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8화 : 장강(江)에 솟는 또 하나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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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8화 : 장강(江)에 솟는 또 하나의 해


장강(江)에 솟는 또 하나의 해

손책이 숨을 거두자 손권은 그 침상 앞에 넘어져 곡하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비록 나이는 그리 많이 위가 아니었으나 손권에게 는 아버지나 다름없던 형이었다.

아직 철모르는 시절에 아버지 손견이 죽자 형 손책은 겨우 열여 섯의 나이로 가장이 되어 홀로 된 어머니와 여러 형제를 보살피는 한편 그 같은 기업을 일으킨 것이었다.

“지금은 장군께서 울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주공의 장사를 치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국의 큰일을 다스려 가야 합니다.”

장소가 슬피 우는 손권을 일으키며 권했다. 아버지 같은 형을 잃 은 슬픔이 비록 크다 하나 손권이 원래 그리 잘고 막힌 인물은 아니었다. 애써 눈물을 거두며 주군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자 장소는 다시 손정孫)에게 청했다.

“명공께서 종중(宗中)의 어른이 되시는 분이니 돌아가신 주공의 장례를 맡아서 거행해주십시오. 저희는 새 주공으로 하여금 문무의 뭇 관원 앞에서 돌아가신 주공의 뒤를 잇는 예를 치르도록 채비하겠 습니다.”

손정은 손견의 아우로 처음부터 형을 도와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손견이 죽자 잠시 일족을 돌보며 숨어 살았으나 원술에게서 자립한 손책이 유요를 깨뜨리고 여러 현을 손에 넣은 뒤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손정은 그때 이래로 맏조카 손책을 도와 일했는데 일 족의 남자 가운데 일할 만한 이로서는 가장 배분이 높았다. 장소의 말을 듣자 손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손정에게 손책의 장례를 맡긴 장소는 곧 주군의 자리를 잇는 의 식에 들어갔다. 먼저 손권을 청해 높은 당 위에 올리고 문무 관원들 을 불러들여 차례로 하례를 올리게 했다. 형을 이어 주군이 된 손권 에게도 변함없이 충성하리라는 서약이었다.

이러한 경과로 보면 손권은 그저 가만히 앉아 아버지와 형이 피 땀 흘려 일한 과일을 거두게 된 대단찮은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하 지만 손권 또한 출생부터가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머니 오태부 인은 손책을 낳을 때는 달을 품은 꿈을 꾸었고 손권을 낳을 때는 해 를 품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용모도 몇 가지로 특이했다. 우선 네모진 턱에 입은 메기처럼 컸 고, 눈에서는 정광(精光)이 넘쳐 흘렀다. 거기다가 눈동자는 푸르고 수염은 자줏빛을 띠니 보는 사람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 손견은 그러한 손권의 용모를 귀하게 될 상(相)으로 여겨 특 히 사랑하였고, 손책이 살아 있을 때 조정에서 사자로 오 땅에 온 적 이 있는 유완(劉琬)은 손가(孫)의 여러 형제들을 본 뒤에 어떤 사 람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손씨 형제들의 상을 보니 각기 그 재주가 뛰어나고 헤아림 이 밝으나 끝까지 벼슬과 봉록을 누리지는 못할 것 같소. 그런데 둘 째(손권)만은 효성 있고 검소하며 모습이 기이하면서도 위풍이 있어 크게 귀하게 될 상일 뿐 아니라 수명도 가장 길겠소. 한번 두고 보 시오.”

하지만 만 가지 상이 마음의 상보다 못하다[萬相不如心相]했던가 그 같은 용모보다 더 귀한 것은 그의 사람됨이었다. 아버지 손견이 죽은 뒤 항상 그 형 손책을 따르며 일하는데, 성품은 도량이 넓고 어 질면서도 맺고 끊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또 협기(氣)있는 무인을 좋아하면서도 지혜 있는 선비를 높이 대접할 줄 알아 일찍부터 아버 지나 형에 못지않은 인물로 널리 이름을 얻었다.

지모(智)와 식견에 있어서도 동오(東吳)의 어떤 모사에 뒤지지 않았다. 손책은 그런 아우를 사랑하여 모든 의논에 빠짐없이 불러들 였는데 이따금씩 의논 중에 문득 아우를 돌아보며 그 자리에 있는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가 앞날의 네 장수요 모사들이다.”

자신이 끝내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리라는 것이 손책에게 어떤 예감으로 와닿았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설령 자신이 오래 살고 장성한 자식을 보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는 아우에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손권을 높이 본 까닭이었으리라.


뭇 관원들의 하례가 끝나자 장소가 다시 손권에게 말했다.

“지난날 주(周) 무왕이 은(殷)을 치고자 상중에 군사를 일으키니 백이(伯夷)와 숙제(叔)는 그것을 부당하다 여겨 말렸습니다. 그러 나주 무왕이 상중에 군사를 일으킨 것은 부왕(王)을 욕되게 하고 자 함이 아니라 천하의 대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이겠습니까? 지금 간특한 도적들은 다 투어 천하를 노리고 있으며, 늑대나 이리 같은 무리가 길을 가득 메 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때에 골육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문을 닫아걸고 눈물로 지새는 것은 다만 도적의 무리를 돕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록 상중이라 하나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어 손권에게 상복을 벗고 말 위에 올라 각 곳의 군사들 을 돌아보도록 재촉했다. 생전에 손책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여 강 다섯 군을 손에 넣었다고 호언했으나 실제로는 그 다섯 군 모두 가 온전히 손책의 손안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장을 비롯한 몇 군은 형주의 유표나 조조 등의 세력이 닿아 있는 곳이어서 범 같은 손책이 죽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손권이라 장소의 그 같은 말을 물리 칠 수 없었다. 곧 옷을 갈아입으며 말을 준비하게 했다. 그때 사람이 와서 알렸다.

“주공근(周公瑾)께서 파구巴)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주유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손권은 몹시 기뻤다. 

“공근이 이미 돌아왔다니 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렇게 반기며 그를 맞으러 갔다. 어렸을 적 서(舒) 땅에서 처음 만난 뒤로 주유는 형 손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형 손책과 나 란히 당(堂)에 올라 어머니를 뵙는 예로 오태부인을 뵈었으며, 뒷날 에는 교씨 자매를 나란히 맞아들여 손책과 동서가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손책이 처음 원술에게서 자립했을 때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와 도운 것도 주유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년, 숱한 싸움을 거치면서 주유는 동오의 기둥이나 대들보 같은 장수로 손가(家)를 위해 일해왔다.

그 무렵 파구를 지키고 있던 주유는 손책이 자객의 활과 창에 몹 시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군사를 손책이 있는 오군으로 돌렸다. 그러나 미처 오군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손책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 식을 들었다. 이에 주유는 손책의 죽음으로 혹 무슨 변고라도 있을 까 두려워 밤을 낮 삼아 달려온 것이었다.

오회(吳)로 돌아온 주유는 먼저 손책의 영구 앞에서 크게 곡을 했다. 이때 오태부인이 나와 울면서 손책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했다. 주유가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맹세하듯 말했다.

“비록 제 힘이 말이나 개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해도 백부(伯符)의 뒤를 이은 중모를 죽음으로 받들겠습니다. 이제 중모는 동오의 새 주인입니다.”

그때 손권이 들어왔다. 주유는 곧 주공을 뵙는 예로 손권에게 절을 했다. 겸손히 절을 받은 손권이 한 번 더 죽은 형의 뜻을 전하며 당부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부디 돌아가신 형님께서 남기신 명을 잊지마십시오.”

“간과 뇌를 땅에 쏟으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알아준 이의 은 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유가 머리를 수그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이에 손권은 주유를 조 용한 곳으로 청하며 마주 앉은 뒤 물었다.

“이제 못난 이 몸이 동오를 이어 맡게 되었소. 아버님과 형님께서 이루신 바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지켜갈 수 있겠소?”

그러자 주유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부터 이르기를 사람을 얻는 자는 번창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망한다 했습니다.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은 배움이 높고 헤아림이 밝 으며 멀리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선비를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런 이들이 모여 도와야만이 강동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형님께서 이르시기를 안의 일은 모두 자포(布)에게 맡기고 바 깥일은 모두 공근에게 물어서 하라 하셨소.”

장소와 그대 주유가 있는데 달리 무슨 사람을 불러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듯한 손권의 대답이었다. 주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포는 어질고 밝은 사람이니 넉넉히 큰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 러나 이유는 재주가 없어 맡기신 무거운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따로이 한 사람을 추천하여 장군을 돕게 하고 싶습니다.”

“공근보다 더 나를 도와줄 만한 인재가 따로 있을 성싶지 않구려. 하지만 어진 이가 있다면 마땅히 청해 가르침을 받겠소. 그게 누 구요?”

손권이 반가운 얼굴로 주유에게 물었다. 주유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이름이 노숙(魯)이라 하며 자를 자경(敬)으로 씁니 다. 임회 동성 땅이 고향으로 가슴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품고 배에는 지모와 임기응변을 감추고 있는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 어 려서 아버지를 잃어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그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 집이 매우 풍족하여 언제나 그 재물을 흩어 가난한 이를 돌보는 데 조금도 아까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제가 노숙을 알게 된 것은 거소의 장(長)으로 있을 때입니다. 한번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임회를 지나게 되었는 바 마침 양식이 떨어져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 다. 우연히 노숙의 곳간에 쌀 삼천 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도 움을 청했더니 노숙은 종들에게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제가 필요한 만 큼을 거저 주었습니다. 대개 그 기상의 크고 활달함이 그 정도입니다. 항상 칼 쓰는 일과 말 타고 활 쏘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곡아(曲阿) 에 조용히 파묻혀 살았는데 얼마 전 그 할머니가 죽어 장례를 위해 동성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의 친구 유자양(劉揚)이 소호로 가 서 정보(鄭)란 자를 따르자고 졸랐지만 그는 아직도 마음을 정하 지 못해 가지 않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되도록 빨리 사람을 보내 그를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권도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딴 사람 부를 것도 없이 바로 주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공근께서 한번 가주시지 않겠소? 낯선 이를 보내는 것 보다 공이 가면 노숙의 마음이 훨씬 쉽게 움직일 것 같소이다.”

주유도 그 같은 손권의 말을 마다할 리 없었다. 오히려 기쁜 마음 으로 노숙에게 달려가 손권이 부르는 뜻을 자세히 전했다. 한번 퉁 겨보는 것인지, 진실이 그러한지 주유를 통해 손권의 간곡한 부름을 듣고 난 노숙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불러주는 뜻은 고맙소만 나는 이미 유자양과 함께 소호로 가기 로 약조했습니다.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지난날 명장 마원(馬援)은 광무제(武帝)께 말하기를 지금의 세 상은 임금이 신하를 고를 뿐만 아니라 신하 또한 임금을 가려 섬겨 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손장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진 이를 가 까이 하고 선비를 예로 대접하며 각기 그 재주에 따라 벼슬과 녹을 내리시니 실로 세상에 드문 분이십니다. 어찌 소호의 정보 따위와 비기겠습니까? 공은 딴생각 마시고 저를 따라 동오로 가시는 게 옳 습니다. 마원이 말한 바 임금을 가려 섬겨야 할 때라는 것은 바로 이 런 난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급해진 주유가 한층 더 간곡히 말했다. 노숙은 그제야 못 이긴 체 주유를 따라나섰다.

노숙이 오자 손권은 예를 다해 맞고 더불어 천하의 일을 얘기하는 데 날이 저물도록 싫증 내는 법이 없었다. 노숙도 한번 손권을 만 나본 뒤에는 기꺼이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러 관원들이 흩어진 뒤 노숙만 남게 한 손권은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한 동이 술을 비우자 둘의 흥은 도도 해졌다. 군신의 예도 잊고 나란히 평상에 다리를 걸친 채 누워 주거 니 받거니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었을 무렵 손권이 불쑥 노숙에게 물었다.

“지금 한실은 위태롭고 사방은 소란하기 그지없소이다. 나는 아버 님과 형님의 뒤를 이어 동오를 맡기는 하였으나 앞날을 생각하면 그 저 아득할 뿐이오. 제환공이나 진문공 같은 패업(覇業)을 이루고는 싶소만 도무지 길을 모르겠구려. 공은 내가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소?”

술김에 하는 소리 같지 않게 간곡한 물음이었다. 노숙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지난날 한고조(漢高祖)는 의제(義)를 높여 섬기고자 하였으나 의제는 항우의 손안에 있다가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조조는 그 항우에 비할 만합니다. 천자가 이미 조조의 손에 들어가 있는데 장군께서 어떻게 제환공이나 진문공 같은 패업을 이 룰 수 있겠습니까?

제가 헤아리기에 이미 한실은 다시 흥하기 어렵고 조조도 쉽게 없애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직 장군을 위해 계책을 낸다면 강 동에 자리 잡고 앉아 천하의 형세를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 다. 다행히 지금 북방은 조조와 원소가 맞서 둘 다 남쪽을 돌볼 겨를 이 없으니, 이때 먼저 황조를 없애고 나아가 유표를 친다면 마침내 장강 동쪽은 장군의 오로지함이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장강의 넓 고 깊음에 의지해 지키면서 제호(號)를 칭하고 천하를 도모해보십시오. 이는 지난날 한고조가 천하를 얻게 된 바로 그 길입니다.”

실로 엄청나다면 엄청난 소리였다. 그러나 입으로는 제환공과 진 문공을 말해도 마음속의 뜻은 달리 있었는 듯 손권은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며 노숙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의복과 예물을 후하게 내림과 아울러 그 어머니에게 도 많은 재물을 보냈다.

이에 힘을 얻은 노숙은 다시 한 사람을 천거했다. 배움이 깊고 재 주가 많으며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는 사람으로 성은 제갈 (諸葛)이요, 이름은 근), 자는 자유)였다. 낭야군 남양(南陽) 땅 사람인데, 일찍 고향을 떠나 공명을 구하던 중에 노숙의 천거를 받게 된 것이었다.

손권이 제갈근을 만나보니 또한 비범했다. 몹시 기뻐하며 상빈( 賓)으로 모시고 물었다.

“선생께서는 제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 하십니까?”

제갈근이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장군께서 급히 결단할 일이 하나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원소는 겉보기에는 네 주에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위세를 드러내고 있지만 내실은 결코 조조에게 미 치지 못합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조조에게 패망할 것이니 장군께서 는 원소와 거래를 끊으시고 조조를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때를 보아 일을 꾀해나가는 것이 동오를 보전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 라 나아가서는 천하를 도모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손권이 가만히 헤아려보니 제갈근이 말이 옳았다. 그날로 그 말을 따라 원소에게서 온 사자 진진을 돌려보냄과 아울러 글을 주어 원소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조조는 손책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범 같은 손책이 원소를 도와 허도로 밀고 올라오는 걸 걱정하는 대 신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강동부터 삼킬 욕심이 인 것이었다. 새로 손권이 주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조조가 보기에는 아비와 형의 덕 을 본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곧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불러들여 강동을 칠 의논을 했 다. 이때 손책의 사자로 허도에 왔다가 시어사로 눌러앉아 있던 장 굉이 나서서 말렸다.

“남의 상(喪)을 틈타 쳐들어가는 것은 의로운 일이 못 될 뿐만 아 니라 만약 이기지 못하는 날에는 좋던 사이가 원수로 변하고 맙니 다. 오히려 이 기회에 더 잘 대우해주어 우호를 든든히 해두는 게 나 을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동오를 위해서만 한 말 같지만 실은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었다. 조조와 손권만의 싸움이라면 몰라도 원소가 있는 한 반드시 그 싸움에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갑작스런 욕심으로 그런 의논을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조조도 이내 거기 따르는 어려움을 알 아차렸다. 껄껄거림으로 자신의 욕심을 감추며 말했다.

“실은 공연히 한번 해본 소리요. 아무려면 천하의 조조가 남의 장 례식에 군사를 풀어 훼방이야 놓겠소?”

그리고 오히려 손권에게 장군의 벼슬에다 회계 태수까지 얹어 보내게 했다. 장굉이 다시 청했다.

“인수를 가지고 가는 사자로는 저를 써주십시오. 저는 원래 강동 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손권의 사람됨을 잘 압니다. 승상을 위해 그 를 좋은 말로 달래보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릇되어 그가 원소에 게라도 붙는 날이면 실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굉으로서는 허도에서 몸을 빼쳐 동오로 돌아갈 궁리를 낸 것이 었지만 조조는 왠지 의심 않고 들어주었다. 장굉을 회계도위로 삼아 인수를 품게 하고 강동으로 내려보냈다. 조조와의 우호가 맺어진 데 다 장굉까지 돌아오자 손권은 몹시 기뻐했다. 손책 시절에 허도로 가 조정의 벼슬까지 받고 눌러앉자 잃어버린 줄로 여겼던 장굉이 었다.

“잘 돌아오셨소. 부디 모자라는 이 몸을 많이 깨우쳐주시오.” 

그렇게 장굉을 반긴 뒤 그로 하여금 장소와 나란히 정사를 돌보 게 했다. 장굉이 또 한 사람을 천거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고옹(顧雍)이란 선비가 있는데 쓸 만한 인 재입니다. 지난날 왕윤에게 베임을 당한 석학 채옹(蔡邕)에게서 배 운 이로 말이 적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사람됨이 근엄하고 정대합니 다. 반드시 주공께 긴요하게 쓰일 것입니다.”

그러자 손권은 곧 사람을 보내 고옹을 부르게 했다. 만나보니 과 연 장굉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고옹을 승(丞)으로 삼아 새로 얻은 회계 태수의 일을 거들게 했다.

그렇게 되자 동오는 손책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흥성했고, 따라 서 손권의 위세도 형에 못지않게 강동에 떨쳐 울렸다. 손책의 죽음 으로 흔들리던 민심이 안정된 것 또한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그대로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손권에게도 시련이 닥쳐왔으니 곧 여강 태수 이술(李術)의 배반이었다.

이술은 원래 손책의 아낌을 받던 자로 손책이 올린 표문에 힘입 어 그 무렵 여강 태수로 있었다. 그런데 손책이 죽고 그 아우 손권이 뒤를 이었다는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애송이 손권을 주인으로 섬기기보다는 차라리 자립하거나 적어도 손권보다는 더 나은 주인 을 새로 정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었다.

그러자 손권 아래 있으면서도 이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무리가 모조리 도망쳐 여강으로 갔다. 손권이 그 같은 배신을 용서 할리 없었다. 가만히 이술에게 글을 보내 도망친 무리를 모조리 잡 아서 되돌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술은 코웃음과 함께 편지를 찢으 며 말했다.

“주인이 덕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덕이 없으면 떠나는 것이 다. 중모가 덕이 없어 이 사람들이 나를 바라고 온 것인데 어찌 돌려 보낼 수 있겠는가?”

사자로부터 그 같은 이술의 대답을 들은 손권은 크게 노했다. 그 날로 군사를 일으켜 여강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장소가 나서서 그런 손권을 말렸다.

“지금 주공께서 선형(先兄)의 뒤를 이은 지 오래되지 않은 터에 갑작스레 군사를 일으키면 상하가 놀랄 뿐만 아니라 조조의 의심을 살 우려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서둘러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지 않소. 만약 지금 이술을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또다른 이술이 생겨날 것이오. 머뭇거릴 일이 아니외다.”

손권이 전에 없이 강경하게 말했다. 장소가 더욱 간곡하게 말했다.

“그렇더라도 조조에게는 반드시 먼저 알려두는 게 좋습니다. 그렇 게 해야만 조조가 이 일을 구실로 강동에 군사를 내는 일이 없을 것 입니다. 또 다급한 이술이 조조에게 구원을 청할 때 조조가 들어주 지 못하도록 하는 데도 먼저 알리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성난 가운데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었다. 그제서야 손권 은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하여 장소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 보내야겠소?”

“첫째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셔서는 아니 됩니다. 이술을 치는 것은 조정과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대의명분을 크게 앞세우셔야 합니다. 둘째로는 겁을 먹은 이술이 조조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이술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모두가 거짓이 요 속임수이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해두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두 가지를 먼저 조조에게 밝혀둔 뒤에라야 주공께서 마음 놓고 군사 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이에 손권은 글 잘하는 이를 골라 조조에게 보낼 글을 짓게 했다. 옮겨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조정에 있을 때는 윗사람 잘못을 서슴없이 탄핵하고 백성을 다스 림에는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우매, 비록 형벌을 사용함 이 지나치게 참혹하여 기시, 죽여 시체를 저자에 버림)에 처해졌으 나 엄연년(延年, 후한의 엄혹한 관리)은 의연히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그같이 엄한 관리가 승상께도 소용이 되고, 저희도 천거할 만하여 일찍이 이술을 여강 태수로 삼은 일은 승상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이술이 흉악하여 함 부로 한의 법제를 어길 뿐만 아니라 주의 군민을 잔혹하게 해치니 그 방자함이 끝간 데를 모를 지경입니다. 마땅히 죽여 없애 그같이 못된 무리를 벌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이술을 치려는 바, 이는 한편으로 나라를 위 해 함부로 약한 백성을 죽이는 흉악한 고래와 같은 무리[鯨鰓]를 없 애려 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위해 그 원수 갚음을 돕고 자 함입니다. 또 이는 천하의 대의에도 맞는 일이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니 승상께서도 허락하여 주십시오.

혹 이술이 벌받음이 두려워 승상께 구원을 청하더라도 들어주셔 서는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 잡고 있는 것은 천하의 저울과 같으니 [阿衡之任]만민은 거기에 의지해 공평함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해 내(海內)가 모두 이 일을 보고 있음을 헤아리시어 만에 하나라도 이 술의 거짓과 속임수에 그 저울이 기우는 일이 없기를 엎드려 빕니다.’

손권에게서 그 같은 글이 오자 조조는 곽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곽가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지금 원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마침 그리되었다니 동쪽의 일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이술은 원래 손가의 사람이니 손권이 이긴다 해도 더 얻는 게 없고 오히려 크건 작건 힘만 소모될 뿐입니다.”

이에 조조는 좋은 말로 손권에게 답을 써 보냈다.

조조의 답을 받은 손권은 곧 크게 군사를 일으켜 이술이 근거한 환성(城)으로 몰아갔다. 손권을 얕보고 있던 이술은 놀랐다. 그 신 속한 진공(進)도 진공이려니와 앞장선 손권의 위세도 전혀 뜻밖이 었다. 형 손책의 그늘에 가리어 제대로 보이지 않던 손권의 진가를 새삼 알게 된 느낌이었다.

처음 성을 나와 손권의 군사를 맞으려 했던 이술은 그 바람에 변 변한 싸움 한번 없이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리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기만 하는 한편 급히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 했다.

이술의 글을 받자 조조는 다시 슬몃 마음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원소와 천하를 건 싸움을 벌이기 전에 뒤를 깨끗이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권의 글을 떠올리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 가 원소의 움직임도 한층 활발해진 때라 가볍게 군사를 나눌 처지도 못 돼 이술을 구해주지 못했다.

한편 성안에 갇혀 조조의 구원만을 기다리던 이술은 오래잖아 양 식부터 떨어졌다. 소, 돼지에 이어 군마까지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진흙을 떡 모양으로 빚어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아무도 구원 올 사람이 없음을 알고 성을 에워싼 채 느긋하게 기 다리던 손권은 이술의 군사들이 창칼도 제대로 휘두를 힘이 없을 만 큼 굶주린 뒤에야 일제히 성을 공격하게 했다. 아무리 한쪽은 성에 의지해 지키고 한쪽은 험한 성벽을 타고 넘어 공격한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반나절도 안 돼 환성은 떨어지고 이술은 그 졸개들과 함께 손권에게 사로잡혔다.

“저놈을 목 베어 군문에 높이 매달도록 하라!”

이술이 끌려오자 손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그런 영을 내렸 다. 그러나 이술을 뺀 나머지는 모조리 오군으로 옮겨가게 하였는데 그 수가 삼만이나 되었다.

기세등등하던 이술이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하고 잡혀 죽자 은근히 퍼져 있던 손권에 대한 강동 사람들의 불안은 깨끗이 씻겨졌다. 새 주인이 그 아비나 형에 못지않음을 비로소 믿게 된 것이었다.

손권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군사를 보내 산월(山越)을 치게 했다. 역시 손책의 죽음을 틈타 동오의 명을 따르려 하지 않은 죄였 다. 그리고 그 싸움에도 이기자 손권의 기세는 그대로 장강에서 새 로 솟는 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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