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11화 : 여우 죽은 골에 이리가 들고
여우 죽은 골에 이리가 들고
궁궐 안의 환관들을 눈에 띄는 대로 벤 뒤 원소는 다시 군사들에 게 영을 내렸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패를 나누어 십상시의 가속들을 모조리 잡아 내 베도록 하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씨를 말려야 한다.”
그렇잖아도 이미 피를 보아 눈이 뒤집힌 군사들이었다. 환관의 가 속들이라 여겨지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니 그 하루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만도 이천이 넘었다. 호분중랑장으로 있던 종제 원술) 이 앞장서서 지휘했고, 군사들 또한 광란 상태에 가깝게 흥분해 있 었다고는 하지만, 그때껏 너그럽고 어진 군자로 알려져 있었던 원소 의 과격함과 잔혹함이 대강 그러했다.
이때 조조도 원소, 원술 형제와 함께 있었다. 만약 그 자신이 환관의 자손만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그 참사를 막아볼 수도 있었지만, 넓게 따지면 그 자신이 바로 환관의 가속이 되니 나서서 어찌해볼 처지가 못 되었다.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휘하의 군사들만이라 도 그 학살 대열에서 빼내는 일뿐이었다.
조조는 휘하의 군사들을 시켜 일부로는 궁궐의 불을 끄게 하고 나머지로는 천자를 끼고 달아난 내시 장양(張讓)의 무리를 뒤쫓게 했다. 그리고 하태후를 권하여 황실의 어른으로서 혼란스런 대국을 주관케 했다.
한편 소제()와 진류왕(陳留王)을 끌고 달아난 장양과 단규의 무리는 자욱한 연기와 불길을 헤치고 어둠 속을 달려 북망산에 이르 렀다. 그런데 삼경 무렵 하여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인마 가 나타났다. 앞선 사람은 하남(河南) 땅의 중부연리(中部) 민공 (閔貢)이란 사람이었다.
“역적은 달아나지 마라.”
민공은 크게 소리치며 장양과 단규의 무리를 덮쳤다. 장양은 이미 일이 그른 줄 알고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죄가 죄인 만큼 붙들리기만 하면 어떤 혹형을 당할지 모르는 게 그들의 처지였 다. 단규도 천자고 뭐고 돌아볼 틈도 없이 숲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소제와 진류왕은 일단 환관들의 손에서는 벗어났지만 나타난 사 람들이 어떤 무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일의 허실을 살피기로 하고 강가의 풀숲에 몸을 숨겼다. 그 바람에 민공은 군사를 사방에 풀어 천자를 찾게 했으나 끝내 찾지를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소제와 진류왕은 그들이 떠나고도 한동안을 더 풀숲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 사경에 이르니 이슬이 차고 배가 고팠다. 만승의 귀한 몸으로 깊은 궁궐 안에서 고이 자란 몸들이라 그 추위와 배고픔은 한층 견디기 힘들었다. 한차례 서로 부둥켜 안고 소리 없 이 흐느낀 뒤 어린 진류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됩니다. 따로이 살아날 길을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소제도 어린 아우의 말을 옳게 여겨 두 사람은 서로 옷자락을 묶 은 채 강가의 언덕으로 기어올라갔다. 서로 옷자락을 묶은 것은 어 둠 속에서 두 사람이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간신히 언덕에 올랐으나 땅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하고 어둠 속이 라 길은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때 막막 하여 서 있는 그들 앞에 한 떼의 반딧불이 몰려들어 환하게 주위를 비추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 형제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진류왕이 그렇게 말하며 반딧불을 따라 걷기를 권했다. 한참을 걸 으니 길이 보였다. 그러나 오경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어 쉴 곳을 찾아보니 마침 산자락에 풀더 미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형제는 지친 몸을 그 풀더미 위에 뉘었다. 어둠 속이라 알아보지 못했지만 소제와 진류왕이 누워 있는 그 풀더미 앞 멀지 않은 곳에는 장원(莊園)이 하나 있었다. 그 주인 되 는 사람이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붉은 해 두 개가 집 뒤로 떨어졌 다. 놀라 깨어나니 아무래도 예삿꿈 같지 않았다. 급히 옷을 걸치고 사방을 살피자 집 뒤에 쌓아둔 풀더미 위에 붉은 빛이 하늘을 찌르는 듯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놀라 그리로 가보니 두 소년이 풀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행색이나 생김이 여느 집 아이들 같지는 않았다.
“두 분은 어느 집 자제분이시오?”
장원의 주인 되는 사람이 공손히 물었다. 소제가 대답을 망설이는 데 진류왕이 나서서 소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분은 당금(當)의 천자시오. 십상시의 난리를 만나 피해 오다 보니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소이다. 나는 황제(皇弟)인 진류왕이오.”
그 말에 장원의 주인은 깜짝 놀라 두 번 절한 뒤에 자신을 밝혔다.
“저는 선제 때 사도(司徒) 벼슬을 지낸 최열(崔烈)의 아우 최의 毅)옵니다. 십상시들이 관직을 팔고 어진 이를 미워하는 게 보기 싫 어 이곳에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최의는 그 길로 황제를 부축하여 장원 안으로 맞아들이고 술과 밥을 차려 올렸다. 우연히 만나도 소제와 진류왕에게는 찾고 있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소제와 진류왕이 최의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민공은 여전히 그들을 찾아 부근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보 이지 않아 군사를 물리다가 앞서 달아난 단규를 만났다. 민공이 큰 소리로 천자가 계신 곳을 물었으나 단규가 알 리 없었다. 벌벌 떨며 도중에 헤어져 알 수 없노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노한 민공 은 한칼에 단규를 베고 그 목을 말안장에 매단 뒤 다시 군사를 나누 어 천자가 계신 곳을 찾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홀로 말을 달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갔다.
하늘이 도우신 것인지 그렇게 달린 지 반 각도 안 돼 민공은 우연히 최의의 장원 앞에 당도했다. 말발굽 소리를 듣고 달려 나간 최의
가민공에게 물었다.
“공은 뉘시오? 그리고 말 안장에 매단 것은 누구의 목이오?” “나는 하남 중부연리 민공이라 하오. 지금 십상시들에게 끌려가신 황제 폐하와 진류왕 전하를 찾고 있소이다. 이 목은 중상시 단규의 목이오.”
“폐하를 찾아서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궁궐로 다시 모셔가려는 것이오. 이제 십상시의 무리는 깨끗이 제거되었소.”
그리고 민공은 그날 낙양성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전해 주었다. 최의가 가만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천자를 해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민공을 불러들여 천자를 뵙게 했다.
천자를 뵙자 한바탕 통곡을 한 민공은 곧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뢰었다.
“나라에는 단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폐하, 부디 도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최의도 장내(內)에 유일한 여윈 말 한 필을 끌어내며 천자께 돌 아갈 것을 권했다. 이에 소제는 여윈 말 한 필을 진류왕과 함께 타고 최의의 장원을 떠났다. 채 삼십 리도 못 가 다시 한 떼의 인마가 황 제를 맞았다. 사도 왕윤(允), 태위 양표(楊) 등의 대신들과 원소 를 비롯한 남북군의 교위들이 이끄는 수백의 군사들이었다.
더욱 힘을 얻은 황제 일행은 먼저 단규의 목을 성안으로 들여보 내 영을 세운 뒤 황제와 진류왕도 좋은 말로 바꾸어 타 위의威儀)를 갖추고 낙양성으로 향했다. 일찍이 낙양성 아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노래에,
황제는 황제가 아니고 帝非帝
왕도 왕이 아니네. 王非王
천수레 만 말이 千乘萬騎
북망산으로 내닫네. 走北邙
란 것이 있었는데 그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노래대로 된 셈이었 다. 실로 그 전날 밤은 황제는 황제 같지 아니했고 왕도 왕 같지 아 니했다. 그리고 고요하던 북망산에 수천의 인마가 들끓게 된 것이 었다.
하지만 그만큼으로만 그쳐도 일은 다행스럽게 풀릴 뻔했다. 수법 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혹독한 대로 건석, 장양, 단규 등 천하 뭇 사 람들의 미움을 받던 열 명의 환관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잃고 그 가 속들까지 베임을 당했다. 거기다가 하진(何), 하묘(何) 등 그대로 살아 있으면 반드시 나라의 우환이 될 외척 세력도 그 와중에서 저 절로 소멸되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운은 이미 한나라를 떠난 뒤였다. 황제 일행이 다시 몇 리 가기도 전에 갑자기 깃발이 해를 가리고 하늘 가득 먼지가 일며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어가를 따르던 여러 관원들은 낯빛이 변 하고 임금도 크게 놀랐다. 앞을 가로막는 인마의 기세가 너무도 커 만약 불측한 뜻을 품은 무리라면 거느린 인마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너희들은 누가 이끄는 군사들인가?”
어쨌든 상대나 알고 보자는 기분으로 원소가 말을 달려 나가 크게 소리쳤다. 오색으로 수놓은 깃발 아래서 한 장수가 말을 몰아 나왔다. 눈에 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그 장수는 원소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높고 거만한 음성으로 오 히려 그렇게 물었다. 적인지 한편인지 구별이 안 가는 태도였다. 대 신들은 불안스레 수군거리고 젊은 황제는 두려움에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어린 진류왕이 나섰다.
“거기 온 것은 누구냐?”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답지 않게 당차고 매서운 물음이었다. 그 제서야 그 장수도 움찔하며 이름을 밝혔다.
“서량 자사 동탁이옵니다.”
동탁이란 이름에 대신들은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으면서도 한편으 로는 모두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진류왕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꾸짖듯 물었다.
“그대는 어가를 보호하러 왔는가? 아니면 힘으로 눌러 빼앗으러 왔는가?”
어린 진류왕의 날카로운 물음에 동탁은 한층 수그러든 기세로 대답했다.
“어가를 호위하고자 특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이왕 어가를 호위하러 왔다면 천자가 이곳에 계시는데 어찌하여 말에서 내려 뵙지 않는가?”
진류왕이 다시 소리 높여 꾸짖었다. 동탁은 완전히 기가 꺾여 황 망히 말에서 뛰어내린 뒤 길 왼편으로 비켜나 황제를 뵈었다.
진류왕은 말로 동탁을 어르고 달래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그르침이 없었다. 아홉 살의 나이로 보면 빼어난 총명이요, 영특함 이었다. 비록 그 때문에 혼이 나기는 했지만, 동탁이 소제를 내쫓고 진류왕을 제위에 나가게 하려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그런 첫 만남부 터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탁이 이끄는 서량병(西凉兵)들의 호위를 받게 되자 어가는 더 이상 지체할 일이 없었다. 황제는 그날로 궁궐에 돌아와 하태후와 눈물로 상봉을 했다.
그을다 만 궁궐은 어지럽기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궁중을 점 고해보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새가 없었다. 진시황(秦始皇) 때부터 사백 년이 넘는 세월을 한나라의 황제에게서 황제로 이어온 전국옥새(傳國玉璽)였다.
옥새를 잃은 것은 실로 나라의 큰 변괴였다. 그러나 한실로 보면 그보다 더 다급한 발등의 불은 성 밖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동 탁의 존재였다. 동탁이 군사들에게 철갑을 입힌 뒤 매일 말을 타고 성안 거리를 가로지르게 하니 백성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다. 급 히 달려오느라 대군은 뒤에 남겨두고 수하의 기병만을 이끌고 온 동 탁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허장성세였지만 거듭되는 난리에 시달려 온 백성들에게는 기대 이상의 위압 효과가 있었다.
그러다가 본대의 대군이 이르게 되면서 동탁도 차차 본색을 드러냈다. 궁중을 출입하는 데 조금도 거리끼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보는 이 치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후군교위(後軍校 尉) 포신(鮑信)이 그 꼴을 보다 못해 원소를 찾아와 의논했다. “동탁은 틀림없이 딴마음을 품은 자외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없애
야 할 것이오.”
그러나 원소의 대답은 미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막 새로 조정이 열려 아직 안정되지 못한 터에 가볍게 움직 여서는 안 되겠소.”
이에 포신은 다시 사도 왕윤을 찾아갔다. 왕윤도 원소와 크게 다름이 없었다.
“차차 의논해보기로 하세. 아직 무슨 짓을 한 것도 없으니 자칫하 면 도리어 이쪽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몰리게 되네.”
그러자 포신은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을 데리고 도성을 빠져나가 태산 깊숙이 숨어버렸다. 자신이 한 일이 동탁의 귀에 들어가게 는 것이 두려울 뿐만 아니라 뻔한 일을 눈앞에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포신이 앞질러 본 사태는 머지않아 벌어졌다. 동탁은 하진 형제가 이끌던 병마까지 손아귀에 넣자 가만히 모사인 사위 이유를 불렀다.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제위에 오르게 하고 싶은데 자 네 생각은 어떤가?”
이유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내 찬동했다.
“지금의 조정은 주인이 없다 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입니다. 이때를 놓치고 머뭇거리다 보면 뜻밖의 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내일 온명원(溫明園)에서 여러 대신들을 불러 모으고 폐립(立)의 일을 꺼내신 뒤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어버리십시오. 이 제야말로 한번쯤 주공의 위엄과 권세를 떨쳐볼 때입니다.”
이에 힘을 얻은 동탁은 다음 날로 온명원에 크게 잔치를 열고 모 든 대신과 공경(公卿)을 청했다. 동탁을 두려워하는 공경들은 아무 도 감히 거역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모인 뒤에야 동탁은 천천히 말을 타고 와 잔 치장소로 들어섰다. 칼을 차고 호위를 거느린 채였다. 몇 순배 술이 돈 뒤에 동탁은 돌연 술과 음악을 멎게 하고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동탁이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잠시 귀를 기울여주시 기 바라오.”
그러잖아도 동탁이 부른 까닭을 궁금히 여기던 백관들은 그 말에 모두 동탁을 바라보았다. 동탁은 한층 높은 소리로 진작부터 먹은 마음을 드러냈다.
“천자는 뭇 백성의 주인 된 자를 일컫는 말이외다. 위의가 없으면 종묘사직을 받들 수가 없는 것이오. 금상은 유약하여 진류왕 전하의 총명호학(聰明好學)을 따르지 못하고 있소이다. 이제 나는 금상을 폐 하고 진류왕 전하로 대위를 잇게 하려는 바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동탁은 드디어 자신의 죽음으로 끝맺게 될 찬역의 첫발을 공공연 히 내디딘 셈이었다.
무릇 무(武)란 문(文)의 배후에서 그 성취를 옹호하고 지켜나가는한 위엄이요, 영광이요, 미덕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의 전면에 나서서 그 성취의 과일을 독점하고 정신의 질서를 힘의 질서로 대치시 키려 들면 흔히 비열이요, 오욕이요, 악이 되고 만다. 동탁의 경우도 반드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예가 될 것이다. 그가 변방에서 오랑 캐를 막아낼 때는 훌륭한 장수요, 떳떳한 신하였다. 그러나 그 힘을 들어 대권을 노리자 이내 오욕과 저주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무의 힘으로 문의 성취까지를 독점하려 한 탓이며, 주인을 지키기 위해 받은 칼로 그 주인의 목을 겨눈 탓이었다.
그러나 위급을 당하면 어이없이 무력한 것이 또한 문이다. 동탁의 수작이 터무니없건만 대신들은 동탁의 칼이 무서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동탁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가나보다 싶어 은근히 기뻤 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탁자를 밀치고 뛰쳐나오며 큰소리로 동탁을 꾸짖었다.
“아니 된다. 결코 아니 된다. 도대체 너는 누구이기에 그토록 엄청 난 말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금상 폐하는 선제의 적자(嫡子)로서 아 직 아무런 허물이 없는데 어찌 감히 폐립을 논한단 말이냐? 너야말 로 참람된 뜻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니냐?”
대신들이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라 소리치는 사람을 보니 다름 아닌 형주 자사州) 정원(原)이었다. 성난 동탁이 정원을 노려보며 마주 외쳤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 것이요, 거역하는 자는 죽으리라.”
그리고 칼을 빼어 정원을 베려 했다. 모사 이유가 시킨 대로였다. 그런데 정작 그걸 시킨 이유가 살펴보니 정원의 등 뒤에 한 장수가 서 있는데 그릇됨[器]이 커 보이고 생김이 씩씩한 게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한 자루 방천화극(天畵戟, 창과 갈고리를 결합한 형태의 창)을 들고 동탁을 노려보고 섰는 모습은 정원을 목 베기 전에 동탁이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일게 했다.
놀란 이유가 급히 나가 동탁을 말리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잔치 자립니다. 나라의 정사를 얘기하기에는 마 땅치가 못합니다. 내일 묘당에서 공론에 붙여도 늦지 않으니 이만 고정하십시오.”
그 말에 동탁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슬며시 칼을 거두었다. 다른 사람들도 정원을 말리니 화가 난 정원은 그 길로 말을 타고 나 가버렸다.
정원이 나가버리자 동탁은 다시 한번 백관들에게 물었다.
“오늘 내가 한 말이 그토록 공도(公道)에 어긋나오이까?”
이번에는 아직 도성을 뜨지 못하고 있다가 그 자리에 불려나온 노식이 정원을 이어 나섰다.
“그렇소이다. 공의 말은 당치 않소. 태갑(太甲, 은나라의 어리석은 임 금)이 밝지 못하매 이윤伊, 태갑을 내쫓는 신하)이 동궁(桐宮)으로 내쫓았고, 또 창읍왕(昌邑王, 전한의 황제로 폐위됨)이 대위에 오른 지 스무이레 만에 죄가 이천 가지나 되어 곽광(光, 한나라의 정승으로 창 읍왕을 폐위)이 내친 적이 있기는 하오이다. 그러나 금상 폐하께서는 태갑이나 창읍왕의 허물이 없소. 춘추는 많지 않으셔도 총명하고 너 그러움과 학식을 갖추신 데다 아직 이렇다 할 잘못을 저지르신 바 없는데 어찌 폐위를 논할 수 있단 말씀이오? 더군다나 공은 한낱 외 군(外郡)의 자사로서, 나라 정사에 참여할 권한도 없거니와 이윤이나 곽광 같은 재주도 갖추지 못한 터에 감히 그 무슨 당찮은 말씀이시오? 성인께서도 이르기를 이윤과 같은 뜻을 가졌다면 천자를 폐 하는 일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뜻이 없는 자가 그 일을 한다면 다만 찬탈에 지나지 않는다 하셨소.”
그 말에 동탁은 다시 크게 성이 났다. 칼을 빼들고 이번에는 노식 을 죽이려 들었다. 의랑 팽백(彭伯)이 동탁을 말렸다.
“노상서는 해내(海內)에 인망이 두터운 분입니다. 이제 그런 분을 해하셨다가 천하의 공분을 사게 되면 어쩌시렵니까?”
동탁도 노식을 잘 아는 터라 억지로 분을 삼키며 칼을 거두었다. 조정의 원로로 오래 국정에 참여한 사도 왕윤이 점잖게 동탁을 무마 시켰다.
“천자의 폐 술자리에서 의논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외다. 따로 날을 잡아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뭇 대신들도 왕윤의 그 말을 옳게 여겨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동탁은 더욱 분통이 터졌다. 정말로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모조리 베어버리겠다는 듯 칼을 빼들고 온명원 문앞에 버티어 섰다. 아무래도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나지 못할 자리 같았다.
그때 갑자기 원문(園門)밖에 한 장수가 나타났다. 화극을 비껴들 고 말을 달리며 오락가락하는 품이 심상치 않다.
“저게 누구냐?”
동탁은 까닭없이 그 젊은 장수의 기세에 위축되어 이유에게 물었다.
“정원의 맺은 자식[義]으로 성은 여(呂)요 이름은 포(布)로 자를 봉선(奉先)이라 합니다. 용맹이 대단한 자이오니 주공께서는 잠시 자리를 피하십시오.”
그 같은 이유의 말을 듣고 보니 동탁도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 다. 슬며시 온명원 안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동탁이 대신들의 몸에 손만 대면 그걸 구실로 동탁을 치려고 여 포를 보냈던 정원도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여포를 데리고 자기의 영채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직을 위해 동탁을 없앨 결심을 이미 굳 힌 정원이었다. 이튿날 군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정식으로 동탁에게 싸움을 걸었다.
“형주 자사 정원이 수하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 같은 전갈을 받은 동탁은 크게 노했다. 곧 이유와 함께 자기 군 사들을 이끌고 마주 싸우러 나갔다.
양쪽 군사들이 둥그렇게 진을 치고 대치한 뒤 동탁이 눈을 들어 정원의 진을 살피니 여포(呂布)가 진문 앞에 나와 있었다. 묶은 머리 에 금으로 된 관을 얹고, 백화(百花) 전포에 보석으로 치장한 갑옷과 띠를 두른 모습이 멀리서도 눈부셨다. 말에 오르지 않고 화극을 낀 채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정원이 진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원래 여포는 오원군(五原郡) 구원(九原) 땅 사람이었다. 그 배운 곳은 알 수 없으나, 도검, 창극, 궁마 등 모든 무예에 능했는데, 특히 방천화극이라 불리는 한 자루 갈고리 달린 창을 쓰는 솜씨가 뛰어 났다.
일찍 대단찮은 군리(郡)로 병주(州)에 벼슬살이 나갔다가 자 사 정원의 눈에 들어 차차 벼슬이 높아졌다. 정원은 처음 여포를 기 도위(騎都尉)로 삼았다가 하내(河內)에서 군사를 기르게 되면서는 주부로 데려가는 등 그를 대하는 게 남달랐다. 여포도 그런 정원의 은혜에 감동하여 그를 한낱 상관으로서보다는 아버지처럼 받드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부자의 의를 맺은 것으로 알았다.
정원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온 것은 환관 세력을 뿌리 뽑자는 하진의 밀서에 호응해서였다. 그러나 동탁과는 달리 군사를 엄히 단속하여 성안으로 들이지 않으니 낙양 사람들은 그의 군사들 이 성 밖에 와 있는지조차 몰랐다.
이때 여포도 따라와 집금오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하진이 뜻밖의 죽음을 당하고 환관들도 한가지로 모조리 죽자 잠시 형세를 관망하 고 있던 정원을 호위하며 성 밖에 머물러 있었는데 전날과 같은 일 이 벌어졌다.
이윽고 정원이 진문에 나와 말 위에 오르자 비로소 여포도 말에 올라 그 뒤를 따랐다. 동탁의 진문 앞에 이른 정원은 채찍으로 동탁 을 가리키며 소리 높이 꾸짖었다.
“나라에 운이 없어 간악한 환관의 무리가 대권을 희롱하매 만백 성은 도탄에 빠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너는 그 환관들을 제거하 는 데 한 치의 공도 없으면서 어찌 감히 폐립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너야말로 조정을 어지럽히려 드는 도적이 아니냐?”
동탁은 생각지 아니한 난적을 만났음을 알았다. 대답이 궁한 대로 일단 정원의 말을 되받아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여포가 똑바로 말을 몰아 가로막는 동탁의 군사들을 베며 짓쳐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엄청난지 아무도 앞을 가로막지 못하 고, 동탁도 황망히 말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되면 싸움은 끝난 것이 나 다름없었다. 저희 대장이 도망치는 걸 보자 동탁의 군사들도 사 태 나듯 뭉그러졌다. 정원이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몰아 뒤따르 며 죽이니 동탁은 크게 패해 삼십여 리나 도망친 뒤에야 겨우 진채 를 내릴 수 있었다.
원래 정원의 군세는 동탁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동탁은 세력 의 반을 갈라 근거지인 서량에 남겨두고 온 데다 여포의 용맹 또한 절륜하니 정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에 크게 근심이 된 동탁은 막 장(幕)들을 불러놓고 정원 깨칠 일을 의논했다.
“오늘 보니 여포란 놈이 예사내기가 아니다. 그자를 얻을 수만 있 다면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겠다만..”
동탁이 그렇게 개탄하는데 문득 한 사람이 나섰다
“주공께서는 심려를 거두십시오. 저는 여포와 같은 고향이라 그가 용맹하나 꾀가 없음을 잘 압니다. 이익을 보면 대의를 잊는 인물이 오니 세 치 혀로 한번 달래보겠습니다. 반드시 여포가 스스로 손을 모으고 주공께 항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동탁이 놀랍고 기뻐 말하는 자를 보니 호분중랑장 이숙(李肅)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포를 달래겠느냐?”
“제가 듣기로 주공께는 이름을 적토(赤兎)라 하며 하루 천리를 닫 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제게 주시고 그 위에 약간의 금은보석을 더 얹는다면 이익으로 그 마음을 움직여볼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좋은 말로 그를 달랜다면 여포는 반드시 정원을 버리 고 주공께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얼른 믿지 못하는 동탁의 물음에 이숙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동탁은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한번 곁에 있는 이유에게 물었다.
“정말로 이 말대로 될 수 있을까?”
동탁 또한 욕심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 데다 적토마(赤兎馬)는 워낙 그가 아끼는 말이었다. 동탁의 물음에는 일의 성패에 관한 의 심 못지않게 적토마와 재물에 대한 아까움이 담겨 있음을 이유가 모 를 리 없었다.
“주공께서는 천하를 얻고자 하시면서 어찌 한 마리 말을 아까워 하십니까?”
그렇게 충동하자 비로소 동탁도 흔연히 이숙의 요구를 들어주었 다. 적토마에다 황금 일천 냥, 좋은 구슬 수십 알에 옥으로 깎아 이 은띠 한 개로 여포를 달래보게 했다.
이숙은 예물을 점검한 뒤에 몰래 여포의 진중을 찾아갔다. 정원의 군사들이 곳곳에 숨어서 지키다가 그런 이숙을 가로막았다. 이숙은 짐짓 태연하게 그 군사들에게 일렀다.
“급히 여장군께 가서 고향 친구가 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시 오.”
군사들이 그대로 전하자 여포도 별 생각 없이 이숙을 들여보내게 했다.
“아우님은 그간 별 탈 없이 잘 지냈는가?”
이숙이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여포도 이숙을 알아보고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오래 뵙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계시다가 이렇게 오셨습니까?”
“나는 지금 호분중랑장으로 있네. 근간에 현제가 나라를 위해 크게 힘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리 찾아온 걸세.”
이숙은 자기가 동탁의 막하에 있다는 말은 쑥 빼고 그렇게 둘러 댄 뒤 먼저 적토마부터 끌어오게 했다.
“마침 좋은 말 한 필을 얻었기에 현제에게 주려고 가져왔네. 하루 에 천리를 달리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르는 것도 마치 평지를 가 듯 한다네. 이름을 적토라 하는데, 특히 자네를 위해 가져왔으니 자 네의 호랑이 같은 위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네.”
여포가 살펴보니 과연 명마였다. 온몸이 불붙은 숯처럼 붉고, 잡 털 하나 섞이지 않았는데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가 일 장이요, 발 굽에서 목까지 높이가 여덟 자였다. 우렁차게 우는 소리에도 공중으 로 솟고 바다로 뛰어드는 듯한 기상이 있었다.
천리를 치달아 자옥이 이는 먼지, 奔騰千里蕩塵埃
물 건너고 산 오를 젠 자주 안개가 열리네. 渡水登山紫霧開
매인 줄 당겨 끊고 옥고삐 흔드니. 掣斷絲韁搖玉轡
불뿜는 용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듯싶네. 火龍飛下九天來
뒷사람이 그렇게 노래할 정도의 명마이니 그 적토마를 얻은 여포
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얼굴 가득 감사하는 빛을 띠며 이숙에게 말했다.
“형께서 이렇게 좋은 말을 주시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만 의기로 찾아왔을 뿐이네. 어찌 자네에게 보답을 바라겠는가?”
이숙은 여전히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여포는 더욱 마음을 놓고 좌우를 시켜 술자리를 마련케 했다. 세밀한 이숙은 어지간히 술자리 가 무르익은 뒤에야 슬슬 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자네와 내가 자주 만나지 못해 영존을 뵈온 지도 오래되었네. 그 래 그간 무고하신가?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여포의 아버지가 죽은 걸 뻔히 알면서도 이숙은 짐짓 그렇게 물 었다. 맺은 아비인 정원의 얘기를 자연스레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단순한 여포는 당장 그런 이숙에게 말려들었다.
“형이 취하셨구려. 아버님께서 세상 버리신 지 이미 여러 해인데 형이 무슨 수로 뵈옵겠습니까?”
그러자 이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취한 게 아닐세. 나는 지금 자네의 의부인 정(丁)자사를 말하고 있는 걸세.”
이숙의 말에 여포의 얼굴이 실쭉해졌다. 사실 정원과 여포의 관계 는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그리 깊은 것은 못 되었다. 정원이 여포를 자식처럼 아끼는 것은 틀림없지만, 원래가 엄격하고 곧은 사람이라 허물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다. 여포 또한 아버지처럼 그를 따르기 는 했으나, 천성이 우직하고 지조가 없다 보니 그런 정원에게 따스한 아비의 정을 느끼기보단 엄한 주인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이숙이 그런 정원을 이미 죽은 친아버지에 갈음하니 여포의 기분 이 별로 유쾌할 리 없었다.
“아우가 정건양建陽, 정원의 자)의 막하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아서가 아니라 나가봐야 달리 갈 만한 데도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여포는 이숙에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이숙은 속으로는 옳 다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뜻밖이라는 듯한 얼굴로 은근히 여포를 부 추겼다.
“자네의 재주는 하늘을 뒤흔들고 바다를 가라앉힐 만한데 누가 존경하여 흠모하지 않겠나? 마음만 먹으면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 듯 부귀와 공명을 누릴 수 있을 것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별로 내 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밑에 있다니?”
여포는 한층 마음이 흔들려 탄식하듯 대답했다.
“한스럽게도 저는 아직 옳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숙은 이때라 생각했다. 얼굴빛을 고치고 손위답게 점잖은 목소 리로 일렀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이고 현명한 신하는 그 주인을 골라 섬기는 법일세. 때가 와도 일찍 알아보지 못하면 후회해도 이미 늦 을 것이네.”
“형께서는 조정에서 벼슬을 살고 계시니 당세의 빼어난 영웅이 누구인지를 알 것입니다. 이 아우에게 일러주십시오. 그게 누구오니까?”
그렇게 묻는 여포의 머릿속에는 이미 정원 따위는 그림자도 없었 다. 하지만 이숙은 한참을 더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당금 조정의 사람들 가운데는 동탁만 한 이가 없을 것이네. 동탁은 어진 이를 공경하고 선비를 예로 대할 줄 알며, 상과 벌이 분명하니 마침내는 큰일을 이룩할 사람이네.”
“동탁이 그토록 큰 인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서로 창 칼을 맞댔으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인가?”
“이 아우가 그를 찾아가려 한들 어디에 문과 길이 있겠습니까?”
여포의 사람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너무 쉽게 나 오니 이숙도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여포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신을 얻은 이숙은 비로소 가져온 예물들을 펼쳤다. 일천 냥의 황금은 물론 구슬이며 옥으로 깎은 띠는 검소한 정원만 따라다닌 여 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여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이숙은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내쫓은 뒤 나지막이 알려주었다.
“이것은 바로 동공(公)께서 아우의 큰 이름을 사모하여 보내신 것일세. 조금 전의 그 적토마도 마찬가지로 동공께서 주신 것이네.”
여포가 조금이라도 생각 깊은 자였다면 그때쯤이라도 한 번은 앞 뒤를 헤아려보았어야 했다. 이숙의 그 돌연한 방문이 단순히 같은 고향 사람의 호의에서가 아니라 사전에 면밀히 꾸며진 계책이란 걸 안 이상 그가 한 말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적토마와 금은보화에 완전히 넋을 앗긴 여포는 다만 동탁의 후의에 감동할 뿐이었다.
“동공께서 이토록 크신 사랑을 베푸시는데 저는 실로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사람도 호분중랑장의 자리를 주셨으니 만약 아우가 간다면 그 높게 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네.”
이숙은 그렇게 여포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여포가,
“한 점 띠끌만 한 공도 없이 찾아가 뵙기 실로 부끄럽습니다.”
라고까지 하자 넌지시 일러주었다.
“공을 세울 길이야 손바닥 한 번 뒤집기보다 쉬운 게 있네. 다만 아우가 마음이 내키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지…….”
지모가 모자라는 여포지만 그 말만은 금세 알아들었다. 그러나 워 낙 일이 엄청난 탓인지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뒤에야 입을 열 었다.
“정원을 죽인 뒤 그 군사를 이끌고 동공에게로 가면 어떻겠습니까?”
“자네가 그렇게만 하면 정말로 큰 공을 세우는 게 되네. 다만 일이란 시일을 끌면 안 되는 수가 많으니 급히 결행하게.”
“내일 안으로 결행하겠습니다.”
“동공께 여쭙고 기다리겠네.”
이숙은 여포와 그렇게 약조한 뒤 돌아갔다.
그날 밤 이경쯤이었다. 여포는 칼을 들고 정원의 군막으로 들어갔 다. 무략(武)에 못지않게 문재(文才)도 갖추고 있는 정원은 비록 진중이지만 촛불을 밝히고 책을 읽다가 여포가 들어오는 걸 보고 물 었다.
“내 아들이 무슨 일로 밤중에 나를 찾아왔느냐?”
동탁과의 한 싸움에서 여포가 세운 공 때문에 전에 없이 부드러 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여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떳떳한 장부로서 어찌 너 같은 놈의 자식일 수 있겠느냐?”
“봉선, 네가 마음이 변했구나. 도대체 무슨 연고냐?”
정원이 놀라 읽던 책을 떨어뜨리며 거듭 물었다. 평소에도 여포의 심지가 깊지 못함을 걱정해오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포는 대답 대신 한칼질로 정 원의 목을 잘라버렸다. 정원 또한 전혀 무예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 었으나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 손발 한번 놀리지 못하고 목 없는 주 검이 되고 말았다.
여포는 피가 뚝뚝 듣는 정원의 목을 높이 쳐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장졸들은 듣거라. 정원이 어질지 못해 내가 이미 죽였다. 나는 이 제 동장군께 의지하려니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 자 는 모두 떠나라.”
그러자 정원의 군사들은 태반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다음 날 여포는 정원의 목을 들고 이숙을 찾아갔다. 이숙은 여포를 인도하여 동탁에게 보이니 동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여포를 맞았다. 좋든 나쁘든 천하를 노릴 정도의 인물이라 동탁의 처신 또한 변화가 무쌍했다. 어제까지의 거드름은 어디를 갔는지 가장 겸손한 체 먼저 여포에게 절을 하며 칭송했다.
“이 동탁이 장군을 얻은 것은 마치 가뭄으로 말라들어가던 모가 단비를 만난 것 같소이다!”
여포도 과분한지 놀라 동탁을 자리에 앉게 한 뒤 공손히 절을 올리며 말했다.
“공께서 하찮은 여아무개를 이토록 환대하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버리시지 않는다면 아버님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차이라면 이리와 승냥이 정도일까, 한 쌍 잘 어울리는 상하의 자 못 감동적인 만남이었다.
여포를 얻자 동탁의 위세는 한층 커졌다. 더구나 정원의 군사까지 흩어져버린 뒤라 적어도 낙양성 안에서는 동탁에 대항할 만한 무력 은 없었다. 이에 동탁은 스스로 전군의 장수와 사졸을 거느리고, 아 우동민(董)을 좌장군으로 여포를 기도위 중랑장에 도정후(都) 로 봉해 도성 안의 모든 군사력을 장악했다.
그다음은 이미 입 밖에 낸 황제 폐립을 마무리짓는 일이었다. 동 탁은 다시 자기의 부중에 연회를 열고 여러 공경 대신을 청했다. 여 포로 하여금 천여 갑사를 거느리고 좌우를 지키게 하여 잔뜩 위세를 부린 뒤였다.
정한 날이 되자 태부 원외袁隈)를 비롯한 조정 백관들이 차례로 연회장에 이르렀다. 동탁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거니 와 폐립의 일이 어떻게 맺어질까 궁금하기도 한 까닭이었다. 몇 순배 술이 돈 뒤에 동탁은 칼을 빼들고 위협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황제는 어둡고 약하시어 종묘사직을 받들기 어렵소이다. 이에 나는 이윤伊)과 곽광霍光)의 옛일에 기대 황제를 폐하여 홍 농왕(弘農王)으로 삼고 지금 진류왕 전하를 추대하고자 하오. 또다 시 내 뜻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정원과 마찬가지로 벨 것이오.” 동탁의 위세에 질린 백관들은 아무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때 중군교위 원소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아니 되오. 천하는 동공(董公)의 것이 아니오. 금상께서는 제위에 오르신 지 오래지 않고 덕을 잃은 다스림을 펴신 일도 없는데, 공은 어찌 적자를 밀어내고 서자를 세우려 하시오? 그건 모반이나 다름 없소.”
일이 잘 돼가는가 싶은데 원소가 그렇게 나오니 동탁은 화가 치 밀었다. 금세 칼로 원소를 후릴 듯 소리쳤다.
“천하가 이미 나를 따르거늘 내가 하는 일을 누가 감히 거스른단 말이냐? 너는 내 칼이 날카롭게 보이지 않느냐?”
원소도 지지 않았다. 마주 칼을 빼들며 소리쳤다.
“네 칼이 날카롭다면 내 칼이라고 날카롭지 못하란 법이 있느냐?”
두려움을 모르는 명문의 공자(公)다운 기백이었다. 그러나 기백 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원이 의를 세우려다 몸이 먼저 죽은 것처럼 원소의 목숨도 위태롭기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동탁 자 신이 본시 무예가 뛰어난 데다 천여 갑사를 거느린 여포까지 방천화 극을 꼬나들고 여차하면 원소를 찌를 기세였다.
이때 동탁의 모사 이유가 나섰다.
“일이 아직 정해지기도 전에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고정하십시오.”
자기가 꾀를 빌고 있는 이유가 그렇게 말리자 동탁은 노한 가운데 도 주저가 되었다. 기백 하나로 동탁과 맞섰으나 원소 또한 자신의 처지를 모를 만큼 숙맥은 아니었다. 여전히 손에는 보검을 빼든 채 백 관에게 작별을 고한 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길로 말을 달려 원가(家)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기주(冀州)로 도망쳐버렸다. 원소까지 떠나가자 이제 동탁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탁 은 먼저 원소의 일로 그 숙부인 태부 원외를 얼러 천자를 폐립하는 일에 찬성을 얻어낸 뒤, 이어 우격다짐으로 나머지 백관들도 승복시 켰다. 그리하여 소제(少) 폐위는 결정되고 새 황제의 즉위는 구월 보름으로 날을 잡았다.
하지만 동탁은 아무래도 원소를 놓아 보낸 일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에 신임하는 시중 주비(周毖)와 교위 오경(伍瓊)을 불러 가만히 물었다.
“원소의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주비가 대답했다.
“원소가 비록 화를 내고 떠났으나 공께서 급하게 잡으려들면 반 드시 변을 일으킬 것입니다. 원씨는 사대에 걸쳐 널리 덕을 베풀어 따르는 문생(門)들과 관리들이 천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거기 다가 원소 또한 평소부터 여러 호걸들과 사귀어둔 터라 만약 그가 무리를 모아 변을 일으키고 다른 영웅들도 따라서 일어난다면 산동 은 결코 공의 다스림을 받는 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소가 도망친 것은 그런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의 뜻을 거스른 일이 두려워서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그에게 태수 자리라도 하 나 내려주는 것이 그를 급히 모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면 그는 죄 를 벗은 것이 기뻐 우환을 만들지 아니할 것입니다.”
원소의 그릇됨을 지나치게 작게 본 흠은 있지만 대강은 맞는 말 이었다. 오경도 거들었다.
“원소는 일 꾸미기를 좋아는 하나 결단성이 없는 위인입니다. 족 히 두려워할 바가 못 됩니다. 그에게 태수 자리나 하나 주어 도량을 보이시고 민심을 거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이에 동탁은 그 말을 따라 원소에게 발해 태수 자리를 내려주었 다. 뒷일이야 어찌되건 당장으로는 합당한 처사였다.
구월 보름이 오자 동탁은 문무백관을 모두 불러 모으고 소제를 청 해 가덕전(德殿)에 오르게 했다. 그런 다음 수천 갑사들로 둘레를 에워싸게 한 뒤 자신도 칼을 빼든 채 소리쳤다.
“천자가 자질이 어둡고 여러 만백성의 임금으로 마땅치가 못하다. 이에 책문을 갖추어 읽고자 하니 모두 들으라.”
동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유가 나서서 마련된 책을 읽었 다. 소제의 재주와 위엄이 없음을 논함과 하태후의 동태후 독살을 꾸짖음이 제법 준엄하고, 진류왕의 지혜로움과 돈독함을 기리는 말 이 자못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덕으로 분 바르고 의로 치장해도 동탁의 숨은 뜻이 아름답지 못하니 도무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없었다. 백관들은 한결같이 속으로 탄식만 삼킬 뿐이 었다.
이유가 읽기를 마치자 동탁이 다시 나섰다. 좌우를 꾸짖어 소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리게 한 뒤 옥새 (십상시의 난 때 잃어버린 전국옥새가 아 니라 새로 새긴 것)와 인수를 빼앗고 북면(北面)하여 꿇어앉게 했다. 신하로서 제명을 받드는 자세였다. 그런 다음 하태후도 끌어내려 예 복을 벗기고 무릎을 꿇게 하니 무력한 모자는 그저 얼싸안고 통곡할 뿐이었다.
그 정경을 바라보는 백관들 치고 슬프고 참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어쩌랴, 당장 두려운 것은 동탁의 칼끝이었다. 하지 만 그렇다고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한 대신이 분 노를 이기지 못해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동탁 이 역적 놈아, 네 감히 하늘을 속이는 일을 꾸미는구나. 내 마땅히 목의 피를 뿌려서라도 네놈을 꾸짖으리라.”
그리고 조회 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상아 막대 [笏]로 동탁 을 때렸다. 동탁의 성난 목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끌어내리고 보니 상서 정관(管)이었다. 동탁은 정관을 끌어내 목 베게 하였으나 정 관은 죽는 순간까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동탁을 꾸짖어 마지 않았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를 찬양했다. 동탁은 다시 진류왕 협(協)을 부축하여 옥좌에 앉게 했다. 영제의 둘째아들로 하태후에게 독살당한 왕미인의 아들인데 그때 나이 겨 우 아홉이었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헌제(獻帝)가 바로 그였 다. 가엾게도 소제는 사월에 즉위하여 구월에 폐위되니 겨우 다섯 달을 제위에 있었던 셈이다.
자기가 뜻한 바대로 새 천자를 세우자 동탁은 연호를 초평(初平)으로 갈고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의 대권을 오로지했다. 뿐만 아니라 찬배(贊拜)할 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조회에서도 허 리를 굽히지 아니하며, 신을 신은 채 전(殿) 위로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채 천자를 대할 수 있으니 위세가 천하에 비할 바가 없었다.
동탁은 또 이유의 권유를 받아들여 새로 꾸민 조정에 명망 있는 선비들을 불러들였다. 완연히 동탁의 세상으로 바뀌자 허명(名)의 탈을 벗어던지고 권세와 부귀를 찾아 동탁의 부름에 좇는 이도 많았 으나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채옹(蔡邕)이었다. 학 자요 빼어난 문장가로서 일찍이 십상시를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가 파직된 적까지 있는 그는 동탁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
동탁이 그대로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오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 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문약한 채옹은 마지못해 나갔다. 그러나 채 옹이 한번 벼슬길에 나서자 그에 대한 동탁의 후대는 남달랐다. 한 달에 세 번이나 벼슬을 높여 시중侍中)으로 삼고 누구보다도 무겁 고 귀하게 여겼다.
거기까지는 제법 한 나라의 정승다운 풍도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잖아 감춰져 있던 그의 흉포함이 드러났다. 그 첫 번째가 영안궁(永 安)에 유폐되어 있는 폐제)와 당비(唐妃), 그리고 하태후를 죽 인 일이었다.
동탁은 폐제를 영안궁에 가둔 뒤 백관들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 게 하는 한편 사람을 풀어 항상 폐제를 감시했다. 거기다가 음식이 며 의복까지 제대로 대주지 않으니 아무리 문약한 폐제지만 울분과 한이 없을 수 없었다. 자연 노래로 그 울분과 한을 달랬는데, 그중의 한 구절이 동탁의 귀에 들어갔다.
아득히 푸른 구름 깊은 곳 遠望碧雲深
거기가 내 옛 궁궐일세. 是吾舊宮殿
누가 충의를 짚고 일어나 何人仗忠義
이 가슴속 맺힌 한을 풀어주리. 洩我心中怨
그러잖아도 폐제와 하태후가 살아 있는 게 마음에 걸리던 동탁이 었다. 은근히 충의지사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그 구절을 듣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에게 무사 열 명을 딸려 폐제를 죽이라 명했다.
이때 폐제는 하태후 및 당비와 더불어 궁 안의 누각 위에 올라가 있었다. 궁녀로부터 이유가 왔다는 말을 듣자 폐제는 크게 놀랐다.
“무슨 일로 왔는가?”
폐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유는 짐독이 든 술을 내놓으며 대답했다.
“봄날이 화창하와 상국께서 특히 수주(壽酒)를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태도가 수상쩍었다. 곁에 있던 하태후가 그런 이유를 다그쳤다.
“그게 참으로 오래 살기를 비는 술이라면 네가 먼저 마셔보아라.”
그 말에 이유가 본색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마시지 못하겠소?”
그리고 좌우를 불러 단도와 흰 비단 띠를 내놓으며 말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겠거든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당비가 나서서 대신 죽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질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당비를 꾸짖어 물리친 뒤 하태후를 가리켜 비정하게 말했다. “당신부터 마시시오.”
그러자 하태후는 꾀 없이 동탁을 낙양으로 불러들인 오라비하진
을 소리 높이 욕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먼저 드시오.”
이유는 그런 하태후를 두고 폐제를 재촉했다.
“내게 어머님과 작별할 여유를 주시오.”
폐제는 그렇게 대답하고 한차례 통곡한 뒤 구슬픈 노래를 지어불렀다.
하늘과 땅이 바뀜이여, 해와 달도 뒤집혔네. 天地易兮日月飜
만승의 자리를 버리고 물러나 번을 지키는도다. 棄萬乘兮退守藩
신하의 구박을 받음이여, 목숨조차 길지 못하겠구나. 爲臣滬兮命不久
대세는 가버리고 부질없는 눈물만 흐르네. 大勢去兮空淚濬
당비 역시 노래를 지어 답했다.
하늘이 무너지려 하네. 땅조차 견디지 못하겠구나. 皇天將崩兮后土頹
몸은 황제의 아내로되 따라가지 못함이 한이네. 身為帝姬兮恨不隨
죽음 삶의 길이 다름이여, 이제는 헤어짐뿐이로구나. 生死異路兮從此別
어찌할거나 홀로 남겨짐이여, 가슴속엔 슬픔만이네. 奈何煢速兮心中悲
노래를 마친 뒤 서로 부둥켜안고 우니 그 슬픈 정경에 무사들까 지 멈칫했다. 그러나 모진 이유는 더욱 매섭게 그들을 재촉했다. 하 태후가 다시 그런 이유를 소리 높여 꾸짖었다.
“역적 동탁은 우리 모자를 핍박했으니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오, 너희는 그 못된 짓을 도왔으니 반드시 멸족의 화를 입으리라!” 그 말에 이유는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스스로 태후를 죽인 뒤 무사들을 호령하여 폐제와 당비도 죽이게 했다.
이유가 돌아와 그 전말을 들려주자 동탁도 노하여 그들의 시체를 성 밖에 끌어내 아무렇게나 묻어버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