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5화 : 아직도 길은 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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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5화 : 아직도 길은 멀고


아직도 길은 멀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으나 오는 길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 였다. 조승상이 알면 반드시 나를 은혜를 저버린 자로 여기겠구나!” 

황하를 건너며 관공은 그렇게 탄식했다. 그러나 원소의 땅에 들어 섰다 해서 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들은 대로 유비가 원소에게 있 다 하더라도 아직은 먼 길을 더 가야만 했다. 관공은 대략 원소가 있 을 곳으로 추측되는 기주를 바라고 일행을 재촉했다.

“운장께서는 잠시 멈추십시오.”

관공이 한창 길을 가고 있는데 홀연 한 사람이 북쪽에서 말을 달 려오며 소리쳤다. 말고삐를 당기며 보니 다름 아닌 손건이었다. 관 공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여남에서 서로 헤어진 뒤 여러 날이 지났구려. 그 뒤 일이 어찌되었소?”

“유벽과 공도는 장군께서 돌아가신 뒤 다시 여남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하북으로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고 현덕공과도 의 논해서 조조를 칠 계책을 꾸며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원소 의 장수들과 모사들은 서로 헐뜯고 시새움을 그치지 않아, 전풍은 아직도 옥에 갇혀 있고, 저수는 쫓겨나 쓰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 기다가 심배와 곽도는 서로 권세만 다투고 원소는 의심이 많아 뜻을 결정하지 못하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원소를 이미 틀린 인 물로 보고 유황숙과 의논해서 먼저 원소로부터 몸을 빼도록 권했습 니다. 이에 유황숙께서는 지금 여남의 유벽에게로 가 계십니다. 그 런데도 장군께서 아무것도 모르고 원소에게로 갔다가 해나 입지 않 을까 걱정하여 특히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다행히 도중에 장군을 만나거든 여남으로 모셔 오라는 분부셨습니다. 어서 빨리 여남으로 가 유황숙을 뵙도록 하십시오.”

아직도 길은 멀고 손건이 도중에 만나 참으로 잘됐다는 듯 그렇 게 대답했다. 관공은 그런 손건에게 두 부인을 뵙도록 했다. 

“황숙께서는 별고 없으신지요?”

예를 마치기 무섭게 두 부인이 입을 모아 손건에게 물었다. 손건 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원소는 두 번이나 황숙을 목 베려 했으나 황숙께서는 다행히도 몸을 빼시어 지금 여남에 가 계십니다. 두 분께서도 그곳에 이르시 면 황숙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두 부인은 모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었다. 안도와 아울러 그리움의 눈물이었다. 관공은 손건의 말을 따라 하북으로 가지않고 여남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관공이 급한 마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홀연 등 뒤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왔다. 앞선 장수는 조조의 맹장 하후돈이었다. 

“관아무개는 달아나지 말라!”

하후돈이 성난 기세로 소리쳤다. 그 뒤에는 이백여 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후돈이라면 지금까지 관공이 벤 장수들과는 부류가 달랐 다. 거기다가 가려뽑은 것임에 분명한 철기까지 이백이나 딸리고 있 으니 아무리 천하의 관운장이라 해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관공은 손건에게 두 부인의 수레를 보호하며 앞서 가게 하고 자 신만 말을 돌려 하후돈을 맞았다.

“그대가 이렇게 나를 뒤쫓는 것은 승상께서 보이신 크나큰 도량 에 흠을 내는 것임을 아시오?”

관공이 다가오는 하후돈을 보며 점잖게 꾸짖었다. 그러나 하후돈 의 기세는 더욱 험해질 뿐이었다.

“비록 승상께서 너를 보내주셨다 해도 네가 가면서 한 짓을 듣게 된다면 마음이 달라지실 것이다. 너는 도중에 많은 사람을 죽였고, 더욱이 조금 전에는 나의 부장까지 죽였다. 승상께뿐만 아니라, 내 게도 이리 무례할 수 있는 것이냐? 이제 내가 특히 달려온 것은 너 를 사로잡아 승상께 바치고 아울러 네 죄를 고하여 너를 다스리시게 하려 함이다!”

하후돈은 그렇게 되받으며 곧장 창을 꼬나들고 말을 박차 관공에 게 덤벼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말 한 필이 나는 듯 달려오며 소리쳤다.

“하후돈 장군께서는 관운장과 싸우지 마시오!”

그 소리에 막 말을 내어 하후돈과 맞붙으려던 관운장은 말고삐를 당겨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온 사자는 품 안에서 공문 한 통을 내어주며 하후돈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관장군의 충의를 높이고 사랑하시어 혹시 도중에 관 을 막거나 길을 끊는 일이 없도록 특히 저를 보내셨습니다. 속히 이 공문을 여러 곳에 돌리시어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하후돈은 조조의 명을 받드는 대신 오히려 그 사자에게 물었다.

“저 관아무개는 도중에 관을 지키는 장수와 군졸들을 많이 죽였다. 승상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느냐?”

“그것은 아직 모르실 것입니다.”

사자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하후돈은 한층 기세 가 등등하여 소리쳤다.

“내가 저자를 사로잡아 승상을 뵈옵겠다. 그때 승상께서 저자를 놓아 보내신다면 나도 더 쫓지 않겠다.”

“내가 너 따위를 겁낼 줄 아느냐?”

하후돈이 너무도 자기를 업신여기는 데 화가 치솟은 관공이 그렇 게 외쳤다. 그리고 말을 박차고 칼을 휘두르며 하후돈을 덮쳤다. 하 후돈도 기다렸다는 듯 창을 들어 관공을 맞았다.

조조의 첫손 꼽는 장수 가운데 하나인 하후돈에 천하의 관운장이 맞붙으니 참으로 볼만했다. 청룡도와 창이 어울려 불꽃을 뿜는데 마

치청룡 황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듯했다. 잠깐 사이에 여남은 번이 나 말이 엇갈리고 창칼이 붙었다 나뉘었다. 그때 다시 말 한 필이 나 는 듯 달려오며 그 위에 탄 이가 소리쳤다.

“두 분 장군께서는 잠시 싸움을 그치시오!”

“그렇다면 승상께서 관아무개를 사로잡아 오라는 분부라도 내리셨느냐?”

하후돈이 잠시 창을 거두며 사자에게 물었다. 사자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외다. 승상께서는 아직도 관을 지키는 장수들이 관장군의 앞 을 막고 길을 끊을까 두려워하셔서 다시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 공문을 보시고 관장군을 그대로 내보내십시오.”

“승상께서 저자가 도중에 사람을 죽인 일을 알고 계시느냐?” 

“그건 아직 모르십니다.”

그러자 하후돈은 군사들로 하여금 관공을 에워싸게 하며 말했다. 

“아직 저자가 사람을 죽인 일을 모르신다면 이대로 놓아 보낼 수 없다. 자칫 놓치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창을 들어 다시 관공을 찔렀다. 노한 관공도 청룡도를 휘 둘러 그런 하후돈의 창을 맞았다.

두 사람의 칼과 창이 다시 막 어우러지려 할 때 멀리서 또 말 한 필이 나는 듯 달려왔다.

“운장과 원양은 잠시 싸움을 그치시오!”

그렇게 외치며 나타난 것은 바로 장요였다. 그를 알아본 두 사람이 무기를 거두고 물러서자 장요가 말했다.

“승상의 명을 받들어 그 뜻을 전하러 왔소이다. 승상께서는 운장 이관을 지키던 장수들을 베었단 말을 듣고 다시 나를 보내셨소. 앞 서 공문을 내려 운장을 막지 말라 하였으나, 그 일로 길을 막는 자가 있을까 걱정하신 까닭이오. 운장이 사람 죽인 일을 승상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니, 각처의 관애를 지키는 장수들은 누구도 운장을 가로막 아서는 아니 되오. 원양도 이제는 길을 내어주시오.”

그 말을 듣자 하후돈도 더는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냥 보내기는 싫은지 장요를 보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진기)는 채양(陽)의 조카로 채양은 특히 내게 잘 돌봐달라 고 당부하였소. 그런데 이제 진기가 저 관아무개에게 죽음을 당했으 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내가 채장군을 만나 일의 전말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해보겠소. 이미 승상께서 큰 아랑을 베푸시어 운장을 보내주셨으니 공께서는 그 같은 승상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제서야 하후돈도 관공을 에워싼 군마를 물러나게 했다. 장요가 감사의 눈길을 보내는 관공에게 물었다.

“운장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들으니 형님께서는 이미 원소에게 계시지 않는다는구려. 이제는 천하를 두루 돌며 형님을 찾으려 하오.”

관공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보아 가는 곳을 바로 대지 않 고 그렇게 얼버무렸다.

“현덕공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신다면 다시 승상께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승상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요가 관공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넌지시 권했다. 관공이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그렇게야 할 수 있겠소? 이제부터 천하를 구석구석 다 뒤지 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형님을 찾고 말겠소. 문원은 돌아가 승상을 뵙고 나를 대신해 사죄해주시오. 내가 어쩔 수 없어 관을 지키던 장 수들을 죽였다는 것만이라도 승상께서 알아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소이다.”

그러고는 손을 모아 장요에게 예를 표한 뒤 말 머리를 돌렸다. 장 요도 하후돈과 함께 군마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한참을 달려 두 부인이 탄 수레와 손건 일행을 따라잡은 관공은 손건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 었다. 더 이상 쫓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길은 순탄했다. 그러나 며칠 안 돼 길가에서 큰비를 만났다. 군사들은 모두 옷이 젖고 두 부인이 탄 수레에도 비가 샜다.

관공이 송구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문득 멀리 산허리에 장 원 한 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관공은 일행을 재촉하여 그 장원으로 갔다.

그 장원에 이른 관공이 소리 높여 주인을 찾자 한 늙은이가 나와 맞았다. 관공은 그 늙은이에게 자신이 온 뜻을 밝히고 호의를 구하 였다. 늙은이가 선뜻 대답했다.

“나는 곽상이란 사람으로 대대로 이곳에 살아왔습니다. 장군의 크 신 이름을 들은지 오래되더니 이제 다행히 뵙게 되었습니다. 집이 누추하지만 마음 편히 쉬어 가십시오.”

그러고는 관공을 집 안으로 맞아들이더니 양을 잡고 술을 내어 정성껏 대접했다. 관공은 먼저 두 부인을 후당으로 청해 편히 쉬게 한 다음 손건과 더불어 곽상을 마주하고 술잔을 들었다. 뜰에서는 수레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한편으로는 불을 피워 젖은 옷이며 보따 리를 말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필을 돌보았다.

그런데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 한 젊은이가 장정 몇 명을 데리고 장원으로 들어오더니 초당으로 올라왔다. 곽상이 그런 젊은이를 불 러 말했다.

“얘야, 이리 와서 장군께 절하고 뵙도록 해라.”

그리고 다가온 그 젊은이를 가리키며 관공에게 말했다.

“제 어리석은 아들놈입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어디를 갔다 오는 것입니까?”

관공은 왠지 그 젊은이의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아 물었다. 곽상이 대답했다.

“이제야 막 사냥에서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한번 관공을 빤히 바라보고는 그대로 초당을 내 려가버렸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에 문득 눈물을 쏟으며 곽상이 탄식 했다.

“이 늙은이는 농사짓고 글 읽으며 평생을 살았는데 집을 이을 자 식으로는 저 아이 하나를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어찌 된 셈인지 할 일은 게을리하고 사냥이나 하며 나돌기만 좋아합니다. 집안으로 보면 실로 큰 불행이지요…….”

관공이 그런 곽상을 위로했다.

“지금은 어지러운 세상이라 무예도 잘 익힌다면 크게 공명을 이 룰 수 있습니다. 어찌 그걸 불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아이가 무예라도 힘을 다해 익힌다면 품은 뜻이 있는 인간이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 저 아이가 힘을 쏟는 것은 오 로지 즐기고 노는 것뿐입니다. 못할 짓이 없다 할 지경이니 어찌 이 늙은이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관공의 위로에도 곽상은 한탄해 마지않았다. 듣고 보니 관공 또한 탄식이 절로 났다.

곽상은 밤이 깊어서야 제 방으로 돌아갔다. 곽상이 돌아가자 관공 은 손건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미처 잠이 들기도 전에 뒤 채 마구간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관공이 급히 데리고 온 군사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소 손건과 함께 칼을 빼들고 비명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곽상의 아들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땅에 널브러져 죽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 곁에서는 관공의 수하들이 장원의 머슴과 엉겨 치고 받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

관공이 한 소리 크게 꾸짖어 싸움을 말린 뒤에 물었다. 관공을 따 라온 군사가 씨근거리며 대답했다.

“저 사람이 적토마를 훔치러 왔다가 말발굽에 채여 저 지경이 되 었습니다. 우리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왔는데 갑자기 장원의 머슴 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싸움을 걸어오는 바람에 패싸움이 된 것입니다.” 

듣고 난 관공은 노했다.

“쥐새끼 같은 도적놈들이 감히 내 말을 훔치려 들다니!”

그 한마디 호령과 함께 번쩍 칼을 들어 말도적을 찍으려 했다. 그 때 곽상이 황급히 달려 나와 간곡하게 빌었다.

“못난 자식이 장군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하나 늙은 처가 가장 어여삐 여기는 자식입니다. 빌건대 장군께서는 너그 럽고 어진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관공도 그런 곽상을 보자 성난 대로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노기를 억누르고 칼을 거두어들이며 곽상을 안심시켰다.

“이 아이가 정말로 착하지 못하구려. 어르신께서 말한 그대로이니 자식은 아비가 가장 잘 안다[知如]는 말이 옳은 듯싶소이다. 내 어르신네의 낯을 보아 이 일을 없던 걸로 하겠소.”

그러고는 부리는 이들에게 적토마를 돌보게 하는 한편 몰려서 있는 장원의 머슴들을 꾸짖어 흩어버렸다.

다음 날이었다. 관공이 길을 떠나려 하자 곽상 부부가 당 앞에 엎 드려 절하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못난 자식이 장군의 크신 위엄을 모독했습니다. 장군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실로 무어라 감사의 말씀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관공은 문득 한마디 따끔하게 일러주고 싶은 게 있어 그 젊은이를 불러내게 했다. 곽상이 무안한 듯 대답했다.

“그놈은 사경 무렵에 이미 저희 패거리와 함께 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일이라도 절로 탄식이 날 만큼 망나니 자식 놈이었다. 관공은 그런 자식을 둔 곽상을 안타까이 여기며 작별하고 장원을 나섰 다. 늘상 그러하듯 두 부인을 모신 수레를 앞세운 채 손건과 함께 말 머리를 나란히 하여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오래잖아 산길로 접어든 일행은 한 삼십 리쯤 일 없이 나아갔다. 그런데 한군데 산굽이를 도는데 문득 말 두 필을 앞세우고 백여 명 의 사람이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머리에 누런 띠를 두르고 몸에 는 전포를 걸친 자가 앞장을 서고 그 뒤에는 곽상의 아들놈이 서 있 었다.

“나는 천공장군 장각의 부장이다. 오는 자는 어서 빨리 적토마를 바쳐라. 그러면 길을 지나게 해주겠다.”

머리에 누런 띠를 두른 자가 말했다. 그 말에 공이 크게 웃으며 물었다.

“이 무지하고 미친 도적놈아, 네가 이미 장각을 따라다니며 도적 질한 적이 있다면 어찌 유, 관, 장 삼형제의 이름을 모르느냐?” 

“나는 다만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자가 관운장이란 소리를 들었 을 뿐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관공의 늠름한 기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그 외모를 보자 생각나는 게 있는지 누런 띠를 두른 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관공은 대답 대신 수염을 싸매고 있던 주머니를 끌렀다. 곧 검고 긴 수염이 배꼽까지 늘어지며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누런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는 자는 그걸로 이내 관공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곽상의 아들을 끌고 관공의 말 앞에 엎드려 절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자기를 알아보는 게 기특한지 관공이 부드럽게 물었다. 상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배원소(裵元紹)라 하며 일찍 황건의 무리에 가담한 적 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두머리인 장각이 죽은 뒤에는 주인 없이 떠 돌다가 무리를 모아 잠시 이곳 산속에 숨어 지내는 중입니다. 아침 일찍 이자가 달려와 자기 집에 천리마를 가진 손이 묵고 있다고 알 려주기에 저는 그 말을 뺏고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장군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묻지도 않은 자신의 내력까지 밝히는데 그 목소리가 자못 간절했다.

태산같이 믿었던 우두머리 배원소가 그렇게 관공에게 굽히고 들자 곁에 있던 곽상의 아들은 퍼렇게 겁에 질렸다.

“살려주십시오. 장군님.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이를 덜덜거리며 엎드려 그렇게 애걸했다. 관공은 그런 곽상의 아 들을 성난 눈길로 내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 아버님의 낯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얼른 눈앞에서 없어져라.”

그러자 곽상의 아들은 머리를 싸매고 겁먹은 쥐새끼처럼 달아나버렸다. 관공은 다시 배원소를 보며 물었다.

“너는 내 얼굴도 모르면서 어찌 내 이름은 아느냐?”

“여기서 이십 리쯤 가면 와우산이란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산 위에는 주창)이란 관서 사람이 있는데 두 팔이 모두 천근의 힘 을 낼 만한 장사입니다. 얼굴이 검고 규룡)과 같이 꾸불꾸불한 수염이나 위풍도 몹시 당당하지요. 원래 황건의 우두머리였던 장보 아래서 장수 노릇을 하다가 장보가 죽자 역시 저처럼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장군의 크신 이름을 제게 전해주며 늘 길이 없어 만나뵙지 못함을 한스러워했습니다.”

“녹림은 호걸이 몸을 의지할 만한 곳이 못 된다. 그대들은 지금부 터라도 그릇된 걸 버리고 바른길로 돌아가 스스로 몸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배원소의 말을 듣고 난 관공이 점잖게 타일렀다. 원소도 엎드려 감사하며 관공의 말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한창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다시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이는 필시 주창일 것입니다.”

배원소가 다가오는 인마를 바라보더니 관공에게 나직이 알렸다. 관공이 말 위에서 보니 과연 한 사람이 앞서 말을 달려 오는데 검은 얼굴에 키가 크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바로 관장군님이시다.”

달려온 주창은 배원소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관공을 알아보고 그렇게 소리치더니 황망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길가에 넙죽 엎드리며 절을 했다.

“주창이 장군님을 뵈옵니다.”

“장사는 일찍이 어디서 나를 알았는가?”

관공이 그런 주창에게 물었다. 주창이 엎드린 채 대답했다.

“지난날 황건의 장보를 따라다닐 때 존안을 뵈온 적이 있으나 한 스럽게도 몸이 도적의 무리에 섞여 있어 감히 장군을 따르지 못했습 니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저를 버리시지만 않는다면 비록 보졸이 되어 채찍을 들고 말을 돌보게 되더라도 장군 을 따르는 게 소원입니다. 죽더라도 장군과 함께라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관공이 보기에도 그 뜻이 여간 정성스럽지가 않았다. 한동안 부드 러운 눈길로 주창을 내려보다가 고요히 물었다.

“만약 그대가 나를 따른다면 데리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함께 데리고 갈 것이요, 원하지 않는자는 그 뜻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주창이 그렇게 말하자 무리가 일제히 소리쳤다.

“저희들은 모두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이에 관공은 말에서 내려 두 분 형수가 탄 수레 앞으로 갔다. 자신 의 뜻 같으면 모두 데리고 가고 싶지만 두 형수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물어보려 함이었다.

“아주버님께서는 허도를 떠나신 이래 줄곧 홀몸으로 이곳까지 이 르렀습니다. 오는 길에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반드시 군마를 따 르게 할 까닭은 없을 성싶습니다. 저번에 요화가 따르려 할 때는 아 주버님께서 마다하셔 놓고 유독 이번에는 주창의 무리를 거두어들 이려 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자들이니 아주버님께서 알아서 처결하십시오.”

감부인이 관공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주창의 무리가 녹림도당(산도적)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두 형수가

탐탁히 여기지 않음을 알자 관공은 이내 주창의 무리를 데려갈 마음 을 바꾸었다.

“형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음에 때를 보아 저들을 거두어들이

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수레 앞을 물러나온 뒤 주창에게 말했다. 

“이 관아무개가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 분 형수님께서 원치 않 으시니 어쩌겠나? 그대들은 잠시 산으로 되돌아가 있게. 내가 형님 을 찾기만 하면 반드시 그대들을 부르러 오겠네.”

“이 주창이 어리석고 하찮은 무리라 잘못 몸을 던져 도적이 되었 으나 이제 장군을 뵈오니 하늘의 해를 다시 보게 된 듯합니다. 어찌 장군을 두고 그릇된 길로 되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럿이 함 께 따라가는 게 편치 않으시다면 수하들은 모두 배원소에게 딸려 보 내고 저 혼자 걸어서라도 따르겠습니다. 장군과 함께라면 만릿길을 걷는다 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공의 말을 듣고도 주창이 다시 그렇게 청했다. 그 정성을 갸륵 하게 여긴 관공은 다시 두 부인에게로 가서 그 같은 주창의 뜻을 전 하고 답을 구했다.

“한두 사람이 따른다면야 꺼려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감부인도 주창의 그 청만은 들어주었다. 이에 관공은 주창을 데려가기로 하고 그의 졸개들은 모두 배원소에게 맡겨 산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배원소 역시 관공을 따라가고 싶기는 주창과 마찬가지 였다. 관공의 영을 받고도 오히려 엎드려 빌었다.

“저도 또한 장군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 배원소를 주창이 나서서 말렸다.

“자네까지 장군을 따라간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버릴 것이 네. 잠시만 이들을 맡아 이끌고 있게. 내가 관장군을 따라갔다가 있 을 만한 곳이 마련이 되면 곧 달려와 자네들을 데리고 감세.”

주창이 그렇게 나오니 배원소도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마음이 기쁘지 아니한 대로 졸개들을 수습하여 원래 있던 산으로 돌아가고 주창만 관공을 따라 여남으로 향했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났다. 여남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중에 문득 저만치 산성 하나가 있는 게 보였다. 관공이 그곳 주민 한 사람을 불 러 물었다.

“저기가 어딘가?”

“저 성은 고성(城)이라 하는데 몇 달 전 이름이 장비라고 하는 장수 하나가 수십 기를 이끌고 와서 원래 있던 현(縣)의 관리들을 내쫓고 차지했습니다. 그 뒤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며 군량과 마초를 재두기 시작하여 지금은 인마만도 수천에 이르지요. 이 부근 에서는 아무도 감히 맞서지 못할 만큼 세력이 큽니다.”

물음을 받은 그곳 백성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관공은 크게 기뻤다.

“지난날 서주를 잃은 뒤로 내 아우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몰랐더니 이제 찾았구나. 누가 여기에 와 있는 줄 생각이나 했으랴!”

그렇게 감탄하고 먼저 손건을 성안에 들여보내 자신이 온 것을 장비에게 알림과 아울러 두 형수를 맞아들이도록 했다.

장비가 고성을 손에 넣은 경위는 이러했다. 원래 망탕산으로 들어 갔던 장비는 그곳에서 한 달쯤 지내자 바깥 일이 궁금해졌다. 그래 서현덕의 소식이나 알아보고자산을 나왔다가 우연히 그 고성을 지 나게 되었다. 때마침 식량이 떨어져 곤란을 겪던 장비는 성으로 들 어가 그곳을 지키는 현의 관리에게 곡식을 꾸어달라고 어거지를 썼 다. 어디 할 것 없이 곡식이 귀하던 때라 현의 관리가 쉽게 곡식을 꿔줄 리 만무하였다.

그러자 성이 난 장비는 힘으로 현령을 내쫓고 관인을 뺏은 뒤 성 을 차지해버렸다. 차지하고 보니 산중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리하여 잠시 몸을 쉬려 했던 고성은 차차 뒷날을 위한 근거로 변해 간 것이었다.

그 장비를 만나러 성안으로 들어간 손건은 예를 마치기 바쁘게 말했다.

“유황숙께서는 이미 원소에게서 떠나 여남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지금 운장께서 허도로부터 두 분 부인을 모시고 이곳에 이르셨으니 장군은 어서 나가 맞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장비는 그 말을 듣자 대답 한마디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 둘러 몸에 갑주를 걸치더니 장팔사모를 잡고 말에 올랐다. 손건은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런 장비가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을 뛰 쳐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로운 느낌이 들었으나 장비의 기세가 어찌나 흉한지 감히 묻지 못하고 급히

뒤따를 뿐이었다.

관공은 장비가 달려 나오는 걸 보자 기쁨과 반가움을 이기지 못 했다. 주창에게 청룡도를 맡기고 맨몸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그러 나 가까이 다가오는 장비의 모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과 머리칼을 올올이 곤두세운 채 달려오 는 품이 성이 나도 이만저만 난 게 아니었다. 거기다가 관공 곁에 이 르러서는 다짜고짜 우레 같은 호통과 함께 창을 번쩍 들어 힘차게 내질렀다.

관공은 크게 놀랐다. 황망히 몸을 틀어 창을 피하면서 장비에게 소리쳤다.

“아우는 무슨 일로 이러는가? 도원에서 맺은 의를 잊었는가?”

“너는 이미 의리를 저버린 놈이다. 무슨 낯짝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그제서야 장비가 놋그릇 깨지는 소리로 대꾸했다. 관공이 기가 막혀 되물었다.

“내가 어째서 의를 저버렸단 말이냐?”

“너는 큰형님을 배반하고 조조에게 항복하여 제후에 봉해지고 벼 슬까지 받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도 이제 와서 다시 나까지 속이려 들어? 나는 오늘 네놈과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야겠다!”

“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우니 두 분 형수님께 물어보아라. 마침 두 분 다 여기 와 계신다.”

성미 급한 장비가 무얼 잘못 안 걸로 짐작한 관공이 다시 달래는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두 부인도 수레의 발을 헤치고 내다보며 장비에게 물었다.

“작은아주버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러십니까?”

장비가 여전히 노기등등하여 대답했다.

“두 분 형수님은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먼저 이 의리를 저버린 놈 을 죽인 뒤에 성안으로 모셔들이겠습니다.”

“큰아주버님께서는 작은아버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고 잠시 조조에게 몸을 위탁했던 것뿐입니다. 이제 형님께서 여남에 계신다 는 걸 알자 험하고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허도를 떠나 여기에 이르셨습니다. 작은아버님께서 부디 잘못 알고 함부로 큰아주버 님을 대하지 마십시오.”

감부인이 다시 나서서 그렇게 말하고 미부인도 곁에서 거들었다.

“큰아주버님께서 허도에 계셨던 것은 어찌할 수 없어 그리된 것 입니다. 작은아주버님께서는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장비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두 부인을 보고 우겨댔다.

“형수님들은 저놈에게 속지 마십시오. 충신은 죽을지언정 욕을 당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제 놈이 대장부라면 어찌 두 주인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아우는 나를 너무 비굴하게 만들지 말라!”

마침내 관공이 은은하게 노기 서린 목소리로 장비를 타일렀다. 손 건도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운장께서는 특히 장군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미 의를 저버렸다면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겠습니까?”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저놈은 좋은 뜻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나를 잡으러 왔을 것이다.”

그래도 장비는 들은 체 만체였다. 관공이 답답한 듯 대꾸했다. “내가 만약 너를 잡으러 왔다면 군사를 이끌고 왔을 것이다. 어찌 홀몸으로 이렇게 왔겠느냐?”

그러자 장비가 문득 손가락을 들어 관공의 등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오는 것은 무엇이냐? 저것이 군사가 아니고 허깨비라도 된 단 말이냐?”

그 말에 관공이 돌아보니 정말로 자옥한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 의 군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니 틀림없이 조조의 군사였다. 관공을 뒤쫓아 오는 것임에 분명했지만 성난 장비 는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래도 나를 속일 작정이냐? 이 속 컴컴한 놈아!”

그 한마디 욕질과 함께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다시 찌르려 했다. 뒤따라오는 군사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관공이 그런 장비를 급히 말 리며 소리쳤다.

“아우는 잠깐 기다리게. 내가 오는 적장을 목 베 진심을 보여주겠네.”

“그게 정말이라면 얼른 가서 적장을 목 베 오너라. 북을 세 번 치 는 동안에 반드시 적장의 목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그제서야 장비도 조금 수그러든 기세로 그렇게 말했다. 관공이 청룡도를 받아들고 돌아서며 응낙했다. 

“알았네. 기다리게.”

조조 군사는 오래잖아 이르렀다. 앞선 장수를 보니 다름 아닌 채 양이었다. 원래 관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던 채양인 데다 조카가 죽어 분이 꼭뒤까지 올라 있었다. 관공을 보자 한소리 성난 외침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내 생질 진기를 죽여놓고 용케 여기까지 도망쳐 왔구나. 나는 승 상의 명을 받들어 특히 네놈을 잡으러 왔다. 길게 목을 늘여 이 칼을 받아라.”

그러나 관공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칼을 들어 채양을 맞이했다. 그걸 본 장비가 손수 북채를 잡고 북을 울렸다. 겨우 첫 번째 북소리 가 났을 때였다. 관공의 청룡도가 번쩍 들렸다 내려쳐지는 곳에 채 양의 잘린 목이 날았다.

눈 깜짝할 새에 대장이 목 없는 시체로 변하는 꼴을 보자 채양을 따라온 군사들은 얼이 빠졌다. 하나같이 무기를 내던지고 뒤돌아서 내빼기 바빴다. 관공은 그런 적군들 중 깃발을 든 졸개를 하나 잡아 물었다.

“이 일은 조승상이 시킨 게 결코 아니다. 너희가 어떻게 나를 뒤 쫓게 되었느냐?”

“채양은 장군께서 자기 생질을 죽였단 말을 듣자 분을 이기지 못 해 장군과 싸우려고 하북에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조승상께서는 그 일을 허락지 않으시고 여남으로 가서 유벽을 치도록 했습니다. 채양은 못마땅한 대로 승상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도 도중에 장군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붙잡힌 군사가 벌벌 떨며 그렇게 대답했다. 관공은 그 군사를 장 비에게 보내어 그 같은 사실을 밝히게 했다. 장비는 다시 그 군사에 게 관공이 허도에 있을 때에 있었던 몇 가지 일을 더 물은 뒤에야 비로소 관공을 믿는 기색이었다.

“성 남문 밖에 여남은 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장군께서 살펴주십시오.”

장비가 쑥스런 낮으로 관공과 지난 일을 주고받고 있을 때 문득 고성에서 군사 하나가 달려와 그렇게 알렸다. 다시 의심을 일으킨 장비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남문 쪽으로 가보니 과연 십여 기가 가 벼운 활에 짧은 화살을 지닌 채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장비를 알아보자마자 얼른 말에서 내렸다. 장비도 자세히 살피니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바로 미축과 미방 형제였다. 급히 말 에서 내려 그들의 예를 받는 장비에게 미축이 말했다.

“지난번 서주를 잃고 흩어진 이래 우리 두 형제는 고향으로 가 숨 어 지냈습니다. 가만히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운장께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주공께서는 하북으로 가신 데다 간옹 또한 하북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장군만 어디에 계신지 몰라 궁금하게 여겼는데 어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이 장군의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성 이 장(張씨인 장수로 모양이 이러이러한 분이 고성을 차지하고 있 다는 소식으로 들어보니 장군임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 형 제는 장군을 찾아 나선 것인데 이제 다행히도 이렇게 만나뵙게 되었 습니다.”

“운장 형님도 손건과 함께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이제 막 여기에 이르셨다네. 이미 큰형님께서 계신 곳도 알고 있으니 자네들도 마침 때맞추어 온 셈일세.”

장비가 그렇게 대답하자 미축 형제는 더욱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뛰듯이 관공에게로 가 만나본 뒤 누이인 미부인과 또 한 분 감 부인도 절하며 뵈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세.”

장비가 그렇게 말한 뒤 두 부인을 청해 성안으로 들도록 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두 부인은 번갈아 관공의 지 난 일을 장비에게 얘기해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의심을 거두고 있 던 장비는 두 부인의 말을 듣자 감격과 부끄러움으로 크게 소리내어 울더니 우르르 관공 앞에 달려가 엎드렸다.

“형님, 이 비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엄히 벌해주십시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미축과 미방 또한 감격으로 솟는 눈물을 감 출 길이 없었다.

오해가 완연히 풀리자 이번에는 장비가 자신의 지난 일을 줄줄이 엮어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하를 시켜 크게 잔치를 열게 했다. 조조에게 항복한 것을 잔뜩 오해하고 있던 장비에게는 관공이 죽었 다 살아온 사람보다 더 반가웠다. 거기다가 현덕이 있는 곳까지 알 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고 서로 치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룻밤을 떠들썩한 잔치로 보낸 다음 날 장비는 또 성급을 부렸다.

“형님, 우리 모두 여남으로 가 큰형님을 뵈옵시다. 지금부터 새로 한번 시작해보는 거요.”

눈을 뜨기 바쁘게 졸개들에게 모조리 떠날 채비를 하라고 성화를 부리면서 장비가 관공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관공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우는 두 분 형수님을 돌보며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게. 내가 먼저 손건과 함께 가서 형님의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네.”

들뜬 장비에게는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들어본즉 옳 았다. 이에 장비가 조급한 성미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이니 관공은 손건만 데리고 여남으로 떠났다.

과연 관공의 헤아림은 옳았다. 간신히 여남에 이르러 보니 유벽과 공도는 뜻밖의 소리를 했다.

“황숙께서 며칠 전에 이곳에 오시기는 했습니다만 군사가 적은 걸 보고 다시 하북의 원본초에게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곳 군사만으 로는 조조에게 대항할 수 없다 여겨 원본초와 의논하러 간다고 하셨 습니다.”

아무리 그런 일에 대비해 손건과 가벼운 차림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듣자 관공은 맥이 빠졌다. 원소에게로 갔다면 그의 상장(上 將)을 둘씩이나 죽인 자기로서는 함부로 찾아갈 수도 없는 곳이려니 와 원소가 또 무슨 변덕을 부려 현덕을 해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손 건이 그런 근심에 젖은 관공에게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괴롭지만 하북으로 가서 황숙을 만나뵙는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고성으로 돌아갔다가 하북으로 가 보도록 하시지요.”

관공도 당장은 어쩌는 수가 없었다. 손건의 말을 따라 유벽과 공도를 작별하고 고성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확실하게 큰형님께서 계신 곳을 알았으니 우리 모두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관공으로부터 여남에 갔던 일을 듣자 장비가 다시 그렇게 나왔다. 이번에도 관공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어 장비를 말렸다.

“이 성이라도 하나 있어 우리가 모두 몸을 편안히 둘 수 있게 되 었으니 결코 가볍게 버려서는 아니 된다. 내가 다시 손건과 함께 원 소에게로 가서 형님을 찾아보겠다. 형님을 모시고 와 서로 만나게 될 때까지 아우는 이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라.”

“형님께서는 전에 안량과 문추를 목 벤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 런데도 어떻게 원소에게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장비가 문득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관공은 태연했다.

“괜찮다. 그때그때 기회를 보아 잘 대처하면[見而] 될 것이다.” 

그렇게 대꾸하고는 주창을 불러오게 했다.

“와우산 배원소에게 있는 인마가 얼마나 되겠는가?”

주창이 불려오자 관공이 물었다. 주창이 잠시 어림하더니 대답했다.

“한 사오백 될 것입니다.”

“그럼 그대가 한 번 와우산을 다녀와야겠다. 나는 지금 가까운 길 을 골라 형님을 찾으러 갈 것이니 그대는 와우산으로 가서 한 갈래 군마를 이끌고 큰 길을 따라 나를 맞으러 오도록 하라.”

관공이 그렇게 명하자 주창은 두말없이 거기에 따랐다. 주창이 떠 난 뒤 관공은 다시 손건과 스무남은 기만 이끌고 하북을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하북 언저리에 이르렀을 때 손건이 문득 말했다.

“아무래도 장군께서 가벼이 하북으로 들어가셔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쉬며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황숙을 만 나뵙고 따로이 의논해본 뒤에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전에 안량과 문추를 죽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려 있던 관공도 손 건의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손건이 먼저 하북으로 들어가고 관공 은 가까운 곳에 있는 장원에 묵으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장원의 주인은 관공과 같은 성을 쓰는 관정(定)이란 사람이었다.

“크신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직접 이렇게 뵙게 되니 실 로 광영입니다.”

관정은 그렇게 관우를 반기며 두 아들을 불러 관공을 보게 한 뒤 관공은 물론 따르는 이들까지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아직도 유 비에게 이르는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관공은 결코 마음이 밝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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