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77화
“대단하시군.”
이드는 옆에 앉아있던 바하잔의 조용한 혼잣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이드의 물음에 바하잔은 웃는 얼굴로 이드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말에 대한 설명을 했다.
“저분, 크레비츠 저분은 여기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거지. 물론 그 덕에 건방진 백작 한 명까지 같이 날아갔고 말이야. 만약 그냥 나타나셔서 자신의 주장을 펴셨다면 대신들이 반신반의하며 완전히 따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저렇게 강하게 모든 대신들과 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시킴으로써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하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린 거지. 아마 이제부터 저분의 발언권은 거의 황제 때와 맞먹겠지.”
이드는 바하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 꿇고 있는 대신들을 자리로 돌려보내는 크레비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접대실에서 보았던 부드러운 얼굴이 아닌 상당히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탕하기만 하신 줄 알았더니, 역시 나이가 있으신가 봐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고 말예요.”
“훗, 나이만큼의 노련함이지.”
크레비츠의 말에 따라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파고 백작은 자작으로 강등당한 뒤 좌천되고 회의실에서 쫓겨났다.
여황의 할아버지이자 선 황제인 크레비츠가 명하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거기다 그만한 죄를 지었으니 목이 달아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좌중이 진정되고 크레비츠도 자신의 자리에 앉자 여황이 대신들을 바라보며 본론에 들어갔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바로 회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오갔던 아나크렌과의 동맹에 관한 것입니다.”
여황의 말이 있고 나자 갈색 머리의 50대 중반의 남자가 이견을 표했다.
“폐하, 그것은 차후 결정하기로 한 문제가 아니옵니까.”
“그렇습니다. 하이츠 후작, 하지만 의견을 나눈 결과 사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황의 말에 대신들이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크레비츠는 그 모습에 다시 이야기하려는 여황을 말리고는 자신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적, 카논의 전력을 어떻게 보는가?”
대신들은 크레비츠의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웅성거리더니 코레인이 대답했다.
“카논에서 소드 마스터들을 만들어 낸다고는 하나 어차피 한 달 정도면 그 힘을 잃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며 방어 위주로 싸워나간다면 저희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사려되옵니다.”
그 말에 주위의 대신들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크레비츠가 풋 하고 웃어버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멈추고는 크레비츠를 바라보았다.
“자네, 소드 마스터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벨레포 백작 등이 공격당했다는 그 여섯 혼돈의 파편을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은 생각해 봤나?”
크레비츠의 말에 코레인은 뭐라고 답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소드 마스터들뿐이다.
소드 마스터라면 피해가 있더라도 시간을 끌며 버티면 승산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벨레포가 보고한 그 여섯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벨레포들을 통해 듣기는 했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괴물이 존재한다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괴물과 맞선 바하잔과 어린 용병이라니…
만약 바하잔과 자리가 회의실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꾸며낸 이야기라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전혀 전력이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자네들도 오전에 있었던 회의로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그레이트 실버급의 검사 두 사람이 싸워 평수를 이루었다. 자네들, 그래이트 실버급의 실력이나 전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나 아는 것이 있나?”
이번에도 좌중은 침묵할 뿐이다. 직접 그래이트 실버를 본 적도 없는데다가 두 명 있었다는 그래이트 실버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이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자신이 그래이트 실버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는 한 그래이트 실버인지 소드 마스터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하다.
“나 역시 그래이트 실버다. 나 한 사람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하지만 좌중의 사람들은 몇몇을 제하고는 크레비츠의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크레비츠가 그래이트 실버라는데 먼저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두 명 있었다는 그래이트 실버, 물론 조용히 살았던 사람 중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알려지기는 두 명이다. 그런데 현재에 와서는 크레비츠까지 합해 그래이트 실버가 세 명이나 눈앞에 나타나니 말이다.
“수만이다. 시간은 좀 걸릴 수도 있지만 치고 빠지는 식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가 수만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래이트 실버가 두 명이 덤벼 평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 여섯이 존재한다. 자네들 아직까지 자신 있나? 그들과 소드 마스터들이 같이 쳐들어온다면, 그때도 시간을 끌어 보겠나?”
“그, 그것은…”
코레인 공작을 시작으로 대신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레비츠의 말은 설마 설마했고 별로 믿고 싶지 않던 말이었던 것이다. 크레비츠는 조용히 가라앉아 버린 대신들을 바라보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직, 아나크렌과의 동맹을 두고 보자는 의견이 있나?”
크레비츠의 말에 뭐라고 의견을 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코레인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크레비츠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크레비츠 전하의 현명하신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음, 그럼 지금 당장 아나크렌으로 마법통신을 연결해라. 이미 아나크렌도 그리고 본국도 카논과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서둘러야 한다.”
이드는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어 마법통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바하잔에게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말 대단한 연륜에 노련함이시네요. 순식간에 상황을 끝내버리고 아나크렌과의 통신이라니.”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덕분에 내가 여기 온 일도 수월하게 이루겠군.”
“그런데 아나크렌으로 가셨다는 분, 그분은 어떻게 되신 거죠? 만약 성공하셨으면 아나크렌에서 먼저 연락이 있었을 텐데.”
이드의 말에 바하잔의 얼굴이 조금 걱정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좀 늦어지는 모양이지. 어쨌든 차레브 그 사람도 실력은 대단하니까 말이야…”
이드가 바하잔의 모습에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였다. 밖으로부터 커다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사 공작님께 지급이옵니다.”
그 말에 몇몇의 귀족과 함께 케이사 공작이 고개를 돌렸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은 긴급한 회의 중이다. 나중에 다시 오라 하라.”
하지만 꽤나 급한 일인 듯 밖으로부터 다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급한 상황이라 하옵니다.”
기사의 말에 케이사 공작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여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하라. 케이사 공작, 급한 일이라 하니 먼저 일을 보세요.”
“황공하옵니다. 폐하.”
케이사가 여황의 배려에 고개를 숙일 때 크레움의 한쪽 문이 열리며 뛰다시피 들어선 것은 얼굴에 땀을 가득 매달고 있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모습에 케이사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섰다.
“마르트, 무슨 일이냐. 궁까지 찾아오다니. 그것도 씨크가 오지 않고 왜…”
공작의 말에 마르트라는 젊은 청년은 급한 듯 다른 말도 없이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워낙 급한 일이다 보니.”
마르트의 당황하고 긴장하는 모습에 공작도 그제서야 얼굴을 조금 굳혔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저렇게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저택에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마르트의 말에 코레움 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돌려졌다. 수도 내에 있는 공작가에 침입자라니. 결코 그냥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영지 하나의 폭동과 맞먹는 정도의 일인 것이다.
“침입자라니, 소상히 설명해라.”
“그, 그것이 몇 십 분 전에 저택의 정문으로 갈색 머리에 무표정한 인상을 가진 20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와서 한다는 말이 딸을 데려가려고 왔다고….”
마르트의 말에 장내에 인물 중 이드와 벨레포, 그리고 바하잔이 동시에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에 병사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몰아내려고 하던 중에 그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헌데… 상대가 너무도 강한지라 저택에 있는 병사들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고, 아버님과 저택에 머물고 계시던 용병분들과 기사분들이 상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든 듯 하여 제가 마법진을 이용해서 급히 달려온 것이옵니다.”
마르트의 말에 장내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한 제국의 공작가라면 그 곳을 방어하고 지키는 병사들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이 한 사람을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병사들뿐 아니라 공작의 저택에 머물고 있던 기사들과 용병들까지 가세한 상태에서 밀리고 있다고 하니, 거기다가 상대는 젊은 청년이라는 말에 그 정체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인 것 같지요?”
“그렇겠지. 내가 제국 내에서 받은 보고 대로라면 자네들이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아이를 인질로 삼았다고 했으니까, 헌데 여자가 아니고 누군가 했더니 딸이었구만, 그 나이에 딸이라니 참 빨리도 결혼한 모양이야.”
“참 태평하시네요. 공격당하고 있다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드의 얼굴에도 별다른 긴장감 없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앞쪽 테이블에서 케이사와 같이 앉아 딱딱하게 굳어 있는 벨레포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훗, 그러는 자네는 왜 웃고 있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하는 바하잔의 모습에 이드는 씩 웃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똑같은 것이었다. 별일 없다는 것. 저택에는 저번에 인질로 잡아두었던 소녀가 있다. 아마 처음에는 적을 몰랐기에 당했겠지만 가이스 등이 알아보고 소녀를 다시 한번 인질로 내세우고 시간을 끌 것이다. 물론 프로카스가 마음먹고 빼앗으려 들면 조금 위험하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봐야 되겠어요.”
이드가 케이사 공작과 벨레포 등이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제야 바하잔이 고개를 돌렸다.
“혼자? 보고 받기로 꽤나 당했다고 하던데. 소문으로 듣기에도 나와 비슷한 실력인 것 같았고 말이야.”
“걱정 없어요. 저번에 당한 것은 제 몸이 좋지 않아서였고, 아마 이번에는 별로 싸울 것 같지도 않아요.”
이드는 자신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바하잔을 바라보며 씩 웃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크렌과 통신해서 잘되지 않으면, 제 이름을 한 번 거론해 보세요. 저도 바하잔 씨와 같은 생각이라고요.”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지?”
“선이 좀 다아 있죠.”
웃는 얼굴로 바하잔을 슬쩍 바라본 이드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공작에게로 걸어갔다. 덕분에 공작과 마르트에게 몰려 있던 좌중의 시선들이 의아함을 담은 채 이드에게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가 크레비츠들과 같이 들어왔으니, 크레비츠와도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막 여황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려던 공작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드를 보고 의아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인가. 이드군?”
이드는 의아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과 그 뒤에 있는 벨레포를 한번 바라보고는 그에게 답했다.
“예, 저택 일은 제가 보았으면 합니다.”
“왜 자네가?”
이드의 말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공작과는 달리 그의 뒤에 서 있는 벨레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 침입한 자와 안면이 있습니다. 수도로 오는 도중 약간의 충돌이 있었죠. 벨레포 백작님께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드의 말에 공작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벨레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벨레포가 그런 공작에게 대답했다.
“그때 말씀 드린 굉장한 실력의 용병입니다. 저희가 인질을 잡고 있는.”
“음. 들었지. 하지만 내가 듣기로 그때 자네 혼자서 힘들었다고 들었네 만…”
공작의 말에 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헷, 그때는 제가 몸 상태가 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싸울 일도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저 혼자 가보겠습니다. 공작님은 여기서 일을 보시지요.”
옆에 있던 벨레포도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그런 벨레포의 표정에는 이드의 말이 뭔지 알겠다는 투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공작님. 이미 인질이 저희들 손에 있고, 수도에서 보자고 하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같이 가보겠습니다.”
이드는 벨레포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저 혼자서도 충분하고 저택에는 기사분들과 용병분들이 계시니 여기 일을 보세요.”
하지만 벨레포가 자신의 말에 대꾸도 않고 공작만을 바라보자 이드도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은 벨레포까지 그렇게 나오자 조금 굳은 얼굴로 이드와 벨레포를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황을 바라보았다.
“폐하…”
공작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고개를 숙이자 여황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택으로 가보도록 하세요.”
“감사하옵니다.”
여황의 허락에 공작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때 여황의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크레비츠가 이드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농담이라도 건네듯 말을 건넸다.
“이드, 웬만하면 그 용병. 내가 고용하고 싶은데. 알아봐 주겠나?”
이드는 농담처럼 건네는 크레비츠의 말에 웃음을 뛰어 올렸다. 크레비츠의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적이 강한 때는 하나의 실력자라도 필요한 때인 것이다. 그런 중에 굉장한 실력의 용병이라니, 잡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처음에는 공격했든 말았든 상관없었다. 원한 관계도 아니고 그것이 용병의 일,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가. 물론 ‘그’의 경우에는 돈이 아니지만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죠. 큰 전력이 될 것 같아요.”
여러 대신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크레비츠에게 말하는 투가 전혀 바뀌지 않은 이드였다. 물론 이런 이드의 말투에 몇몇 귀족이 분노하는 기세였으나 크레비츠가 웃는 얼굴이기에 누가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크레비츠가 저렇게 웃고 있고 말을 한 소년인지 소녀인지 조금 헷갈리는 소년도 웃고 있으니 괜히 나섰다가는 오히려 망신만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기대하지.”
“예, 그럼.”
이드는 크레비츠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벨레포와 함께 미르트를 앞장세운 채 코레움을 나섰다. 이곳 궁에는 제국의 세 공작 가와 통하는 텔레포트 플래이스가 설치되어 있다. 궁의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궁의 정면 방향으로의 세 곳이다. 이렇게 떨어뜨려 놓은 이유는 만약 하나의 텔레포트 플레이스를 두 곳의 공작 가에서 동시에 사용하게 될 경우 두 사람이 텔레포트의 아웃 지점에서 만나 공간 분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더 불어 세 속의 텔레포트 플레이스는 각각의 공작 가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다. 벨레포와 이드는 그 텔레포트 플레이스 중 케이사 공작 가와 연결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 어쩔 생각인가?”
벨레포가 앞에서 거의 뛰어가듯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미르트를 여유 있게 뒤따르며 이드에게 물었다.
“뭐가요?”
“크레비츠님께 그를 고용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에게 있는 소녀를 다시 인질로 삼거나 돌려준다면 전투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용은 어려울 텐데.”
이드는 벨레포의 말에 뭔가 있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이미 포석을 깔아 놓았거든요. 저번에 본 그의 성격대로라면 제가 고용하겠다고 하면 거절 못할걸요.”
“포석?”
벨레포가 궁금한 듯이 이드를 바라보았으나 이드는 벌써 말해주기 싫은 듯이 입가에 미소만 띄어놓을 뿐이었다. 그런 이드와 벨레포 앞으로 이드가 텔레포트 해왔던 정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기럴, 니미럴, 얼어죽을, 젠장할, 으……..”
“제발 좀 조용히 못해?”
가이스의 눈 째림에 10살 가량의 소녀를 품에 안고 있던 타키난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욕지기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키난들은 현재 앞에 서있는 갈색머리의 냉막한 얼굴의 청년 프로카스와 지루한 대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하십시오. 가이스양. 지금은 저조차도 초조하거든요.”
토레스의 말에 타키난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저 앞에 서있는 프로카스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실력을 본 적이 있기에 한순간이나마 눈을 땐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상상이 가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 말투는 날 무시하는 거야?”
“흥분 잘하는 건 사실이잖아?”
타키난의 느긋하게 대답하는 토레스의 말을 들으며 이빨을 갈았으나 현재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전방에서 맨몸으로 편히 서있는 프로카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타키난의 시선에 들어온 프로카스는 자신들이 서있는 곳으로부터 30미터 정도 지점. 그의 뒤로는 쓰러져 있는 공작 가의 병사들과 엉거주춤하게 프로카스의 뒤를 막아서고 있는 몇몇의 병사들이 보일 뿐이었다.
사실 프로카스가 저곳에 정지한 것도 지아가 서둘러 인질을 데리고 온 덕이지 좀만 행동이 굼떴어도 타키난들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아이가 인질이었는지는 몰랐어.”
토레스가 타키난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소녀를 보며 말했다. 소녀는 지아에게 안겨 나올 때부터 슬립(sleep) 마법이 걸려 잠든 상태였다.
인질이라고는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아이에게 별로 좋은 기억거리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취한 조치이고 어쩔 수 없이 인질로 잡기는 했지만 이런 장면은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기사들 때문이었다. 또 아이가 쓸데없는 반항을 하다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쳇, 그럼 이 아이가 용병인 줄 알았나?”
“메이라 아가씨가 돌보는 아이인 줄 알았다.”
토레스와 타키난 두 사람이 중얼거리자 그들의 옆에 서있던 가이스가 눈을 흘겼다.
“좀 조용히 하지 못해? 지금이 수다 떨 정도로 한가한 땐 줄 알아?”
“하… 하지만 이 녀석이 먼저… 젠장. 움직인다.”
가이스의 눈 째림에 가히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하던 타키난은 바짝 긴장하며 아이의 목에 대고 있던 단검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가이스들도 마찬가지였다. 편히 팔짱을 낀 채 서있던 프로카스가 팔짱을 풀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각자 내려놓았던 검을 세워 들었다.
“어이, 어이. 비싼 용병 아저씨. 이 아이 안 보여?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지. 안 그래?”
타키난이 긴장을 완화해 보려는 듯 저번과 같은 장난스런 말을 내뱉었으나 프로카스는 타키난에겐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일행들의 뒤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어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그의 입이 들썩이며 높낮이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희들에겐 관심 없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난다면 이 저택뿐 아니라 이 나라를 상대로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프로카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두 가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먼저 그의 실력을 본 적이 있는 타키난과 가이스들은 그가 정말 제국을 상대로 싸울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국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토레스 등 프로카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이 주는 황당함에 말을 잊지 못했다.
사람들을 공황 상태까지 몰고 간 말을 한 프로카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오랜만이다. 소년.”
그리고 그에 답하는 많이 들어본 목소리에 타키난 등은 프로카스도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네, 오랜만이네요.”
타키난 등의 고개가 돌려진 저택의 현관에는 이드와 벨레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