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79화
“예.”
이드는 이번에도 간단히 대답만 하는 프로카스를 보며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가 저 딱딱함은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라엘의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을 완전히 남의 일 대하듯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저런 성격의 인물과 함께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이드였다.
“그런데 크레비츠님은 궁에 계시지 않으시고… 무슨 다른 일이 있으신가 보죠?”
이드는 괜히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화제를 바꾸어 크레비츠를 향해 궁금해했던 점을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곳까지 특별히 올 이유가 없었다.
물론 조금 예측불허의 털털한 성격이라 단정지을 순 없지만, 다른 대신들에게도 이미 전전대의 황제라는 것을 알렸기에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이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케이사 공작들과 함께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으니…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꽤나 된다.
바로 아래층 거실에서 아직 멍하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가이스들.
처음 이드와 가이스들이 있는 거실로 들어온 크레비츠가 이드와 꽤나 편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이스와 토레스들도 편하게 말을 걸었었다.
헌데 잠시 후 들어선 케이사 공작이 크레비츠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다물었고, 이어 케이사 공작이 말해주는 크레비츠의 프로필이 주는 충격에 완전히 굳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다니는 곳마다 파란을 일으키는 크레비츠가 이드의 말에 방금까지 띄우고 있던 여유로움이 담긴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급한 일이지. 그리고 꽤나 중요한 일이기도 해서 내가 직접 온 것이라네.”
이드는 꽤나 진지한 크레비츠의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 케이사 공작과 바하잔 등의 얼굴을 살피고는 다시 크레비츠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모두의 얼굴에 꽤 급한 일이다라고 써 붙이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드는 모두의 모습에 요즘 들어서는 잘 굴리지 않았던 머리를 잠깐 굴려 보았다.
“아나크렌? 그쪽 일인가 보죠?”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크레비츠가 네크널을 향해 고개짓 했다.
아마 설명을 하라는 듯했다.
그런 크레비츠의 눈길을 알아들었는지 네크널은 간단한 결과 말과 함께 이드와 벨레포가 나가고 난 다음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나크렌과의 동맹은 아무런 문제없이 아주 간단하게 통과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이어진 대화에 있었단다.
크레움의 중앙에 조각된 석검의 손잡이 부에 붙어있는 수정을 중심으로 공중에 떠 있는 아홉 명의 영상.
그중에서도 20대의 청년을 제외한 일곱 명의 중늙은이들 사이에 앉아있는 소년.
방금 전 여황의 말에 적극 찬성을 표한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단순한 옷(옷감은 최고급이다.)을 걸친 아나크렌의 소년 황제 크라인.
그가 방금 전과는 달리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나머지 일곱의 인물들을 바라보고는 여황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귀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동맹국으로서 귀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본래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예(禮)가 아니나 본국의 사정이 상당히 시급합니다.”
그러자 크레움 내에 좌정하고 있던 대신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본래 저러한 요청은 절차를 밟아 사신을 보내어 서로의 체면을 생각해가며 하는 것이었다.
특히 저처럼 황제가 직접 나서는 것은 동맹을 맺은 양국 간의 전력 차이나 국력이 확연한 차를 보일 때나 가능한 일.
라일론 제국과 맞먹는 국력을 가진 아나크렌에서 황제가 라일론의 모든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체면도 생각지 않고 도움을 청한다면 그것은 보통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여황과 대신들로서는 소년 황제 크라인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의 보고에 의하면 아나크렌과 카논의 전선에는 별다른 변동 사항이 없다는 것으로 보고받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요. 귀국 아나크렌과 본국은 동맹은 맺었습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한은 도와야겠지요. 그런데 귀국에서 도움을 청할 정도의 일이라 함은 무엇인가요?”
바하잔은 마치 귀부인 식의 말투에서 다시 한번 그녀의 이중성을 보고는 몸서리 쳤다.
어떻게 대외적인 것과 대내적인 모습이 저렇게 다른지…
“여황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럼 편히 말을 하지요. 사일 전, 아니 정확히는 오일 전입니다. 데카네에서 본국과 팽팽히 대치 중이던 카논 측에 몇몇의 인원이 합류했습니다. 약 사, 오십 명에 이르는 인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전투 때 보니 모두 소드 마스터들이더군요.”
여황과 코레움 내에 앉은 모든 대신들은 크라인의 말을 들으며 의아해했다.
자신들이 알기로 지금 말한 오십여 명의 인원이 합류하기 전까지 싸웠던 인원들도 모두 소드 마스터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드 마스터 오십 명을 더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전투의 상황이 역전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럼, 그 오십 명의 소드 마스터들 때문에 전투 상황이 좋지 않은 건가요?”
여황의 말에 크라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들이라 하나 모두 만들어진 인공적인 실력, 그들을 상대로 금방 밀리게 된다면… 귀국의 동맹국으로써 말을 꺼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본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등장한 소녀입니다. 15, 6세 정도의.”
“소녀라니요?”
여황이 모든 대신들을 대신해서 의문을 표하자 크라인이 고개를 돌려 늙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크라인의 눈짓을 받은 마법사가 자신들이 앉은 테이블의 한쪽을 건드리자 코레움 중앙의 검에 달린 보석이 빛을 내며 작은 영상을 만들어 나갔다.
마치 맑은 가을 하늘 같은 연한 푸른색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과 큰 눈, 그리고 발그스름한 작은 입술을 가진 163cm 정도의 소녀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머리카락 색에 맞춘 듯한 원피스 계통의 연한 푸른색 옷과 이미 그녀의 품에서 떠났어야 할 황갈색의 곰 인형이 귀여움을 한층 더했다.
하지만 꼭 안아주고픈 귀여운 모습과는 다른 곳이 한 곳 있었는데 바로 눈이었다.
원래 같으면 맑고 아무 걱정 없이 빛나야 할 갈색의 눈, 그 눈이 암울한 갈색의 빛을 띠며 깊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세상의 절망과 슬픔을 끌어안은 것처럼…
코레움 내의 모든 눈길이 소녀의 영상으로 모여들었다.
“이 아이, 이 소녀가 문제란 말인가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황의 말에 크라인은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땅을 가라앉히기를 시도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아~! 그렇습니다. 그 소녀가 문제입니다. 비록 귀여운 모습의 소녀이긴 하나 그 소녀가 가지는 힘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사일 전, 그러니까 그녀와 소드 마스터들이 도착한 다음날 그녀와 소드 마스터들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본진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는데 위력이 어마어마하더군요. 게다가 쓰는 마법 역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저희 측에서는 미처 손을 써보지도 못한 채 뒤로 밀려 어제로 해서 데카네 지역이 완전히 카논에게 넘어간 상태입니다.”
크라인이 힘없이 말을 끝맺자 여황과 대신들 모두가 조금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소녀의 영상을 시선에 담았다.
모두의 시선에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크라인의 말을 대입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이어 그 소녀에 대한 설명으로 주로 대지 계열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마법 주문이 꽤나 특이하다는 등의 설명을 듣던 여황이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런… 헌데 이상하군요. 제가 듣기로 귀국에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전사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카논과의 첫 전투에서 소드 마스터들을 날려버려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들었는데… 그도 진 것인가요?”
여황의 말에 크라인은 고개를 적게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그는… 그는 현재 본국에 없습니다. 얼마 전 카논 국이 벌여놓은 일을 처리하던 중 실종되었습니다. 강제 텔레포트 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군요. 후~ 우, 정말 그라도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말입니다.”
크라인의 말에 여황이 의아한 듯이 물었고 크라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크라인의 설명에 여황과 대신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근 두 달 전 카논과 아나크렌의 첫 전투에 대해서 보고받은 적이 있었다. 카논과 아나크렌의 심상찮은 대치에 라일론의 정보부인 바츄즈에서 활동하는 몇몇의 인원을 보내어 감시케 했었다.
덕분에 예상을 초월하는 카논의 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카논을 간단히 밀어붙여 버리는 아나크렌 측의 검사, 그 실력이 어떤지 보고하던 기사들이 바츄즈의 부장인 투카라나 후작 앞에서 거의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을 정도라고…
그런 검사가 강제 텔레포트로 실종이라니…
그래서 여황과 대신들은 귀를 기울였고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마치 죽었다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마, 만약, 카논에서 그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런 파괴력을 보고 나서 쉽게 공격할 수 있었을까?’
여황은 그런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데카네 지역, 아나크렌 제국의 1/15을 날려버리는 파괴력을 보고 난 후라면 쉽게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만약 그 위력으로 카논이 아나크렌을 삼키기라도 했다면?
왠지 그 일을 처리한 검사에게 고마운 생각이 드는 여황이었다.
하지만 실종되었다니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할아버지, 크레비츠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한 명의 강자가 아쉬운 때이기에 말이다.
“그럼 대량의 병력보다는 그 소녀를 상대할 실력자가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누구를 보낼 것인지는 그 자리에서 정하지 못했기에 크라인에게 정해지는 대로 연락을 하겠다고 말한 후 통신을 끝맺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의에서 누구를 보낼 건지를 상의할 때 저택에서 프로카스를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소식에 크레비츠가 이드와 프로카스를 보내자는 의견을 내건 것이었다.
“음, 그래서 그 이야기도 하고 여기 프로카스 씨도 보고 겸사겸사 오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레비츠에게 고개를 돌리자 크레비츠가 중년의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겸사겸사… 이 사람도 보고 일도 처리하고 겸사겸사 해서 말이야, 그래 어떤가? 자네들이 한번 가보겠는가? 가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 입 발린 소리지만 부담 가지지 말고 말해 보게 뭐, 부담 가질 자네들도 아니지만 말이야.”
이드는 크레비츠의 말에 씩 웃어 보이며 맞은편에 앉은 프로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은 어떤가 해서였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 저 아저씨 얼굴에 표정이 도는 때는 아라엘에 관한 일뿐이지. 아마 천지가 개벽을 해… 이건 아니다. 천지가 개벽하면 아라엘이 다칠 수도 있으니 이때는 얼굴이 표정이 돌겠군..쩝.’
이드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크레비츠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갈게요. 아나크렌에 아는 사람도 좀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번 가볼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꼬마라는 애. 맘에 걸리는데요.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소녀의 등장이라… 그들이겠죠?”
이드는 말을 끝맺으면서 바하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드의 시선을 받은 바하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도. 그런 전력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혼돈의 파편들이라는 존재. 아이라는 게 의외지만 거의 신화의 인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군.”
바하잔의 말을 크레비츠가 받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지. 카논 쪽에서 그 여섯 혼돈의 파편이란 자들을 전쟁에도 투입할 생각인 듯한데… 그래서 일부러 자네들만 보내는 거지. 만약 본국으로도 그 여섯 중 하나가 달려올 수 있으니 누군가 지키고 있어야지 않겠나.”
크레비츠가 그렇게 말할 때 바하잔이 품에서 하얀색의 봉투를 꺼내 이드에게 건네었다.
“자네가 간다면 아마 격전지인 아마타로 바로 가게 될 걸세. 차레브 공작이 혼돈의 여섯 파편이라는 자들을 보기 위해 직접 그곳에 가 있다니 그 사람에게 건네게. 자네 실력은 잘 알지만 그 사람 실력도 만만찮으니 힘 닿는 데까지 자네를 도와줄 게야.”
“이럴 실건 없는데요. 그럼 언제 출발해야 되는데요?”
이드가 봉투를 손에 쥐며 말하자 레크널이 대답했다.
“자네가 수락했으니 내일 오전 중으로 일정이 잡힐 거야. 먼 길이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마법 진을 이용하기로 했지. 아마타까지 한 번에 갈 수는 없고… 중간 경유지로 드레인의 비엘라 영지를 거쳐서 가게 될 걸세.”
이드는 레크널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말을 타고 가든 뭘 타고 가든… 그 먼 거리를 지루하게 가려면 피곤은 둘째 치더라도 엄청나게 지루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 프로카스와 같이 가는 것이라면… 혼자 가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좋죠. 편하고, 빠르고… 헤헤헤.”
이드가 꽤나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어 보이자 옆에 있던 벨레포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럼 그 사람들도 데려 가려나? 여기까지 같이 온 용병들 말일세. 어차피 그들과 계약할 때 내걸었던 내용이 자네와 함께 가는 것이니까. 데려갈 텐가?”
이드는 벨레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데려가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좋고… 그럼…
“뭐, 자신들에게 직접 물어보죠. 가고 싶다면 같이 데려가고 아니면 프로카스 씨와 둘만 가고… 하지만 메르시오와 싸우는 것까지 가까이서 지켜봤는데 가려고 할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레크널이 확실히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때 있었지만 직접 전투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떨어진 곳에 실드로 보호하며 있었는데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을 스스로 찾아갈까?
좀 다혈질인 친구 벨레포라면 모르지만 꽤 냉철하다는 말을 좀 들어본 자신이라면 두말 않고 거절할 것이다.
이어 몇 마디가 더 오고 갈 때 서재의 문을 열며 깨끗하고 부드러운 모양의 메이드 복을 걸친 소녀가 들어섰다.
“주인님. 모든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