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3화 : 궁한 새는 쫓지 않으리
궁한 새는 쫓지 않으리
하지만 이번에도 거친 풍운은 서주를 비켜갔다. 견성을 지키고 있 던 하후돈과 조인이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자에 세작을 풀어 연주를 염탐하게 하였던바, 여포의 장수 설 란과 이봉(李封)의 군사는 모두 인근에 노략질을 나가 성이 자 주 빈다고 합니다. 싸움에 이기고 돌아온 군사를 이끌고 비어 있는 연주성을 치면 북소리 한 번에 떨어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말을 듣자 조조는 어쩔 수 없이 서주를 쳐 유비를 꺾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처럼 군량을 마련할 주 변이 없는 여포이고 보면, 군사를 먹이는 일은 노략질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노략질을 하자면 성을 비우더라도 군사를 내보내야 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그 빈 성을 치는 일은 흉년이 들지 않은 서주에 앉아 음으로 양으로 조조를 대비하고 있을 것임에 분명한 유비를 치 는 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연주는 조조가 자신의 근 거지로 생각하는 땅이었다.
이에 조조는 하후돈과 조인의 말을 따라 지름길로 군사를 내 연 주로 달려갔다. 뜻하지 않게 조조의 대군을 맞은 수장 설란과 이봉 은 되는대로 군사를 긁어모아 맞싸우러 나왔다. 성문을 굳게 닫아걸 고 여포의 구원을 기다리며 힘을 다해 지켜도 견디기 어려운데 스스 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오니 그들의 자질을 알 만했다.
이봉과 설란이 말 머리를 나란히 진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허저 가 나서서 조조에게 청했다.
“제게 저 둘을 맡겨주십시오. 함께 사로잡아 주공께 폐백 대신으 로 올리겠습니다.”
조조에게 후한 대접을 받고도 보답을 못해 때만 기다리던 허저였 다. 조조도 그 같은 허저의 말에 기뻤다. 말로만 들어온 허저의 무용 을 직접 보리라는 기분으로 기꺼이 출전을 승낙했다.
여포 쪽에서 허저를 맞으러 달려 나온 것은 이봉이었다. 이봉 또한 제 주인 여포를 따라 한 자루 화극을 쓰고 있었으나 무예는 제 주인 에 반도 미치지 못했다. 두 말이 서로 마주치기 겨우 두 번 만에 허 저의 한칼을 맞고 두 토막 난 시체로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꼴을 본 설란은 겁이 더럭 났다. 허저가 쫓을 틈도 없이 군사를 돌려 성안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성으로 들어가는 적교에 이르 기도 전에 낌새를 알고 달려온 이전이 창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할 수 없이 성으로 들어가기를 단념한 설란은 그 길로 거야鉅野)를 바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조의 장수 여건(呂)이 그런 설란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듯 말을 달려 뒤따르면서 활을 쏘았다. 시위를 떠난 화 살은 어김없이 설란을 맞추어 떨어뜨리니 그나마 뒤따르던 그 졸개 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조조는 다시 연주를 되찾게 되었다. 실로 몇 달 만에 되찾은 근거였으나, 아직 군사를 쉬게 하기에는 일렀다.
“이 기회에 복양까지 회복해야 합니다. 서두르십시오.”
정욱이 급하게 조조에게 권했다. 조조도 생각하니 옳은 말이라 그를 따랐다.
“전위와 허저는 선봉이 되고, 하후돈과 하우연은 좌군, 이전과 악 진은 우군이 되라. 나는 중군을 맞아 나아가리라!”
조조는 그날로 그렇게 영을 내리고 따로 우금과 여건에게도 군사 를 떼주어 후군으로 함께 뒤를 받치도록 했다. 승세를 탄 조조의 군 사라 그 기세는 자못 당당했다. 조조의 대군이 연주를 우려빼고 다 시 복양성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여포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 다. 노략질 나간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성을 나가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진궁이 그런 여포를 말렸다.
“나가 싸우셔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많은 장졸들이 성을 나가 아 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포는 듣지 않았다. 지난번 조조에게 낭패를 당했던 일도 잊고 겁 없이 내뱉었다.
“누가 왔다고 내가 두려워하겠소?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내 조조놈의 목을 안장에 달고 돌아오겠소.”
그래도 진궁이 여러 말로 달랬지만 여포는 끝내 듣지 않고 군사 들과 함께 성을 나갔다. 천성이 무모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데다 마 음속에는 여전히 조조를 얕보는 구석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조조, 이 어린 도적놈아, 네가 죽으려고 여기 왔다는 말은 들었 다. 어서 나오너라!”
여포는 성을 나가 진세를 벌이기 바쁘게 화극을 비껴들고 조조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딴에는 조조를 격동시켜 자기에게 유리한 마구 잡이 싸움으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조가 격동될 틈도 없이, 여포를 맞으러 큰 칼을 휘두르 며 달려 나가는 장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허저였다.
“닭 모가지를 따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 이 허저의 큰 칼부터 받아보아라!”
그렇게 마구 여포를 꾸짖으며 달려 나간 허저는 그대로 여포와 어 울렸다. 곧 맹렬하다 못해 보기에 휘황스럽기까지 한 싸움이 시작되 었다. 허저의 큰 칼이 여포를 쪼갤 듯 내려치는가 싶으면 어느새 몸 을 피한 여포의 화극이 허저의 목줄기를 노렸다. 말과 말이 엇갈리 기 스물 몇 차례, 그래도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전위는 어디 있는가? 나가서 허저를 도우라. 여포는 허저 혼자서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조조가 문득 전위를 불러 출전을 명했다. 그리고 달려 나가는 전위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목청을 높였다.
“하후돈과 하후연도 나가 여포를 사로잡으라!”
“이전과 악진도 나가 도우라.”
여포의 용맹을 잘 아는 조조라 여포 주위에 장수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자 자기의 여섯 맹장을 한꺼번에 내보내 사로잡으려 들었다. 전위가 달려가 허저를 돕고, 이어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이 차례 로 달려 나가 여포를 에워쌌다.
아무리 천하의 여포라지만 그들 여섯 장수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한차례 불 같은 공격을 퍼부어 길을 앗기 무 섭게 말 머리를 돌려 성안으로 달아나려 했다.
이때 성안의 부호 전씨(田氏)는 성벽 위에서 주의 깊게 싸움을 보 고 있었다. 전일 거짓 항복으로 조조를 궁지에 빠뜨린 적이 있는 그 라 집 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포의 강압에 못 이긴 일이라 하지만 조조가 그 싸움에 이기면 일족을 용 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씨는 여포가 쫓기는 걸 보자 자신과 일족을 살릴 궁리부터 했 다. 마침 성안에 남아 있는 군사들이 많지 않음을 틈타 전씨는 성문 과 적교 부근을 일족의 장정들과 종들의 손에 넣게 할 수가 있었다.
“적교를 내려라!”
그것도 모르고 헐떡이며 달려온 여포가 성 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적교가 내려지지 않자 이번에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빨리 적교를 내리고 성문을 열지 못할까?”
그때 성벽 위로 나타난 전씨가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진심으로 조장군께 항복을 했네. 나를 두 번 죄짓게 하지 말고 이만 물러가게나.”
그제야 사정을 알아차린 여포가 소리소리 질러 전씨를 욕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조조군의 추격이 급하니 별수없이 군사를 이끌 고 정도로 달아났다.
그때 성안에는 진궁이 남아 있었지만 워낙 군사는 적고 전씨의 세력이 커 그 같은 낭패를 막아낼 수 없었다. 기껏 급하게 동문을 열 어 여포의 일가 노유를 이끌고 달아나는 길뿐이었다.
이에 조조는 복양마저 힘들이지 않고 다시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에 전씨의 공이 크다 하여 지난번 자기를 속인 죄를 깨끗이 용 서했다. 불구덩이 속에서 죽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 릴 지경이었지만, 그것이 여포의 강압에 못 이겨 한 일이라는 점과 뒷사람을 위한 본보기로 전씨를 살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복양까지 회복하고서도 조조는 여전히 쉴 겨를이 없었다. 모사 유엽이 다시 조조를 재촉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여포는 용맹하기가 범 같은 자입니다. 오늘은 비록 곤핍하게 되 었으나 오래 참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힘을 길러 다시 싸 우려들 것이니 이번에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복양성을 되찾은 일만으로 만족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조조 역시 지쳐 있었지만 아직 옳은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귀는 열려 있었다. 유엽에게 복양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시 장졸들과 함께 여포를 쫓아 정도로 달려갔다.
조조의 군사들이 정도에 이르렀을 때 성안에는 여포와 장막(張邈), 장초(張超) 형제만 있었다. 여포의 수하 장수 고순(順), 장요(張遼), 후성(侯), 장패臧) 등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로 식량을 구하러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까닭이었다.
조조는 성 밖에서 연일 싸움을 돋우었으나 섣불리 성을 나갔다가 어이없이 복양성을 빼앗긴 지 오래잖은 여포라 이번에는 도무지 싸 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고순, 장요 등의 장수가 돌아오기를 기다 려 한 싸움으로 조조를 깨뜨릴 심산이었다.
여포가 싸움을 받아주지 않으니 조조도 어쩔 수 없었다. 며칠간이 나성 아래에서 갖은 욕설로 여포를 충동질하다가 마침내는 포위를 풀고 사십 리나 군사를 물려 진채를 세웠다. 쓸데없이 성을 에워싸 고 있다가 성안의 여포와 성 밖에 나와 있는 그 수하 장수들을 앞뒤 로 맞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조조가 하채(下)한 제군(郡) 일대에는 한창 밀이 익을 무렵이었다. 급하게 여포를 쫓느라 그 역시 군량이 달리게 된 조조 는 군사를 풀어 밀을 베어들이게 했다. 그 밀로 군사들을 먹이며 여 포가 성을 나오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조조의 군사들이 들판에 흩어져 밀을 베어들이는 걸 본 세작들이 나는 듯이 그 일을 여포에게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여포는 좋은 기 회라 여겼다. 들판에 흩어진 군사를 급하게 들이쳐 조조를 잡으려는 심산으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왔다. 그런데 단숨에 사십 리를 달 려 조조의 진채 가까이 이르러보니 왼편에 나무가 무성한 숲이 보였 다. 이미 여러 번 조조의 꾀에 골탕을 먹은 여포는 그 숲을 보자 더 럭 겁이 났다. 조조의 복병이 있을까 해서였다. 감히 그 숲을 지나 진채를 급습할 생각도 못하고 군사를 물려 정도성으로 돌아가버렸다.
여포가 이미 돌아가버린 뒤에야 조조는 여포가 왔다 간 걸 알았다.
“여포가 왔다면 틀림없이 우리 군사가 밀을 베느라 흩어져 있는 걸 틈타 본진을 급습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갔는가?”
“그건 저희들도 모르는 일입니다.”
군사들 또한 그게 궁금하다는 눈치로 대답했다. 조조가 한참 생각 에 잠기더니 이내 그 까닭을 알아낸 듯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으고 말했다.
“여포가 일껏 왔다가 그냥 돌아간 것은 왼편 숲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서였다. 그 의심을 이용해 이번에는 정말로 계책을 써야겠다. 숲에는 많은 정기(旌旗)를 꽂아 여포로 하여금 계속 우리 복병이 있 는 줄 의심케 하라. 복병을 숨길 곳은 따로 있다. 우리 진채 서쪽에 는 물이 흐르지 않는 개울을 따라 긴 둑이 있으니 거기야말로 정병 을 숨겨 둘 만하다. 내일 여포가 다시 오면 반드시 복병이 있어 보이 는 그 숲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걸 보고 둑 뒤에 숨은 우리 군사들 이 나아가 그 돌아갈 길을 끊으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포의 의심을 거꾸로 이용한 계책에 여러 장수들도 한결같이 고 개를 끄덕였다. 이에 조조는 숲속에 어지러이 기치를 꽂는 외에 본 채에도 북 치는 군사 오십여 명과 인근 마을에서 잡아온 남녀들을 남겨 북 치고 고함 지르며 많은 군사가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꾸미 게 했다. 그런 다음 젊고 날랜 군사들은 모조리 물 마른 개울가의 둑 뒤에 매복시킨 채 여포 오기만 기다렸다.
이때 여포는 여포대로 진궁과 마주 앉아 조조에게 이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포가 군사를 물린 까닭을 말하자 진궁도 여포에게 동의하듯 그 말을 받았다.
“잘하셨습니다. 조조는 꾀가 많은 자라 가볍게 대적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말에 여포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진궁이 조조만 두려워하고 자기는 꾀 없는 인물로 여기는 듯한 까닭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뽐내듯 계책을 말했다.
“하지만 내게도 한 계책이 있소이다. 화공을 쓰면 숲속에 있는 복 병은 힘 안들이고 쫓아버릴 수 있을 것이오.”
아무리 미련한 여포라 하지만 진궁도 그 계책은 반대할 까닭이 없 었다. 조조가 대비도 없이 군사를 풀어 밀을 베게 할 리가 없고, 대 비가 있다면 반드시 그 숲속의 복병일 것이라 여긴 까닭이었다. 이에 여포는 진궁과 고순으로 하여금 정도에 남아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조조와 싸우기로 했다.
이튿날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조조의 진채 가까이 이른 여포는 먼 저 왼편 숲부터 살폈다. 과연 여기저기 정기가 꽂히고 창검이 서 있 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복병이 있는 것 같았다.
“불을 질러라!”
여포는 그렇게 명을 내려 사방에서 불을 지른 뒤 수하 장졸들을 몰아 똑바로 조조의 본진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방에서 불길이 솟는데도 숲속에 복병은커 녕 한 사람의 인기척도 없는 일이었다. 여포는 퍼뜩 의심이 들었으 나 이왕 내친김이었다. 그대로 조조의 본채를 향해 군사를 몰아가는데 이번에는 그곳이 이상했다. 북소리와 군사들의 함성이 크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포는 더욱 의심이 났다. 그래서 군사를 내보낼지 거두어들일지 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진채 뒤에서 갑자기 한 떼의 군마가 나타 났다. 여포는 대뜸 그 군마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얼마 뒤쫓기도 전에 한 소리 포향이 들리더니 긴 둑 뒤에서 조조의 복병들이 한꺼 번에 쏟아져 나왔다. 물 흐르는 개울가라 여겨 복병이 없으리라 믿 었던 곳이었다.
놀란 여포의 눈에 앞장서 말을 달려오는 조조의 장수들이 보였다. 하후돈, 하후연, 허저, 전위, 이전, 악진- 며칠 전에 자신이 크게 낭 패를 본 맹장들이었다. 여포는 도저히 그들을 당할 수 없다 여겨 싸 움 한번 안 해보고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렸다. 장수가 그러하니 군사 들인들 싸울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서로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 작했다.
그 싸움에서 입은 여포의 피해는 컸다. 군사는 셋에 둘만 돌아오 고, 따르던 장수 성렴(成廉)은 이전의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연주, 복양과 이곳까지 세 번이나 잇단 참패에 남은 장졸들 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조조는 여포를 꺾은 기세를 휘몰아 똑바로 정도로 짓쳐들어갔다. “온후께서 계시지 않은 성은 빈 성이나 다름없다. 빈 성은 지키기 어려우니 차라리 급히 달아남이 나으리라.”
여포에 앞서 쫓겨온 군사로부터 여포가 다시 싸움에 졌다는 소식 을 들은 진궁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만히 여포의 장수 고순과 의논한 뒤 여포의 가솔들을 보호하여 정도를 버리고 달아났다.
오래잖아 조조가 승세를 탄 군사를 몰아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직까지 성안에 남아 있던 장막, 장초 형제만으로는 대를 쪼개는 듯 한 조조의 기세를 당할 길이 없었다. 이에 장초는 스스로 거처에 불 을 질러 타 죽고 장막은 원술에게 구차한 목숨을 의탁하러 달아났다. 다시 산동 일대는 조조의 세력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조조는 거 기서 멈추지 않고 미루어둔 서주의 유비 칠 일을 의논했다. 여러 번 참패를 당한 끝에 힘들여 이긴 여포였건만, 조조의 밝은 눈에는 그 여포보다 몇 배나 이기기 힘든 것이 유비로 보였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거나 사로잡아 내 연못에 가두어둬야 한다…..’
그게 솔직한 조조의 심경이었다. 이때 모개가 나서서 말렸다.
“천하의 형세로 볼 때 먼저 각처에 흩어져 있는 군웅들을 호령하 는 일이 급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군사는 피로하고 군량은 넉 넉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군사를 쉬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케 하여 군자를 충분히 갖추면서 때를 기다리십시오. 반 드시 패왕의 위업을 이룰 것입니다. 유비 따위를 급하게 몰아 헛되 이 힘을 써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뒤따라 순욱과 정욱도 말렸다. 산동은 원래가 조조의 터전이었으 나 서주는 원정이 되니 준비를 넉넉히 갖춘 뒤라야 한다는 게 그구 실이었다. 거기서 조조는 다시 한번 뜻을 바꾸었다. 자기 세력 내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평안케 하여 각기 생업에 전념케 하고, 군사들에 게는 쉬는 틈틈이 성곽을 수리하게 했다. 내실을 다지며 조용히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편 조조에게 대패해 정신없이 달아나던 여포는 바닷가에 이르 러서야 흩어진 군사들과 장수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식량 약탈을 나갔던 장패와 후성 등도 소문을 듣고 하나씩 둘씩 여포를 찾아 모 여들었다.
“내 군사가 비록 적으나 아직도 조조 따위는 깨뜨릴 만하다. 돌아 가 다시 한번 싸워야겠다.”
어느 정도 장졸들이 모여들자 기운을 회복한 여포가 말했다. 아직 도 자신의 패배가 조조의 계략 탓이라기보다는 장졸들이 흩어져 힘 을 모아 쓰지 못한 탓이라고 믿고 있는 여포로서는 해봄직도 할 만 한 소리였다. 진궁이 그런 여포를 말렸다.
“지금 조조의 세력이 너무 커 더불어 싸우기 어렵습니다. 먼저 편 안히 몸을 둘 곳부터 찾은 뒤에 때를 기다려 다시 싸워도 늦지 않습 니다.”
그제야 여포도 자신의 처지가 보이는 듯했다. 군사는 꺾인 데다 의지할 성 하나 없는 그라 조조와의 싸움을 고집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원소에게 의지해보는 게 어떻겠소?”
이윽고 여포가 뜻을 바꾼 듯 진궁에게 물었다. 진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먼저 사람을 기주로 보내 원소의 움직임부터 살핀 뒤에 가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전에 한번 원소에게 데인 적이 있는 터라 여포도 그 말을 따랐다.
진궁의 그 같은 조심은 옳았다. 원소는 조조와 여포가 연주를 두고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마자 모사들을 불러놓고 그 일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심배가 나서서 말했다.
“여포는 이리 같은 자입니다. 연주를 얻으면 반드시 우리 기주를 노릴 것입니다. 조조를 도와 여포를 치는 것이 뒷날의 근심을 없이 하는 방책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에서 압박해오는 원술과 공손찬에 대해 동서 로 조조와 연결해 대항해오던 원소였다. 내심의 경계는 남아 있었지 만 원소 또한 여포보다는 조조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에 원소는 상장군 안량(顔)에게 군사 오만을 딸려 조조 를 도우러 보냈다.
세작을 통해 그 같은 기주의 소식을 들은 여포는 크게 놀랐다. 조 조의 군대만으로도 참패를 거듭하고 있는데 안량의 오만 군이 이른 다면 정말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급히 진궁을 불러 물었다. “원소에게 의탁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대군이 조조를 도우러 오 고 있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진궁도 암담한 모양이었다. 잠시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다가 겨우 한 길을 찾아냈다.
“듣기에 유현덕이 새로 서주를 얻어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는 너그러운 사람이니 장군을 박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주로 가서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포도 그 길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여겨 진궁의 말을 따랐다. 그날로 서주를 바라 지친 장병들을 이끌고 달렸다.
여포가 유비에게 의지하러 서주로 온다는 소식은 여포보다 한걸음 앞서 유비의 귀에도 들어왔다.
“여포는 당금에 둘도 없는 영용한 인물이다. 마땅히 성을 나가 맞음이 옳으리라.”
유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하며 여포를 맞으러 나갈 채비를 하게 했다. 미축이 놀라 말했다.
“여포는 호랑이나 늑대 같은 자이니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집 안에 들이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듣지 않았다.
“지난날 서주가 위험했을 때 여포가 연주를 쳐서 빼앗지 않았더 라면 조조는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오. 만약 조조가 힘을 다해 서주 를 에워싸고 쳤더라면 어떻게 이 서주가 온전할 수 있었겠소? 이제 그가 궁하여 내게 의지하려 함이니 차마 모른 체할 수는 없소이다.”
물론 유비도 여포의 사람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전 날 여포가 연주를 친 것도 서주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 심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제대로 터를 잡지 못 한 유비에게는 여포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내일이라도 조조의 대군이 들이닥친다면 속절없이 서주를 내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힘 을 유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밖에 유비가 위험을 무릅쓰고 여포를 받아들인 데에는 조조를 향한 야릇한 호승심의 충동도 있었다.
‘조조, 그대는 칼로 여포를 베려 하지만 나는 인의로 그를 사로잡 겠다. 그대는 천하를 얻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힘을 쳐 없애려 하지 만, 나는 그 힘을 덕으로 길들여 내 힘에 보태려 한다………………’
유비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유비가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미축은 더 말리지 못했다. 그걸 보고 장비가 투덜거렸다.
“형님은 도무지 마음이 좋아 탈이오. 정 그러시겠다면 준비라도 단단히 하도록 합시다. 여포 그놈이 불측한 마음을 드러내면 단칼에 베어버리도록 말이오.”
그러나 유비는 그런 장비마저 꾸짖은 뒤 삼십 리나 성을 나가 여 포를 맞고 말 머리를 나란히 해 서주로 돌아왔다.
유비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을 환대하자 여포는 은근히 기 가 살아났다. 주아에 이르러 예를 마치고 자리를 잡기 무섭게 지난 일로 생색을 냈다.
“나는 왕사도와 일을 꾸며 역적 동탁을 죽였으나 뜻밖에도 이각 과 곽사의 난리를 만나 관동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소이다. 왕사도께 서 돌아가실 때 내게 관동의 제후들과 힘을 합쳐 기울어지는 한실을 붙들라 하였지만 제후들은 서로 용납하지 않고 싸움을 일삼으니 실 로 아득할 뿐이오. 그런데 그중에도 조조 그 도적이 특히 모질어 서 주를 침범하매 사군(君)께서 힘을 다해 도겸을 구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소. 내 비록 힘이 없으나 모진 도적이 어진 태수를 죽이려 드는 걸 어찌 가만히 보고 있겠소? 이에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를 들 이쳐 그 세력을 나누이게 하였던 것이오. 하지만 불행히도 적의 간 계에 떨어져 군사는 잃고 장수는 꺾였소. 이제 사군께 투항하려 하 거니와 함께 대사를 도모해 천하를 바로잡고 싶소. 사군의 뜻은 어 떠시오?”
마치 연주를 빼앗은 일이 유비를 위해서였던 양 내세우는 것이었 다. 그러나 유비는 진심으로 그 말을 믿는 듯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사군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자 서주를 관장할 사람이 없 어이 유비가 잠시 맡아 있었습니다. 이에 다행히도 장군께서 이곳 에 이르셨으니 서주를 넘겨드림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자사의 패인(印)을 가져오게 하여 여포에게 바쳤다. 여 포로서는 다시 한번 뜻밖이었다. 한 모퉁이 몸담을 곳이라도 허락하 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서주를 통째 넘겨주겠다니 자기 귀가 의심스 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포의 위인이 워낙 염치없고 단순했다. 한번 사양함도 없이 유비가 바치는 패인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여포가 막 손을 내밀 때였다.
문득 유비의 등 뒤에 얼굴 가득 성난 기색을 띠며 서 있는 두 사 람이 여포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못마땅한 얼굴로 유비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던 관우와 장비였다.
그걸 본 여포는 속이 뜨끔했다. 자칫하다간 패인을 받아넣기도 전 에 목부터 달아날 판이었다. 이에 여포는 내밀었던 손을 저으며 거 짓 웃음과 함께 사양의 말을 했다.
“유사군의 겸양이 지나치시오. 스스로 헤아리건대 이 여포는 한낱 용부에 지나지 않소이다. 어찌 한 주를 다스릴 만한 그릇이 되 겠소?”
그래도 유비는 거듭 패인을 바치려 했다. 실로 여포의 욕심과 뻔 뻔스러움을 한껏 비거리는 듯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 무도 그것이 유비의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간곡하고 도 진정이 우러나는 겸양이었다.
보다 못한 진궁이 나서서 말렸다.
“옛말에 힘센 손[客]이라도 주인을 억누르는 법이 아니라 했습니 다. 우리 온후께서 비록 곤궁하여 이리로 왔으나 서주를 빼앗고자 하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부디 사군께서는 의심을 거두십 시오.”
유비의 속셈을 꿰뚫어본 듯한 말이었다. 진궁이 그렇게 말하자 유 비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패인을 거두게 하는 대신 큰 잔치 를 열어 여포와 수하 장졸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리고 집과 터를 마 련하여 그들이 마음 놓고 성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튿날이었다. 여포는 현덕의 후한 대접에 답례하는 뜻에서 임시 로 정한 자신의 거처에다 술상을 차리고 유현덕과 관, 장두 아우를 청했다. 유현덕은 두 아우를 데리고 기꺼이 응했다.
처음 한동안 술자리는 별일이 없었다. 그러나 술이 반쯤 오른 여 포가 자신의 감사를 지나치게 나타내려다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다.
“이제 후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소? 한집안 사람이나 다 름없이 되었느니 마음껏 마십시다.”
그렇게 현덕과 관우, 장비를 후당으로 청해 들인 여포는 곧 좌우에 일렀다.
“가서 마님께 일러라. 유사군께서 오셨으니 모두 나와 절하여 뵙도록 하라고.”
처첩을 불러내 절하게 하는 것은 가까운 피붙이 사이거나 절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없는 일이었다. 유비가 황급히 사양했다.
“이 비(備)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하지만 여포는 굳이 듣지 않다가 세 번 네번 사양하는 유비에게 말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이제 한집안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현제(賢弟)께서는 너무 사양하지 마시게.”
딴에는 한껏 친근함을 드러내는 셈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무슨 트 집거리나 없을까 하고 기다리던 장비가 그 말을 그냥 들어 넘길 리 없었다. 고리눈을 희번득이며 성난 목소리로 여포를 꾸짖었다.
“우리 형님은 제실의 종친으로 금지옥엽(金枝玉)같이 귀한 몸 이신데, 네놈이 무엇이관데 감히 아우라 부르느냐? 이리 나오너라. 나와 삼백 합을 싸워보자!”
그러면서 펄펄 뛰는 장비의 기세는 금세라도 칼을 빼들고 여포를 덮칠 듯 보였다. 그제야 실수를 알아차린 여포가 황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유비가 나서 급하게 장비를 꾸짖었다.
“네 이놈, 이 무슨 버릇이냐? 비록 지금은 잠시 곤궁하시나 여기 있는 이 온후로 말할 것 같으면 당금에 둘도 없는 영웅이시다. 나를 혈육으로 여겨주는데 감격하고 송구해할 줄은 모르고 그 무슨 망발 이냐?”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송구스런 얼굴로 여포를 달랜다.
“장군께서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 아우가 천지를 몰라 버릇없이 구나 그 본심은 그리 악하지 아니합니다.”
유비의 그 같은 말에 여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심경이었다. 그러나 그 난감한 가운데도 돋보이는 것은 유비의 너그러움과 겸양이었다. 여포가 그리 속 깊은 위인이 못 되니 거기에 대한 감격 또한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본 관우도 무얼 느꼈던지 문 득 유비를 편들어 장비에게 권했다.
“자네는 이만 나가 있게. 형님께서 하시는 일 아닌가?”
관우까지 그렇게 나오니 장비는 도리 없이 방을 나갔다. 그러나 씩씩거리며 여포를 노려보는 두 눈에는 그대로 흉흉한 불길이 이는 듯했다.
“용렬한 아우가 술에 취해 미친 소리를 한 것입니다. 형께서는 너 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장비가 나가자 유비가 다시 간곡한 음성으로 여포에게 용서를 빌 었다. 그러나 여포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함부로 말했다가 또 무슨 욕을 당할지 몰라 두렵기도 하거니와 둔한 머리에 도 유비와의 응대에는 좀더 신중해야겠다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술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소동에 식은 술을 몇 잔 더 들이켜다 자리가 파하자 여포는 문밖까지 유비 를 바래주었다. 유비가 막 여포의 거처를 나설 때였다.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말까지 탄 장비가 바람같이 나타나 유비가 말릴 틈도 없이 집 안에 대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여포 이놈! 어서 나오너라. 나와 삼백 합을 싸워보자!”
여포도 분통을 꾹 누른 채 묵묵히 서 있는데 유비가 노한 목소리 로 장비를 꾸짖었다.
“익덕, 어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어느 앞이라고 함부로 주사를 부리느냐?”
관우도 유비를 거들어 장비를 말렸다. 그러나 장비는 유비가 칼까지 뽑아들고 호통을 친 뒤에야 겨우 물러갔다.
그날 밤이었다. 여포는 가만히 진궁을 청하여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되는 성싶소이다. 달리 몸 을 의탁할 만한 곳을 찾아봄이 어떻겠소?”
“아니 됩니다. 달리 마땅히 가볼 곳도 없거니와 제가 보기에는 장 군께서 좋은 의지를 찾으셨습니다. 유비는 인의 재산으로 삼고 있 으나, 인의란 난세에는 종종 힘이 되기보다는 약점이 되기 쉬운 법 입니다. 방금도 유비는 내심 괴로우면서 자신이 내세운 그 인의에 못 이겨 무서운 호랑이 같은 장군을 자기 집안으로 받아들인 것입니 다. 장군께서는 그 점을 십분 이용하십시오. 더구나 이 서주는 머지 않아 조조의 공격을 받을 것인즉 유비에게는 실제로도 장군이 필요 한 사람입니다.”
진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포는 무 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장비란 자가 저렇게 펄펄 뛰고 있고 또 관우란 자도 마음 속으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치이니 그걸 어쩌겠소? 자칫 하다간 자다가 그 둘의 칼을 맞게 될까 두렵소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내일 유비에게로 가서 짐짓 작별을 고하십시오. 떠나는 까닭은 유비 때문이 아니라 그 두 아우 때문이라는 걸 밝히면 반드시 어떤 좋은 결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이미 말씀드렸듯 유비는 장군과 한집안에 있기는 두려워하나 그 냥 보낼 처지도 못 됩니다. 어쨌든 제 말대로 해보십시오.”
여포도 달리 길이 없다고 여겨 진궁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 일찍 여포는 수하 몇 기를 거느리고 유현덕의 부중을 찾아 작별 을 고했다. 유현덕이 깜짝 놀라 여포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형께서 어찌 이토록 훌훌이 떠나려 하십니까? 아우의 대접이 소 홀했다면 엎드려 죄를 청할지언정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오. 사군께서는 버리지 않고 받아주셨으나 두려운 것은 아우님들이오. 두 분 아우님께서 용납하지 않으니 이 여포는 부득불 다른 데서 의지할 곳을 찾을까 하오.”
여포는 진궁의 말대로 떠나는 까닭을 밝혔다. 유비가 진정으로 송 구한 듯 사죄했다.
“장군께서 가버리신다면 실로 내 죄가 너무 큽니다. 용렬한 아우들 이 함부로 장군의 노여움을 샀으니 마땅히 꾸짖어 사죄토록 하겠습 니다. 부디 이 비를 버리고 떠나신다는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더니 문득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굳이 이 서주성이 싫으시다면 가까운 곳에 소패란 성이 있습니 다. 지난날 제가 잠시 군사를 둔치게 하였던 곳으로 성이 얕고 좁으 나 약간의 군사가 머물 수는 있습니다. 장군께서 얕고 좁다 버리시 지 않는다면 그 성을 내어드리겠사오니 잠시 그곳에서 군마를 쉬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양식이며 군수(軍需)는 마땅히 제가 뒤보아드리 겠습니다.”
여포가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 길이 그중 나을 것 같았다.
“사군의 두터운 정에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고단한 여(呂) 아무개에게는 실로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소.”
여포는 그렇게 감사하고 그날로 수하 장졸들과 함께 소패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유비로서는 여포의 원한을 사지 않고 알맞은 거리에 다 붙들어둔 셈이지만 그래도 장비는 속이 풀리지 않았다. 연일 투 덜거리는 그를 유비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사냥꾼도 궁하여 품 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잡지 않는 법이다. 비 록 여포가 시랑이 같은 무리라 하나 궁하여 찾아온 걸 어찌 그냥 내 쫓을 수 있겠느냐?”
한편 서주로 쫓겨간 여포가 유비에게 받아들여져 소패에 자리 잡 게 되었다는 소문은 산동의 조조에게도 들어갔다. 조조는 놀랐다. 자신에게 져서 쫓겨난 여포가 하필 유비에게로 간 것도 그랬지만 그 여포를 두말 없이 받아들인 유비가 더욱 그랬다. 원술이나 원소처럼 굳건한 기반을 가진 인물들도 선뜻 받아들이기를 꺼리던 여포가 아 닌가. 거기다가 주제넘게 그를 받아들인 장막, 장초 형제는 결국 그 가 일으킨 풍운에 휩쓸려 여지없이 패망하고 말지 않았는가.
‘유비, 역시 너는 범용한 인물이 아니다. 여포 같은 맹수를 우리에 가두고 길러보겠다니, 어리석음이라도 멋진 어리석음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지난번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서주를 휩 쓸어버리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결코 그럴 리야 없지만 만에 하나 라도 유비가 여포를 길들여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더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다시 다급해진 조조는 순욱과 곽가를 불러 서주칠 일을 새삼 의논해보았다.
“안 됩니다. 지금 만약 서주를 친다면 유비와 여포는 한 몸이 되 어 주공께 대항할 것입니다. 두 호랑이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격이니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곽가가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말리고 나섰다. 조조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다가 만약 여포가 정말로 유비의 손발이라도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정원(原)과 동탁과 원소를 생각해보십시 오. 또 장양(張楊)과 장막, 장초 형제를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끝내 여포를 자기 사람으로 잡아둘 수 있었습니까? 유비가 비록 그를 받 아주었으니 도리어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순욱도 옆에서 거들었다.
“한 굴에 두 호랑이가 들었으니 머지않아 둘 중 하나는 죽거나 상 할 것입니다. 오히려 주공께서 눈을 돌리실 곳은 그 서주가 아니라 조정입니다. 급히 조정에 표를 올려 산동에 주공이 계심을 알리고 아울러 명목이나마 이번에 얻으신 땅에 합당한 벼슬을 받도록 하십 시오.”
조조는 원래 어두운 인물이 아니었다. 곧 생각을 바꾸어 순욱의 말을 따르니 산동 평정의 표를 받은 조정은 과연 조조를 건덕장 군(建德將軍)에 비정후(費亭侯)로 올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