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6화 : 다시 이어진 도원(桃園)의 의(義)
다시 이어진 도원(桃園)의 의(義)
건안 오년 가을 팔월이었다. 하북 원소의 객사에서는 유비가 탁자 에 기대앉아 시름에 젖어 있었다.
원래 유비가 여남으로 갔던 것은 상장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잃 고 변덕이 심해진 원소에게서 우선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유벽과 공도를 자기 밑에 끌어들여 그 자신의 새로운 근거 로 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다행히 원소와의 사이가 좋 게 유지된다 해도 언제까지고 남의 밑에 웅크리고 살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유벽과 공도의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원소에 게 말한 대로 그들을 달랜다 해도 그 세력으로는 허도를 넘보기는커 녕 조조의 한 갈래 군사조차 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군사의 머릿수도 대단찮으려니와 그나마 황건의 잔당에다 여기저기 흘러다니는 유민들을 끌어모은 것이라 몇 번이고 조조의 정예한 군사들 과 맞붙어본 경험이 있는 유비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들려오는 풍문도 심상치 않았다. 조조가 원소와 유비의 생각을 알고 조인에게 대군을 주어 여남으로 보내리란 것이었다. 그 대군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나 적어도 조조가 아우 조인을 골라 보내 는 것만으로도 매서운 공격이 되리라는 것쯤은 알 만했다.
이에 유비는 싫든 좋든 원소에게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원소의 변덕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보다는 이미 깊 은 앙심을 품은 조조의 공격이 더 급한 발등의 불이었다. 여남에 남 아 섣불리 조조의 대군에 맞서다가 싸움에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 해도 또 한 번 패장이 되어 원소에게 더욱 업신 여김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그러나 떠나올 때 원소에게 해둔 말이 있어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내가 보니 이 군사로는 조조의 대군을 당해낼 수 있을 성싶지 않 소. 차라리 두 분께서는 하북으로 가서 원소와 힘을 합치는 게 어떻 겠소?”
생각다 못한 유비가 유벽과 공도에게 그렇게 권해보았다. 유비가 온 일로 크게 기대에 부풀어 있던 두 사람은 그 말에 얼굴이 실쭉해 졌다.
“황숙께서 어떻게 헤아리신지는 모르되 그렇게는 아니 되겠습니 다. 비록 우리 두 사람이 거느린 군사가 적다 하나 그래도 이미 조조가 보낸 군사를 물리친 일이 있습니다. 어찌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이 여남을 조조에게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황숙께서 정히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면 홀로 하북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서 원본초(袁本 初)께 우리가 위급할 때 구원이나 잊지 말라고 전해주시면 마음이나 마 든든하겠습니다.”
도적의 무리라고는 해도 자신의 근거지를 버리고 남의 밑에 들기 는 싫었던지 유벽과 공도가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두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니 유비는 할 수 없이 빈손으로 원소에 게 돌아갔다. 다시 원소의 변덕에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한이 있더라 도 세력이 큰 그 아래 있으면서 변화를 구해보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비의 그 같은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원소는 다시 돌아왔 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유비를 전보다 더 믿어주는 것 같았다. 유 비가 여남으로 떠났을 때 실은 원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몸을 빼쳐 달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수군댄 모사들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하북으로 돌아와도 유비의 마음은 편하지가 못했다. 자기 를 찾아 길을 떠났을 관우 때문이었다. 손건을 보내기는 했으나 과 연 관우가 무사히 조조의 땅을 벗어났는지, 그리고 벗어났다면 어디 로 갔는지 궁금하고도 불안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여남 으로 갔던 관우가 하북으로 찾아오는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랜다 해도 원소가 눈앞에 나타난 관우를 보면 또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장비는 아직 종적조 차 모르고 있었다.
유비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소리 없는 탄식과 한숨을 짓고 있을 때 문득 시중드는 군사가 들어와 알렸다. 유비가 원소에게 있음 을 수소문해 듣고 여기저기서 찾아든 약간의 장졸 중의 하나였다.
“관장군을 맞으러 갔던 손 종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바로 손건이 돌아온 것이었다.
기다리던 사람이라 유비는 펄쩍 뛰듯 일어나 손건을 맞았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손건이 예를 마치기 바쁘게 유비가 물었다. 손건은 도중에 관우를 만난 일이며 다시 장비를 만나고 여남까지 갔던 일을 빠짐없이 말 했다.
“하늘이 이 유아무개를 버리시지는 않으셨구나!”
관우가 무사히 조조의 땅을 빠져나온 데다 생사를 몰랐던 장비까 지 만났다는 말을 듣자 유비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도 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감개에서 벗어나자마자 조용히 말했다.
“간옹(雍)이 또한 여기 있으니 가만히 불러 의논해보도록 하세. 그 사람은 지모에도 밝아 반드시 여기서 몸을 빼칠 좋은 꾀를 낼 것 일세.”
유비가 몰래 사람을 보내 부르자 오래잖아 간옹이 이르렀다. 원 래 유비와 같은 탁군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냈는데, 그 무렵에는 원소에게 몸담고 있어도 마음은 이미 유비의 사람이었다. 유비가 손건에게서 들은 말을 옮기고 원소로부터 몸을 빼칠 계교 를 묻자 잠깐 생각에 잠기던 간옹이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내일 원소를 찾아보고 형주로 가야겠다고 말씀하십시오. 그곳 태수 유표를 달래 함께 조조를 치게 만들겠다고 하면 아마도 원소는 허락할 것입니다. 그때 얼른 기회를 틈타 관장군께로 가시면 됩니다.”
“그 참 좋은 계책이오. 그러나 공은 어떻게 빠져나와 나를 따라오겠소?”
유비가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지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간옹은 이미 마련해둔 꾀가 있는지 거침없이 대답했다.
“제 일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따로 이 몸을 빼칠 계교가 있습니다.”
그러자 유비도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그 계책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의논을 맺었다.
다음 날이었다. 유비는 아침 일찍 원소를 찾아보고 말했다.
“유경승(景)은 형주와 양양에 걸친 아홉 군을 다스리고 있는 데 그 군사는 날래고 곡식은 넉넉합니다. 마땅히 그와 더불어 맹약 을 맺어 함께 조조를 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그에게 사자를 보내 함께 힘을 합치자 하였으나 그는 아직도 따르지 않고 있소. 그런데 갑자기 유표의 일은 왜 꺼내시오?”
원소가 갑작스럽다는 듯 유비를 빤히 건너다보며 물었다. 유비가 태연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이 비와 같은 종친입니다. 제가 가서 달랜다면 반드시 망설이지 않고 명공께로 올 것입니다.”
유비가 그렇게 대답하자 원소의 얼굴이 문득 환해졌다. 조조와 싸 움을 시작한 이래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아 울적해 있던 그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만약 유표만 얻을 수 있다면 유벽 따위를 얻는 것보다는 몇 배나 나을 것이오.”
그러고는 선선히 유비가 형주로 가는 일을 허락한 뒤 불쑥 덧붙였다.
“요사이 듣자니 관운장이 이미 조조를 떠나 하북으로 오고자 한 다고 하오. 그가 오면 마땅히 죽여 안량과 문추를 잃은 한을 풀도록 해야겠소.”
얼핏 들으면 엉뚱한 소리였지만 제 딴에는 선심을 베푼다는 뜻인 것 같았다. 전에 관운장이 오면 안량과 문추 대신 쓰겠다고 말했으 나 그새 마음이 변한 것인데, 이번에 유비가 자신을 위해 먼 길을 떠 나게 되니 나중에라도 섭섭하지 않게 특히 알려준다는 투였다.
이제 자신만 빠져나가면 관운장이 하북으로 올 리도 없고, 또한 원 소에게 죽음을 당할 걱정도 없었으나 유비는 짐짓 놀란 체 물었다. “전에 명공께서 쓰시겠다 하시기에 제가 사람을 보내 관운장을 이리로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제 와서 다시 죽이려 하십니까?”
“아무래도 죽은 안량과 문추를 생각하니 그를 살려둘 수가 없소. 현덕께서 너무 섭섭히 여기지 마시오.”
원소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뚱한 얼굴로 그렇게 잘라 말했다. 유 비는 그 같은 원소의 변덕에 아연하면서도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명공께서 진정으로 천하를 다투시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비유컨대 안량과 문추가 두 마리의 사슴이라면 운장은 한 마리 호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슴 두 마리를 잃고 호랑이 한 마리를 얻는 일인데 한이라니 무슨 한이란 말씀입니까?”
유비의 말을 듣자 원소의 사람 욕심이 다시 변덕을 일으켰다. 방 금 한 말을 농담으로 돌리려는 듯 일부러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말 했다.
“내가 운장을 너무 사랑하여 한번 장난삼아 말해보았을 뿐이오. 설마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를 헛되이 죽일 리야 있겠소? 공은 다시 사람을 보내 운장을 얼른 오라고 이르시오.”
“즉시 손건을 보내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유비가 원소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했다. 자신도 빠져나갈 구실이 있고 간옹도 이미 마련해둔 꾀가 있었으나 손건까지는 핑계 가 없어 답답하던 그로서는 원소의 말이 반갑기 짝이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원소는 손건 또한 기꺼이 보내주었다.
유비와 손건은 원소의 허락을 받자마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하북을 떠났다. 원소 앞을 떠날 때는 각기 방향이 달랐으나 가는 곳 은 마찬가지로 관운장이 묵고 있는 장원이었다.
유비와 손건이 떠난 지 오래잖아 이번에는 간옹이 원소 앞에 나 아가 말했다.
“유비는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해도 속으로는 주공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유비와 함께 형주로 보내주십시오. 아직 떠난 지 오래지 않았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 주공의 명을 전한다면 그도 어쩔 수없이 저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유비와 힘을 합쳐 유표를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비가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감시하겠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유비를 보내었던 원소였으나 그 말을 듣자 더럭 의심이 들었다. 유비를 보낼 때의 너그러움은 간곳없이 간을 재촉 해 유비를 뒤쫓도록 했다.
유비와 손건이 떠나가고 다시 간옹마저 뒤따라 떠나려 하자 원소 의 모사 곽도가 나서서 간했다.
“앞서 유비는 유벽을 달랜다고 갔으나 끝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 다. 그런데 이제 다시 형주로 간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더구나 간옹은 유비와 한 고향 사람으로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입니다. 겉으 로는 유비를 감시한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있지만 속은 다를 것입니 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일을 밝게 보고 하는 소리였으나 이미 간옹에게 넘어간 원소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벌컥 역정까지 내며 곽도를 물 리쳤다.
“간옹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니 그대는 쓸데없이 의심하지 말라! 어찌 유비 따위를 따르기 위해 나를 저버리겠느냐?”
마치 백만 대군과 넓은 땅을 가진 자신과 의지가지없이 떠도는 유비를 비교하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투였다. 좋은 뜻으로 간했다가 오히려 야단만 맞게 되자 곽도는 이를 갈았다.
‘두고 보아라.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원소 앞을 물러났다.
한편 남쪽 형주를 바라고 기주성을 나섰던 유비는 곧 말 머리를 동으로 돌려 손건과 약정한 곳에서 만났다.
“그대는 먼저 운장에게 돌아가 내가 간다는 것을 알리게 혹시라 도 잘못 생각하여 하북으로 들까 봐 걱정되네. 나는 간옹이 뒤따라 오기를 기다려 함께 그리로 가겠네.”
그 말에 따라 손건은 먼저 관운장에게로 달려가고 유비는 간옹을 기다리며 천천히 뒤따랐다. 과연 오래잖아 요란스런 말발굽 소리와 함께 간옹이 왔다. 그가 원소로부터 몸을 빼쳐 나온 계책을 들은 유 비는 한편으로는 간옹의 기지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 소를 위해 탄식해 마지않았다.
“무릇 남의 우두머리 된 자로서 지녀야 할 덕성 중에 가장 으뜸은 뜻을 하나로 정해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원본초는 뜻을 정하기에 더딜 뿐만 아니라 한번 정한 것도 죽 끓듯 뒤바뀐다. 거기다가 이제는 그 변덕이 널리 알려져 남에게 이용되기까지 하니 그 끝을 보는 듯하다. 잠시나마 내가 곤궁한 몸을 의지했던 사람이 니 실로 안됐구나!”
그러고는 간옹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길을 재촉했다.
하북의 경계에 이르니 관운장에게 전갈을 마친 손건이 다시 나와 유비와 간옹을 맞았다. 관정(定)의 장원 문 앞에는 관운장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별래 무양하시었습니까?”
관우가 엎드려 절을 올리자 유비가 말에서 뛰어내려 쓸어안고 일으켰다.
“운장을 살아서 다시 만나니 실로 꿈만 같구나!”
관우의 손을 잡은 유비의 눈에서는 샘솟듯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굳기가 철석같다는 관운장도 흐르는 눈물은 어찌하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는 눈물로 회포를 푼 형제는 이윽고 주인 관정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초당에 자리 를 마련해둔 관정은 모두가 앉기를 기다려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둘다 생김이 씩씩하고 눈빛이 남달랐다.
“좋은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름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사이 마음을 가다듬은 유비가 관정에게 물었다. 관우가 관정을 대신해 대답했다.
“집주인 되시는 이분은 저와 성이 같은데 저 젊은이 둘은 이분의 아들들입니다. 큰아들은 관녕(關)이라 하며 글을 배웠고, 둘째 아 들은 관평(關平)이라 하며 무예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관정이 머뭇거리며 말을 보탰다.
“제 어리석은 소견에는 둘째놈으로 하여금 관장군을 따르게 하고 싶습니다만 받아들여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나이가 몇 살이 됩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유비가 문득 관정에게 물었다. 관정은 흰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열여덟이 됩니다.”
그러자 유비가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이미 어르신의 후한 대접을 받은 데다가 또 내 아우는 아직 아들을 두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 젊은이를 내 아우의 아들로 삼게 하고
싶은데 어르신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그 말에 관정은 몹시 기뻐했다. 유비에게 대답하는 대신 관평에게 일렀다.
“너는 얼른 관장군께 절을 올려라. 앞으로는 아버지라 불러야 한 다. 그리고 유황숙께도 절을 올려라. 네 큰아버님 되시는 분이다.”
그러고는 하인들을 불러 큰 잔치를 열 준비를 하게 했다. 유비가 그런 과정을 말렸다.
“비록 하북 땅은 벗어났다 하나 아직 원소의 추격에서 온전히 벗 어난 것은 아닙니다. 급히 길을 떠나야 하니 잔치는 뒷날로 미루어 주십시오.”
유비의 그 같은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관정도 따르는 수밖에 없 었다. 떠나가는 유비 일행을 한 마장이나 바래다주는 것으로 깊은 정을 표시하고 돌아갔다. 다만 관평만은 새로이 아버지가 된 관운장 을 뒤따라 함께 떠났다.
“아무래도 군사를 좀 거두어 호위로 삼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와 우산이라는 곳에 약간의 군사가 기다리기로 되어 있으니 그리로 가 십시다.”
관정이 돌아간 뒤 관운장이 앞서 길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고 성을 떠날 때 주창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처 와우산으로 접어들기도 전이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주창이 겨우 여남은 명의 졸개만 데리고 비틀거리며 오고 있었 다. 놀란 관운장이 주창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무슨 일로 그토록 심하게 다쳤는가?”
그러자 주창이 분한 얼굴로 까닭을 밝혔다.
“장군의 명을 받고 와우산에 와보니 마침 한 장수가 졸개 하나 없 이 배원소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습니다. 배원소가 마주 나가 싸웠으 나 겨우 한 합에 찔려 죽고, 그 장수는 항복한 졸개들을 불러모아 산 채를 차지해버리더군요. 제가 가서 졸개들을 다시 끌어내보려 했으 나 달아난 자들을 빼면 모두 겁에 질려 감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저는 분해 견딜 수 없어 그 장수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그 러나 싸움에 몇 번을 잇달아 지고 몸도 세 군데나 창에 찔려 더 버 티지 못하게 돼 하는 수 없이 장군께 알리려고 도망쳐 나오는 길입 니다. 장군께서 처결해주십시오.”
그때 곁에 있던 유비가 주창에게 물었다.
“그 사람의 생김이 어떠하던가? 또 이름은 무엇이라던가?”
“몹시 몸집이 크고 사내답게 생겼는데 그 이름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주창이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주창의 말을 들은 관공이 문득 말의 배를 차며 유비에게 소리쳤다.
“형님, 어떤 자가 그리 방자한지 아우가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주창이 다친 것이나 그대로 두면 자기편의 군사가 될 졸개들을 가로채인 데 대한 분노보다는 정체 모를 강적에 대한 호승심이 인 것임에 분명했다. 유비도 알 수 없는 조급에 빠져 그런 관우를 급히 뒤따랐다.
관우가 앞서고 유비가 뒤를 쫓듯 말을 달려 형제는 곧 와우산으로 접어들었다. 그사이 산 아래에서는 주창이 그 정체 모를 장수를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이 산을 치달아 오르는 것을 보았는지 아니면 주창의 욕 질에 끌려나온 것인지 상대편 장수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긴 창을 든 채 말 위에 탄 그 장수 뒤에는 수백의 졸 개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멀리서 그 장수를 한참이나 눈여겨보던 유비가 감격에 떨리는 목 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앞에 오는 것은 자룡이 아닌가?”
그 물음에 상대도 눈을 크게 뜨고 유비를 살피더니 문득 안장에 서 내려 길가에 엎드렸다. 이어 큰 쇠북을 치는 듯한 목소리가 엎드 린 그의 입에서 울려 나왔다.
“조운이 황숙을 뵙습니다.”
정말로 조자룡이었다. 유비와 관우도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뛰어 내려 조자룡의 예를 받았다.
“자룡도 살아 있었구나! 나는 공손찬 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 고 얼마나 자네를 걱정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홀로 살아남아 실로 면목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조자룡의 소년 같은 얼굴에는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 많고 감격하기 쉬운 유비의 눈도 부 옇게 흐려졌다.
“부끄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일세. 어쨌거나 공손백규(公孫伯珪)는 내게 혈육보다 더한 정을 보냈는데 나는 앉아서 그가 망하는 걸 구경만 해야 했으니…………….”
유비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물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때 서주에서 운(雲)은 이미 공손찬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 으나 명공의 분부가 엄해 어쩔 수 없이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손찬은 갈수록 허황되고 교만스러워져 통 남의 말을 듣지 않다가, 끝내는 패망하여 불타는 역경(易京樓)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았습니다. 그 무렵 공손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을 지키던 나는 급 히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지요. 그 뒤 원소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저를 불렀습니다. 원소 또한 사람 을 바로 쓸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서주에 계신 명공만 생각하고 그리로 가 이 한 몸 을 의탁할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주에 이르기도 전에 놀 라운 소문부터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미 성이 떨어지고, 운장께서는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명공께서는 원소 에게로 가셨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저는 몇 번이나 명공을 찾아 원 소에게로 가려 했습니다만 원소가 이상하게 여길까 보아 결국은 가 지 못했습니다. 제가 간 것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공을 쫓아 서라는 걸 원소가 알면 저뿐만 아니라 명공까지 해칠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남은 길은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도는 것뿐 이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흩어진 공손찬의 군사를 끌어모아 약 간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오래잖아 그들마저 떠나버려 홀몸 이 되고 말았지요.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는데, 갑자기 배원소가 산을 내려와 제 말을 빼앗으려 한 게 탈이었습니다. 얼결에 그를 죽이고 나니 산채와 졸개들이 생겨 잠시 이곳에서 몸을 숨길 마음이 난 것입니다. 근래에는 또 익덕이 고성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허나 그에게 가려 해도 그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이던 차에 다행히도 이렇게 명공을 뵙게 된 것입니다.”
조운은 유비와 눈물로 헤어진 뒤의 일을 그렇게 간추려 말했다. 그가 자기를 잊지 않고 찾고 있었다는 걸 알자 유비는 크게 기뻤다. 유비 또한 감회에 젖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조운에게 들려 주었다.
관우도 아울러 지난 일을 간략히 말했다. 관우의 얘기가 끝나자 유비가 다시 조운의 손을 쓸며 말했다.
“나는 자룡을 처음 볼 때부터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 떨쳐버릴 수 없었네. 그러나 그대가 이미 공손찬 형의 사람이라 차마 내 곁에 잡 아둘 수 없었는데 이제 다행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기 짝이 없네. 죽은 사람에게는 안된 일이나, 내게는 백만 대군을 얻은 들 이보다 더 든든하겠나?”
“운도 사방을 돌아다니며 섬길 만한 주인을 찾았으나 아직 명공 만한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상산초옹(常山 어른의 말씀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따르게 되었으니 평생의 큰 소원을 푼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명공을 위한 일이라면 간과 뇌를 쏟으며 쓰러진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조운도 진심 어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로 산채를 불사른 뒤 졸개들을 이끌고 유비를 따랐다. 십 년 전 반하磐)에서 처음 만난 이래 엇갈리기만 하던 인연의 끈이 드디어 둘을 맺어준
것이었다.
그런데 부질없는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조운이 유비의 사람 이 된 경위에 대해서 ‘조운별전(趙雲別傳)’에서는 달리 전한다. 대략 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조운이 원소를 마다하고 공손찬을 섬기러 갔을 때 유비도 또 한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유비는 조운을 매양 두터운 정으로 대하고 조운도 유비의 인품에 반해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제 주인 공 손찬보다 더 높이 여겼다. 뒷날 공손찬에게 실망한 조운은 형이 죽 은 걸 핑계로 공손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유비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손을 어루만지며 마지막 작별을 했 다. 조운이 나직이 유비에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떠나가나 이것은 명공에게서가 아니라 공손찬에게 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명공의 은덕은 평생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떠나갔던 조운은 몇 해 뒤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 게 의지하고 있을 때에야 다시 나타났다. 조운을 만난 유비는 늘 잠 자리를 함께할[同床眠臥]만큼 그를 아끼고 가까이했다. 그리고 원소 몰래 조운을 보내 자신을 위해 군사를 모으도록 하니, 그는 얼마 안 돼 수백의 군사를 모아 왔다. 원소의 진중에 있으면서도 모두 스스 로를 ‘유좌장군의 군사[劉左將軍軍師]’라 할 만큼 유비만을 따른 자들 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조운이 자기를 위해 군사를 모아 온 줄로 알았을 뿐 유비의 군사를 모아 온 줄은 끝내 몰랐다. 뒤에 그 군사들과 함께, 원소에게서 떠난 유비를 따라 형주로 갔다………….
또 정사는 유비가 전해(田楷)를 위해 원소와 맞설 때 공손찬의 명 을 받고 유비의 주기(主)가 되어 싸운 이래로 유비의 사람이 되었 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쨌든 조운이 원래 유비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세 천하를 삼킬 듯한 기 세를 보이는 주인을 마다하고 기껏해야 객장(客將)이거나 부장에 지 나지 않는 유비를 마음의 주인으로 정하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 성으로 섬겼다. 조조가 갖은 공을 다 들이고도 끝내 관우를 제 사람 으로 만들지 못했음에 비해 유비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조운을 제사 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유비의 사람을 끄는 힘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조조가 지혜에 서도 병법에서도 세력에서도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유비를 끝내 꺾지 못하고 죽은 강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조운과 산채의 졸개 수백을 받아들여 제법 당당한 행렬을 이룬 유비는 고성에 이르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 도착을 알렸다. 장비 와 미축, 미방 형제가 구르듯 달려 나와 유비 앞에 엎드렸다. 감정이 단순하고도 격한 장비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미축과 미방도 오랜만에 만난 주인이자 생사를 모르던 매형을 다시 만난 기 쁨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다. 어서 성안으로 들어가자.”
이윽고 관우가 나서서 장비를 달래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생사를 모르던 낭군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부인이 눈물로 유비를 맞았다. 유비인들 어찌 감회가 깊지 않으리오마는 애써 눈물을 감춘채 위로했다.
“그간 얼마나 고초들이 심하셨소? 모두 이 몸의 덕이 없는 탓이외다.”
그러자 두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말 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을 때로부터 허도에서의 나날이며 다 시 허도를 떠나 다섯 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죽인 일, 장비의 오해 와 채양의 죽음 등에 이르기까지 두 부인이 번갈아 이르니 유비는 물론 처음 듣는 사람은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 삼형제는 소를 잡고 말을 죽여 그 옛날 고향의 복사꽃 핀 동 산에서 한 것처럼 먼저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다시 크게 잔 치를 벌여 군사들의 노고를 달래주었다. 유비는 삼형제가 다시 모두 만나게 된 데다 그렇게도 탐내던 조운까지 새로이 얻었고, 관우도 관평과 주창 두 사람을 아들과 심복으로 거두었으니 기쁘기 한량없 었다. 장비 또한 기쁘기는 손위의 두 형에 진배없어 술자리는 며칠 을 이어졌다. 그 일을 듣는 뒷사람인들 어찌 감회가 없으랴. 시(詩) 를 지어 그 광경을 노래했다.
그때는 손과 발이 잘리듯 서로 나뉘고 當時手足似瓜分
소식 전할 말과 글 모두 끊겨 아득히 듣지 못했다. 信稀不聞
오늘 임금과 신하 다시 함께 의로 모이니 今日君臣重聚
용과 호랑이 서로 만나 풍운이 이는 듯하구나. 正如龍虎會風雲
이때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 손건, 간옹, 미축, 미방, 관평, 주창 에다 딸린 마보군도 사오천이나 됐다.
“지금껏 이 성은 우리 형제가 만나는 데 요긴하게 쓰였으나 이제 는 맞지 않다. 사람도 자라면 큰 옷을 지어 입어야 하는 법, 이 성은 너무 좁고 한갓지니 보다 넓고 든든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여남으로 가보는 것이 어떠하냐?”
며칠에 걸친 술자리로 어느 정도 쌓인 회포를 푼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불러놓고 물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 그리 따뜻한 대접을 받 지 못했던 관우가 신중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이 고성이 길게 있을 곳이 못 되는 줄은 압니다만 유벽과 공도가 우리를 반겨 맞아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비록 천하를 담을 큰 그릇은 못 된다 해도 그리 앞 뒤가 막힌 위인들은 아니다. 스스로 청하기라도 해야 할 판에 우리 가오는 걸 왜 마다하겠나?”
유비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장비가 옆에서 팔을 걷고 나섰다.
“까짓것, 안 되면 그 두 놈을 모두 요절내버리면 되지 않소?”
관우가 그런 장비를 조용히 나무랐다.
“너는 그 고생을 하고도 아직 성미를 고치지 못하는구나. 세상이 어디 힘으로만 된다더냐?”
“운장의 말이 옳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 또한 여포나 원술의 무리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유비도 관우를 편들었다. 그리고 다시 의논을 계속하려는데 손건이 와서 알렸다.
“여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유비가 반갑게 불러들여 만나보니 다름 아닌 유벽과 공도의 사자 였다. 유비가 이미 원소에게서 벗어나 고성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여남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온 것이었다.
“마침 잘됐다. 어서 여남으로 가자.”
유비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그날로 고성 을 떠났다. 그리고 여남에 이르러서는 유벽, 공도와 힘을 합쳐 군사 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며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