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35화
“그럼… 실례를 좀 하기로 할까나!”
“상대는 강하다. 모두 조심해!”
페인은 이제껏 자신들의 공격을 받아치지도 않고 유유히 잘만 피해 다니던 이드가 검을 뽑아 드는 모습에 이드를 포위하고 있는 단원들을 염려하며 소리쳤다. 이드를 제외하고도 은발의 소녀가 허공중에 떠 있긴 하지만, 그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녀가 이드에게 매달려 있던 것처럼 별달리 손을 쓰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룬을 위해서였다. 이드와 라미아의 나이에 비례할 실력을 계산하고, 자신들의 수와 실력을 믿고서, 그녀의 명예에 해가 될지 모를 사실을 퍼트릴 상대를 제거할 목적으로 검을 빼 들었던 것이다. 헌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런 뜻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최선을 다한 공격은 상대의 옷자락도 건들지 못한 것이다. 지금 현재 이렇게 검을 들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스스로 패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 상대의 전력을 확실하게 잘 못 본 것이 실수였다. 상대의 실력은 나이에 비해 절대적으로 반비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의 단원들. 그들까지 공격에 가담한다면 어떻게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가 남았던 것이다.
“모두… 틈만 있으면 어디서든 찔러 넣어랏!”
페인은 그렇게 외치며 허공에 검기를 내 뿌렸다. 다시 한번 공격의 맥을 잡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페인의 행동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름 아니라, 이드의 검에 모든 검기가 철저히 와해되어 버린 때문이었다. 이미 제로들을 쓰러트리기로 생각을 굳힌 이드로서는 공격의 흐름을 상대편에 넘겨줄 생각이 없어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붉게 물든 일라이져의 검신이 화려하게 허공중에 아름다운 꽃잎들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페인의 공격이 막혀 멈칫한 그 짧은 순간에 제로들의 사이사이로 붉은 꽃잎들이 흩뿌려진 것이다. 일라이져라는 꽃 봉우리에서 뿌려진 꽃잎들은 마치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순식간에 제로의 단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막아!!”
페인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갑작스럽고 생각도 못 했던 방식의 공격에 일순 반응할 순간을 놓쳐 코앞에까지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지만, 그 공격을 그대로 두드려 맞을 생각은 절대 없었다. 거기다 붉은 꽃잎과 같은 검기의 위력이 절대 약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페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모든 제로의 단원들이 검기를 피해서 몸을 피하거나 검기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런 제로들의 모습에 검기를 뿜어대던 이드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 올랐다.
“그렇게… 쉬운 공격이 아니라구. 난화육식(亂花六式) 분영화(分影花)는….”
마치 바둑을 두는 상대에게 훈수를 하듯 말을 잇던 이드는 흘려내던 검초와 내력의 운용에 아주 미세한 변화를 가했다. 난화십이식 제육식 분영화의 핵심 요결인 층영(層影)의 묘리였다.
살랑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꽃잎은 그 작은 움직임과 동시에 한,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분영화를 맞받아 치려는 제로 단원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헛손질을 하는 단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들은 여지 없이 분영화의 검기에 혈도를 제압당하고는 그대로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분영화의 초식에 쓰러진 것은 열 명하고도 두 명밖에 더 되지 않는 수였다. 나머지는 그들의 모습에 검기를 피하거나 스스로의 검기를 넓게 퍼트려 분영화와 부딪혀 왔기 때문이었다. 그 분영화의 일 초를 시작으로 일방적인 공격과 일방적인 방어만으로 이루어진 전투가 시작되었다. 화려하면서도 다양하다 못해 생각도 못 했던 방법으로 검기를 사용하는 이드의 공격과 검기, 마법, 염력으로 방어에 힘쓰는 제로의 단원들과 페인들 세 사람 사이의 전투. 그렇게 20분 가량에 걸쳐 치러진 전투는 제로 쪽에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허락하고는 제로 측의 완벽한 패배로 끝이 나 버렸다. 애초에 전투력의 질이 달랐던 것이다. 그 모습에 허공중에 편하게 누워 구경하고 있던 라미아가 연무장에 홀로 서 있는 이드 옆으로 내려서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이드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두 눕혀 버리셨네요.”
그녀의 말대로 이드를 중심으로 80여 명이 넘던 제로의 단원들이 모두 연무장 바닥에 편하게 쓰러져 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몸엔 전혀 혈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옷이 찢어지거나 퍼렇게 멍든 사람은 있지만 말이다. 모두 이드가 혈도만을 찾아 제압한 때문이었다. 또 전투가 20분 동안 계속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몸이 다치지 않은 대신 너무 간단하게 쓰러진 것에 대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은 때문인지 제로의 단원들은 다시 한번 이드에게 쓰러지는 악몽을 꾸는 듯 끙끙대고 있었다. 특히 이드에게 가장 많은 공격을 퍼부었지만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했던 페인의 얼굴은 한순간도 펴질 줄을 몰랐다. 이드는 그 모습을 슬쩍 돌아본 후 라미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혹여라도 누가 크게 다치면 이야기하기 껄끄럽잖아. 거기다 이 사람들이 다치면 이 도시를 방어하는 것도 힘들어질 테니까. 그리고 피를 흘리지 않다니. 넌 저 사람들만 보이고 난 안 보이냐? 여기 피 난 거?”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대뜸 팔뚝의 한 부분을 라미아 앞으로 내밀었다. 그 팔뚝의 한 부분엔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의 아주 작은 상처와 함께 희미한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도저히 상처라고 말해 주기 힘든 정도의 상처였다. 한 마디로 장난이란 말이다. 라미아는 그 모습에 피식 김빠진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 호~ 해 드려요?”
“뭐… 그래 주면 고맙지.”
잠시 후 라미아로부터 치료(?)를 받은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정령과 마법를 사용하여 제멋대로 쓰러져 있는 제로의 단원들을 연무장 한쪽으로 정리했다. 해혈을 했지만 점혈의 강도가 지나치게 강했는지 깨어나는 사람이 없어서 취한 행동이었다.
촤아아악
“히에에엑…. 뭐, 뭐냐. 푸푸풋… 어떤 놈이 물을 뿌린 거야… 어떤… 놈이…”
차갑지도 못해 얼얼할 정도의 냉기를 품은 물세례에 한창 꿈나라를 헤매던 페인은 기겁을 해서 벌떡 일어나며 아직 잠에 취해 흐릿한 눈으로 물을 뿌린 상대 찾아 사방으로 살기를 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퓨와 데스티스의 모습에 살기를 거두어야 했고, 그 뒤로 소파에 앉아 킥킥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에 말까지 어물거리고 말았다. 기절하기 전까지 죽이기 위해 싸우던 상대에게 이런 꼴을 보였으니 평소 체면 같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로서도 창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페인은 창피함을 피해보려는 듯 괜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퓨와 데스티스를 향해 상황 설명을 해 달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이드는 물에 빠진 생쥐 마냥 흠뻑 젖은 페인을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전투 때와는 달리 이렇게 보는 페인은 상당히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깨어나기 전의 상황을 생각했다. 이드에 의해 단체로 낮잠 시간을 가지게 된 제로 단원들은 잠든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 둘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깨어나며 이드와 라미아를 확인한 그들은 한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곧 뭔가를 생각했는지 두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자신들의 몸을 추슬렀다. 아니, 경계를 풀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목숨이 이드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드와 다투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난 후에야 퓨와 데스티스가 깨어났다. 그들이 강했던 만큼 점혈의 강도가 강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인만은 모든 사람들이 깨어난 후에도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데스티스가 염력을 이용해 건물 안으로 옮겼고, 그를 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던 중 최후의 수단으로 퓨가 마법으로 얼음물을 뿌려 깨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드가 몇 분 전의 상황까지 생각했을 때 페인이 데스티스에게 받아 든 수건으로 흠뻑 젖은 몸을 닦아 내며 이드와 라미아가 앉아 있는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우선… 나를 포함한 모두를 살려 주어서 고맙다.”
페인은 그 말과 함께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를 따라 퓨와 데스티스도 고개를 숙였다. 죽이려 했던 자신들을 살려 준 이드에게 이외에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 자신들이 먼저 공격을 하고서도 이렇게 목숨을 건졌으니 말이다. 거기다 룬의 명예를 위해 검을 빼 들긴 했지만, 서로 간에 직접적인 원한이 있어 싸운 것이 아닌 만큼 페인들이 이드에게 고개를 숙이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바꿀 가능성도 없이 일방적인 이드의 승리로 끝이 나 있는 상태였던 때문이기도 했다. 이드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별로. 저 역시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죠. 더구나 아직 더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구요. 사실 저희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뭐, 싸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말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들이 검을 들고 싸웠던 이유가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특히 룬에 대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데스티스의 얼굴엔 뭔가 굳은 결의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 이야기라면 더 할 말이 없군요. 당신이 우리를 살려 준 것은 고마우나 룬 님에 대해 뭔가를 알아내고자 하거나 좋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요. 또 다시 당신과 싸우고, 이번엔 죽게 된다 하더라도…”
데스티스의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실내에 흘렀다. 그녀의 말에 페인과 퓨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동의를 표했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에 이드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좀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해 볼까 하는 생각에 무혈로 제압한 것이지만, 저렇게 나온다면 좋은 분위기는 고사하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힘들 것 같아 보였다. 그때 라미아가 그런 이드를 대신해 입을 열고 나섰다.
“저기요. 서로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희는 그 룬 양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단지 저희가 찾는 물건에 대해 알아보려 할 뿐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요? 우.연.이지만 두 사람이 찾고 있는 물건을 룬 님이 가지고 계세요. 이 상황에서 뭘 더 말할 수 있겠어요?”
데스티스가 라미아의 말을 받았다. 거기에 우연이란 말을 써서 룬이 의도적으로 남의 물건을 쓰고 있지 않다고, 지금 룬이 쓰고 있는 검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것이 아니란 것을 주장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알뜰하게 룬을 챙기는 데스티스였다.
“그렇죠. 우연히, 정말 우연히 저희가 찾고 있는 검을 룬 양이 가지고 있을 뿐이죠.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희가 아는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이거든요. 도둑맞거나 한 물건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오해라고 말한 거예요. 단지 물건을 찾고 있는 것 때문에 공격이라니… 이건 저희들보다 그쪽의 문제인 것 같은데요. 혹시 룬 양이 저희가 찾고 있는 검. 브리트니스를 룬 양이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한 그쪽의 문제 말이에요.”
라미아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슬쩍 데스티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데스티스는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눈이 마주친 사람처럼 흠칫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퓨와 페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라미아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떠오른 표정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들이 룬을 불신한 것이고, 자신들이 지레짐작하여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룬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끔찍이 생각하는 데스티스는 다름 아닌 스스로가 룬에게 죄를 씌우고, 의심한 것이란 사실에 고개를 들 생각을 못 하고서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세 사람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룬이 하고 있는 일. 즉 몬스터 편에 서서 인간을 몰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 이 세 사람에게 상당히 좋지 못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그 느낌이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은근히 룬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드의 말을 들은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페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데스티스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자책에 빠진 그녀로서는 지금 대화를 끌어갈 수 없다 생각한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레 짐작한… 우리들 잘못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한다.”
“뭐… 이미 지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에게 크게 위협이 된 것도 아니고… 대신 아까도 말했지만 브리트니스와 룬 양에 대해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냈으면 좋겠는데요. 그렇죠. 이드 님?”
저 말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라미아는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는 그녀의 모습에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페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아. 라미아 말대로 저희들이 바라는 건 처음에 말했던 것과 같이 룬 양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말이라도 다시 전해 주세요. 정말 브리트니스의 주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번 만나길 원한다고. 검이 이곳에 왔듯이 검을 아는 사람도 이곳에 왔을 수도 있다고 말이죠. 해 주시겠습니까?”
“바로 전해 주겠네. 룬 님도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실 테니까.”
페인은 그렇게 말하며 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다시 다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드가 슬쩍 말을 끌자 페인과 퓨가 시선을 모았다.
“이번에도 며칠간 기다려야 하나요? 좀 오래 걸리는 것 같던데.”
그 말에 페인이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퓨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받은 퓨가 바로 방에서 나가자 페인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연결이 될 거야. 그때는 우리가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거니까. 이쪽에서 연락을 하고자 하면 언제든지 가능하지. 룬 님은 우리를 잊은 게 아니니까 말이야.”
페인은 그렇게 말을 하며 큰 죄를 지은 양 고개를 숙인 데스티스의 어깨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