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7화 : 아깝다, 강동의 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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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7화 : 아깝다, 강동의 손랑


아깝다, 강동의 손랑

한편 원소는 유비가 형주로도 가지 않고 되돌아오지도 않자 불같 이 노했다.

“유비 그귀 큰 도적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모두 어서 군사를 일 으킬 채비를 하라. 내 몸소 나아가 그놈을 사로잡으리라!”

그렇게 소리치며 좌우를 재촉했다. 곽도가 나서서 말렸다. 

“유비는 크게 걱정할 게 없습니다. 오히려 강한 적은 조조이니 그 부터 먼저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공께서는 잠시 진노를 멈추 시고 그 계책부터 세우십시오.”

“조조를 먼저 없애야 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래서 유비를 보내 형주 유표를 끌어들이려 한 게 아닌가? 그런데 유비 그놈이…………….” 

곽도의 말에 원소가 그렇게 대답하다가 새삼 화가 치솟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원소를 곽도가 다시 달랬다.

“유표가 비록 형주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를 끌어들인다 해도 그리 큰 힘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유표보다 몇 배나 큰 세력을 가진 자가 있으니 그를 끌어들이도록 하십시오.”

“그게 누군가?”

“강동의 손책입니다. 그의 위세는 삼강(三江)에 떨치고 땅은 여섯 군에 이어지며 모사와 장수들도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보내 그와 동맹을 맺은 뒤에 함께 조조를 치도록 하십시오. 반드시 조조를 없 앨 수 있을 것입니다.”

원소가 들어보니 귀가 솔깃한 말이었다. 조금 전의 그 불 같은 노 기도 잊고 곽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곧 화친을 구하는 글 한 통을 쓴 뒤 진진(陳)을 사자로 삼아 강동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무렵 강동은 평안치가 못했다. 손책의 세력은 곽도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 몸은 중태에 빠져 있었다. 자객을 만 나 그리된 것인데 그 경위는 대강 이러했다.

강동을 차지한 이래 손책의 세력은 날로 불어났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넉넉해 건안 사년에는 여강(廬江)을 쳐서 빼앗고 그 태수 유 훈(勳)을 죽였으며, 또 우번을 시켜 예장 태수 화흠()에게 항 복받았다. 한꺼번에 두 군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손책의 성세는 더욱 크게 떨쳐 울렸다. 손책은 그 기 세를 타고 장(張紘)을 허도로 보내 그 승리를 천자께 고하게 했다. 장굉이 가져온 표문과 뒤이어 들리는 소문으로 손책의 강성함을 안 조조는 탄식했다.

“실로 사자의 새끼로구나! 다투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조인의 딸을 손책의 어린 아우 손광(孫匡)에게 시집 보내 두 집안의 화친을 도모하게 했다. 이에 더욱 기가 난 손책은 허도에 머물고 있는 장광을 통해 다시 대사마 벼슬을 구하였다. 아무리 손 책을 두렵게 여기는 조조라 해도 그것까지는 허락할 수 없었다. 겨 우 스물너덧의 손책에게 지난날 이각이 그 전성기에 올랐던 최고의 벼슬을 내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내 먼저 조조부터 쳐부수리라.”

원하던 벼슬을 얻지 못해 한을 품은 손책은 그렇게 내뱉으며 그 때부터 매양 허도를 치려고 엿보았다.

이때 오군(郡)의 태수에 허공(貢)이란 사람이 있었다. 손책이 허도를 노리는 걸 보자 가만히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게 했다.


‘손책의 날래고 씩씩함은 지난날 항적(項)에 견줄만합니다. 그 에게 높은 벼슬과 영예를 내려 마음을 어루어준 뒤에 경사(師)로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바깥 진(鎭)에 있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반 드시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그릇되어 글을 품고 장강을 건너려던 허공의 사자가 그곳을 지키던 손책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군사들은 그 사자의 몸을 뒤져 허공의 글을 찾아내고 곧 그와 함께 손책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글을 읽어본 손책은 크게 노했다. 그 자리에서 허공의 사자를 목 벤 뒤 사람을 허공에게 보내 의논할 일이 있다며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허공은 부르는 대로 손책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놈!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허공이 나타나자 손책은 대뜸 빼앗은 글부터 내보이며 소리쳤다. 그리고 허공이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꾸짖었다.

“너는 나를 죽을 곳으로 보내려 했다. 이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랐느냐?”

그 소리에 비로소 일이 잘못된 걸 안 허공은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했으나 이미 혀가 굳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 다. 그런 허공을 성난 눈길로 노려보던 손책이 다시 무사들에게 소 리쳤다.

“저놈을 끌어내다 목매달아라!”

허공이 그렇게 죽자 그 가솔들은 모두 풍비박산으로 흩어져 달아 났다. 그런데 그 가솔들 속에 평소 허공이 아끼던 가객(家客)이 셋 있었다.

그들은 살았을 때 자기들을 두터운 정으로 대해준 허공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한스럽게도 기회가 없었다. 언제나 무사들에 게 둘러싸여 있는 손책이라 그들 셋의 힘으로는 터럭 하나 다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손책의 주위를 맴돌며 기다리는데 마침내 때 가 왔다. 어느 날 손책이 군사들을 이끌고 단도의 서산으로 사냥을 나선 것이었다. 짐승을 쫓다 보면 호위하는 무사들로부터 떨어지게 되는 수가 있어 허공의 세 가객은 그때를 노리기로 했다.

드디어 사냥이 시작됐다. 한참 몰이를 해나가는데 문득 손책 앞으로 큰 사슴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손책은 좋아라 말을 박차며 그 사슴을 쫓았다. 한동안 정신없이 쫓다 보니 문득 사슴은 어디 가고 숲속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창을 들고 활을 멘 채였다. 손책은 그들이 그저 몰이꾼이거 니 여겨 말고삐를 당기며 무심코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희들은 한당 장군의 군사들로 이곳에서 사슴을 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천연덕스런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손책은 별 의심 없이 다시 말고삐를 당기며 놓쳐버린 사슴을 찾으려 했다. 그때 셋 중의 하나가 재빨리 창을 내질러 손책의 왼편 넙적다리를 찔렀다. 

“윽!”

손책은 한소리 아픔과 놀라움이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급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자를 베려 했다. 그러나 손책의 운이 다했는지 칼 날이 빠져 달아나며 손에는 빈 칼자루만 남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 지 않고 다른 하나가 재빨리 활시위에 살을 먹여 당겼다. 시위 소리 와 함께 화살은 어김없이 손책의 뺨에 꽂혔다. 손책은 아픔을 참고 화살을 뽑아낸 뒤 자신도 급히 활을 들어 방금 활을 쏜 자객을 쏘았 다. 그 자객은 쓰러졌으나 이번에는 남은 둘이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우리는 허태수(허공)의 보살핌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이제 억울하 게 죽은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이렇게 왔다. 손책은 순순히 목숨을 내놓아라!”

둘은 이렇게 소리치며 함부로 손책을 찔러댔다. 손에 별다른 무기 를 갖지 못한 손책은 활대를 휘둘러 창을 막아내는 한편 길을 앗아 달아나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여러 곳을 다친 데다 두 사람은 또 죽 기로 덤비며 물러서지 않으니 손책은 다시 몇 곳에 더 창을 맞고 말 또한 제대로 닫지 못할 만큼 다쳤다.

그대로 가면 손책은 마침내 두 자객의 창 아래 목숨을 잃을 만큼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정보가 졸개 몇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덕모, 얼른 이 도적들을 죽이시오!”

손책이 간신히 힘을 모아 소리쳤다. 정보는 놀라움과 분노로 두 자객에게 덮쳐갔다. 그 뒤를 졸개들이 분분히 뒤따르니 자객들은 곧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되어 숨이 끊어졌다.

비록 그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평소 그들을 거두어준 허공에 대 한 의리로 보면 실로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얼핏 보면 소의 (小)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때로 역사는 그들에 의해 바꾸어지기 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그런 이들을 충신 명유(明)와 나 란히 적은 이래 중국의 거의 모든 기전체(紀傳體정사가 한결같이 협객열전(列傳)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로 그러한 까닭이리라. 정보가 두 자객을 죽인 뒤 손책을 보니 얼굴은 피투성이요, 몸에 도 여러 군데 무거운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정보는 급히 옷깃을 찢어 손책의 상처를 싸맨 뒤 오회 땅으로 손책을 옮겨갔다. 그리고 지난 날 주태를 치료한 명의 화타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 또한 손책의 운이 다했는지 화타는 중원으로 가고 없고 남은 것은 화타의 제자뿐이었다. 스승을 대신해 불려온 제자는 한동안 손책의 상처를 살피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화살촉에 바른 독이 이미 뼈에까지 스몄습니다. 백날을 정양하 신 뒤라야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전에 노 기로 크게 격동되는 일이 있으면 이 상처는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비록 제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천하의 화타에게 닦은 의술이 라 제대로 볼 줄은 아는 듯했다.

아무리 성미가 불같은 손책이라 할지라도 목숨이 달린 일이니 어 쩔 수 없었다. 어서 빨리 백날이 지나 상처를 털고 일어날 때를 기다 리며 급한 성미를 누르고 자리보전을 했다.

그렇게 한 스무 날쯤 보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허도에 가 있는 장굉으로부터 사자가 달려왔다. 비록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다고는 하나 눈과 귀가 멀쩡한 손책이 그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궁금함을 참 지 못해 사자를 불러들여 허도의 소식을 물었다.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던 끝에 사자가 눈치 없는 말을 했다.

“조조는 몹시 주공을 두려워하고 그 아래 있는 모사들도 한결같 이 주공께 경복해 마지않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곽가만이 주공 을 대단찮게 말하고 있습니다.”

“곽가가 무슨 소리를 하던가?”

문득 손책이 성난 기색으로 캐물었다. 그제서야 잘못을 알아차린 사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더욱 성이 난 손책은 그런 사자를 매 섭게 재촉했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사자가 들은 대로 털어놓았다. 

“곽가가 일찍이 조조하고 마주 앉아 말하기를, 주공은 크게 두려워할 바 못 된다고 했습니다. 몸가짐이 가볍고 어려움에 대비함이 없 는 데다 성품이 급하고 지모가 적어 비록 용기가 있다 해도 필부의 뽐냄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주공께서는 뒷날 반드 시 보잘것없는 자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소리까지 덧붙였습니다.”

손책이 아무 일 없이 지내는 때라 해도 그 같은 곽가의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이름없는 자객들에게 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때이고 보니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억눌렸 던 노기가 일시에 솟구쳐 이를 갈며 소리쳤다.

“곽가 그 하찮은 놈이 나를 어찌 보고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내 맹세코 허창을 취해 그놈의 혀를 뽑아놓으리라!”

그리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도 잊은 채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들여 군사를 일으킬 의논을 시작했다. 장소가 그런 손책을 깨우 쳤다.

“의자가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백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몸조리를 하셔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한때의 분함 을 참지 못하시고 귀한 몸을 스스로 가벼이 두려하십니까?”

그러나 성난 손책은 그 같은 장소의 말조차 귀담아듣지 않으려 했다. 거듭 허도를 칠 의논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원소로부터 사 자가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손책이 불러들여 보니 진진이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소?”

원소 또한 대단하게 보지 않는 손책은 자기 수하 대하듯 물었다. 진진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저희 주공께서는 장군과 더불어 힘을 합쳐 역적 조조를 치고자 하십니다. 저희가 대군을 내어 조조를 칠 때 동오(東吳)도 밖에서 호 응하여 군사를 낸다면 조조 제가 무슨 수로 앞뒤를 다 감당해내겠습 니까? 가깝게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바로잡고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 는 길이요, 멀게는 하늘의 뜻을 대신해 간악한 역적 조조를 쳐 없애 는 길이니 부디 때를 놓침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책은 몹시 기뻤다. 한마디로 원소의 뜻을 받아들 이고 곧 여러 장수들을 성루로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 진진을 대 접함과 아울러 조조를 칠 의논을 다져놓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시 손책으로 보아서는 불운한 일이 벌어졌다. 한참 술자 리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장수들이 저희끼리 수군거리더 니 분분히 몸을 일으켜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냐?”

손책이 괴이쩍다는 듯 물었다. 곁에 남아 있던 장수들이 대답했다. “우(于)씨 성을 쓰는 신선이 한 분 있는데 방금 누각 아래로 지나 가고 있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자리를 뜬 것은 그분을 절하며 뵙기 위함일 뿐입니다.”

미처 누각 아래로 내려가지는 못했으나 자기들도 마땅히 내려가 절하는 게 옳다는 투였다.

손책은 불끈 치솟는 노기를 억누르며 난간으로 가 아래를 내려보 았다. 한 도인이 몸에는 학의 깃털로 짠 옷을 두르고 손에는 명아주 지팡이를 든 채 길에 서 있는데 그 앞에는 백성들이 향을 사르며 엎 드려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손책은 더 이상 노기를 억누르지 못했다.

“저것이 어떤 요사스런 자냐? 어서 빨리 잡아들여라!”

손책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은 자기가 다스리는 강동 땅에 자기보다 더 높임과 우러름을 받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손책의 비위를 곁에 있던 장수들이 멋모르 고 한 번 더 건드렸다.

“저분은 성이 우(于)씨요 이름은 길(吉)이라 쓰는데 동방에 사시 면서 오회 땅을 이따금씩 찾으십니다. 그때마다 부적 태운 재를 푼 물로 많은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바, 한번도 효험이 없는 적이 없습니다. 당세의 신선이라 불리고 있는 분이니 함부로 욕되게 해서 는 아니 됩니다.”

그러자 손책은 더욱 성난 목소리로 재촉했다.

“무슨 소리냐? 어서 빨리 저놈을 끌어오너라. 이 명을 어기는 자 는 목을 베리라!”

칼자루에 손을 대는 품이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구든 당장 목을 칠 기세였다. 그제서야 손책이 몹시 노한 걸 알아차린 군사들은 마지못 해 우길에게 갔다. 하지만 차마 묶을 수 없어 그대로 에워싼 채 누각 위로 데려왔다. 우길에 대한 군사들의 그 같은 공경함이 또 한 번 더 손책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이 미친 늙은이야. 네 감히 인심을 어지럽히고도 성할 줄 아느냐?” 

손책이 우길을 매섭게 쏘아보며 꾸짖었다. 그런데 우길의 대꾸가 또 손책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빈도는 낭야궁(宮)의 도사로 일찍이 순제 때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가 곡양천 가에서 신서(書)를 얻었습니다. 이름하여 『태평청령도(太平淸道)란 책인데 무려 백권에 이르며 내용은 모두 사람의 질병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빈도는 그 책을 얻은 뒤로 하늘의 뜻을 대신해 펴고자 널리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백성들로부터 터럭만 한 재물도 취한 일 이 없거늘 어찌 민심을 어지럽힌다 하십니까?”

손책의 대노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츠러든 기색이 없는 대꾸였다. 그러나 손책은 그 같은 대꾸에서 오히려 우길을 죽여야 할 이유를 찾아냈다.

“일찍이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속은 것은 바로 너 같은 무리에게 서였다. 사람이란 나면 언젠가는 죽는 법, 그런데 너는 이미 순제 때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면 지금은 나이가 이백 살에 가까울 것이 다. 네가 무슨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도라도 깨우쳤다는 것이냐? 그 래 놓고도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고 지껄일 수 있느 냐? 또 너는 백성들로부터 터럭 하나 취한 게 없다고 하지만 네 손 으로 밭 갈고 길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옷을 입고 밥을 먹으니, 그렇다면 그 옷과 밥은 어디서 얻은 것이냐? 백성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네놈을 보니 그 간 교한 거짓말이며 요망한 짓거리가 바로 지난날 장각이 이끌던 황건 의 무리와 같다. 만약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뒷날의 근심덩 이가 될 것이다.”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매섭게 영을 내렸다.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그 말에 장소가 다시 나서 말렸다. 우길이 정말로 신선이라고 믿었다기보다는 그를 따르는 강동의 민심을 헤아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우도인은 이미 강동에 있은 지 십 년이 되나 아직 이렇다 할 잘 못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이러한 무리는 요망한 것들이라 사람 축에 들 수가 없소이다. 내 가 죽인다 한들 개나 돼지를 잡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손책이 이미 뜻을 정한 듯 냉담하게 말했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며 모사들까지 우길에게 쏠리는 것이 더욱 그 같은 뜻을 굳게 해준 것 같았다. 하지만 우길 또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남 의 이름을 훔쳐 썼건 아니건 간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대단 해서 손책 휘하의 여러 관리들까지도 우길을 살리려고 나섰다. 거기 다가 사자로 온 진진마저 말리고 나서니 손책은 차마 그 자리에서 우길을 죽일 수 없었다.

“좋다. 저 요망한 늙은이의 죄를 백일 아래 밝힌 뒤에 목 베리라. 우선은 옥에 가둬두어라!”

마지못해 우길의 목숨을 살려주면서도 아직 노기가 식지 않은 손 책은 그렇게 영을 내렸다.

그 뜻밖의 일로 잔치는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손책의 여러 관 원들은 오래잖아 모두 흩어지고 진진도 쉬기 위해 역관에 들었다. 손책 또한 불쾌한 기분을 씻지 못한 채 부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손책 가까이서 일하는 자 하나가 바깥에서 있었던 그 일 을 안에 있는 오태부인(吳太夫人)에게 전했다. 손책이 우길을 죽이려 고 가두어두었다는 말을 들은 오태부인은 놀랐다. 급히 사람을 보내 손책을 후당으로 불러들이고 말했다.

“내가 듣자니 네가 우길 선인을 묶어 옥에 내렸다더구나. 안 될 일이다. 그 사람은 일찍이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군민이 모두 높이 고 우러르는 바니 결코 해쳐서는 아니 된다.”

“아닙니다. 그자는 요사스런 늙은이로 요술을 부려 백성들의 마음 을 어지럽힌 자이니 없애야 합니다.”

손책이 그렇게 잘라 말했다. 평소에 효자로 이름난 그였으나 이번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오태부인은 두 번 세 번 아 들에게 신선을 죽이지 말라 당부했다.

“어머님께서는 바깥 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결하겠습니다.”

마침내 손책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고 후당을 나왔다. 하지만 홀로 된 어머니의 당부라 아무래도 소홀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만나보 고 뜻을 정하려고 옥리를 불러 우길을 데려오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옥리(獄)들의 선심이 일을 꼬아놓고 말았다. 전부터 우길을 우러러 믿던 옥리들은 비록 손책의 영을 어기지 못해 그를 옥에 가두기는 하였으나 죄인에게 씌울 칼도 차꼬도 없이 그냥 두었다. 그러다가 손책이 갑자기 데려오라고 하자 부랴부랴 칼을 씌 운다 차꼬를 채운다 법석을 떠느라 늦어지고 말았다.

“죄인을 데려오는데 어찌하여 이리 늦느냐?”

기다리던 손책이 짜증난 목소리로 물었다. 한 눈치 없는 관원이 무심코 까닭을 밝혔다.

“칼을 씌우고 차꼬를 채우느라 늦었습니다.”

어머니의 당부로 간신히 숙여 있던 손책의 노기가 다시 천 길이나 솟았다. 자신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옥리들까지 그렇게 우길을 대접할 정도라면 나머지 일반 백성들의 우길에 대한 우러름과 믿음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거기서 손책은 한 위정가로서 질서와 풍속에 대한 우려 이상의 격렬한 시기심까지 느꼈다.

그 같은 손책의 분노는 먼저 옥리들에게 떨어졌다. 손책은 우길을 담당한 옥리에게 매서운 꾸짖음과 매질로 벌을 내리고, 다시 다른 옥리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죄수에게 칼과 차꼬를 채우지 않는 것은 사사로운 정으로 국법 을 어기는 짓이다. 일후 다시 어기는 자는 그 목을 어깨 위에 남겨두 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자 아무리 우길을 우러르는 옥리들이라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다시 옥으로 데려가라는 손책의 영이 떨어지자 우길에게 큰 칼을 씌우고 차꼬를 채워 가두었다.

오태부인이 사이에 들어 우길이 곧 풀려날 줄 알았던 손책의 모사 와 장수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중에는 우길을 진심으로 신선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식견 있는 사람은 그걸 믿지 않으면서도 우길 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과 우러름이 두려워 그를 살리는 일에 나섰 다. 이렇다 할 뚜렷한 죄목 없이 백성들이 아끼고 따르는 자를 죽여 손책이 백성들로부터 미움받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장소(張昭)를 비롯한 수십 명의 관원들이 나란히 이름을 쓴 글을 올려 우길의 목숨을 빌어보았다. 그러나 읽고 난 손책의 응답 은 냉랭하기만 했다.

“공들은 모두 책을 읽은 사람들로서 어찌 이 이치를 모르시오? 지난날 교주 자사였던 장진(張)이라는 자는 사교(邪敎)를 믿고 따르 다가 끝내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소. 북을 치고 향을 사르며 제사 를 지냄으로써 귀신의 힘을 빌어 적을 막으려 들다 그리된 것이오. 원래 그런 일은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없건만 그대들은 그것을 스스 로 깨닫지 못하고 있소이다. 나는 이제 우길을 죽여 바른 생각이 요 사스런 가르침에 혼란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 하오.”

손책의 뜻이 더 움직일 수 없이 굳어 있음을 짐작한 여범(呂範)이 다른 방도를 냈다.

“제가 알기로 우도인은 능히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부를 수 있다 고 합니다. 지금 마침 가뭄이 심하니 그로 하여금 비를 빌어 자신의 죄를 씻도록 해보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손책도 그것은 마다하지 않았다. 우길에게 그 같은 힘이 있을 리 없다고 믿는 그에게는 오히려 그 같은 시험이 우길을 죽일 알맞은 구실을 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그것이라면 좋소. 나도 그 요사한 것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소.” 

손책은 그렇게 허락하고 옥에 있는 우길을 끌어낸 뒤 칼과 차꼬 를 풀어주게 했다

“네가 진정으로 요술을 써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 았다면 그 증거를 보여라. 이제 너를 위해 제단을 쌓아줄 터이니 너 는 하늘에 빌어 비를 오게 해야 한다.”

그 같은 손책의 말을 들은 우길은 곧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손책이 사람을 시켜 쌓아준 제단 위에 오르더니 밧줄을 가져다 스스로를 묶었다. 오뉴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였다.

제단 주위에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서서 우길의 신통력을 보려 했다. 가까운 거리와 골목까지 온통 사람들로 메워질 지경이었다.

우길은 그런 사람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석 자 비를 빌어 가뭄에 시달리는 만백성을 구하겠지만 내 한 몸만은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영험함을 보이신다면 주공께서도 반드시 도인을 우러르고 따를 것입니다.”

우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나 우길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내 운수가 이미 다했으니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손책도 제단 앞으로 왔다.

그러나 그는 우길의 신통력을 보러 온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정오까지 비가 오지 않거든 저 요망한 늙은이를 태워 죽여라!” 

제단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그 같은 영을 내리는 손책은 여럿 앞 에서 당당하게 우길을 죽일 구실이 생겨 기쁘다는 듯한 데마저 있었 다. 군사들은 그 영을 받들어 우길이 올라가 있는 제단 주위에 마른 섶이며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다.

그사이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정오가 가까웠다. 문득 미친 듯한 바 람이 일며 사방에서 차차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걸 보 자 손책은 급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우길 을 죽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뒤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우길에게 쏠리게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미 정오가 다 됐다. 그런데도 검은 구름뿐 비는 오지 않으니 지금껏 저 늙은이가 한 짓은 모두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저 요사 스런 늙은이를 태워 죽여라.”

손책은 서둘러 그런 명을 내렸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군사들을 꾸 짖어 이미 제단 주위에 쌓아둔 마른 섶과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게 했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곧 세차게 타올랐다. 그대로 두면 제단 위의 우길을 형체도 없이 태워버릴 것 같은 불길이었다. 그런데 이 상한 일이 벌어졌다. 불길 속에서 홀연 한줄기 검은 연기가 치솟아 하늘에 닿는가 싶더니, 한소리 뇌성과 함께 번갯불이 번득이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퍼붓듯 하는 장대비였다.

기세 좋게 일던 장작더미의 불꽃은 순식간에 꺼지고, 마른 땅을 적신 빗물은 차차 괴기 시작했다. 곧 거리와 마을은 물바다가 되고 골짜기와 웅덩이도 물로 가득 찼다. 그 비가 석 자쯤 되었을 때였다. 장작더미에 둘러싸인 제단에 반듯이 누워 있던 우길이 크게 한소리 를 질렀다. 신기하게도 비가 멎고 구름이 걷히더니 다시 햇살이 따 갑게 비치었다.

그 광경을 본 손책의 관원들과 백성들은 모두 장작더미로 올라가 제단 위에 있는 우길을 부축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 묶은 것을 풀 어준 뒤 엎드려 절하며 공경과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손책도 처음에는 놀랐다. 슬몃 두려움까지 일며 우길을 살려줄 마 음이 생겼다. 그러나 우길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자마자 손책의 마음은 이내 변했다. 옷을 버리는 것도 잊고 빗물 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는 관원들과 백성들의 모습에서 어떤 배신감 까지 느낀 탓이었다.

“날이 개고 비가 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정한 이치다. 저 요사스 런 늙은이는 어쩌다가 그 변화를 틈탔을 뿐이거늘, 너희들은 어찌하 여 이토록 홀려 법석을 떠느냐?”

손책은 성난 꾸짖음과 함께 허리에 찬 보검을 뽑아 한칼에 우길 을 죽이려 했다. 그때의 손책에게는 우길이 일생에 만났던 그 어떤 적보다 더 굳세고 날랜 적수처럼 느껴졌다.

“아니 됩니다. 도인을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놀란 손책을 막아서며 그렇게 입을 모아 말렸다. 손책은 더욱 화가 났다. 누구 할 것 없이 금세라도 베어버릴 듯 노려보며 소 리쳤다.

“물러서라! 너희들은 모두 우길을 좇아 내게 반역이라도 할 작정이냐?”

그러자 뭇 관원들도 움찔하며 더는 손책을 막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책이 다시 소리 높여 무사들을 꾸짖었다. 

“어서 저 요물의 목을 치지 못할까!”

그런 손책의 두 눈에서는 불이 철철 흐르는 듯하고 목소리도 살 기로 뭉쳐 있었다. 거기에 얼이 빠진 한 무사가 이미 체념한 채 목을 늘이고 앉은 우길의 목을 쳤다. 우길의 목이 떨어지는 곳에 한줄기 푸른 기운이 일더니 동북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손책은 그래도 분 이 풀어지지 않았다. 아연해 있는 군사들에게 한층 엄하게 영을 내렸다.

“우길의 시체를 저잣거리에 내걸고 요망한 죄에 대한 벌이 어떤 것인가를 널리 알게 하라!”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더니 새벽녘이 되 자 우길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었다. 시체를 지키던 군사가 놀라 그 일을 손책에게 알렸다.

억지를 써서 우길을 죽이기는 했으나 종내 마음이 개운치 못하던 손책이었다. 시체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자 왈칵 성부터 났다. 몇 마 디 경위를 물어보지도 않고 칼을 뽑아 그 군사를 베려 들었다. 홀연 한 사람이 저만큼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만히 살피니 다름 아닌 우길이었다. 마땅히 죽었어야 할 우길이 다시 보이자 손책은 또다른 노기에 눈이 뒤집혔다.

“이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 칼을 받아라!”

손책은 그렇게 소리치며 우길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그러나 미처 내려쳐보지도 못하고 혼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독기가 스며 아 직 성치 못한 몸인데도 잇단 분노로 지나치게 심기를 해친 탓이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손책을 업고 가 자리에 눕혔으나 손 책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깨어났다. 오태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손책을 보러 와서 걱정했다.

“네가 억지를 써서 신선을 죽이더니 이 같은 화를 불러들였구나. 실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연거푸 놀라운 일을 겪고서도 손책의 기세는 조금도 움츠 러듦이 없었다. 오히려 가벼운 웃음까지 띠며 오태부인을 안심시키려 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님을 따라 싸움터를 누비면서 사람 죽이기를 삼단 베어넘기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 일로 화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더욱이 어제 요망한 늙은이를 죽인 것은 바로 나라 의 큰 화근을 없애기 위함이었는데, 어찌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겠 습니까?”

“아니다. 우도인은 신선임에 틀림없다. 네가 그걸 믿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를 위해 좋은 일을 해주고 제사를 지내 화 를 물리치는 것이 옳다.”

오태부인이 다시 그렇게 달래보았으나 손책은 여전히 듣지 않았다.

“제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 그 요사스런 것이 결코 더하거나 줄일 수 없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제사를 지내 빈단 말입니까?”

그러고는 오태부인이 아무리 권해도 고개만 가로저었다. 이에 오 태부인은 손책 몰래 그에게 씌워진 앙화를 풀기 위한 제사를 준비하 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손책이 방 안에 누워 있는 데 돌연 음습한 바람이 일며 등불이 금세 꺼질 듯 깜박거렸다. 까닭 없이 섬뜩해져 바라보니 등불 아래 우길이 서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우길을 보자 손책은 다시 노기가 일어 꾸짖었다.

“내가 평생 맹세해온 일은 요망한 무리를 죽여 천하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너는 이미 죽어 음(陰鬼)가 되었거늘 어찌 감히 살아 있 는 나에게 다가드느냐!”

그리고 머리맡에 놓인 검을 뽑아 던지자 홀연 우길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비록 헛것을 본 것이라 해도 실로 대단한 손책의 담기였다.

그 소문은 곧 오태부인에게도 전해졌다. 손책이 헛것을 본 것은 곧 그 병세가 악화된 까닭이라 여긴 오태부인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이 지나쳐 끼니마저 거르게 되었다. 그러자 손책은 오히려 그 같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오 태부인에게로 갔다.

하지만 오태부인이 보니 이미 손책은 그토록 강건하던 예전의 그 손책이 아니었다.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여겨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성인께서도 ‘귀신의 덕이 실로 성하다[鬼神之爲德 其盛矣]’ 하신 적이 있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귀신과 아래로 땅에 있는 귀신에게 빈다[禱爾于上下神祗]’는 말씀도 하셨다. 그와 같이 귀신의 일은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너는 어거지를 써서 우선생을 죽였으니 어 찌 그 귀신의 해코지가 없겠느냐?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오군의 옥 청관(玉淸觀, 도교의 사원)에다 초제(醮祭, 도교의 제례)를 지낼 채비를 차려놓았다. 너는 친히 그곳으로 가서 절하고 빌도록 해라. 그리하 면 죽은 우길의 귀신도 더는 너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손책은 그 같은 오태부인의 말에 속으로는 여전히 코웃음 났으나 하도 정색을 하고 내리는 분부라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 이 가마를 타고 오태부인이 말한 옥청관으로 갔다.

도사(道)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손책을 맞아들였다. 안에는 이미 초제의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장군께서도 향을 사르고 절을 하십시오.”

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못해 거기까지 가기는 했지만 향을 사르 고 절을 하는 짓이 손책의 비위에 맞을 리 없었다. 권에 못 이겨 겨 우 향을 사르는 시늉만 하고 절은 끝내 하지 않았다.

거기서 다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이미 손책의 기가 허해져 다 시 헛것이 보인 것인지, 아니면 죽은 우길이 또 한번 신통력을 보인 것인지 홀연 향로에서 솟던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한 송이 큰 꽃송 이처럼 뭉치더니 그 위에 우길이 반듯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우길을 보자 어머니로 하여 억눌렀던 손책의 노기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왔다. 침을 뱉으며 우길을 꾸짖었다.

“이 요망한 것아! 여기가 어디라고 이러느냐?”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몃 두려움도 이는 모양이었다. 꾸짖기를 마 치고는 우길을 피하듯 전각을 나서기도 전에 우길이 먼저 허공을 타 고 나르듯 전각의 문을 가로막더니 성난 눈으로 손책을 쏘아보았다. 손책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저 요귀가 보이지 않느냐?”

정신이 어지러운 중에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었다. 손책을 따르던 군사들이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에 손책은 더욱 노했다. 우길이 자기만을 노리고 있음을 확 인한 듯한 느낌이었다. 더 꾸짖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차고 있던 칼 을 뽑아 우길을 향해 던졌다.

갑자기 한소리 끔찍한 비명과 함께 누군가가 쓰러졌다.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보니 바로 전날 우길을 목 벤 군사였다. 손책의 칼이 머리통을 쪼개고 박혀 눈 코 귀 입 일곱 구멍 [七]으로 피를 쏟으며 숨이 끊어져 있었다.

손책도 그 모습을 보고야 우길이 아닌 걸 알았다. 하필이면 여러 군사들 중에서 그가 죽었다는 데 섬뜩함이 느껴졌지만 굳이 내색 않 고 영을 내렸다.

“그 요귀의 못된 장난이 지나치구나. 시체를 들어내 후히 장사 지내주어라!”

그리고 서둘러 옥청관을 나섰다. 그런데 미처 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뛰어오는 우길과 마주쳤다.

“이제 보니 이 도관(觀)이 바로 요귀가 숨은 곳이로구나!”

다시 우길을 본 손책이 그렇게 소리치더니 미친 듯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여봐라. 무엇을 하느냐? 무사들을 풀어 이 도관을 헐어버려라!”

좌우가 한결같이 놀랐으나 이미 손책의 광기를 말릴 수 있는 상 태가 아니었다. 그곳까지 손책을 호위해 온 무사 오백이 모두 나서 도관을 헐기 시작했다.

무사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려 할 때였다. 우길이 지붕

위에 서서 기왓장을 어지러이 내던졌다.

그 광경을 본 손책이 한층 높은 소리로 영을 내렸다.

“도관 안에서 도사들을 모두 끌어내고 불을 질러라!”

무사들이 그 영을 어기지 못해 도관에 불을 질렀다. 불꽃이 이는 곳마다 우길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책도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어 발만 구르다 부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부문(府門) 앞에 다시 머리를 풀어헤친 우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책은 성난 가운데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 다. 삼군을 점고하여 성 밖에다 진채를 세우게 하고 그리로 들었다. 

“병마가 부딪는 곳에는 죽는 자가 생기게 마련. 그들이 저마다 음 귀가 되어 한을 풀고자 한다면 세상은 그 같은 귀신으로 넘칠 것이 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선친을 따라 수많은 전장을 치달리며 사람을 죽였건만 아직껏 그들의 음귀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우길 따위 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요사를 부린단 말이냐? 내가 오래 편안히 누 워 지냈더니 헛것이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군사를 일으켜 허해진 기를 되살려야겠다.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모이게 하 라. 이 기회에 군사를 내어 원소와 함께 조조를 쳐야겠다!”

손책은 그렇게 말하며 여러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뭇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손책을 말렸다.

“주공께서 아직 옥체가 온전치 못하시니 함부로 가볍게 움직여서 는 아니 됩니다. 낫기를 기다려 군사를 내도 늦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도 손책은 끝내 출병을 고집하다가 그날은 의논을 정하지 못 하고 자리를 파했다.

그날 밤이었다. 손책이 성안으로 들지 않고 진채에서 잠을 자는데 다시 우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타났다. 한 번도 아니고 잠들 만 하면 되풀이해서 나타나는지라 손책의 장막에서는 밤새도록 우길을 꾸짖는 성난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이었다. 손책이 전날 옥청관을 불사른 일이며 밤새 우길의 귀신에게 시달린 일을 모두 전해 들은 오태부인이 사람을 보내 손책을 불렀다.

“얘야. 네 꼴이 실로 말이 아니로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방 안에 들어서는 손책을 보자마자 오태부인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간밤에 잠을 좀 설쳤을 뿐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손책은 그렇게 좋은 말로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한편 거울을 가져 오게 하여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과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자 기가 그렇게 상해 있는 줄 몰랐던 손책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런데 미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거울 안에 다시 우길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길을 보자 손책은 이내 눈이 뒤집혔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거울을 내던지며 그대로 노여움의 화신처럼 외치더니 정신을 잃 고 땅에 쓰러졌다. 우길을 죽인 뒤로 나날이 덧나 가던 상처가 불같 은 노기에 견디지 못해 마침내는 터져버린 탓이었다.

놀란 오태부인은 그런 아들을 부축해 방 안에다 눕혔다. 손책은 잠시 뒤에 다시 깨어났으나 이제는 스스로도 명이 다해감을 깨달은 듯했다.

“이제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없겠구나!”

그렇게 탄식하고 곧 사람을 시켜 장소를 비롯한 문무 관원들과 아우 손권을 불러오게 했다.

급히 불려온 사람들이 병상 앞에 엎드리자 손책은 곧 죽을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뚜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우나 우리에게는 오, 월의 수많은 백성과 삼강의 험난함이 있소. 큰일을 해볼 만하오. 자포(布, 장소의 자)를 비롯한 여러분은 부디 내 아우를 도와 그 뜻을 이루게 해주시오.” 

손책은 여럿에게 그렇게 말한 뒤 인수(印綏)를 가져다 아우 손권 에게 내주게 하며 일렀다.

“만약 강동의 백성들을 몰고 조조와 원소가 다투는 틈을 타 천하 를 노리고 싸우는 일이라면 너는 나보다 못하다. 그러나 어진 사람 을 끌어들이고 능력 있는 이를 뽑아 그들과 더불어 힘을 다해 강동 을 지키는 일이라면 네가 나보다 나으리라. 너는 마땅히 아버지와 형인 내가 이 땅을 마련할 때의 힘들고 어려웠음을 잊지 말고 나를 이어 스스로 큰일을 꾀함에 그르침이 없도록 하라.”

이에 손권은 큰 소리로 울고 절하며 손책의 인수를 받았다. 손책 은 다시 어머니 오태부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 아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목숨은 이미 다한 듯합니다. 살아서 인자하신 어머님을 받들어 모시지 못하고 먼저 이승을 떠나는 불효, 무어라 그 죄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 강동의 인수는 아우에게 넘겼으나 바라건대 어머님께서는 아침저녁 그 아이를 깨 우치고 가르치시어 아버지와 형이 아끼던 옛사람들을 가벼이 대하 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모가 되어 자식의 임종을 지키는 심정이 오죽하랴만 오태부인 은 역시 천하의 용장 손견의 짝될 만했다. 애통함을 억누르며 앞일을 걱정했다.

“네 아우가 아직 어려 그 큰일을 맡아낼 수 있을까 걱정되는구나. 실로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 일은 걱정 마십시오. 아우의 재주는 저보다 열 배나 낫습니다. 넉넉히 큰일을 맡아 해낼 만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히 결정짓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물으시고 밖의 일은 주유 (周瑜)에게 묻도록 하십시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주유가 이곳에 있 지 않아 얼굴을 마주하고 부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손책은 위로와 아울러 안팎의 으뜸가는 중신까지 어머니에게 알 려준 뒤 다시 여러 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모두 형 중모仲, 손권의 자)를 도와 내가 못 다한 일을 이루도록 하라. 집안에서 감히 딴마음을 품는 자가 있 으면 남은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죽여야 한다. 골육으로서 반역을 한 자는 죽어서라도 조상께서 누운 땅에 편히 들게 해서는 아니 된다!” 실로 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영웅다운 끝맺음이었다. 여러 아우 들이 울며 명을 받들어 골육간의 결속을 약속하자 비로소 아내인 교 (喬, 흔히 대교라 이름)부인을 불러들이게 했다. 한 지아비로서 지어미 와의 영결을 고하려 함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뒷일의 당부를 잊지 않 았다.

“이제 불행히도 내 목숨이 다했으니 그대와 나는 도중에 서로 나 뉘게 되었소. 그대는 부디 어른들을 공경하여 모시고 아이들을 잘 길러주시오. 그리고 또 하나 머지않아 처제가 내 장례를 보러 올 것 인데 그때 그녀에게도 당부하여 주유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내 아우를 보살피고 돕도록 하시오. 부디 주유가 나와 생전에 서로 나눈 정

의를 잊지 않게 해주시오.”

손책의 처제요, 교부인의 아우인 교씨(喬氏, 소교)는 주유의 아내 가 되었기에 그리 당부한 것이었다.

모두에게 남길 말이 끝나자 손책은 비로소 눈을 감고 숨을 거두 었다. 그때 그의 나이 아깝게도 스물여섯, 헛되이 수명만 길어진 요 즈음으로 보면 애처롭다고 할 만한 젊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다시 정사를 더듬어보고 싶은 것은 우길 이란 도사와 손책의 죽음 사이에 있는 관련이다. 진수의 『삼국지』는 손책이 허도를 치고 헌제를 자신이 맞아들이려고 몰래 군사를 일으 켰다가 미처 군사를 내기 전에 허공(貢)의 가객에게 죽은 것만 본 문에 기록하고 우길의 일은 주)에만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우길의 귀신이 나타났다는 구절은 없고 주를 단 배송지도 우길의 일을 전하고 있는 『강표전(傳)』이란 책의 진 실성을 의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연의에 나오는 요사스런 일들은 거의가 지어낸 것이며 그 뒤에는 알게 모르게 손책의 사람됨을 낮추 어 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그는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 폐단은 있어도 오래 살아 조금 더 스스로를 닦고 다듬었으면 천하 의 풍운을 바꾸어놓았을 것임에 틀림없는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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