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3화 : 우리를 벗어나는 호랑이
우리를 벗어나는 호랑이
수춘성은 중원의 일각을 차지한 원술이 오래전부터 근거로 삼고 있던 성이었다. 그날 원술은 크게 잔치를 열어 대소의 장수들과 모 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여포를 이용해 힘 안 들이고 유비를 물리 쳤을 뿐만 아니라, 방금 또 자신에게 거역한 여강 태수 육강(陸康)을 손책이 쳐 없앴다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의 날이 점점 가까워 온다. 이대로만 간다면 한나라를 이 을 만한 자 이원술을 빼고 누가 있으랴!’
원술은 흥겨운 눈길로 기라성처럼 모여 앉은 장수와 모사들을 내 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지난 몇 년은 그로서는 놀라운 성공 의 연속이었다. 동탁에게 대항해서 단신으로 낙양을 빠져나온 게 불 과 대여섯 해 전, 손견의 도움을 받아 남양 태수 장자(長咨)를 죽이고 겨우 얻은 근거지는 이제 구강, 양주, 여강까지 뻗어가고 있었다. 원술의 그 같은 성공은 그 개인의 능력도 있지만 주변에 가로막 는 이렇다 할 인물이 없는 덕분이기도 했다. 공손찬은 북방에 치우 친 데다 동맹 관계에 있었고, 종형 원소와 조조가 손잡고 대항해 왔 으나 역시 그의 북진을 가로막는 데 그쳤다. 또 남방에는 손견과 유 표가 있었지만 손견은 이미 죽었고 유표는 늙고 소심해 제 땅을 지 키기에 바빴다. 따라서 대강 남동의 넓고 기름진 땅은 비어 있는 것 이나 다름없어 원술이 마음대로 뻗어갈 수 있었다.
물론 원술도 조조가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를 끼고 야심을 펴려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 앞의 사람들이 맛본 실패의 선례 에다, 원소와 공손찬 또한 조조의 독주를 바라보고만 있을 리 없다 는 판단에서 원술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이 뒤얽 혀 헛되이 힘을 소비하고 있는 동안, 자신은 착실하게 남방을 경략 하여 그 축적된 힘으로 일거에 대세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한층 흥겨운 마음으로 잔을 들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서 고했다.
“여강 태수 육강을 이긴 손책이 방금 돌아왔습니다.”
“들라 하여라.”
원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곧 용모가 빼어난 청년 장수가 하나 들어왔다. 기골은 아버지 손견을 이어 날래고 굳세 보 였으나 얼굴은 어머니 오부인을 닮아 눈부시게 수려했다.
“오, 네가 왔느냐? 잘 싸웠다. 네가 곁에 있으니 천하에 두려울 게 무엇이랴.”
원술은 그렇게 손책의 공을 치하하고 지난 싸움의 수고로움을 어루어준 뒤 자기 곁에 앉게 했다. 마치 사랑스런 자식 대하듯 하는 태 도였다. 손책은 공손히 원술 곁에 앉았으나 그 훤한 미간에는 알 듯 말 듯 한 가닥 수심이 어렸다.
원래 손책은 아버지 손견이 죽은 뒤 강남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 됨이 활달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어진 이를 예 로 대우할 줄 알고 사람을 잘 부려 한때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때는 서주목 도겸(陶謙)이 살아 있을 때였는데 도겸은 그런 손 책을 아주 싫어했다. 강(江), 회淮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손책을 그 이름보다는 손랑(孫郞)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한번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해 따르고 또 그를 위해 죽는 걸 즐거움으로 여기기까지 하니 멀지 않은 서주의 도겸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아비 손견의 기반이 있고, 손책의 야심 또한 만만치 않 아 보이자 절로 손책을 칠 구실만 찾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손책은 단양 태수로 있던 외삼촌 오경(吳璟)에 게 의지하여 곡아로 어머니와 아우들을 옮기고, 자신은 여범(呂範) 등과 함께 원술에게로 갔다. 원술은 한번 손책을 보자 몹시 사랑하 여 전일 그 아비 손견이 다스리던 곳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항시 말하기를,
“내가 너 같은 아들이 있다면 지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손책의 수하가 죄를 짓고 원술의 영채로 숨어들었다. 원술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군사를 받아들여 가까이 두고 부렸는데, 손책은 기어이 사람을 시켜 그 군사를 죽여버린 뒤 에야 원술에게 잘못을 빌었다. 자신이 가까이 두고 부리던 자를 함 부로 죽였으니 성낼 만도 하였으나 원술은 그 죄를 묻지 않았다. “남의 병사 되어 윗사람을 저버리는 것은 모두가 미워하는 짓이 다. 너는 마땅히 죽여야 할 자를 죽였는데 새삼 내게 빌 것이 무엇 이냐?”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손책이 상벌에 분명함을 칭찬하자 그로부 터 손책의 군사들은 손책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때 태부 마일제가 원술의 진중에 있었는데, 역시 손책을 기이하게 여겼다. 조정에 표 문을 올려 그 재주와 무예를 알리니 천자는 손책을 회의교위校 尉)로 삼았다.
원술이 여강 태수 육강을 치게 된 것은 유비와의 싸움에 앞서 쌀 삼만석을 육강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한 때문이었다. 노한 원술은 손 책을 보내 육강을 꾸짖게 하였으나 육강은 손책을 만나주지도 않고 겨우 주부 한 사람을 보내 대접게 했다. 이에 원술은 무시당한 일에 원한을 품은 손책을 보내 육강을 치게 하였는데 그때 덧붙여 약속 했다.
“만일 네가 육강을 죽이면 너로 하여금 그가 다스렸던 땅의 임자가 되게 하겠다.”
손책이 힘을 다해 싸워야 할 더 큰 이유를 만들어준 셈으로, 이제 과연 손책은 그 육강을 이기고 돌아온 길이었다.
손책은 술자리가 다하도록 원술이 출전 때 한 그 약속을 여럿 앞에서 밝혀주기를 내심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원술은 종내 거기에 대해서 말이 없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에야 한마디로 그 약속을 뒤엎어버렸다.
“새로 얻은 여강에는 전부터 나를 위해 애써 온 유훈(劉勳)을 태 수로 보낼 것이니 모두 그리 알라.”
손책의 실망은 컸다. 거기다가 자신을 대하는 원술의 오만한 태도 도 아버지 손견에 못지않게 자부심이 강한 손책을 괴롭혔다. 그 바 람에 손책은 잔치가 끝나고 자신의 영채로 돌아온 뒤에도 울적함과 번민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는 천하를 떨쳐 울리던 영웅이셨건만 그 자식인 나는 겨우 원술 따위에게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는 신세로 떨어졌구나…………’
달빛 아래 뜰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든 손책은 저도 몰래 비감에 젖어 목을 놓고 울었다. 그때 한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물었다.
“백부, 손책의 자)는 무슨 까닭으로 이러시는 거요? 일찍이 존 부께서 살아 계실 때도 내게 많은 것을 물으셨거늘, 그대는 어찌 내 게 물으려 않고 울고만 계시오?”
손책이 놀라 보니 단양 고장 사람 주치(朱)였다. 주치는 자를 군 리(君理)라 하였는데 손견이 살아 있을 때 종사관을 지내 손책도 어 려서부터 알던 사이였다. 손책은 급히 눈물을 닦고 그를 끌어 자리 에 앉게 한 뒤 말했다.
“이 책이 슬피 우는 것은 선친의 큰 뜻을 잇지 못하는 게 한스러 운 까닭입니다. 만약 공께서 알고 있는 길이 있다면 어리석은 저를 깨우쳐주십시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원공로(公路)에게 군사를 빌려 강동으로 가지 않으시오? 외숙부인 오경을 구하러 간다는 걸 핑 계로 삼되 실제는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거늘 무엇 때문에 남의 아 랫사람으로 오래도록 고단하게 지낸단 말이오?”
시원스럽기 짝이 없는 주치의 반문이었다. 이에 손책도 정신을 가 다듬고 그 세세한 계책을 묻고 있는데 다시 한 사람이 뛰어들며 말 했다.
“그대들이 꾀하는 일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소. 나도 뜻을 함께 하고 싶으니 어리석다 물리치지 마시오. 내게는 날랜 장사 백여 명 이 있어 백부에게는 한 팔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손책이 다시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살피니 다름 아닌 여범(呂範) 이었다. 여남 세양 땅 사람으로 손책과 함께 원술에게 투신하여 지 금은 그의 모사로 있었다. 손책은 크게 기뻐하여 여범도 자리에 앉 게 하고 주치와 하던 의논을 계속했다.
“그대들이 꾀는 그럴 듯하오만 원공로가 군사를 빌려주지 않을까 걱정이오.”
자리에 앉은 여범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손책이 잠깐 생각에 잠 겼다가 결연히 입을 열었다.
“내게는 돌아가신 부친께서 물려주신 전국(國) 옥새가 있소. 그 걸 담보로 삼으면 될 것이오.”
전국 옥새란 말에 여범은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이라면 공로가 오래전부터 얻고 싶어 하던 물건이오. 담보로 내놓는다면 그는 반드시 군사를 빌려줄 것이오.”
그렇게 되자 세 사람의 계책은 매듭이 졌다.
다음 날이었다. 원술을 찾아간 손책은 엎드려 울며 말했다.
“선친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한 터에 이제는 또 외숙부 오경이 양 주 자사 유요(繇)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책의 노모와 가솔들이 모두 외숙부의 그늘인 곡아에 있으니 머지않아 반 드시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감히 바라건대 군사 수천만 빌려주시 면 외숙부의 어려움을 구하고 노모를 보살필 수 있겠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명공께서 저를 믿지 아니하시는 것이나, 제게는 선친께 서 물려주신 전국 옥새가 있으니 그것을 담보로 삼아주십시오.”
그러자 원술은 먼저 옥새부터 보고자 했다. 손책은 서슴없이 품고 간 옥새를 꺼내 원술에게 바쳤다. 원술이 보니 틀림없이 말로만 듣 던 전국 옥새였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품안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제 담보까지 이렇게 내놓 으니 더욱 마다할 수 없구나. 네게 군사 삼천과 말 오백 필을 빌려주 겠다. 유요를 이긴 뒤에는 속히 돌아오도록 해라. 또 너의 벼슬이 하 찮아 큰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특히 표문을 올려 너를 절충교위에 진구장군(珍寇將軍)으로 삼을 터이니 벼슬이 이르는 그날로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거라.”
원술은 혹시라도 손책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운지 청하지 않은 것까지 함빡 들어준 뒤 떠나기를 재촉했다. 손책은 원술에게 절하여 감사한 뒤 여범, 주치와 함께 빌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일을 골라 강 동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들의 행렬이 수춘성을 떠난 지 한나절쯤 되었을 때였다. 뒤편에서 갑자기 먼지가 뽀얗게 일며 몇십 기의 기 마가 나는 듯 달려왔다.
손책은 원술이 마음을 바꾸어 자기를 되불러 들이려고 사람을 보 낸 것이나 아닌가 두려웠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은 길이라 정히 안 되면 그들 모두를 베고라도 떠날 양으로 칼자루에 힘을 주고 노려보 았다.
그사이 뒤따르는 군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앞장서 달려오 는 세기가 아무래도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쇠채찍 [鐵鞭] 을 감아쥐고 또 한 사람은 한 자루큰칼[大刀]을 찼으며 다른 하나 는 쇠자루 달린 창[] 안장에 꽂고 있는데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다름 아닌 황개와 한당과 정보였다.
“작은 주인, 아니 주공! 실로 무정하십니다. 어찌 저희들을 두고 가십니까?”
셋은 손책 앞에 이르기 무섭게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땅바닥에 엎 드리며 원망스레 말했다. 손책도 물론 아버지 손견과 함께 싸움터를 누비던 그들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옛 장수들까지 달라고 하면 원술이 의심할까 보아 감히 청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어찌 공들을 잊었을 리 있겠소? 다만 원술의 의심이 두려워 차마 데려오지 못했을 뿐이오.”
그렇게 대답하는 손책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들 셋을 보니 문득 죽은 아버지 손견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들도 손책의 늠름 한 모습에서 옛 주인 손견을 본 듯했다. 원망도 잠시, 어느새 굵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울먹였다.
“주공, 장하십니다. 돌아가신 큰 주인의 한을 풀 날도 멀지 않았습 니다.”
“주랑, 주유)과 뜰 앞에서 검을 가지고 노시던 때가 어제 같건 만………… 이제 큰 주인님께서도 편히 눈감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부디 큰 주인님께서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십시오. 저희는 끓 는 물 타는 불 속을 마다 않고 주공을 따르겠습니다.”
그 같은 말을 들으니 손책의 굳고 매서운 가슴속도 새삼스런 슬 픔과 감개로 젖어왔다. 이에 그들 넷은 한바탕 얼싸안고 운 뒤에야 행렬을 수습해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군마가 역양 땅에 이르렀을 무렵 손책은 다시 한 떼의 군사와 마주쳤다. 처음에는 경계하여 마지않았으나 가 까워지자 역시 앞선 장수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부드럽고 날 랜 몸매에 잘생긴 얼굴 헤어져 보낸 몇 년 동안 더욱 굳세고 어른 스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는 틀림없이 옛 친구 주유(周瑜)였다.
주유는 여강 서성 사람으로 자를 공근(公瑾)이라 했다. 증조부 영 (榮)은 장제(章), 화제 때 상서령을 지냈고, 종조부 종숙부가 나란히 태위 벼슬을 했으며, 그 아비 이(異)도 낙양령(洛陽令)에 오 른 세가의 자제였다.
주유와 손책이 만난 것은 나이 열여섯,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 탁을 치러 떠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 손견은 아내와 아들들을 서 성에 피난시켰는데, 손책도 함께 그리로 가 주유를 만나게 되었다. 비록 열여섯의 나이였지만 둘은 만나자마자 한눈에 서로의 비범함 을 알아보고 남다른 친교가 이루어졌다. 주유가 자신의 저택 하나를 비워 손책에게 내주고 그 어머니를 절하여 뵘으로써 둘은 형제의 의까지 맺었다. 나이는 동갑이었으나 손책의 생일이 두어 달 빨라 형이 되었다.
그 뒤 손견이 죽고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해 떠나자 둘은 헤어졌 다. 주유 또한 단양 태수가 된 종숙 주상(周尙)을 따라 서성을 떠났 다. 그러다가 이제 손책이 다시 강동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수 하의 군마 약간을 수습해 달려오는 길이었다.
“아니, 이건 공근이 아닌가? 여기는 어떻게 왔는가?”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리는 주유를 보고 손책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주유가 번쩍이는 눈을 들어 손책을 올려보며 씩씩하 게 대답했다.
“형님께서 강동으로 돌아가신다기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개나 말 의 힘이라도 보태어 큰일을 함께 도모해보고 싶습니다.”
“고맙네. 공근이 함께 가준다면 반드시 큰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 이네.”
손책이 감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치와 여범 및 세 명의 옛 장수를 불러 주유를 보게 했다.
“이 사람은 주유라 하는데 강동의 준재(俊)요, 나와는 오래된 벗 으로 내가 몇 달 먼저 난 덕에 형이 되었으나 여러 가지로 내가 오 히려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소.”
이렇게 되자 손책의 세력은 한층 불어났다. 잠시 군사를 멈추고 술을 내어 의기를 돋우는데 문득 주유가 물었다.
“형님께서 큰일을 이루려 하신다면 역시 강동의 두 장씨를 알고 계시는지요?”
“두 장씨라니? 누구누구를 말하는가?”
손책이 처음 듣는 말이라 궁금한 듯 되물었다. 주유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하나는 팽성에 사는 장소(張)란 사람으로 자를 자포(子布)라 하 고, 또 하나는 광릉에 사는 장굉(張)으로 자를 자강(綱)으로 쓰 는 사람입니다. 둘 다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이나 지금 난리를 피해 그 곳에 각기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이들을 불러 쓰시지 않습니까.”
“공근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천하의 현사를 모르고 지나칠 뻔했네.
고마우이.”
손책은 그렇게 기뻐하며 당장 사람을 시켜 예물을 갖추고 장소와 장굉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그들은 모두 세상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진 이를 모시는 데 정성이 부족했다. 내가 스스로 가리라.”
손책은 그렇게 말하며 차례로 광릉과 팽성을 들러 장소와 장굉을 찾아보았다. 손책이 힘써 천하를 위해 함께 일하기를 청하자 그들 둘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손책은 장소를 장사(史)겸 무군중랑 장(撫軍中郎將)으로 삼고 장광은 참모(參謀) 정의교위(正議校尉)로 삼 아 함께 유요를 칠 의논을 했다.
유요는 동래 모평 땅 사람으로 역시 한실의 종친이었다. 태위 유 총)의 조카요 연주 자사 유대의 아우인 그는 원래 양주 자사로 수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술에게 수춘을 빼앗기는 바람에 강동으로 밀려 부득이 곡아를 엿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사람들 을 불러 의논했다.
부장 장영(張)이 일어나 말했다.
“제게 군사 약간을 주시어 우저에 둔치게 한다면 설령 손책이 백 만의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때 장영의 말을 이어 한 장수가 일어나 소리쳤다.
“그 선봉은 제가 맡겠습니다.”
모두 놀라 그를 보니 다름 아닌 동래 사람 태사자(太史慈)였다. 전 날 북해 태수 공융의 위험을 구해준 뒤 유요를 보러 왔다가 아직껏 그 장하(下)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태사자의 용맹을 모 르는 유요는 오히려 그 당돌함이 은근히 비위에 거슬렸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장수로는 삼을 수가 없다. 내 곁에 머 물러 달리 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 말에 모처럼 유요를 위해 싸워보려던 태사자가 머쓱하여 물러 났다. 마음이 기껍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이에 홀로 떠나게 된 장영은 군사를 우저에 머물게 하고 군량 십만 석은 저각이란 곳에 쌓아두었다.
이때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우저에 이르니 장영이 맞으러 나가 양군은 우저의 한 개울가에서 만났다.
“어린것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넘보느냐?”
장영이 진 앞에 나와 큰 소리로 손책을 꾸짖었다. 손책이 대답할 틈도 없이 황개가 쇠채찍을 휘두르며 달려 나가 장영을 덮쳤다. 그런데 몇 합 어우르기도 전에 갑자기 장영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진채 뒤에 불을 놓은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영은 급히 군사를 돌렸다.
손책이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보아넘길 리 없었다. 곧 군사를 휘몰 아 뒤쫓으며 죽이니 장영은 마침내 우저를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달 아났다가 간신히 제 주인 유요에게로 돌아갔다.
첫 싸움에 이긴 손책이 승세를 타고 유요의 근거지로 군사를 휘 몰아가려는데 문득 범 같은 두 장수가 졸개 삼백여 명을 이끌고 투 항해 왔다. 한 사람은 구강 수춘 사람으로 장흠(蔣)이란 장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구강 하채 사람으로 주태(周泰)란 장사였다.
원래 장흠과 주태는 대강(양자강)을 오르내리며 양민들의 재물을 털어 살아나가는 수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항시 큰 뜻을 품 고 때를 기다리는데, 손책이 강동으로 온다는 말을 들었다.
“손책이 강동의 호걸로서 어진 이를 예로 대우하고 힘센 장사를 중히 여긴다니 우리 그에게로 가는 게 어떤가? 장부로 태어나 수적 질이나 하며 평생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네.”
둘은 그렇게 의논하고 졸개 삼백여 명과 함께 손책을 찾아 나섰 다. 그들 둘이 손책에게 이른 때가 마침 장영과 황개가 어우러져 싸 울 때였다. 둘은 장영의 군사들이 함빡 그 싸움에 정신이 쏠린 틈을 타 장영의 진채를 급습하고 불을 놓았다. 그게 조금 전 장영을 놀라 달아나게 한 불로 손책에게 바칠 예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예물인 셈이었다.
그 같은 장흠과 주태를 얻은 손책은 크게 기뻤다. 좋은 말로 둘을 치하한 뒤 나란히 전군교위로 삼았다. 비록 거느리고 온 졸개는 많지 않았으나 손책의 군사들이 또 한번 사기를 드높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장영이 저각에 쌓아두었던 곡식 십만석과 군기(軍器)를 얻고 또 항복한 군사 사천까지 새로이 보태니 손책의 세력은 배로 늘었다. 손책은 그 세력을 업고 신정으로 군사를 휘몰아갔다.
한편 쫓겨온 장영으로부터 손책에게 대패했다는 말을 듣자 유요 는 몹시 노했다. 그 자리에서 장영을 끌어내 목 베려 하였으나 모사 작융(融)과 설례(薛禮)가 간곡히 말려 죽이는 대신 영릉성을 지키 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정으로 가 작은 고개 남쪽 에 진을 쳤다.
얼마 뒤에 손책도 신정에 이르러 유요가 진을 친 고개 북쪽에다 진채를 내렸다. 진채를 세우기 무섭게 손책은 군사들을 시켜 그 부 근에 사는 백성 하나를 찾아오게 했다.
“가까운 산 어디에 혹시 광무제의 사당이 없는가?”
군사들이 한 사람을 찾아오자 손책이 불쑥 그렇게 물었다.
“고개 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손책은 둘러선 장수들에게 자신이 광무제의 사당을 찾는 까닭을 밝혔다.
“어젯밤에 광무제께서 나를 부르시기에 가서 뵈온 꿈을 꾸었소. 마땅히 사당을 찾아가 기도를 드려야겠소.”
그러자 장소가 반대했다.
“아니 됩니다. 고개 남쪽에 유요의 진채가 있는데 만약 복병이라도 숨겨두었으면 어쩌시렵니까?”
“신인(神人)이 나를 돕고 있는데 두려워할 게 무엇이오.”
손책은 그렇게 장소를 안심시킨 뒤 갑옷을 걸치고 창을 든 채 말 에 올랐다. 그리고 정보, 한당, 황개, 장흠, 주태 등 열두 기만 이끌고 진채를 나섰다.
고개 위에 오르니 과연 광무제의 사당이 하나 있었다. 말에서 내 려 사당으로 들어간 손책은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기원했다.
“만약 이 책이 강동에서 대업을 이루고 선친의 원수를 갚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당을 수리하고 사철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사당을 나와 말 위에 오른 손책은 따라온 장수들을 보고 불쑥 말했다.
“나는 고개를 넘어 유요의 진채를 가까이서 보아두고 싶소.”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위태롭다고 말렸으나 손책은 듣지 않았 다. 앞장서서 고개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 남쪽에 있는 유요의 진채 를 살폈다.
이때 그쪽 숲속에는 유요의 군사 약간이 매복해 있었다. 손책이 겨우 여남은 기만 이끌고 바로 앞까지 와서 자기네 진채를 살피는 걸 보자 나는 듯 달려가 유요에게 알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손책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작이다. 함부로 뒤 쫓다가 말려들어서는 아니 된다.”
소심한 유요는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이때 태사자 가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손책을 사로잡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려 하십니까?”
그리고 유요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갑옷 끈을 죄며 말 위에 올랐다.
“용기 있는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
태사자가 창을 꼬나잡고 말을 달려 나가며 그렇게 소리쳤으나 장
수들은 아무도 따르지 않고 다만 높지 않은 장수 하나만이
“태사자는 참으로 맹장이다. 내가 따라가 도우리라!”
하며 말을 박차 함께 달려 나갔다. 그래도 유요의 장수들은 한결 같이 그 둘을 비웃을 뿐이었다. 태사자가 고개 꼭대기에 이른 것은 이미 유요의 진채를 살필 대로 살핀 손책이 말 머리를 돌려 자신의 진채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손책은 달아나지 마라!”
갑작스런 외침에 손책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필의 말이 나는 듯 고갯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손책의 열두 장수가 모두 싸울 태 세를 갖추고 벌여 선 가운데 손책도 창을 비껴들고 달려오는 적장을 기다렸다.
“누가 손책이냐?”
달려온 태사자가 다시 소리쳐 물었다. 손책이 나서서 그 말을 받았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동래의 태사자다. 특히 손책을 잡으러 왔다.”
손책의 열두 장수는 안중에도 없는 듯 태사자가 씩씩하게 말했다.
손책도 지지 않았다.
“내가 바로 손책이다. 나를 잡으러 왔다니 너희 둘이 한꺼번에 덤벼 보아라. 하나도 두렵지 않다. 만약 내가 네놈들을 겁낸다면 천하 의 손백부(伯)가 아니다!”
“너희야말로 한꺼번에 덤벼라. 나 또한 조금도 두렵지 않다.”
태사자는 그렇게 응수하며 바로 창을 내밀어 손책을 찔러 갔다. 손책도 창을 들어 그런 태사자를 맞았다. 누가 끼어들고 자시고 할 틈도 없는 접전이었다.
수만 황건적의 포위를 혼자서 뚫고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러 간 적이 있는 태사자였으나 손책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동탁까지 떨게 한 아버지 손견에게서 어려서부터 익혀온 무예에다, 손견이 죽은 뒤 에는 더욱 힘들여 연마한 터라 가히 신기(神)라 할 만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어울린 만큼 싸움은 쉰 합에 이르러도 끝이 날 줄 몰랐다. 하나가 찌르면 하나가 피하고 이쪽이 후리면 저쪽이 막았 다. 정보나 황개, 한당 같은 장수들이 모두 무예가 서툰 사람들이 아 니었지만 속으로 한결같이 그들 둘의 기막힌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 먼저 싸움에 변화를 오게 한 쪽은 태사자였다. 태사자는 손책의 창 쓰는 법에 작은 틈도 없는 걸 보고 속임수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한참을 싸우다가 힘에 부친 척 달아나니 손책이 더욱 기세 를 올려 뒤따랐다. 태사자는 온 길로 달아나 고개 위로 오르지 않고 고개 뒤로 말을 몰았다. 손책이 뒤따르며 소리쳤다.
“어디를 가느냐? 꼴사납게 달아나지 마라.”
그러나 태사자는 여전히 달아나며 속으로 헤아렸다.
‘저쪽에는 열둘이나 따르는 자들이 있고 나는 하나이니, 설령 내 가 저를 사로잡는다 해도 저 떼거리에게 되빼앗기고 말 것이다. 한 마장쯤 더 유인해 떼거리를 모두 따돌린 후 으슥한 곳에서 손을 써 야겠다.’
그러고는 한편 싸우며 한편 달아나기를 거듭했다.
태사자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손책이 그를 놓아주지 않고 따라 와 둘은 어느새 평지의 냇가에 이르렀다. 손책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걸 본 태사자는 그제서야 말 머리를 돌려 다시 싸움다운 싸움 을 시작했다. 하지만 쉰 합을 더 싸워도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싸웠을까, 손책의 창이 힘차게 태사자를 찔러 갔을 때였다. 날쌔게 피한 태사자가 손책의 창을 거머쥐며 자신의 창으로 손책을 찔렀다. 그러나 손책 또한 몸을 뒤집어 피하면서 태 사자의 창대를 낚아채려 했다.
양쪽이 서로 상대의 창대를 잡고 끌어당기니 그대로 말 등에 남 아날 수 없었다. 서로 용을 쓰는 순간 한 덩이가 되어 땅바닥으로 굴 러떨어졌다. 둘은 할 수 없이 창을 버리고 맨주먹으로 싸우기 시작 했다.
다시 성난 용과 호랑이가 어울려 싸우듯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갑옷이 조각조각 뜯겨져 나가고 투구 끈이며 띠가 끊어졌다. 그러다 가 손책이 재빨리 태사자의 등에 매어져 있던 단극을 빼드는 순간 태사자 또한 손책의 투구를 벗겨 갔다. 둘은 이제 그것을 무기 삼아 싸우기 시작했다. 손책이 빼앗은 단극으로 찌르면 태사자는 빼앗은 투구를 들어 막았다.
한참을 그러는데 갑자기 함성이 일어났다. 그제서야 겨우 태사자 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된 유요가 천여 군사를 먼저 보내 응원을 하게 한 것이었다. 손책은 다급했다. 자칫하면 정말로 유요에게 사 로잡힐 판이었다. 그러나 그때 마침 황개와 정보를 앞세운 열두 장 수가 나타나 유요의 군사들과 부딪쳤다.
일이 그렇게 번지자 손책과 태사자도 가망 없는 싸움을 그만두고 각기 떨어졌다. 말도 창도 없는 주먹싸움 대신 다시 말과 창을 갖추 어 결판을 내려는 뜻이었다.
태사자는 유요의 군사들에게로 가서 새말을 얻어 타고 나오고 손책은 정보가 잡아준 자기의 말을 타고 나왔다. 창도 둘 다 새로 얻 었다. 그렇게 되자 유요의 천여 군사와 손책의 열두 장수 간의 혼전 이 벌어졌다.
손책을 비롯한 열두 기가 아무리 용맹스럽다 해도 역시 중과부적 이었다. 겨우 손책을 보호하며 밀리고 밀려 고개 아래까지 이르렀 다. 그때 다시 함성이 크게 일며 북쪽에서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구 원을 오고, 남쪽에서는 유요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태사자를 후원하 러 왔다.
싸움은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때가 해 질 녘인 데다 비바람 까지 심하게 몰아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양군은 싸움을 다음날로 미루고 각기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손책이 먼저 군사를 움직여 유요의 진채 앞에 나타났다. 양쪽 군사는 곧 둥그렇게 진을 벌여 싸울 태세를 갖추었 다. 이때 손책이 어제 뺏은 태사자의 단극을 긴 장대 끝에 매달아 진 문 앞에 내걸게 한 뒤 군사들을 시켜 크게 외치게 했다.
“태사자는 어디 있느냐? 어제 재빨리 달아나지 않았다면 여기 찔려 죽었을 것이다!”
태사자를 조롱하여 격동시키기 위함이었으나 태사자도 지지 않았 다. 곧 전날 뺏은 손책의 투구를 진문에 내건 뒤 역시 자기 군사들을 시켜 소리쳤다.
“손책의 머리가 여기 있다! 머리를 두고 달아나는 놈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양쪽에서 서로 이겼다고 우기며 저희 장수 힘 자랑을 하 니 그 고함소리에 산천초목이 들먹일 지경이었다. 한참 뒤에 태사자 가 말을 달려 나와 다시 싸움을 걸어왔다.
“손책은 어디 있느냐? 오늘은 나와 승부를 내자!”
손책이 불 같은 성미에 또 참지 못했다. 그대로 창을 잡고 말을 박 차 나가려는데 정보가 말했다.
“주공께서는 힘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나가 저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달려 태사자를 맞으러 나갔다. 태사자가 그런 정보를 놀렸다.
“너는 내 적수가 못 된다. 가서 네 주인 손책더러 나오라고 해라.”
그 말에 정보는 크게 노했다. 아무 대답 없이 똑바로 태사자를 찔 러 가자 곧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정보 또한 예사 장수가 아니 라 싸움은 두 말이 서른 번을 부딪도록 형세를 가름할 수 없었다. 그 런데 유요가 급히 북을 쳐 태사자를 불러들였다.
“이제 막 적장을 사로잡으려 하는데 무슨 일로 갑자기 군사를 거 두게 하셨습니까?”
태사자가 분한 듯 유요에게 물었다. 유요가 안색까지 변해 황망스레 대답했다.
“방금 들으니 주유란 놈이 곡아를 쳐서 손에 넣었다 한다. 진무 武)란 놈이 성안에서 호응해 주유를 맞아들였다. 이미 내 가솔들과 근거지를 잃었으니 이곳에는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급히 말릉으로 가 설례와 작융의 군마를 합친 뒤에 적을 맞도록 해야겠다.”
태사자도 그 말을 듣자 더 불평하지 못하고 유요가 군사를 물리 는 걸 도왔다. 손책은 태사자가 뒤를 지키니 감히 유요를 뒤쫓지 못 했다. 장사로 있는 장소(張)가 권했다.
“적군은 주유에게 곡아를 뺏긴 바람에 싸울 마음이 전혀 없습니 다. 오늘밤쯤 적의 진채를 급습하는 게 좋겠습니다.”
낮에는 추격을 꺼리던 손책도 야습이라면 할 만하다 여겼다. 장소 의 계책을 따라 그날 밤 군사를 다섯 길로 나누어 유요의 진채를 들 이쳤다. 돌아가는 데만 급급해 있던 유요는 대패하여 군사는 뿔뿔이 흩어졌다. 태사자도 혼자 힘으로는 손책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겨우 수십 기만 데리고 경현으로 달아났다.
유요를 크게 이긴 손책은 곧 군사를 돌려 곡아로 갔다. 주유가 반 갑게 손책을 맞으며 한 사람을 데려와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여강 송자가 고향인데 이름은 진무(陣武)이고 자는 자열(烈)이라고 씁니다. 이번에 안에서 호응해준 덕분에 쉽게 곡아 를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손책이 보니 키가 일곱 자에 얼굴은 누렇고 눈알은 붉은 것이 여느 사람과 달랐다. 절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 그를 교위 로 삼고 유요의 장수 설례를 칠 때 선봉을 세웠다.
진무는 십여 기를 이끌고 돌진하여 잠깐 사이에 오십여 명의 목 을 베니 설레는 성문을 닫아 걸고 감히 나오지 못했다. 손책이 영을 내려 성을 공격하려는데 갑자기 급한 전갈이 왔다.
“유요가 작융의 군사들과 합쳐 우저를 되찾아갔습니다.”
그 말에 손책은 노기가 솟구쳤다. 설례의 말릉성은 놓아두고 스스 로 앞장서 우저로 달려갔다. 손책의 대군이 우저에 이르자 유요와 작융이 군사를 이끌고 대항해왔다.
“내가 이미 여기 이르렀거늘 네놈들이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느냐?”
손책이 진문 앞에 나와 선 두 사람을 보고 호령했다. 유요의 등 뒤 에서 한 장수가 창을 들고 말을 달려 나오는데 바로 부장 우미(糜) 였다.
하지만 우미 따위는 처음부터 손책의 적수가 아니었다. 미처 창칼 이 세 번 부딪기도 전에 손책이 갑자기 손을 내뻗는가 싶더니 어느 새 우미는 산 채로 손책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손책이 어린애 다루듯 우미를 사로잡아 가는 걸 보자 유요의 장 수 번능이 다시 그를 구하러 달려 나갔다. 번능의 창이 아무것 도 모르는 채 자기 진채로 돌아가는 손책의 등판을 막 찌르려 할 때 였다. 손책의 군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주공, 등 뒤에 노리는 자가 있습니다!”
손책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번능의 말이 코앞에 이르러 있었다.
“이놈! 어디를 감히.”
손책이 온 힘을 목청에 모아 한소리 크게 꾸짖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높고 우렁찬지 마치 큰 우렛소리 같았다. 막 창을 내지르려 던 번능은 그 소리에 정신이 아득하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창을 떨 어뜨림과 함께 말 등에서 굴러떨어지며 머리가 터져 죽고 말았다. 손책이 자기 진채의 문기 아래로 돌아와 우미를 내려놓고 보니 그 또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손책의 남다른 팔 힘에 겨드랑이 에 끼인 채 질식한 듯했다. 한번 나가 장수 하나는 겨드랑이로 눌러 죽이고 하나는 고함 한번으로 놀라 죽게 만드니, 이로 인해 사람들 은 그 뒤 손책을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렀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는다던 패왕 항우(項羽)에 비견할 만한 용력을 지녔 다는 뜻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유요의 군사들이 겁을 먹은 것은 당연한 이치 였다. 유요인들 그런 군사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크게 져 인 마의 태반은 손책에게 항복해버리고, 애꿎은 졸개들의 목만 만여 개 나 손책에게 남겨주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유요는 더 대항해 싸울 뜻을 잃고 작용과 함께 예장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는 원술에게로 몸을 의탁해 갔다.
우저를 되찾은 손책은 다시 말릉으로 돌아가 설례가 지키는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곽이 견고하고 설례 또한 만만치 않아 적잖이 군사가 상할 게 염려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몸소 성벽 아래로 가 설례를 불러냈다. 유요가 져서 달아난 일을 알리고 항복을 권하려 함이었다.
성벽 위에 있던 설례는 대답 대신 가만히 활 잘 쏘는 장수 하나를 시켜 눈 아래 있는 손책을 쏘게 했다. 화살이 날아오는 걸 보고 손책 이 얼른 몸을 틀어 피했으나 워낙 가까운 거리라 화살은 손책의 왼 쪽 허벅지에 깊숙이 꽂혔다. 손책은 아픔을 이기지 못해 한마디 무 거운 신음과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손책을 구해 진채로 모셔간 뒤 화살을 뽑고 고약을 붙였다. 다행히 허벅지라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은 아니었다. 손책은 아픈 가운데도 한 꾀를 내었다. 자기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설례를 성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꾀 였다.
갑자기 손책의 진채에 곡성이 울려퍼지자 설례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손책이 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장졸들이 모두 슬피 울 며 채를 뽑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말을 들은 설례는 기뻤다. 주장 손책이 죽은 다음에야 두 려워할 게 없다고 여겨 그날 밤으로 역습에 나섰다. 성안에 있는 모 든 군사들은 장영(張英)과 진횡(陳橫) 두 장수에게 맡겨 한꺼번에 성 을 나가 돌아가는 손책의 군사들을 치게 했다.
장영과 진횡도 신이 나 손책의 군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뒤쫓기도 전에 홀연 사방에서 복병이 일며 죽었다던 손책이 앞 장서 소리쳤다.
“이놈들, 손책이 여기 있다! 얼른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그 우레 같은 고함소리에 설례의 장졸들은 한꺼번에 얼이 빠졌다. 모두 창칼을 버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항복하기에 바빴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마라!”
손책이 엄하게 영을 내렸다. 그러자 항복하는 자는 더욱 늘었다. 장영은 이미 일이 그른 걸 알았다. 제 한목숨이나 구하고자 급히 말 머리를 돌리는데 어느새 손책의 장수 진무(武)가 창을 내질렀 다. 장영은 창황한 가운데 손발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구슬 픈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장영이 죽는 걸 보자 진횡도 겁이 났다. 정신없이 달아나는데 이 번에는 손책의 장수 장흠이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차고 있는 활을 풀어 한 살[矢]을 날리니 시위 소리와 함께 진횡 또한 말에서 떨어 져 죽었다.
유요 밑에서는 한가락씩 하던 장수들이 그런 꼴로 죽는 마당에 모사인 설례가 무사할 리 없었다. 어지럽게 엉켜 싸우는 군사들 틈 에서 어느 귀신이 잡아간지도 모르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유요의 군사들을 남김없이 죽이거나 항복받은 뒤 손책은 텅 빈 말릉성으로 들어갔다.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민폐를 없게 하고 방을 걸어 백성들을 안심시키니 백성들은 모두 손책을 칭송하여 마 지않았다.
“이제는 태사자를 잡을 차례다!”
어느 정도 성안이 안돈된 것을 보고 손책은 그렇게 말하며 태사자가 있는 경현으로 군사를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