이었다.

탕! 탕! 탕!

마치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노크 소리 같지 않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가디언 본부에서 저렇게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을 이드와 라미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디엔 놀러 온 거니?”

라미아가 반갑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힌 디엔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라미아는 그 모습에 소매로 땀을 닦아 주며 디엔의 몸을 살폈다.

“이 땀 좀 봐. 디엔 너 뛰어왔지? 어디 넘어지진 않았니?”

이드는 호들갑을 떨어 대는 라미아의 모습에 쿠쿡 소리 죽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애 엄마 다 됐군. 좌우간 아이는 잘 키울 것…. 이익!… 내가 무슨 생각을…’

이드는 아무런 죄 없는 입을 가로막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런 모습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말이지만, 디엔으로 인해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라미아가 지금의 말을 듣게 된다면 뒷감당이 힘들어 진다. 더구나 두 사람으론 영혼으로 이어져 있는 사이. 이드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라미아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못 들은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드가 안도할 때였다.

“엄마가, 엄마가 빨리 누나하고 형하고 데려오래. 빨리! 빨리!”

디엔이 발을 동동 구르며 이드와 라미아를 재촉했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 이드와 라미아는 소리 내어 웃어 버렸고, 덕분에 뾰로통해진 디엔을 달래느라 세르네오의 사무실을 찾아가는 시간이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부른 지가 언젠데, 늦었잖아.”

들어서자마자 세르네오가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분위기와 사무실의 분위기 모두 상당히 어수선해 보였다.

“미안, 미안.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세르네오의 눈총을 웃음으로 넘기는 이드의 눈앞으로 한 장의 팩스 용지가 들이밀어졌다.

“너희들이 찾던 놈들이 이번엔 우리 나라에 들어온 모양이야.”

이드는 그 말에 종이를 받아 들며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라미아가 찾고 있던 것. 바로 제로가 아니던가.

“제로?”

“그래. 몽페랑에서 연락이 왔어.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몰려 들어온다고, 거기 적힌 건 몽페랑의 좌표야.”

과연 종이 위에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마 몽페랑의 어느 한 장소의 허공 오 미터쯤에 열리는 좌표겠지.

“그런데 넌 안 갈 거야?”

이드는 좌표를 라미아에게 넘겨주며 세르네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세르네오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간다고 크게 도움 될 것도 없잖아. 텔레포트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이곳에도 언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거든. 계속 지키고 있어야지. 지원은 몽페랑 주위에 있는 도시에서 나갈 거야.”

맞는 말이긴 했다. 또 몽페랑보다 더욱 큰 도시인 파리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그녀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어. 그럼 간다.”

“아, 그런데 가서 일보고 다시들 올 거야?”

이드는 그 말에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디엔의 머리를 쓰다듬던 라미아는 그 시선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세르네오에게 대답해 주었다.

“아마… 다시 돌아오진 않을 거야. 이번에 제로에 대해서 일을 다 본 후에 다시 너비스로 돌아갈 생각이거든. 몬스터와의 전투가 다 끝난 후에 나올 생각이야. 내가 준 스코롤 아직 있지? 뭔가 일이 생기면 그걸로 연락하고, 제이나노와 페트리샤 언니한테 바빠서 인사 못했다고 대신 전해 줘. 그리고 디엔… 누나하고 형하고 다음에 다시 올게.”

이드와 라미아는 말을 마친 후 바로 사무실을 나서며 수련장 쪽으로 걸어갔다. 텔레포트를 위해서였다. 보통 때 같으면 본부 밖으로 나가서 텔레포트를 하겠지만 밖에 깔린 구경꾼들 때문에 본부 안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드와 라미아는 몇 명의 가디언들과 용병들에게 다시 한번 구경거리를 제공하고는 가디언 본부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후우~ 엄청나군.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아.”

“저렇게 많은 인원이 싸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이드와 라미아는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피비린내에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 두 사람은 몽페랑 내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르네오가 건네준 텔레포트 좌표의 바로 이 옥상의 5미터 허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텔레포트가 끝남과 동시에 불어온 강한 바람에 옥상에 발도 못 디디고 10층의 건물 아래로 떨어질 뻔한 위기를 넘긴 두 사람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저 멀리 보이는 치열한 전장이었다. 일전 파리의 전투에서도 보았던 군인들과 그 군인들이 다루는 여러 가지 굉음을 내는 무기들. 그리고 그 사이로 마법과 검을 휘두르고 있는 가디언들과 용병과 그에 맞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다양하고 수많은 몬스터 대군.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허공으로 붉고 푸른 피가 솟구치고, 푸르던 대지는 붉게 물들어 비릿하게 변해 갔다. 멀리서 보는 그런 전장의 모습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인간들끼리의 전투도 난장판이긴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했다. 원래가 대열이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사실 이드는 전투가 시작되어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세르네오의 호출을 받고 이곳에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때문이었다. 파리로 전해진 소식은 당연히 몽페랑이 멀리서 다가오는 몬스터의 군대를 보고 연락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몬스터가 몽페랑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얼추 계산해 봐도 전투 전일 테고, 라미아와 이드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인 그때에 슬쩍 스며들어 제로의 인물들만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인다는 것이 전투가 시작돼도 한참 전에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난장판의 전장이라니.

“하아~”

전장을 바라본 지 십여 분이 흘렀을까. 이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었다. 또 가슴 한쪽이 돌을 올려놓은 듯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 이 모든 것이 신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고, 좀 더 좋은 환경과 균형을 위한 일이란 것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로 인해 전투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생각한 이드였었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던 것이다. 특히 몬스터에 의해 사람들이 산 채로 갈갈이 찢겨 나가는 모습을 볼라치면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몬스터 쪽에서 생각해보면 그게 또 아니기도 하고… 하아… 이드의 입에서는 다시 한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불편하시면 전투가 끝날 때까지 다른 곳에 피해 있을까요?”

라미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영혼으로 연결된 그녀인 만큼 이드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기로 했잖아. 좀 더 두고 보자.”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라미아는 그대로 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로서는 피와 광기만이 있는 전장보다는 이드를 바라보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전장엔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하늘이 조용한 덕분에 지상의 싸움만 확인하면 되었는데, 전체적인 전황을 따진다면 인간들 쪽이 약간 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저렇게 하루나 이틀 정도를 싸우면서 지원이 없다면 아마 지는 쪽은 인간이 될 것이다. 물론, 몬스터들의 피해 역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저 총과 로켓포, 폭약 등이 모두 사용된다면… 거의 공멸에 가까운 결과가 예측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상황을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중간에 지원이 있다면 변화가 있겠지만 그때까지 있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이드는 확인하듯 전장을 다시 한번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라미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언제 챙겨 둔 건지 모를 책을 꺼내 옥상 난간에 기대 읽고 있었다.

“일어나, 라미아. 빨리 우리 일 보고 여길 떠나자.”

그 말에 라미아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전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는데… 제로 측 사람을 만날 방법이라도 생각나신 거예요?”

이드는 그 말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장의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야. 아까부터 계속 살펴봤는데, 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 그중에 여덟 명 정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 제로의 사람들 같은데… 아마 여기 있는 제로 측 대원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일 거야.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서 만나보면 될 것 같지 않아?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한참 앞이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라미아는 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처음 제로의 사람들을 만나려던 때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그럼 저 위로 이동할까요?”

“그래. 전장을 지나가면서 시선을 끌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이드의 말에 라미아는 다시 한번 이동할 위치를 확인하고는 이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몬스터 무리 속에 떨어질 것이기에 이드 곁에 붙어 있으려는 생각이었다. 이드 역시 같은 생각인지 라미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물론 목적이 있어서 안은 것이지만… 전장을 앞두고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전장과 너무나 대비되어 보였다. 한쪽은 피를 흘리는 전장이고, 한쪽은 서로를 감싸 안고서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미남, 미녀라니 말이다.

“이번에도 5미터 허공이에요. 텔레포트!!”

캐스팅도 없이 이어진 라미아의 시동어에 두 사람 주위로 강렬한 섬광이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하지만 전투에 한참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 건물 옥상의 빛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아아앗!!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의 한 구석. 그곳의 허공에 마법의 작용에 의한 빛이 하나 가득 모여들어 주위의 눈길을 피하게 만들었다. 요 이주간 살이 쪽 빠져 버린 제로의 존 폴켄, 존은 허공에서 일어나는 빛에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 경계했다. 그 빛이 마법사의 공격 마법이 아닌 이동 마법, 그것도 텔레포트라는 고위 마법에 의해 일어나는 빛이란 것을 아는 때문이었다.

“모두 경계하도록. 뭔가가… 나올 테니까.”

그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제로의 대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주로 연금술을 다루는 존에겐 마법이나 검과 같은 공격 능력이 없는 때문이었다. 그 뒤를 이어 존의 손이 몬스터들을 향해 몇 번 움직이자 제로의 대원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몬스터들이 빛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존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몬스터가 자신의 명령을 이렇게 잘 듣다니… 존은 빛이 강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 빛이 순간 강렬해졌다 바람에 꺼져 버린 성냥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빛을 대신해 그 자리를 대신해 커다란 하나의 그림자. 아니, 그건 하나가 아닌 서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많이도 모였구나.”

이드는 자신들이 내려설 조그마한 자리 주위로 모여 있는 2, 30마리의 몬스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텔레포트와 함께 생겨나는 빛을 보고 모여든 녀석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모습들이었다.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운룡대팔식을 운용해 자신과 라미아의 몸을 바로 세운 이드는 자유로운 나머지 손을 앞으로 뻗어 내며 빙글 하고 한 바퀴를 회전했다. 그렇게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이드가 회전한 길을 따라 부드럽지만 항거할 수 없는 그런 음유(陰柳)한 경력(經力)이 몬스터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그 알 수 없는 힘에 몬스터들은 한껏 당황하며 뒤로 주춤주춤 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쿠어어?

몬스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그 무엇도 없는데 버티지도 못하고 스스로 걸어서 밀려나가다니. 몬스터들이 당황하는 사이 이드는 그 자리에서 한번 더 회전을 시도했고, 그에 따라 몬스터들은 처음 자신들이 서 있던 자리까지 밀려가 버리고 말았다.

“태극만상(太極萬象) 만상대유기(萬象大柳氣)!!”

몬스터가 충분히 물러섰다고 생각되자 몬스터를 밀어내던 기운은 몬스터 사이를 스쳐 대기 중으로 녹아들며 사라져 버렸다. 큰 기운을 다스리는데 좋은 태극만상공의 운용에 따른 효능이었다. 강제하는 힘이라기보다는 얼르는 힘을 가진 기운이었다. 하지만 물러선 몬스터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리는 없는 일. 이드는 급히 제로의 대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몬스터들의 접근을 미뤄 주세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싸움은 원치 않아요.”

그 말에 뭐라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알아듣긴 한 모양이었다. 뒤로 물러난 몬스터들이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이드는 허리를 안고 있던 라미아를 풀어 준 후 한쪽에 모여서 있는 제로의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모두 제로가 강시를 처음 사용하며 파리를 공격했을 때 봤던 사람들이었다.

‘그럼 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이드는 뭔가를 짐작할 때였다. 제로의 대원들 사이로 대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들어냈다.

“여기서 자네를 다시 보는군. 오랜만이야.”

“그렇네요.”

이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내심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저 존이란 남자와는 전에 이야기해 본 경험이 있는 때문이었다.

“그래, 자네도 가디언으로서 싸우러 온 건가? 자네가 왔다면 몽페랑에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이야기군.”

존은 이드의 등 뒤로 보이는 몽페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이 전투를 이끌고 있는 존재 중 하나인 만큼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아니요. 앞서 말했듯이 할 말이 있어서 이리 온 겁니다.”

“하하하… 처음에 만날 때도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그런 건가?”

존은 홀쭉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말을 해 보란 듯 이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궁금하기에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런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질문엔 대답해 줄 생각이 있었다. 눈앞의 소년은 룬의 나이를 듣고도 말하지 말라는 부탁에 말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만, 제로의 단장인 넬을 만나고 싶은데요.”

갑작스런 제로의 움직임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고 있던 일. 이드는 라미아와 자신이 제로와 만나기를 원하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말에 존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버렸다.

“… 그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물어도 괜찮겠나?”

“그녀에게 물어볼 게 있거든요. 그녀가 들고 있는 검에 대해서…”

“그렇담 더욱 안 될 것 같군. 단장님은 단장님의 검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른 걸 물어보게.”

존은 더 이상 제로의 단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거북했는지 이야기를 바꾸었다. 이드도 그의 뜻대로 질문 내용을 바꾸었다. 다그친다고 될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제로가 몬스터와 같이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분명 한 달 전에 존 씨가 절대 몬스터와는 상관없다고 목숨 걸고 맹세를 했잖아요?”

“당연하지. 분명 한 달 전에는 몬스터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같이 움직이고 있지. 이렇게 하는 게 단장님의 뜻이었고, 또 하늘의 뜻이니까.”

이드는 당당히 대답하는 존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마치 제로라는 단체가 종교 단체처럼 느껴졌다. 여신을 받드는 신흥 종교.

‘단장의 뜻이 하늘의 뜻이라니. 그럼 제로를 이끄는 열네 소녀가 성녀(聖女)란 말이게?’

이드는 갑자기 광신도로 보이는 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넬 단장이 뭐 때문에 몬스터와 같이 인간을 공격하느냐고요. 처음에 제로가 움직였던 건 정부에 이용당한 능력자들을 위해서라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몬스터와 함께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궁금한데요.”

그 말에 존이 얼굴을 굳혔다. 그런 그의 얼굴은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게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지. 지금부터 듣는 말. 비밀로 해 주겠나? 단장님의 나이를 들었을 때처럼.”

이드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존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하늘의 뜻이네. 자네는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또 그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결연한 의지를 담은 채 말을 이어 나가는 존의 말에 이드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존이 하고 있는 말. 그것은 이미 카르네르엘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거의 똑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신이 드래곤에게만 전해 준 내용을 저들이 알고 있는 거지? 이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제야 앞서 존이 어째서 하늘의 뜻이란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어진 존의 말들은 전체적으로 카르네르엘이 말해 준 내용과 똑같았다. 거기에 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하늘의 뜻일지라도, 또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라도 같은 인간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우리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세워진 물건들을 부수고 있지. 과학이란 것이 남아 있어 보았자 몬스터와의 전쟁만 길어지고, 또 언젠가 재앙이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나타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확실히 말된다.

‘확실히 말은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글쎄요. 어떤 정신 나간 드래곤이 술 마시고 소문을 낸 것 아닐까요?’

왠지 상당히 가능성 있게 들리는 건 왜일까?

‘좌우간 브리트니스도 브리트니스지만, 그 넬이란 소녀도 꼭 만나 봐야겠는걸요.’

‘그래야겠지.’

이드는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동의를 표하고는 다시 존을 바라보았다. 이드의 시선에 잡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넬의 의견을 믿는다는. 아마 살이 빠진 이유도 같은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을 했던 때문인 것 같았다.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실제 존은 그것을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었던 것이다.

“잘 들었습니다. 비밀은 확실히 지키도록 하지요. 그런데… 다시 한번 부탁드리는데, 넬 단장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 정말 내 말을 믿는 건가?”

존은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의심했던 말을 바로 믿는다고 하다니. 이드는 그의 말에 금방 답을 하지 못하고 미소로 답했다. 드래곤에게 먼저 그 사실에 대해 들었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믿어야죠. 지금 저렇게 몬스터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넬 단장을 만나 볼 수 없을까요?”

그 말에 존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은 만나기 어렵다는 말보다는 만날 수 없다는 듯한 표현처럼 느껴졌다.

“먼저 말과 같네. 내가 정할 일이 아니야. 또 이런 시기에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확실히 몬스터 편에 서 있는 지금의 제로를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 도시를 지키고 있는 제로의 분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순간 그 질문을 받은 존은 상당히 지쳤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까 자네에게 그 말을 믿느냐고 물었었지? 그 이유는 우리 제로의 대원들 중에서도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네. 또 믿는다고 해도 같은 인간이란 생각으로 몬스터 편에 들지 못한 대원들이 있지. 그런 대원들은 그냥 도시에 그대로 남아서 도시를 보호하고 있다네. 우리 역시 그들을 강제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 응?”

우와아아아악!!!!

엄청난 비명 소리였다. 전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이렇게 생생하게 들려올 비명 소리라니. 존의 설명을 듣던 이드와 라미아는 물론이고, 제로의 모든 대원들까지 비명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비명의 근원지를 확인한 순간. 몇몇의 대원들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도 끔찍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한가운데 땅에서 튀어나온 기형의 몬스터. 거대한 두더지와 같은 모습의 몬스터였는데 그 앞의 머리 전체가 입으로 꽃봉우리처럼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의 안으로는 마치 송곳니 같은 이빨 같지 않은 날카로운 것들이 수없이 돋아나 있었는데, 그 사이로 사람을 씹어 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한 번에 삼키는 것이 아니라 입 전체를 벌렸다 닫았다 하는 덕분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점점 찢겨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생생히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너무 잔인하고 공포스런 그 모습에 몇몇의 군인들은 뒤로 돌아 도망을 가 버렸고, 많은 수의 군인들이 그 자리에 엎드려 그대로 속의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이드 역시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이드의 몸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앞으로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미 이드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의 세 사람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미 검을 나눠 본 적이 있는 단과 그의 사제인 미카, 그리고 파리에서 문옥련과 싸웠었던 켈렌 맥로걸이란 이름의 여성 마검사였다. 이드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제로의 대원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들이 막아 설 줄은 몰랐다. 이들 역시 아까의 장면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가.

“뭐죠?”

“미안하지만 이곳의 전투에 관여할 거라면 보내 줄 수 없네.”

단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엔 그의 도가 새파란 예기를 발하며 뽑혀져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드의 실력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감시 태만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막겠다는 건가요?”

“우리도 지금은 싸우고 있는 몬스터 군단의 일부니까. 자네가 나선다면 커다란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한데 그냥 보내 줄 수야 없지 않겠나. 물론 나도 저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단장이 명령한 일이라서 말이네.”

단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언뜻 비쳐 보이는 투지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이번을 기회로 다시 한번 검을 나눠 보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한 모양이었다.

이드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맞긴 했다. 또 나서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저 모습을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게릴라전을 연상케 하듯 땅을 뚫고 나와 사람을 집어삼키는 몬스터라니… 이 전투에 크게 관여해서 몬스터를 몰아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저기 저 두더지 같이 생긴, 그레이드론의 머릿속에도 없는 저 녀석들만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다.

“라미아.”

이드는 가만히 라미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미아는 이미 이드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여서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하아~ 어쩔 수 없네요.”

따로 말이 필요 없었다. 라미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아공간으로부터 일라이저를 꺼내 이드에게 건넨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드가 싸움을 끝내는 동안 하늘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실제 그 자리에 그냥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라미아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드가 별로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하늘로 몸을 피한 것이다.

“조심하셔야 돼요.”

이드는 그 말을 하고 날아오르는 라미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일라이저를 뽑아 들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몬스터를 그냥 두고 갈 생각도 없었다.

‘속전속결!’ 이드의 생각과 동시에 일라이저의 검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디붉은 검강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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