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2화 : 풍운은 다시 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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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2화 : 풍운은 다시 서주로


풍운은 다시 서주로

조조의 낙양 입성은 천하대세에 영향을 주는 큰 사건이었지만 뜻 밖에도 드러나게 반발하는 제후는 없었다. 처음부터 천하제패 같은 큰 야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성공에 조금씩 안주해가는 공 손찬은 여전히 자기의 근거지 확보에만 몰두해 있었고, 야심만큼 정 치적인 안목이 없는 원술은 조조의 낙양 입성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 로 알지 못했다.

원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일의 심각성을 느 끼고는 있었으나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조조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조가 얻 은 이익 못지않은 위험 부담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를 끼 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럿의 공적이 되어 쓸데없이 힘을 소모하게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원소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제쳐놓고 조조를 불러들인 조정의 처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조의 등장에 아무런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첫 번째가 양봉과 한섬의 이탈이었다. 조조가 이각과 곽사를 크게 쳐부수고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 양봉과 한섬은 가만히 의논했다.

“이제 조조가 큰 공을 이루었으니 반드시 나라의 대권을 잡게 될 것이오. 우리가 비록 그동안 어가를 지키는 데 약간의 공이 있다 하 나 그가 어찌 인정해주겠소? 차라리 일찍 몸을 빼쳐 따로 때를 기다 림이 나을 것이오.”

그렇게 의논을 맞춘 그들은 함께 천자에게 청했다.

“지금 조조가 이각과 곽사의 군을 깨뜨렸다 하나 그 두 역적을 잡 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 둘이 무사히 서량으로 돌아가면 또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오니, 저희에게 약간의 병마를 주어 뒤를 쫓게 허 락해주십시오. 반드시 그 두 역적의 목을 안장에 걸고 돌아와 후환 을 없이 하겠습니다.”

그냥 떠난다면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둘러댄 말이었다. 그러나 그 들의 마음속을 알 리 없는 헌제는 선선히 허락했다. 그들의 말이 조 리에 닿는 데다 이각과 곽사에 대한 풀 길 없는 노여움과 미움 때문 이었다. 이에 양봉과 한섬은 자기의 졸개들을 거두어 낙양성을 나간 뒤 대량 땅으로 가버렸다. 조조의 그늘을 벗어난 그곳에서 때를 기 다리고자 함이었다.

그들이 떠나던 날이었다. 헌제가 조조의 영채에 사람을 보내 조조를 불렀다. 앞일을 의논하기 위함이었지만, 뜻밖에도 그것이 새로운 변화의 발단이 되었다.

천자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들은 조조는 예를 표하고자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사신으로 온 사람이 청수(淸)한 미 목(眉)에 정기가 가득한 게 예사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낙양 일대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이고 벼슬아치고 모두가 주 린 기색이 도는데 이 사람은 어찌 됐길래 홀로 주린 기색이 없는가.’ 

조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공의 존안에는 남달리 정기가 넘칩니다. 어떻게 몸을 보살피기에 그렇습니까?”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삼십 년째 간(소금기)을 먹지 않고[食淡]있습니다.”

사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공은 어떤 벼슬자리에 있으십니까?”

“저는 효렴에 오른 뒤 처음에는 원소와 장양의 종사로 있었습니 다. 그러다가 천자께서 낙양으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뵈 었더니 정의랑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이름과 고향을 밝히는데 그는 제음 정도 땅 사람으 로 이름은 동소(董昭)요 자는 공인(仁)이었다. 조조도 전부터 그 재주와 학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에 조조는 술상 을 차리게 하고 순욱을 불러들여 서로 보게 한 뒤 함께 잔을 들었다. 그런데 몇 순배 술이 돌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한 떼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가는데 누구의 군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장수들에게는 그런 군령을 내린 적이 없는 조조는 이상했 다. 곧 사람을 보내 그게 누구인지 알아오게 했다. 그때 한자리에 앉 아 있던 동소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이각의 구장將) 양봉과 백파(白波, 흑산적의 한갈래)의 우두머리 한섬일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들이 왜 떠나는 것이오.”

조조가 놀라 물었다. 동소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명공께서 이렇게 오셨으니 자기들이 설 곳이 없다 여겨 떠난 것 입니다. 대량梁)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조조는 더욱 놀랐다. 한편으로는 둘 다 출신이 그러하다 니 떠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그들 이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한 짓 같아 섬뜩했다.

“그렇다면 이 조조에게 딴 뜻이 있는 줄 의심해서 떠났다는 것입 니까?”

“지모(智)가 없는 무리들이니 명공께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 니다.”

조조가 심상찮은 안색으로 묻자 동소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 다. 조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각과 곽사 두 역적이 달아난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호랑이가 발톱이 없고 새가 날개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이각과 곽사가 그 꼴이니 머지않아 명공께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마음 쓰실 일이 아닙니다.”

역시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조조는 곧 그런 동소와 의기투합했다. 술 마실 것도 잊고 조정의 앞일을 묻는데 그 대답이 실로 뜻밖이었다. 

“명공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시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포악 한 무리를 제거하신 뒤 조정에 드셔서 천자를 보좌하고 계십니다. 이는 저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五伯, 쇠약한 주나라 왕실을 도와 패업을 이룩한 다섯 제후, 곧 제환공, 송양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가 이룬 공에 못지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기 남다른 데가 있고 뜻 또한 저마 다 같지 않아서 한결같이 복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칫 이 낙양 에 오래 머물다가는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허도(都)로 어가를 옮기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지금 조정은 이리저리 떠돌다 간신히 도성으로 돌아온 터라 원근이 모두 하루아 침이나마 평안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다시 허도로 어가 를 옮기게 되면 중심(衆心)이 즐겨 따르지 않을 것이나, 무릇 비상한 일은 비상한 공을 들여야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결단을 내려 행하십시오.”

실로 기대했던 것 이상의 소득이었다. 허도라면 조조의 근거지에 가까운 곳으로, 천자와 조정을 그리로 옮길 수만 있다면 조조의 위 치는 한층 흔들림이 없게 되는 셈이었다. 조조는 기뻐 어쩔 줄 모르 며, 동소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것은 원래의 내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양봉이 대량 땅에서 틈을 엿보고 있고, 대신들도 모두 조정에만 붙어 지내니 무슨 변란이 있지는 않겠습니까?”

“물론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그 변란을 막는 일은 쉽습니다. 먼저 양봉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안심시킨 다음, 대신들에게는 도성에 양 식이 없으니 허도로 어가를 옮겨야 되겠다고 말씀하십시오. 허도는 풍년이 든 노양(陽) 땅에 가까워 거기서 식량을 옮겨 오면 관민이 모두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하면 대신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동소는 마치 미리 헤아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조조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 소를 보낼 때까지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은 채 거듭 감사했다. 

“만약 이 조조가 그 일을 무사히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공께 서 깨우쳐주신 덕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힘을 얻어 도읍 옮기는 일을 여러 모사들과 가만히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중 태사령에 왕립(立)이란 사람이 있었다. 천문을 자못 밝히 볼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종정(宗正)으로 있는 유애(劉)란 사 람에게 말했다.

“내가 천문을 보니, 지난봄부터 태백성이 두우(牛) 사이에서 진 성(鎭星, 북극성)을 범하여 천진(天津, 은하수)을 지나가고, 형혹성 星, 화성)은 역행하여 천관(天, 각성)에서 태백과 만나고 있소이다. 금(金)과 화(火)가 바뀌는 형국이니 반드시 새로운 천자가 나게 될 것이오.”

“아니, 그게 무슨 뜻이오?”

놀란 유애가 물었다. 왕립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한나라의 기수(數)는 곧 다할 것이오. 진(晋)과 위(魏) 땅에 반드시 흥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헌제에게도 가만히 상주했다.

“천명은 이르고 떠남이 있으며 오행의 이치도 어느 하나가 항상 성할 수는 없습니다. 화(火)를 대신해 흥할 것은 토(土)이니, 한을 대 신해 천하를 얻은 자는 반드시 토(土)의 방위인 위(魏) 땅에 있을 것 입니다.”

위 땅이란 중원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조조의 근거지도 포함된 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서 조조의 가슴 깊이 감추어진 야심을 별 의 움직임으로 드러내 보인 것인지, 머지않은 한나라의 종말이 어떤 예감으로 와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왕립의 그 같은 말은 곧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는 두렵고 도 노여웠으나 아직은 함부로 왕립을 죽여 입을 막을 처지가 못 됐 다. 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왕립에게 이르게 했다.

“조정에 대한 공의 충성은 알 만하나 천도는 깊고도 먼 것이오. 함부로 여기저기 말하지 마시오.”

그런 다음 곽가를 불러 일의 앞뒤를 말해주고 그의 생각을 물었 다. 곽가가 대답했다.

“한은 화덕(德)으로 천하의 주인이 되었고, 주공께서는 토명(土 命)에서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거기다가 허도는 토(土)에 속하는 곳 이니 그곳에 자리를 잡으시면 반드시 흥성하시게 될 것입니다. 화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목(木)을 기르니 이것은 바로 동소와 왕립의 말에 합치됩니다.”

이에 조조는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자기 사람들과의 은밀한 논의 에서 드러내놓고 천도 문제를 밀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튿날 조조는 대궐로 들어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동도 낙양은 동탁 이래로 황폐해진 지 오랩니다. 대궐과 성 곽은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고 허물어진 데다 이제는 양식까지 옮겨 오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허도는 노양에 가깝고 성곽과 궁 실이며 재물과 곡식이 모두 쓸 만큼 있습니다. 신이 감히 바라건대 허도로 어가를 옮기심이 어떻겠습니까? 신은 폐하의 분부를 따를 뿐이오나 다만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말은 그같이 공손했지만 이미 천자는 조조의 청을 거절할 처지에 있지 못했다. 거기다가 여러 대신들도 한결같이 조조의 세력이 두려 워 반대하지 못하니 도성을 옮기는 일은 별 어려움 없이 조조의 뜻 대로 이루어졌다.

길일을 골라 어가가 허도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조조는 모든 장졸 을 풀어 철통같이 호위를 하고 그 뒤를 백관들이 남김 없이 따랐다. 그런데 행렬이 미처 몇 리도 가기 전에 길 앞의 높은 언덕에서 함성 이 크게 일었다.

대량 땅에 있던 양봉과 한섬이 군사를 이끌고 길을 막은 것이었다. 양봉의 수하 장수 서황이 앞장서서 큰 소리로 꾸짖듯 물었다.

“조조는 어가를 겁박하여 어디로 가려는가?”

조조가 말을 몰고 나가보니 서황의 위풍이 늠름하여 자기도 모르게 아끼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그 무예를 보고 싶어 먼저 허저를 내보냈다.

허저가 큰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가니 서황도 도끼 솜씨를 뽐내며 마주 말을 달려 나왔다. 과연 늠름한 풍채에 못지않은 서황의 무예였다. 조조의 막하에서도 손꼽는 맹장인 허저를 맞아 싸우는데 오십 합이 되어도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조조는 더욱 서황이 탐났 다. 곧 북을 울려 군사를 거둔 뒤 모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의논했다. 

“양봉이나 한섬 따위는 하잘것없는 무리이나 서황은 참으로 훌륭 한 장수였소. 내가 차마 힘으로 그를 꺾지 않은 것은 마땅한 계교로 그를 불러 쓰고자 함이오. 누구 서황을 내 사람으로 만들 만한 계책 을 가진 분은 없으시오?”

그러자 행군종사로 있던 만滿寵)이 일어나 말했다.

“그 일이라면 주공께서는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서황과 같은 고향일 뿐만 아니라 전에 한번 만난 적도 있습니다. 저 녁 때 소졸(小卒)로 가장하고 그의 영채에 숨어들어 말로 한번 달래 보겠습니다. 간곡히 타이르면 그도 마음을 돌려 항복해 올 것입니다.” 

조조는 그 같은 만총의 말에 기꺼이 따랐다. 주인의 허락을 받은 만은 그날 밤 이름 없는 졸개의 복색을 하고 양봉의 군사들 틈에 끼어들었다. 누구 할 것 없이 군자가 넉넉하지 못해 졸개에 이쪽저 쪽을 구별할 만한 복색이 정비되지 않은 때라 별 어려움 없이 서황 의 군막에 이를 수 있었다.

만이 벌어진 장막 틈으로 살피니 서황은 촛불을 밝히고 갑옷을 입은 채 홀로 앉아 있었다. 알맞은 때라 여긴 만총은 다짜고짜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 손을 모으며 인사를 건넸다.

“옛 벗은 그동안 무(無)하신가?”

그 말에 놀라 몸을 일으킨 서황은 한동안 만총을 뜯어본 뒤에야 뜻밖이란 듯 물었다.

“그대는 산양 땅의 만백녕(滿寧)이 아닌가? 어찌하여 그런 행색으로 이곳에 왔는가?”

헤어진 지 오래라 만총이 조조의 사람이 된 줄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만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놀라지 말게. 나는 지금 조(曹)장군의 종사로 있네. 오늘 뜻밖에 도진 앞에서 옛 벗의 모습을 보고 한마디 드릴 말이 있어 이렇게 목 숨을 걸고 온 것이네.”

“무슨 말이기에 이토록 어렵게 나를 찾았는가?”

서황이 자리를 권하며 다시 물었다. 만총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간 곡히 말했다.

“자네의 용맹과 지략은 세상에 드물다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양 봉이나 한섬 따위에게 몸을 굽히고 지내는가? 우리 조장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대의 영웅으로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귀히 여 기는 것은 세상이 이미 아는 바일세. 오늘도 진 앞에서 자네의 용맹 을 보고 경애하는 마음이 일어 강한 장수로 하여금 죽기로 싸우게 하는 대신 특히 나를 보내 자네를 만나보게 한 것일세. 자네는 어둠 을 버리고 밝음을 찾아 우리와 함께 큰일을 해보지 않겠는가?”

그 말에 서황은 한동안 침울하게 말이 없다가 탄식 섞어 대답했다.

“나도 진작부터 양봉이나 한섬이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러나 이미 따른 지 오래이니 어찌 차마 버릴 수 있겠나?”

“자네는 옛말을 듣지 못했나?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이고, 지혜로운 신하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良禽擇木而棲 賢臣擇主而事]하 였네. 섬길 만한 주인을 만나고도 사사로운 정분에 얽매여 섬길 기 회를 잃는다면 이는 장부가 할 일이 아니네.”

그러자 서황은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뒤에야 결연히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네. 자네의 말을 따르겠네.”

그런 서황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감사의 뜻까지 들어 있었다. 힘을 얻은 만총은 슬며시 욕심이 났다.

“이왕 가려면 양봉과 한섬의 목을 가지고 가는 게 어떤가? 조장군 을 뵙는 데는 그보다 나은 예물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서황은 여포의 무리와는 달랐다. 비록 양봉이 자기를 제대 로 써줄 만한 큰 그릇이 못 되어 떠나기는 하나 그 목숨까지 뺏고 싶지는 않았다. 정색을 하고 만총의 부추김을 물리쳤다.

“남의 아랫사람이 되어 그 주인을 죽이는 것은 큰 불의네. 나는 결단코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네.”

“자네야말로 진정한 의사일세. 그럼 이대로 떠나세.”

만도 얼른 서황의 뜻에 찬동하고 자기가 한 말을 거두었다. 그 러자 서황은 평소 곁에서 부리던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어둠을 틈타 만총과 함께 조조의 진중으로 향했다.

“서황이 조조에게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서황이 떠난 지 오래잖아 그 같은 보고를 받은 양봉은 크게 노했다. 몸소 천여 기를 이끌고 서황을 뒤쫓기 시작했다. 한동안을 달리 니 저만치 서황이 보였다.

“주인을 저버린 도적 서황은 달아나지 말라!”

양봉은 그렇게 소리치며 한층 급하게 뒤쫓았다.

그렇게 하여 어느 산비탈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한소리 포향과 함께 산 위와 산 아래에 함께 수많은 횃불이 켜졌다. 그와 함께 사면 에서 쏟아지는 것은 그럴 때에 대비해 숨겨둔 조조의 복병이었다. 

“내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양봉, 너야말로 오히려 달아나지 말라.”

쏟아지는 복병들 앞에서 높이 말 위에 앉은 조조가 비웃듯 양봉 에게 소리쳤다. 양봉은 몹시 놀랐다. 급히 군사를 돌려 조조군의 포 위를 뚫으려 했다. 이때 마침 한섬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조 조의 군사들과 혼전을 벌인 덕분에 양봉은 무사히 몸을 빼쳐 달아날 수가 있었다.

조조는 적군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승세를 타 세찬 공격을 퍼부 었다. 그 바람에 양봉과 한섬의 군사 태반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 았다. 겨우 몸을 빼내기는 했으나 싸울 힘을 잃은 양봉과 한섬은 할 수 없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원술에게로 가버렸다.

조조가 군사를 수습해 영채로 돌아오자 만총은 서황을 이끌어 조 조를 만나게 했다. 조조의 기쁨은 컸다. 오랜 벗을 만난 듯 서황을 반긴 뒤 휘하의 그 어떤 장수에 못지않게 후대했다.

양봉과 한섬이 달아나자 더는 조조의 앞길을 가로막을 세력이 없 었다. 이에 조조는 무사히 어가를 허도로 모신 뒤 새로운 제도(帝都) 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궁궐을 새로 짓고 종 묘와 사직을 옮겨 모셨으며 성대(省臺) 사원(司院)의 아문(衙門)도 새로 세웠다. 성곽과 부고(府)를 수리했고 동승 이하 열세 명을 열 후에 봉하는 등 상벌을 내리는 일도 조조의 뜻에 따라 행해졌다. 그다음은 조조 자신과 그를 도운 모사 및 장수들의 논공행상이었 다. 조조는 스스로 대장군 무평후(武侯)가 되고 순욱은 시중 상서 령(尙書令)으로 삼았다. 순유는 군사, 곽가는 사마좨주로 삼았으며, 유엽은 사공연조, 모개와 임준(任峻)은 전농중랑장을 삼았다.

정욱은 동평상(東平相), 범성(范成)과 동소는 낙양(洛陽), 만총 은 허도령(都)을 삼았으며, 하후돈, 하후연, 조홍, 조인은 모두 장군의 열에 올리고 이전, 악진, 여건, 서황은 모두 교위, 허저와 전 위는 도위가 되었다.

그밖의 나머지 장졸들도 그 공과 재주에 따라 각기 벼슬을 내리 니 이로써 조정은 조조의 사람으로 가득 차고 대권은 절로 그에게 돌아갔다. 조정의 큰일은 모두 먼저 조조에게 알린 뒤에야 천자에게 상주할 정도였다.

천도에 따르는 큰일을 대강 정한 뒤 조조는 후당에다 크게 잔치 를 열고 여러 모사들과 장수들을 불러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다시 꺼냈다.

“유비는 군사를 서주에 머무르게 하여 스스로 서주목이 된 데다 근일에는 내게 져서 쫓겨 간 여포까지 받아들여 소패에 머무르게 하였으니, 만약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쳐들어오면 이는 실로 가슴과 배의 큰 우환이 아닐 수 없소. 어찌하면 그 둘을 도모할 수 있겠소? 제공들께서는 묘책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말해주기 바라오.”

조조로서는 벼르고 별렀던 서주 평정이었다. 서주가 자신의 근거 지와 잇닿아 있다는 것보다 이상하게 부담을 주는 유비란 인물 때문 이었다.

허저가 씩씩하게 일어나 말했다.

“바라건대 제게 정병 오만만 빌려주시면 반드시 유비와 여포의 머리를 승상께 갖다 바치겠습니다.”

그때 순욱이 일어나 허저의 말을 가로막았다.

“장군의 용맹은 그저 용맹일 뿐 꾀를 쓸 줄 모르시는구려. 지금 새로이 도읍을 옮긴 터에 군사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하오.” 

그러고는 조조를 향해 말했다.

“제게 한 계책이 있으니 이름하여 두 범이 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교[二虎競食之]라 합니다. 지금 유비는 비록 서주를 다스리고 있 으나 황제로부터 조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명공께서는 폐하께 주 청하여 유비를 정식으로 서주목을 삼은 뒤 몰래 글을 보내 여포를 죽이도록 하십시오. 여포를 죽이면 그에게는 달리 도와줄 만한 힘 있는 인물[]이 없으니 그 또한 머지않아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유비가 여포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여 포가 반드시 유비를 죽일 것이라 명공께는 마찬가지로 유리합니다. 이는 서주란 먹이 하나에 유비와 여포란 두 호랑이가 있기에 가능한 계교입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화살 한 개 허비하지 않고 유비를 없앨 좋은 계책이었다. 풍운은 드디어 조용하던 서주를 향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무렵 유비도 조조가 낙양으로 들어가 대권을 잡고 도읍을 허 도로 옮긴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유비는 그 일이 가진 심각한 의미 를 피부로 느꼈다. 그것은 이제 곧 조조의 시대가 열리리란 예고인 동시에 자신의 오랜 후원자요, 의지였던 공손찬과 그 동맹군 원술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 천자가 낙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유비는 몰래 공손찬에게 글을 보내 낙양으로 군사를 내도록 권해보았다. 그러나 공손찬의 대답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현제의 뜻은 고마우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네. 우선 내 가 낙양으로 가려면 도중에 원소를 지나가야 하네. 원소는 나와 원 혐을 가진 지 오래이니 순순히 길을 내줄 리 만무일세. 거기다가 낙 양에 가 어가를 모신다 해도 득실을 헤아릴 길이 없네. 아우는 천자 를 받든다는 명분의 이득을 말하나 지난날의 하진(何進)부터 동탁이 며 이각, 곽사에 이르기까지 어디 그들이 천자를 끼고 있지 않아 죽 고 망했던가? 공연히 낙양으로 가 제후들의 미움과 의심을 일신에 모으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머물러 근거나 충실히 하겠네.’


다음으로 유비는 원소와 조조가 입경(京)을 두고 서로 다투기를 은근히 기대해보았다. 그러나 원소마저도 어쩐지 조용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할 수 없어진 유비는 조조의 마음이나 어루어줄 양으로 경 하의 표문을 쓰게 했다. 그런데 유비가 막 표문을 받쳐든 사신을 허 도로 보내려는 참이었다. 홀연 사람이 와서 고했다.

“허도에서 천자의 사신이 이르렀습니다.”

유비가 놀라 군(郡) 경계까지 나가서 사자를 맞아들였다. 사자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서주목을 내린다는 제명을 전했다. 도겸으로부 터 사사로이 인수(印綏)는 물려받았으나 유비는 마음속으로 늘 그 일을 개운치 않게 여겨왔다. 그런데 천자가 갑자기 조서를 내려 자 신의 관작을 승인해주었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는 사자에게 절하여 제명을 받든 후 성은에 감사했다. 그리고 크게 잔치를 열어 사자를 대접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어갈 무렵 사자가 불쑥 말했다.

“사군께서 이같이 은혜로운 명을 받게 되신 것은 실로 조장군께서 힘써 주선하신 일입니다. 힘써 어가를 모신 공에 의지해 여러 번 주 청하셔서 이 같은 성지를 받아내신 것입니다.”

이 무슨 조화일까. 의심이 가면서도 유비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 정을 지으며 조조에게 감사와 칭송을 올렸다. 사자는 그런 유비를 가 만히 살피다가 소매에서 조조의 사신을 꺼내주었다. 여포를 죽이라 는 내용이었다.

“이 일은 제 수하들과 의논한 뒤에 계책을 정하겠습니다.”

읽기를 마친 유비는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잔치가 끝난 뒤 유비는 사자를 역관에 묵게 하고 여럿을 불러모았다. 유비가 조조가 보낸 글의 내용을 밝히기 무섭게 장비가 팔을 걷고 나섰다.

“여포는 본래 의롭지 못한 자이니 죽인들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비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궁해서 내게 의탁하러 온 사람이다. 내가 만약 그를 죽인다 면 나 또한 불의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형님은 사람이 좋아서 탈이오. 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여포 그놈 에게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장비가 그렇게 말하며 거듭 여포를 죽이자고 졸랐으나 유비는 끝 내 따르지 않았다. 관우 또한 마음속은 장비와 크게 다를 것 없었지 만 유비가 굳이 고개를 젓자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음 날이었다. 유비가 제명을 받아 정식으로 서주목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여포는 소패에서 그 일을 축하하러 왔다.

“공께서 조정으로부터 은명(恩命)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왔소이다.”

유비와 마주앉기 무섭게 여포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성은에 어떻게 보답할지 다만 두렵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유비가 겸손하게 답례의 말을 했다. 그때 갑자기 장비가 나타나 칼을 빼들고 다짜고짜로 여포를 죽이려 했다.

“익덕, 이게 무슨 짓이냐?”

유비가 황망히 장비를 꾸짖으며 여포를 가로막았다. 여포도 놀라 소리쳤다.

“익덕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드는가?”

“조조가 네놈을 의리 없는 놈이라 하여 우리 형님께 죽여달라고 했다.”

장비는 거리낌없이 대답하며 그대로 여포를 찌를 기세였다.

“장비,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유비가 더욱 엄중하게 장비를 꾸짖었다. 그래도 부득부득 여포에 게 덤비려던 장비는 유비가 칼까지 뽑아들고 호령을 거듭한 뒤에야 물러갔다.

유비는 장비가 물러간 뒤에야 여포를 후당으로 청해 조조의 편지 를 보이고 일의 내막을 밝혔다. 읽기를 마친 여포는 눈물까지 글썽 이며 말했다.

“사군, 이것은 조조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꾸민 수작이오. 부디 헤아려주시오.”

유비가 그런 여포를 안심시켰다.

“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이 비는 결코 그런 의롭지 않은 짓은 아니할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두 번 세 번 유비의 솔직함과 넓은 도량에 감사하고 유비가 다시 차려온 술상을 받아 늦도록 함께 마신 뒤에야 돌아갔다. 

“형님께서는 왜 여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여포가 돌아간 뒤 관우와 장비가 입을 모아 물었다. 유비가 그제 야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까닭을 일러주었다.

“이번 일은 조조가 여포와 나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자기를 칠까 봐 두려워 꾸민 일이네. 우리 둘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고 가운데서 이득을 보자는 얕은 꾀지. 그런데 어찌 그가 사자를 통해 시 킨 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관우는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장비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아니오, 형님. 내가 지금 여포를 죽이려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써 뒤탈을 없이 하자는 것입니다. 당장은 형님의 말씀이 옳다 쳐도 뒷날 여포는 반드시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장부의 할 짓이 아니다.”

유비는 그렇게 장비를 달랬다. 그리고 이튿날 사자가 돌아가는 편 에 조조에게 회신을 보냈다.

‘명공의 뜻은 열 번 받들겠사오나 다만 여포가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로 졸속히 도모할 수 없어 걱정입니다……..’

그 글을 받아본 조조는 사자에게 일의 앞뒤를 물었다. 사자는 여 포가 제 발로 유비를 찾아왔으나 유비가 그를 죽이지 않았음을 일러 바쳤다. 유비가 자기의 속셈을 알아차렸다고 본 조조는 곧 순욱을 불렀다.

“이번의 계책은 이뤄지지 못했소.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조의 물음을 받은 순욱이 다시 꾀를 내었다.

“다시 한 계책이 있으니 이름하여 범을 몰아 이리를 삼키게 하는 계책[驅吞狼]이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겠소?”

조조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순욱이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술술 대답했다.

“가만히 사람을 보내 원술과 유비를 싸움 붙이십시오. 유비가 원술의 땅인 남군을 치려고 천자께 표문을 올렸다는 말을 원술에게 몰 래 알려주면 됩니다.”

“원술과 공손찬은 오래전부터 손을 잡고 나와 원소에게 대항해왔 소. 그런데 유비는 공손찬의 사람이니 원술이 쉽게 우리 꾀에 말려 들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원술과 공손찬이 손을 잡은 것은 눈앞의 이득 을 위한 소인의 뭉침이니 그 둘 사이의 믿음과 정분이 그리 깊지 아 니합니다. 거기다가 유비는 이미 서주를 손에 넣을 때부터 공손찬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힘이 모자라 그 그늘에 있기는 했지만 유비는 애초부터 공 손찬 따위와 비교될 인물은 아니었소. 하지만 원술에게 그걸 알아볼 눈이 있겠소?”

“원술도 그만한 것은 알 것입니다. 그 소문이 주공께서 거짓으로 퍼뜨린 소문이라는 것만 모른다면 반드시 크게 성이나 유비를 들이 칠 것입니다.”

“그다음은?”

“주공께서는 다시 유비에게 원술을 치라는 조서를 내리도록 하십 시오. 그렇게 되면 유비와 원술은 싸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 니다. 유비가 원술과 싸우려면 그로서는 온 힘을 기울여야 하고 따 라서 서주는 빈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본시 의리를 모르는 여포 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여포란 호랑이가 유비란 이리를 삼키게 되는 것이지요.”

조조가 원래 계교에 어둡지 않았다. 그 같은 순욱의 말을 듣자 그 뒤는 저절로 보이는 듯하였다. 크게 기뻐하며 그 계교를 따르니 그 날로 한편으로는 일종의 반간계(反間)를 쓸 사람을 원술에게 보내 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자의 조명을 빌어 서주의 유비더러 원술을 치 라 했다.

서주의 유비는 다시 조정에서 사신이 내려온단 말을 듣고 성을 나가 맞아들였다. 한 통 조서를 받들고 왔는데, 읽어보니 군사를 일 으켜 원술을 치라는 내용이었다. 유비는 말없이 제명을 받들기로 하 고 사신을 허도로 돌려보냈다.

유비가 너무도 쉽게 응하는 것을 보고 미축이 근심스레 물었다. 

“이 역시 원술과 주공에게 싸움을 붙이려는 조조의 계교입니다. 어찌 그토록 의심 없이 따르려 하십니까?”

“비록 계교일지라도 제명을 빌어 내려온 것이라 어길 수가 없소이다.”

유비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한조에 대한 충성심을 잘 드러낸 말이 기도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 또한 훌륭한 계교이기도 했다. 동 탁의 무리는 물론 조조까지 이미 야심을 드러내고 함부로 제명을 비 는 이상, 진정으로 한실을 떠받드는 인물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고 백성들의 사랑도 한층 많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비는 말뿐만 아니라 실천도 빨랐다. 그날로 마보군을 점고하여 원술을 치러 떠나려 했다. 손건이 나서서 그런 유비를 일깨웠다.

“원술을 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서주성을 지킬 일이 정해진 뒤라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들 둘 중 누가 남아 이 서주성을 지키겠는가?”

“제가 남아서 지키겠습니다.”

먼저 관우가 나서며 대답했다. 서주성이 그들 형제의 근거지란 점에서 무엇보다도 그걸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헤아린 나머지였다.

“오래잖아 나는 자네와 의논해야 될 일이 많을 것일세. 그런데 서 로 떨어져 있으면 누구와 의논을 하겠는가?”

글을 읽어 아는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밝은 관우여서 떼어놓기가 싫은 듯했다. 그 눈치를 알아차린 장비가 나섰다. 

“제가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나 유비의 얼굴에는 별로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네게 이 성을 맡겼으면 좋겠지만 마침내 지켜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첫째로 너는 술에 취하면 성질이 사납고 급해져 사졸( 卒)들에게 매질을 하기 때문이요, 둘째로 일을 가볍고 쉽게 처리해 남의 말은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너에게 맡기고 내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지금부터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고 사졸들에게 매질도 않을 것이며, 모든 일은 남의 말을 들어 처리해나가겠습니다.”

장비가 황급히 맹세했다. 유비의 말이 장비에게 성을 맡기지 않으 려는 것이 아니라 다짐을 받아두기 위해서라는 걸 헤아린 미축이 곁 에서 한 번 더 장비를 충동질했다.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다만 두려운 것은 입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일입니다.”

장비는 그 말에 성이 났다. 금방 미축에게 달려들 듯 버럭 소리쳤다.

“내가 형님을 따른 지 여러 해 되었지만 한번도 형님의 믿음을 저 버린 적이 없는데 당신이 어찌 그리 나를 가볍게 보시오!”

그래도 유비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말했다.

“아우는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진원룡)에게 청해 자네를 돕도록 해야겠네.”

그리고 진등에게 당분간 장비가 술을 못 마시게 하고, 잘못되는 일이 없게 장비를 돌보도록 했다. 진등이 그에 응하여 대강 서주성 지킬 일이 정해지자 유비는 그동안 힘써 기른 마보군 삼만을 이끌고 서주를 떠났다.

제명을 받들어 남양의 원술을 치기 위함이었다.

그 무렵 원술은 원술대로 유비가 자신을 치려고 조정에 표문을 올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조조의 계교에 의해 흘러든 거짓 소문 이란 걸 알 리 없는 원술은 좁아터진 속에 일의 앞뒤는 헤아려볼 생 각도 않고 성부터 먼저 냈다.

“원래 돗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삼던 놈이 어찌 이리 건방지단 말 이냐! 갑자기 서주 같은 큰 군을 얻어 제후들과 같은 줄에 서게 되더 니 머리가 돌아버린 게로구나. 일찍 쳐 없앨 것을 공손찬의 낯을 보 아 참았더니, 뭐라고? 제 놈이 도리어 나를 치겠다고? 정말 같잖고 도 한심스런 일이로구나.”

그리고 상장 기령()에게 군사 십만을 주어 서주를 치게 했다.

원술의 군사와 유비의 군사는 오래잖아 우이에서 만났다. 군사가 적은 유비는 지키기 좋게 강물을 두른 산 기슭에 진채를 내리고 원 술의 군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원술의 상장 기령은 산동 사람으로 날카로운 끝이 세 갈래 난 칼 [三尖刀]을 잘 썼는데, 그 칼의 무게가 쉰 근이었다. 여러 곳 싸 움에서 공을 세워 자못 위세가 높았다. 그날도 군사를 유비의 진채 앞으로 몰고 오자마자 앞서서 큰 소리로 유비를 꾸짖었다. 

“유비 이 촌놈아! 네 어찌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유비도 지지 않았다. 진문 앞에 나와 늠름하게 맞섰다.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불측한 신하를 토벌하러 왔다. 네 감 히 항거하려 들면 그 죄 반드시 주살을 면치 못하리라!”

그 말에 기령은 몹시 성이 났다. 스스로 말을 박차 칼춤을 추며 달 려나오더니 곧장 유비를 치려 했다. 관우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 었다.

“하찮은 것이 힘있고 날랜 체 뽐내지 말라! 감히 누구에게 덤비려 느냐?”

한마디 꾸짖음과 함께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기령도 원술의 상 장이니 만큼 만만치 않았다. 관우와 어울린 지 서른 합이 넘도록 잘 버텨나갔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잠시 쉬었다 싸우기를 청했다.

“좋다.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쉴 틈은 주리라.”

관우는 그렇게 허락하고 말 머리를 돌려 자기편 진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잠시 후 기다리는 관우 앞에 나타난 것은 기령이 아니라 그 부장 순정(正)이었다. 겁을 먹은 기령이 대신 내보낸 듯했다. 

“가서 기령이 나오라고 해라. 그와 자웅을 겨루어야겠다.”

관우가 순정에게 일렀다. 순정이 죽을 때가 되었는지 그런 관우의 성미를 돋우었다.

“너는 이름 없는 조무라기 장수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우리 기 (紀)장군의 맞수가 되겠느냐!”

그 말에 관우는 크게 노했다. 똑바로 순정에게로 말을 몰아가 한 칼에 순정의 목을 잘라버렸다. 순정의 목 없는 시체가 말 아래로 떨 어지는 것을 보고 유비가 일시에 장졸들을 몰아 나갔다. 군사가 많 다 하나 예봉이 꺾인 기령이었다. 그대로 쫓겨 달아나다 회음하 어 귀에서야 간신히 군사를 수습했다. 그러나 한번 혼이 난 기령이라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굳게 지키며 다만 군사들을 시 켜 상대의 영채나 기습하게 하였지만 그나마도 번번이 서주군에 들 켜 군사만 축낼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싸움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되풀이되는 소규모의 기습 공격으로는 대세가 판가름이 나지 않고, 본대는 기령이 싸움을 피하는 바람에 군사가 적은 유비로서는 무리하게 공격해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원술과 유비의 군사들이 지루하게 대치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서 주성을 지키고 있는 장비는 성안의 잡사를 모두 진등에게 맡기고 자 신은 군무에 관한 일만 다스렸다. 한동안은 제법 그럴듯하게 일을 꾸려나갔으나 시일이 오래자 차차 술 생각이 났다. 거기서 장비가 생각해낸 것이 일종의 금주 의식이었다. 하루는 크게 술자리를 벌여놓고 모든 관원들을 불러 말했다.

“우리 형님께서 떠나실 때 내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소. 내가 일을 그르쳐 이 서주성을 잃을까 두려워하신 까닭이오. 하지만 즐겨 마시던 술을 하루아침에 끊자면 섭섭하실 것 같아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소이다. 모두들 오늘은 실컷 마셔 취하고 내일부터는 술을 마 시지 않도록 합시다. 나를 도와 형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이 성을 굳 건히 지키는 것이오. 자, 그럼 듭시다. 오늘만은 여기 계신 모든 이가 다 취하도록 마셔야 하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여러 관원들에게 차례로 큰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장비의 잔은 돌고 돌아 조표(曹)란 관원 앞에 이르렀다. 조표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천계, 신명의 가르침. 여기서는 병 따위로 무당이나 도사가 마 시지 못하게 한 정도)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이때 장비는 이미 술기운이 돈 뒤였다. 모두 말없이 받는데 조표 가 홀로 마다하니 불끈 성이나 대뜸 욕설로 나왔다.

“죽일 놈 같으니라고. 어찌하여 너만 홀로 마시지 않겠단 말이냐? 나는 꼭 너를 한잔 마시게 해야겠다.”

그러자 장비의 성미를 잘 아는 조표는 겁에 질려 억지로 한잔을 받아 마셨다. 모든 관원에게 술잔을 돌린 후 장비도 마음 놓고 퍼마 시기 시작했다. 술 앞에 장사 없다고, 아무리 장비라 하지만 큰 잔으 로 수십 잔을 들이켜니 저도 모르게 곤드레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 여러 관원들에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 조표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 정말로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조표가 다시 잔을 피하며 사정했다.

“무슨 말이냐? 조금 전에는 마시고 지금은 왜 못 마신단 말이냐?”

장비가 을러대며 잔을 코앞으로 디밀었다. 조표가 두번 세번 사 정했으나,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오른 장비의 부아만 건드릴 뿐이었다. 조표가 유독 자신의 영을 듣지 않는다 여겨 마침내 잔을 팽개치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장수인 내 영을 어겼으니 채찍 백 대를 맞아야겠다.”

그리고 군사들을 시켜 조표를 끌어내려 묶게 했다. 진등이 놀라 그런 장비를 말렸다.

“현덕공께서 떠나실 때 그렇게도 간곡히 당부하신 말을 잊으셨 소? 함부로 관원을 때려서는 아니 되오.”

“당신은 문관이니 문관의 일이나 잘 다스리시오. 이 일은 나의 소 관이오. 장령()을 시행하는 데 관여하지 마시오!”

취한 장비는 유비의 당부도 잊고 고리눈까지 부릅떠가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런 꼴을 보자 조표는 어찌할 줄 몰랐다. 급하게 끌어댄 다는 게 한층 장비의 속을 긁어놓고 말았다.

“익덕공, 제 사위의 낯을 보아서라도 나를 용서해주시오.”

“네 사위가 웬놈이기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

“여포가 제 사위올시다.”

그 말에 장비는 배알이 확 뒤틀렸다. 조표가 바로 여포나 되는 듯 노려보며 노기등등하여 소리쳤다.

“나는 원래 겁만 주고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네놈이 여포를 업고 나와 나를 위협하려 드니 정말로 때려야겠다. 너를 때리는 것은 바 로 여포를 때리는 것이다!”

그리고 군사를 호령해 조표를 매질하게 했다. 놀란 관원들이 모 두 일어나 말렸지만 장비는 꼭 미친 사람 같았다. 사정 없이 쉰 번이 나 채찍질한 뒤에야 겨우 사람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표를 풀어주 었다.

풀려난 조표는 장비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날 밤으로 편지 한 통을 써서 소패에 있는 사위 여포에게 보냈다. 장비가 자기를 매 질한 일이며, 유비가 원술을 치러 떠나고 장비는 술에 곯아떨어져 있음을 알린 뒤, 이 기회에 서주성을 손에 넣으라는 권유를 담은 내 용이었다.

조표의 글을 받은 여포는 곧 모사 진궁을 불러들였다.

“서주에 있는 장인이 이런 글을 보내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여포의 그 같은 물음에 진궁이 얼른 대답했다.

“원래 소패는 오래 머무를 만한 땅이 못 됩니다. 이제 서주에 노 릴 만한 틈이 생겼으니 망설이지 말고 손에 넣으십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뒷날에는 뉘우쳐도 이미 늦을 것입니다.”

조조가 여백사 일가족을 죽인 일을 보고 그를 버렸을 만큼 개결 한 데가 있던 진궁이었으나 그 몇 년 어려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렇게 변해 있었다. 원래 의리 없기로 소문난 여포가 그런 진궁의 말 을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곧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올라 오백 기를 이끌고 먼저 떠나고, 진궁으로 하여금 남은 군사를 수습해 뒤따르도록 했다. 수하장수 고순도 진궁과 함께 뒤따르게 할 만큼 재빠른 출격이었다.

서주와 소패는 겨우 사오십 리의 거리라 말로 달리니 금세 이를 수 있었다. 여포가 서주성 아래 이르렀을 때는 사경 무렵이었는데 달이 매우 밝았다. 그러나 성 위에서는 여포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劉)사군께서 급한 일로 사람을 보내셨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 앞으로 간 여포는 성 위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마침 성문 을 지키고 있던 것은 조표의 군사들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조표에게 그 같은 전갈을 보내자 조표는 마음속으로 여포가 온 것인 줄 짐작 하고 곧 성문을 열게 했다.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여포는 멀찌감치 있던 수하 오백 기에 게 암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하 오백 기가 달려와 일시에 열린 성문 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무렵 장비는 술에 곯아떨어져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부리던 사람들이 뛰어들어 장비를 흔들어 깨 웠다.

“여포가 성문을 열고 들어와 이리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술에 절어 있는 중에도 여포란 말을 듣자 장비는 번쩍 정신이 들었 다. 급히 갑옷을 걸치고 장팔사모를 끌며 부중을 나와 말에 올랐다. 그때 여포는 이미 거기까지 와 있었다. 장비는 여포를 보자마자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맞붙었으나 아직 술이 깨지 않아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마음만 급해 함부로 사모를 휘두르고 있는데 평소 장 비가 아끼는 연(燕) 땅 출신의 장사 열여덟 기가 그런 제 주인을 보호해 동문을 열고 달아났다. 유비의 가족들이 모두 부중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마저 돌볼 틈이 없었다.

노리는 것이 서주성이요, 장비의 목숨이 아닌 데다, 또 평소부터 장비의 용맹을 잘 아는 여포라 구태여 그런 장비를 뒤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앙심을 먹고 있는 조표는 달랐다. 장비가 술에 취한 채 불과 수십 기만 데리고 달아나는 걸 보자 수하 백여 기를 몰아 뒤쫓기 시작했다. 결과로는 쓸데없이 죽음만 재촉한 꼴이었다. 흐릿 한 눈길로도 조표를 알아본 장비는 금세 고리눈을 부라리며 말 머리 를 돌려 조표를 맞았다.

장비에게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기는 하나 조표 따위는 적수가 못되었다. 삼합도 어울리기 전에 겁을 먹은 조표는 그제야 후회하 며 달아났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성 밖 물가에 이르렀을 무렵 장비가 내지른 창에 등 한가운데가 뚫려 말과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 다. 장비는 그 기세를 몰아 성 밖에서 성안의 자기편 군사들을 불러 모은 후 그들을 이끌고 회남으로 간 유비를 찾아 떠났다.

한편 힘들이지 않고 서주성을 얻은 여포는 먼저 백성들을 안심하 게 한 뒤 군사 이백을 풀어 유비의 집을 지키게 하고 아무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이 있어, 지난날 유비가 그에게 베풀었던 은의에 보답한다고 하는 일이었다.

얼마 안 되는 장졸들과 밤새 달린 장비는 다음 날 우이에 있는 현 덕의 진채에 이르렀다. 장비로부터 서주성을 잃게 된 경위를 듣고 있던 유비는 다만 탄식처럼 말할 뿐이었다.

“얻은들 기뻐할 게 무엇이며 잃은들 걱정할 게 무엇이냐.”

뜻밖의 인물에게 하도 어이없이 근거지를 잃은 터라 망연해서 한말이었다. 그때 관우가 장비에게 물었다.

“형수님은 평안히 계시는가?”

“모두 성안에 계신 걸 두고 왔습니다.”

장비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비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 으나 관우는 발을 구르며 장비를 꾸짖는다.

“너는 당초 성을 지킨다고 나설 때 무어라고 다짐했느냐? 또 형님 은 얼마나 네게 간곡히 당부했느냐? 그런데도 이제 성을 잃고 형수 님들까지 적의 손에 넘겨주었으니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

그 말에 장비도 부끄럽고 두려워 어쩔 줄 몰랐다. 갑자기 칼을 빼 제목을 찌르려 했다. 그걸 본 유비가 놀라 장비를 껴안으며 칼을 뺏 어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장비의 어깨를 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형제는 손발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 하 였다. 의복이야 떨어지면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손발이 끊어진다면 어찌 다시 잇겠느냐? 너와 운장, 나 셋은 도원에서 의를 맺고 함께 태어나기를 구하지 않으나 죽는 것은 함께이기를 원하였다. 이제 비 록 성과 가솔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 일로 형제가 죽는 꼴이야 어찌 보겠느냐? 더구나 그 서주성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고, 가솔들도 비 록 사로잡혔으나 여포는 반드시 해치지 않을 것이다. 서로 꾀를 내 어 구해낼 방도나 생각하지 않고 한때의 잘못으로 네가 목숨까지 던 져서야 될 말이냐?”

그러고는 큰 소리로 울었다. 관우와 장비도 유비의 그 같은 너그러움과 깊은 정에 함께 감격해 울었다.

여포가 서주를 쳐 빼앗았다는 소식은 원술에게도 들어갔다. 원술 은 여포에게 사람을 보내어 곡식 오만석, 금은 일만 냥, 비단 일천 필을 줄 터이니 함께 유비를 치자 하였다. 뜻밖에도 유비의 군세가 큰 걸 보고 이판에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원술의 그 같은 제의에 다시 눈이 어두워진 여포는 기꺼이 응했 다. 고순에게 정병 오만을 주어 유비의 뒤를 치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비는 놀랐다. 때마침 쏟아지는 비를 이용해 군사를 우이에서 물린 뒤 광릉이나 차지할까 하여 동쪽으로 옮겼다.

고순이 우이에 이르러 보니 유비는 이미 가고 없었다. 그러나 여 포 쪽으로 보면 약속을 이행한 셈이라 기령을 만난 고순은 전날 원 술이 약속한 물건들을 내놓으라 했다.

“장군께서는 먼저 군사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나는 주공과 의논해 이 일을 처리하겠소.”

기령은 그렇게 말하며 고순을 돌려보냈다. 돌아온 고순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여포는 은근히 원술의 속셈에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원술이 보낸 글이 이르렀다.

‘비록 고순이 군사를 이끌고 갔으나 아직 유비를 없애지는 못했 소. 유비를 사로잡는 때를 기다려 약속한 물건들을 보내드리겠소.’

그 같은 내용의 글을 보자 여포도 원술의 속셈을 알았다. 속은 것 이 분해 곧 군사를 일으키려는데 진궁이 나서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원술은 수춘壽)에 근거하여 군사는 많고 양식은 넉넉하니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유비를 소패로 청해 날개로 삼도록 하십시오. 뒷날 유비로 하여금 선봉이 되어 먼저 원술을 치고, 다시 원소를 없앤다면 가히 천하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포도 가만히 생각하니 그 말이 옳았다. 더구나 유비의 가솔들을 보호하고 있어 유비를 오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 유비는 광릉을 뺏으려다 오히려 원술의 급습을 받아 군사를 태반이나 잃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포가 보낸 사자를 만나 그가 올리는 편지를 보고 기꺼이 응하려 했다. 이때 관우와 장비가 걱정 했다.

“여포는 의리가 없는 자입니다.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유비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켰다. 

“저는 좋은 뜻으로 나를 부르는데 어찌 의심하겠느냐?”

어쩌면 달리 갈 곳이 없는 유비로서는 궁여지책인지도 모를 일이 었다. 여포는 유비가 혹시라도 자신을 의심할까 보아 먼저 유비의 가족부터 돌려보냈다. 감(甘), 미(糜두 부인은 유비를 만나자 그동 안 여포가 자기들을 지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리는 이와 쓸 물건까 지 넉넉히 보내준 것까지 이야기했다.

“봐라. 여포는 반드시 내 가족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일찍 말하지 않더냐?”

다 듣고 난 유비가 빙긋이 웃으며 관우와 장비에게 말했다. 그리 고 여포를 찾아보러 서주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포에게 원한을 품 은 장비는 끝내 수긍하지 않고, 두 형수와 먼저 소패로 가버렸다.

“나는 성을 뺏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의 아우가 술에 취해 함부로 사람을 죽이니,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까 보아 잠시 성을 맡아 지킨것 뿐이오.”

성안으로 들어온 유비를 만난 여포는 넉살 좋게 말했다. 유비도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이 서주를 형께 양보하려 한 지 오랩니다.”

그러면서 짐짓 서주성을 도로 내놓으려는 여포에게 좋은 말로 사 양한 뒤 소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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