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7화 : 복사꽃 핀 동산에서 형제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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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7화 : 복사꽃 핀 동산에서 형제가 되고


복사꽃 핀 동산에서 형제가 되고

이월 초순에 일기 시작한 황건란의 회오리는 한 달도 못 돼 유비 가사는 유주(幽州)로까지 휩쓸어 왔다. 장각(張角)의 군사 한 갈래 가 유주성을 공격한 게 그 시작이었다.

유주 목사 유언(劉焉)은 역시 한의 종실(室)로 군사를 부리는 일 에 그리 밝지 못했다. 황건적이 경내의 군리(郡)와 현령들을 죽이 고 몰려온다는 말을 듣자 놀라 교위 추정(鄒靖)을 불러들여 물었다. 

“황건적이 이리로 몰려온다니 어쩌면 좋겠는가?”

추정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약간의 무재(武)도 갖춘 이였다. 걱 정을 하면서도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지금 도적 떼는 무리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습니다. 명공(公)께 서는 마땅히 의군을 모으시어 적을 맞이하십시오. 아직도 백성들 간에는 충의지사와 의기남아가 많이 숨어 있으니 반드시 큰 힘이 될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 길밖에 없었다. 조정이 있다 하나 도적 떼가 사방에 서 벌떼처럼 일고 있는 마당에 언제 원군(軍)을 보내올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유언은 경내 곳곳에 방을 붙이고 널리 군사를 모 았다.

유언의 방문은 탁군 탁현에도 이르렀다. 그날도 어수선한 세상 소 식이나 들으려고 일찍 성안으로 나온 유비는 한군데 사람들이 모여 서 웅성거리는 담벽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걸린 방문을 보니 바로 태수 유언이 새로이 주군(州軍)을 모은다는 내용이었다.

일찍이 스승 노식이 떠나면서 한 당부가 아니더라도 황건적은 이 미 유비에게는 반드시 무찔러야 할 마음속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그는 민란의 소문도 여러 번 들었고 갖가지 도둑 떼도 겪었지 만, 황건적처럼 천하를 송두리째 삼키려들 만큼 큰 규모와 넓은 지 지를 바탕으로 한 난리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한(漢)제국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분개와 혐오를 품어왔다. 그러나 황건적의 궐기가 그 치료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악을 더 큰 악으로 바꾸려는 거칠고 잔인한 반역 음모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가 충 성의 대상으로 받들어온 한 제국의 사백 년 권위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가장 크고 급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를 따르 는 무리가 약간 있다 해도 그것은 오직 뒷골목 세계의 어둠 속에서였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주군의 하급 관리로 출발할 처지나 나이도 못 되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유비는 문득 자기가 걷고 있는 알 수 없는 길이 다시 불안해지며 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때 갑자기 유비의 등 뒤에서 질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대장부가 나라를 도와 힘쓸 생각은 않고 어찌 탄식만 하슈?”

유비가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장비가 정색을 하고 서 있었다. 정 색한 장비를 보니, 여덟 자 키와 표범의 머리에 고리눈이 호랑이 수 염과 어울려 평소에 볼 수 없던 종류의 당당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네가 웬일이냐?”

유비가 약간 뜻밖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장비가 한층 엄숙 하게 대답했다.

“형님은 언제나 나를 술주정뱅이에 망나니로만 여기시지만 나도 크고 작은 일은 구별할 줄 안단 말이오.”

“나도 네가 나라와 도적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으로는 보지 않 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이제 와서 군현의 갑졸로라도 출발할 작정이냐?”

“못할 건 뭐 있소? 하지만 뭐 정히 남의 졸개 노릇을 하기 싫으면 우리가 의군을 끌어모아 대장 노릇을 하면 될 거 아니오?”

“나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따로 군사를 모은다는 것이 말로만 되는 일이냐?”

“군자로 쓸 재물이라면 내게 약간은 있소.”

그 말에 유비가 더욱 놀라 물었다.

“네게 무슨 재물이 있느냐?”

“지난날 양부가 어린 나를 난리 중에서 구해 연나라를 빠져나온 때 함께 감추어 온 보화를 불린 것과 자신이 이 저잣거리에서 술을 팔고 돼지를 잡아 모은 돈을 고스란히 물려준 게 있소. 또 형님은 내 가 부근의 부자 놈들과 장사치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밤낮없이 술이 나 퍼마시고 다니는 줄로만 알고 있지만, 그 돈도 일부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모아두었소.”

듣느니 새롭고 놀라운 소리뿐이었다. 언제나 장비를 덩치 큰 어린 아이로만 여겨온 유비로서는 얼른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벌써 여러 해 사귀어오는 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한 적이 없는 장비 라 또한 그 말을 무턱대고 의심할 수만도 없었다. 그런 유비를 다시 장비가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어떻소? 형님. 이 장비와 함께 탁현의 용사들을 모아 한번 큰일을 해보지 않겠소?”

그러자 유비의 얼굴에도 차츰 장비를 믿는다는 표정이 드는가 싶 더니 곧 감개 어린 표정으로 변했다.

“장하다. 그렇다면 우리 저 주루(樓)에 들어가 의논해보자.” 

이윽고 유비는 그렇게 대답하며 장비를 가까운 술집으로 끌었다. 두 사람이 큰소리로 술과 고기를 청하고 막 자리에 마주 앉았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주루 앞에 수레 멎는 소리가 나며 한 결기 있는 목소리가 먼저 발을 건너 들려왔다.

“주인장 술 한 동이 빨리 내놓으시오. 얼른 마시고 성안에 들어가 초모(招募)에 응할 작정이오.”

맑고 우렁찬 소리만 들어도 금세 누구인지 알 만했다. 아홉 자 키와 익은 대춧빛 얼굴에 두 자 넘는 수염을 늘어뜨린 관우, 바로 그사람이었다.

“아니, 장비 이 사람, 그리고 유공(公)이 대낮부터 이곳에서 만나 무엇 하시오?”

이윽고 둘을 알아본 관우도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사이 장비와는 형아 아우야 하는 사이가 되었고, 유비와는 십년지기처럼 된 관우였 다. 장비와는 자칫 게을러지기 쉬운 무예 수련을 통해 친하게 되었 고, 유비에게는 그의 연줄에 힘입어 적어도 탁군 안에서는 관부(官 府)에 쫓기지 않게 된 빚을 진 것 외에 살이에서도 적지 않은 보살 핌을 받아온 까닭이었다.

“아이고, 관우 형님. 잘 왔소. 그러잖아도 마침 형님 얘기를 꺼내 려던 참이었소.”

장비가 그렇게 요란을 떨었고, 유비도 반갑게 소매를 끌어 관우를 자리에 앉혔다.

“그래, 듣자 하니 현군(縣軍)에라도 드실 작정이신 모양인데, 누구 의 부름이라도 받으셨소?”

관우가 자리를 정하기 바쁘게 유비가 묻는 말이었다. 관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그저 나라에서 크게 사면령을 내려 내가 쫓기 는 신세를 면하게 해주었으니 나도 이제 나라를 위해 싸워볼까 하는 참이오.”

죄지은 자에게 사면령을 내려 벌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병역을 과하는 것은 무제(武이래로 큰 원정이나 변란이 있을 때마다 한 나라가 취해온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에는 쫓기는 자들도 자수 하여 군적에만 들면 지난날의 죄를 묻지 않게 되는데 방금 영제(靈 帝)도 황건적의 난리를 다스리기 위해 사면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그런 관우의 대답이 좀 놀라웠던 듯했다. 자신 도 모르게 목소리를 약간 높이며 물었다.

“아니, 그럼 관공처럼 신무(武)하신 분이 졸오(伍)에 서서 싸 우시겠단 말씀이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졸오와 장렬(將)이 무슨 구분이 있 겠소이까? 다만 가진 힘과 익힌 재주를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관우의 대답은 초연하기만 했다. 그러자 장비가 참지 못하고 털어 놓았다.

“그러지 말고 관우 형도 우리와 함께 의군을 일으켜봅시다. 어디 서 싸우든 나라를 위해 싸우기만 하면 될 거 아니오?”

“의군이라고? 아니, 자네가?”

“왜 나라고 항상 탁현 저자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주먹질이나 하 며 보내란 법이 있소? 나도 이 기회에 공을 세워 떳떳하게 머리 들 고 살고 싶소.”

“그렇지만 무슨 재주로 의군을 일으키고 지탱하겠는가?”

“장비의 말을 듣고 보니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소.”

이번에는 유비가 장비를 대신해 물음에 답한 뒤 천천히 조금 전 장비와 주고받은 말들을 관우에게 요약해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봅시다. 이왕 싸울 바에야 졸오에 서기보다는 적더라도 일군을 거느리는 편이 이 관아무개에게도 나을 것 같소.”

듣기를 마치자 관우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자 장비가 웬일로 마침 날라온 술을 물리치며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큰일을 시작하기에는 이 자리가 마땅하지 못한 것 같소. 이러지 말고 우리 달리 장소를 택해 예를 갖추는 게 어떻겠 소? 마침 내 집 뒤에는 복숭아밭[桃園]이 있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꽃이 한창 만발하였소. 내일 그 복숭아밭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 세 사람이 사생을 같이할 의(義)를 맺은 뒤 큰일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이에 세 사람은 다음 날 모여 형제의 의를 맺기를 약속하고 헤어 졌다. 나이로 보면 관우가 가장 위이고 다음이 유비이며 끝이 장비 였지만, 관우의 주장으로 유비가 맏이가 되고 다음이 관우가 되었으 며 장비는 막내가 되기로 했다.

“일에는 근본이 있고 무리에는 우두머리가 있게 마련이오. 무릇 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뽑는 일은 어짊과 슬기로움을 위주로 해야 하 니 어찌 이 아무개에게 가당이나 하겠소. 여기 이 유형은 한나라 제실(室)의 종친으로 어짊과 슬기로움을 두루 갖추신 분이니 응당 우리 의군으로는 주장(將)이고 형제로서는 맏형이 되어야 하오.”

그게 관우의 주장이었다.

이튿날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전날 약속한 복숭아밭에 모여 검은 소와 흰 말을 제물로 삼고 하늘과 땅에 형제가 되었음을 알리 는 제사를 지냈다. 먼저 검은 소와 흰 말의 피를 섞어 서로 나누어 마신 뒤, 나란히 향을 사르며 미리 마련해 간 맹세의 글]을 읽는 순서였다.

‘고하건대 여기 선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비록 성은 다르나 큰 의와 두터운 정으로 맺어 이제 형제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치어 어려울 때는 서로 구하고 위태로울 때는 도우며 위로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고 아래로 창생을 평안케 하고자 합니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되 죽기만은 같 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이기를 바라오니, 황천후토(皇天后土)여 이 뜻 을 굽어살피소서. 만일 우리 가운데 의를 저버리고 형제의 정을 잊 는 자가 있거든 하늘과 사람에게 함께 베임을 당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런 다음 형제의 예로 먼저 관우와 장비가 나란히 유비에게 절을 올리고, 이어 다시 장비가 관우에게 형을 대하는 예로 절을 올렸다. 제사를 끝낸 그들 세 사람은 그날로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널리 향 리의 용사들을 불러들였다. 평소부터 유비와 장비를 따르던 탁현 저 잣거리의 건달들을 비롯하여 스승 노식 아래서 함께 배운 동문들이 며 인근의 유협(遊俠)들, 그리고 관우의 가르침을 받던 양향(鄕) 이가촌(村)의 장정들만으로도 삼백이 넘었다.

술자리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유비는 그들에게 황건적 토벌의 대 의를 설파하고 함께 싸워줄 것을 청했다. 비록 저잣거리에 몸을 낮 추고 있어도 유, 관, 장 삼형제가 예사로운 인물들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거기다가 황건적의 노략질과 살상도 더는 강 건너 불일 수만은 없고 보니 하나같이 의군이 되어 싸우기를 자원했다.

이에 힘을 얻은 유비 삼형제는 한나절 의기를 돋우며 크게 마신 뒤에 이튿날부터 그곳에다 차일을 치고 발군(軍)할 준비에 들어갔 다. 먼저 장비의 재물을 풀어 용사들이 쓸 칼과 활과 화살을 사들이 는 한편 관우를 시켜 간단한 조련을 시키고 몇 가지 군율을 익히게 했다.

하지만 장비의 재력에는 한도가 있었다. 지원자는 줄을 잇는데 겨 우 삼백을 위한 병장기와 얼마간의 군량을 마련하는 것으로 장비가 맨몸이 되다시피 하며 내놓은 재물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유비도 가진 것을 모두 털고 그동안의 알음을 통해 거둬들이기도 해보았으 나큰 보탬은 되지 못했다. 오래잖아 용사들이 싸우기를 원하며 찾 아와도 돌려보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더욱 답답한 것은 그들에게 말이 없는 일이었다. 혹 말 을 타고 온 이에다 유비와 관우의 말을 합쳐도 삼백 명 군사에 열 필이 넘지 못했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소. 부자 놈들을 얼러 재물을 좀더 뺏어내 든지 말 도둑질이라도 나서야겠소.”

임시로 연 군막에서 유비와 관우가 그 일을 근심하고 있을 때 장 비가 불쑥 말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유비가 점잖게 타일렀다.

“우리가 대의를 앞세우고 이제 큰일을 시작하려는데 어찌 도둑 떼 의 흉내를 내겠느냐? 좀더 기다려보자. 나도 원기(元起) 아저씨에게 글을 내 도움을 청해보겠다.”

“나도 소쌍(蘇雙)에게 글을 내보겠습니다. 마침 그가 말도 사고 파 니 몇십 필쯤이야 어떻게 될 것도 같습니다.”

관우도 곁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장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금 하루가 급한데 언제 글질이나 하며 놈들의 선심을 기다리 고만 있을 수가 있소? 내게 장정 백 명만 주시오. 까짓것 부근을 확 쓸어 마필과 군자를 넉넉히 구해 오겠소.”

금방이라도 사모를 짚고 나설 기세였다. 그런데 마침 망을 보고 있던 장정 하나가 군막으로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말입니다. 백여 필은 좋이 되어 보이는 말 떼가 저자에서 이쪽으 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이 한꺼번에 군막을 나가 내려다보니 정말로 말 한 떼가 부옇게 먼지를 날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어떤 놈의 말인지 모르지만 저걸 뺏어 씁시다. 황건 적을 물리친 뒤에 돌려주면 될 거 아뇨?”

장비는 말을 보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손짓 을 해 장정들을 불렀다. 그러나 한동안 말떼가 몰려오는 것을 살피 던 유비가 조용히 손을 저어 장비를 말렸다.

“장비, 기다려라. 보아하니 이리로 몰려오는 것 같다. 차라리 그 주인에게 좋은 말로 도움을 청해보자. 힘으로 덮치는 것은 그때 가 서도 늦지 않다.”

그때 다시 관우가 거들었다.

“형님 말이 맞네. 아우, 잠깐 기다려보세. 더군다나 말 떼를 모는

사람들이며 앞선 주인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은 듯하네.”

과연 그랬다. 도원으로 드는 걸 보니 앞선 사람은 소쌍과 장세평이었고 말 떼를 모는 것은 그들의 종자들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나.’

유비는 속으로 가만히 외쳤다. 그들이라면 어떻게 말을 변통해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터럭만큼도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 둘을 맞았다.

“장대인(人)과 소형(兄)이 누추한 진중을 어이 알고 찾으 셨소?”

“세 분 대협께서 의군을 일으키셨다는 소문은 이 탁군 전체에 파 다합니다. 이 소아무개의 귀가 촛농으로 틀어막혀 있지 않은 다음에 야 어찌 그걸 듣지 못했겠습니까? 해서 도울 일이 없을까 하고 달려 와보았습니다.”

소쌍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그렇게 대답했다. 장세평도 평소 와는 딴사람 같은 얼굴로 소쌍의 말을 거들었다.

“아무래도 의군을 일으키시자면 마필과 군자가 필요할 것 같아 여기 말 백여 필과 금은 오백 냥, 좋은 쇠 천근을 가지고 왔소. 거두 어서 요긴하게 써주시면 그보다 더 다행이 없겠소.”

“하지만 아직 아무런 공도 이루지 못한 터에 어찌 이렇게 많은 재 물을 거둬들일 수 있겠습니까? 찾아주신 두 분의 후의만으로도 이 유아무개는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속으로는 기쁨으로 뛸 듯하면서 유비는 짐짓 사양하는 체했다. 장 비가 내달으며 무어라고 떠들어대려다가 유비의 엄한 눈길을 받고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소쌍이 다시 그런 유비의 말을 받았다.

“유대협께서 저희가 너무 생색을 낸다 여기실까 바른대로 말하겠 습니다. 원래 이 말들은 팔기 위해 북방으로 끌고 가던 것이었으나 도중에 황건적이 있어 부득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다 가 가만히 생각하니, 중산(中山)으로 끌고 가보았자 말이 필요한 관 부의 성화를 배겨낼 것 같지 않고, 더욱이 도중에 도적 떼나 만나면 공짜로 빼앗기기 십상이라 장대인과 의논하여 이리로 온 것입니다. 금은과 쇠는 마필에 붙인 작은 정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인은 이(利)를 무섭게 여기는데 어찌 아무런 대가도 주지 못하면서 이 많은 것들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 려 그렇게 겸손히 말하시니 더욱 손이 오그라드는 것 같소이다.” 

“장사치라고 해서 어찌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겠습니까? 비록 몸 을 던져 싸우지는 못하나 재물이라도 내어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니 대협께서는 거두어주십시오.”

소쌍의 청은 자못 간곡했다. 그러자 옆에 섰던 관우가 천천히 입 을 열어 소쌍을 거들었다.

“형님, 소형의 뜻이 이토록 간곡하니 거두어들이시지요. 뒷날 도 적을 물리친 후에 되돌려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맞소. 우리가 뭐 이 말을 차지한다고 해서 사사로운 욕심이나 채 우자는 것은 아니잖소? 위로 나라를 구하고 아래로 백성을 평안케 하자는 노릇이니 이만 거두어들입시다.”

장비도 더 참지 못하고 나서서 그렇게 관우를 거들었다. 유비는 그래도 한동안을 더 사양하다가 장세평까지 나서 거듭 간곡히 청하 자 겨우 마필과 금은을 받아들였다.

“두 분의 의기(氣)를 뼈에 새겨 길이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소쌍과 장세평이 중산으로 돌아간 뒤 유비는 곧 솜씨 좋은 대장 장이를 불러 새로 얻은 쇠로 세 사람의 무기와 갑주를 만들고 용사 들을 위해서도 투구와 갑옷을 만들게 했다.

원래 유비에게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보검이 있었다. 중산정왕(中 山靖)이 차던 칼로 보석과 구슬로 장식된 값진 것이었으나 실제 싸움에 쓰기에는 너무 짧고 가벼웠다. 이에 유비는 새로이 다섯 자 길이의 쌍고검(雙股劍)을 하나 벼리어 무기로 삼았다. 관우에게도 전에 쓰던 청룡도가 있었으나 역시 무게 여든두근에 칼자루만도 열 자나 되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새로이 벼리었고 장비도 선대 의 철사모(鐵蛇)를 버리고 새로이 길이가 한 길 여덟 자나 된다는 뱀 모양의 창八蛇矛]으로 바꾸었다.

군자가 넉넉해짐에 따라 용사들도 더 받아들였다. 이에 의군의 수 는 삼백 명에서 오백 명으로 늘어났다. 거기다가 말이 백 필이 넘고 용사마다 날카로운 무기에 갑주까지 대강 갖추게 되니 여느 의군과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병이었다.

무기며 갑주, 말, 깃발 등이 갖추어지고 용사들도 어느 정도 대와 오(伍)를 갖출 수 있게 되자 세 사람은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유주성으로 군사를 몰아갔다.

“돗자리 장수가 대장이 되었군.”

“이가의 식객도 장수가 되었네.”

“아니, 저건 술 팔고 돼지 잡던 개망나니 장비가 아닌가?”

“한다 하는 탁군의 건달들은 싹 쓸어가는군.”

그들 의군이 탁현을 떠날 때 구경꾼들 가운데는 그렇게 빈정거리 는 자들도 있었지만 유, 관, 장 세 사람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유주의 태수 유언은 장수 세 사람이 의군 오백 명을 이끌고 당도 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뻤다. 교위 추정을 재촉해 세 사람을 불러 들이고 각기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현덕(德, 유비의 자. 앞으로는 당 시의 관례대로 유비를 자주 현덕이라 호칭하게 될 것임)이 같은 한실 종친 인 것을 알고 더욱 기뻐하며 가만히 따져보니 조카뻘이었다. 

“조카가 이렇게 와주니 천군만마가 구원을 온 것보다 더욱 든든 하네. 아무쪼록 잘 싸워 큰 공을 이루게.”

유언은 현덕의 두 손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당부하고, 술과 고기를 내어 따라온 오백 용사를 위로했다.

유현덕의 첫 출전은 그로부터 사흘도 되지 않아 있었다. 황건적의 한 장수인 정원지(志)가 군사 오만을 이끌고 드디어 탁군으로 밀려들자 유언이 교위 추정을 불러 명했다.

“그대는 즉시 유현덕 등 세 사람을 선봉으로 삼아 도적을 막으라.” 

이에 현덕은 기꺼이 오백 의군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황건적이 몰려오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탁군 대흥산(大興山) 아래 이르니 황건적은 벌써 그곳까지 밀려와 있었다. 모두 산발한 머리에 누런 띠만 질끈 동인 적의 오만 대군은 들판을 메뚜기 떼처럼 뒤덮고 있었 다. 비록 이끌고 온 군사의 백 배가 넘는 적세였지만 현덕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군이 대치하여 멈추어 서자 말을 달려 앞서나오며 소리쳤다.

“나라에 반역한 도둑놈들아! 어서 빨리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그런 그의 오른쪽에는 관운장이 두 자가 넘는 검은 수염을 휘날 리며 여든두 근 청룡도를 들고 서 있고, 왼쪽에는 장익덕이 고리눈 에 역시 한 길 여덟 자나 된다는 사모를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

황건적의 대장 정원지는 크게 성이 났다. 잘 조련되었다는 관군도 누런 깃발만 보면 벌벌 떨며 달아나는데, 대오도 제대로 못 갖춘 잡 병 오백을 거느리고 유현덕이 그토록 큰소리를 친 까닭이었다. 

“가서 저 애송이 촌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정원지는 부장(副將) 등무(武)를 보고 그렇게 명했다. 거기까지 는 승승장구해온 터라 등무는 기세 좋게 말을 달려 나갔다. 그걸 보 고 현덕 곁에 섰던 장비가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마주 달려 나왔다. 하지만 가엾게도 등무는 장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장비의 손이 들리며 창이 한번 번뜩하는가 싶더니 등무는 한마디 비명과 함께 몸 을 뒤집으며 말 등에서 떨어졌다.

등무가 단 일합(合)에 꺾이는 것을 보고 자기편의 사기가 떨어 질 걸 염려한 정원지는 누구에게 명할 것도 없이 스스로 칼을 뽑아 춤추며 말을 몰았다.

“제가 저자의 목을 얻어 오겠습니다.”

이번에는 관운장이 청룡도를 비껴들고 마주쳐 나갔다.

정원지의 운명 또한 등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운장의 달려 나 오는 기세에 놀란 정원지는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청룡도에 두 동강이 나서 말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그때껏 하늘 아래 자기들의 대장밖에 없는 줄 알고 있던 황건의 무리들은 그 끔찍한 광경에 완전히 혼이 빠지고 말았다. 한번 싸워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기를 내던지며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덕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오백 용사를 휘몰아 덮치니 항복하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유, 관, 장 세 사람에게는 서로에 대한 새로운 감격이었다. 관우와 장비에게는 항시 너그러운 미소와 부드 러운 목소리로만 이해되는 유비에게 그처럼 지용을 겸한 장수의 재 질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유비는 유비대로 두 아우의 용맹과 무예가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대단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하찮은 도적 떼라지만 적어도 한 무리의 대장 둘을 각기 한창 한칼에 떨어뜨리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뒤이어 달려온 교위 추정도 놀랐다. 선봉으로 가 적의 기세나 꺾 어 주면 다행이라 여긴 유비의 군사들이 그 백 배나 되는 적을 여지 없이 깨뜨려버린 때문이었다. 턱없이 우쭐거리며 몰려온 시골 장정 들에 지나지 않으리란 짐작으로 은근히 유비가 이끌고 온 군사들을 깔보고 있던 추정은 그때부터 유비와 그의 용사들을 다시 보게 되었 다. 일당백이란 말이 있다더니 그들이 바로 그런 일당백의 용사들이 었다.

첫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니 유주목(幽州牧) 유언은 친히 성문 밖까지 나와 유비의 군사들을 맞았다. 그리고 전곡(錢穀)과 피 륙을 풀어 그 공을 기리고 크게 잔치를 벌여 노고를 위로했다. 군사 들도 갑주 끈을 풀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겼다. 하지만 오래 쉴 팔자는 못 되었다.

다음 날 청주(靑州)태수 공경(景)에게서 급한 파발이 왔다. 황건적 수만이 성을 에워싸 곧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급히 원군을 보내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급보를 받은 유언은 곧 현덕을 불 러들여 물었다.

“청주가 위태롭다니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우리도 군사가 넉넉지 못한데 실로 난감하구나.”

그러자 현덕이 선뜻 대답했다.

“이 비(備)가 구하러 가겠습니다.”

“길이 멀고 도적 떼가 여기저기 날뛰는데 겨우 오백 명으로 무얼하겠나?”

유언은 그렇게 반문한 뒤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교위 추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유주의 병마 오천을 거느리고 여기 이 유현덕의 뒤를 받 쳐 청주를 에움에서 구하고 오라.”

유언으로서는 큰 용단이었다. 나중에 문책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는 하지만 오천씩이나 빼낸다면 유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그 런데도 유주 경내의 황건적은 이미 깨뜨린 뒤여서인지, 유언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명을 받은 현덕은 관, 장두 아우와 오백 용사를 거느리고 그날로 먼저 청주를 구원하러 떠났다. 첫 싸움의 피로가 아직 씻기지 않은 채였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청주성을 에워싸고 있던 황건적들은 구원병이 이른 걸 알자 군사를 나누어 어지러운 싸움을 일으켰다. 성을 에워싼 자는 계속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는 길을 나누어 여기저기서 오는 구원병 을 막는 식으로, 우세한 머릿수에만 의지한 계책이었다.

현덕과 그 아래의 오백 용사는 거기서도 용감히 싸웠으나, 워낙 적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은 데다 또 여러 갈래에서 대항해 오니 이 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삼십 리나 군사를 물려 진채를 내리고 관우, 장비 두 아우를 불러 말했다.

“도적들은 머릿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반드시 기계(奇)를 써 서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것 같네.”

그리고 추정의 본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한바탕 매복계를 펼쳤다. 관우로 하여금 가까운 산 오른편에 일천 군마를 이끌고 숨어 있게 하고, 장비는 산 왼쪽에 역시 일천 군마를 거느리고 숨게 한 뒤 징소 리를 신호 삼아 일제히 내달아 싸우도록 일렀다. 적의 대군을 그리 로 유인하는 것은 현덕 자신과 추정이 남은 삼천여의 인마로 직접 해볼 작정이었다.

관우와 장비가 어둠을 틈타 각기 일천 군마를 거느리고 지정된 곳에 숨자 현덕과 추정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남은 군사를 이끌고 다시 청주성으로 향했다. 기치와 창검을 정연히 하고 북까지 울리며 당당히 쳐들어갔다.

그걸 본 황건적들은 다시 그 몇 배의 대군으로 마주쳐 왔다. 전날 의 승리로 자만심이 생겨 혼전을 버리고 정공으로 맞서 온 것이었 다. 양군이 부딪자 현덕은 한바탕 싸우는 체하다가 짐짓 패한 양군 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덕의 매복계를 알 리 없는 황건적들은 자기들이 다시 이긴 것 이라 믿고 승세를 타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십리도 못 가 한 산허리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현덕의 군중에서 일제히 징소리가 나자 산 좌우에 관우와 장비의 복병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오고 현 덕도 말 머리를 돌려 역습해왔다.

황건적들은 아직도 머릿수에 있어서는 현덕군에 비교도 되지 않 을 만큼 우세하였으나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관 우, 장비의 복병이 수십만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그때껏 얕보며 따 라왔던 현덕의 군사들마저 갑자기 몇만으로 불어난 듯한 느낌이었 다. 싸울 용기가 날 리 없어 눈사태 뭉그러지듯 저희 패거리가 에워 싸고 있는 청주성을 바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청주 태수 공경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쫓긴 적이 성 아래로 몰려드는 걸 보자 성병(兵)과 더불어 성문을 열고 나와 싸움을 도왔다. 그렇게 되고 보니 다시 앞뒤로 적 을 맞게 된 황건적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베이고 밟히고 하면서 극히 적은 수만 목을 붙여 달아났다. 그로써 함락 직전에 있던 청주 성은 에움에서 풀려났다.

공경은 적이 완전히 물러난 걸 알자 현덕 등을 불러 크게 공을 치 하하고 소와 돼지를 잡아 군사들을 대접했다. 이때 교위 추정은 유 주성이 불안하여 급히 돌아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현덕의 생각은 달 랐다.

“이제 교위께서는 그만 유주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비는 원래 데 려온 인마와 함께 달리 가봐야 될 곳이 있습니다.”

유비의 그 같은 말에 추정이 적이 놀라운 표정으로 물었다.

“태수께서는 도적들로부터 유주를 지키는 일에 장군을 기둥이나 들보처럼 여기시는데 어인 말씀이오? 우리 유주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오?”

“근자에 들으니 노식 중랑장께서는 광종() 땅에서 황건의 우 두머리 장각(角)과 싸우고 계시다고 합니다. 비가 일찍이 스승으 로 모신 바 있어 이번에는 그쪽으로 도우러 갈 작정입니다. 유주의 도적은 이미 예봉에 꺾였으니 앞으로 큰 우환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추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비의 말을 받아들였다. 

“장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니 이 정(靖)도 말릴 수 없구려. 의기가 장하시오. 부디 큰 공을 이루기 바라오.”

그리고 데리고 온 오천 인마를 이끌고 유주로 돌아갔다.

유비는 자신이 본시 이끌고 온 오백의군만을 이끌고 그날로 광 종을 바라 떠났다. 광종에 이르자 인마를 영(營) 밖에 세워둔 채 노 식의 진중을 찾아간 유비는 먼저 이름을 들여보내 옛 스승께 뵙기를 청했다.

노식도 옛 제자를 잊지 않고 있었다. 손수 장막을 걷어 젖히고 유 비를 맞아들였다.

“내가 탁군을 떠날 때는 아직 홍안의 소년이더니 그사이 헌헌장부 가 다 되었구나. 그래 어인 일로 이 험한 곳까지 와 나를 찾았느냐?” 

유비가 스승을 뵙는 예를 마치자 노식이 부드럽게 물었다.

“두 아우와 오백 장정을 모아 스승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두 아우라…… 너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이 아니냐? 그리고 오백 장정이라니?”

“두 아우는 이번에 결의한 관우와 장비란 자이옵고, 오백 장정은 오직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일념으로 의군에 응한 탁군의 용사들입 니다.”

이어 유비는 의군을 일으키게 된 경위와 유주 및 청주에서의 싸 움 등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듣고 난 노식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나는 네가 정강성(鄭康成, 정현)의 문하에 들어 학업을 잇지 않고 탁군의 저잣거리를 헤맨단 말을 듣고 근심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오히려 내 뜻을 저버리지 않았구나.”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습니다.”

“공손찬과는 아직 자주 내왕이 있느냐?”

“몇 년 전 탁현 현령으로 있을 때 얼마간 가까이서 대한 뒤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럴 것이다. 아직 양주(州)에서 오랑캐를 막느라 몸을 뺄 겨를이 없다. 실은 이번에도 그를 불러 곁에 두고 쓰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해 달리 사람을 구해 왔다.”

그러더니 노식은 장막 밖에 있는 사졸 하나를 불러 명했다.

“원교위를 들라 하라.”

“원교위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원소(라고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명문인 하남 원씨가의 후예니라. 이번에 특히 천자께 청하여 함께 데려 온 인재니만치 알아 두어 나쁠 건 없다.”

원소라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러나 탁현에만 처박혀 있어 만날기회가 없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만나게 되니 유비로서는 자못 감격스러웠다. 벌써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낙양의 인재를 만나게 되 는 이름 없는 시골 청년의 호기심과 환상 때문이었다.

원소는 오래잖아 나타났다. 처음 원소를 대하는 유비는 그 빼어난 용자에 넋을 잃다시피 했다. 원래도 준수한 모습인 데다 금동 투구와 금빛 수술, 비단 깃을 단 번쩍이는 전포(戰袍)에 보석과 구슬 로 칼자루를 장식한 보검을 차고 나니 더욱 준수하고 영걸스럽게 보 였다.

‘저것이 바로 영웅의 모습이다.’

유비는 언뜻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원소는 유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똑바로 노식에게 다가가 군례를 올리며 단정히 물을 뿐이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러네. 내 특히 원본초(初)에게 알고 지내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불렀다네.”

그리고 유비의 손을 끌며 소개했다.

“여기 이 아이는 탁군에 사는 유비로 자는 현덕이며 한실 종친일 세. 지난번 내가 신병을 핑계로 은거했을 때 얻은 제자인데 이번에 향리의 용사 오백을 모아 특히 이 옛 스승을 돕고자 찾아왔네.”

“우레 같은 이름만 듣다가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이 비에게는 광 영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치심을 빌겠습니다.”

유비는 공손히 손을 모아 예를 했다. 그러자 비로소 원소도 유비를 살펴보았다. 좀 특이한 용모이기는 하나 그리 대단찮다고 느껴지는 듯했다.

“원소라 합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빌겠습니다.”

몸에 밴 예절로 공손히 두 주먹을 모으기는 해도 어딘가 마지못 해 하는 것 같은 데가 있었다.

사실 낙양에서 당대의 명사들만을 사귀어온 원소에게는 유비가 특별한 인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탁군 같은 궁벽한 곳에 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쭐거리다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식으로 나라가 어지럽자 섣부른 공명심에 잡병 약간을 모아 나선 시 골뜨기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 유비의 기이한 체모는 사사로이 지은 허름한 전포에 가리워 드러나지 않았고, 크고 환한 정신도 아 직은 접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노식 같은 인물이 소 개하지 않았더라면 원소의 자만으로는 이름조차 통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응대하는 데 밝은 유비가 그런 원소의 기분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일시 부끄러움과 분함에 빠졌으나 이내 슬 며시 위로가 느껴졌다. ‘이 사람의 정신은 빼어난 그 용모를 따르지 못하는구나, 덕도 겉뿐인 예절을 따르지 못하고…….’ 하는 생각이 얼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부시던 원소의 용모도 새롭게 비쳤다. 이목구비 무 엇 하나 나무랄 데 없었지만 어딘가 풀어지고 흩어져 결단성과 의지 를 보여주고 있지 못했다. 처음 그가 나타났을 때 어떤 무형의 힘처 럼 유비를 억누르던 눈부신 빛 같은 것도 명문이란 배경과 오랜 배 움과 몸에 배인 예절이 어우러져 내는 무력한 후광일 뿐이었다. 분명 한 거목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시대에서만 천하를 위한 재목이 될 수 있는 거목이었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살피고만 있자 노식이 이 상한 듯 유비에게 물었다.

“천하의 원소를 만나보니 어떠냐?”

“안목이 새롭게 열리는 듯합니다. 스승님의 은혜로 이 미천한 비 가 일생의 광영을 입었습니다.”

어느새 유비의 얼굴 가득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떠 올라 있었다. 목소리도 어찌나 정성이 우러나는지 두 번씩이나 상찬 을 듣게 된 원소도 절로 마음이 누그러져 사양을 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내가 보니 유공(公)이야말로 숨은 영걸이시오.” 

그렇게 자리가 풀려나가자 노식은 다시 화제를 바꾸어 원소에게 물었다.

“지금 적도의 형세는 어떠한가?”

“아직 저희 근거지에 숨어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움을 풀지 말고 엄하게 감시를 계속하라. 머지않아 군량이 다하면 적도들이 스스로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그런 다음 노식은 유비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곳에는 내가 적의 괴수 장각을 포위해놓고 있으니 너는 영천(川)으로 가거라. 그곳에는 황보, 주준 두 장군이 장각의 아 우장보, 장량과 대치하고 있는 바, 이곳보다 훨씬 형세가 불리하다. 네가 데리고 온 오백 의군 외에 따로이 일천 군마를 줄 터이니 그곳 으로 가서 두 분 장군과 함께 적도를 소탕하도록 해라.”

유비는 이왕이면 스승의 막하에서 싸우고 싶었으나 명이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군사들을 하룻밤 편히 쉬게 하지도 못하고 새로이 받은 관군 천 명을 더하여 영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영천에 이르기 얼마 전이었다. 한군데 들판에서 지친 장졸 을 쉬게 하고 있는데 한 떼의 인마가 부옇게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 고 있었다. 황건적이 미리 알고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싸울 태 세를 갖추고 기다렸지만 가까이 오는 걸 보니 반갑게도 관군이었다. 마보군(馬步軍)을 합쳐 대략 오천쯤 되었는데 기치와 복색이 붉은 것이 몹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유비가 군사를 물려 길을 내주려 하는데 역시 붉은 말을 탄 젊은 장수 하나가 말고삐를 당겨 멈추어 서며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에 속한 군사들인가?”

“중랑장 노식 휘하의 일천 관군과 탁현에서 출발한 의군 오백으 로 이제 영천 황보숭, 주준 두 장군의 휘하로 가는 길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관우와 장비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선 유비 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도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되 어 다시 물었다.

“귀공(貴公)은 누구시오?”

“나는 탁군 탁현에 사는 유비로 의군을 이끌고 노(盧)중랑장을 도 우러 왔다가 이제 그분의 명을 받아 영천으로 가게 된 백신(白身, 벼 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살피던 유비는 문득 선뜩한 기분을 느꼈다. 가 늘고 길게 찢어진 두 눈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빛 때문이었다. 엷은 입술, 짙으나 숱이 많지 않은 수염, 특별히 빼어날 건 없는 얼굴 에 일곱 자에 채 못 미치는 키, 붉은 전포와 호화로운 장식에도 불구 하고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용자였지만 그 몸 전체에서는 이상한 힘 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전날 원소를 처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유비는 그런 생각이 들자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장군의 크신 이름을 물어봐도 허물이 되지 않을는지요?”

그러자 무엇 때문인가 유비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상대가 정중하 게 물음을 받았다.

“나는 패국(國) 초현(縣)에 사는 조조로 이번에 기도위(騎都 尉)가 되어 오천 마보군으로 황보숭 장군의 후진이 되어 적도를 치 러 가는 길이오.”

“역시 세상은 허명을 전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느 분은 아니시 리라 짐작했습니다만………….”

“그렇다면 귀공께서는 이 몸의 보잘것없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 으시오?”

“낙양 북부도위(北部都尉)의 매서운 이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조조야말로 이 낯선 이름의 청년을 만난 것이 감격이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조조도 유비를 순진한 의기로 의군에 나선 시골뜨기 정도로 생각했다. 사사로이 버린 것임에 틀림없는 조잡한 투구를 쓴 온화한 얼굴에 어린 환한 빛도 그런 순진무구함에서 우러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몇 마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그의 공손한 말 투와 겸손한 몸가짐에 어우러져 알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서 힘과 자만을 빼내고 몸가짐을 낮추게 했다. 뚜렷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 의 힘이었다.

‘탁군의 유비라, 어쩌면 나는 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시각을 다투는 전장이었다. 뜻밖에도 모병이 더디고 조련에 시간이 걸려 후 진이 되고 말았지만 원래 조조는 황보숭이 선봉으로 쓰기 위해 발탁 한 인물이었다. 조조 자신도 그 좋은 성공의 기회를 신기하기는 해 도 낯선 이 인물로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모처럼 유공 같은 영웅을 만났지만 군령이 엄하니 더 지체할 수 없구려. 먼저 가겠소이다.”

조조는 그렇게 말한 뒤 뒷날을 기약하고 바람처럼 군사를 몰아갔다.

“아아, 정말 세상에는 빼어난 인물도 많구나. 어쩌면 내가 헛되게 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조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유비가 그렇게 탄식했다. 하지만 장 비에게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무엇 때문에 틀어졌는지 퉁명 스럽게 유비의 말을 받았다.

“형님은 무엇 때문에 그리 한숨을 쉬고 야단이오? 빼어난 인물이라니, 방금 저자를 두고 한 말이오?”

“그렇다. 내 눈이 크게 어둡지 않다면 반드시 세상을 놀라게 할 기재(奇)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목소리는 불난 집 계집 같 고 눈은 수작 부리는 논다니 같은 게 무슨 인물은.”

“아니다.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우니 멀리 미칠 것이요, 눈이 가늘 고 기니 제 마음은 읽히지 않고도 남의 마음은 밝게 들여다볼 수 있다.”

“형님은 무슨 방사나 상자(相) 같은 소리요? 그 반들반들 한 쥐수염에 한 주먹이면 날려버릴 보잘것없는 체수로 제까짓 놈이 하면 무얼 한단 말이오?”

장비가 바윗덩이 같은 주먹까지 휘둘러 보이며 유비에게 대꾸를 계속했다. 그때 조용히 둘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만 있던 관우가 장 비를 나무랐다.

“사람을 그렇게 외모로만 저울질하는 법이 아니다. 어디 우리 고 조께서 수염이 길고 풍성해 혼일사해(混一四海)를 이루셨겠느냐? 회 음후 한신(韓信)이 몸집이 크고 힘이 세서 항우(項羽)를 깨뜨렸겠느냐?”

“그럼 운장 형도 그자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보시오?” 

장비가 못마땅한 듯 씨근대며 관우에게 대들었다.

그러자 관우가 약간 웃음기 머금은 채 대답했다.

“여기 이 형님만큼 대단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헛된 이름을 전하는 법이 없다. 나는 서원교 위를 거느린 건석(蹇碩)의 아재비를 때려죽인 그의 매서운 의기만은 높이 산다.” 

그러고는 유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노중랑의 군막에서 본 그 원소란 자는 어땠습니까?”

“세상에 떠도는 이름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았네. 그도 한 거목이라 할 수 있으되, 비와 거름과 햇볕이 모두 갖추어져야만 겨우 제 대로 자랄 거목 같아 보였네.”

“그럼 이런 난세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란 말입니까?”

“조조를 만나고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드네.”

그때 장비가 다시 퉁을 놓았다.

“형님 차라리 상자로 나 앉으시구려. 한 번 보고 어찌 그리 잘 아시오?”

그 말에 유비도 빙긋 웃었다.

“네 말이 옳다. 무얼 보아서가 아니라 그저 느낌이 그렇다는 뜻이 었다. 자, 그럼 이제 서둘러 군사를 움직이자 기한을 정한 건 아니지 만 너무 지체하다가 좋은 때를 놓치면 또한 한스럽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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