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3화 : 마침내 하북도 조조의 품에
마침내 하북도 조조의 품에
조조는 삼군을 호령하여 성 둘레에 토산을 쌓게 하는 한편 몰래 땅굴을 파 공격하게 했다. 이때 업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은 심 배였는데 법령을 시행함에 몹시 엄했다. 한번은 동문을 지키던 장수 풍례(禮)가 술에 취해 순찰을 게을리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더니 풍 례는 거기에 한을 품고 몰래 성을 나가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조는 풍례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 성을 깨칠 수 있겠는가?”
“우뚝 솟은 성문 안쪽은 흙이 두꺼워 굴을 파 들어갈 수 있을 것 입니다.”
풍례가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여러 군데 땅굴을 파보았으나 암맥 에 막히어 애를 먹고 있던 조조에게는 천금에 값하는 정보였다. 조조는 얼른 풍례에게 명을 내려 장사 삼백 명을 이끌고 밤중에 땅굴을 파게 했다.
한편 심배는 풍례가 성을 나가 항복한 뒤로 매일 밤 스스로 성벽 위에 올라 군마를 점검했다. 그날 밤 돌문(門)에 있는 누각 위에서 바라보니 그쪽 성 밖에는 이상하게 등불 하나 없었다.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있어 여기저기 모닥불이라도 있건만 유독 그쪽만 깜깜한 것이었다.
“풍례란 자가 틀림없이 군사들을 데리고 땅굴을 파고 있을 것이다. 이쪽에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불을 밝히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심배는 그렇게 헤아리고 급히 정병(精兵)을 불러 돌을 날라오게 했다. 그리고 성안의 수문을 부수고 돌로 막으니 돌 사이로 새어나 간 물이 땅굴을 채워 풍례와 삼백 장사는 고스란히 흙 속에서 죽고 말았다.
한바탕 낭패를 본 조조는 땅굴로 성을 우려뺄 계책을 버리고 원 수(水)로 군사를 물리고 원상의 움직임을 알아보았다. 이때 원상 은 평원을 공격하다가 조조가 이미 윤해와 저곡을 깨뜨렸다는 소리 를 들었다. 조조의 대군이 둘러싸 기주가 고달퍼지는 게 두려운 원 상은 급히 군사를 돌려 기주를 구하러 가기로 했다. 부장 마연(馬延) 이 그런 원상에게 말했다.
“큰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조조의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사잇길을 취하여 서산으로 간 뒤 부수구로 뛰쳐나가 조조의 본진을 들이친다 면 틀림없이 기주성의 포위는 풀릴 것입니다.”
원상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앞서 가고 마연과 장의 두 장수로 하여금 원담의 추격을 막게 했다.
원상의 그러한 움직임은 곧 세작을 통해 조조에게 알려졌다. 조조 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만약 원상이 큰길로 온다면 나는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 나 서산의 사잇길을 따라온다면 반드시 복병을 내 한 싸움에 사로잡 을 수 있다. 원상은 반드시 횃불을 신호로 성중에 자신이 온 것을 알 릴 것이다. 나는 군사를 나누어 그를 치리라.”
그리고 거기에 따라 각기 군사를 나누어 배치했다.
과연 원상은 부수구를 나와 동으로 양평에 이르렀다. 양평정(陽平 亭)에 군사를 머물게 하니 기주에서는 십칠 리요, 한편으로는 부수 를 등진 채였다.
원상은 조조의 진채를 치기 전에 먼저 기주 성안과 군호(軍號)를 정해놓고 싶었다. 군사들에게 섶과 장작이며 마른 검불을 쌓아놓게 하는 한편 주부 이부(李孚)를 성안으로 들여보내 그 신호를 알리게 했다.
조조군의 도독으로 꾸며 무사히 기주성에 당도한 이부는 성문 아 래 이르러 크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마침 성 위에 나와 있던 심배는 이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시 간을 끌지 않고 바로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자 이부가 말했다.
“주공께서는 이미 군사를 이끌고 양평정에 와 계시오. 지금 성안 과 호응할 작정으로 적을 살피시는 중이니 만약 성안에서 군사를 내 게 되거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을 피워 신호를 하도록 합시다.”
이에 심배도 성안에 마른 풀을 쌓아두어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가 되도록 했다. 이부가 다시 꾀를 내어 말했다.
“만약 성안에 양식이 모자라면 늙고 병든 자나 부녀자를 내보내 항복게 하시오. 그러면 적은 별 의심을 않고 대비가 없을 것이오. 그 때 백성들의 뒤를 이어 군사를 내고 성을 나가 공격하면 될 것이오.”
이미 원상이 성 밖에 와 있다면 한번 써볼 만한 계책으로 여겨졌 다. 이에 심배는 이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이었다. 심배는 성 위에다 ‘기주백성투항(冀州百姓投降)’이 라 쓴 흰 깃발을 내걸었다. 하지만 어떤 조조인가. 마치 심배와 이부 가 주고받은 말을 곁에서 들은 사람처럼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것은 성안에 양식이 없어 늙은이와 부녀자를 항복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놓아서는 안 된다. 항복하는 백성들 뒤로는 반드시 적병이 따를 것이다.”
그러고는 장요와 서황에게 각기 군사 삼천을 주어 양쪽으로 매복 해 있게 한 다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성 아래로 갔다. 휘개 (摩)까지 받쳐들게 한 한가로운 행차였다.
조금 있으려니 성문이 열리더니 과연 백성들이 늙은이를 부축하 고 어린 걸 안은 채 손에 손에 흰 기를 흔들며 쏟아져 나왔다. 조조 는 속은 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백성들의 행렬이 끝나는 가 싶더니 성안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조조는 그제야 빙긋 웃으며 붉은 깃발을 한 번 흔들게 했다. 그걸 보고 미리 숨어 기다리던 장요와 서황의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나온 적병들을 덮쳤다. 꾀를 부리려다 오히려 상대편의 꾀에 걸려든 심배의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시체만 어지러이 남기고 성안으로 되쫓겨 들어갔다.
“이때다. 바짝 적을 뒤쫓아 성안으로 들라!”
조조는 그렇게 외치며 나는 듯 말을 몰아 앞장섰다. 그러나 적교 에 이르자 성안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며 그중의 한 대가 조조 의 투구에 맞았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으나 투구의 정수리 부분에 화살이 박히자 조조 자신은 물론 뒤따르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놀랐 다. 급히 조조를 구해 물러서니 그사이 심배는 적교를 걷어 올리고 성문을 닫아걸었다.
성을 우려빼기는 어렵게 되었다 싶자 조조는 다시 원상의 진채를 급습해 들어갔다. 여느 사람 같으면 투구에 박힌 화살로 가슴이 서 늘해져 머뭇거렸을 것이나 조조는 투구를 바꿔 쓰고 말을 갈아타기 바쁘게 다음 싸움으로 달려갈 만큼 재빨랐다.
조조가 오는 것을 보고 원상도 스스로 달려 나가 맞섰다. 그러나 조조의 여러 갈래 군마가 일시에 짓쳐드니 당해낼 수 없었다. 한바 탕 혼전 끝에 크게 낭패를 본 원상은 패군을 물려 서산에다 진채를 내렸다. 그리고 후군으로 오고 있는 마연과 장의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이르기를 재촉했다.
하지만 조조는 이미 그쪽에도 손을 써놓고 있었다. 원래 원상의 장수였다가 항복해 온 여광과 여상 형제를 보내 마연과 장의를 달래 게 한 일이었다. 이미 원씨의 내분에 실망하고 있던 차에 다시 옛 동 료였던 여광과 여상이 와서 좋은 말로 달래자 마연과 장의는 곧 마 음을 바꿔 먹었다. 원상에게 가서 합류하는 대신 조조에게로 가 항복해버렸다.
조조는 그들 역시 열후(列侯)에 봉한 뒤 여광, 여상과 더불어 원상의 군량 나르는 길을 끊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날로 군사를 몰아 서산에 있는 원상의 진채를 후려쳤다.
믿고 있던 마연과 장의가 조조에게 항복해버린 데다 또 조조가 있는 힘을 다해 몰려온다는 걸 알자 원상은 서산을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밤을 틈타 일구로 달아났다. 하지만 어느새 조조의 복병은 거기까지 미쳐 있었다. 원상이 미처 영채를 안돈시키기도 전에 사방에서 불길이 일며 복병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람은 갑옷 입을 틈이 없고 말은 안장 얹을 여유가 없을 지경이 라 싸움이 될 리 만무였다. 원상의 군사는 그대로 뭉그러져 다시 오 십 리를 달아났다.
원상이 겨우 정신을 차려 점고해보니 이미 더는 싸울 처지가 못 되었다. 세궁역진(勢窮力盡)이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원상은 하는 수 없이 예주 자사 음기(陰夔)를 조조의 영채로 보내 항복을 청했다. 진심으로 항복을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시간이라 도 좀 벌어볼까 해서였다.
조조는 원상의 그 같은 다급함까지 철저하게 이용했다. 거짓으로 그 항복을 받아들여주는 체해놓고 그날 밤으로 장요와 서황을 시켜 원상의 진채를 급습게 했다. 힘으로도 이미 태부족인 데다 한밤에, 그것도 마음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으니 원상의 낭패가 어느 정도 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원상은 인수(印)와 절월(節鉞)이며 병장기, 갑옷을 비롯한 온갖 치중을 고스란히 버려둔 채 몸만 빠져
중산으로 달아났다.
다시 일어나기 힘들 만큼 원상을 두들겨 쫓은 뒤에야 조조는 다 시 기주로 군사를 돌렸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주를 우려 뺄 작정이었다. 허유가 그런 조조에게 한 계책을 내놓았다.
“장하의 물은 두었다 어디에 쓰실 작정이시오? 그 물만 끌어들여 도 기주는 금세 결딴나고 말 것이외다.”
말은 경박하나 내용인즉 옳았다. 조조는 거기에 따르기로 하고 그 날로 군사를 뽑아 장하를 기주성으로 끌어들일 물길을 파게 했다. 그러나 전에 땅굴을 파들어 가다가 심배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어 이번에는 방법을 달리했다. 기주성 둘레 사십 리에 이어지는 물길이 라 어차피 심배에게 들키지 않고 일할 수는 없으니만큼 심배가 알더 라도 방심을 하도록 꾀를 쓰기로 했다.
그날 낮이었다. 심배가 성 위에서 보니 조조의 군사들이 성 밖에 서 물길을 파고 있는데 그 깊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심배는 속으로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저것은 필시 장하를 끊어 이 성으로 물을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다. 하지만 물길이 깊어야 이 성을 물에 잠기게 할 것인데 저토록 얕 게 파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고는 그 일에 별로 대비하지 않았다. 심배의 크나큰 실책이 었다.
그날 밤 조조는 낮보다 열 배가 넘는 군사를 풀어 힘을 다해 물길 의 깊이와 너비를 늘렸다. 날이 밝을 무렵이 되자 물길은 너비와 깊이가 모두 두 장(丈)이 넘었다. 그리로 장하의 물을 끌어대니 기주성 안은 곧 몇 자나 되는 물속에 잠겼다. 거기다가 양식까지 떨어져 성 안의 군사들은 고스란히 굶어 죽어가는 판이었다.
원담의 사자로 조조에게 갔다가 오히려 조조의 사람이 되어버린 신비가 보다 못해 나섰다.
“여기 너희 주인인 원상의 인수와 의복이 있다. 이미 너희 주인이 이 모양이 되었거늘 무엇 때문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 모 두 승상께 항복하여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누리도록 하라.”
신비는 창에다 원상의 인수와 의복을 꿰어 보이며 그렇게 성안 사 람들을 달랬다.
그걸 본 심배는 몹시 노했다. 마침 기주성 안에 남아 있던 신비의 가솔 팔십여 명을 성 위로 끌어내 목 벤 뒤 성 밖으로 그 목을 내던 졌다. 그것은 신비에 대한 징벌인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의 를 강렬하게 표명한 것이기도 했다. 눈앞에서 가솔들의 목이 하나하 나 떨어지는 걸 보고 신비는 통곡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데 심배의 조카 중에 심영(榮)이란 사람이 있었다. 평소부 터 신비와 매우 가까이 지냈는데 심배가 그 가족을 참혹하게 죽이는 걸 보자 원한을 품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심배의 그 같은 행동에서 이미 죽음을 각오한 자의 발악 같은 것을 보고 자신은 삶의 길을 찾 아보려 한 것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영은 안에서 성문을 열어 주겠다는 글을 쓴 뒤 화살에 매달아 성 아래로 쏘아 보냈다. 그 글을 주운 군사가 신비에게 갖다 바치고 신비는 또 조조에게 그 글을 바 쳤다.
읽고 난 조조는 먼저 장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기주성 안에 들어가더라도 원씨 집안 사람이라면 늙고 젊고 간에 결코 죽여서는 아니 된다. 또 군사와 백성들도 항복한 자는 반드시 살려주어라. 이 명을 어기는 자는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목을 베리라!”
그런 다음 비로소 기주성으로 짓쳐들 채비들을 하게 했다.
다음 날이 밝았을 무렵이었다. 심영은 미리 알린 대로 서문을 활 짝 열어젖히고 조조의 군사를 맞아들였다. 원한에 눈이 뒤집힌 신비 가 먼저 말을 박차 성안으로 뛰어들고, 그 뒤를 조조군의 장졸들이 물밀듯 짓쳐들어갔다.
이때 심배는 동남쪽에 있는 성루 위에 있었다. 조조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온 걸 보자 몇 기 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 로 내려와 죽기로 싸우려 들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심배가 먼저 맞 닥뜨린 것은 다름 아닌 맹장 서황이었다. 원래도 무예에 그리 능하 지 못한 심배고 보면 결과는 뻔했다.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서 황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심배를 끼고 성을 나오던 서황은 도중에 신비를 만났다. 신비가 이를 북북 갈며 피맺힌 소리를 냈다.
“이 미친 살인귀야, 이제 너도 한번 죽어보아라!”
그러나 심배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큰 소리 로 신비를 꾸짖었다.
“이 더러운 도적놈아, 조조를 끌어와 우리 기주를 깨친 네놈을 죽 이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심배의 그 같은 태도는 조조를 대할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서황이 조조 앞으로 심배를 끌고 가자 조조가 물었다.
“그대는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들인 자가 누군지 아는가?”
“모른다.”
심배가 꿋꿋하게 대답했다. 조조가 빈정대듯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조카 심영이었다. 그가 서문을 우리에게 바친걸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어린 놈의 행실이 막돼먹었다 했더니 끝내 여기에 이르렀구
나. 그놈은 사람도 아니다!”
그 말에 조조가 다시 빈정대듯 물었다.
“전에 내가 성 아래 이르렀을 때 성안에 웬 활과 쇠뇌가 그리도 많았던가?”
전에 조조가 백성을 미끼로 성에서 나온 기주 군사를 되받아치며 그 틈에 성안까지 뛰어들려다 활과 쇠뇌에 죽을 뻔했던 일을 가리키 는 말이었다. 사로잡혀 와 있는 마당이라 조조의 그 같은 말이 섬뜩 하게 들릴 법도 하건만 심배는 오히려 더 기세를 냈다.
“그때 더 많은 화살을 네게 퍼붓지 못한게 한이다.”
“그건 그렇고 그대는 원씨들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저들이 받아들 여주지 않아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떤가? 내게 항복해 함께 일해보지 않겠는가?”
“아니 될 말, 결코 항복할 수 없다.”
심배가 결연히 대답했다. 이때 신비가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조조에게 말했다.
“저희 가솔 팔십여 명이 모두 저 도적놈의 손에 죽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저놈을 토막 내어 이 크나큰 한을 씻어주십시오.”
조조가 심배의 재주를 아껴 혹시라도 살려둘까 두려웠던 것이다. 조조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심배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원씨의 신하요, 죽어서도 역시 원씨의 귀신이 될 뿐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너희 같은 무리와 같을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이 목을 쳐라!”
그 말을 듣자 조조도 그를 단념하고 끌어내게 했다. 형(刑)을 받는 심배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형리가 남쪽으로 향해 앉게 하 자 심배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주인이 북쪽에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나를 남쪽을 향해서 죽게 하느냐? 나를 북쪽으로 앉게 하라!”
그러고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뒤 길게 목을 늘여 칼을 받았 다. 전풍이나 저수 같은 이들과 화합하여 대국을 잘 이끌어가지 못 한 일이나 원소의 맏아들 원담을 제쳐놓고 셋째 원상을 내세움으로 써 집안싸움을 일으킨 점은 문제가 있으나 한번 정한 주인을 저버리 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실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뒷사람이 그를 애석하게 여겨 시를 지었다.
하북에 이름 난 선비 많으나 河北多名士
심배만 한 이 누가 있는가 誰如審正南
어리석은 주인 만나 죽건만 命因昏主要
그 충성 옛사람에 섞일 만하다. 心與古人參
충직한 말 숨김 없었고 忠直言無隱
깨끗한 재주 탐심이 없었다. 廉能志不貪
죽음에 이르러 오히려 북쪽을 향하니 臨亡猶北面
항복하여 살아남은 자 모두 부끄러워라. 降盡
어쩔 수 없어 심배를 죽이기는 하였으나 조조는 그 충성되고 의 로움을 어여삐 여겨 성 북쪽에다 후히 장례 지내주게 했다. 그때 기 주성을 완전히 우려뺀 여러 장수들이 달려와 조조에게 성안으로 들 기를 청했다. 조조가 막 성안으로 들어가는데 창칼을 든 군사들이 한 사람을 에워싸고 끌어왔다. 조조가 보니 바로 진림(陳琳)이었다. 전에 원소 아래서 조조를 꾸짖는 저 유명한 격문을 쓴 적이 있어 그 죄를 크게 본 군사들이 특히 사로잡아 끌고 오는 길이었다.
“그대는 전에 격문을 쓰면서 나의 죄만 따질 것이지 어찌하여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했는가?”
조조가 짐짓 매서운 얼굴로 물었다. 진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화살이 시위에 올려진 이상 날아가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나 자신의 글은 원소의 활시위에 얹혀진 화살과 같은 것으로 원소가 조조를 향해 쏘면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었다. 한낱 글의 장인(匠人)으로서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화살을 대 듯 글을 빌려주었다는 말도 되고, 자신의 처지가 바로 그 화살 같았 다는 말도 되지만 어쨌든 재치 있으면서도 씁쓸한 대답이었다. 재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비유로 가볍게 자신의 책임을 벗어던진 까닭이 요, 씁쓸하다는 것은 힘 앞에서 종종 자신의 진의眞意)에 관계 없이 글을 빌려주어야 하는 문사의 처지를 너무도 부끄럼 없이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진림의 그 같은 대답에 조조를 둘러싸고 있던 장수들이 먼저 술렁거렸다.
“저자는 원소를 위해 승상의 조상까지 욕한 자입니다. 죽여서 본보기를 삼아야 합니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조조는 진림의 글재주 가 아까웠다. 잠깐 생각하다 조용히 물었다.
“나는 너와 너의 글을 이번에는 내 활시위에 얹으려 한다. 원소를 위해 했던 것처럼 나를 위해서도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주겠느냐?”
세상의 원한 중에서 얼른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무섭고 끈질긴 것 중의 하나는 글로 맺어진 원한이다. 그런 점에서는 놀랄 만한 조조 의 아량이며, 한편으로는 비정하리만큼 현실적인 조조의 정치 감각 이었다. 진림이 그 같은 조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승상께서 써주신다면 재주를 다해 받들 뿐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종사로 삼았다.
이때 조조의 아들 조비도 나이 열여덟으로 아비를 따라 출정했다 가 함께 기주성으로 들어갔다. 조비는 자를 자환(桓)이라 썼는데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많았다. 태어나던 날도 푸르고 자주색을 띤 구름이 둥그런 수레덮개 모양으로 산실(室)을 떠돌며 하루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구름 같은 기운을 본 자가 있어 조조에게 가만히 일러주었다.
“이것은 천자의 기운입니다. 아드님의 귀히 됨은 말로 다할 수 없 을 것입니다.”
자라면서도 조비가 보여준 재주는 놀라웠다. 여덟 살에 이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오래잖아 고금을 통해 두루 막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빼어난 자질을 보여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했으며 칼쓰기 또한 매우 좋아했다.
조조는 아들들을 어릴 때부터 전장에 데리고 다녔는데 특히 맏아 들 앙(昻)이 장수와의 싸움에서 죽은 뒤로는 둘째 비(조)를 항상 곁 에 두었다. 이번에도 조비는 아비를 따라왔다가 성이 떨어지자 앞서 달려들어간 것이었다.
“원소의 집이 어디냐?”
조비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먼저 원소의 집부터 찾았다. 백성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원소의 집 쪽을 가리켰다.
질풍같이 말을 달려 원소의 집에 이른 조비가 칼을 빼어들고 말 에서 내리니 장수 하나가 막아서며 말했다.
“승상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원소의 집 안으로는 아무도 들여보내 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그를 꾸짖어 물리치고 칼을 뽑아든 채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무리 조조의 명이 엄하다 해도 그 맏아들인 셈인 조비가 하는 짓이니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조비가 후당으로 들어가니 두 부인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조비가 칼을 빼어들고 원소의 집으로 뛰어든 것은 그들 일 족에 대한 오랜 원한 때문이었다. 아버지 조조가 그들 때문에 겪는 고통과 손실을 곁에서 보아오는 동안 그의 원한은 아버지보다 더 크고 깊게 자라 있었다.
그런 조비이다 보니 아낙네라 해서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칼을 들 어 막 찍으려 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붉은 빛 같은 것 이 번쩍하며 두 눈 가득 찔러오는 게 있었다. 두 부인 중 하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으로, 조비는 순간 까닭 모르게 손목에서 힘이 빠져 칼을 내리고 좀 나이 든 쪽을 향해 더듬거리듯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원장군의 처인 유씨(劉氏)올시다.”
나이 든 부인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원상의 어미인 그 유씨였다. 조조는 다시 그 곁에 있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냐?”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처인 진씨(甄氏)올시다. 원희가 유주를 지키러 가자 저 아이는 멀리 가는 게 싫어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습 니다.”
그제서야 조비는 그 젊은 부인 곁으로 끌리듯 다가갔다. 경황중이 라 거친 옷에 얼굴은 흙먼지를 덮어쓰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그러나 까닭을 알 수 없는 힘이 조비를 끌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헤 치고 소매로 그 얼굴의 흙먼지를 닦게 했다. 옥으로 깎은 듯한 살결 에 꽃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실로 나라 를 기울게 할 만큼 미인이었다.
조비는 비로소 조금 전 자신의 눈을 어지럽게 했던 그 빛이 무엇 이었는지 짐작할 만했다. 산발한 머리 틈으로 별빛처럼 새어나온 그 눈빛이 열여덟 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그토록 현란하게 비쳤음에 틀림없었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진씨의 미모는 정말로 전대의 서시(西施)나 왕소군(王昭君)에 비해 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조는 진씨를 본 뒤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아들 조비에게 주면서도 측근에게 아까운 듯 말했다고 한다.
“이번 싸움은 비(조) 그놈을 위해 한 것 같군!”
또 삼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인 조비의 동생 조식도 그 형수를 사모하여 그의 작품 중의 어떤 것에는 그 감정이 숨김 없이 드 러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비는 한 전리품으로 생각해도 좋을 그녀를, 그것도 한번 남의 아내였던 여자를 일생 사랑했으며 뒷날에는 황후로까지 올려세우고 또 그녀의 아들로 태자를 삼았다.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일들 이다.
어쨌든 조비는 진씨를 보자마자 무엇에 홀린 듯 칼을 칼집에 되 꽂은 뒤, 전보다 더 심하게 더듬거리며 그 두 여인을 안심시켰다.
“나는 조승상의 아들이다. 그대들 집을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그러고는 스스로 마루에 올라 그녀들을 지키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조조도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기주성 안으로 들고 있었다. 막 성문을 지나는데 허유가 말을 달려오더니 채찍으로 성문을 가리 키며 큰 소리로 조조를 불러 우쭐거렸다.
“아만阿아, 네가 나를 얻지 못했으면 어찌 이 성문으로 들 수 있었겠느냐?”
아만이란 조조의 어렸을 적 이름이었다. 어릴 때부터의 친구였던 허유로서는 감격에 겨워 한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으나 아랫사람들 에게 둘러싸여 있는 조조의 위엄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경박한 말 이었다. 거기다가 그 말 속에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데가 있어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불끈했다. 오소를 급습하도록 권해 관도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이나 장하의 물을 끌어들이도록 권한 것이 기주성을 떨어뜨리는 데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하북을 얻은 것이 허유 한 사람의 공일 수만 있겠는가. 그러나 조조는 크게 웃을 뿐 그런 허유의 방자함을 나무라지 않았다. 조조가 먼저 찾은 곳도 원소의 집이었다.
“누가 벌써 들어갔느냐?”
원소의 대문 앞에 이르러 누군가 미리 들어간 사람이 있음을 느낀 조조가 지키는 장수에게 물었다. 그 장수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큰 공자(公, 원문에는 세자로 되어 있으나 이때 조조는 아직 위왕이 되 지 않았음)께서 안에 계십니다.”
그 말에 조조는 조비를 불러내 꾸짖었다.
“너는 어찌하여 내 명을 어기고 함부로 이 집 안에 들어왔느냐?”
그때 원소의 처 유씨가 주르르 달려 나와 엎드리더니 조비를 대 신해 빌며 말했다.
“큰 공자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 집 안은 보전되지 못했을 것입 니다. 바라건대 제 며느리 진씨를 큰 공자님께 바쳐 비질이나 쓰레 질에라도 쓰이게 하고 싶습니다.”
그 같은 유씨의 말에 조조는 절로 노기가 가셨다. 얼굴을 대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한때 자신과 맞서 천하를 다투던 원소의 아내가 비는 것이라 그런 것 같았다. 거기다가 며느리를 바치겠다니 우선은 진씨란 여자가 궁금하기도 했다.
조조는 진씨에 대해 몇 마디 물은 뒤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러 나 한번 보기나 하자는 기분으로 진씨를 불렀던 조조는 그녀를 보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냈다.
“참으로 내 아들의 지어미가 될 만하구나!”
그리고 두 말 없이 조비가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아 들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이미 알고 난 이상 말 릴 수도 없고 말려서도 안 되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기주가 대강 안정되자 조조는 몸소 원소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드린 후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 곡을 하는데 듣기에도 몹시 슬퍼서 내는 곡소리였다.
곡이 끝난 뒤 조조는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옛일을 얘기했다.
“지난날 나와 원본초(袁本初)가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 본초는 내게 물었다. 만약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느 곳이 근거를 삼아 뜻을 펴볼 만하겠는가? 하고. 그때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자 본초는 말했다. 나는 남으로 하북을 근 거로 하여, 연(燕)과 대(代)로 울타리를 삼고, 북으로 사막에 흩어져 사는 무리까지 아우른 뒤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천하를 다툴 작 정이네.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이에 내가 대답했다. 나는 천하의 슬 기와 힘을 모아 도리에 맞게 다스려가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하필 땅의 위치나 넓이겠는가?
우리가 그런 말을 주고받은 게 어제 같은데 이미 본초는 죽고 없으니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구나!”
그리고 다시 비 오듯 눈물을 흘리자 함께 있던 이들이 모두 슬퍼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뒷사람의 해석은 대개 조조에게 이롭지 못 하다. 기껏해야 간웅의 눈물이요, 더 나쁘게는 고양이 쥐 생각이라 거나 아니면 이긴 자의 뒤틀린 거드름 정도로 여길 뿐이다.
아무리 『연의』의 저자들이 한 방향으로만 몰아댄 탓이라고는 하 지만 지나치다. 엄밀한 의미에서 원소야말로 조조 일생의 가장 큰 적이었다. 뒷날의 촉(蜀), 오(吳)가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멀리 변방 에 치우치고 혹은 대강(大江)을 격해 적어도 조조 생전에는 별로 중 원을 위협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소는 중원의 목줄기를 껴누르듯 하 북에 버티고 앉아 십여 년이나 두렵고 고통스런 싸움을 걸어왔다. 한 적과 오래 싸우다 보면 쌓이는 미움 못지않게 정도 자란다. 거기 다가 그들은 젊은 날부터의 친구였고 때로는 좋은 동맹군이었다. 조 조가 원술이나 여포 같은 강적과 싸우고 있을 때 원소가 북방에서 공손찬을 견제해주지 않았던들 어찌 조조에게 그 같은 뒷날이 있었 겠는가. 따라서 조조가 원소를 위해 흘린 눈물은 어떤 면에서든 진 실할 수도 있었다.
원소의 묘에 크게 제사를 드린 조조는 그 처 유씨에게 비단과 곡 식을 내려 뒤를 돌보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영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했다.
‘하북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가 병란(兵亂)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해는 모든 부역과 조세를 면해줄 것이니 각기 생업에 힘쓰라.’
그런 한편 조정에 표를 올려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을 맡아 머물 렀다. 아직 원담과 원상이 살아 있어 마음 놓고 허도로 돌아갈 수 없 는 까닭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허저가 말을 타고 동문으로 들어가 다가 허유를 만났다. 전부터 기주를 온통 제 힘으로 뺏은 듯 떠들고 다니던 허유는 또다시 허저를 보고 경박한 입을 놀려댔다.
“내가 없었더라면 너희들이 어찌 이 문을 멋대로 드나들 수 있었겠느냐?”
그 말에 전부터 허유를 고깝게 여기던 허저가 불끈했다.
“우리가 천 번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피를 뒤집어쓰고 싸워 빼앗은 성이거늘 그게 무슨 소린가? 그대가 어찌 감히 그토록 공을 떠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만하면 입을 다물 만도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허유는 오히려 허저를 욕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모두 하잘것없는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한들 어찌 알아듣겠느냐!”
이미 명이 다했는지 그런 허유의 눈에는 성이 날 대로 나 터럭이 올올이 치솟은 허저의 모습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듯했다. 마침내 허 저는 더 참지 못했다.
“이놈,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 한마디와 함께 칼을 뽑아 허유를 내리쳤다. 일찍이 내로라하던 장수도 받기 어렵던 허저의 한칼을 받았으니 허유의 목이 성할 리
없었다. 한 줄기 피가 솟으며 허유의 목이 박덩이처럼 땅바닥을 굴 렀다.
허저는 그 길로 허유의 목을 들고 조조에게 찾아가 사실을 고했 다. 다 듣지 않아도 조조는 일의 경과를 알 만했다. 그러나 몇 마디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해서 무장들이 함부로 문신들을 죽여서는 큰 일이라 여겨 짐짓 엄하게 허저를 꾸짖었다.
“자원)은 나의 옛 친구인 까닭에 나와도 서로 우스갯소리를 해온 터다. 그런데 네가 어찌 함부로 죽였느냐?”
그러고는 다시 좌우에 명하여 허유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었다. 허유가 원래 원가의 사람이라 어떻게 보면 실컷 이용만 하고 죽인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조조가 다시 명을 내렸다.
“널리 기주를 둘러보고 어진 선비가 있으면 천거토록 하라.”
그러자 기주의 백성들이 입을 모아 한 사람을 천거했다.
“전에 기도위를 지낸 최염(崔)이란 이가 있는데 지혜롭고도 어 질기로 이름났습니다. 일찍이 원소에게 여러 번 좋은 계책을 올렸으 나 원소가 따르지 않자 병을 핑계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습니다.”
최염은 자를 계규(季)라 하며 청하 동무 땅 사람이었다. 조조는 천거하는 말을 듣자마자 최염을 불러들이고 본주(本州) 별가사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가까이 불러 마주 앉은 뒤 무심코 말했다.
“내가 어제 본주의 호적을 들쳐보니 인구가 모두 삼십만이나 되었소. 실로 큰 주라 할 만하오.”
그 말을 최염이 정색을 하고 받았다.
“지금 천하는 나뉘어 무너져가고 구주(州)는 갈가리 찢기었습니 다. 거기다가 원가의 두 형제가 서로 싸워 기주 백성들의 원통한 뼈 는 들판에 널려 있습니다. 승상께서 하실 일로 급한 것은 백성의 풍 속을 물으시는 게 아니라 그들을 도탄에서 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데도 먼저 호적부터 살피시니 그게 어찌 이곳 백성들이 명공께 바라 는 일이겠습니까?”
자못 준엄한 일깨움이었다. 조조도 그 말을 듣자 얼굴빛을 바꾸어 자신의 그릇됨을 빌며 최염을 상빈(上賓)으로 모셨다. 그 뒤로 조조 가 기주 백성들의 살이에 더욱 마음을 썼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대강 기주가 안정되자 조조는 사람을 보내 원담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조조에게 항복하여 아우 원상을 기주에서 내 쫓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그 무렵에는 어디로 갔는지 원담의 모습 이 보이지 않았다.
원담의 소식은 곧 알려졌다. 그때 원담은 군사들을 데리고 감릉, 안평, 발해, 하간 등을 휩쓸며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제딴에는 아직 조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아비의 옛 땅을 돌며 힘을 긁어모으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조조에게 쫓기는 원상이 중산으로 도망쳐 왔다 는 말을 듣자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손톱에 박힌 가시는 알아도 염통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더니 원담이 바로 그랬다. 발 딛고 설 기 주가 없어진 마당에도 분하고 미운 것은 다만 제자리를 뺏은 아우일 뿐이었다.
조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원상이라 싸울 마음이 남았을 리없었다. 한번 저항해보지도 않고 저 혼자 유주에 있는 형 원희에게 로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우두머리를 잃은 원상이 거느리던 무리는 모조리 원담에게 항복해버렸다.
갑자기 크게 세력이 불어난 원담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제야 조조 에게 빼앗긴 아비의 기업을 되찾고 싶었다. 그때 조조가 사람을 보 내 원담을 불렀다. 원담이 바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품는 걸 막기 위 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바꿔 먹은 원담은 조조가 불러도 가지 않았 다. 크게 노한 조조는 곧 글을 써서 전에 사위 삼기로 한 일을 없었 던 것으로 한 다음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원담을 치러 나섰다.
원담은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은근히 두려웠다. 세력이 불어났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조조와 그냥 맞서서는 이겨 낼 자신이 서지 않았다. 이에 원담은 형주로 사람을 보내 유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표는 원담의 청을 받자 유비를 불러 들어줄 것인가 아닌가를 물었다. 유비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이제 조조는 이미 기주를 깨뜨려 그 병세가 바야흐로 크게 떨치 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씨 형제는 오래잖아 반드시 조조에게 사로잡 힐 것이니 구해줘봤자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조조는 언 제나 우리 형주와 양주를 엿보는 마음을 가져왔으니 오히려 대비할 일은 그것입니다. 군사를 기르며 스스로 지킬 때지 함부로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거절하겠소?”
유표가 난처한 듯 유비에게 다시 물었다. 유비가 어렵잖다는 듯 말했다.
“원씨 형제에게 서로 화해하라는 핑계로 슬며시 구원을 거절하시면 될 것입니다.”
유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먼저 원담에게로 글을 보냈다.
‘군자는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원수의 나라로는 가지 않는 법이외 다. 그런데 일전에 들으니 그대는 조조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하였소. 이는 돌아가신 부친의 원수를 잊어버림이요, 형제의 정을 돌아보지 않음이며, 뜻을 함께하는 이를 저버린 부끄러운 짓이었소. 기주의 원상이 아우로서 할 짓을 않았다 해도 마땅히 참고 따라, 먼저 큰일을 이룩한 뒤에 천하로 하여금 그 옳고 그름을 가리게 하 는 것이 또한 의에 맞는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다음에는 원상에게 글을 보냈다.
‘청주의 원담은 천성이 급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함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는 먼저 조조를 쳐 없애 돌아가신 부친의 한을 씻 어드린 뒤에 그 옳고 그름을 따졌어야 했소. 그런데 형제가 서로 싸 워 조조에게 몰리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한로(韓盧)와 동곽(東郭)이 저희끼리 싸움에 먼저 지쳐 밭 가는 농부에게 사로잡히게 된 꼴과 무엇이 다르겠소이까?’
한로는 한자로(韓子盧)라고도 하는데 한나라에서 나던 검둥개로 천하에서 가장 빨리 달리기로 이름났고, 동곽은 동곽준(東郭)이라 고도 하는데 제나라 성곽 동쪽에 살던 꾀 많기로 이름난 토끼다. 한 로가 동곽을 쫓아 산을 세 개나 맴돌고 산마루를 다섯 개나 넘다 보 니 함께 지쳐 끝내 둘 모두 죽고 말았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힘 안 들이고 둘 모두를 차지했다.
유표는 원담과 원상의 다툼을 한로와 동곽에 빗대 나무라고 있는 셈이었다. 원담은 유표가 보낸 글을 보고 그가 군사를 내 도와줄 뜻 이 없음을 알았다. 혼자 힘으로는 조조의 군사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겨 평원을 버리고 남피로 물러나 지키기로 했다.
조조가 남피에 이르니 날씨가 매우 차 강물이 모두 얼어붙었다. 강이 얼어서는 군량을 운반할 길이 없는지라 조조는 그곳 백성들을 시켜 얼음을 깨고 군량 실은 배를 끌게 하라 영을 내렸다. 그러나 그 영(令)을 들은 백성들은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배를 끄는 일이 싫어 모두 달아나버렸다.
“달아난 놈들은 모두 잡아 목을 베어라!”
성이 난 조조가 다시 그렇게 영을 내렸다. 잠시 몸을 피했다 돌아 오면 될 줄 알았던 그곳 백성들은 그 소문을 듣자 더럭 겁이 났다. 모두 숨었던 곳에서 나와 조조의 영채로 몰려가서는 목숨을 빌었다.
“만약 너희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 군령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모두 죽이면 이번에는 내가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 되 고 만다. 하는 수 없다. 너희는 지금 빨리 산속 깊이 숨어 내 군사들 에게 붙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다시 붙들려 올 때는 나도 너희들을 구해줄 수 없다!”
법가와 유가의 원리를 교묘하게 배합한 조조의 멋진 처신이었다.
이에 백성들은 고단한 도망길에 들어서면서도 한결같이 조조의 너 그러움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