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화 : 안겨오는 천하
안겨오는 천하
어가가 황황히 홍농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을 무렵 조조는 아직도 산동에서 여포로부터 되찾은 연주를 근거로 힘을 기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힘써 백성들의 살이를 보살피고 생업을 북돋우며 널리 인재 를 구하고 군사를 기르니, 어느새 수백의 모사, 양장(將)에 군사가 이십만이요, 창고마다 병기와 군량이 가득했다.
물론 조조도 이각과 곽사의 틈이 벌어질 때부터 장안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떤 제후보다도 더 예민한 눈과 귀로 조정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장안성이 싸움 터가 되고 천자와 공경(公卿)들이 각기 이각과 곽사에게 잡혀 있다 는 소식을 듣고서도 조조는 조금도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공명심에 조급한 장수들이 장안성으로 진격하자고 우겨도 조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두 호랑이가 더 싸워 양쪽이 모두 상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만약 지금 대군을 몰고 장안으로 들어가면 둘 은 반드시 싸움을 멈추고 힘을 합쳐 우리에게 대항해 올 것이다.” 조조는 항상 자기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내세웠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을 살피면 반드시 그것만도 아니었다.
사실 조조도 처음 이각과 곽사의 싸움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 일이 자신의 생애에 어떤 변화를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천리도 넘게 떨어진 곳의 싸움이긴 하지만 그 둘이 싸우는 배경이 바로 제 실과 조정이란 점에서 반드시 그 여파는 천하에 두루 미칠 것이라 는 일반적인 예측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지는 어떤 알지 못할 감각 이었다.
이에 조조는 모개의 진언도 잊고 가장 아끼는 곽가를 불러 물었다.
“봉효(奉)는 이각과 곽사의 싸움을 어떻게 보는가?”
갑작스런 물음이었으나 곽가는 미리 준비한 듯 대답했다.
“주공을 향해 부는 바람입니다. 그들이 싸워 쇠약해지면 천하는 주공께 의지해 올 것입니다.”
“북에는 원소와 공손찬이 있고 남에는 원술과 여포가 있다. 어찌 천하가 다음에 의지할 게 나란 말인가?”
“당장은 모두 자못 위세가 있으나 그들은 기껏 주공께서 헤치고 나가야 할 가시덤불이나 건너야 할 개울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천하가 의지하게 될 곳은 반드시 주공입니다.”
곽가는 자신 있게 말했다. 조조는 엷은 입술에 미소를 띤 채 듣고 있다가 슬쩍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이 내가 움직여야 할 때란 뜻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각과 곽사가 싸움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느 쪽도 상 한 정도는 아닙니다. 더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지금 주공께서 섣불 리 군사를 일으킨다면 둘은 반드시 싸움을 멈추고 힘을 합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자를 끼고 있는 그들 쪽이 유리합니다. 거 기다가 섬서에 가 있는 장제張)까지 그들에게 가세하면 주공께서 는 열에 아홉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곽가는 조조가 헤아리지 못하던 것까지 단숨에 말했다. 그러나 조 조의 눈에는 무언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조조가 한참 뒤에 나직이 물었다.
“이유란 그뿐인가?”
그러자 곽가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살피듯 조조를 올려보다가 거 듭 조조의 물음을 듣고서야 역시 나직하게 되물었다.
“주공께서는 스스로를 천하에 바치고자 하십니까? 천하를 얻고자 하십니까?”
만약 젊은 날에 그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조조는 틀림없이 스스 로를 바치는 쪽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흔 줄에 접어든 지 금, 그리고 한실(漢室)에 대한 거듭된 환멸로 충성의 서약마저 철회 해버린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느 편도 선뜻 택할 수가 없었다. 한쪽 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고 다른 한쪽은 드러내놓고 말하기에 너무 엄청난 일이 되는 까닭이었다.
“봉효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일세.”
한참을 망설이던 조조는 그렇게 대답해놓고 다시 곽가를 살폈다.
이상스레 번쩍이는 눈길로 조조를 마주보던 곽가가 무겁게 입을 열 었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스스로 다가가는 수고로움도 있어 야 하지만 때로는 천하가 스스로 다가오도록 기다리기도 해야 합니 다. 그런데 지금이 주공께서는 바로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조조는 곽가의 그 같은 말이 한편으로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조조가 곽가에게 보인 유별난 정은 어쩌면 재주보다 그런 젊은 패기와 과단성 쪽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조조는 아무하고도 장안성의 변 란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의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말한 대 로, 어쩌다 진병(進兵)을 주장하는 쪽이 있어도 곽가가 겉으로 내세 운 이유를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헌제가 양봉과 동승의 호위 아래 홍농으로 떠났다는 소식 에 이어 날아든 갖가지 후문은 더 이상 조조를 산동에 눌러 있을 수 없게 하였다. 천자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도 급박하고 천하 형세의 변화가 너무도 격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경과는 대강 이러했다.
뜻 아니하게 동승(承)이 나타나 양봉을 거드는 바람에 두 번째 싸움에도 지고 만 곽사는 쫓겨 돌아가는 길에 역시 어가를 뺏으러 달려오던 이각의 군사들을 만났다. 이미 말만이라도 화해를 한 데다 곽사 역시 어가를 뺏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이각도 전처럼 무턱대고 싸우려 들지만은 않았다. 그런 이각에게 곽사가 말했다.
“양봉과 동승 두 놈이 갑자기 나타나 어가를 구해 홍농으로 달아 났네. 만약 그것들이 천자와 함께 산동에 이르는 날이면 우리는 끝 장일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천자의 영을 빌어 천하에 포고를 내리 면 제후들은 모두 힘을 합쳐 우리를 칠 것이니 우리는 삼족이 살아 남기 어려울 것이네.”
이각이 듣고 보니 일인즉 낭패였다. 어제까지 창칼을 맞대고 싸우 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곽사에게 새롭고도 엄청난 제의를 했다.
“지금 장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에 있으나 가볍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네. 자네와 나는 그 틈을 타 군사를 합쳐 홍농으로 진격하 세. 가서 한나라의 천자를 죽여버리고 우리 둘이 천하를 반씩 나누 어 갖는 게 어떤가?”
곽사가 생각하니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그 자리에서 기꺼이 응낙 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의 행렬을 뒤쫓기 시작했다. 군량을 제대 로 준비할 틈이 없었던 데다 원래가 기강이 제대로 안 된 군대라 필 요한 것은 모두 약탈에 의지하니 그들이 지나는 길목에는 쌀 한 톨 닭 한 마리 남아나지 않았다.
이각과 곽사가 군사를 모아 뒤따라온다는 걸 알자 양봉과 동승은 군사를 돌려 동간이란 곳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로 했다. 군세가 적병보다 약하니 만큼 기계)로 적을 물리쳐야 하는 게 양봉과 동승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각과 곽사 또한 싸움을 모르는 장수들이 아니었다. 양봉, 동승과의 싸움을 앞두고 서로 의논을 맞추었다.
“적은 군사의 수효가 많지 못하니 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을 것이네. 계략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여버리세.”
그리고 거기에 따라 이각은 왼쪽을 맡고 곽사는 오른쪽을 맡아 산과 들을 덮으며 그대로 밀어왔다. 계책이라면 가장 좋은 계책이 었다.
양봉과 동승도 각기 한쪽씩 맡아 대항했으나 워낙 군사가 모자랐 다. 겨우 천자가 탄 수레만 보존했을 뿐 백관과 궁인들이며, 장부와 전적, 서책 및 궁궐에서 쓰는 여러 가지 집기들은 모조리 버리고 도 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에 이긴 이각과 곽사는 홍농까지 군사를 몰고 갔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으니 홍농은 죄 없이 폐 허와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런 다음 이각과 곽사는 군사를 나누어 섬북(北)으로 피해가는 어가를 쫓았다. 양봉과 동승은 한편으로는 이각과 곽사에게 사람을 보내 여러 가지 약속으로 강화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몰래 하 동으로 성지(聖旨)를 보내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흑산적의 한 갈래 를 불러들였다. 백파(白波)의 우두머리 한섬(韓暹)과 이낙(李樂), 호 재(胡)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낙은 산중에서 무리 를 모아 도적질을 하던 산적에 지나지 않았으나 사정이 급하니 부르 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자의 부름을 받은 한섬, 이낙, 호재 세 사람은 기꺼이 응했다. 이각과 곽사만 막아주면 지난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벼슬까지 내리겠다는 데야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모두 산채를 거두고 내려온 그들 셋은 동승, 양봉과 힘 을 합쳐 홍농으로 쳐들어갔다. 천자로부터 강화 요청을 받아 잠시 추격을 늦추고 홍농에서 머뭇거리던 이각과 곽사는 그 갑작스런 공 격에 견뎌내지 못했다. 한 싸움에 대패하여 쫓겨가니 홍농은 다시 천자가 머무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각과 곽사가 그대로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그 들은 인근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젊고 건 장한 자는 잡아 병졸을 만들었다. 이른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는 감사군(軍)이 그들이었다.
그렇게 되자 이각과 곽사의 세력은 오래잖아 커졌다. 약탈한 곡식 이라고 군량이 되지 않을 리 없고 억지로 끌려갔다고 해도 병졸은 병졸이었다.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헌제는 이낙을 보내 이각과 곽사를 치게 했다. 이낙은 위양에서 이각과 곽사의 군대를 따라잡고 급하게 몰아 쳤다. 승세를 탄 공격이라 이각과 곽사가 유리하지 못했다. 그때 곽 사가 꾀를 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의복이며 약탈해 지니고 있 던 물건들을 모조리 길바닥에 버리고 도망치게 했다.
이낙의 군사들이란 게 원래가 산도적들이었다. 길 위에 즐비하게 버려진 의복이며 재물을 보자 서로 다투어가며 줍기에 바빴다. 그렇 게 되니 대오가 남아날 리 없고 군령 또한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이때다! 모두 되돌아서서 적을 쳐라!”
이낙의 군사가 흐트러진 것을 보자 이각과 곽사가 그렇게 소리쳤 다. 명을 받은 이, 곽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되돌아와 재물에 정신이 빠져 있는 이낙의 군사들을 어지러이 치자 이번에는 이낙의 대패였다.
가장 믿었던 이낙이 그 모양으로 져서 쫓겨 들어오니 양봉과 동 승도 마침내 홍농을 지켜낼 수 없었다. 급히 어가를 보호하여 북쪽 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이각과 곽 사의 추격은 급했다. 천자가 탄 수레가 느려 행군이 더디자 이낙이 천자께 권했다.
“일이 급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말에 오르시어 먼저 피하십시오.”
그러나 젊은 헌제는 의연히 대답했다.
“짐이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 백관을 버리고 먼저 달아날 수 있겠소? 차라리 함께 사로잡힐지언정 그렇게는 할 수 없소.”
그 말을 따르던 백관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제가 한번 뒤를 막아보겠습니다.”
호재가 그렇게 말하고 칼을 휘두르며 밀려오는 이각과 곽사의 군 사들에게 마주쳐 나갔으나 소용없었다.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난군 가운데서 누구의 병장기에 의한 줄도 모르게 목숨만 잃었을 뿐이 었다.
“폐하, 아무래도 수레를 버리시고 걷는 게 낫겠습니다. 어서 내리 십시오.”
일이 급한 걸 보고 양봉이 다시 권했다. 천자도 이번에는 그 말을 따랐다. 군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참을 가다 보니 황하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는 더 나갈래야 나갈 수도 없게 된 것이었다.
이낙의 무리가 어디선지 작은 배 한 척을 찾아와 물을 건너려 했다. 이때 날씨는 몹시 추웠다. 머뭇거리는 황제와 황후를 억지로 부축하여 배에 오르게 하려 했으나 강 언덕이 높아 배를 댈 수가 없었다.
“말고삐 줄을 이어 폐하의 허리를 묶고 배에 내리게 하는 수밖에
없소.”
이각과 곽사의 추격이 급한 걸 보고 양봉이 황망하여 말했다. 황 제 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국(國)인 복덕(伏德)이 흰 비단 열 필을 내놓으며 말고삐 줄을 대신케 했다.
“이 비단은 난군 중에 얻은 것인데 이걸 쓰면 폐하의 연輦)을 배 에 내리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행군교위 상홍(尙)이 천자와 황후를 비단으로 동인 후 여 러 신하들이 언덕 위에서 그 한 끝을 잡게 하고 조금씩 배 위로 내 려 보냈다. 만승의 귀한 몸을 얼어붙은 물에 적시지 않고 무사히 내 리기 위함이었다. 뱃머리에는 이낙이 칼을 빼들고 섰고 곁에는 찬물 을 헤어 배로 건너간 황후의 오라버니 복덕이 내려오는 황후를 받아 안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무사히 뱃전으로 내려서자 그다음은 중신들의 차 례였다. 그러나 배는 작고 탈 사람은 많으니 아무래도 차례가 오지 않게 된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얼음같이 찬물에 뛰어들어 뱃전 에 매달리며 태워주기를 애걸했다.
뱃전에 서 있던 이낙이 칼을 빼어 뱃전에 매달리는 자는 모조리 찍어버렸다. 그리고 군사를 재촉해 황제와 황후를 강 건너로 옮겨놓은 뒤에야 다시 배를 보내 남은 사람들을 실어왔다. 이번에도 이낙은 차례가 아닌데 뱃전에 매달리는 자가 있으면 모조리 그 손가락이 나 손목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바람찬 겨울 강가에 때 아닌 곡성 이 하늘을 울렸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보니 헌제 주위에 남은 것은 겨우 대신 여남 은 명뿐이었다. 헌제는 양봉이 어디선가 구해 온 소달구지를 타고 대양에 이르렀다. 황망한 피난길이라 조석 공양인들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저녁도 굶은 채 어느 헌 기와집에 자리를 정하고 누웠는데 이름 모를 촌 늙은이 하나가 조밥을 진상했다. 헌제와 황후는 함께 수저를 들었으나 그 거친 밥이 제대로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이튿날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의지할 만한 데도 없는 황제는 이낙 을 정북장군, 한섬을 정동장군으로 삼아 격려한 뒤 다시 수레를 움 직이게 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두 대신이 찾아와 수레 앞에 엎 드리며 통곡을 했다. 보니 태위 양표(楊彪)와 태복 한융(韓融)이었다. 모두 지난날 손발같이 부리던 측근들이라 그들을 만난 황제와 황후 는 함께 눈물을 지었다.
한동안 눈물로 다시 만난 반가움을 대신한 뒤 한융이 말했다.
“이각과 곽사 두 도적이 신의 말은 제법 믿는 편입니다. 신이 목 숨을 걸고 저들을 달래 군사를 물리게 하겠사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옥체나 잘 지키십시오.”
한융이 그렇게 말하고 떠난 뒤 이낙은 황제께 청해 양봉의 영채 안에 잠시 머물도록 했다. 그때 양표가 다시 진언했다.
“신이 생각건대 가까운 안읍은 비록 작고 궁벽하나 양봉의 영채 안보다는 지내시기에 나을 듯합니다. 그곳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겠 습니까?”
“경의 뜻대로 하라.”
그의 계책에 따라 이각과 곽사를 이간시켰다가 오히려 이 같은 어려움에 떨어졌으나 양표를 믿는 천자는 두말없이 허락했다.
하지만 그 같은 전란 중에 어디인들 성하겠는가. 안읍도 같은 처 지라 어가가 이르렀으나 천자가 거처할 만한 집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띠집[屋] 한 채를 빌어 거처하는데, 드나드는 문조차 없어 가 시를 베어다 사방을 둘러 막았다. 그리고 천자와 대신들은 그 띠집 아래서 조회를 하고 장수들은 모두 울타리 밖에서 군사를 이끌고 지 켰다.
거기다가 더욱 기막힌 것은 이낙과 한섬의 무리였다. 슬슬 도적의 본색을 드러내 나랏일을 전단(專斷)하는데, 대신일지라도 거슬리면 황제 앞에서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일부러 황제에게 거친 밥과 탁한 술을 보냈으나 황제 또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 니라 이낙과 한섬은 그때껏 따라온 이백여 명의 졸개들에게 저마다 벼슬을 내려주도록 청했다.
“그들은 모두 폐하를 위해 시석(石)을 무릅쓰고 싸운 자들이오 니 마땅히 높은 벼슬을 내려 위로하셔야 합니다.”
강도며 백정, 무당, 주졸(卒) 따위에게 교위나 어사 벼슬을 내려 달라는 요구였다. 평시 같으면 그들이 감히 우러러볼 수조차 없는 관작들이었지만 황제는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망히 쫓기는 길이라 옥새를 갖추지 못했다. 급히 파게 하였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송곳으로 그리다시피 한 나무토막을 옥새라고 찍게 되니 황제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한편 이각과 곽사를 찾아간 태복 한융은 갖은 말로 그들을 달랬 다. 이각과 곽사도 황제가 이미 황하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따르는 무리 또한 적지 않다는 한융의 말에 졸속히 도모할 수 없다 여겼다. 거기다가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내걸며 군사를 물리라 하니 못 이 긴 체 따르기로 하고, 먼저 잡아두고 있던 백관과 궁인부터 돌려보 냈다.
하지만 황제의 어려움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그해는 몹시 흉년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목 숨을 이어가니 굶고 부황들어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다행히 하내 태수 장양(張揚)이 고기와 쌀을 보내오고, 하동 태수 왕읍(王 邑)이 비단과 베를 보내 천자는 차차 지내기가 나아졌다.
동승은 양봉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낙양의 궁궐을 수리하게 하 한편 어가를 그리로 모시려 했다. 이낙이 곰곰 생각해보니 낙양 에 돌아가봤자 자기에게 별로 이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근본이 떳떳치 못한 데다 그동안 해놓은 짓이 있어 뒤가 켕기기도 했다. 이 낙이 이런저런 핑계로 낙양에 돌아가지 않으려 하자 동승이 좋은 말 로 달랬다.
“낙양은 원래가 천자의 도읍이었던 땅이오. 이 안읍은 땅이 좁고 물산도 넉넉지 못한데 어찌 오래도록 어가를 머무르게 할 수 있겠소? 이제 어가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오.”
그러나 이낙은 벌컥 성까지 냈다.
“정 그렇다면 그대들이나 어가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시오. 나 는 여기 있겠소!”
딴에는 그렇게 하면 차마 돌아가지 못하리라 여겼다. 어가를 호위 하는 군사들이란 게 태반이 이낙의 졸개들이라 동승과 양봉이 아무 리 급하다 해도 몇 안 되는 자기 군사들만 믿고 어가를 움직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승과 양봉은 끝내 어가를 낙양으로 되돌리게 했다. 어렵 더라도 돌아만 가면 관동의 제후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들일 작정이 었다.
생각과는 달리 어가가 기어이 낙양으로 떠나자 이낙은 마음을 달 리 먹었다. 가만히 사람을 이각과 곽사에게 보내어 함께 천자를 사 로잡자고 제안했다. 자기 군사만으로는 동승과 양봉의 수하를 이겨 내지 못할 것 같아 이각의 무리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동승과 양봉은 이낙의 그 같은 계획을 알자 밤낮을 쉬지 않고 길 을 재촉하는 한편 천자의 어가 행렬의 맨 앞에 세워 기관을 넘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낙은 마음이 급했다. 이각과 곽사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졸개들을 이끌고 뒤를 쫓기 시작 했다.
천자의 행렬은 궁인, 대신들과 보졸들이 뒤섞인 것이요, 이낙의 군사는 젊고 날랜 자들과 말 탄 군사들이라 사경 무렵이 되자 이낙 은 어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가를 앞세운 천자의 행렬이 막 기 산 아래 이르렀을 때 이낙이 무리를 이끌고 막아서서 소리쳤다.
“어가는 잠시 머무르라! 이각과 곽사가 여기 있다.”
헌제가 놀라 바라보니 벌써 산 위 이곳저곳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정말로 이각과 곽사의 대군이 이른 것 같았다.
그때 형세를 살피던 양봉이 놀란 헌제를 진정시켰다.
“폐하, 심려 마십시오. 이것은 이낙이란 놈의 장난일 뿐입니다. 이각과 곽사는 틀림없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뒤따르는 군사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서황은 어디 있느냐? 어서 가서 역적 놈의 목을 가져오지 못하겠느냐?”
그 말에 서황이 한달음에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서황의 용 맹을 얕잡아본 이낙이 제 스스로 서황을 맞았다. 두 말이 어우르는 가 싶더니 단 한 번 창칼이 부딪기도 전에 이낙이 두 토막이 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힘을 얻은 양봉이 군사를 내보내 남은 이낙의 졸개들을 죽인 뒤 재빨리 기관을 넘었다.
이때 천자의 어가가 낙양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하내 태수 장양은 다시 곡식과 베를 보내 어가를 맞아들였다. 황제는 장양에게 대사마 벼슬을 내렸으나, 장양은 사양하고 군사를 야왕에 주둔시켜 뒤따라오는 이각과 곽사의 무리를 경계했다.
간신히 낙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성안을 둘러본 천자의 마음 은 어둡기만 했다. 궁궐은 모조리 불타고 거리는 황폐한데 눈에 들 어오는 것은 다만 엉겅퀴와 쑥대뿐이었다. 황제는 양봉에게 명하여 궁실 중 무너지다 만 담벽이나마 남은 곳을 골라 손을 보게 한 뒤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백관들이 조하(朝賀)를 드리러 왔으나 그런 황제를 보는 마음은 모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처럼 괴로웠다.
궁궐이 그 모양이니 그러잖아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제실의 체통은 한층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헌제는 조서를 내려 연호를 흥평(興平)에서 건안(建安)으로 고쳤다. 나라를 새로이 일으켜보려는 의지 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해따라 흉년이 겹쳐 그같이 장한 헌제의 뜻도 소용이 없었다. 겨우 수백 호나 될까 말까 한 낙양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 어 모두 성을 나가버렸다. 산과 들에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라도 캐 어 먹기 위함이었다. 그나마도 할 만한 힘이 없는 사람들은 성안에 서 굶어죽었는데 무너지고 부서진 담 사이가 굶어죽은 시체로 뒤덮 이다시피 했다. 한나라의 천운이 쇠하기가 그와 같았다.
천자며 대소 관원인들 먹을게 넉넉할 리 없었다. 거기다가 백성 들까지 낙양을 버리고 떠나버리자 제실은 한층 외로웠다. 보다 못한 태위 양표(楊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전에 폐하께서 조서를 내리셨으나 이각과 곽사의 난리를 겪는 통에 띄우지 못한 게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산동에 있는 조조를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그의 군사는 강하고 장수들은 용맹스러우니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제실을 보필케 하십시오.”
“짐이 이미 조서를 내렸거늘 새삼 물을 게 무엇이오? 빨리 사람을 뽑아 조서를 조조에게 전하게 하시오.”
그 같은 헌제의 윤허를 얻자 양표는 그날로 사람을 뽑아 산동으로 보냈다.
그 무렵 조조는 사방에 풀어놓은 염탐꾼들을 통해 그 같은 낙양 의 사정을 소상히 듣고 있었다. 곧 천자의 부름이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몰랐으나 천자가 아무런 보호도 없이 텅 빈 낙양에서 곤궁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듣자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곽가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좀더 기다리십시오. 곧 천자의 부름이 있을 것입니다.”
낙양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외로운 천자를 옹위하는 게 어떨까 라는 조조의 물음에 곽가는 여전히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 게 대답했다. 약간 다급해진 조조가 다시 물었다.
“제실이 곤궁하다고 해서 반드시 이 나를 부르리라는 보장은 없 지 않은가?”
“지금 주공과 힘을 겨룰 만한 자는 더러 있으나 조정이 알고 있는 것은 주공뿐입니다. 지난번에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산동 평정의 표 문을 올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지만 조정이 나를 부르기 전에 원술이나 공손찬 같은 무리 가 먼저 입경하여 천자를 끼고 앉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조가 굳이 원소를 들먹이지 않은 것은 아직 그와 동맹 관계에 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가장 두려운 것은 원소였다. 공손 찬은 입경하려면 반드시 원소를 지나야 하고, 원술은 속이 좁은 데 다 성미까지 급해 구태여 천자를 끼고 무얼 해보려고 들지는 않을 것 이기 때문이었다. 곽가가 그런 조조의 마음속을 읽은 듯 대답했다.
“원술, 공손찬 따위는 물론 원소도 그럴 만한 안목은 없을 것입 니다.”
“원술, 공손찬은 그렇다 쳐도, 본초(本初)까지야……”
“그렇지 않습니다. 원소는 과단성이 없고 지나치게 헤아리는 결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도 천하를 호령하는 데는 천자를 끼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 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까 지 천자를 끼고 있던 자는 제후들의 공적이 되어 시달리다가 마침내 는 패망하는 꼴도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원소는 반드시 그 두 가지 이롭고 해로운 점을 함께 헤아릴 것이지만, 소심한 그가 택하는 것 은 열의 아홉 큰 이로움을 취하는 쪽보다 큰 해로움을 피하는 쪽일 것입니다.”
그 같은 곽가의 말은 마디마디 조리와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미 불같은 야심과 열정에 몸이 달기 시작한 조조로서는 모두 받아 들일 느긋함이 없었다. 곽가가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순욱을 불러들 였다.
“들으니 방금 성상께서는 이각과 곽사의 수중을 벗어나 낙양에 돌아와 계시다고 하오. 그러나 낙양성은 흉년으로 텅 비고, 폐하는 호위하는 것도 동승, 양봉의 수하 몇 백에 지나지 않으니 가위 버려 져 있음이나 다름없소. 문약(文)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소?”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순욱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지난날 진(晋) 문공(文公)은 주(周) 양왕(襄王)을 모심으로써 여 러 제후들이 복종하였고, 한고조(漢高祖)께서도 의제(義帝)를 위해 발상(發喪)을 함으로써 천하의 인심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지금 어가 가 어려운 피난길에 있을 때에 장군께서 앞장서 창의(倡義)의 군사 를 일으켜 천자를 받드신다면 뭇사람의 기대를 모아 큰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만약 일찍 이 일을 꾀하시지 않고 머뭇거리시다가 다른 사람이 나서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매우 기뻤다. 순욱의 뜻이 자신과 같을 뿐만 아니 라, 언제부터인가 속으로 은근히 불안하게 생각하던 순욱의 마음속 을 일부나마 확인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순욱에 대한 조조의 의심이란 순욱이 자신을 주인으로는 섬겨도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으로는 삼고 있지 않은 듯한 데서 온 것이었 다. 다시 말해 조조 자신을 향한 무조건의 충성이 아니라, 한(漢)을 부흥시킬 인물로서의 조조를 향한 섬김이요, 따름인 듯한 태도였다. 사실 조조가 제실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가만히 살피고만 있었던 그 몇 달 동안 왠지 우울한 얼굴로 조조 대하기를 꺼리던 순욱이었다. 그런데 그 순욱이 춘추시대의 패자(者)인 진문공과 한나라를 일 으킨 고조를 내세워 낙양으로의 진군을 권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한층 크게 흔들어놓기 위한 비유에 지나지 않 을지라도 조조는 기뻤다. 특히 한고조를 예로 든 것은 조조의 가슴 속 깊이 꿈틀거리고 있는 대야망까지 순욱이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 져 한가닥 전율까지 느껴졌다.
“과연 문약은 나의 자방(子房, 유방을 도와 한을 세운 장량)이오. 하마 터면 깨닫지 못한 사이에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소.”
조조는 순욱의 뜻을 한 번 더 다짐하듯 그렇게 치하하고 곧 군사 를 일으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그 명이 제대로 하달되기 도 전에 문득 한 급한 전갈이 왔다.
“성상께서 주공을 부르시는 조서를 가지고 낙양에서 사람이 왔습 니다.”
곽가가 말하던 그때가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조조는 좌우에게 명 해 격식을 갖추어 사자를 맞아들이고, 그 앞에 엎드린 채 자기를 부 르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었다. 그리고 그날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폐하께서 그토록 어려움을 겪고 계신 터에 어찌 촌각이라도 지 체할 수 있겠느냐? 모든 장졸은 걸음을 배로 하고 밤을 낮으로 삼아 낙양으로 치닫도록 하라.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는 자는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낙양성에 있는 황제의 어려움을 들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고 다시 출발에 즈음해서는 진두에서 칼을 빼든 채 그런 추상같은 영을 내리 던 조조에게서 누구도 사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조를 감 격시키고 조급하게 한 것은 사직의 위태로움이나 천자의 어려움이 아니라 스스로 안겨오고 있는 듯 느껴지는 천하였다.
이때 낙양에 있는 헌제는 또 새로운 어려움을 맞고 있었다. 몇 안 되는 군사의 호위 아래 백성들이 없어 무너진 채 수리조차 못한 성 곽에 의지해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급한 보고가 들어 왔다.
“이각과 곽사가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짓쳐오고 있다고 합니다.”
놀란 헌제는 급히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양봉에게 물었다.
“산동으로 간 사자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이 마당에 이각과 곽 사의 군사가 이곳으로 쳐들어온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양봉이 곁에 있던 한섬과 아울러 대답했다.
“저희들이 그 두 역적과 죽기로 싸워 폐하를 지키고자 합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둘 다 장하고 갸륵했지만 특히 놀라운 것은 한섬이었다. 비록 출 신은 산적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번 천자의 부름을 받아 나온 뒤에는 그 누구에 못지않은 충성을 바쳤다. 옛 동료였던 이낙의 유혹도 뿌 리치고 험한 낙양길을 택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어가를 지켰으며, 이제는 형세가 이롭지 못함을 뻔히 알면서도 천자를 위해 기꺼이 죽 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각과 곽사에 비해 그들이 거느 린 군사가 너무 적었다. 그걸 근심한 동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뜻은 장하오만, 성곽은 튼튼하지 않고 병갑(兵甲)은 아울 러 적에게 미치지 못하니 실로 걱정이오. 만약 싸워서 이기지 못하 면 그때는 또 어찌하겠소? 우리야 한목숨 바치면 그뿐이라 해도 폐 하께서 여기 계시니 차마 양책이라 할 수 없구려. 차라리 어가를 모 시고 조조가 있는 산동으로 피해 감만 못할 것이오.”
그 말에 양봉과 한섬은 얼른 대꾸를 못했다.
“경의 말이 옳소, 즉시 산동으로 떠나도록 하시오.”
황제도 동승의 말을 옳게 여겨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에 고단 한 어가는 다시 피난길에 오르는데 말이 없는 백관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랐다.
일행이 막 낙양성을 벗어났을 무렵 화살이 날아갈 거리도 못 미 치는 곳에 자욱이 먼지가 일며 북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마가 달려오 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두려움에 떨며 입조차 열지 못했다.
그때 무리 가운데서 말 한 필이 나는 듯 황제 일행 쪽으로 달려왔 다. 가까이 오는 걸 보니 전날 산동의 조조에게 사자로 보냈던 이였 다. 어가 앞에 무릎을 꿇기 바쁘게 천자께 아뢰었다.
“조장군은 산동의 병마를 모조리 이끌고 폐하의 소명을 받들고자 달려오는 중입니다. 도중에 이각과 곽사가 낙양을 범하려 한다는 소 식을 듣고 하후돈을 선봉으로 삼아 상장 열 명과 정병 오만을 보냈 습니다. 어가를 지키게 하려 함이니 이제 폐하께서는 심려를 그치시 옵소서.”
그제야 헌제도 마음을 놓았다. 오래잖아 하후돈이 허저와 전위 등 을 이끌고 어가 앞에 나타나 군례로 헌제를 뵈었다.
“경들의 수고로움이 크다. 힘써 역적들을 치고 나라를 평안케 하라.”
헌제가 그렇게 하후돈을 위로하고 있는데 다시 동쪽에서 한 떼의 군사가 이르고 있었다. 헌제는 즉시 하후돈에게 명하여 다가오는 군 사들이 어느 쪽인지 알아보게 했다.
“조장군의 보군이 이제 당도한 것입니다.”
하후돈이 곧 그같이 알려왔다. 조금 있으려니 조홍, 이전, 악진이 보들을 이끌고 나타나 어가 앞에 엎드렸다. 황제의 물음에 이름을 밝힌 조홍이 다시 아뢰었다.
“신의 형은 적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혹시라도 하후돈 혼자서 당 하기 어려울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과 몇 장수에게 속도를 배로 하여 달려가 도우라기에 이렇게 온 것입니다.”
헌제는 기뻤다.
“조장군이야말로 정말 사직을 위하는 신하로다.”
그렇게 조조를 치하한 뒤 조홍으로 하여금 어가를 보호하며 앞서게 했다. 그때 탐마가 달려와 알렸다.
“이각과 곽사가 군사를 이끌고 짓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헌제는 두려움 없이 명을 내렸다.
“하후돈과 조홍 두 장군은 각기 길을 나누어 두 역적을 치도록 하라!”
영을 받은 하후돈과 조홍은 곧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이각과 곽사 를 맞으러 나갔다. 각기 양날개를 이루며 마군을 앞세우고 보군으로 뒤를 받치게 한 뒤 일제히 공격했다. 원래 산동의 정병만 뽑아 선봉 으로 삼은 데다 조조 막하의 맹장들이 앞장서서 들이치니 헌제 일행 을 잔뜩 얕보고 쫓기에만 급급하던 이각과 곽사가 당해낼 리 없었 다. 한 싸움에 크게 져 목 없는 시체만 만여 구나 남겨놓고 달아나고 말았다.
“폐하, 이제는 안심하고 낙양으로 환궁하십시오.”
이각과 곽사를 멀리 쫓아버린 하후돈이 그렇게 헌제에게 권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와 지켜준다는 데야 헌제인들 낙양을 버릴까 닭이 없었다. 곧 어가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가 무너지다 남은 옛 궁 궐에 자리 잡았다. 하후돈과 조홍은 성 밖에 군사를 머물게 하여 다 시 올지 모르는 이각과 곽사에 대비했다.
조조는 그 다음 날에야 대군을 이끌고 낙양에 이르렀다. 먼저 성 밖에다 영채를 세우고 군사들을 자리 잡게 한 뒤에야 성안으로 들어 가 천자를 뵈었다.
조조가 궁궐 계단 아래 엎드리자 황제는 평신(身, 국궁을 안 함)을 허락하고 좋은 말로 노고를 치하했다. 조조가 입을 열어 그런 헌제 를 더욱 기쁘게 했다.
“신은 일찍부터 나라의 큰 은혜를 입어 항시 보답하고자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각과 곽사 두 역적의 죄가 땅을 덮고 하늘에 닿을 만하니, 신은 그동안 기른 날랜 군사 이십만을 들어 두 역적을 치고자 합니다. 이는 따름[順]으로 거스름[逆]을 치는 것인즉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다만 용체(龍體)를 보중하심 으로 사직의 크고 무거움을 잊지 마옵소서.”
이에 헌제는 조조를 영領) 사예교위 가절월(假節) 녹상서사(錄 尙書事)로 삼았다. 어제까지 명목뿐인 외직에 있던 조조가 하루아침 에 조정의 대신으로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한편 이각과 곽사는 한 싸움을 크게 지고 난 뒤에야 산동의 조조 가 온 줄 알았다. 그러나 한때 나라의 대권을 쥐고 흔들던 그들의 기 억에 조조는 그리 대단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첫 싸움에 진 것은 다만 뜻밖에 공격을 받은 탓이라 단정하고 둘이 모여 다시 싸울 의 논을 했다.
천하의 형세나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누구보다 밝은 가후(賈詡)가 그런 그들을 말렸다.
“아니 됩니다. 조조의 군사는 가리고 가려 뽑은 정병들이요, 장수 들은 하나같이 날래고 용맹스럽습니다. 차라리 항복하여 그동안 지 은 죄를 빎만 같지 못합니다.”
그 말에 이각은 왈칵 성이 났다.
“네놈이 감히 우리 예기(氣)를 꺾으려 드느냐?”
그 한마디 꾸짖음과 함께 칼을 빼어 가후를 찌르려 했다. 곁에 있 던 여러 장수들이 말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가후는 이미 이각과 곽사의 운이 다한 줄 알았다. 그날 밤으로 말 한 필을 훔쳐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난세를 살아가는 재사(士)의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이각은 다음 날로 군사를 몰아 조조와 부딪쳤다. 조조는 먼저 허 저, 전위, 조인 세 장수에게 삼백 철갑 두른 기병을 주어 이각의 진 중으로 뛰어들게 했다. 잘 조련된 삼백의 철기가 범 같은 세 장수를 앞세우고 짓밟아 들어가니 이각의 보군이 당해내지 못했다. 세 차례 나무인지경 가듯 진중을 휩쓴 뒤 둥글게 진세를 갖추는 삼백 철기 를 보다 못해 이각은 이섬(李暹), 이별(別) 두 조카를 불렀다.
“너희들은 마군을 수습해 저것들을 쫓아버려라.”
그 같은 아재비의 명을 받은 이섬과 이별은 곧 자기편 마군을 이 끌고 조조의 삼백 철기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미처 무어라고 입 을 열기도 전에 허저가 나는 듯 말을 달려 두 사람을 맞았다. 이섬이 먼저 허저와 부딪쳤으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칼에 목을 잃고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섬이 처참한 시체로 변하는 걸 본 이별은 몹시 놀랐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제풀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뒤따 라온 허저는 그런 이별의 목마저 잘라 안장에 걸었다.
허저가 한 번 나가 두 적장의 목을 얻어오자 조조가 그의 등을 쓸 어주며 칭찬했다.
“그대는 실로 나의 번쾌요!”
번쾌는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맹장이니 은 연중에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이어 조조는 기세가 꺾인 이각 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했다. 하후돈은 왼쪽에서, 조홍은 오른쪽에서 나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고 밀어가는데, 북소리 한번에 삼군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이각의 군사는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해 크게 뭉그러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조는 스스로 보검을 빼들고 그런 적병을 뒤따르며 죽이 기를 며칠이나 했다. 그렇게 되니 적의 시체는 들판을 덮고 항복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각이 그 모양으로 쫓겨오자 곽사도 감히 조조에게 대항해볼 엄 두가 나지 않았다. 둘은 한 덩이가 되어 서쪽으로 돌아가는데 그 추 레하고 겁먹은 꼴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다. 간신히 조조의 추격 은 면했으나 달리 갈 만한 곳이 없음을 잘 아는 그들은 남은 졸개들 을 이끌고 산중으로 숨고 말았다.
이각과 곽사를 멀리 쫓고 돌아온 조조는 낙양성 밖에 군사를 주 둔시키고 자신만 입궐하여 헌제를 뵈었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이각과 곽사가 대패하여 멀리 쫓겨갔다는 말을 들은 헌제는 기뻤다. 그때부터 한층 조조를 믿고 의지하니 조정의 대권은 절로 조조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