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0화 : 하북을 적시는 겨울비
하북을 적시는 겨울비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허유의 말을 쫓아 날랜 마보군 오천을 뽑 은 뒤 오소를 칠 채비를 하게 했다. 원소의 군사로 가장하기 위해 복 색이며 기치를 따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을 들은 장요가 들어와 걱정스러운 듯 조조에게 말했다.
“원소가 곡식을 쌓아둔 곳인데 어찌 방비가 없겠습니까? 승상께서 는 가벼이 움직이지 마십시오. 허유의 속임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네. 허유가 이렇게 온 것은 하늘이 원소를 이 싸움에서 지게 하려 하심에 틀림이 없네. 지금 이미 우리는 군량이 오지 않아 오래 견딜 수 없게 되어 있지 않나? 만약 이번에 허유의 계책을 따 르지 않는다면 가만히 앉아서 고단한 처지에 떨어질 뿐이지. 또 허 유가 만약 우리를 속이려 한다면 어찌 우리 진채에 머물러 있겠는가? 거기다가 나 또한 원소의 진채 하나를 급습해보려 마음 먹은 지 오랜세. 어차피 이번에 적의 군량을 뺏으려는 계책은 그대로 행해질 것이니 그대는 너무 의심을 갖지 말게.”
조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장요는 여전히 한마디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그래도 원소가 우리의 빈틈을 타고 쳐들어오는 데 대한 대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여러 모로 깊이 생각해두었지. 그 일은 걱정하지 말게.”
그런 다음 곧 배치를 시작했다. 먼저 순유와 가후, 조홍은 허유와 더불어 조조의 본채를 지키게 하고, 하후돈, 하후연 형제는 일군을 이끌고 그 왼편에 숨어 있게 했으며, 조인과 이전은 그 오른편에 숨 게 하여 본채를 지키는 데 걱정이 없도록 했다. 그다음은 오소를 덮 칠 부대였다. 장요와 허저를 앞세우고 서황과 우금으로는 뒤를 막게 하며 조조 자신 여러 장수와 함께 중군이 되었다.
이끌고 갈 오천의 인마도 빈틈없이 채비를 갖추었다. 군사들은 모 두가 원소군의 복색과 기치에 마른 섶과 장작을 지고 입에는 하무 [枚, 소리를 못 내게 입에 무는 도구]를 물었다. 또 말들은 모두 입에 재 갈을 물리고 말굽을 헝겊으로 싸매 소리를 내지 않도록 했다. 그리 고 해질 무렵하여 오소로 떠나는데 그날 밤 하늘에는 달은 없고 별 빛만 희미했다.
이때 저는 아직도 원소의 군중에 갇혀 있는 몸이었다. 그날 밤 창틈으로 바라보니 뭇 별들이 줄지어 빛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좀 볼 게 있네. 잠시 뜰로 나가도록 해주게.”
저수는 자기를 감시하는 군사에게 그렇게 청했다. 주인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가둬두고는 있어도 평소부터 저수의 인품을 우러러온 그 군사는 별 주저 없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
뜰에 나온 저수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우러러 천문을 보았다. 문 득 태백성(星)이 거꾸로 흘러 두우(斗牛,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로 드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천하를 다툴 만한 인물이라 원소에게 해 로운 일은 하늘이 어떤 징조를 보이는 것 같았다.
“큰 화가 있겠구나!”
놀란 저수는 그렇게 탄식하고 사람을 시켜 그 밤으로 원소에게 보기를 청했다.
때마침 원소는 술에 취해 누워 있었다. 저수로부터 온 전갈을 듣자 사람을 시켜 저수를 불러들였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는가?”
원소는 아직도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지 탐탁잖은 목소리로 물었 다. 저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방금 천문을 보니 태백성이 거꾸로 유성(柳, 이십팔수의 세 번째 자리)과 귀성(鬼星, 주작칠수의 두 번째 별) 사이로 흐르며 그 빛이 두우 가 갈라지는 곳으로 들었습니다. 적군이 갑작스레 치고 들까 두려운 형상이라 특히 주공을 뵙고자 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오소는 우리 편의 군량과 마초를 쌓아둔 곳이니 이런 때일수록 방비를 든든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조가 헤아리는 대로 되지 않으려면 마땅히 날랜 군사와 사나운 장수를 보내어 그리로 가는 길과 산등성이를 순초(巡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실로 조조의 진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으로 본 것 같은 저 수의 헤아림이었다. 그러나 어떤 패신(神)에라도 홀린 것인지 원 소의 귀에는 그 말이 아니꼽게만 들렸다. 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죄지은 몸이다. 어찌 그 같은 요망한 소리로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드느냐?”
그러고는 다시 저수를 감시하는 군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나는 너에게 저수를 가두어두라고 말했거늘 감히 풀어주어 이 같은 소리를 하게 했다.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그 군사가 부들부들 떨며 목숨을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원소는 곧 무사들에게 명하여 그 군사를 목 베게 한 뒤 딴 사람을 딸려 저 수를 다시 진중에 가두게 했다. 끌려 나가던 저수가 눈물을 쏟으며 탄식했다.
“우리는 오늘밤이면 망하리라. 이제는 죽은 내 몸뚱아리가 어느 곳에 뒹굴게 될지조차 모르겠구나!”
그사이에도 밤길을 재촉해 오소로 가던 조조의 군사들은 도중에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원소군의 진채 하나를 지나게 되었다. 진채 에 있던 원소의 군사들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 군마들이냐?”
“우리는 장기장군의 군사들로 명을 받들어 오소로 군량을 옮기는 중이다.”
조조의 군사들이 미리 들은 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원소의 군사들이 횃불에 의지해 보니 틀림없이 자기편의 기치라 별 의심 없이 지나 보내주었다.
다시 몇 군데 더 원소군의 진채를 지났으나 그때마다 조조의 군 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을 장기의 졸개들이라 속이고 지나갔다. 모 두 의심 없이 넘어가주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마침내 오소에 이르러 보니 밤이 이미 다해가는 사경이었다. 조조 의 군사들은 지고 온 섶 다발에 일제히 불을 붙인 뒤 여러 장수들과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똑바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오소를 지키던 원소의 장수 순우경은 마침 수하의 장수들과 질탕 한 술자리를 벌이고 제 군막에 돌아와 누워 있었다. 북소리와 함성 에 펄쩍 뛰듯 놀라 일어나며 좌우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시끄러우냐?”
그러나 대답 대신 날아든 것은 어느새 군막 안까지 뛰어든 조조 군의 요구, 사람이나 말을 사로잡을 때 쓰는 갈고리 같은 무기)였다. 취한 순우경은 칼 한번 뽑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조조군에게 사로잡 히고 말았다.
이때 순우경의 부장 목원진(進)과 조예(趙叡)는 마침 다른 곳 에서 군량을 호송해 오소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자기편 군사들이 있 는 곳에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구원하러 달려왔다.
“큰일났습니다. 적을 구하러 온 군사들이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군사를 나누어 막도록 해야겠습니다.”
조조의 군사들이 나는 듯 조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러나 조조는 오히려 이렇게 소리쳤다.
“모든 장수들은 오직 힘을 다해 앞의 적을 치도록 하라! 등 뒤의 적은 바짝 다가오거든 그때 돌아서서 싸워도 된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은 앞을 다투며 적을 죽이고 나아갔다. 잠깐 사이에 불꽃은 사방에서 일고 연기는 하늘에 가득했다. 이윽고 목원 진과 조예가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했으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 아서서 치고 나오는 조조의 군사를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둘은 순우경을 구하기는커녕 제 목숨만 잃고 오소에 쌓여 있던 군량과 마 초는 모조리 조조군의 손에 불타고 말았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자 사로잡힌 순우경이 조조 앞에 끌려나왔다. 싸늘한 눈으로 순우경을 내려다보던 조조가 매섭게 영을 내렸다.
“저놈의 코와 귀를 베어내고 말에 묶어 원소의 진영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가혹한 영에 의아해하는 장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저자를 심하게 대하는 것은 저자가 원소의 수하이기 때문 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원소의 장수로서는 드물게 나를 도운 셈 이지.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대군의 목줄기 같은 곳을 맡아 지 키면서도 경계와 방비를 게을리한 장수로서의 큰 죄다!”
한편 원소는 저수를 꾸짖어 물리치고 태평스레 누웠다가 문득 북 쪽에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바로 오소쪽 이었다.
“모든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들이도록 하라!”
오소가 조조의 손안에 떨어졌음을 짐작한 원소는 그제서야 황급 히 영을 내렸다. 그리고 자다가 불려 나온 모사와 장수들에게 군사를 보내 오소를 구할 방책을 물었다.
장합이 선뜻 나서며 말했다.
“제가 고람과 함께 가서 구해보겠습니다.”
그때 곽도가 일어나 다른 계책을 내놓았다.
“아니 됩니다. 바로 오소에 군사를 보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됩니다. 조조가 양식을 뺏으러 왔다면 반드시 조조 자신이 친히 왔 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이미 군사를 끌고 나왔다면 그 본채는 반드시 비었을 것입니다. 군사를 풀어 오히려 조조의 본채를 치도록 하십시오. 본채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조조는 급히 돌아갈 것 이니 오소는 절로 구함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이른바 손빈(孫)의 위 (魏)나라를 포위하여 한(韓)나라를 구한다란 계책입니다.”
“아닙니다.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이라 밖으로 나올 때는 반드시 안의 방비를 든든히 해두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조조의 본채를 쳤다가 빼앗지 못하면, 오소에 있는 순우경과 그 휘하 장졸들이 조 조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 우리도 모두 사로잡히는 꼴을 보이게 될 뿐입니다.”
장합도 지지 않고 그렇게 곽도에게 맞섰다. 곽도가 다시 제 주장을 쳐들었다.
“조조는 다만 군량 빼앗는 일에 급급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본채에 군사를 남겨둘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 세 번 조조의 본채를 들이치자고 권했다.
원소가 들으니 이도 저도 다같이 그럴듯해 보였다.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이윽고 두 가지 계책을 모두 취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장합과 고람은 군사 오천을 이끌고 관도로 가서 조조의 본채를 치게
하고, 장기는 군사 일만을 이끌고 가 오소를 구하게 한 것이었다.
한편 조조는 오소에서의 일이 뜻대로 되었으나 머지않아 밀어닥 칠원소의 구원군이 걱정되었다. 자신은 먼 길을 은밀하고 신속하게 오기 위해 오천의 인마밖에 끌고 오지 못한 데 비해 본진이 멀지 않 은 원소는 반드시 대군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둥지둥 물러나 다가는 군데군데 있는 원소의 딴 진채들과 뒤쫓는 대군에게 어떤 낭 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조조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순우경의 졸개들이 버리고 간 갑옷과 무기며 기치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군사들을 이 번에는 순우경의 졸개들로 꾸며 원소의 구원군을 맞으러 보냈다. 싸움에 지고 쫓겨 돌아가는 순우경의 졸개들로 꾸민 조조의 군사 들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산기슭 소로(小)에서 마침 오소를 구원 하러 달려오던 장기의 군사들과 마주쳤다.
“어디서 오는 군사들이냐?”
장기의 군사들이 물었다. 조조의 군사들이 거짓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오소를 지키던 순우경 장군의 수하로 이제 조조군을 당 해내지 못해 본채로 돌아가는 길이오.”
장기가 다가가 보니 한결같이 자기편의 복색과 갑주에 들고 있는 것도 자기편 기치였다. 조조군이 설마 자기편의 패군으로 위장해 거 기까지 올 리는 없다고 생각한 장기는 별 의심 없이 그들을 지나쳤 다. 그에게 급한 것은 오소를 구하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홀연 순우경의 졸개들 속에서 두 장수가 나타나 장기의 말 앞을 막았다. 다름 아닌 장요와 허저였다. 역시 순우경의 졸개를 가장한 조조의 군사들 틈에 숨어 있다가 적의 우두머리가 나타나자 달려든 것이었다.
“장기는 달아나지 말라!”
허저와 장요가 함께 소리치며 달려들자 방심하고 말을 닫던 장기 는 놀라 정신이 아뜩했다. 얼른 무기를 쳐들었으나 한번 제대로 휘 둘러 보지도 못하고 장요의 칼에 목이 달아나버렸다.
장수가 그 모양이 되니 졸개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혀 원소의 일만 대군은 다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장요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소에게까지 사람을 보내 거짓 으로 알리게 했다.
“장기 장군은 벌써 오소에 온 조조의 군사들을 쳐 흩어버렸습니다.”
그 같은 말을 들은 원소는 그 뒤로 다시는 더 오소를 구하러 사람 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관도에 있는 조조의 진채를 치러 간 쪽에만 군사를 보탤 뿐이었다. 하지만 관도로 간 원소의 군사들도 험한 꼴 을 보기는 오소로 간 쪽보다 덜할 게 없었다. 장합과 고람은 기세 좋 게 조조의 본채를 급습했지만, 왼편에서는 하후돈이 달려 나오고 오 른편에서는 조인이 달려 나온 데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진채 안에 서마저 조홍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맞으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한 싸움에 크게 뭉그러져 달아나는데 마침 원소가 보낸 증원군이 이르렀다. 거기서 힘을 얻은 장합과 고람은 다시 군사를 수습해 조 조의 본채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처 그 싸움이 어우러지기도 전에 등 뒤에서 한 떼의 군사가 달려 나오더니 원소군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들이쳤다. 어느새 돌아온 조조가 친히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그쯤 되면 이미 장합과 고람 따위로는 버티어낼 싸움이 못 되었 다. 반나마 얼이 빠진 두 장수는 앞뒤 없이 어지럽게 뒤엉킨 군사들 사이를 헤매다가 간신히 길을 앗아 포위에서 벗어났다.
그 무렵은 원소의 본진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 조에게 쫓겨간 순우경의 진짜 졸개들이 그제야 귀와 코가 잘리고 손 가락도 모조리 없어진 순우경과 함께 그곳에 이른 것이었다. 장요의 군사들이 전한 거짓 소문만 믿고 있던 원소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하다 오소를 잃게 되었는가?”
“순우경이 술 취해 누워 자고 있었기에 적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쫓겨온 졸개들이 원망스런 눈으로 순우경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 다. 성난 원소는 그 자리에서 순우경을 목 베어버렸다.
그때 다시 관도로 갔던 군사들의 소식이 들어왔다. 조조의 물 샐 틈 없는 대비로 장합과 고람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곽도는 덜컥 겁이 났다. 장합과 고람이 진채로 돌아와 모든 걸 밝히면 그 계책을 낸 자기에게 어떤 화가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먼저 장합과 고람이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곽도는 원소에게 가서 그들을 헐뜯었다.
“장합과 고람은 주공께서 싸움에 지신 걸 보고 마음속으로는 틀 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러잖아도 심기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던 원소가 험한 눈길로 그렇게 되물었다. 곽도는 더욱 고약하게 장합과 고람을 모함했다.
“그들 둘은 평소부터 조조에게 항복할 뜻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일부러 힘을 들이지 않고 싸워 군사들만 태반이나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니 어찌 주공이 패하신 것을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곽도의 말을 들은 원소는 한번 알아볼 생각도 않고 성부터 냈다. 그리고 아직 본채로 돌아오지도 않은 장합과 고람에게 사람을 보내 급히 돌아오라 재촉했다.
곽도는 속으로 됐다 싶었다. 원소가 보낸 사람이 장합과 고람에게 이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사람을 보내 알려주었다.
“주공께서는 두 장군께서 싸움에 진 책임을 물어 죽이려 하시오. 부르더라도 이리로 돌아오셔서는 아니 되오.”
장합과 고람이 그 말을 듣고 잔뜩 근심에 싸여 있는데 다시 원소 가 보낸 사람이 왔다. 원소가 급히 부른다는 말을 듣자 고람이 사자 에게 물었다.
“주공께서 우리들을 부르는 까닭이 무엇인가?”
“글쎄……… 저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사자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무언가 겁먹고 숨기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사자를 가만히 살피던 고람이 돌연 칼을 빼어 사자 의 목을 쳐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장합이 놀라 물었다. 고람이 피묻은 칼을 던지며 분연히 소리쳤다.
“원소는 간사한 무리의 헐뜯는 말을 잘 믿으니 반드시 조조에게 사로잡히는 날이 오리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 다릴 필요가 있겠소? 차라리 조조에게로 투항해 감이 나을 것이오.”
그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장합도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 지 오래다. 이제 갈 때가 왔는가보오.”
그렇게 뜻이 맞자 두 사람은 곧 거느린 병마를 모조리 데리고 조 조의 진채로 투항해버렸다.
장합과 고람이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자 조조는 몹시 기뻐했다. 곁에 있던 하후돈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장합과 고람은 이미 여러 번 그 주인을 바꾼 적이 있습니다. 지 금 그 두 사람이 항복해 왔다고는 하나 거짓인지 참인지는 알 수 없 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웃으며 하후돈의 말을 받았다.
“주인이 옳지 못하면 떠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지난날 은나라가 포학하니 미자(微)는 떠났고, 초가 강포하니 한신(韓信)은 한으로 돌아섰다. 내가 둘을 은혜로 대한다면 설령 딴마음을 품고 왔더라도 달라질 것이다.”
그런 다음 영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창을 누 이고 갑옷을 벗은 뒤 땅에 엎드려 조조에게 절했다. 그사이에 그들 이 오게 된 경위를 들어 안 조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만약 원소가 두 장군의 말을 듣고 따랐다면 싸움에 지는 데까지 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이제 두 장군께서 내게로 오신 것은 마치 미자가 은을 떠나고 한신이 한으로 돌아선 것과 같소이다.”
그리고 장합은 편장군에 도정후로 봉하고, 고람은 편장군에 동래 후로 봉하니 두 사람은 한가지로 몹시 기뻐했다.
한편 원소 쪽은 허유가 이미 떠난 데다 다시 장합과 고람이 조조에게 투항하고, 또 오소의 군량은 조조가 모조리 태워버려 군심(軍心)이 몹시 술렁거렸다. 어떻게 보면 똑같이 군량이 없는 마당에서 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 원소 쪽이 오히려 짐이 무거웠다.
자신의 계책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조조가 원소보다 더 유리한 입장이 되자 우쭐해진 허유는 이어 조조의 급속한 공격을 권했다. 무언가 공을 세워 조조의 후대에 보답하려고 장합과 고람도 스스로 선봉이 되기를 청하며 은근히 허유의 뒤를 밀어주었다. 이에 조조는 다시 한번 부딪쳐보기로 하고 장합과 고람으로 하여금 원소의 진채 를 야습하게 했다.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조조로부터 출전을 허락받은 장합과 고 람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원소의 본진을 들이쳤다. 그러잖아도 움츠러든 사기에 깊은 밤의 급습이라 얼마 안 되는 조조의 군사건 만 원소의 대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쪽 저쪽도 잘 구별하지 못한 채 뒤엉켜 싸우다가 날이 밝자 각기 군사를 거두었는데 이번에도 당 한 것은 원소 쪽이었다. 조조 쪽의 대단찮은 손실에 비해 원소는 다 시 군사의 태반이 꺾여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한때 칠십만 대군을 자랑하던 원소의 군세는 쓰러지 기 직전의 만신창이 거인과 같은 꼴이 나고 말았다. 그 거인에게 드 디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것이 바로 순유가 다음 날 조조에게 올린 계책이었다.
“이때가 바로 인마를 풀어 거짓된 말을 퍼뜨림으로써 적을 현혹 시킬 기회입니다. 승상께서는 군사를 나누어 한 길로는 산조(酸棗) 를 뺏은 뒤 업군을 치리라 하고, 다른 한 길로는 여양(黎陽)을 뺏은 뒤 원소의 군사들이 돌아갈 길을 끊으리라는 말을 퍼뜨리게 하십시 오. 그 말을 듣고 놀란 원소는 반드시 군사를 나누어 우리에게 맞서 려 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소의 군사가 움직일 때 우리가 틈을 보 아 치면 넉넉히 깨뜨릴 수 있습니다.”
실로 훌륭한 계책이었다. 조조는 거기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크고 작게 세 갈래로 나눈 뒤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며 순유가 시킨 대로 거짓 소문을 사방에 퍼뜨리게 했다.
그 소문은 곧 원소의 군사들에게도 들어갔다. 그중의 하나가 딴에 는 큰 기밀이라도 알아냈다는 듯 헐레벌떡 원소의 진채로 달려가 알 렸다.
“조조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한편으로는 업군을 치게 하고 한 편으로는 여양을 뺏으러 보냈다고 합니다.”
많지 않은 군사를 둘로 쪼갠다는 게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이었으나 이미 여러 번 조조에게 당한 뒤끝이라 원소는 놀라기부터 먼저 했다. 얼른 아들 원상(尙)에게 군사 오만을 주어 업군을 구하 러 가게 하고, 다시 장수 신명(明)에게 오만을 주어 여양을 구하러 보냈다. 그것도 그날 밤으로 떠나도록 재촉, 재촉해서였다.
그렇게 되자 원소의 본진에 남은 군사는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았 다. 하북을 떠날 때는 칠십만의 대군이었다 하나 그사이 절반이 꺾 인 데다 다시 십만을 빼내고 보니 이제 원소 곁에 남은 군사는 조조 가 거느린 군사보다 크게 많을 것도 없었다.
하나가 열을 당할 작정으로 나온 조조 쪽으로 보면 싸움은 이미 이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는 원상과 신명이 떠났다는 소리를 듣기 바쁘게 자기가 거느린 모든 군사를 들어 여덟 길로 일제히 원소의 본채를 쳤다.
열 배의 머릿수를 가지고도 조조군을 당해내지 못하던 원소군이 그 돌연한 공격을 당해낼 리 없었다. 조조군이 왔다는 소리만 듣고 도 한결같이 싸울 생각을 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니 원소의 본진 은 그대로 뭉그러졌다.
경황이 없기는 원소도 마찬가지였다. 갑옷으로 갈아입을 틈도 없 이 홑옷에 복건 바람으로 말 위에 올랐다. 뒤를 따르는 것은 다만 맏 아들 원담譚)과 그 졸개 약간이었다.
장요, 허저, 서황, 우금 네 장수가 각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그 런 원소를 뒤쫓았다. 그 지경이 되니 원소는 한목숨 구해 달아나기 도 바빴다. 급히 강을 건너는데 그 많은 수레며 금은 비단은 물론 진 중에서 쓰던 서책이며 문서까지 모두 버려둔 채였다. 군사도 그를 따라 강을 건넌 것은 겨우 팔백 기에 지나지 않았다.
힘들여 쫓았으나 끝내 원소를 놓친 조조의 군사들은 원소가 버리 고 간 것들을 모조리 거두었다. 이때 죽은 원소의 군사는 팔만여 명, 피는 내를 이루고 강물도 물에 빠져 죽은 시체로 메워질 지경이었 다. 조조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조조는 원소가 버리고 간 금은보화며 비단으로 군사들에게 골고 루 상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서책과 문서를 뒤질 때였다. 편지 한 묶음이 나왔는데 모두가 허도에 있는 대신들이나 자신의 부하 장수 들이 원소와 몰래 주고받은 것이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모조리 이름을 밝혀내 죽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조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소의 세력이 강할 때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랬을진대 하물며 딴 사람들이겠느냐?”
그러고는 명을 내려 묶음도 풀지 않은 채 모두 태워버리게 한 뒤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일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라.”
실로 우리는 조조의 일생 전체를 통해, 아니 이 이야기(『삼국지』) 전체를 통해 가장 광채 있는 부분 중의 하나를 보고 있다. 다만 승자 의 관용으로 돌려버리기에는 너무도 휘황한 영웅 정신의 광채이다.
한편 원소의 모사 저수는 갇혀 있었던 탓에 일찍 달아나지 못했 다. 이미 원소의 본진이 조조의 군사들에게 짓밟힌 뒤에야 겨우 풀 려나 급히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은 조조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군사들은 저수를 묶어 조조에게로 끌고 갔다. 원래 조조와 저수는 서로 아는 사이라 목숨을 빌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저는 조조를 똑바로 쏘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이 저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어서 죽여라!”
조조는 그런 저를 내려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원소가 미련하여 그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찌하 여 아직도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가? 만약 내가 일찍 그대를 얻 었던들 천하에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네.”
그리고 한동안을 좋은 말로 달랜 뒤 후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진채에 머물게 했다. 저수는 묵묵히 조조의 말을 따랐으나 그 마음까지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진채 안에서 말 한 필을 훔쳐 원소 에게로 달아나려 하다가 그만 조조의 군사들에게 들켜버렸다.
재주가 아까워 저수를 살려주려 했던 조조도 그 같은 말을 듣자 왈칵 성을 냈다. 저수를 달래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 리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자를 끌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저수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낯빛 한번 변하는 법이 없었다. 태연히 목을 늘여 칼을 받으니 조조가 듣고 탄식했다.
“내가 충성되고 의로운 선비를 잘못 죽였구나!”
그리고 후한 예로 장사 지낸 뒤 황하 어귀에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충렬저군지묘(忠烈沮君之墓)’란 묘비와 함께였다. 자신의 선택이 그릇된 줄 알고 나서도 한번 믿음을 준 곳에 기꺼이 생명을 내던지 는 것이 또한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고집이 아닐는지. 이때 복건에 홑옷 차림의 원소는 겨우 팔백 기를 거느리고 여양 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승세를 탄 조조는 틈을 주지 않고 군마를 정돈해 잇달아 추격했다. 그러나 여양 북쪽 물가에 이르자 원소의 장수 장의거渠)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원소를 맞아들여 가는 바람에 더는 뒤쫓지 못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원소는 앞서 있었던 일을 의거에게 말하고 조 조의 추격을 막을 계책을 물었다.
“주공의 대군이 비록 패했다 하나 그 모두가 죽거나 사로잡히지 는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군사가 산과 골짜기에 흩어져 숨어 있을것인즉 먼저 그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십시오. 그들만 돌아온다면 이곳의 군사들과 더불어 다시 한번 조조와 싸워볼 만합니다.”
이에 원소는 사방에 사람을 놓아 흩어진 군사를 불러들였다. 원소 가 여양에 있다는 말을 듣자 조조에게 패해 흩어진 군사들이 개미 떼 처럼 줄을 이어 모여들었다. 워낙 대군이었던 까닭에 곧 상당한 군 사가 모여들었다.
“일단 기주로 돌아가자. 가서 뒷날을 기약하는 편이 옳겠다.”
원소는 그렇게 결정하고 기주로 군사를 돌렸다. 회군을 시작한 그 날 밤이었다. 원소의 군사들은 어떤 거친 산기슭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원소도 장막 안에 누웠으나 쉽게 잠이 올 리 없었다. 이일 저 일을 생각하며 몸을 뒤척거리고 있는데 문득 멀리서 은은한 곡성 이 들렸다.
원소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곡성이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군사들 이 모여 형과 아우를 잃은 슬픔이며 친지와 친척을 잃어버린 쓰라림 을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얘기하다 말고 가슴을 움킨 채 큰 소리로 울기도 했는데 그 끝에 한탄하는 말은 모두가 한결같았다.
“만약 주공께서 전풍의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가 어찌 이 같은 화 를 당했겠나? 실로 원망스러우이………….”
그 말을 듣자 원소도 크게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속으로 탄식했다.
‘내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싸움에 지고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전풍을 보랴!’
그런데 다음 날이었다. 원소가 다시 말 위에 올라 기주로 돌아가 는 길을 재촉하는데 간 곳을 알 수 없던 봉기가 어디선가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반갑게 봉기를 맞은 원소가 말했다.
“내가 일찍이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이 같은 낭패를 당하게 되었 네. 이제 돌아가면 그 사람 보기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네.”
그 말에 봉기의 얼굴이 실쭉해졌다. 돌아가면 반드시 원소가 전풍 을 무겁게 쓰리란 짐작이 들자 다시 헐뜯어 말했다.
“주공께서는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전풍은 옥 안에서 주공이 패하셨단 말을 듣자 손을 쓸며 큰 소리로 웃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자기가 헤아린 바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뽐내더란 것입 니다.”
원소의 아픈 곳만 건드리는 말이었다. 봉기의 그 같은 말에 원소 는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볼 생각도 없이 화부터 먼저 냈다.
“그 더벅머리 선비놈이 어찌 나를 비웃는단 말이냐? 내 반드시 그 놈을 죽이리라!”
그리고 사자에게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주며 먼저 기주로 가서 옥에 있는 전풍을 죽이게 했다.
이때 전풍은 이미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었다. 하루는 옥리(獄吏)가 찾아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별가(別駕)께서 기뻐하실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뻐한단 말이오?”
전풍이 까닭을 몰라 물었다. 옥리가 까닭을 밝혔다.
“주공께서 싸움에 크게 지고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공을 중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자 전풍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죽게 되었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공을 위해 기뻐하고 있는데 공은 어찌하여 죽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전풍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장군은 겉으로는 관대하나 안으로는 시기가 많아 남의 충성을 알아줄 줄 모르네. 만약 싸움에 이겨 즐거우면 나를 살려줄 것이나 이 제 싸움에 져 부끄럽게 돌아오는 길이라니 나는 이미 살기 틀렸네!”
그러나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풍이 공연히 겁을 먹은 것이 라 여기고 있는데 문득 원소에게서 사자가 왔다. 원소가 풀어준 보검 을 내보이며 전풍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옥 리는 비로소 놀랐다. 전풍은 오히려 그런 옥리를 위로하듯 말했다.
“내 뭐라던가?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미 알고 있었 던 일이니 너무 놀라지 말게.”
그 말에 옥리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들을 처연히 바라 보던 전풍은 다시 자조하듯 덧붙였다.
“대장부가 천지간에 태어나서 주인 하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섬겼으니 그것은 바로 용서할 수 없는 무지다. 새삼 애석해할 게 무 엇이랴!”
그러고는 원소가 내린 보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러 죽었다. 옛부 터 봉황은 나뭇가지를 가려 앉는다던가, 이렇게 일대의 모사 전풍은 허무하게 삶을 마쳤다. 시인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어제는 저수가 군중에서 죽더니 昨朝沮授軍中死
오늘은 전풍이 옥에서 죽는구나. 今日田豐獄內亡
하북의 기둥과 대들보 모두 꺾이니 河北棟樑皆折斷
원소 어찌 그 집과 땅을 지킬 수 있으리. 本初焉不喪家邦
전풍이 그렇게 죽자 듣는 이 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래잖아 원소도 기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팎의 일이 그 모양이 되고 보니 마음에 근심이 차고 정신이 어지러워 정사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소의 처 유씨(劉氏)가 다시 평지풍파를 일으켰 다. 그 마당에 후사 세울 일을 재촉하고 나선 게 그랬다.
원래 원소에게는 아들(여기서는 적자만 들었다)이 셋 있었다. 전처에 게서 얻은 맏아들은 원담으로 자를 현충(忠)이라 쓰며 밖으로 나 가 청주를 지키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원희라 하며 자를 현혁(顯奕) 이라 쓰는데 역시 밖에서 유주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는 원 상으로 자를 현보(顯甫)라 쓰며 바로 지금의 처 유씨가 낳은 자식이 었다.
원상은 얼굴과 체격이 한가지로 준수하고 우람했다. 원소도 그런 셋째를 특히 사랑하여 그 형들과는 달리 언제나 곁에 데리고 다녔는 데 이제 그 어미 유씨가 후사로 삼아달라고 졸라댔다. 관도에서의 패배가 그녀를 어떤 조급 속에 몰아넣은 듯했다.
처 유씨에게 부대끼던 원소는 마침내 심배, 봉기, 신평, 곽도 네 사람을 불러놓고 후사 세울 일을 의논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네 사람의 모사가 뜻이 같지 않은 점이었다. 심배와 봉기는 셋째 원상을 돕고 있는 반면 신평과 곽도는 맏이인 원담을 받들고 있으니 네 사람은 각기 그 주인을 위해 일할 게 뻔했다.
“이제 바깥의 걱정거리가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안 의 일을 일찍 결정해두어야겠소. 내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이 어 대업을 이룰 후사 세울 일을 의논하려는 것이오. 내가 보기에 맏 아들 담(譚)은 성정이 모질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며 둘째 희(熙) 는 줏대가 없고 겁이 많아 큰일을 하기는 어려울 성싶소. 그러나 셋 째상(尙)은 영웅다운 기상이 있고 어진 이를 예로 대하며 선비를 공경할 줄 아오. 나는 그 아이로 후사를 세우고 싶은데 공들의 뜻은 어떠시오?”
원소의 그 같은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맏아들 원담의 편인 곽 도가 일어나 말했다.
“세 아드님 가운데 담이 맏이가 될 뿐만 아니라 지금은 또 밖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까닭 없이 맏이를 제쳐놓고 나이 어린 아드님을 세운다면 이는 반드시 뒷날 어지러움의 싹이 될 것입 니다. 방금 군사의 위세는 꺾이고 적병은 우리 경계로 밀려오는데, 어인 까닭으로 다시 부자와 형제간이 서로 다투게 될 일을 만들려 하십니까? 주공께서는 마땅히 먼저 적을 꺾을 계책부터 마련하셔야 합니다. 후사를 세우는 일은 다음에 의논하셔도 늦지 아니합니다.”
원담이 없는 때 후사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불리하다 여겨 시 간을 벌어두려는 뜻도 있었지만 실은 일도 그러했다. 원소도 그 말 을 들으니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 사람이 와 알렸다.
“원희가 군사 육만을 이끌고 유주로부터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비가 조조에게 패했단 말을 듣고 도우러 달려온 듯했다. 이어 다시 사람이 와 잇달아 알렸다.
“원담이 청주에서 군사 오만을 이끌고 당도했습니다.”
“생질 고간도 병주에서 군사 오만을 이끌고 막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같은 말을 들은 원소는 크게 기뻤다. 곧 후사 따위는 뒤로 미뤄 두고 조조를 쳐부수는 일로 마음을 돌렸다. 세 군데 인마에다 원래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합치니 다시 무시 못할 대군이었다. 원소는 그들을 정비하고 기운을 돋워준 후 조조와 싸우러 갔다.
이때 조조는 싸움에 이겨 기세가 오른 군사들을 이끌고 하상 上)이란 곳에 이르러 진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지방의 사람들이 대 그릇에 담은 밥과 병에 넣은 장으로 조조의 군사를 반겨 맞았다. 조 조가 그들 가운데 몇몇 늙은이를 보니 머리가 허옇게 센 이들이었 다. 조조는 그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자리를 내주며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제 모두 백 살에 가깝습니다.”
늙은이들이 황송한 듯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조조가 걱정스레 말했다.
“내 군사들이 어르신네의 고을을 놀라게 하지나 않았는지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자 노인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지난날 환제(帝) 때에 누런 별이 초(楚)와 송(宋) 어름에 나타 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요동 사람으로 은규(殷植)란 이가 있어 천문을 썩 잘 보았는데, 그가 밤에 그 별을 보고 늙은이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황성(星)이 거기서 빛나는 것은 오십 년 뒤 양(梁)과 패() 사이에서 진인(眞人)이 나올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히 헤아려보니 금년이 바로 그 오십 년째가 됩니다.
원소는 그동안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짜내 사람마다 원망하 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인의의 군사들을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지은 자를 치시니 관도의 한 싸움에서 원소의 백 만 대군을 깨뜨렸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십 년 전 은규가 말한 것 에 맞아떨어지는 일로 백성들은 다만 승상께서 오신 것을 태평성대 가 올 조짐으로 여겨 기뻐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아무리 제가 어찌 거기에 당키야 하겠습니까?”
조조는 그렇게 겸양했으나 마음속으로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곧 술을 내어 늙은이들을 대접한 뒤 비단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곧 삼군에게 엄한 영을 내렸다.
“지금부터 작은 것이라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 백성의 닭이나 개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 서슬 퍼런 영을 누가 감히 어길 것인가. 이에 장졸들이 한가지 로 터럭만 한 민폐도 끼치지 않으니 고을 백성들은 더욱 감격하여 조조를 따랐다. 비록 마을 늙은이의 말을 참고로 한 결단이지만 군사들의 약탈이 보편적이고, 때로는 그 약탈이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수단이기도 했던 그 시대로 보아서는 드문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원소가 네 주로부터 군사 이십삼만을 끌어모아 그 선봉은 이미 창정에 진채를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도 군사를 몰아 창정으로 갔다. 조조가 진채를 내리니 양군은 다시 창정에서 맞서게 되었다.
다음 날이었다. 각기 싸움에 유리한 진세를 벌인 뒤 조조가 먼저 여러 장수를 이끌고 진문 밖으로 나갔다. 원소도 세 아들과 생질 및 문무의 수하들을 이끌고 진 앞으로 나섰다. 조조가 기세 좋게 소리 쳤다.
“본초는 이미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했거늘 어찌 항복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칼이 목 위로 떨어질 때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이미 늦으리라!”
비록 관도의 싸움에서 크게 졌다고는 하나 아직 원소가 망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범 같은 세 아들에 이십만이 훨씬 넘는 대군을 거느 리고 있는 터라 기세는 전과 다름없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좌우 를 돌아보며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나가서 저놈의 목을 가져오겠느냐?”
이때 원상(尙)은 아버지 앞에서 한번 자신의 용맹을 뽐내고 싶었다. 원소의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쌍칼을 춤추듯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아갔다. 말을 휘몰아 오는 기세가 자못 볼만했다.
“저게 누구냐?”
못 보던 장수라 조조가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원상을 알아본 사람이 대답했다.
“원소의 셋째 아들 원상인 듯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조조 편에서도 한 장수가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조조가 보니 서황의 부장인 사환(渙)이었다.
두 말은 곧 기세 좋게 부딪쳤다. 그러나 채 세 합이 되기도 전에 창을 헛 찌른 원상이 말을 박차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환은 원소의 아들을 사로잡는 공에 마음이 들떠 급하게 뒤쫓았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 원상이 가만히 활을 뽑아 화살을 재더니 몸을 뒤집듯 사환을 쏘았다. 멀지 않은 거리인 데다 뒤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 던 사환이 그 화살을 피해낼 리 없었다. 왼눈에 정통으로 화살을 맞 고 그대로 말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아들이 한바탕 싸움에 이기는 것을 보자 원소는 부쩍 힘이 났다. 채찍을 번쩍 들어 군사를 몰아가니 모든 장수들이 그를 에워싼 채 조조군으로 돌진했다. 대군과 대군의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어느 편이 낫고 못하고도 구별 안 되는 마구잡이 살육전이었다.
어느 쪽도 승산 없이 군사만 죽고 상하는 싸움이 되자 오래잖아 양편은 각기 북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원소로서는 오랜만에 대등 한 형국을 이룬 것이라 그리 불만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조조 는 승승장구의 기세가 꺾인 기분이라 약간 초조했다. 곧 여러 장수 들을 불러놓고 계책으로 원소를 깨뜨릴 의논을 시작했다. 아직도 힘 만으로는 원소를 상대하기 벅찬 느낌이었다.
“십면매복(埋伏)의 계책을 써보는 게 어떻습니까?”
정욱이 일어나 그렇게 권했다. 군사를 하상(河上)으로 물린 뒤 열 갈래로 매복시켜 원소를 유인한다는 계책이었다.
“오늘 싸워보니 아직도 원소의 세력은 무서운 데가 있었소. 설령 그곳까지 유인한다고 해도 꺾어낼 것 같지 않구려.”
조조가 이렇게 말하며 주저하자 정욱이 다시 말했다.
“하상 뒤쪽은 깊은 강물이 두르고 있습니다. 우리 군사는 물러날 래야 물러날 길이 없으니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반드시 원소를 쳐 부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배수진(背)의 원리였다.
거기까지 들으니 조조도 느껴지는 게 있었다. 곧 정욱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좌우 각 다섯 대로 나누었다. 좌로는 첫 대가 하후돈, 두 번째 대가 장요, 세 번째 대가 이전, 네 번째 대가 악진, 다섯 번째 대가 하후연이었고 우로는 일대가 조홍, 이대가 장합, 삼 대가 서황, 사대가 우금, 오대가 고람이었다. 조조가 있는 중군은 허 저가 선봉을 맡기로 했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십대를 미리 보내 정해둔 곳에 매복하게 한 다음 밤중을 기다려 자신은 허저를 앞세우고 원소의 진채로 달려 들었다. 진채를 야습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전에 이미 진채를 야습당해 크게 손해를 본 적이 있는 원소라 이 번에는 방비가 엄했다. 진채를 다섯으로 나누어 서로 연결하고 있다 가 조조의 군사들이 쳐들어가자 일제히 일어나 맞섰다.
얼핏 보면 야습을 하려다가 되레 당하게 된 꼴이지만 사실은 그게 조조가 노린 바였다. 선봉을 맡았던 허저는 당황한 체 군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원소가 대군 을 휘몰아 추격해 왔다.
뒤쫓는 원소군의 함성 소리에 몰리듯 달리던 조조의 군사들은 날 이 밝을 무렵 하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앞을 보니 시퍼런 강물이 가 로막혀 이제는 더 도망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그때 조조가 군사들 을 향해 돌아서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제는 더 도망할래야 도망갈 길도 없다. 제군은 어찌하여 죽기 로 싸워보지 않는가?”
그 소리를 들은 군사들은 돌아서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강물에 빠져 죽느니 적과 싸워 살 길을 열어보겠다는 생각이 든 것 이었다. 특히 선봉을 맡았던 허저는 연달아 적장 여남은을 베어 그 런 군사들의 사기를 복돋우었다.
조조군의 힘을 다한 반격에 원소군은 곧 크게 어지러워졌다.
“물러서라! 진채로 돌아가자!”
원소는 급히 그런 영을 내리고 군사를 돌렸다. 이번에는 거꾸로 조조의 군사들이 그런 원소군을 뒤쫓았다.
원소가 한참 정신 없이 쫓기는데 홀연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왼쪽에서는 하후연이 오른쪽에서는 고람이 달려 나왔다. 이미 쫓기 고 있는 원소라 싸움다운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세 아들과 조카가 한 덩이로 되어 죽을 힘을 다해 뚫은 한 가닥 혈로(血路)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하지만 조조의 매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시 십 리도 가기전에 이번에는 악진과 우금이 좌우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쫓기는 원소군을 덮쳤다. 들판은 곧 원소군의 시체로 덮이고 거기서 흐르는 피는 도랑을 이룰 지경이었다.
간신히 몸을 빼친 원소가 다시 몇 리쯤 왔을 때 이번에는 이전과 서황이 좌우 양쪽에서 달려 나왔다. 놀란 원소 부자는 남은 군사들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는 헌 진채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뒤를 쫓던 이 전과 서황은 진채까지 뛰어들지는 않았다. 겨우 한숨을 돌린 원소는 군사들에게 밥을 짓게 했다. 간밤부터 이미 해가 높이 솟은 그때까 지 쫓고 쫓기느라 군사들을 먹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은 밥을 막 나눠먹으려 할 때였다. 다시 장요와 장합이 좌우에서 원소의 진채를 휩쓸어 왔다. 군사들은 물론 원소도 이제는 싸우는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황망히 말에 올라 창정이란 곳까지 내쳐 달아났다.
창정에 이르니 원소군은 사람과 말이 함께 극도로 지쳐 그저 쉬 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이 급하게 쫓아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원소는 주저앉은 군사들을 꾸짖어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조조의 추격을 벗어났다 싶었을 때 원소는 또 한 떼의 매 복을 만났다. 십면 매복의 마지막 부대인 조홍과 하후돈의 군사였 다. 하상에서 조조의 군사들을 분기시킨 것이 위기의식이었던 것처 럼 그곳에서 원소를 분기시킨 것도 바로 그 위기의식이었다.
“모두 들어라! 여기서 죽기로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사로 잡히게 된다. 사로잡혀 욕되게 죽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싸우다 죽자!”
원소가 그렇게 소리치며 몸소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부딪쳐 갔다. 군사들도 그 같은 주군을 보자 힘과 용기를 다해 뒤따르니 아무리 범 같은 조홍과 하후돈이라 하나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간 신히 길은 뚫었어도 원소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둘째 아들 원희와 생질 고간이 모두 화살에 다치고 군사와 말도 거지반 잃어버렸다. 원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천하를 차지할 인물로는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뛰어난 점도 많았다. 지난날 한낱 청년 장 수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세를 쥐고 있던 동탁에게 분연히 “천하는 동공(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순간의 개결한 용기나 북방의 효웅 공손찬과의 힘 겨운 싸움에서 절박한 처지에 떨어질 때마다 보여준 과단성 같은 것 들은 참으로 볼만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이긴 자의 편이다. 그 는 끝내 진 자가 되었기에 결함은 더 크게 그려지고 장점은 빛 없이 묻혀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방금 본 것도 원소의 그 같은 장점 가운 데 하나이다. 어려움에 처해 오히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범 용한 인간에겐 실로 얼마나 흉내 내기 어려운 미덕인가.
그러나 조조의 불같은 추격을 벗어나자마자 원소는 곧 격정과도 같은 비감에 빠져들었다. 세 아들을 쓸어안고 한바탕 목놓아 울다가 문득 피를 토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급히 부 축해 뉘었으나 입으로는 붉은 피가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껏 수십 번 싸움터를 누볐으나 오늘과 같이 이토록 심 한 낭패를 당해본 적은 없었다. 이는 하늘이 나를 저버리심이다…… 너희들은 각기 다스리는 주로 돌아가 힘을 기른 뒤 맹세코 조조 그 역적 놈과 자웅을 가리도록 하라!”
이윽고 정신을 차린 원소는 탄식 섞어 그렇게 당부한 뒤 신평(評)과 곽도를 불렀다.
“너희들은 급히 원담을 따라 청주로 돌아가라. 조조가 그곳을 침 범할까 두려우니 관민을 정돈하여 만에 하나라도 동요함이 없도록 하라.”
이에 두 사람은 그 길로 원담을 따라 청주로 말을 달렸다.
원소는 다시 둘째 아들 원희와 생질 고간을 불렀다. 둘 다 화살에 다쳐 움직이기가 거북했으나 원소는 그들도 재촉하여 원래 다스리 던 유주와 병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셋째 아들 원상과 함께 기 주로 향했다.
실로 참담한 패배였다. 처음 기주를 떠날 때의 칠십만 대군 중에 서 살아서 돌아가는 자 열에 두셋이 안 되었다.
장수들 또한 순우경, 장기, 장합, 고람 등이 죽거나 남의 사람이 된 것 말고도 태반이 꺾였으며, 모사도 허유, 전풍, 저수가 죽거나 남 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아들과 생질은 화살에 상하고 원소 자신도 무거운 병을 얻어 돌아가는 길이었다.
‘조조, 그 환관의 자식 놈에게 사세오공의 후예인 내가 이 무슨 꼴이냐…….’
기주로 들어서는 수레에 기대어 원소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런 원소의 마음속처럼 바깥에는 때 아닌 겨울비가 언 땅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기주로 돌아가자 원소는 다소나마 투지를 회복했다.
조조에게 설욕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이 성해야 된다고 여겨 군사에 관한 일은 잠시 셋째 아들 원상과 심배, 봉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 로지 병을 다스리는 데만 전념했다.
한편 조조는 창정에서 다시 크게 이기자 삼군에게 고루 무거운 상을 내려 그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으로 몰래 사람을 풀어 기주의 허실을 살펴보게 했다. 여세를 몰아 기주까지 우려빼고 원소와의 싸 움을 이참에 아예 결판을 내버릴 생각이었다. 오래잖아 세작들이 탐 지한 바를 알려왔다.
“원소는 병들어 누워 있으나 그 셋째 아들 원상이 심배와 함께 성 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맏아들 원담과 둘째 아들 원희는 각기 원 래 다스리던 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급하게 기주를 들이치자고 나왔다. 조조가 한참 생각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주는 양식이 풍족한 데다 심배란 자는 제법 임기응변의 재주 와 꾀가 있다고 들었다. 급히 들이친다 해서 쉽게 우려뺄 수 있는 성 이 아니다. 거기다가 군사를 일으킨 지도 오래되어 백성들의 생업에 도 어려움이 많을 터이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기주를 쳐 빼앗 는 것은 뒷날이라도 늦지 않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군사를 되돌린 이유 가운데 곡식이 들에 있 어[]란 이유를 대며 추수 뒤로 미루고 있으나 이는 저자의 혼동인 듯하다. 그보다 앞서 관도의 싸움이 한창일 때가 이미 겨울 인 시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