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2화 : 조각나는 원가
조각나는 원가
한편 조조는 유비가 형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들어 유표를 치려 했다. 정욱이 그런 조조를 말렸다.
“원소를 아직 죽이지 못한 채로 이곳에서 형주와 양양를 치다가 원소가 북쪽에서 일어나면 어찌하시렵니까? 만약 원소가 이번에 다 시 기운을 차린다면 그때는 실로 누가 이길지 모르는 싸움이 돼버릴 것입니다. 허도로 돌아가 군사를 기르고 힘을 모으는 편이 낫습니 다. 내년 봄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먼저 원소를 깨뜨린 다음 형 주와 양주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리되면 남북의 이익을 한꺼번에 얻 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유비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만 휘몰리던 조조도 그 말을 듣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욱의 말이 옳았다. 이에 조조는 군사를 돌려 허도로 향했다.
여남에서 허도로 가는 도중에는 조조의 고향인 초현이 있었다. 부 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 것과 같 다고 했던가. 비록 군사들과 함께 허도로 돌아가는 길이기는 해도 조조의 마음은 적지 않이 설레었다.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고 향을 떠난 지도 이미 십수 년, 나름으로는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 고 산하도 그리웠다. 그러나 종일토록 고향 근처를 지나도 아는 얼 굴은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싸움에 끌려가 죽고 난리로 흩어진 까 닭이었다. 그것도 싸움에서 죽은 사람의 대부분은 조조 자신을 위해 죽었다. 거기서 조조는 저 유명한 포고령을 내렸다.
‘……나는 의병을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 들을 없이 하려 했다. (그러나 십수 년을 지난 지금)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죽거나 없어져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아는 얼굴 하나 만날 수가 없으니 실로 이 마음이 괴롭고 쓰라림은 어디다 견줄 데 없다.
내가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나를 따라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은 장사(將)는 그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 자녀가 없으면 그 가까 운 친척의 자녀에게라도 논과 밭을 나누어주도록 하라. 관청은 그 밭을 갈 소를 대어주고 학교와 선생을 두어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또 남아 있는 자들은 사당을 세워 먼저 간 이들을 제사 지내주도록 하라. 진실로 혼이나마 있어 그 제사를 받을 수 있다면 나 죽은 뒤 백 년이 지난들 무슨 한이 있으리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그 포고령은 거듭 시행 여부가 확인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미비한 점은 보충까지 되는 것으로 보아 조조야말로 사상 최초로 어느 정도 정비된 원호정책(援護政策)을 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인 초() 땅을 거쳐 허도로 돌아간 조조는 이듬해 춘정월에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그동안 수습한 민심과 힘을 바탕으로 원소의 마지막 숨통을 죌 작정이었다. 의논 끝에 조조는 먼저 하후돈과 만에 군사를 주어 여남으로 보냈다. 유비의 충동질 로 형주의 유표가 움직이게 될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허도에는 순욱과 조인을 남겨 지키게 한 뒤 이번에도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세 번째로 관도를 향해 떠났다.
이때 원소는 원소대로 지난해 패전 때 얻은 토혈(吐血) 증세가 조 금 낫자 다시 모사들을 모아놓고 허도를 칠 의논을 꺼냈다. 심배가 나서서 말렸다.
“지난해 관도와 창정에서 패한 뒤로 아직 군사들의 사기가 회복 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도랑을 깊게 파고 성벽과 담장을 높여 지 키며 군민의 힘을 기를 때입니다. 결코 주공께서 먼저 싸움을 일으 켜서는 아니 되십니다.”
그러면서 조목조목 이유를 대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조조가 군사를 관도로 내어 우리 기주를 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원소가 기다렸다는 듯 심배의 만류를 뿌리쳤다.
“적의 장이 이미 성 아래 이른 뒤에야 항거하려 들면 일은 이미 늦다. 내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조조를 맞으리라!”
원소가 그렇게 생각을 굳히자 셋째 아들 원상尙)이 가장 아비를 위하는 체 나섰다.
“아직 아버님께서는 병환이 다 낫지 않으셨으니 멀리 나가 싸우셔서는 아니 됩니다. 차라리 저를 먼저 보내주십시오. 장졸들과 힘 을 합쳐 조조와 맞서보겠습니다.”
원상이 원래부터 유달리 아끼는 자식인 데다, 또 모두가 조조를 두려워하는 것을 비웃듯 호기를 부리고 나서자 원소는 흐뭇했다. 몸 소 나서려던 생각을 버리고 기꺼이 원상의 출전을 허락하는 한편 청 주, 유주, 병주 세 곳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곳을 지키는 맏아들 원담 과 둘째 아들 원희 그리고 생질 고간)에게 군사를 일으켜 원상 과 함께 네 길로 조조를 치게 한 것이었다.
원상은 창정의 싸움 때 조조의 장수 사환)을 죽인 뒤로 자신 의 용맹에 한껏 취해 있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자 형들과 고종사 촌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군사 몇 만을 몰아 먼저 조조 와 싸움을 하러 떠났다.
원상은 여양에서 조조의 군사와 만났다. 조조군의 선봉은 장요였 다. 양군이 부딪자 장요가 말을 몰아 나왔다. 원상도 창을 휘둘러 무 예를 뽐내며 말을 박차 부딪쳤다. 그러나 원상이 원래 장요의 상대 가 못 됐다. 채 세 합을 견뎌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장요가 원상의 군사를 뒤쫓으며 죽이니 원상은 끝내 기세를 회복 하지 못한 채 기주로 급하게 돌아갔다. 원상이 싸움에서 쫓겨왔다는 말을 듣자 원소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나은가 싶던 병이 다시 도졌 다. 한꺼번에 몇 말이나 되는 피를 토하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땅 바닥에 쓰러졌다.
유부인이 놀라 원소를 눕히고 곁에서 돌보았으나 원소의 병세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유부인은 바로 원상의 어미였다. 원소가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자 급히 사람을 보내 심배와 봉기를 원소의 병상 앞으로 불러들였다. 원소가 죽은 뒤의 일을 의논코자 함이었다. 이때 원소는 다만 손짓 발짓을 할 수 있을 뿐 말은 이미 하지 못 했다. 유부인이 그런 원소에게 물었다.
“뒷일을 미리 정해두셔야 합니다. 우리 상(尙)으로 하여금 뒤를 잇 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상 앞에 서 있던 심배가 급히 붓을 들어 원소의 유촉遺囑)을 적었다. 그때 원소가 문득 몸을 뒤집 으며 다시 한 말이 넘는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조조와 더불어 천하를 다투던 일세의 영웅으로서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여러 대 공경의 자손 되어 큰 이름 이루고 累世公卿立大名
젊은 시절의 의기 천하를 종횡했다. 少年自縱橫
헛되이 불러들인 준걸 삼천이요, 空招俊傑三千客
턱없이 기른 군사 백만이었다. 漫有英雄百萬兵
양고기에 호랑이 가죽 입어 공 이루지 못하고 羊質虎皮功不就
봉의 깃에 닭간이라 큰일 이루기 어려웠다. 鳳毛鷄膽事難成
가련하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更憐一種傷心處
집안 어려운 일 두 형제에게까지 미친 일이네. 家難徒延兩弟兄
원소가 죽자 심배가 도맡아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그 상중에 유부인은 참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원소가 생전에 사랑하던 첩 다섯을 모조리 끌어내 죽여버린 일이었다. 그것도 죽어서나마 원소 와 다시 만나는 게 싫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을 도리며 시체까지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아무리 생전에 품었던 투기가 맺혀 이루어 진 원한이지만 듣는 사람치고 몸서리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아들 원상은 한술 더 떴다. 그렇게 죽은 총첩()들 의 가솔이 어머니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 또한 모조리 잡아 죽여버렸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 할 만했다.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대사마 장군으로 세우고 청주, 기주, 병주, 유주 네 주의 목(牧)으로 올려 세워 지난날 원소를 잇게 한 뒤에야 각처로 원소의 죽음을 알렸다.
이때 원소의 맏아들 원담은 아비의 죽음을 이미 알고 군사를 일으켜 청주를 떠나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데 나는 장차 어찌해야 되겠소?”
청주를 떠나기에 앞서 원담이 곽도와 신평을 불러놓고 물었다. 곽도가 대답했다.
“주공께서 기주에 계시지 않았으니 심배와 봉기는 틀림없이 원상 을 주인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마땅히 행군을 재촉해 빨리 그리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신평은 생각이 달랐다.
“심배와 봉기 두 사람은 반드시 미리 꾀를 정해놓고 기다릴 것입 니다. 이제 만약 급하게 달려갔다가는 반드시 그 꾀에 걸려 화를 당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겠소?”
원담이 그런 신평에게 물었다. 곽도 또한 신평의 말을 듣고 보니 옳은지 자신의 계책을 고쳤다.
“기주에 가시더라도 군사를 성 밖에 머물게 하시고 먼저 저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성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도 록 하지요.”
이에 원담은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기주에 이르자 군사를 성 밖 에 머무르게 한 뒤 곽도만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곽도는 먼저 원상 을 만나 문상의 예를 했다.
“형님은 어찌하여 오지 않으셨소?”
원상이 곽도에게 물었다. 곽도가 둘러댔다.
“오다가 병이 들어 군중에 누워 계신 까닭에 와 뵙지 못합니다.”
그러자 원상이 거드름을 떨며 말했다.
“나는 선친의 유명을 받들어 선친의 뒤를 잇고 형님께는 거기장 군을 더했소. 지금 조조의 군사가 우리 경계로 짓쳐들고 있으니 바 라건대 형님은 전부(部)가 되어주셨으면 하오. 나는 그 뒤를 따르 며 군사들을 모아 형님과 앞뒤로 접응할 작정이오.”
곽도가 가만히 헤아려보니 일은 이미 걱정한 대로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심배와 봉기라도 원상에게서 떼내 그 힘을 줄여야 겠다고 생각하고 수를 부렸다.
“주공의 명은 옳으나 지금 저희 군중에는 좋은 계책을 의논할 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정남심배의자)과 원도(圖, 봉 기의자)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를 돕도록 하게 해주십시오.”
“나 역시 그들 두 사람에게 의지해 좋은 계책을 얻으려 하는 중이오. 그런데 어찌 그리로 보낼 수 있겠소?”
원상이 곽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거절했다. 곽도 가 물러서지 않고 거듭 떼를 썼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하나라도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원상도 어쩔 수 없는지 심배와 봉기 두 사람이 제비를 뽑 아 그중 한 사람이 원담에게로 가도록 했다. 제비를 뽑은 것은 봉기 였다. 원상은 봉기에게 거기장군의 인수를 주어 곽도와 함께 원담에게로 보냈다. 원담의 군중에 이른 봉기는 곽도를 따라 원담을 만났다. 원담을 보니 병난 기색이 전혀 없어 마음이 적이 불안했으 나 받은 명이 있어 거기장군의 인수를 원담에게 바쳤다.
“그래, 제놈은 기(冀), 청(靑), 유(幽), 병() 네 주의 주인이 되고 내게는 거기장군으로 앞장이나 서라고?”
원담이 성난 눈길로 봉기를 내려보며 꾸짖다가 문득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놈도 상을 도와 일을 꾸민 놈이다. 어서 끌어내다 베어버려라!”
곽도가 가만히 그런 원담을 말렸다.
“지금 조조의 군사들이 우리 경계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잠시 봉기 를 이곳에 남겨두어 상이 마음을 놓게 하십시오. 조조의 군사들을 깨뜨린 뒤에 달려가 기주를 다투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집안 싸움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치솟는 노기로 펄펄 뛰던 원담이었으나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그 말을 따 르기로 하고 즉시로 진채를 움직여 조조의 군사를 맞으러 갔다.
원담의 군사는 여양에 이르러 다시 조조의 대군과 부딪쳤다. 원담이 장수 왕소(昭)를 내보내자 조조는 서황을 시켜 맞서게 했다. 둘 이 맞붙은 지 몇 합 되기도 전에 서황의 한칼이 번득이자 왕소의 목 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적장의 목이 떨어지는 걸 보자 조조군은 기세를 올리며 일시에 덤벼들었다. 결과는 원담의 대패였다. 원담은 패군을 이끌고 여양 성안으로 쫓겨 들어가 원상에게 구원을 청했다.
원상은 심배와 의논한 끝에 겨우 군사 오천을 뽑아 원담을 구원 하러 보냈다. 아직 형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불안하기는 했으나 우선 급한 것은 조조를 물리치는 일이어서 흉내라도 낸 것이었다.
그러나 원상의 구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소문이 먼저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조조는 악진과 이전에게 군사를 주어 도중에서 원상의 구 원군을 치게 했다.
악진과 이전은 조조가 시킨 대로 도중에 숨어 기다리다가 양쪽에 서 에워싸고 오천의 구원병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성안에서 목이 빠지도록 구원군을 기다리다가 그 소식을 들은 원 담은 다시 몹시 노했다. 원상이 겨우 군사 오천을 보냈다는 것만도 화가 나는데 그나마 도중에서 모조리 죽어버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
“제가 글을 써서 주공에게 올리면 주공께서는 반드시 몸소 구원 하러 달려오실 것입니다.”
원담이 홧김에 다시 봉기를 불러 꾸짖자 봉기가 그렇게 말했다. 당장 형편이 위급한 때라 원담도 성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봉기 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며 글을 써서 원상에게 보내도록 했다.
봉기의 글을 가지고 기주로 돌아간 사자는 원상에게 그 글을 올렸다. 원상은 심배를 불러 다시 형을 구하는 일을 의논했다. 원가(袁 家)의 운이 다한 것인지 심배가 기막힌 계교를 냈다.
“곽도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전에 원담이 우리와 싸우지 않고 바로 여양으로 간 것은 조조군이 우리 경계에 와 있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러나 이제 만약 조조를 깨뜨린다면 틀림없이 기주로 와서 우 리와 싸우려 들 것입니다. 구원군을 보내지 말고 조조의 힘을 빌려 그들을 제거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원담이 조조에게 패하면 다음은 자기들 차례라는 것에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원상이었다. 아 버지의 원수를 시켜 자기의 형을 죽이라는 계책이건만 아무런 거리 낌 없이 그 계교를 따랐다. 진실로 원소의 가장 큰 실패는 그런 자식 들을 낳고 기른 것이었다.
원상이 심배의 말을 듣고 구원병을 보내려 하지 않는단 말을 듣 자원담은 다시 크게 노했다. 선 채로 봉기를 목 베 죽이고 조조에게 항복하려 했다.
생각하면 봉기는 원소의 모사들 중에서 재주는 일류가 아니었으 나 자리는 언제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했다. 거기서 오는 무리가 여 러 번 원소를 낭패케 하고 끝내는 자기 목숨까지 잃게 하고 말았다.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하려 한다는 소식은 곧 원상의 귀에도 들어 갔다. 일이 생각과 달리 꼬이자 놀란 원상은 다시 심배를 불러 의논 했다. 심배도 안색이 변하여 말했다.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하여 함께 쳐들어온다면 기주가 위태롭습니다. 아무래도 주공께서 원담을 구해주셔야겠습니다.”
이에 원상은 심배를 대장 소유(蘇)와 함께 남겨 기주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들어 원담을 구원하러 여양으로 달려갔다.
“누가 선봉이 되겠는가?”
기주를 떠남에 이르러 원상이 장수들을 보며 물었다. 대장 여광(呂)과 여상(呂) 형제가 나섰다.
“저희들이 한번 앞장서 보겠습니다.”
원상은 기뻐하며 그들에게 군사 삼만을 떼어주어 선봉으로 삼았 다. 여광, 여상의 선봉이 여양에 이르자 비로소 원담도 원상이 스스 로 대군을 이끌고 자신을 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날의 분노도 잊고 기뻐하며 조조에게 항복할 뜻을 버렸다.
원담은 곧 사람을 원상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아우는 성 밖에 군사를 둔치고 나는 성안에 군사를 둔쳐 서로 의지하고 돕는 형세를 취하도록 하라.”
실로 어렵게 이루어진 형제간의 협력이었다.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원희(熙)와 고간이 각기 군사를 이 끌고 여양에 이르렀다. 그리고 역시 성 밖에 진채를 세우니 원가의 기세가 자못 드높아졌다.
서로 세력이 엇비슷해지자 싸움은 다시 지구전(持久戰)이 되었다. 원상은 몇 번이나 조조와 접전을 했으나 그때마다 조조에게 졌다. 하지만 전체의 형국은 그대로 유지되며 싸움은 달포를 끌었다.
건안 팔년 춘삼월 조조는 마침내 결전을 시도했다. 그동안의 정탐 으로 적의 허실을 안 조조는 대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원담, 원상, 원희, 고간을 일시에 들이쳤다.
조조의 계책은 들어맞아 그들 넷이 이끄는 군사는 한결같이 패하 여 여양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조는 승세를 타고 그들을 쫓아 기주 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오랜 원가의 근거지라 거기서는 싸움이 뜻같지 못했다. 원담과 원상은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고 원희와 고간은 성 밖 삼십 리에 진채를 벌여 허장성세로 도우니 조조가 연 일 군사를 몰아쳐도 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조조가 조급해하고 있을 때 곽가가 넌지시 권했다.
“원씨가 맏아들을 버리고 셋째를 세워 형제 사이에 권력을 다투 게 만들었습니다. 각기 이끄는 무리가 있으니 우리가 급하게 치면 서로 구해주겠지만 늦춰주면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군사 를 거두어 남쪽으로 형주를 도모하는 게 낫겠습니다. 유표를 치면서 원씨 형제들 사이에 변란이 일기를 기다려 다시 기주로 온다면 그때 는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이에 조조는 가후를 태수) 로 삼아 여양을 지키게 하고, 또 조홍에게도 군사를 주어 관도를 지 키게 한 뒤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향했다.
원담과 원상은 조조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는 말을 듣 자 서로 기뻐하며 치하했다. 원희와 고간은 조조가 물러간 이상 기 주에 더 머물 까닭이 없어 각기 자신이 다스리는 주로 돌아갔다. 기주에는 일시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곽가의 예측은 곧 맞아들어갔다. 먼저 일을 벌인 것은 원담이었다. 원담은 가만히 제 사람인 곽도와 신평을 불러놓고 불평했다.
“나는 맏이로서 아버님의 대업을 이어받지 못하고 상은 오히려 계모의 자식으로서 아버님의 관작을 이었다. 내 마음이 실로 즐겁지 않구나!”
그러자 곽도가 기다렸다는 듯 소곤거렸다.
“주공께서는 그까짓 일로 무어 그리 마음 상해하십니까? 지금 곧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셔서 청주로 돌아간다고 소문을 낸 뒤 원상 과 심배를 성 밖으로 부르십시오. 작별을 하려 함이라면 저들도 의 심치 않고 나올 것입니다. 그때 술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마시다가 미리 숨겨둔 도부수로 하여금 그들을 죽이게 한다면 대사는 절로 정 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담도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곧 그대로 따르려 하는데 별가 왕 수(修)가 청주로부터 보러 왔다. 원담은 왕수가 자기 사람이라 무 심코 그 계책을 털어놓고 의견을 물었다. 왕수가 무겁게 고개를 가 로저으며 대답했다.
“형제는 왼손과 오른손 같은 사이입니다. 지금 형제와 싸우는 것 은 스스로 손을 자르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이긴다 한들 어찌할 짓 이겠습니까? 거기다가 무릇 형제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면서 천하의 누구와 가깝게 지내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공연히 헐뜯는 사람들 이 골육 사이를 이간시켜 눈앞의 이익을 얻으려는 수작입니다. 바라 건대 주공께서는 귀를 막으시고 그 말을 듣지 마십시오.”
실로 원가의 사람으로는 드물게 사람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좋 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든가, 원담은 오히려 성난 소리로 왕수를 꾸 짖어 내쫓고 그 잘난 계책에 들어갔다.
“형이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르는지 알겠소?”
원담으로부터 오라는 전갈을 받은 원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 배에게 물었다. 갑작스레 청주로 돌아간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하필 이면 성 밖에서 작별을 하겠다고 청하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 끼리 끼리라 더 잘 상대의 속이 들여다보이는지 심배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는 필시 곽도의 못된 꾀일 것입니다. 만약 주공께서 가신다면 틀림없이 그의 간계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원상이 굳은 얼굴로 심배에게 물었다. 심배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세력이 강하니 세력 으로 밀고 나가 대사를 굳히는 게 옳겠습니다.”
그 말에 원상도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 용이 없는 자리싸움으로 그 또한 형제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고 나 선 것이었다.
원상은 곧 갑옷 입고 투구 쓰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군사 오만을 긁어모아 성을 나섰다. 원담은 원상이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일이 이미 새어나간 걸 알았다. 역시 갑옷 입고 말 에 올라 아우를 맞으러 나갔다. 곧 형제간의 꼴사나운 입씨름이 벌 어졌다.
“너는 선친의 유명을 어기고 감히 내게 대적하려 드느냐? 네 죽은 들 무슨 낯으로 선친을 뵈오려느냐?”
원상이 그렇게 큰 소리로 꾸짖자 원담도 지지 않고 맞섰다.
“너는 아버님을 독살하고 그 자리를 도적질한 놈이다. 거기다가 이제는 형마저 죽이려 드는구나!”
그러다가 남을 앞세울 것도 없이 직접 맞붙었다. 창과 칼이 서로 형제의 목숨을 노리며 뒤얽혔다. 하지만 무예에 있어서는 원래 원담 은 원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원담이 곧 패해 달아나니 원상은 몸 소시석(石)을 무릅쓰고 뒤를 쫓으며 원담의 군사를 죽였다.
원담은 패군을 이끌고 평원까지 달아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원 상이 군사를 거두고 돌아가자 원담은 다시 곽도와 더불어 원상을 칠 계책을 의논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잠벽(岑)을 대장으로 앞세우고 기주로 짓쳐갔다.
원상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맞섰다.
양쪽 군사가 둥그렇게 맞서 진을 치니 기치와 북소리가 서로 마 주쳤다. 원담의 장수 잠벽이 먼저 말을 내어 진 앞에 나서더니 큰소 리로 원상을 꾸짖었다. 원상이 또 용맹을 뽐내며 나가 싸우려 했다.
“주공께서는 수고로이 창칼을 잡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장수 여광이 그런 원상을 말리며 말을 박차 나아갔다. 곧 잠벽과 여광의 싸움이 어우러졌다. 그러나 몇 합 어우러지기도 전에 여광은 잠벽을 베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장이 그 지경으로 죽는 꼴을 본 원담의 군사들은 기가 죽었다. 기세를 올려 덤벼드는 원상의 군 사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뭉개져 달아나니 또다시 원담의 대 패였다.
원담은 전에 쫓겨갔던 평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심배가 권하여 원상이 그곳까지 쫓아왔다.
원담은 들판에서는 더 이상 원상을 당해내지 못할 줄 짐작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원상은 평원성(平原城) 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들이치는데 그 기세가 자못 세차고 급했다. 더럭 겁이 난 원담이 곽도를 불러 물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도가 미리 생각해둔 듯이나 입을 열었다.
“지금 성안에 양식은 적고 저쪽 군사의 기세는 한창 날카롭습니 다. 제 어리석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을 조조에게 보내 투항하는 게 어떨는지요? 조조로 하여금 기주를 공격하면 상은 틀 림없이 주공께 구원을 청할 것입니다. 그때 구해주지 말고 뒤에서 들이치면 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조조가 먼저 상을 깨뜨 린다면 그때는 그 군사를 거두어 조조에게 대적할 수도 있겠지요. 조조의 군사는 멀리서 왔으니 양식이 모자라서라도 스스로 물러나 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주를 차지할 수 있 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원상도 사로잡고 조조도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이라 원담은 귀가 솔깃했다.
“누구를 사자로 보냈으면 좋겠소?”
“신평)의 아우로 신비)란 이가 있는데 자를 좌치(治) 라 하며 지금 평원령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을 잘해 사자 로 삼을 만합니다.”
곽도가 다시 준비한 듯 대답했다.
원담은 즉시로 신비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기꺼이 달려온 신비에 게 글 한 통을 써준 뒤 군사 삼천으로 군(郡) 경계까지 호송케 했다. 신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조에게로 달려갔다.
이때 조조는 서평벌이란 곳에 군사를 둔치고 있었다. 유표는 조조 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선봉으로 조조를 맞게 했다. 그러나 아직 양군이 싸우기 전에 신비가 먼저 조조의 진 중에 이르렀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신비가 예를 끝내기 무섭게 조조가 물었다. 곽가의 진언으로 군사 를 물리기는 했지만 일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진척되어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비는 원담이 구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함과 함께 지니고 온 글을 조조에게 바쳤다.
“뜻은 알았소. 잠시만 진채 안에서 기다리시오.”
글을 다 읽은 조조는 신비에게 그렇게 이르고 자신은 따로 문무 의 여러 벼슬아치들을 불러모아 그 일을 의논했다. 먼저 정욱이 일 어나 말했다.
“원담은 원상의 공격을 받아 일이 매우 급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투항해 온 것입니다. 믿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 이미 군사를 이끌고 이곳까지 오셨는데 어떻게 유표를 버리고 다시 원담을 도우러 갈 수 있겠습니까?”
여건과 만총도 그렇게 정욱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순유만은 달랐다. 한구석에서 가만히 여럿의 말을 듣다가 불쑥 일어나 말했다.
“세 분의 말씀은 옳지 않소이다. 어리석은 소견으로 헤아려보건대, 천하가 방금 시끄러운데도 유표는 다만 가만히 앉은 채로 형주 를 보전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소. 감히 발을 뻗쳐 천하를 향해 나오 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이 천하에 없음은 넉넉히 알 수 있는 일 이오. 이에 비해 원씨는 네 주에 걸친 넓은 땅에 웅거하며 갑병(甲 兵)만도 수십만이 되오. 만일 그 두 아들이 화목하여 함께 아비의 기 업을 지켜간다면 천하 일은 아직 알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져 세력이 궁한 쪽이 우리에게 투항하려 한다 하니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 있겠소이까? 못 이긴 체 군사를 내 어 먼저 원상을 없애고 변화를 지켜보다 다시 원담까지 없앤다면 천 하의 일은 절로 결정이 날 것이오. 이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실로 아 니 되오.”
조조의 마음에 꼭 맞는 소리였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순유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신비를 불러 술을 내리며 슬며시 물었다.
“원담의 항복은 참이요, 거짓이요? 그리고 원상은 정말로 꼭 원담 을 이겨내겠소?”
기주의 허실을 물음과 아울러 신비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뜻에서 였다. 어딘가 신비의 행동거지에는 원씨들에 대한 실망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뜻밖에도 조조의 의도는 들어맞았다.
“명공께서는 이 투항이 거짓인가 참인가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남 의 사자가 돼 그 허실을 상대에게 밝히기는 심히 난감합니다. 그러 나 기주의 형세라면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신비가 매우 거북한 듯 그렇게 말했다. 조조가 얼른 물었다.
“그럼 지금 하북의 형세는 어떠하오?”
“원씨는 해마다 싸움에 져서 군사들은 밖으로 전쟁에 지쳐 있고 모신(臣)들은 안으로 집안싸움에 여럿이 죽었습니다. 거기다가 형 제간이 벌어져 나라는 둘로 나뉘고, 기근과 천재로 백성들은 고단하 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가릴 것 없이 그 땅에 사 는 사람이면 머지않아 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알 정도이니 이는 곧 하늘이 원씨들을 없애려는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승상께 서 군사를 들어 업성을 들이친다면 원상은 미처 구할 틈이 없어 그 소혈을 잃게 됩니다. 또 돌아와 구하려 할지라도 원담이 그 뒷덜미 를 후려칠 것이니, 승상의 위엄으로 그 피곤한 원상의 무리를 치시 면 빠른 바람이 가을잎 쓸 듯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형주를 치신다면 이는 다만 하늘이 주신 기회를 잃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화를 키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하여 그렇소?”
조조가 다시 물었다.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신 비는 이내 조조의 사람이라도 된 듯 대답했다.
“형주는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넉넉한 곳인 데다 나라는 화평하 고 백성들은 모두 순종하고 있습니다. 쉽게 흔들어 뽑을 수 있는 땅 이 못됩니다. 거기다가 지금 사방에 근심거리가 널려 있고, 특히 하 북에 있는 근심거리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닙니다. 먼저 하북을 평정 하는 것이 곧 패업(業)을 이룩하는 것이 되니 바라건대 명공께서 는 소상히 살펴 행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조조는 신비의 속마음을 뚜렷이 알 듯했다. 그 마음 은 이미 그 주인 원담에게서 멀리 떠난 사람이었다.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소리쳤다.
“신좌치와 이토록 늦게 만난 게 실로 한스럽구려!”
그러고는 그날로 군사를 재촉해 기주로 달려갔다. 유비는 조조가 갑자기 군사를 물리자 그 뒤를 들이치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속임수가 있을까 두려워 함부로 뒤쫓지 못하 고 군사를 돌려 형주로 돌아갔다.
한편 원상은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업鄴)으로 되돌렸다. 이때 뒤를 맡은 것은 여광과 여상 이었다. 원담은 원상이 물러가는 걸 보자 평원의 군사들을 있는 대 로 몰아 뒤를 쫓았다. 그런데 채 수십 리도 가기 전에 한소리 포향이 들리며 두 길로 적군이 쏟아져 나왔다. 왼쪽은 여광이요, 오른쪽은 여상이었다. 원상의 명을 받들고 원담의 뒤쫓음을 막으려고 기다린 것이었다.
원담이 말고삐를 당기며 여광, 여상 두 형제를 달랬다.
“우리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한번도 나는 두 분 장군을 섭섭 하게 대한 적이 없소. 그런데 이제 어찌 내 아우를 좇아 나를 이렇게 구박하시오?”
그 소리를 듣자 여광과 여상은 잠깐 생각해보았다. 조조가 다시 강을 건넜다니 원상은 이제 등과 배로 한꺼번에 적을 맞게 된 셈이 었다. 거기다가 원담은 원래 옛 주인의 맏아들로 당연히 자기들이 주인으로 섬겼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둘은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원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원담이 점잖게 말 했다.
“이제는 내게 항복할 게 아니라 조승상께 항복하도록 하시오.”
이에 두 장수는 원담을 따라 우선 그 영채로 함께 돌아갔다. 이윽고 조조의 군사가 이르자 원담은 여광과 여상을 데리고 조조 를 보러 갔다.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그 딸을 원담에게 출가시키기 로 하고 여광과 여상을 중매인으로 삼았다. 원담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 하늘을 함께 지지 못한다는 원수의 사 위가 되고서도 원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서 기주를 쳐서 아 우 원상을 잡아 죽이자고 조르고 나섰다. 오히려 조조가 그런 원담 을 말렸다.
“지금은 군량과 마초가 오지 않고 운반조차 힘든 형편이네. 제하 (濟河)로부터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물을 들게 하면 곡식 을 나르는 길이 열릴 것인즉, 그 뒤에야 군사를 나아가게 해야겠네.”
그러고는 원담을 잠시 평원에 있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물려 여 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조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떠나기 전 그는 여광과 여상 형제를 후(侯)로 높여 봉한 뒤 함께 데리고 갔는데 그것은 바로 원 담을 노리는 미끼였다. 그들을 이용해 아직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원담의 속을 떠보려 한 것이었다.
과연 원담은 오래잖아 그 미끼에 걸려들었다. 발단은 곽도였다. 곽도는 조조가 떠나자 가만히 원담에게 말했다.
“조조가 그 딸을 내주며 혼인을 허락한 것은 아무래도 참 마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이제는 여광과 여상까지 봉직을 내려 데려갔으니 이는 틀림없이 하북의 인심을 자기에게로 거둬들이려는 수작입니다. 그대로 두어서는 뒷날 반드시 우리에게는 화가 될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대장인 둘을 파서 몰래 여광과 여상에게 보내도록 하 십시오. 그 둘의 마음을 주공께로 되돌려 조조의 진중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내응(內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조가 원상을 깨뜨리는 즉시로 우리가 조조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지모가 밝다는 곽도의 말이라 원담은 그게 바로 조조의 미끼에 걸려드는 것인 줄도 모르고 거기에 따랐다. 장군의 도장 둘 을 파서 가만히 여광과 여상에게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여광과 여상은 이미 원씨의 사람이 아니었다. 장인(印) 을 받고 감격해 내응을 약속해오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똑바로 조조 에게로 달려갔다.
“원담이 저희 형제에게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여광 형제가 그 말과 함께 대장인을 바치자 조조가 대수롭지 않 다는 듯 껄껄 웃었다.
“원담이 몰래 장인을 보낸 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안에서 자기를 돕도록 하려는 뜻이다. 내가 원상을 깨뜨리기를 기다려 어떻게 해보 려는 수작이겠지. 그대들은 잠시 그 대장인을 받아두도록 하게. 나 도 따로이 생각이 있네.”
그러나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때부터 조조는 이미 원담을 죽일 마음을 품었다.
한편 업성으로 돌아간 원상은 심배와 더불어 앞일을 의논하며 물었다.
“지금 조조의 군사들은 백구로 군량을 운반해 들여오고 있다 하 오. 그다음은 반드시 우리 기주를 공격할 것인즉 어찌하면 좋겠소?”
“격문을 띄워 무안의 장(長) 윤해(尹楷)로 하여금 모성을 지키도 록 하시고, 다시 한편으로는 상당을 통해 곡식 나르는 길을 트게 하 시며, 또 저수의 아들 저곡(鵠)으로 하여금 한단을 지키면서 멀리 서나마 응원케 하십시오. 그런 다음 주공께서는 평원으로 군사를 내 시어 급히 원담을 치셔야 합니다. 먼저 원담을 결딴낸 뒤에라야 조 조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할 게 없다는 듯한 심배의 말이었다. 원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심배와 진림을 남겨 기주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마(馬)과 장의(張)를 선봉으로 삼아 그날 밤으로 평원 을 향해 달려갔다. 먼저 원담부터 꺾어버릴 작정이었다.
원담은 원상의 군사가 몰려오는 걸 보자 얼른 조조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반드시 기주를 얻게 되겠구나!”
그러는데 마침 허유가 들어왔다. 허창에서 조조의 진중으로 왔다 가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조조를 만나러 온 길 이었다.
“승상께서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 지키시면서 벼락이라도 떨어져 그들 원씨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허유가 충동하듯 말했다. 그도 조조처럼 이제 때가 무르익은 걸 알아본 것 같았다. 조조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생각해둔 게 있네. 걱정 말게나.”
그러고는 먼저 조홍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업성을 치게 했다. 조조 자신은 윤해가 지키는 모성이 표적이었다.
조조가 질풍같이 군사를 몰아 모성으로 달려가니 윤해는 그 경계 까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적했다. 윤해가 말을 내어 싸움을 돋우 는 걸 보며 조조가 소리쳤다.
“허중강(仲, 허저의 자)은 어디 있는가?”
이에 허저가 큰 소리로 대답하며 말을 박차고 나갔다. 허저가 똑 바로 윤해를 향해 덮쳐가자 윤해도 겁없이 맞섰다. 그러나 처음부터 윤해에게는 무리한 상대였다. 윤해는 손발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 못 하고 허저의 한칼에 두 토막이 되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대장이 그 모양으로 죽으니 남은 군사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쫓기다가 모조리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조는 다시 한단으로 군사를 돌렸다.
그곳을 지키던 저곡이 힘을 다해 맞섰으나 결과는 윤해 때와 크 게 다르지 않았다. 조조의 영을 받고 뛰쳐나간 장요와 싸우던 저곡 은 겨우 세 합을 버텨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장요는 두 말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보고 가만히 활을 꺼내 살을 먹였다. 시위 소리 나는 곳에 저곡이 화살을 맞고 말 에서 떨어졌다. 그걸 본 조조가 일제히 군사를 몰고 나아가니 저곡 의 군사는 그대로 풍비박산이 되어 흩어져버렸다.
모성과 한단을 모두 깨뜨린 뒤에야 조조는 대군을 기주로 돌렸다. 그때 조홍은 이미 성 아래에 이르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