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화 : 살아서는 한의 충신 죽어서는 한의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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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화 : 살아서는 한의 충신 죽어서는 한의 귀신


살아서는 한의 충신 죽어서는 한의 귀신

유비가 떠난 뒤 국구 동승은 밤낮 없이 왕자복(服)의 무리와 조조 죽일 일을 의논했으나 마땅한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건안 사 년도 가고 이듬해 정초가 되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조 하(朝賀) 때에 조조가 전보다 더욱 교만하고 횡포하게 구는 꼴을 보 자 동승의 분한 마음은 그대로 병이 되었다.

헌제는 동승이 병들어 누웠다는 말을 듣자 태의를 먼저 보내 치 료하게 했다. 그 태의는 낙양 사람으로 성이 길(吉)이요, 이름은 태 (太), 자가 칭평(平)이었는데 사람들은 흔히 길평(吉平)이라 불렀 다. 동승의 집에 이르러 약을 짓고 병을 다스리는데 잠시도 동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동승의 병이 원래 마음의 병이라 아픈 중에도 길고 짧은 탄식이 끊이지 아니했다. 길평은 크게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감히 까닭을 묻지 못한 채 보름이 지났다.

정월 대보름이 되어 길평이 떠나려 하니 동승이 아직 몸이 불편 한데도 술을 내어 대접했다. 극진한 치료에 보답고자 함이었다. 그 런데 두 사람이 함께 마신 지 얼마 안 돼 동승은 차차 피곤하고 졸 음이 왔다. 아직 병이 다낫지 않았는데 술을 마신 탓이었다. 그 바 람에 옷을 입은 채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 왕자복을 비롯한 동지 네 사람이 왔다고 알렸다.

“기뻐하십시오. 국구 어른, 큰일이 이제 풀려갑니다.”

동승이 달려 나가 맞아들이자 왕자복이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 고 말했다. 동승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큰일이 풀려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유표와 원소가 연결하여 오십만 대군을 일으킨 뒤 열 갈래로 나 누어 허도로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또 마등도 한수와 연결하여 서량군 칠십이만을 일으키고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조 조는 허도에 있는 병마를 모조리 끌어모아 이리저리 갈라내 보낸 바 람에 지금 성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실로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 까? 우리 다섯 집안의 일꾼과 종들만 끌어모아도 천 명은 될 것입니 다. 오늘밤에 대보름 잔치가 있을 터인즉, 그때 조조의 부중으로 그 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조조를 죽이면 일이 아니 될 것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동승은 크게 기뻤다. 곧 집안에서 힘깨나 쓰는 장 정들은 노복과 인척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불러모아 병장기를 나누 어준 뒤 밤이 오기를 기다려 자신도 갑옷 입고 창을 든 채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내문 앞에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만나 일시에 조조의 부중으로 향했다.

조조의 집 앞에 이르자 동승은 몸소 손에 보검을 잡고 똑바로 뛰 어들었다. 후당에 이르니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조조가 보였다. “역적 조조는 달아나지 마라!”

동승은 그렇게 외치며 달려가 한칼로 조조를 죽인 뒤 닥치는 대 로 베어넘겼다.

하지만 잠시 후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술을 마시다 조 는 걸 보고 길평이 그대로 보고만 있었는데 그사이 마음속의 응어리 가 꿈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더욱 난감스런 것은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계속 조조를 향해 퍼부은 욕설이었다. 길평이 놀란 눈 길로 물었다.

“국구께서는 조공을 해하려 하십니까?”

그러나 동승은 자기의 속마음을 들킨 게 두렵고 놀라워 얼른 대 답을 하지 못했다. 길평이 다시 말했다.

“국구께서는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의인(醫人)에 지 나지 않으나 한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며칠 동안 곁에 있으면서 국 구께서 연신 탄식하시는 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그 까닭을 묻지 못했 는데 이제 꿈속에서 하시는 소리를 들으니 대강 짐작이 갑니다. 속이 지 말고 들려주시고 혹시라도 제가 쓰일 데가 있다면 일러주십시오. 설령 구족이 몰살당한다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진정이 밴 목소리였다. 그러나 동승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며 말했다.

“그게 진심이오? 혹시라도 거짓은 없소이까?”

그 말에 길평은 문득 손가락 하나를 물어뜯어 그 피로 맹세했다.

“제 진심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이에 동승은 의심을 거두고 옥대 속에 감추어져 내려온 헌제의 밀조를 내보이며 말했다.

“지금 우리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유현덕과 마등이 각기 떠나버렸기 때문이오. 남은 우리끼리는 아무리 머리를 짜도 마 땅한 계책이 없으니 그 답답함이 이렇게 병이 된 것이외다.”

그런데 길평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 일이라면 여러 공께서 구태여 마음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 금 조조의 목숨은 제 손에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동승이 반가우면서도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렇게 물었다. 길평은 더욱 자신 있게 대답했다.

“조조는 오래전부터 두풍을 앓아 이제는 그 병이 골수에 깊이 스 몄습니다. 한번 머리가 아파오면 견디지 못하고 급히 나를 불러 그 병을 다스려왔으니, 기다리면 머지않아 그가 다시 나를 부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두풍을 다스리는 약이라 하며 슬쩍 독약 한 첩 을 달여 먹인다면 제가 아니 죽고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 에 그 자를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키고 손에 칼을 잡을 필요가 있겠 습니까?”

듣고 보니 정말로 훌륭한 방법이었다. 동승이 감격에 떨리는 목소 리로 길평에게 말했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한나라 사직을 구하는 일은 오직 그대를 믿을 뿐이오!”

길평은 그런 동승을 한 번 더 안심시킨 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동승은 마음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온몸의 아픔이 씻은 듯 가시며 기분이 상쾌해져 오랜만에 시첩들이 기거하는 후당으로 들 었다. 그런데 후당 안으로 몇 발 들여놓기도 전에 동승은 문득 계집 과 사내가 정을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소리나는 곳으로 가 보니 후당 으슥한 곳에서 자기가 부리는 가노 진경동(慶)과 애 첩 운영)이 한데 엉겨 있었다.

동승은 두 눈에 불이 이는 듯했다. 주인이 앓고 있는 줄 알고 놀아 나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바람에 얼이 빠져 있는 연놈을 가리키며 좌 우를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무엇을 하느냐? 당장 저것들을 끌어내 죽여버려라!” 

그 말에 다른 가노들이 우르르 달려와 미처 고의춤이며 치마폭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 둘을 끌어내 죽이려 했다. 그때 전갈을 들은 동승의 부인이 나와 말렸다.

“그만 일로 부리던 자들을 죽여서는 아니 되십니다. 혹시라도 세 상 사람들이 옹졸하다 비웃을까 두려우니 달리 벌을 내리도록 하십 시오.”

동승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옳았다. 젊은 첩의 정부를 탄해 죽이기에는 그 몸이 너무 늙고 지체 또한 너무 높았다. 이에 동승 은 진경동과 운영 둘에게 각기 사십 대씩 매를 때리게 한 뒤 뉘우칠 때까지 찬 방 안에 가두어두게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원래가 뉘우칠 수 있는 성질이 못 됐다. 진경동 의 눈으로 보면 동승은 더 이상 상전도 대감도 아니었다. 부당하게 자신과 운영 사이를 갈라놓으려 드는 늙은 연적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모진 매까지 맞았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 힘을 다해 문 고리를 비틀고 갇힌 방을 빠져나가 담장을 넘었다.

동승에게는 불행하게도, 진경동은 평소에 가까이 두고 부리던 가 노여서 동승이 꾸미는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가까 이 다가가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며 없애려는 상 대가 누구라는 것쯤은 알 만했다. 그렇다 보니 진경동이 찾아갈 곳 은 뻔했다.

“승상을 뵈옵게 해주시오. 급히 고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소!”

진경동은 조조의 부중으로 찾아가 파수 보는 군사에게 그렇게 소 리쳤다. 매에 찢어지고 피멍이 든 몸을 이끌고 찾아와 하는 말이라 파수 보는 군사들도 예삿일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지체 없이 조조에 게 그 말을 전하니 조조는 곧 그를 으슥한 방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너는 누구며, 무슨 일로 그토록 급히 나를 찾았느냐?”

“저는 국구 댁의 가노 진경동입니다. 근일 왕자복, 충집, 오자란, 마등, 오석 다섯 사람이 저희 주인 집에 모여 비밀스런 의논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승상을 해치려는 음모일 것입니다. 저희 주인 은 흰 비단 한 폭을 꺼내놓고 여럿에게 보였는 바 거기 씌어 있는 것 은 알 수가 없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 다. 거기다가 근일에는 태의 길평이 또 저희 주인에게 가담해 왔습니다.”

“길평은 동승의 병을 다스리러 가지 않았는가?”

“물론 겉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내막은 다릅니다. 저는 이 두 눈으로 길평이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무언가를 맹세하는 걸 보았습니 다. 왕자복의 무리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조조로 보면 진경동의 그 같은 밀고는 뜻밖으로 굴러든 복이요, 시운(時運)이랄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평이 달여준 약을 아무 의심 없이 마셔온 걸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지 기까지 했다.

“알겠다. 너는 잠시 안에 들어가 숨어 있거라.”

조조는 그 말과 함께 진경동을 부중에 숨겨놓고 그 엄청난 모의를 캐내는 일에 착수했다.

조조의 첫 겨냥은 태의 길평이었다.

다음 날 조조는 거짓으로 다시 두풍이 인 듯 머리를 싸매고 누워 길평을 불렀다. 내막을 알 리 없는 길평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가 만히 중얼거렸다.

‘이제 이 역적 놈이 죽을 때가 되었구나!’

그러고는 두풍을 다스리는 약 외에 독약을 한 첩 지어가지고 조 조의 부중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드러누워 있던 조조는 길평이 들어 오자 얼른 약을 올리기를 재촉했다. 길평은 더욱 신이 났다.

“이 병은 약 한 첩이면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약탕기를 가져오게 하여 조조 앞에서 약을 달였다. 두풍을 다스리는 약이 거지반 달여졌을 무렵, 길평은 다시 독약을 남 몰래 탕기에 넣은 다음 스스로 약그릇을 받쳐들고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이미 그 약에 독이 든 걸 아는 터라 짐짓 마시기를 미루었다. 길평이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뜨거울 때 마시고 땀을 한번 빼시면 곧 나으실 것입니다. 식기전에 어서 드십시오.”

그러나 조조는 약을 마시는 대신 선뜻 몸을 일으키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대도 책을 읽었을 것이니 또한 예의를 알 것이오. 임금이 병이 나서 약을 마실 때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며, 아비가 병이 나서 약을 마시게 될 때는 자식이 먼저 맛본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대는 내게 배나 가슴[腹心]처럼 가까운 사람이니 먼저 맛을 본 다음 내게 올리 는 게 어떻겠소?”

그 말을 듣자 비로소 길평은 일이 이미 새어나간 걸 알았다. 자기 를 매섭게 내려보는 조조도 두풍을 앓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약이란 병을 낫게 하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맛보 일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 말과 함께 길평도 몸을 일으켜 약사발을 조조의 귀에다 쏟으 려 했다. 귀로 쏟아부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 들어 있는 약 인 까닭이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조조가 가만히 서서 당할 리 가 없었다. 손으로 약사발을 밀쳐내니 약이 땅바닥에 쏟아져버렸다. 얼마나 독이 맹렬한지 약물이 떨어진 곳은 벽돌이 다 갈라질 정도 였다.

길평과 약사발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느라 조조가 미처 명을 내리 기도 전에 좌우에서 조조를 호위하던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길평을 끌어내렸다.

“내가 병을 핑계로 특히 네놈을 시험하여 보았다. 과연 너는 나를 해칠 마음이 있었구나.”

길평을 계하에 꿇린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은 조조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홀연 매서운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후원에 형틀을 차리고 이놈을 그리로 끌고 가라! 그리고 젊고 날 랜 장정과 옥졸 스물을 뽑아 나를 돕게 하라! 이제부터 내가 친히 이놈의 입을 열게 하리라.”

그 영에 따라 무사들이 길평을 묶어 후원에 이르렀을 때 조조는 이미 그곳에 있는 정자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조조의 살기 표 정에 비해 길평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조금도 겁을 먹거 나 두려워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건대 너는 한낱 의인으로 어찌 감히 독을 써서 나를 해칠 생 각을 했겠느냐? 반드시 너를 꼬드겨 내게 보낸 자가 있을 것이다. 네 가 그자를 가르쳐준다면 너를 용서해주겠다. 대답하라, 그게 누구냐?” 

조조가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

길평이 오히려 노한 목소리로 조조를 꾸짖었다.

“너는 임금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역적 놈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하고 있거늘 어찌 나 혼자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느냐?”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법이 아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 스러진 뒤에 바른 말을 하느니보다 지금 말하라. 누구냐? 너를 부추 겨 이리로 보낸 자는?”

조조가 여전히 싸늘한 미소로 되물었다. 길평은 한층 거세게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 너를 죽이고자 하였거늘 너는 어찌 다른 사람이 시 켜서 한 일이라 하느냐? 이제 그 일이 틀려버렸으니 내게는 오직 죽 음이 있을 뿐이다. 어서 나를 죽여라!”

그 말에 조조도 더 참지 못했다. 노한 눈으로 길평을 쏘아보다가 엄하게 소리쳤다.

“여봐라, 이놈이 입을 열 때까지 몹시 쳐라. 매에 인정을 남기는 자가 있으면 그 목을 베리라!”

이에 겁을 먹은 옥졸들은 힘을 다해 길평을 매질했다. 하나가 지 치면 딴 옥졸이 들어서고 그가 지치면 다시 다른 옥졸이 들어서는 식으로 매질을 하니 길평의 몸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껍 질이 터지고 살이 갈라져 흐르는 피는 계단을 적셨다.

그래도 굳게 닫힌 길평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조조는 그러다가 길평이 매 아래서 숨을 거둘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약 그렇 게 되면 나머지 무리들을 잡아들일 증거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매질을 멈추어라. 저놈을 죽여서는 안 된다. 따로 부를 때까지 잠 시 조용한 곳에서 쉬도록 해주어라.”

조조는 그렇게 영을 내려 이미 반송장이 된 길평을 감추어두게 한 뒤 다시 동승을 비롯한 나머지 다섯을 잡는 일에 들어갔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크게 잔치를 벌인 뒤 뭇 대신들에게 함께 마시자고 청해 들였다. 다른 대신들은 그럭저럭 다 모였으나 유독 동승만은 아프다는 핑계로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왕자복을 비롯한 다른 네 사람도 마음이 내키지 않기는 동승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마저 가지 않으면 조조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마지못해 가기로 했다.

조조는 후당에다 술자리를 펼치고 대신들을 맞아들였다. 몇 순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잔이 오간 뒤에 조조가 문득 술잔을 내려놓고 여러 대신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흥겨운 잔치에 음악이 없어서야 쓰겠소? 마침 내게 한 사람이 있 으니 그의 소리는 여러분의 술기운을 걷어낼 만하오. 한번 듣도록 합시다.”

그러고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스무 명의 옥졸들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가서 내가 말한 사람을 데려오너라!”

여러 대신들이 얼른 조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 는 사이에 옥졸들이 긴 칼을 쓴 길평을 끌어내었다. 계하에 끌어다 놔도 누구인지 얼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조조 가 그를 가리키며 다시 여러 대신들을 향해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이나 이놈은 나쁜 무리와 연결되어 조정 에 반역하고 이 조아무개를 해치려 들었소이다. 그의 노랫가락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합시다.”

그때 이미 조조는 조금씩 잔혹의 악귀에 흘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럿 앞에서 길평을 자기에게 거역하는 자가 겪어야 할 고통의 본보기로 삼으려는 뜻도 있었다. 얼른 자기의 말뜻을 알아차 리지 못하고 있는 옥졸들에게 차갑게 영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저놈이 한가락 뽑도록 매질을 해라!”

그러자 옥졸들은 여러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사정없이 매질을 시 작했다. 이미 전날의 매질로 몸이 찢기고 부서진 길평은 입 한번 열 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옥졸 하나가 물 한 동이를 가져다 길 평에게 뒤집어씌우자 길평은 겨우 정신이 든 듯 눈을 떴다. 하지만 조조가 잔혹의 악귀에 조금씩 흘려들고 있다면 길평은 이미 분노와 저주의 화신으로 변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두 눈을 부릅 뜨고 이를 갈며 조조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조조 이 역적 놈아! 어서 나를 죽이지 않고 무얼 기다리고 있느냐?”

조조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듣자 하니 함께 반역을 꾀한 자가 먼저 여섯이 있었다더구나. 그 렇다면 너까지 합쳐 일곱이 되느냐?”

“이 역적 놈아, 어찌 너를 죽이고자 하는 이가 일곱뿐이겠느냐?”

“이름을 대라. 그렇다면 네놈은 살려주겠다.”

“천하의 뭇사람이 모두 나와 뜻을 함께한 이들이다. 어찌 일일이 그 이름을 댈 수 있겠느냐?”

길평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조조를 꾸짖고 욕했다. 그 자 리에 와 있던 왕자복과 나머지 세 사람도 그 광경을 보았다. 애써 태 연한 체하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어도 몸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조조는 한편으로는 때리게 하고 한편으로는 성난 물음을 계속했 다. 그러나 길평은 털끝만큼도 용서를 구하려는 뜻을 보이지 않았 다. 아무래도 그로부터 함께 모의한 자들의 이름을 들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조조는 다시 길평을 끌어내도록 했다.

노랫가락은커녕 욕설과 꾸짖음에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광경 을 보게 되니 잔치가 흥겹게 이어질 리 없었다. 오래잖아 잔치는 어

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끝나고 여러 대신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 했다.

“네 분은 잠시 여기서 더 머무시오. 밤에 또 좋은 잔치가 있을 것이오.”

틈을 보아 자리를 뜨려는 왕자복과 충집, 오석, 오자란 네 사람을 조조가 좋은 말로 붙들었다. 이미 혼이 반이나 나간 그들이었으나 그 중에도 억지로 가겠다면 조조의 의심을 살까 두려웠다. 길평이 입을 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지못해 그곳에 머물렀다. 잠시 후 조조가 다시 천연덕스런 얼굴로 그들 넷에게 물었다.

“원래는 서로 오고 감이 없었던 네 분께서 무슨 일로 서로 오가며 의논을 맞추고 있소이까? 특히 여기 네 분과 동승이 함께 모여 의논 하는 것은 어떤 일이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황망한 가운데도 왕자복이 얼른 말을 둘러댔다. 그러자 조조가 비 웃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흰 비단에 씌어진 글은 무엇이오?”

왕자복을 비롯한 네 사람은 더욱 놀랐다. 나름대로 둘러댄다고 둘 러대지만 이미 수작이 서로 어긋나고 어지러운 기색이 뚜렷했다. 그 러나 조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돌연 매서운 눈길이 되어 차갑 게 내뱉었다.

“너희가 꼭 한 사람을 더 보아야 바른 말을 하겠구나.”

그러고는 옥졸을 시켜 그때까지 부중에 감춰두었던 진경동을 데려오게 했다.

“네가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느냐?”

왕자복이 섬뜩한 가운데도 꾸짖듯 진경동에게 물었다. 동승의 집 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언제나 동승이 곁에 두고 부리는 종이라 얼 굴을 알아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진경동은 그 물음은 들은 체도 않고 뻣뻣하게 대답했다.

“당신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함께 쓰지 않았소? 내가 그것을 모두 보았는데도 아니라 하시겠소?” 

이미 상전의 친구들을 대하는 종놈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제서야 왕자복도 일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를 알 만했다. 그도 동승에게서 진경동과 운영의 일을 들은 적이 있었다. 동승이 별로 대수롭지 않 게 말하기에, 그도 그저 상전에게 죄를 지은 종놈 하나가 멀리 달아 난 것이려니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가 조조의 부중에서 나타난 것이 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해도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 다. 이에 왕자복은 우선 진경동의 비행을 걸고 넘어져보았다. 

“이놈은 동국구의 종놈으로 주인의 시첩과 사통한 놈입니다. 죄를 짓고 뉘우치기는커녕 거꾸로 제 주인을 모함하는 것이니 하나도 믿 을 말이 못 됩니다. 부디 가려 들으십시오.”

“그렇다면 길평이 내게 독을 쓰려 든 것은 동승이 시킨 일이 아니 고 누가 시킨 것이냐?”

조조는 한층 엄하게 그들을 다그쳤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왕자복을 비롯한 네 사람은 입을 모아 부인했다. 조조가 그런 그들을 한 번 더 얼러댔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스스로 지은 죄를 밝히고 나온다면 아직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잡아떼다가 일이 터져 그 내막이 드러 나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래도 승상을 원망치 않겠습니다.”

내친김에 네 사람은 끝까지 그렇게 뻗대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 으로 그들의 모의를 확신하고 있는 조조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노여운 듯 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들을 모두 가두어라. 내 먼저 우두머리를 잡은 뒤에 저들의 죄 를 따지리라.”

그리고 다음 날로 그 모의의 주동인 동승을 찾아갔다. 문병을 구 실로 하고 있었지만 여러 대신들과 무사들을 거느린 방문이었다.

조조가 친히 문병을 왔다는 말에 동승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나와 맞았다.

“국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어젯밤의 잔치에 오지 못하셨소?” 

병이 나서 가지 못한다는 전갈을 전날 이미 들었건만 조조가 굳 이 물었다. 동승으로서는 새삼 묻는 그의 태도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으나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단찮은 병이 아직 낫지 않아 함부로 문밖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건 분명 나라를 근심하는 병일 게요. 그렇지 않으시오?”

조조가 동승의 말을 비꼬듯 말했다. 동승도 놀랐다. 자기 속을 들여다본 듯한 조조의 물음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는데 조조가 다시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국구께서는 길평의 일을 아시오?”

“길평의 일이라니요?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동승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황급히 잡아뗐다. 조조가 더욱 싸늘한 미소로 빈정거렸다.

“모르시다니, 국께서 어찌 그 일을 모르실 리가 있소이까?”

그러더니 좌우를 불러 소리쳤다.

“어서 그자를 국구께로 끌고 오너라.”

기습과도 같이 급작스런 방문을 받은 동승으로서는 그대로 경과 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잠시 후 옥졸들이 이미 두 차례의 매질로 걸음조차 제대로 떼어 놓지 못하는 길평을 떼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부서지고 터진 몸에 비해 정신은 아직도 꿋꿋했다.

“조조 이 역적 놈아! 이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드느냐? 어서 빨 리 나를 죽여라!”

길평은 계하에 이르기 무섭게 다시 조조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러 나 조조는 길평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동승을 향했다.

“이놈과 왕자복을 비롯한 네 사람이 조정을 거역하고 나를 해치 려 하였소. 모두 잡아 가두어두었으나 아직 한 사람이 더 남았다는 구려. 나는 이놈에게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을 대도록 하려 하오.”

그리고 비로소 길평을 향했다.

“누가 너더러 나에게 독약을 먹이라 하더냐? 어서 빨리 대답하라.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뻗대보아야 네 살과 뼈만 상할 뿐이다.”

하지만 길평은 더욱 소리 높여 조조를 꾸짖을 따름이었다.

“하늘이 나에게 가서 역적을 죽이라 하였다. 누가 달리 내게 그걸 시킬 사람이 있겠느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매 아래서 죽더라도 나를 원망치 말라!”

조조가 다시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길평을 쏘아보더니 그 말과 함께 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놈이 바른 대로 말할 때까지 매우쳐라!”

그 말에 이어 모진 매가 이미 성한 곳 없는 길평의 몸에 또다시 쏟아졌다. 앉아서 보고 있는 동승의 가슴은 칼로 에이는 듯했다. 당 장 달려 나가 실토하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못다 한 큰일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조조가 잠시 매질을 멈추게 하고 다시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길평에게 물었다.

“너는 원래 손가락이 열 개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아홉 개만 남았느냐?”

“그 하나를 역적 놈을 죽이겠다는 맹세의 표시로 물어뜯었기 때 문이다. 그 역적 놈이 바로 너다!”

길평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조조도 더는 참지 못했다. 길평의 저 항보다 훨씬 격렬한 잔혹과 가학의 열정에 빠져 옥졸들에게 소리쳤다.

“저놈의 남은 아홉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려라!”

누구의 말이라 어기겠는가. 옥졸들이 지체 없이 받은 영을 시행하 니, 동승의 뜰 안에서는 곧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

다. 옥졸들의 칼날 아래 길평의 손은 마침내 손바닥만 남게 되고 말 았다.

“네 남은 아홉 손가락을 모두 자른 것은 맹세한다는 게 어떤 것인 가를 네게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조조가 길평을 향해 악귀같이 이죽거렸다. 그러나 길평의 기백은 여전했다. 이글거리다 못해 푸른빛까지 도는 눈길로 조조를 노려보 며 대꾸했다.

“까짓 손가락이 없다고 그만인 줄 아느냐? 아직 입이 있으니 네 고기를 씹을 수 있고 혀가 있으니 네 죄를 꾸짖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도 없애주지.”

조조는 완연히 살기에 찬 음성으로 그렇게 내뱉더니 다시 옥졸들 에게 명을 내렸다.

“저놈의 혀를 잘라내고 입을 부수어버려라!”

결국 길평의 굽힐 줄 모르는 정신은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잔혹 의 극치를 조조에게서 이끌어내고 말았다. 옥졸들이 다시 칼과 망치 를 가지고 길평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길평이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다가오는 옥졸들에게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라. 승상께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조조를 향해 지금까지의 기세와는 달리 정중하게 말했다. 

“아마도 이제 더는 모진 형벌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 같구려. 늦으 나마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겠소. 그전에 나를 옭은 이 밧줄이나 좀 풀어주시오.”

조조는 길평의 그 같은 돌변이 좀 이상하기는 했다. 죽을지언정 굴하지는 않으리란 게 길평을 두고 한 조조의 예측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종종 인간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그에 따른 고통을 더 두 려워한다는 평소의 관찰에다, 설령 풀어준다 해도 무사들이 둘러싼 가운데서 성치 못한 제 놈이 어쩌랴 싶기도 해서 조조는 길평의 청 을 들어주었다.

“밧줄 하나 풀어주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나? 풀어주어라.” 

조조의 명이 떨어지자 옥졸들은 이내 그를 옭은 밧줄을 풀어주었 다. 풀려난 길평은 멀리 천자가 있는 대궐을 바라보며 큰절을 올렸 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조는 그 절이 이제 부득이해서 한조의 충신 을 팔게 된 길평의 사죄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침내 길 평의 입에서 동승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는 기분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조조에게 들려온 길평의 울부짖음은 전혀 뜻밖이었다. 

“신은 끝내 나라를 위해 역적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하늘 이 정한 운수라면 폐하, 정녕 이 일을 어찌하시렵니까?”

그제서야 조조는 길평이 뭔가를 위해 자기를 속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으로 조조가 옥졸들에게 어떤 명을 내리는 것보다 길평의 행동이 더 빨랐다. 비통한 울부짖음을 끝내기 무섭게 길평은 곁에 있는 계단의 돌난간을 머리로 힘껏 들이받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낸 힘이라서인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길평의 머리는 수박처럼 으스러지고 뇌수가 허옇게 쏟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섬뜩함으로 되새겨보고 싶은 것은 전율인 동시에 아름다움인 인간과 그가 지닌 바 신념 또는 사상과의 관련이다. 유 가의 가르침, 특히 충(忠)의 해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시아적 왕조 국가의 체제 유지를 위한 장치로서의 관련이다. 거기다가 오늘 날의 진보된 사상 쪽에서 보면 한 왕가, 한 혈통, 한 인간[君]에 대 한 충성의 강조는 미련스럽고 답답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 이 한 인간의 신념 또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는 목숨까지 기꺼 이 내던지며 지켜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 면 신념을 위한 모든 죽음은 전율로 표현되어도 좋을 어리석음의 극 치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그 신념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인간 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이기도 하다.

길평이 계단의 난간에 머리를 들이받고 숨지자 조조는 다시 진 경동을 끌어오게 했다.

“국구께서는 이 사람을 알아보시겠소?”

진경동이 끌려오자 조조는 싸늘한 눈길로 동승을 살피며 물었다. 진경동을 알아본 동승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망친 종놈이 여기 있으니 마땅히 죽여야겠소. 내게 넘겨주시오.”

“저 사람은 모반을 고해온 자요. 지금은 증인이 되어 이 자리에 왔는데 누가 감히 죽인단 말이오?”

조조가 한층 차갑게 동승의 말을 받았다. 동승도 비로소 일이 새 나간 경위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시치미를 떼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죽을 죄를 짓고 도망친 종놈이 살기 위해 무슨 소린들 못하겠소이까? 그런데도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놈의 말만 들으시오?”

그러자 조조가 성난 목소리로 동승을 꾸짖었다.

“왕자복의 무리가 이미 사로잡혀 와 있다. 모두 실토를 해 증거가 뚜렷한데, 너는 어찌하여 끝까지 잡아떼려 하는가?”

그러고는 다시 좌우를 향해 소리쳤다.

“이 늙은이를 끌어내고 그가 묵던 방을 뒤져라!”

조조의 그 같은 명이 떨어지자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한 패 는 동승을 묶고 한 패는 동승이 누워 있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 래잖아 옥대에 숨겨져 있던 천자의 밀조와 거사에 가담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의장(義)이 나왔다.

“쥐 같은 무리가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무사들이 찾아낸 밀조와 의장을 읽은 조조가 갑자기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득의에 찬 웃음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허탈이 밴 듯한 실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험한 얼굴로 돌아가 좌우에게 명 을 내렸다.

“동승의 가솔이라면 노소와 양천을 가리지 말고 모조리 잡아들이 도록 하라. 단 하나라도 달아나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다음 부중으로 돌아온 조조는 곧 여러 모사들을 불러모았다. 조조가 그들에게 밀조와 의장을 보여주자 모사들은 혹 놀라고 혹은 분해했다.

“지난날 이각, 곽사의 손에서 천자를 구한 이래 나는 한조를 위해 충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이러했소. 감히 내게 칼을 겨누려 드는 무 리도 무리려니와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지금의 천자요. 은혜를 원수 로 갚아도 분수가 있지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아무래도 이 일을 그 냥 보아 넘길 수가 없소. 이대로 넘어가면 지금의 천자는 다시 두번 째, 세 번째 밀조를 내릴 것이고 야심에 찬 무리 가운데에는 또다른 동승이 수없이 생겨날 것이오. 차라리 지금의 천자를 폐하고 달리 덕 있는 이를 옹립해야겠소. 제공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조조가 겨우 분기를 가라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이미 한조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철회한 그였지만 아직은 사백 년 전통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동승의 일 또한 허전(田)에서 사냥 때 해본 시험에 대한 그 힘의 반발이라는 것을 꿰뚫어본 그였기에 스스로 나서는 대 신 다른 유씨(劉氏)로 제위를 잇게 하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지으 려 한 것이었다.

“명공께서 능력과 위세를 사방에 떨치시고 천하를 호령하실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한실을 떠받들고 계신 덕택입니다. 이제 아직 천하가 평정되지 않은 터에 천자를 내치고 세우시는 일을 하시는 것 은 합당치 못합니다. 반드시 사방에서 근왕의 군사가 일어 곤경을 당하시게 될 것이니 부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정욱이 일어나 그렇게 조조를 말렸다. 조조가 비록 분노로 혼란되 어 있다 하나 옳고 그름을 분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욱의 말을 듣자 아직도 자신이 지나치게 격해 있음을 깨닫고 곧 천자 폐립하는 의논을 그쳤다. 대신 동승을 비롯한 다섯 사람과 그 가솔들에게는 일찍이 없었던 참혹한 벌을 내렸다. 각기 문마다 나누어 끌어낸 뒤 목을 베어 죽였는데 그때 죽은 사람이 남녀노소를 합쳐 칠백이 넘었다. 성안의 백성들 중에 그 처참한 광경을 본 사람치고 눈물짓지 않 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조조가 동승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물론 그의 늙고 젊은 가솔들 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일은 확실히 지나친 데가 있다. 흔히 조조를 간웅)으로만 몰아가는 논의에서도 그때 죽인 칠백여 명의 피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되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대와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 사건이 반드시 조조에게만 있는 악성의 발로라고는 단정짓기 어렵다. 우선 살펴볼 것은 처벌의 범위이다. 남녀노소를 합쳐 그 가족 칠백여 명을 모두 죽인 것은 언뜻 보아서는 부당하게 처벌의 범위를 넓힌 듯하지만 실 제로 역사는 그보다 더 심한 예를 얼마든지 보여주고 있다. 당시보 다 천년 뒤의 사회에서도 구족을 없애는 법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처벌의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처럼 정보 기구와 조직이 발달 한 사회에서도 적대 세력의 처벌에는 죽음이 자주 애용된다. 그런데 정보 기구나 조직의 미비로 살려준 적대 세력의 통제나 감시가 거의 불가능한 당시의 사회에서 조조가 일률적으로 죽음이라는 처벌을 썼다고 해서 특히 부당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그때 조조 는 아직 밖으로도 안으로도 안정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련되고 성숙되지 못한 당시의 사회 관 습이나 의식, 제도이지 조조만의 악성은 아니었다.

평생을 윤리보다는 능률을,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해온 그가 칠백이나 되는 극렬한 적대 세력을 윤리나 명분 때문에 살려두는 모험을 했다면 오히려 걸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무렵 조조가 지나치게 잔혹의 열정에 사로잡 혔던 것만은 부인할 길이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귀비(董貴妃)를 죽인 일은 그전의 어떤 일보다 지나쳤음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동승과 그 동지들의 가솔들을 몰살시키고도 노기가 가라앉지 않 은 조조는 칼을 찬 채 궁궐로 들어갔다. 동승의 누이로 헌제의 총애 를 받고 있던 동귀비를 죽이고자 함이었다.

이때 헌제는 후궁에서 복(伏)황후와 함께 동승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교묘하게 밀조를 주어 보냈으나 뒷소식이 없어 궁금히 여기 고 있는데 갑자기 조조가 들어왔다. 천자 앞에서는 차지 못하게 되 어 있는 칼을 찬 채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 얼굴에는 성난 기색이 완 연했다. 문득 솟구치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헌제는 놀라움으로 낯빛 이 핼쑥해졌다.

“동승이 반역을 꾀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조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가 한 일이 있어 떳떳치 못 한 헌제가 우물우물 대답했다.

“동탁은 이미 주살되지 않았소?”

동승의 일은 전혀 모르는 척 벌써 몇 년 전에 죽은 동탁을 끌어댔 다. 헌제의 마음속을 읽은 조조가 왈칵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탁이 아닙니다, 폐하.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동승입니다.”

그제서야 헌제도 일이 그릇된 걸 알았다. 절로 몸이 떨려왔으나 어쨌든 잡아떼고 볼 일이었다.

“동승이라고? 동국구가 언제 반역을 꾀했소? 짐은 실로 모르는 일이오.”

“폐하께서는 벌써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쓴 조서를 그에게 내리 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조조가 두 눈까지 흡뜨며 소매에서 흰 비단에 쓴 밀조를 꺼내 보 였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보자 헌제도 더는 잡아떼지 못했다. 두려움과 참담함과 무안함에 사로잡혀 입을 열지 못하는 헌제를 잠 시 쏘아보고 있던 조조가 데려온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어서 동귀비를 끌어내도록 하라.”

비록 정비(妃)는 아니라고 하나 그래도 천자의 배필인 귀비( 妃)를 마치 어느 집 종년 잡아들이듯 끌어오게 했다. 명을 받은 무사 들은 오래잖아 동귀비를 찾아 끌고 왔다. 눈에 띄게 배가 불렀으나 조조의 살기 띤 눈길에는 그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귀비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라에 반역한 죄인은 예로부터 구족을 죽여 벌했습니다. 동승의 무리도 또한 같아서 이미 그 족이 모두 주살되었으나 오직 동귀비 만 남아 있습니다.”

조조가 차갑게 대답했다. 헌제는 애가 탔다.

“그렇지만 동귀비는 지금 잉태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소. 바라건 대승상께서는 그 뱃속에 든 것을 보아서라도 동귀비를 불쌍하게 여겨주시오.”

누구보다 아끼는 동귀비라 헌제는 천자의 위엄도 잊고 조조에게 간곡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조조는 들은 체도 않았다.

“만약 하늘이 도와 동승의 무리를 죽이게 해주지 않았던들 내가 도리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저 여자를 살려두어 다 시 뒷날의 근심거리를 남기시란 말씀입니까?”

“그래도 폐하께서 저렇듯 말씀하시니 부디 손길에 인정을 베푸시 오. 동귀비는 냉궁(宮)에 가두어두었다가 분만하기를 기다려 죽여 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함께 있던 복황후도 헌제를 거들어 조조를 달래보았다.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만약 태어난 그 아이가 어미를 위해 원수 갚음을 하려 들면 그 일은 또 어쩌시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동귀비를 노려보았다. 이미 모든 걸 단념한 동귀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말했다.

“이 몸의 죄가 그러하다면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습니다. 나를 죽이더라도 부디 시신만은 온전하게 있도록 해주시고, 특히 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지. 들어주겠다.”

조조는 그렇게 허락하고 곧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흰 비단 몇 자만 가져오너라!”

그리고 무사들이 흰 비단 한 발을 가져오자 동귀비에게 내밀며 스스로 목매 죽기를 명했다. 무력한 천자가 그런 동귀비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대는 죽어 구천에 들더라도 부디 짐을 원망하지 말라!”

어찌 눈앞에서 죽어가는 애비(愛妃)에게 할 말이 그뿐이랴만 조조가 살기 띤 눈으로 보고 있으니 속뜻을 드러내 보이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그 한마디로 작별을 하는데 두 눈에서는 비 오듯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복황후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이 무슨 어린애나 계집아이 같은 짓입니까?”

조조는 못마땅한 듯 헌제와 복황후에 그렇게 쏘아붙이고 이어 무 사들을 돌아보며 성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동귀비를 궁문 밖으로 끌어내라!”

아무리 비정한 복수심에 휘몰리고 있는 조조라고 하지만 차마 헌 제가 보는 앞에서 동귀비를 죽일 수는 없었던 듯했다. 동귀비는 끝 내 궁문 밖으로 끌려나가 목매어 죽었다.

동귀비를 죽인 조조는 다시 궁감관(宮監官)에게 엄하게 일렀다. 

“앞으로는 외척이건 종친이건 내 뜻을 받들지 않고는 함부로 궁 궐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어기는 자는 목을 베리라. 궁궐을 지키는 자로 그런 외척이나 종친이 함부로 드나듦을 막지 못한 자도 같은 벌로 다스린다.”

그러고는 또 자기가 믿는 군사 삼천을 뽑아 어림군(御林軍)을 채 운 뒤 조홍으로 하여금 그들을 이끌게 했다. 천자가 두 번 다시 외부 의 세력과 연결되는 일이 없도록 안팎으로 철저히 고립시켜 버린 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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