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4화 : 서도의 회오리 [2권 끝]

랜덤 이미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14화 : 서도의 회오리


서도의 회오리

그때 조정은 온전히 이각과 곽사의 수중에 있다 해도 지나친 말 이 아니었다. 이각은 스스로 대사마가 되고 곽사는 또한 스스로 대 장군이 되어 멋대로 정사를 농락했으나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시에 만조백관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도 태위로 있는 양표와 대사농 주준은 오래전부터 이각과 곽 사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참에 조조의 표문이 올라오 자가만히 헌제에게 아뢰었다.

“지금 조조는 거느린 군사가 이십여 만이요, 모신(臣)과 무장도 수십 명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을 얻어 사직을 붙들고 간사 한 도적의 무리를 쳐 없애게 한다면 천하를 위해 큰 다행이겠습니다.”

“짐은 그 두 역적에게 속임과 능멸을 당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만 일 그것들을 주살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 있겠소?”

젊은 천자가 눈물 섞어 대답했다. 양표가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 시오. 먼저 그 두 역적이 서로 싸우게 한 뒤 조서를 내려 조조를 불 러들이면 됩니다. 조조가 산동의 정병을 이끌고 서로 싸워 허약한 역적을 쓸어버리면 조정은 절로 평안해질 것입니다.”

“어떻게 그 두 역적이 서로 싸우게 할 수 있단 말이오?”

“듣기에 곽사의 처는 투기심이 몹시 많다고 합니다. 사람을 시켜 곽사의 처를 충동질함으로써 둘을 이간시키는 반간계(反間計)를 쓰 면 그들 두 역적은 오래잖아 반드시 창칼을 맞대게 될 것입니다.” 

양표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헌제도 마침내 그 계책을 허락하고 조조에게 보내는 밀조를 써서 내렸다. 헌제의 허락을 받은 양표는 대궐을 나오는 길로 이각과 곽사를 이간시키는 일에 들어갔다. 부인 을 몰래 곽사의 부중에 보내 곽사의 처를 만나게 한 뒤 틈을 보아 가만히 이르게 했다.

“제가 들으니 곽장군과 이사마(李司馬) 부인이 친해 그 정분이 몹 시 깊다고 합니다. 만약 사마(司馬)께서 그 일을 아시면 곽장군께서 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니 부인께서 두 집의 내왕을 끊게 하는 길만이 그 같은 화를 막는 묘책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자주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걸 괴이하게 여겼 더니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짓을 하고 다녔구려! 부인이 말씀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알지 못할 뻔했소. 마땅히 그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야지요.”

질투에 눈이 뒤집힌 곽사의 처는 일이 정말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도 않고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양표의 처가 자기 방을 나설 때까 지 몇 번이고 그 일을 귀띔해준 것만 고마워했다. 왕윤이 남자의 질 투심을 부추겨 동탁과 여포 사이를 벌어지게 한 데 비해 양표는 이 각과 곽사를 이간시키는 데 여자의 투기심을 이용하려 했다.

그 같은 계책의 효력은 며칠 가지 않아 나타났다. 그날도 이각의 부중에서 벌어진 술자리에 초대를 받은 곽사는 여느 때처럼 떠날 채 비를 했다. 그때 곽사의 처가 나서서 말렸다.

“이각의 성품이 음흉하니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에요. 하 물며 두 영웅이 나란히 설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만약 그가 술 에 독이라도 타서 내놓는다면 제 신세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 말에 곽사는 어리둥절했다. 그날이 있기까지 목숨을 걸고 서로 힘을 합쳐 싸워온 그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야심에 찬 제후들이 사 방에서 힘을 기르며 낙양을 엿보고 있어 아직도 그들 둘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각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곽사는 그렇게 말하며 뿌리치고 나서려 했다. 그러나 아내가 하도 새파랗게 가로막는 바람에 정한 시간에 이각의 부중으로 가지 못하 고 말았다.

기다려도 곽사가 오지 않자 이각은 무슨 일이 있어 못 오는 줄 알 고, 섭섭하다는 말과 함께 장만한 술과 안주를 곽사의 부중으로 보냈다. 순전히 좋은 뜻으로 보낸 것이었지만 그게 뜻밖에도 화근이 되었다.

남편을 붙들고 옥신각신하는 중에 이각의 부중으로부터 술과 안 주가 왔다는 말을 들은 곽사의 처는 퍼뜩 여자 특유의 간지(智)가 떠올랐다. 가만히 부엌으로 내려가 감사와 함께 받아들이는 체하며 몰래 술과 안주에 독을 뿌렸다.

그걸 알 리 없는 곽사는 이각의 정에 새삼 감동하며 보내온 술과 안주가 들어오기 바쁘게 수저를 집었다. 곽사의 처가 다시 그런 그 를 말렸다.

“이 음식은 밖에서 들어온 것인데 어찌 그리 함부로 잡수려 드세요?”

그러고는 안주 가운데 먹음직한 고기 한 토막을 집어 먼저 개에게 던져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오랜 친구요, 생사를 함께해 온 동지가 보낸 음식을 개에게 던져 주는 걸 보자 곽사가 성나 소리쳤다. 그러나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기 토막을 받아먹은 개가 비명 한마디 없이 선 채로 죽어버 리는 걸 보고는 그도 얼굴이 굳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그 뚜렷한 증거에 이각을 의심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이각과 곽사 사이는 자연 전만 같지 않았다. 이각으 로서는 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괴이하게 여기던 끝에 하루 는 조회를 파하자마자 곽사를 만나 다시 자기 집으로 청했다.

이미 상대를 의심하는 곽사라 이런저런 구실로 응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날은 이각도 끈질겼다.

곽사가 마지못해 자기 집으로 오자 이각은 크게 술자리를 벌여 환대했다. 비록 자기를 멀리하는 까닭은 끝내 듣지 못했지만, 곽사 를 그같이 환대함으로써 변함없는 자신의 마음만이라도 보여주자는 게 이각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시 일은 이상하게 꼬여들었다. 술자리가 파한 뒤 집으로 돌아온 곽사가 갑작스레 복통을 일으킨 게 그랬다. 이각의 집을 다 녀왔다는 말에 그러잖아도 심사가 나 있던 곽사의 처가 때를 놓칠세 라 속살거렸다.

“그것 보세요. 틀림없이 당신을 죽이려 음식에 독을 넣은 거예요.” 

그러고는 호들갑을 떨며 좌우를 불러 토하는 데 쓰는 묽은 똥[糞 it]을 가져오게 했다. 과연 곽사의 복통은 그걸 마셔 뱃속의 것을 모 두 토해낸 뒤에야 가라앉았다.

두 번씩이나 당한 꼴이 되자 곽사는 더 참지 못했다.

“나는 이각 그놈과 함께 목숨을 걸고 대사를 도모했는데 이제 그 놈이 까닭 없이 나를 죽이려 하다니! 만약 내가 먼저 그놈을 치지 않으면 반드시 그놈의 모진 손에 내가 먼저 죽겠구나.”

곽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자기 아래에 있는 갑병(甲兵)들을 끌어모았다. 이각이 생각 못한 때에 들이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 처 군사를 내기도 전에 그 소식이 먼저 이각의 귀에 들어갔다. 이각 으로 보아서는 실로 마른날의 날벼락이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이각 또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곽사 그놈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그 같은 외침과 함께 본부의 갑병부터 점고했다. 그 며칠 곽사가 자신을 멀리하던 까닭을 그제야 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의 없는 맺음의 허망함 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상쟁의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 직 남아 있는 공통의 적 때문에 그럭저럭 맺음이 유지돼 왔던 것인 데, 이제 어이없게 터져버린 것이었다.

이각과 곽사의 군사는 오래잖아 마주쳤다. 하나는 대장군이요, 하 나는 대사마로 대권을 나눠 갖고 있던 그들이라 각기 거느린 군사가 수만이었다. 장안성 안에서 맞붙어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니 금세 도 성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뜨는 것은 그들의 졸 개들이었다. 두 쪽 다 원래부터 기강이 없기로 유명한 동탁의 졸개 들이라 제 버릇 개 줄 리 없었다. 싸움하는 틈틈이 노략질을 하니 죽 어나는 건 죄 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이때 이각의 조카에 이섬(李)이란 자가 있었다. 힘깨나 써 이각 이 장수로 부렸는데 제법 일의 앞뒤를 헤아릴 줄 알았다. 이각과 곽 사의 싸움이 어우러진 틈을 타 헌제가 있는 궁성을 덮쳤다. 천자를 먼저 손에 넣는 쪽이 명분에서 유리하리라는 걸 헤아리고 한 짓이 었다.

이섬은 수레 두 대를 구해 헌제와 황후를 각기 나눠 태웠다. 그 리고 가후(賈詡)와 좌령(左靈)으로 하여금 수레를 보살피게 하고 나 머지 궁인들은 걸어서 뒤를 따르게 하여 후재문(後宰門)으로 몰아 갔다.

황제와 황후가 탄 수레를 앞세운 이섬 일행이 막 문을 나설 무렵이었다. 갑자기 어지럽게 쏘아 붙이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뒤늦게 곽사가 보낸 군사들이 이른 것이었다.

몸에 쇳조각 하나 지닌 것 없이 수레 뒤를 따르던 궁인들이 삼단 처럼 쓰러졌다. 곽사가 보낸 군사가 더 많은지 이섬도 앞을 뚫을 엄 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각이 한 수 빨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황제를 겁탈하러 간 조카의 위급을 알고 스스로 몸을 빼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이각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곽사의 군사들은 곧 무너져 달아났다. 그 틈을 타 이각은 황제와 황후가 탄 수레를 끌고 간신히 장안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마디 설명도 없이 성 밖에 있는 자 신의 진영에다 황제와 황후를 모셨다.

곽사도 뒤늦게야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짓쳐들어갔다. 황제와 황 후는 없었으나 아직 많은 비빈(妃嬪)과 궁녀들이 남아 있었다. 곽사 는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그 궁인들을 몽땅 사로잡아 자신의 진 채로 끌어가고 궁전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그같이 흉포한 짓을 저지르고도 황제와 황후를 이 각에게 빼앗긴 분이 풀리지 않은 곽사는 이튿날 동이 트기 무섭게 군 사를 몰아 이각의 본진을 공격했다. 병마가 몰려오는 소리가 사방을 진동하니 이각의 군막 안에 있는 황제와 황후는 한가지로 두려움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그 같은 난세를 뒷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광무제께서 한을 다시 일으키시니 光武中興興漢世

위아래 열두 황제가 서로 이었다. 上下相承十二帝

환제 영제 덕을 잃어 나라 기울고 桓靈無道宗社隳

내시가 권세 잡아 말세 이루니 꾀 없는 하진 삼공에 올라 闍臣壇權爲叔季

쥐 같은 내시 없애려고 간웅 불러들였다. 無謀何進作三公

작은 도적 죽였으나 큰 역적 들어 欲除招奸雄

서량의 더벅머리 역적 음란하고 흉포하니 豺獺雖驅虎狼入

왕윤의 붉은 마음 미인을 빌어 西州逆豎生淫凶

동탁과 여포 서로 싸우게 했다. 王允赤心託紅粉

원흉 모두 죽여 천하태평 바랐더니 致命董呂成矛盾

이각 곽사 분 품을 줄 뉘 알았으리. 渠首殄滅天下寧

나라는 가시덤불 다투어 나는 꼴 되고 誰知李郭心懷憤

여섯 궁궐 굶주림에 싸움 걱정 겹쳤다. 神州荊棘爭奈何

민심 멀어지고 천명 떠나니 六宮饑饉愁干戈

영웅들은 저마다 산하를 나눠 갖네.  人心旣離天命去 

뒷제왕은 마땅히 이를 살펴 행하고 英雄割據分山河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한하지 말라. 後王規此存競業

억울한 백성의 간과 뇌 땅을 덮고 莫把金甌閒缺

강과 산에 넘쳐흐르느니 生靈糜爛肝腦塗

한 맺힌 그 피로구나. 剩水殘山多怨血

한편 곽사의 군사들이 몰려오는 걸 보자 이각도 군사를 이끌고 마주쳐 나갔다. 냉정하게 대비하고 있던 이각의 군사들이라 아무래 도 분에 못 이겨 달려온 곽사 쪽이 이롭지 못했다.

“물러나라 잠시 물러나 대오를 정비하고 다시 돌아오는 게 낫겠다.”

이윽고 곽사는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물렸다. 이각도 그런 곽사를 뒤쫓지 않았다. 대신 군사를 내어 황제와 황후를 옛날 동탁이 근거 로 쓰던 미오로 옮기고 조카 이섬으로 하여금 감시케 했다. 명분이 야 황제를 안전한 곳에 모신다는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아무도 나오 지 못하게 하니 사실상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더욱 괴로운 것은 식량이었다. 이각이 식량을 댄다고는 하나 양이 넉넉하지 못하고 끊기는 때가 많으니 오래잖아 황제를 모 시는 신하들은 모두 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보다 못한 헌제는 이각 에게 사람을 보내 쌀 다섯 섬과 쇠뼈 다섯 마리 분을 청했다. 좌우의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뭐라고? 조석으로 끼니를 올리는데 달리 또 무엇을 내놓으란 말 이냐?”

헌제가 사람을 보내자 이각은 성부터 먼저 냈다. 그리고 일부러 상한 고기와 썩은 곡식을 보냈다. 옛 주인 동탁보다 더한 처사였다. 이각이 보낸 곡식과 고기를 본 헌제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소매를 적시는 눈물은 그 같은 이각에 대한 원망보다 무력한 자신을 한탄하는 것이었으리라. 황제가 눈물을 보이니 좌우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의 눈에도 한결같이 눈물이 괴었다. 그때 홀연 사람이 와서 알렸다.

“폐하,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는데 창검이 해를 가리고 북소리 징 소리가 천지에 떨쳐 울립니다. 어가를 구하러 달려오는 길이라 합 니다.”

“그게 누구라더냐?”

황제는 반갑게 물었다. 좌우가 나가 알아보니 곽사였다. 황제는 탄식했다.

“곽사라면 이각과 다를 게 무엇이겠느냐. 공연히 번거로울 뿐이다.”

그 말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도 한결같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다시 성 밖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이각이 스스로 군사 를 이끌고 곽사를 맞으러 나간 것이었다.

“이놈 곽사야. 내 너를 대함에 야박하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해치고자 하였느냐?”

이각은 저만큼 곽사의 모습이 보이자 채찍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곽사도 노기등등하게 대꾸했다.

“너는 나라를 배반한 도적이다. 내 어찌 너를 죽이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이처럼 천자를 모시고 있는데 어찌 반(反)이라 하느냐?” 

이각이 이죽거리듯 되물었다. 곽사는 더욱 성이나 소리쳤다. 

“너는 무엄하게도 어가를 겁탈했다. 그걸 어떻게 천자를 모신다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이각도 더 참지 못했다. 긴 칼을 비껴들며 곽사를 충동했다.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네가 기왕에 이렇게 달려왔으니 싸우되, 군사는 쓰지 말기로 하자. 우리 둘이 겨루어 이기는 쪽이 폐하를 모 시는 게 어떠냐?”

“좋다. 내가 진작 원하던바다.”

곽사 또한 지지 않고 말을 내달리며 소리쳤다. 원래가 둘 다 동탁이 남달리 아끼던 장수였다. 일신의 무예가 결코 범상할 리 없었다. 말과 말이 엇갈리고 창칼이 맞부딪치기가 열 번을 넘어도 좀체 승부 가 나지 않았다.

황제 곁에서 걱정스레 그들의 싸움을 보고 있던 태위 양표(楊彪) 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말을 달려 나가더니 싸우는 두 사람 에게 소리쳤다.

“두 분 장군께서는 잠시 싸움을 멈추시오. 내가 특히 여러 관원들 과 의논하여 두 분이 화해할 방도를 찾아보겠소.”

그때쯤 이각과 곽사도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생각보다 상대가 강한 걸 알자 분김에 몸소 맞붙은 것이 은근히 후회되던 참이었다. 양표의 말에 못 이긴 체 둘은 각기 자기 진채로 돌아가버렸다.

이튿날이었다. 양표와 주준은 대소 관원 육십여 명을 모아 의논한 뒤 먼저 곽사의 진영을 찾았다. 이각과의 화해를 권하고자 함이었 다. 곽사는 그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 수하 군사들을 시켜 모조리 감금하게 하였다.

“우리는 좋은 뜻으로 화해를 권하러 왔는데 장군은 어찌하여 우 리를 이렇게 대하시오?”

대소 관원들이 놀라 항의했다. 곽사가 유들유들하게 대답했다.

“이각 그 도적놈이 천자를 겁탈했으니 나는 부득불 여러분을 내편에 잡아두어야겠소!”

그때 양표가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한쪽은 천자를 가두고 다른 한쪽은 백관을 잡아두니, 도대체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단 말씀이오?”

그러자 곽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네놈이 죽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이로구나. 감히 나에게 맞서다니.”

그렇게 소리치며 칼을 뽑아 양표를 죽이려 했다. 이미 눈이 뒤집 힌 곽사에게는 삼공의 자리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중랑장 양 밀(楊)이 힘써 말려 간신히 곽사의 광기를 가라앉혔다.

“정히 이각에게 권할 말이 있거든 너희 둘만 가거라. 나머지 대소 관원들은 여기 남아 있어야겠다.”

마침내 칼을 거둔 곽사는 양표와 주준만을 놓아주었다. 곽사의 손 을 벗어난 양표는 주준에게 말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임금을 구하지 못한다면 헛되이 세 상을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렇소.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수가 없구려.”

주준도 그렇게 대꾸하며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이에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어지러운 세상과 자기들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통곡하다 가 마침내 혼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그 후 둘은 곧 깨어나 각기 집으 로 돌아갔으나 주준은 그 길로 병을 얻어 며칠 안 돼 죽고 말았다. 어렵게 인 화해의 기운이 그렇게 스러지자 남은 것은 진흙탕에서 뒹굴며 싸우는 두 마리 개 같은 싸움뿐이었다. 이각과 곽사는 이튿 날부터 서로 군사를 몰아 오십여일이나 계속해 맞붙으니 그 통에 죽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각에게는 좌도(道)와 사술(邪術)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흠이 있었다. 진중에도 항상 무녀를 두어 북을 치며 신내림[降神]을 하게 하고, 작은 일도 그녀들에게 물어 그대로 따랐다. 가후(賈詡)가 여러 번 그 일을 말렸으나, 이각은 종내 듣지 않아 둘의 사이만 서먹 해지고 말았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시중 양기(楊)가 가만히 헌제에게 말했다. 

“신이 보기에 가후가 비록 이각의 심복이기는 하나 제 임금을 온 전히 잊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를 불러 이 어려움 을 넘길 계책을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중에 때맞추어 가후가 헌제를 뵈러 왔다. 헌제 는 양기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좌우를 모두 물리친 다음 울면서 가 후에게 말했다.

“경에게 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일로 왔다가 뜻하지 않게 황제의 눈물을 보게 된 가후가 섬뜩하여 되물었다.

“경은 한실을 불쌍히 여겨 짐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겠소?”

그 말에 가후는 황급히 방바닥에 엎드리며 대답했다.

“실로 신이 마음으로 바라는 바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신이 스스로 좋은 꾀를 내어보겠습니다.”

주위를 경계하느라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두 눈에는 충성 어린 결의가 내비쳤다. 이에 황제는 눈물을 거두고 가후에게 고마워하는 뜻을 표했다.

가후가 나간 지 오래잖아 이번에는 이각이 헌제가 있는 곳으로 왔다. 이각이 칼을 찬 채 들어오는 것을 보고 헌제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곽사란 놈이 불측해서 공경을 가두고 그도 모자라 폐하까지 빼 앗아가려 했습니다. 신이 아니었더라면 폐하께서는 놈에게 끌려가 셨을 것입니다.”

이각이 헌제에게 불쑥 말했다. 조카 이섬을 시켜 가둬놓은 뒤 코 빼기도 내비치지 않다가 기껏 나타나 하는 말이었다. 아직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고 말뜻도 천자를 가두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셈이었 으나 그 태도는 이미 신하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력한 황제 는 어쩔 수 없었다. 신하 흉내라도 내주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이각 에게 손을 모아 감사했다.

“고맙소. 경의 공을 잊지 않으리다.”

그 말에 이각도 좀 머쓱한지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역시 황제 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한 물러남이었다.

황제가 더욱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황보력(皇甫 酈이란 신하가 들어왔다. 말을 잘하는 데다 이각과 같은 고향 사람 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황제는 황보력을 보자 그를 시켜 이각과 곽 사의 화해를 주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표의 현책을 받아들 여 반간계(反間)로 이각과 곽사를 이간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자 칫하다간 그 두 역적이 서로 싸워 망하기 전에 나라가 먼저 결딴날 판이었다.

“경은 언변에 능하고 또 이각과 동향이라 하니 그 둘을 서로 화해 케 하여 짐과 사직을 평안케 하라.”

그 같은 헌제의 명을 받은 황보력은 먼저 곽사를 찾아갔다. 이각은 한 고향 사람이라 어찌 될 것도 같아 곽사의 속부터 떠보기로 한 것이었다.

조정 백관의 대부분을 가두어두고는 있지만 곽사는 아무래도 천 자를 끼고 있는 이각보다는 불안한 입장이었다. 비록 이각의 강압에 못 이긴 것일망정 천자가 조칙을 내려 자기를 역적으로 몰아버리면 명분을 좋아하는 제후들은 모두 이각을 편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황 제의 조칙을 앞세운 황보력의 권고를 받자 못 이기는 체 말했다. “만약 이각이 폐하를 내놓으면 나도 공경들을 모두 돌려보내겠 소.”

황보력은 됐다 싶었다. 곧 말을 달려 이각의 영채로 달려갔다. 그 런데 일은 거꾸로 되어 쉽게 달랠 수 있다고 믿은 이각이 오히려 뺏 뻣하게 나왔다. 이각도 바보가 아닌 이상 천자를 손에 넣고 있는 자 신이 훨씬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내가 공과 같은 서량 사람이라 하여 특히 나를 뽑아 이, 곽 두 분의 화해를 권하도록 하셨소이다. 먼저 곽장군께 들렀던 바 곽장군은 그 같은 폐하의 뜻을 받들겠다고 하였소. 그런데 공의 뜻은 어떠시오?”

황보력이 그렇게 말을 맺기 바쁘게 이각이 짐짓 성난 기색을 지 으며 대답했다.

“나는 여포를 내쫓은 큰 공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뒤 사 년이나 나 라 일을 맡아 적지 않이 볼만한 일을 하였소. 거기 비해 곽사는 본시 말 타고 도적질하던 무리라는 걸 천하가 다 알거니와, 이제는 감히 공경들을 잡아 가두고 나와 싸우려 들고 있으니 그런 자를 어찌 살려둘 수 있겠소? 그대가 보기에는 내 방략이나 군세가 곽사를 이기지 못할 것 같소?”

한마디로 화해 따위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황보력이 위엄을 갖추어 달랬다.

“그렇지 않소. 옛적에 후예(有 后羿, 하대의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아 한때 하를 멸망시킬 정도였으나 다시 반격을 받아 죽음을 당함)는 자기가 활 잘 쏘는 것만 믿고 어려움을 걱정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멸망당하고 말았소이다. 가까이로는 동(董)태사가 비록 힘이 있었으나 한번 여 포가 은혜를 저버리자 그 목이 국문(國門)에 높이 걸린 바 되었소. 그 일은 특히 공도 두 눈으로 보셨으니, 이는 곧 굳고 힘센 것만 믿 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오. 공의 몸은 나라의 상장(上將)으로 임금께 서 내리신 부월(斧鉞)과 장절(杖節)을 지니고 계시오. 거기다가 또 자손 대대로 높은 벼슬이 내릴 것이니 결코 나라의 은혜가 엷다 할 수는 없소. 그런데도 지금 힘으로 폐하를 공의 근거지로 옮겨 모시 고 있으니 공경들을 자기 영채에다 가두고 있는 곽사와 다를 게 무 엇이겠소?”

그러자 아픈 데를 찔린 이각은 크게 노했다. 대뜸 칼을 뽑아들고 황보력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제 보니 천자가 네놈을 보내 나를 욕보이려 하는구나. 먼저 네 놈의 머리부터 베고 천자에게 따져야겠다!”

기세로 보아서는 금세라도 칼로 후려칠 것만 같았다. 기도위 양봉이 황급히 이각을 말렸다.

“아직 곽사를 없애지 못한 터에 폐하께서 보낸 사람은 함부로 죽 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곽사가 군사를 일으키는 데 대의 명분을 세워주게 되어 제후들이 모두 그를 돕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임금의 사신을 죽여서는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게 됩 니다.”

가후도 곁에서 힘을 다해 양봉을 거들었다. 이각은 가후까지 나 서서 말리자 조금 노기를 죽였다. 그걸 본 가후는 황보력을 떠밀듯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황보력은 떠밀려 나가면서도 크게 소 리쳤다.

“이각이 폐하의 조칙을 받들지 않으니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곁에 있던 시중 호막(胡邈)이 그 소리에 놀라 급히 황보력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몸에 해를 당할까 두렵소.”

얼굴까지 핼쑥해지며 하는 말이었지만 황보력에게는 소용이 없었 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오히려 그런 호막을 꾸짖었다.

“호막 이놈, 너 또한 조정의 신하이거늘 어찌하여 역적에게 붙으 려 드느냐?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법이라[君 辱臣死]했다. 설령 이각의 손에 죽는다 한들 그게 바로 신하된 내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리고 계속하여 이각을 꾸짖었다.

그 일은 이각의 영채 안에 함께 있는 헌제의 귀에도 곧 들어갔다. 헌제는 그러다가 성난 이각에게 황보력이 죽임을 당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람을 불러 황보력을 불러들인 뒤 그날로 고향인 서량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황보력은 그냥 떠나가지 않았다. 원래 이각의 군사는 태반 이 서량 사람이고 나머지는 강인이었는데, 황보력은 같은 고향인 서 량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말했다.

“이각은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그를 따르는 자는 모두 역적의 패 거리라 할 수 있다. 뒷날의 화가 결코 얕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 퍼지자 서량 출신의 군사들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 다. 자연 군심에 동요가 일고 심하게는 밤중에 몰래 달아나는 군사 까지 있었다.

그 같은 군심의 동요는 곧 이각의 귀에도 들어갔다. 가후와 양봉 이 말려 간신히 억눌렀던 이각의 노기가 한꺼번에 터졌다.

“너는 급히 군사를 이끌고 황보력을 뒤쫓아 그 목을 베어 오너라!” 이각은 당장 호분중랑장 왕창(王昌)을 불러 그렇게 영을 내렸다. 그러나 왕창은 본시부터 이각의 사람이 아니었다. 명을 받기는 하였 으나 황보력 같은 충의지사를 따라가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에 왕창은 겨우 뒤쫓는 시늉만 하다가 되돌아와 이각에게 알렸다.

“명을 받들어 황보력을 쫓았으나 이미 떠난 지 오래되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보력보다 더 무서운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은 이각이 아 직도 자기의 사람이라 믿고 있는 모사 가후였다. 가후는 이각의 힘 을 줄일 양으로 가만히 강인들에게 일렀다.

“폐하께서는 너희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을 알고 계시다. 너 희들이 오래 싸움터를 떠돌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아무런 보 답을 받지 못한 걸 딱하게 여기시어 이번에 밀조를 내리셨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기다려라. 지금은 이각 때문에 그리하지 못하나 뒷 날 반드시 무거운 상과 높은 벼슬을 내리실 것이다.”

이각이 대권을 잡은 뒤에도 상과 벼슬을 내리지 않아 쌓인 강인들 의 원망을 겨냥한 가후의 꾀였다. 과연 강인들은 그 같은 가후의 말 을 듣자 하룻밤 새 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이각의 영채를 떠나버렸다. 가후의 교묘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말 몇 마디로 이각의 힘 을 절반이나 덜어버린 뒤 가만히 황제께 아뢰었다.

“이각은 탐욕스러우면서도 꾀가 없고, 그 군사들은 마음이 흩어진 데다 겁까지 먹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높은 벼슬을 미끼로 던져 한 번 더 저들을 혼란시킬 때입니다.”

“어떤 벼슬이 미끼가 되겠소?”

“이각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대사마(大司馬)에 봉하십시오.”

헌제는 이상했다. 이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대사마라 칭해 왔고 남들도 그렇게 여겨왔다. 그런데도 새삼 조칙을 내려 대사마로 봉하라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헌제는 더 묻지 않고 가후의 말에 따랐다. 그의 재주를 익히 보아온 데다 무엇보다도 이각의 힘 을 던다는데 듣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사람의 여러 굶주림 가운데서 다른 어떤 것에 못지않게 절실한 것이 정통과 정당성에 대한 굶주림이다. 그가 얻은 것이 권력이건 부이건 명예이건 그것을 남과 자신에게 아울러 유효하게 해주는 최종적 확인 행위가 있어야 정통과 정당성이 획득된다. 이각도 그 점 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았다. 힘으로는 이미 조정을 휘어잡고 대사마 벼슬을 칭한 지도 오래되었으나, 그가 언제나 굶주려 온 것은 정당 성 또는 정통의 권위에 의한 승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황제가 조서를 내려 정식으로 자신을 대사마에 봉했 으니, 비록 늦었고 이름뿐이나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벼 슬이 정통의 권위인 황제에 의해 승인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정당 성의 근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자칭에 지나지 않은 곽사 의 대장군보다 우월한 입장에 놓이게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기 쁨을 표현하는 데 이각은 다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는 모두 여무(巫)들이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복을 빌어준 탓이다.”

이각은 그렇게 말하며 긁어모은 재산을 풀어 무녀들에게만 듬뿍 상을 내리고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온 장졸들에는 치하의 말 한마디 없었다. 바로 가후가 노린 바대로였다.

과연 이각의 그 같은 처사에 대한 장졸들의 불만은 컸다. 그중에 서도 특히 참지 못한 것은 기도위로 힘을 다해 이각을 떠받들어 온 양봉이었다. 평소부터 가깝게 지내던 장수 송(宋果)를 가만히 불 러 울분을 토했다.

“우리가 생사를 넘나들며 시석(石)을 마다하지 않고 저를 위해 싸웠으나 공은 오히려 무당년들보다도 못하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이각만 믿고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역적이란 더러운 이름만 남기게 되겠네.”

송과 또한 불만이 양봉에 뒤지지 않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격한 목소리로 받았다.

“옳으이. 이각 그놈을 그냥 둘 수 없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놈을 죽이고 천자를 구해내어 역적의 이름을 면하겠나?”

송과가 그렇게 선뜻 응하자 양봉은 더욱 힘이 나서 말했다.

“이렇게 하세. 자네는 영채 안에서 일을 일으키고 나는 밖에서 호 응하되, 자네가 영채에 불을 지르는 걸 군호(軍號)로 삼으면 어떻겠 나? 우리 두 사람 모두 거느린 군사가 적지 않으니 그렇게만 하면 이각 그놈은 죽은 목숨일세.”

“좋은 계책일세. 불은 언제쯤 지르면 좋겠는가?”

“아무래도 모두 잠자리에 든 이경쯤이면 좋겠네. 오늘 밤 이경으로 하세.”

“알겠네.”

양봉과 송과는 그렇게 약정하고 각기 자기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일을 꾸밈에 면밀하지 못했던지 그 일은 오래잖아 이각의 귀 에 먼저 들어가고 말았다.

“양봉과 송과가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엿들은 군사로부터 그 같은 보고를 받자 이각은 불같이 노했다. 그 자리에서 군사를 풀어 송과를 잡아들인 뒤 몇 마디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목을 뎅강 잘라버리고 말았다.

한편 양봉은 군사를 이끌고 이각의 영채에서 불길이 솟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 대신 이각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양 봉의 진채를 휩쓸어왔다. 양봉은 일이 탄로난 걸 알았다. 당황한 가운데도 힘써 대적해 싸웠으나 이각의 대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혼전 중에 사경이 이르자 들리느니 이각 군의 함성이요,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느니 그 기치였다. 이에 양봉은 더 대항하지 못하고 약 간의 군사를 거두어 서안(西安)을 바라고 달아나버렸다.

양봉과 송과의 반란은 무사히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이각 의 군세는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강병들이 떠나자 한층 심해진 군사들의 동요는 이제 공공연한 도망질로 번져갔다. 거기다가 곽사 까지 쉴 새 없는 공격을 퍼부어 많은 군사가 죽거나 상하니 이래저 래 느는 것은 걱정뿐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장제가 섬서에서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다 합니다. 두 분 장군을 화해시키러 왔다는데, 만일 따르지 않는 쪽이 있다면 그쪽부터 먼저 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각은 놀랐다. 원래 장제는 번조와 함께 장안(長安)에서 여포를 쫓아내는 데 공을 세웠으나, 번조가 한수와 내통한 혐의로 제 거된 뒤 근거지인 섬서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는 자기들에 비해 보 잘것없는 세력이라 이각과 곽사는 오히려 짐을 더는 기분으로 돌아 가는 걸 허락했는데 이제 사정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이각과 곽 사는 나뉘어 싸운 지 여러 달 동안에 둘 다 쇠약해져 있는 반면 장 제는 처음의 세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각은 생각 끝에 먼저 사람을 장제의 진중으로 보내 자기의 뜻 을 전했다.

“곽사의 죄가 자못 크나 장군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이곳까지 와서 권하시니 옛정을 보아서라도 곽사와 화해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자 곽사도 별 수 없었다. 자칫하다간 장제와 이각의 연합 군에게 공격을 받을 판이라 역시 두말 않고 장제의 권유에 따랐다. 그 일로 대국의 우이(牛耳)를 잡게 된 장제는 곧 이각에게서 풀려 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어가를 홍농으로 옮기도록 청했다. 홍농이 라면 동탁이 버린 옛 도성 낙양 부근이었다.

“짐이 동도(東都, 낙양)를 생각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돌아가게 되었구나! 실로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장제의 표문을 읽은 황제는 그렇게 기뻐하며 장제를 표기장군으 로 삼았다. 뜻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벼슬까지 얻게 된 장제 는 양식이며 술과 고기를 황제와 백관들에게 보내는 한편 이각과 곽 사를 재촉하여 동도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곽사는 그에 따라 가두어두었던 공경들을 모두 풀어주고, 이각도 헌제가 타고 동쪽으로 떠날 어가를 수습게 하는 한편 옛 어림군 수 백을 보내 창을 들고 호위케 했다.

서도(都)인 장안을 떠나 동도 낙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동안 순조로웠다. 그런데 천자의 수레가 신풍을 지나 패릉에 이르렀을 무 렵이었다. 마침 가을이라 맑은 바람이 부는데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더니 수백의 군병이 다리 위에 나타나 길을 막았다.

“오는 자가 누구냐? 멈추어라.”

“성가(聖)가 이곳을 지나는데 누가 감히 가로막으려 드느냐?”

시중 양기가 말을 달려 나가 꾸짖듯 소리쳤다. 군사들 가운데서 두 장수가 나서서 대답했다.

“우리들은 곽장군의 명을 받들어 이 다리를 지키며 간세(間細, 첩자)들이 드나드는 걸 지키고 있소이다. 귀하가 비록 성가를 모셨다 고 말하나 내 두 눈으로 폐하를 뵈온 뒤라야 믿고 길을 내줄 수 있 을 것이오.”

그 말에 양기는 어가에 드리워진 구슬발을 높이 젖혀 올렸다. 헌 제는 몸소 얼굴을 드러내어 두 장수에게 일렀다.

“짐이 여기 이르렀거늘 경들은 어찌 물러나지 않는가?”

헌제가 그렇게 말하자 비로소 다리를 막고 있던 군병들은 길 양 편으로 갈라서며 만세를 불렀다. 그사이에 어가는 천천히 다리를 건 너갔다. 어가가 지나간 뒤 곽사의 두 장수는 즉시 그 소식을 곽사에 게 전했다. 곽사는 노했다.

“내가 비록 장제의 청을 받아들였으나 이는 그의 군세가 너무 커 서 잠시 예봉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때를 보아 천자를 다시 미오에 다 잡아둘 작정이었는데 어찌하여 네놈들이 멋대로 보내주었느냐?”

그렇게 꾸짖은 뒤 장수를 즉시 목 베게 했다.

곽사가 그토록 노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당장은 장제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체 자신이 가두고 있던 공경들을 풀어놓았으나 이각 또 한 천자를 내놓으리란 데에 곽사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렇게 되면 천자와 공경들은 모두 장제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되겠지 만 어쩌면 군사는 많아도 장제의 손에 있는 것을 뺏기가 이각의 손 에 있는 걸 뺏기보다 쉬울 것 같았다. 장제가 워낙 둔해빠진 무골이 라 기다리다 보면 때가 오리라 믿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먼저 곽사의 예상에 빗나간 것은 장제의 처신이었다. 장제가 급작스레 장안으로 군사를 몰아온 것은 자기편끼리의 내분으로 모두 함께 망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였다. 따라서 이각과 곽사가 화 해하고 또 헌제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를 받자 자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으로 믿고 천자를 동도(東都)로 돌려보냈다. 이각이나 곽사처럼 천하에 대한 야심이 없는 장제로서는 특별히 천자를 자기 곁에 잡아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곽사는 그 같은 장제의 결정에 당황했으나 아직은 장제와 맞설 수 없어 망설이고 있는데, 천자의 어가는 동도로 출발해버렸다. 그 래서 장제와 맞붙는 수가 있더라도 천자를 추격할 결심을 굳히고 있 을 즈음 눈치 없는 두 장수가 저절로 굴러들어온 천자를 놓아 보내 버렸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두 장수의 목을 벤 곽사는 곧 군사를 일으켜 천자를 뒤따르기 시 작했다. 날랜 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뒤쫓는 곽사의 군사들과 수 레나 도보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어가 행렬과의 경주라 곽사는 오래 잖아 어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때 어가는 화음현을 지나고 있었다. 군신이 모두 곽사와 이각의 손길에서 겨우 벗어난 걸 다행으로 여기며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홀 연 등 뒤에서 함성이 일었다.

“수레를 멈추어라!”

그 같은 고함 소리와 기치로 보아 뒤쫓아 온 곽사의 군사임에 분 명했다. 좌우가 모두 어쩔 줄을 몰라 웅성이는 가운데 낙담한 헌제 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겨우 늑대 굴을 벗어나니 이제는 바로 호랑이의 아가리로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 말에 좌우에서 모시고 있던 대신들도 실색한 채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뒤따르는 곽사의 군사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어가의 행렬 끝과 곽사의 군사 앞 머리가 닿게 될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 갈래 크게 북소리가 울리며 앞에 보이는 산 뒤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왔다. 큰 깃발 하나를 앞세우고 있는데 거기에는 ‘대한 양봉(漢楊奉)’이란 네 글자가 크 게 씌어져 있었다. 얼마 전 이각을 없애려고 하다 오히려 쫓겨 서안 으로 달아났던 기도위 양봉 그 사람이었다.

그때 서안으로 갔던 양봉은 이끌고 간 군사를 종남산(南山)에 머물게 하면서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어가가 부근 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수하의 천여 명과 함께 특히 어가를 보호하 러 달려온 길이었다.

곽사도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길을 막자 진세를 벌여 싸울 준 비를 갖추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하기는 했지만, 우두머리가 전 일 이각 아래 있던 양봉이요, 군사도 그리 많지 않은 걸 알자 곧 마 음이 놓였다.

“주인을 배반한 도적 양봉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이윽고 곽사의 진문에서 달려 나온 최용(崔勇)이 양봉의 군사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우었다. 욕을 먹는 양봉도 노기가 치솟았다. 불길이 이는 눈길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공명(明)은 어디 있느냐?”

그 말에 한 장수가 한 손에 큰 도끼를 들고 화류마(驛騮馬, 주나라 무왕이 거느렸다는 여덟 마리 준마 중에 하나. 썩 좋은 말)를 나는 듯 몰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똑바로 최용과 어울리는가 싶더니 단 일합에 최용의 목을 찍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실로 무서운 장수였다.

최용이 손발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 못한 채 죽는 걸 보자 군사들 은 물론 다른 장수와 곽사까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땅히 최용을 대신해 달려 나가 흔들리는 사기를 북돋워야 했지만 아무도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 같은 적진의 동요를 모를 리 없는 양봉이었다. 큰 북소리와 함 께 일제히 군사를 몰아 엄살하니 곽사의 군은 대패하여 달아났다. 양봉은 그런 곽사를 이십여 리나 쫓아버린 뒤에 군사를 수습하여 천자를 뵈었다. 꼼짝없이 곽사에게 끌려가 또다시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할 줄 알았던 황제의 기쁨은 컸다.

“경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실로 어떤 일이 났을지 모르겠소. 이 몸 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공이 결코 작다 하지 못할 것이오!” 황제는 그렇게 양봉을 위로한 뒤에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 적장을 벤 장수는 누구요?”

그러자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양봉이 그 장수를 찾아와 황제의 수레 앞에 엎드리게 했다.

“이 사람은 하동 양군 출신으로 이름은 서황晃)이요, 자는 공명 (明)이라 합니다.”

양봉의 그 같은 소개에 한동안 서황을 그윽히 보던 헌제가 위로 했다.

“그대의 도끼 솜씨가 절묘했다. 그 노고를 짐은 잊지 않으리라.”

그런 다음 천자의 일행은 양봉의 호위를 받으며 화음현에 잠시 어가를 머물렀다. 이때 장군단외(段煨)는 의복과 음식을 헌상하니 상하가 모두 주림을 면했다. 그날 밤 황제는 양봉의 군영 안에서 잠 자리에 들었다.

한 싸움에 져 쫓겨갔던 곽사는 다음 날 다시 군사를 수습해 양봉 의 진 앞으로 쳐들어왔다. 전날 비록 지기는 했으나 양봉의 군사가 적은 걸 보고 머릿수로 짓뭉갤 심산이었다.

서황이 또한 전날처럼 앞서 달려 나갔으나 곽사의 대군이 여덟 갈래로 한꺼번에 덤벼드니 혼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곧 양 봉과 천자는 성난 물결 같은 적군들 가운데 남겨진 작은 섬이 되어 버렸다. 위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하늘이 저버리지 않았던지 홀연 동남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짓쳐왔다. 방심하고 있던 곽 사는 다시 낭패했다. 흩어지려는 군사들을 독려하기에 힘을 다했으 나 원군이 온 걸 알고 힘을 얻은 서황이 더욱 맹렬하게 공격해 오니, 다시 곽사의 군사는 대패하고 말았다.

달려온 사람은 제실의 외척 되는 동승(承)이란 사람이었다. 또 한차례 고비를 넘긴 황제는 인척인 그를 보자 눈물부터 솟았다. 그 를 잡고 간신히 이어지는 음성으로 지난 일을 들려주었다. 동승이 그런 황제를 위로했다.

“폐하께서는 이제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신은 양장군과 힘을 합쳐 기필코 이, 곽 두 역적을 목 베고 천하를 바로잡겠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헌제는 곧 좌우에 영을 내려 급히 동도에 이르기를 재촉했다. 동승과 양봉도 먼저 동도에 이르는 일이 급하다 여겨 그대로 시행하도록 했다. 이에 어가는 그날부터 밤에도 수레를 멈추지 않고 홍농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