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4화 : 다섯 관(關)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다
다섯 관(關)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다
급히 수레를 몰고 말을 달린 관공(여기서부터 관우의 호칭을 『연의』에 서 쓰는 대로 관공으로 한다. 벼슬은 후에 올랐고, 단기천리로 충의의 절정을 보여주므로)의 일행은 오래잖아 북문에 이르렀다. 문을 지키던 관리 가 막으려 들었으나 관공이 성난 눈길로 청룡도를 쳐들자 질겁을 하 고 달아나버렸다.
별다른 일 없이 북문을 빠져나오자 문득 관공이 따르는 무리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먼저 수레를 호위하여 앞으로 나가거라. 뒤따르는 자가 있으면 내가 모두 막을 터이니 두 분 형수님을 놀라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에 늙은 군사들은 관공을 뒤에 남겨둔 채 수레를 밀고 급히 큰길로 나아갔다. 한편 그때 조조는 여러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놓고 관공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사람이 관공이 보낸 것이라 하며 글 한 통을 가져왔다.
“운장이 기어이 가버렸구나!”
얼른 글을 읽어본 조조가 그렇게 탄식했다. 그때 이번에는 북문을 지키던 군사들의 우두머리가 급한 전갈을 보내 왔다.
“관공이 문을 앗아 달아났습니다. 수레와 스무남은 명을 이끌고 있었는데 모두 북쪽을 향해 갔습니다.”
그 전갈에 모여 있던 이들은 모두 놀랐다. 그런데 다시 관공의 거 처에 가본 사람이 알려왔다.
“관공은 승상께서 내리신 금은과 재물들을 고스란히 창고에 봉 해두고 미녀 열 사람도 모두 내실에 남겨두었습니다. 한수정후의 인 은 당상에 걸어두고 그밖에 승상께서 보내신 사람들은 아무도 데려 가지 않은 채 원래 데려왔던 자들만 보따리를 싸 따르게 했을 뿐입 니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장수가 내달으며 소리쳤다.
“제게 철기 삼천만 주십시오. 관우를 사로잡아 승상께 바치겠습 니다.”
조조가 그 장수를 보니 채양(陽)이란 자였다. 원래 조조의 장수 들 중에서 장요와 서황은 관공과 교분이 두터웠고 다른 장수들도 모 두 관공에게 경복(敬服)하는 터였으나 오직 채양만이 관우를 대수롭 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관공이 갔다는 말을 듣고도 다른 장수들은 모두 가만히 있는데 유독 그만 쫓아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옛 주인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고 감이 분명하니 관공이야말로 참으로 장부다. 너희들은 모두 그를 본받아야 한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채양을 꾸짖어 물리쳤다. 정욱이 그런 조조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그를 그토록 두터이 보살폈건만 그는 작별조차 고하 지 않은 채 어지러운 글만 남기고 떠났으니 이는 승상의 크신 위엄 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 죄가 적지 않은 데다 또 이제 그가 원소에게 돌아가도록 버려둔다면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더하는 격이 됩 니다. 따라서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좋겠습니다.”
“관공의 떠남은 내가 전날 이미 허락한 일이오. 사람이 어찌 믿음 을 저버릴 수가 있겠소?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니 뒤쫓아 서는 아니 되오.”
조조가 정욱의 말에 그렇게 답한 뒤 장요를 보고 말했다.
“운장은 금은을 봉해놓고 한수정후의 인을 걸어둔 채 떠났으니 재물로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벼슬로도 그 뜻을 옮기게 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내가 우러르고 싶은 사람이다. 생각건대 그는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뒤따라 마지막으로 내 정을 보이고 싶으니 그대는 먼저 가서 잠시만 머무르라 이르라. 길 가면서 쓸 재물과 옷 한 벌을 내려 뒷날의 정표로 삼고자 한다.”
그 같은 조조의 명에 장요는 단기(單騎)로 관공을 뒤쫓았다. 잠시 후 재물과 의복을 마련케 한 조조도 수십 기만 데리고 관공을 찾아 나섰다.
원래 관공이 탄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였다. 뒤쫓는다고 될 일이 아니나 두 부인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가는 길이라 함부 로 닫지 못하고 천천히 가는 바람에 장요는 쉽게 뒤쫓을 수 있었다.
“운장께서는 잠시만 걸음을 늦추시오!”
저만큼 관공의 일행이 보이자 장요가 크게 소리쳤다. 관공은 장요 가 말을 박차 달려오는 걸 보자 먼저 걱정이 됐다. 따르는 무리에게 수레를 재촉해 대로로 급히 달리게 하고 자신은 청룡도를 꼬나든 채 적토마를 달려 장요를 막아 섰다.
“문원은 나를 뒤쫓아 다시 승상께로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관공이 그같이 묻자 장요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승상께서는 형이 먼 길을 떠나셨단 말을 듣고 몸소 배웅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특히 나를 먼저 보내 잠시 수레를 멈추도 록 청하게 하셨을 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겠소. 하지만 만약 승상이 철기를 거느리고 온다 면 나는 한판 죽기로 싸워볼 것이오.”
관우는 그렇게 대답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혼자서 여럿을 대적하기 좋은 다리목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잖아 조조가 수십 기를 이끌고 나는 듯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등 뒤를 따르는 것은 허저, 서황, 우금, 이전 등의 장수들이었다.
조조는 관우가 말을 탄 채 다리 위에 서 있는 걸 보고 자신을 의 심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함께 온 장수들에게 말을 멈추고 좌우로 벌려 서게 했다. 장수들의 손에 병장기가 없는 걸 보고서야 관공도 조금 마음을 놓는 듯했다.
“운장은 어찌 그리 서두르시오?”
조조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관공은 말 위에서 몸을 굽혀 예를 표한 뒤 대답했다.
“이 관아무개는 전에 일찍이 승상께 말씀드린 대로 하고 있을 뿐 입니다. 이제 옛주인께서 하북에 계시다니 제가 어찌 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차례 승상부로 갔으나 승상을 뵈올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글을 올려 작별을 대신하고 떠났습니다. 그동안 승 상께서 내리신 금은은 모두 창고에 봉해두고 인수도 당상에 걸어두 고 왔으니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지난날의 약조를 잊지 마시고 저를 이대로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천하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오. 어찌 지 난날의 약조를 저버릴 수 있겠소? 다만 장군께 길 가는 동안 모자 람이 있을까 걱정되어 약간의 노자를 드리고 보내려 할 뿐이외다.”
그러고는 뒤따르던 이로 하여금 마련해 온 황금 한 쟁반을 관공 에게 올리게 했다. 관우가 사양했다.
“이미 여러 번 은덕을 입어 아직 남은 재물이 약간 있습니다. 이 황금은 남겨두었다가 장사들에게 상으로 내리십시오.”
“작은 재물이나 장군이 세운 큰 공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내리는 것인데 어찌 이렇게 마다하시오?”
조조가 다시 그렇게 권했으나 관우는 끝내 고개를 젓는다.
“구구하고 보잘것없는 노력이었을 뿐입니다. 새삼 입에 올릴 가치조차 없으니 거두어주십시오.”
그러자 조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장은 천하의 의사이나 한스럽게도 내 복이 엷어 붙들어두지 못하는구려. 황금은 그렇다 쳐도 이 금포 한 벌만은 거두어주시오. 간략하게나마 한 조각 내 정성을 표하고 싶소이다.”
그리고 한 장수로 하여금 두 손으로 금포를 관공에게 받쳐 올리 게 했다. 관공은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변이 있을까 두려워 청룡도 끝으로 옷 보퉁이를 꿰 어 받은 다음 금포를 꺼내 몸에 걸쳤다.
“승상께서 내리신 금포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다른 날 다시 뵈 옵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윽고 관공은 그 말과 함께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조조가 연 연한 눈으로 보는 사이에 부연 흙먼지를 날리며 말을 몰아 북쪽으로 사라졌다.
“저자의 무례함이 너무 심합니다. 어찌 사로잡지 않으십니까?”
관공이 하는 양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허저가 마침내 참지 못 하고 그렇게 불평했다. 조조가 그런 허저를 달랬다.
“저는 한 사람이고 우리는 여남은 명이나 되니 어찌 의심이 나지 않겠는가? 내가 이미 허락했으니 뒤쫓아서는 아니 되네.”
관공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칼 끝으로 금포를 받은 걸 대신 변 명해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와 함께 돌아오는 길 위에 서도 내내 관공을 생각하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조의 정신적인 크 기이다. 어쩌면 관우의 드높은 의기가 그토록 화려하게 꽃필 수 있 었던 것은 조조란 거인이 마련해준 격려의 기름진 토양 위에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는지.
한편 조조와 작별한 관공은 적토마를 몰아 삼십 리를 달렸으나 두 부인을 태운 수레와 일행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관공은 거 기서 더 나아가기를 그치고 사방을 뒤지듯 찾아보았다. 한참을 이리 저리 헤매고 있는데 홀연 어떤 산 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관장군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관공이 소리나는 쪽을 보니 누런 수건을 머리에 띠고 비단옷을 입은 청년 장수 하나가 창을 끼고 말을 달려오는데 안장에는 사람의 목 하나가 걸려 있고 뒤로는 백여 명의 보졸이 따랐다. 가까이 다가 온 그에게 관공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자 청년은 창을 버리고 말에서 내리더니 땅에 엎드려 절했다. 관공은 혹시 속임수가 있을까 두려워 청룡도를 힘주어 잡으며 다시 물었다.
“장사는 누군가? 바라건대 이름부터 대도록 하라.”
그제서야 청년이 대답했다.
“저는 양양 사람으로 이름은 요화(化)요, 자는 원검(元)이라 씁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매 무리 오백여 명을 모아 도적질로 살아가 고 있었는데 조금 전 한패인 두원(杜遠)이란 자가 산을 내려갔다가 잘못하여 두 부인을 잡아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 두 분을 뒤따르다 잡혀온 이들에게 제가 물으니 두 분은 바로 대한의 유황숙님의 부인 들이며 장군께서 이곳까지 호송해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두 부인을 모시고 산을 내려와 장군을 뵈려 했으나 두원이란 자가 불손한 말로 가로막기에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이제 그 목을 장군께 바침과 아울러 두 부인을 놀라게 한 죄를 빌고자 합 니다.”
“두 부인은 어디에 계신가?”
관공은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며 급히 물었다. 요화가 송구한 듯 대답했다.
“지금 산채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얼른 모시고 내려오도록 하라.”
관공이 다시 그렇게 재촉했다. 그러자 오래잖아 또 다른 백여 명이 두 부인이 탄 수레를 겹겹이 둘러싼 채 그곳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린 관공은 청룡도를 세워둔 채 두 손을 모으고 수레 앞 에 나가 문안을 드리며 물었다.
“두 분 형수님께서 놀라시지나 않으셨습니까?”
“만약 요장군이 돌보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미 두원에게 욕 을 보았을 것입니다.”
두 부인은 아직도 놀람과 두려움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떨리는 목 소리로 대답했다. 대강 요화의 말과 같으나 그래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관공이 이번에는 부인을 모시고 있던 군사들에게 물었다.
“요화가 어떻게 두 부인을 구했느냐?”
“두원은 두 부인을 산으로 잡아간 뒤에 요화에게 각기 한 사람씩 아내로 삼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화는 두 부인께 신분과 이곳을 지나게 된 까닭을 물은 뒤 오히려 절하며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장군께 모셔드리려 했습니다. 두원은 그것을 듣지 않다가 요화에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군사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관공은 그제서야 요화를 믿 게 된 듯 요화에게 절하며 감사했다.
그런데 요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졸개들과 함께 관공을 따르려 했다. 관공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두 부인을 구해준 것은 고마우나 그들이 황건의 잔당이라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과 함께 가지 않는 게 좋을 성싶어 뒷날을 기약하며 거절했다. 요화는 다시 산채에서 금과 비단을 꺼내다 관공에게 바쳤다. 그러나 관공이 그 또한 받지 않으니 요화는 할 수 없이 절하여 작별하고 졸개들과 함 께 산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아주버님, 어딜 가셨다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요화가 가버린 뒤에야 정신을 수습한 듯 두 부인이 물었다. 관공 은 두 부인께 조조가 뒤따라와 금포를 내린 일을 말해준 뒤 일행을 재촉해 다시 길을 떠났다.
해가 저물 무렵 수레는 어느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관공은 그곳 에서 하룻밤 쉬어 가기로 하고 한 저택을 찾았다. 주인이 나와 맞는 데 이미 백발이 다 된 노인이었다.
“장군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주인이 관공에게 물었다. 관공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저는 유황숙의 아우로 이름을 관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 안량과 문추를 목 벤 관공이 아니십니까?”
노인이 놀란 듯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관공이 그렇게 대답하자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어서 저택 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관공이 그런 노인에게 알렸다.
“바깥 수레에 두 분 부인께서 타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분들도 맞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아내와 딸들을 내보내 두 부인을 맞아들이게 했다.
두 부인이 초당 위로 오르자 관공은 그 곁에 두 손을 모으고 시립 해섰다. 노인이 그런 관공에게 권했다.
“장군도 앉으십시오.”
“두 분 형수님이 여기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앉을 수 있겠습니까?”
관공이 그렇게 사양하자 노인은 다시 아내와 딸을 불러 두 부인 을 안으로 모셔가 대접토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초당에서 관공을 대접하는데 자못 융숭했다. 관공은 훗날에라도 그 후의에 보답하고 자 물었다.
“주인 어른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내 이름은 호화(胡華)라고 합니다. 일찍이 환제桓帝) 때 의랑을 지냈으나 지금은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자기를 밝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제 아들놈은 호반(胡)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형양 태수 왕식(王 植) 아래서 종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가시는 길에 그 곳을 지나게 된다면 아들놈에게 글 한 통을 부치고 싶습니다만…………..?”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마침 형양을 지나가게 되었으니 제 가 전해드리지요.”
관공은 기꺼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한 통의 글이 뒷날 위태로운 고비 하나를 넘기게 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관공은 두 분 형수를 수레에 오 르게 한 뒤 호화 노인과 작별을 했다. 노인은 전날 밤 말한 대로 아 들 호반에게 보낼 글 한 통을 써서 관공에게 내놓았다. 관공은 그 글 을 받아 깊이 간직한 뒤 낙양을 바라고 떠났다.
오래잖아 한 관에 이르렀는데 이름하여 동령관(東嶺關)이었다. 관 을 지키는 장수는 공수(秀)란 자로 군사 오백을 거느리고 고갯마 루를 지키고 있었다. 관공이 수레와 일행을 이끌고 고개에 오르는 걸 보고 군사 하나가 공수에게 달려가 알렸다.
“장군은 어디로 가십니까?”
관 밖까지 마중을 나온 공수가 예를 끝내기 무섭게 관공에게 물었다.
조조의 배웅까지 받으며 떠나온 터라 관공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승상께 작별을 고하고 하북으로 형님을 찾아가는 길이다.”
“하북의 원소는 바로 승상과 맞서 싸우는 자입니다. 그리로 가시 려면 반드시 승상께서 주신 통행장이 있어야겠습니다.”
어쩌면 공수의 그 같은 요구는 관을 지키는 장수로서의 당연한 요 구였다. 그러나 관공은 아직도 별 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하지만 승상 께서 몸소 배웅을 해주셨소이다.”
“그렇다면 아니 되겠습니다. 믿고 보낼 만한 문서가 없으시다면 장군께서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사람을 뽑아 승상께 보내 여쭤본 뒤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이 승상께 여쭤볼 때까지는 내 갈 길이 바빠 기다릴 수가 없소 이다. 나를 보낸 뒤에 여쭤보아도 될 것이오.”
관공이 그렇게 우겼다. 어느새 그의 미간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리 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문득 굳어진 어조 로 자르듯 말했다.
“나는 법에 매인 몸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그럼 그대는 내가 이 관을 지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인가?”
드디어 관공이 언성을 높였다. 공수도 지지 않았다.
“그대가 꼭 이곳을 지나가고 싶다면 수레에 탄 노소를 인질로 내 놓고 가라! 그러지 않고는 보낼 수 없다.”
그러자 관공은 마침내 크게 성이 났다. 청룡도를 번쩍 들어 공수 를 찍으려 들며 소리쳤다.
“이놈! 말이라고 다 하면 되는 줄 아느냐? 수레 위에 계신 분이 어 떤 분이신지 알고 감히 인질로 내놓으라는 것이냐?”
조조가 몹시 관공을 아낀다는 걸 잘 아는 터라 일이 그렇게 될 줄 모르고 싸울 채비 없이 관을 나온 공수는 관공의 기세에 놀랐다. 급 히관 안으로 쫓겨 들어가 북을 울려 군사들을 모으고, 자신도 갑옷 으로 몸을 감싼 뒤에 말에 올랐다.
관운장이 비록 무서운 장수라 하나 그는 혼자나 다름없는 데 비해 자신에게는 오백 명의 정병이 있다는 걸 생각하자 공수는 불쑥 용기가 솟았다. 군사들을 몰고 앞장서 관 아래로 달려 내려오며 관 공에게 소리쳤다.
“이 건방진 놈, 네 어딜 감히 함부로 지나가려느냐?”
그 같은 공수를 본 관공은 급히 수레와 그걸 따르는 무리를 멀리 물러나게 했다. 난군 중에 휩쓸려 뜻밖의 변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 기 위해서였다.
늙은 군사들에게 호위되어 수레가 한켠으로 저만치 물러난 걸보 고 관공은 비로소 말을 내달렸다. 터무니없는 큰소리에는 한마디 대 꾸도 없이 똑바로 공수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죽으려고 귀신이 씌었는지 공수도 그런 관공에게 창을 휘둘러 맞 섰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한 번 엇갈리는가 싶더니 운장의 청룡도 가 번뜩하는 곳에 공수는 두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말 아래로 굴러떨 어졌다.
멋모르고 장수를 따라나섰던 공수의 졸개들은 그 광경을 보자 관 공이 두렵다 못해 오금이 저렸다. 머릿수만 믿고 솟았던 용기는 어 딜 갔는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관공이 그런 그들에게 소리쳤다.
“군사들은 달아나지 말라 내가 공수를 죽인 것은 부득이한 일일 뿐, 너희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너희는 다만 입을 모아 승상께 전 하기만 하면 된다. 공수가 나를 해치려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그를 죽이게 되었노라고.”
그 소리를 들은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엎드려 관공에게 절했다.
관공은 곧 수레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재촉해 주인 없는 관문을 지났다. 전날 길을 잡은 대로 낙양을 향해 나아가는데 발 없는 소 문이 먼저 낙양에 이르렀다.
그때 낙양 태수는 한복(福)이란 자였다. 관공이 공수를 죽이고 동령관을 지났다는 소문을 들은 한복은 무리를 불러모아 어찌할까 를 의논했다.
“승상께서 주신 통행장이 없다면 관우의 이번 길은 사사로운 것 임에 분명합니다. 막지 아니한다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장인 맹탄(孟)이 일어나 똑똑한 체 말했다. 한복이 걱정 스런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관공은 사납고 날래 하북의 명장인 안량과 문추가 나란히 그에 게 죽음을 당했을 정도요. 아무래도 힘으로는 그에게 맞설 수 없으 니 꾀를 써야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외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맹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한복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 계책이 무엇이오?”
“먼저 관 입구를 녹각(鹿角)으로 막은 뒤, 관우가 오기를 기다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겠습니다. 한바탕 싸우다 제가 거짓으로 패 한 체 관우를 유인해 오거든 태수께서는 녹각 뒤에 미리 숨겨둔 궁 수들로 하여금 그를 쏘게 하십시오. 관우가 그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질 때 바로 사로잡아 허도로 보내시면 됩니다. 아마도 조승상께 서는 태수께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들으니 그럴싸한 데다 달리 마땅한 계책도 나오지 않아 한복은 맹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부산하게 녹각을 세우자마자 관공이 가 까이 이르렀다는 전갈이 왔다.
한복은 스스로 활과 화살통을 맨 뒤 일천 인마를 이끌고 녹각 앞으로 나가 관공을 맞았다.
“거기 오는 분은 누구시오?”
자못 정중한 물음이었다. 관공이 말 위에서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답했다.
“나는 한수정후 관우요. 감히 지나가는 길을 빌리러 왔소이다.”
“조승상의 문빙憑, 증명서류)이 있으십니까?”
한복이 여전히 정중함을 잃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일이 바빠 미리 얻어두지 못했소이다.”
관공이 그렇게 대답하자 돌연 한복의 눈길이 실쭉해졌다.
“나는 조승상의 크신 명을 받들어 이곳을 지키며 첩자가 드나듦 을 살피고 있소. 어찌 한 치라도 허술할 수 있겠소이까? 문빙이 없 다면 그것은 바로 달아날 때뿐이오!”
정중함이 가신 말투에 목소리까지 차갑기 그지없었다. 관공도 그 같은 한복의 표변에 불끈 노기가 솟았다. 이미 일 없이 지나갈 수 없 을 바에야 공연한 입씨름으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봉의 눈을 부 릅뜨며 소리쳤다.
“동령관의 공수는 이미 내 손에 죽었다. 너도 죽고 싶어 길을 막 느냐?”
하지만 딴에는 채비를 갖출 대로 갖춘 한복이라 쉽게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채찍을 들어 관공을 가리키며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저놈을 사로잡아 오겠느냐?”
그러자 맹탄이 기다렸다는 듯이 쌍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 다. 관공은 다시 수하들에게 두 부인이 탄 수레를 모시고 저만큼 비 켜 있게 한 뒤 말을 박차 맹탄을 맞았다. 맹탄은 원래 관공의 적수가 못 되는 데다 미리 짜놓은 계책이 있어 세 합을 채우지 않고 말 머 리를 돌렸다. 관공이 그런 맹탄을 놓아줄 리 없었다. 적토마를 박차 맹탄을 뒤따르더니 한칼에 두 동강을 내어버렸다. 맹탄은 관공을 유 인할 것만 생각했지 그가 탄 말이 빠르기로 이름난 천하의 적토마임 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맹탄의 죽음이 전혀 헛된 것은 아니었다. 관공이 맹탄을 죽인 곳은 녹각 문어귀에서 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한복이 말 머리를 돌리려는 관공을 보고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활깨나 쏘는 한 복이라 화살은 어김없이 관공의 왼팔에 박혔다.
관공이 입으로 왼팔에 박힌 화살을 물어 뽑자 피가 샘솟듯 흘렀 다. 그러나 관공은 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한복을 향해 말을 몰았다. 일천 인마가 가로막았으나 관공의 기세는 대쪽을 가르는 칼날 같았 다. 무인지경 가듯 군사들을 헤치며 한복을 향해 청룡도를 겨누었 다. 그제서야 한복은 급히 숨을 곳을 찾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 다. 한복의 머리에서 어깨 어름에 걸쳐 관공의 청룡도가 바람을 일 으킴과 함께 한복의 목은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관공은 그 여세를 몰아 관을 지키던 일천 인마까지 가랑잎 흩듯 흩어버렸다. 그리고 두 부인이 탄 수레를 보호하며 바람처럼 관을 지나갔다.
관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간 뒤에야 관공은 비로소 헝겊을 째 화살에 다친 왼팔을 싸맸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비열한 급습을 받을까 두려워 오래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했다. 하북으 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기수관(關)을 향해서였다. 기수관은 유성추流星, 던지는 철퇴)를 잘 쓰는 변희(木)란 장수 가 지키고 있었다. 병주 사람으로 원래는 황건적의 남은 무리였는데 조조에게 항복해 기수관을 지키는 장수가 된 자였다. 관공이 머지않 아 그곳에 이르리란 말을 듣자 그는 한 가지 계책을 짜내었다. 관앞 의진국사(國寺)란 절에 도부수 이백을 숨겨놓은 다음 관공을 그 곳으로 꾀어들여 술잔을 던짐을 신호로 일시에 들이쳐 죽인다는 계 책이었다.
그 계책에 따라 모든 준비를 끝낸 변희는 관공이 왔다는 말을 듣 기 바쁘게 스스로 관을 나가 맞아들였다. 관공도 변희가 공손하게 마중을 나오자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장군의 크신 이름은 천하에 떨쳐 울리고 있으니 누가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지금은 유황숙께 돌아가신다니 실로 놀라운 충 의라 하겠습니다. 그런 장군을 모시게 된 것은 이 변아무개 일생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관공의 남다른 자부심을 알고 있는 변희가 그렇 게 너스레를 떨었다. 관공은 그런 변희가 기특하면서도 먼저 공수와 한복을 죽인 일을 말해 은근한 으름장을 대신했다. 혹시라도 딴마음 을 품을까 미리 경고해둔 셈이었다. 그러나 변희는 도적 출신답게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일이 그러했다면 그자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다음에 승상을 뵈옵게 되면 제가 장군을 대신해 여쭈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능청을 부려 관공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변희의 능란한 말재주에 넘어간 관공은 그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진국사에 이르렀다.
관공의 일행이 경내로 드니 모든 승려들이 종을 울리며 나와 마 중했다. 원래 진국사는 명제(明)의 어전에 향화를 올리던 절로 본 사에만도 승려가 서른 명이 넘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관공과 같 은 고향 사람으로 보정(淨)이란 승려가 있었다.
변희가 꾸미는 일을 짐작한 보정은 어떻게든 관공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관공 앞에 나가 물었다. “장군께서는 포동을 떠나신 지 몇 해나 됩니까?”
“거의 스무 해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낯선 승려 하나가 벌써 오래전에 떠난 고향을 들먹이자 관공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보정을 쳐다보았다. 보정이 다시 관공에게 물었다.
“장군께서는 빈승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관공이 한동안 보정을 살피다가 대답했다. 그러자 보정이 관공의 기억을 깨우쳤다.
“빈승의 집과 장군의 집은 개울 하나를 건너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관공은 그 말을 듣고도 보정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나 어쨌든 고향사람이라는 데 반가움이 일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고향 얘기라도 나누려고 입을 열려는데 문득 곁에 있던 변희가 보정을 꾸짖었다.
“내가 지금 장군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고 모시려 하거늘 한낱 중 에 지나지 않은 네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보정이 같은 고향 사람의 정으로 자신의 흉계를 관공에게 알려줄 까 두려워 쫓는 것이었다. 관공이 그런 변희를 말렸다.
“그렇지 않소이다. 고향 사람끼리 서로 만났으니 어찌 옛정을 풀 려들지 않겠소?”
그리고 변희의 험악한 기색에 눌려 자리를 뜨려는 보정을 붙들었 다. 관공이 그렇게 나오자 변희도 더는 보정을 떼어놓으려 들지 않 았다. 공연히 억지를 부리다가 관공이 내막을 눈치챌까 두려웠던 까 닭이었다.
“옛정에 차 향기가 스미면 더 다사롭습니다. 잠시 제 방으로 드시 지요. 차 한잔을 끓여 올리겠습니다.”
변희가 수그러드는 걸 보고 보정이 용기를 내어 관공을 청했다. 눈치만 살피다가 일을 그르칠까 걱정돼 마음을 다잡아 먹은 것이었 다. 보정의 타는 속도 모르고 관공은 한가로운 소리만 했다.
“두 분 부인께서 수레에 계시니 먼저 그곳부터 차를 올린 뒤에 함 께 마시도록 하는 게 옳겠소.”
이에 보정은 급한 중에도 두 부인에게 먼저 차를 올린 뒤에야 관 공을 자기 거처로 청해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밖에 없는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변희가 사람을 보내 엿듣는 게 걱정이 되었다. 보정은 알고 있는 것을 말로 하지 못하고 눈짓 손짓으로 대신했다.
손으로는 자기가 찬 계도(刀)를 가리키고 눈은 관공을 바라보는 식이었다.
무심코 찻잔을 들던 관공도 이내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한번 고개 를 끄덕인 뒤 건성으로 몇 마디 고향 얘기를 나누다가 보정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군사들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말고 두 분 형수님을 잘 지 켜라.”
그렇게 대비를 하고 있을 때 변희가 법당에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관공을 청해 들였다. 관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 법당으로 들어가 변희와 마주 앉았다. 변희가 입에 발린 말로 관공을 추키며 술잔을 내밀었다. 그때 관공이 불쑥 물었다.
“그대가 이 관아무개를 이리로 청한 것은 좋은 뜻에서인가, 나쁜 뜻에서인가?”
그 돌연한 물음에 변희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얼른 대답을 못해 어물거리고 있는데 관공이 먼저 법당 벽에 늘어뜨린 휘장 뒤에 칼과 도끼를 든 군사들이 숨어 있는 걸 보았다.
“나는 너를 좋게 보았는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관공이 큰 소리로 변희를 꾸짖었다. 그제서야 변희는 자기가 꾸민 일이 관공에게 들켜버린 걸 알았다. 관공에게 건네려던 술잔을 내던 지며 소리쳤다.
“모두 나와 손을 써라!”
그 소리를 듣자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도부수들이 우르르 달려 나 왔다. 그러나 어느새 뽑아든 관공의 칼 아래 짚단 넘어가듯 하다가 거미 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그 광경을 본 변희는 급했다. 술상을 걷어차며 법당을 빠져나가 낭하 쪽으로 달아났다. 차고 있던 칼로 도부수 등을 베어 쫓은 관공 은 곧 그 칼을 버리고 청룡도를 집어들더니 변희를 뒤쫓았다. 변희 는 관공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깨닫자 소매 속에 감춰두었던 철퇴를 꺼냈다. 유성추라 하여 던질 수 있게 된 철퇴였다.
변희는 때를 보아 철퇴를 날렸다. 평소에 뽐내던 솜씨라 철퇴는 관공의 면상을 향해 그야말로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것이 관공의 솜씨였다. 날아오는 철퇴를 청룡도로 가볍게 쳐낸 뒤 그대로 변희를 뒤쫓아 한칼에 쪼개버렸다.
이어 두 형수가 타고 있는 수레가 걱정이 된 관공은 절 마당으로 몸을 날렸다. 변희의 졸개들일 성싶은 한 떼의 군사들이 수레를 에 워싸고 있다가 관공이 피 묻은 청룡도를 든 채 달려오는 걸 보고 질 겁을 하며 흩어져 달아났다. 관공은 그들을 멀리 쫓아버린 뒤에야 보정을 찾아 감사를 드렸다.
“대사의 고마우신 가르치심이 없었던들 우리는 모두 이자들에게 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실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그 말에 보정이 합장하며 담담히 대꾸했다.
“모두 부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빈승 역시 의발(衣鉢)을 수습해 이곳을 떠나야 할 듯싶습니다. 변희의 수하들이 이 몸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낯선 곳으로 가 구름처럼 떠돌며 지내야겠지요. 다시 뵙게 될 때까지 장군께서도 옥체를 보증하십시오.”
관공은 그런 보정에게 거듭 감사한 뒤 다시 두 형수가 탄 수레를 보호하며 형양을 바라고 떠났다.
형양 태수 왕식은 한복과 집안끼리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한복이 낙양에서 관운장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자 무리를 모아놓 고 원수 갚음을 의논했다. 마침 관공이 형양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걸 남몰래 그를 해칠 좋은 기회라 여긴 까닭이었다.
의논을 거듭해도 관공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길은 역시 꾀를 쓰는 것뿐이었던지 왕식 또한 변희처럼 관공을 반기는 체 맞아들이는 것 으로 시작했다. 관 밖까지 나가 마중하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형님을 찾아 하북으로 가는 길입니다. 승상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이니 조용히 관을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관공은 속으로 왕식이 또 길을 막고 나설까 봐 은근히 걱정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왕식은 뜻밖에도 선선히 허락했다.
“승상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이라면 이 왕아무개가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그래 놓고는 관공에게 넌지시 권했다.
“장군께서는 먼 길을 말을 달려 오셨고, 두 분 부인께서도 수레를 타고 오시느라 지치고 피곤하실 것입니다. 잠시 성안으로 드시어 하 루 저녁 역관에서 쉬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길 떠나시는 일은 내일이라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관공은 그러지 않아도 피로하던 차에 그렇게 은근함을 보이자 마 음이 움직였다. 두 형수를 권해 형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역관 안에는 이미 관공을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식은 또 술자리를 마련하고 관공을 청했다. 관공이 가지 않자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먼 길 을 고생스레 온 관공은 일찍 쉬고 싶었다. 두 분 형수를 청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따라온 이들도 모두 편히 쉬게 하고 자신도 쉴 방으 로 들어갔다.
한편 형양 태수 왕식은 관공이 너무도 쉽게 자신의 계책에 걸려 든 걸 기뻐하며 종사로 부리는 호반을 불렀다.
“오늘 온 관우는 승상을 저버리고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여기로 오는 길에는 앞을 막는 태수와 관을 지키는 장수들까지 죽였으니 죄 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이자는 무예가 빼어나 맞서기 어려우 니 꾀를 써서 죽여야겠다. 오늘밤 군사 일천을 이끌고 역관을 에워 싼 뒤 각기 횃불 하나씩을 마련케 하여 삼경이 되거든 일제히 불을 지르게 하라. 누구이든 묻지 않고 역관 안에 있는 자는 모조리 태워 죽여야 한다. 그때 나도 군사를 이끌고 가 그대의 뒤를 받치리라.”
왕식이 그 같은 영을 내리자 호반은 곧 그대로 따랐다. 군사 일천 을 점고하고, 마른 섶을 구해다 역관 둘레에 쌓아놓은 채 때가 오기 만을 기다렸다.
밤이 제법 이슥했을 무렵이었다. 삼경이 되기만을 기다리던 호반은 문득 생각했다.
‘관운장의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아직 그 모양을 보지 못했다. 죽이기 전에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나 하자.’
그리고 몰래 역관으로 가 역리에게 물었다.
“관장군은 어디 계신가?”
“정청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역리가 그렇게 대답했다. 호반은 가만히 마루에 올라 관공의 모습 을 훔쳐보았다. 그때 관공은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왼손으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참으로 하늘이 낸 사람이구나!”
호반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같은 감탄의 소리를 냈다. 그 웅장한 풍 채도 풍채려니와 그 험난하고 고된 길을 가는 중에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인품에 절로 감동이 된 것이었다.
“거기 있는 게 누구냐?”
사람의 기척을 들은 관공이 물었다.
호반은 얼결에 관공 앞으로 나가 절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형양 태수 아래 종사로 있는 호반이 관공을 뵙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허도성 밖에 사는 호화 어른의 아드님이 아닌가?”
호반의 이름을 듣자 관공은 언뜻 생각나는 게 있어 그렇게 물었 다. 호반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관공은 곧 부리는 이를 소리쳐 부르 더니 명했다.
“내 짐 속에 들어 있는 글을 가져오너라.”
종자가 가져온 편지를 호반이 받아 읽어보니 아버지의 글이었다. 집안 소식과 아울러 관공을 도와주라는 당부가 들어 있었다. 그러잖 아도 관공의 풍채와 인품에 반해 있던 호반은 글을 다 읽자 홀로 탄 식했다.
‘하마터면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을 죽일 뻔했구나!’
그리고 가만히 관공에게 알려주었다.
“왕식은 어질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장군을 해치려 하고 있습니다. 몰래 사람을 시켜 역관을 에워싸게 해놓고 삼경이 되면 불을 질러 안의 사람들을 모두 태워 죽일 작정입니다. 제가 먼저 가서 성문을 열어드릴 터이니 장군께서는 급히 수레를 수습해서 성을 나가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관공은 크게 놀랐다. 곧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오른 뒤, 두 분 형수를 청해 수레에 오르게 하고 역관을 나섰다. 나오다 보니 담 밖에는 과연 군사들이 각기 홰를 들고 담 안의 동정을 살피 고 있었다.
관공은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수레를 몰게 했다. 성문에 이르니 먼저 간 호반이 어느새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관공은 일행을 더욱 재촉해 성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몇 리 가기도 전에 홀연 등 뒤에서 대낮같이 횃불을 밝혀 든 인마가 쫓아왔다. 앞선 사람은 바로 형양 태수 왕식이었다.
“관우는 달아나지 말라!”
왕식이 따르는 졸개들의 머릿수에 힘입어 제법 호기롭게 소리쳤 다. 관공이 말고삐를 당겨 돌아서며 왕식을 꾸짖었다.
“왕식, 이 하찮은 것아, 너와 나는 아무것도 원수진 일이 없거늘 너는 어찌하여 나를 태워 죽이려 했느냐?”
그 말에 왕식은 자신의 비겁한 계책이 관공에게 들킨 걸 알았다. 부끄러움이 분노로 변해 겁도 잊고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창을 꼬 나들고 관공을 향해 닫는 품이 자못 장수다웠으나 처음부터 어림없는 일이었다. 관공의 청룡도가 한 번 번뜩하는가 싶더니 왕식은 어느새 허리가 동강나 말 아래로 떨어졌다.
태수인 왕식이 그 꼴로 죽자 따라오던 졸개들은 겁에 질렸다. 관 공을 뒤쫓을 생각은커녕 무기를 던지고 달아나기 바빴다. 관공은 일 행을 데리고 길을 재촉하면서도 속으로는 호반에게 감사해 마지않 았다.
관공이 다음으로 지나야 할 곳은 활주였다. 태수 유연(延)은 전 날 동군에서 원소의 침공을 받아 위태로웠을 때 관공이 와서 구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안량을 죽인 싸움이었다. 관공이 온다는 말 을 듣자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가 맞이했다.
“태수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시었소?”
관공이 말 위에서 허리를 굽혀 문안했다. 유연이 공손히 답례하며 물었다.
“공은 지금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승상께 작별을 드리고 형님을 찾아가는 길이다.”
관공이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현덕 공이 계신 곳은 하북의 원소에게라 들었습니다. 원소는 곧 승상의 큰 적인데 어떻게 승상께서 공이 가시는 걸 허락하셨습니까?”
유연이 아무리 관공을 좋게 본다 해도 역시 조조의 사람이었다. 그대로 자기 땅을 지나 보낼 수 없어 물었다. 이번에는 믿어주기를 빌며 관공이 대답했다.
“지난날 내가 승상께로 갈 때 미리 말한 바가 있었소이다. 이번 길은 그때 정한 바에 따른 것이라 승상께서도 막지 않으셨소.”
유연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헤아리니 조조나 관우의 사람됨으로 보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대로 도망치는 길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며 길을 비켜줌과 아울러 관공에게 일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황하에 이르게 되실 것이니 그때가 걱정입니다. 물을 건너는 길목의 관을 하후돈의 부장 진기(秦)가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장군께서 그대로 지나가시는 걸 용납하지 않 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수께서 배를 내줄 수는 없겠소이까?”
귀찮은 싸움이 싫은지 관공이 유연에게 물었다. 그러나 유연도 그 일은 난감한 모양이었다.
“배는 있습니다만 그 말씀은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장군께서 너그 러이 보아주십시오.”
유연이 그렇게 거절했다. 관공은 그런 유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나는 전에 안량과 문추를 죽여 그대의 어려움을 풀어준 적이 있 소. 그런데 오늘 물을 건널 배 한 척을 내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 씀이오?”
“하후돈이 그 일을 알까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만약 내가 장군께 배까지 내주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
유연은 송구스런 얼굴로 까닭을 밝혔다. 관공은 유연의 약하고 겁 많은 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참았다. 남의 밑에 있는 그 처지 도 처지려니와 그래도 길을 막지 않는 호의를 높이 산 것이었다.
“할 수 없구나. 가자, 수레를 몰아라!”
관공은 수하에게 그렇게 영을 내려 황하 나루로 향했다.
유연의 말대로 과연 진기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이는 누군가?”
진기가 다가오는 관공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관공이 무겁게 대꾸했다.
“한수정후 관우외다.”
“지금 어디로 가시오?”
관공이 자신을 밝혔건만 진기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물음을 거듭했다. 여러 관에서 해온 대답을 관공이 되풀이했다.
“하북으로 가서 형님인 유현덕을 찾으려 하오.”
“승상의 공문은 어디 있소?”
“나는 승상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아니거늘 공문이 있을 리 있겠소?”
관공이 그렇게 대답하자 진기가 앞뒤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하후돈 장군의 명을 받들어 이 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네가 날개가 돋쳐 난다 해도 이곳을 지나지는 못하리라!”
관공도 그 말에 성이 났다. 봉의 눈을 부릅뜨며 진기에게 소리쳤다. “너는 내가 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베었다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느냐?”
그래도 진기는 눈 하나 깜박 않고 오히려 비웃듯 대꾸했다.
“네가 죽인 것은 기껏 이름없는 조무래기 장수들에 지나지 않는다. 감히 나까지 죽일 수 있다고 믿느냐?”
“그렇다면 안량이나 문추는 어떠냐? 네가 그들보다 낫다는 소리냐? 가소롭구나.”
관공이 다시 그렇게 진기를 몰아세웠다. 겁 없는 진기는 더 참지 못했다. 칼을 들고 말을 박차 똑바로 관공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가상스런 것은 기세뿐이었다. 두 말이 서로 엇갈리는가 싶자 관공이 청룡도를 세웠다 내리치는 곳에 진기의 목이 떨어져 뒹굴었다.
“내게 맞서려던 자는 모두 죽었다. 다른 사람은 죄가 없으니 놀라 거나 달아나지 말라! 얼른 배를 구해 내가 물을 건너도록 도우라.”
관공의 그 같은 말에 진기의 졸개들은 황급히 배를 구해 왔다. 관 공은 두 형수를 청해 배에 오르도록 했다. 황하를 건너니 거기서부 터는 원소의 땅이었다. 관공은 결국 다섯 관을 지나고 여섯 장수를 베며 단기로 천리의 적지를 지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