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9화 : 양웅 다시 관도에서 맞붙다
양웅 다시 관도에서 맞붙다
한편 강동에서 쫓기듯 하북으로 돌아간 진진(陣)은 원소에게 손 권이 준 글을 올리며 말했다.
“손책은 이미 죽고 손권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형 과 달리 조조로부터 장군에 봉해지고 또 그와 맺어져 오히려 밖에서 그를 호응하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원소는 발연히 노했다. 손권이 보낸 글을 읽지도 않 고 구겨 던지며 소리쳤다.
“그 어린놈이 감히 나를 등지고 조조 그 역적에게로 가려 하다니! 곧 기주, 청주, 유주, 병주 모두에 사람을 보내 크게 군사를 일으키 도록 하라. 내 먼저 조조를 깨뜨린 뒤에 그 어린놈을 사로잡아 목 베 리라!”
그리고 발을 굴러가며 재촉하니 순식간에 하북에는 네 주에서 칠십만이나 되는 대군이 몰렸다. 원소는 그 대군을 이끌고 곧장 허도 를 향해 성난 물결처럼 밀고 들어갔다.
하북에서 허도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할 곳이 관도(官)라는 요충이었다. 그곳을 지키던 조조의 장수 하후돈은 원소의 대군이 몰 려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허도로 글을 띄워 위급을 알렸다. 미리 예측하고 있던 일이어서인지 조조의 대응도 빨랐다. 군사 칠만 을 일으켜 원소를 맞으러 나서는 한편 순욱을 남겨 허도를 지키게 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원소의 진중에서는 별로 좋지 못한 일부터 일 어났다. 원소가 막 대군을 이끌고 떠나려 할 무렵이었다. 지난번에 원소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것을 말리다가 원소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혀 있던 모사 전풍이 다시 글을 올려 말렸다.
‘지금은 조용하게 지키며 하늘이 주는 때를 기다림이 옳습니다. 함부로 큰 군사를 일으켰다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 같은 글을 읽자 원소는 울화부터 치밀었다. 그 같은 원소의 심 기를 알아챈 봉기가 전풍을 헐뜯어 말했다.
“주공께서는 지금 인의의 군사를 일으키셨거늘, 전풍이 어찌해서 이런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곧 싸움터에 나설 장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그냥 들어 넘기셔서는 아니 됩니다.”
불에다 기름을 붓는 듯한 봉기의 그 말에 원소는 더욱 화가 치솟았다. 긴소리할 것 없이 좌우를 보고 소리쳤다.
“전풍을 끌어내 목 베도록 하라!”
하지만 전풍은 하북에서도 이름난 모사였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관원들이 한결같이 말리고 나서자 차마 죽이지 못했다.
“좋다. 내 먼저 조조를 깨뜨린 뒤에 전풍의 죄를 밝혀 따지리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군사를 재촉해 떠났다. 겉으로 보아서는 원소 의 그 같은 큰소리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백만에 가까 운 대군에 양식도 넉넉하니 아무리 조조라 해도 당해낼 성싶지 않았 다. 수십 리를 잇대어 행군해 나아가는데 기치는 들판을 덮고 칼과 창은 숲을 이루는 듯했다.
대군이 양무(陽武)에 이르러 진채를 내렸을 때 모사 저수(沮授)가 말했다.
“우리 군사는 비록 머릿수가 많으나 용맹이 적군만 못하고, 적군 은 비록 가려 뽑아 날랜 군사라 하나 양식과 마초가 우리만 못합니 다. 따라서 양식과 마초가 없는 적군은 급히 싸워야 이롭고 그게 넉 넉한 우리는 천천히 싸우면서 지키는 쪽이 이롭습니다. 되도록 오래 싸움을 끌 수만 있다면 적군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패해 물러갈 것입니다.”
밝게 보고 하는 소리였으나 이미 자만에 빠진 원소의 귀에는 저 수의 그 같은 소리가 바로 들리지 않았다. 대뜸 전풍을 떠올리며 성 난 소리부터 질렀다.
“전풍이 우리 군사의 마음을 동요케 하였기로 내가 돌아가는 날로 목 베려 하거늘 이제 또 네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러고는 군사를 불러 저수를 군중에 가두게 하며 덧붙였다.
“조조가 깨뜨려지기를 기다려 전풍과 함께 저자의 죄를 다스리리라.”
대군을 거느린 이로서 사기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가 될 법 도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처사였다. 전풍이나 저수의 재주를 믿 지 못했다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 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면 그 옹졸함과 편협에서, 원소는 벌써 실패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셈이었다.
저수까지 가두어 두 번 다시 지구전에 관한 논의를 꺼내지 못하 게 한 원소는 칠십만 대군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영채를 세우게 했 다. 워낙 많은 군사라 영채가 잇닿으며 둘레가 구십 리에 이어질 지 경이었다.
그 같은 원소군의 허실은 곧 세작에게 탐지되어 관도로 전해졌다. 너무나 엄청난 대군이라 조조의 군사들은 그 같은 소식을 듣자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마음이 무겁기는 조조도 마찬가지였다. 급히 모사 들을 불러들여 원소의 대군에 맞설 의논을 시작했다. 순유가 일어나 말했다.
“원소의 군사가 비록 많다 하나 반드시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군사는 모두 가리고 가려 뽑은 정병들이니 하나가 능히 열을 당해낼 것입니다. 다만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빨리 싸워야만 우리가 이롭다는 점입니다. 만약 헛되이 날을 끌게 되면, 군량과 마초를 대 지 못해 일을 그르치게 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의 말이 내 뜻과 같소. 긴말 필요없이 바로 싸움을 돋우어야겠소.”
조조가 그렇게 대꾸하며 선뜻 몸을 일으켰다. 순유가 힘주어 말한것 역시 자기편의 약점이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원소와 조조는 그처럼 달랐다.
조조는 곧 전령을 내어 모든 장졸들에게 북을 치고 소리치며 나 아가게 했다. 원소를 충동하여 속전으로 끌어내려는 심사였다.
과연 원소도 지지 않고 마주 군사를 냈다. 그러나 모사 심배는 조 조군의 용맹스럽고 날랜 돌격에 대비함을 잊지 않았다. 군사의 양날 개에 쇠뇌 [弩]를 쏘는 군마 일만을 감추고 문기 안에도 오천의 궁수 를 숨겨 포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쏘도록 했다. 전에 공손찬이 자랑 하던 기마대를 꺾을 때 쓴 적이 있는 전법이었다.
양군이 마주치자 북소리가 크게 세 번 울리는 곳에 원소가 나타 났다. 금투구 금갑옷에 비단 전포와 옥대를 두르고 말 위에 높이 올 라진 앞에 섰는데, 좌우에는 장합, 고람, 한맹, 순우경 등의 여러 장 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기(旗)며 절(節鉞) 또한 엄정하여 마치 천자가 친히 나선 것처럼 보였다.
조조 쪽의 진에서도 문기가 열리며 말 위에 앉은 조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저, 장요, 서황, 이전 등이 각기 자랑하는 병장기를 들고 둘러싸듯 호위하고 있는 것이 결코 원소에 뒤진 위세가 아니었다. 조조가 문득 채찍을 들어 원소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나는 천자 앞에 나아가 아뢰어 너로 하여금 대장군에 오르도록 해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무슨 까닭으로 감히 반역을 꾀하느냐?”
원소가 성난 어조로 맞받았다.
“너는 이름은 한의 승상이지만 실상은 한의 역적이다. 죄악이 하늘에 가득하여 심하기가 지난날의 왕망(王)이나 동탁보다 더하거늘, 오히려 누구를 보고 반역을 꾀한다고 덮어씌우느냐?”
“역적은 여러 소리 말라. 나는 오늘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너를 치러 왔다!”
조조도 발끈해 소리쳤다. 그 말을 원소가 다시 이죽거리듯 받았다.
“나야말로 천자께서 의대에 감추어 내리신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러 왔다.”
조조에게는 상처와도 같은 동승과 왕자복 등의 사건을 들먹여 조 조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마침내 조조는 더 참지 못했다. 곁 에 있던 장요를 보고 명했다.
“문원)은 어서 나가 저 역적 놈의 목을 가져오라!”
원소도 지지 않았다. 역시 곁에 있던 장합에게 소리쳤다.
“너는 가서 저 간사한 도적을 사로잡으라!”
그러자 각기 주인의 명을 받고 달려 나온 두 장수는 양진 한가운 데서 맞붙었다. 장요도 범상한 장수는 아니었지만 장합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다. 말과 말이 엉기고 칼과 창이 붙었다가 떨어지기 사 오십 차례가 되도록 승부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눈부신 솜씨에 조조는 이편저편 따질 것도 잊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때 곁에 있던 허저가 더 못 참겠는지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원소 쪽에서는 그걸 본 고람이 역시 창을 비껴들고 말 을 달려 나와 허저와 어울렸다. 거기서 싸움은 두 쌍이 되었다. 각기 상대를 맞아 치고 베고 찌르고 후비는데 구경하는 사람이 오히려 어 지러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조조는 문득 지금이 한번쯤 부딪쳐볼 때라 생각했다. 하후돈과 조홍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너희 둘은 각기 삼천 군을 이끌고 원소의 본진을 휩쓸어버리도록 하라!”
철기를 앞세운 소수의 정병으로 적의 대군을 어지럽혀 승기를 잡아보려는 뜻이었다.
하지만 조조에게는 불행하게도 원소 쪽은 이미 그런 종류의 돌격 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심배는 조조의 군사들이 몰려오는 걸 보자 급히 전령을 내려 포를 쏘게 했다. 한소리 포성과 함께 원소의 진양 날개에서 일만의 쇠뇌가 쏟아지고 이어 중군 쪽에서도 오천여 궁수 가 뛰어나와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아무리 잘 단련되고 날랜 조 조의 군사라 하지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감당해낼 수가 없 었다. 급히 남쪽을 바라고 달아나니 나머지 군사도 절로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원소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장졸을 휘몰아 그런 조조군의 뒤를 쳤다. 이미 기울어진 대세라 조조와 수하 장수들이 아무리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도 소용이 없었다. 조조군의 참담한 대패였다. 수십 리를 쫓 긴 조조는 겨우 관도에 이르러서야 군사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첫 싸움에 크게 이긴 원소는 곧 진채를 뜯어 대군을 관도 근처로 옮겼다. 내쳐 관도를 휩쓸지 못한 것은 조조가 지키는 애구(隘口)가 원체험하기 때문이었다. 심배가 다시 계책을 올렸다.
“지금 조조가 애구를 틀어막고 있어 함부로 우리가 군사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먼저 조조의 진채부터 쫓아내야겠습니다. 군사 십만을 벌려 관도의 우리 본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로는 조조의 진채 앞에 토산을 쌓게 하십시오. 그 토산 위에서 조조의 진채를 내려다 보고 활을 쏘아대면 조조는 견디지 못해 진채를 버리고 갈 것입니 다. 그렇게 하여 이 애구를 얻으면 허창을 두드려 부수는 일도 어렵 지 않습니다.”
들어보니 옳은 말이라 원소는 곧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각 진채 에서 힘있는 군사들을 뽑은 뒤 삽, 가래와 흙 자루를 주어 일제히 조 조의 진채 앞으로 보냈다. 워낙 많은 군사가 하는 일이라 순식간에 흙 자루는 작은 산을 이루어갔다. 조조도 영내에서 그 광경을 보았 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군사를 내보내 토산을 쌓는 원소의 군사를 쫓아버리고 싶었지만 심배의 쇠뇌와 활이 두려워 그럴 수도 없었다. 심배가 수만의 궁노수를 풀어 토산으로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열흘도 안 돼 그렇게 만들어진 토산은 오십여 개나 되었다. 그것 도 토산마다 꼭대기에 다락을 만들어 그 위에서 궁수가 활이나 쇠 뇌를 쏠 수 있게 해놓은 것이었다.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화살이 두 려워 머리에 화살을 막기 위한 방패를 이고 다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토산 위에 있는 원소의 군사들은 나무로 만든 딱딱이 소리를 군호로 활과 쇠뇌를 쏘아대는데 쏟아지는 화살이 마치 비와 같았다. 그때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방패로 몸을 가리고도 납작 땅에 엎드려야 했다. 그걸 본 원소의 군사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히니 조조의 군사들은 더욱 기가 죽었다.
원소군의 토산 때문에 저희 편 군사가 기를 못 펴고 허둥대자 조조는 걱정이 되었다. 여러 모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마땅한 계책을 물었다. 유엽이 나와 말했다.
“발석거(車)를 만들어 돌로 저것들을 때려부수면 될 것입니다.”
발석거라면 커다란 돌덩이를 쏘아 붙이는 수레로 주로 성을 공격 하는 무기였다. 부피가 커서 거추장스럽고 움직이지 않는 표적을 상 대로 하는 것이어서 그 무렵은 잘 쓰이지 않았는데, 유엽이 그걸 생 각해낸 것이었다.
“나도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써보지는 않았소. 공은 그것 을 만드는 방법을 아시오?”
조조가 못 미더운 듯 물었다. 유엽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전에 그 거식(式)을 본 적이 있습니다. 종이와 붓을 주면 그려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같은 유엽의 대답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 거식을 그려오 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그 밤으로 발석거 수백 대를 만들게 하 여 영채 이곳저곳에 감추어두었다. 각기 토산 위에 있는 구름사다리 와 다락을 겨냥한 채였다.
다음 날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원소의 군사들은 다시 딱딱이 소리를 군호로 조조의 영채에다 화살비를 퍼부어댔다. 그때 조조가 영을 내려 발석거들을 일제히 쏘아 붙이게 했다. 굵은 박덩이만 한 돌들이 허공을 날아 토산 위로 쏟아졌다.
원래 발석거가 쏘아 보내는 돌은 무겁고 속도가 느려 눈으로 보 고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표적에는 합당치 못했다. 그러 나 토산 위에 있는 구름사다리나 다락은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을 향해 돌벼락이 쏟아지니 거기 올라가 있는 원소의 궁노수들이 성할 수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머리가 터지고 배가 갈 라져 죽는 군사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때 원소의 군사 들이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 뒤로는 모두 발석거를 벽력거(霹靂車) 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렇게 한번 호된 맛을 본 이후로 원소의 군사들은 감히 토산 위 에 올라 조조의 진채로 화살을 날릴 엄두를 못 냈다. 엄청난 인력을 소모하고 쌓은 오십여 개의 토산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게 되고 만 것 이었다. 그게 미안했던지 심배가 다시 꾀를 냈다.
“군사들로 하여금 몰래 땅굴을 파고 똑바로 조조의 영채에 이르 는 길을 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발석거로도 막지 못 할 것입니다.”
역시 공손찬을 깨뜨릴 때의 전법이었다. 전에 한번 크게 재미를 본 적이 있는지라 원소도 그걸 마다하지 않았다. 굴자군(軍)이 란 두더지 부대를 만들어 밤낮없이 조조의 영채로 이르는 땅굴을 파 게 했다.
원소 쪽에서는 은밀히 한다고 했지만 땅굴을 파는 일은 곧 조조 에게로 알려졌다. 원소의 군사들이 산 뒤에서 흙을 파내고 있는 걸 본 조조의 군사 하나가 조조에게 알린 것이었다. 조조가 다시 유엽 을 불러 물었다.
“원소의 군사들이 이번에는 자루에다 흙을 퍼담아 내고 있다고 하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아마도 원소는 드러내놓고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자 몰래 공격하려는 것 같습니다. 땅을 파고 감추어진 길을 만들어 바로 우리 영채로 뛰어들려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유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실은 원소의 군사들이 무엇 을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의 계책을 막아낼지 몰라 유 엽을 불렀던 조조는 그같이 자신에 찬 유엽의 표정을 보자 기뻐하며 원래 묻고 싶던 걸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막아야겠소?”
“우리 영채 둘레로 아주 깊은 참호를 파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적의 땅굴은 아무 쓸모가 없어질 것입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묘책이었다. 조조는 곧 군사를 뽑아 영채를 빙 둘러싼 깊은 참호를 파게 했다.
원소는 그것도 모르고 군사를 재촉해 땅굴을 파들어갔다. 그러나 미처 조조의 영채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조조의 군사들이 파논 참 호가 앞을 막았다. 기껏 참호까지 땅속을 파고 들어가봤자 거기서 몸이 드러나게 되니 그때껏 판 것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또다시 헛 되게 힘만 낭비한 꼴이었다.
그렇게 되자 원소도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의 군사는 칠십만이요, 조조의 군사는 칠만이라 하나 조조의 군사가 가려 뽑은 정병인 데다 관도의 애구 또한 지키기는 쉬워도 빼앗기는 어려운 요 해처였다.
따라서 싸움은 자연 시일을 끌게 되고 그사이 두 달 가까운 날이 지나갔다. 간신히 관도를 지키고는 있어도 팔월에 군사를 일으킨 조 조는 구월이 다 가도록 싸움이 진전이 없자 차츰 불리한 입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괴로운 것은 군량과 마초였다.
순욱을 비롯해 뒤에 남은 사람들이 힘써 대고는 있지만 기다리는 조 조에게는 끊길 때가 많았다.
견디다 못한 조조는 차라리 관도를 버리고 허창으로 돌아가 그곳 을 근거로 원소와 싸워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시일만 끌다 문득 순욱에게 글을 보내 물었다. 그동안의 경과를 말한 다음 허창 의 형편과 아울러 그리로 군사를 돌리는 게 어떨까를 의논한 것이었 다. 순욱의 답은 곧 왔다. 순욱에게 쫓기듯 급하게 되돌아온 군사가 내준 글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나아감과 물러감이 한가지로 얼른 내키지 않아 그 결정을 물으시 는 존명을 받자옵고 몇 자 답해 올립니다.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 기에 원소가 따르는 무리를 모두 이끌고 관도로 나온 것은 명공과 더불어 승부를 매듭 짓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명공께서는 지금 매 우 약한 것으로 매우 강한 것에 맞서고 있음을 아는 바이나 만약 이 번에 원소를 꺾지 못하면 반드시 그에게 기회를 틈타게 해주는 것이 니 이 싸움은 바로 천하의 향방을 가름하는 큰 계기가 되는 것입니 다. 부디 이 점을 깊이 헤아리시어 싸움에 임하십시오.
비록 따르는 무리가 많다 해도 원소는 사람을 쓸 줄 모르는 위인 입니다. 명공의 신무(武)하심과 명철하심으로 꺾지 못할 게 무엇 이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거느리신 군사가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명공과 원소의 군세가 초(楚)와 한(漢)이 형滎陽)이나 성고(成皐)에서 싸울 때만큼은 차이 나지 않습니다. 명공께서는 다만 땅에 금
을 그어 지키시며 목줄기처럼 중요한 곳만 껴누르고 계신다면 원소 가 더 이상 나오는 것은 막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제가 보기에 지금과 같은 원소의 성세는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변화가 있을 것이니 그때야말로 의외로 움[]을 써서 적을 꺾을 때입니다. 결코 그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 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부디 명공께서는 깊이 헤아리고 살피시어 일을 결단하도록 하십시오.’
격려와 조언이 아울러 담긴 순욱의 글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던 조 조도 그 글을 읽자 뱃심과 용기가 솟았다. 물러날 생각을 버리고 장 졸들을 불러 엄하게 영을 내렸다.
“이번에 원소를 꺾지 못하면 결코 허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장수와 사들은 죽기로 싸워 각자가 맡은 곳을 지키라!”
그렇게 되자 오히려 밀리는 건 원소 쪽이었다. 몇 번이나 앞으로 나가보려 했으나 번번이 조조 쪽의 매서운 저항에 부딪혀 밀려나고 만 원소는 군사를 삼십 리나 물렸다. 나름대로는 전열을 가다듬음과 아울러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원소가 조금 물러난 만큼 조조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이제는 그저 영채를 지키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근 일대에 널리 초병( 兵)을 풀고 수시로 장수들을 내보내 돌아보게 했다.
그러자 곧 한 전기가 찾아왔다. 서황의 부장인 사환(史)이 순찰을 나갔다가 우연히 원소군의 세작 하나를 잡아온 일이었다.
서황이 끌려온 세작에게 원소 쪽의 허실을 묻자 뜻밖에도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오래잖아 대장 한맹이 군량을 운반해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군량을 운반하는 본대에 앞서 안전한 길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황은 급히 조조에게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조조 가 미처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곁에 있던 순유(荀)가 밝은 얼굴 로 입을 열었다.
“한맹은 하찮은 용맹밖에 없는 무리입니다. 장수 하나에 경기(輕 騎) 수천만 딸려 보내도 오는 도중에 그를 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곡식과 마초가 원소의 진중에 대이지 못하게 한다면 원소의 군사 들은 저절로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럼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순유와 뜻이 같은 조조가 물었다.
“바로 서황을 보내십시오. 그라면 넉넉히 한맹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은 나도 그리 생각했네.”
조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서황을 돌아보았다.
“그대는 사환과 함께 수하 군사들을 이끌고 한맹을 치라. 곡식과 마초까지 빼앗아 올 필요는 없다. 태워 없애면 된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의 싸움이라 서황은 기꺼이 대답하고 물러났다. 한참 뒤에 조조는 다시 장요와 허저를 불렀다.
“대군을 먹일 곡식이라 아무래도 원소가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 이다. 한맹을 구원하러 오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그대들은 각기 군 사를 이끌고 가서 서황의 뒤를 받쳐주도록 하라.”
이에 장요와 허저도 급히 졸개들을 모아 앞서 떠난 서황을 뒤쫓아갔다.
그날 밤이었다. 원소의 대장 한맹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레 수 천 대에 곡식과 마초를 싣고 원소의 본진을 향해 떠났다. 조조의 진 채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이라 별 두려움 없이 길을 재촉하는데 갑자 기 산속에서 서황과 사환이 이끄는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 았다.
지켜야 할 물건이 있는 데다 서황의 군사들이 많지 않음을 보고 한맹은 용기를 내어 말을 박찼다. 서황이 그런 한맹을 맞아 싸우고 그 군사들은 또 한맹의 졸개들과 뒤엉켰다. 그 틈을 탄 사환은 약간 의 군사들을 빼내 곡식과 마초를 실은 수레를 덮쳤다. 그리고 기겁 을 하며 흩어지는 인부들을 버려둔 채 수레에다 불을 붙였다.
서황의 용맹을 당해내기도 어려운터에 곡식과 마초까지 불타자 한맹은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그 졸 개들도 거미 새끼 흩어지듯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서황은 그 뒤를 쫓는 대신 불붙은 수레 쪽으로 가 곡식 한 톨 마초 한 줌 남기지 않 고 깡그리 태워버렸다.
마침 그곳은 원소의 본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불길은 원소의 눈에도 비쳤다. 서북쪽에 홀연히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놀랍고 의아롭게 여기고 있는데 간신히 도망쳐 나온 한맹의 졸개 하나가 달려 와 알렸다.
“군량과 마초를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말을 듣자 원소는 급했다. 몇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장합과 고 람 두 장수를 불러 조조의 본진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게 했다.
되는 대로 군사를 모아 달려간 장합과 고람은 때마침 곡식과 마 초를 다 태우고 돌아가던 서황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군사들의 기세 가 바뀌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당한 뜻밖의 공격이라 서 황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맞받아 싸우기는 해도 시 간이 갈수록 불리해져 다급해하고 있는데, 홀연 장합과 고람의 등 뒤에서 함성이 일며 허저와 장요가 이끈 군사들이 나타났다. 조조의 명을 받고 서황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허저와 장요가 양쪽에서 밀 고 나오자 장합과 고람의 군사들은 당황했다. 처음의 기세도 잊고 사방으로 흩어지니 허저와 장요는 서황과 사환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네 장수와 그 군사들이 한곳에 뭉치자 이미 그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인지경으로 달려 조조의 본진으로 돌아가 고 말았다.
네 장수와 그 군사들이 적의 군량과 마초를 불사르고도 큰 손상 없이 돌아오자 조조는 몹시 기뻤다. 장졸에게 각기 무거운 상을 내 려 그 수고로움을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성난 원소의 앞 뒤 없는 반격에 대비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군사를 나누어 본채 앞에다 따로이 영채를 세움으로써 앞뒤에서 적과 맞서는 형세[之勢]를 이루게 한 일이 그랬다.
한편 원소는 한맹이 군량과 마초를 모조리 잃은 채 패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크게 노했다.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원소는 한맹이 눈앞에 서기 무섭게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뭇 관원들이 힘써 말려 결국 한맹의 목은 붙어 있게 되었으나 여기서 또 한번 눈에 띄는 것은 조조와의 대비이다. 일생에 가장 많은 싸움 을 한 조조인 만큼 크고 작은 패배 또한 가장 많이 맛본 조조였으나 싸움에 졌다는 이유만으로 장수를 목 베려 든 것은 거의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원소는 걸핏하면 그런 소리로 장수들을 움츠러 들게 했다.
원소의 노기가 겨우 진정되자 심배가 다시 말했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 양식은 매우 중한 것이니 마음 써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소(烏)는 우리 군사가 먹을 양식을 쌓 아둔 곳입니다. 반드시 좋은 장수와 많은 군사를 보내 지키도록 해 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맹의 일로 가슴 섬뜩한 일을 겪은 원소였다. 그 새 생각한 게 있던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심배의 말을 받았다.
“그 일은 내가 이미 마음에 정해둔 게 있다. 더 긴요한 것은 업도 (鄴都)에서 군량과 마초를 끊기지 않고 보내오게 하는 일이다. 그대 가 업도로 돌아가 그 일을 맡아 보살피도록 하라. 어떤 일이 있더라 도 군량과 마초가 모자라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에 데인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듯 한번 군량과 마초를 빼앗기자 원소는 그 일을 용병에서 가장 중하게 여겼다. 전풍이 이미 옥에 갇 혀 있고 저수 또한 갇힌 거나 다를 바 없는 마당이라 심배야말로 원 소의 첫손 꼽히는 모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심배마저 뒤로 빼 돌려 군량이나 셈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심배는 그 같은 원소의 결정이 탐탁지 않았으나 주인의 성미를 잘 아는 그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말없이 명을 받들어 업도로 돌아갔다. 이제 원소 곁에 남은 모사로는 겨우 봉기 정도가 가장 나 은 축이었다.
심배가 떠나간 다음 원소는 다시 대장 순우경(于瓊)을 불러 명했다.
“그대는 부장 목원진(睦元進), 한거자(韓), 여위황(呂威璜), 조 예(趙叡) 등과 군사 이만을 거느리고 오소로 가라. 그곳은 우리 칠십 만 대군의 군량과 마초가 쌓여 있는 곳이니 특히 잘 지켜야 한다.”
원소로서는 미더운 사람을 골라 보낸 셈이지만 그 또한 그리 잘 된 인선은 못 되었다. 순우경은 성격이 모진 데다 술을 몹시 좋아해 군사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장수였다. 싸움터에서의 용맹은 그럭저 럭 쓸만했으나 싸움터 몇십 리 뒤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상대 로 경계를 지속하는 일에는 맞지 않았다. 오소에 간 지 며칠도 안 돼 마음이 느슨해진 그는 하루 종일 수하 장수들과 술타령이나 하며 지 냈다.
한편 조조의 진중에는 차차 군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조조는 급 히 사자를 허도로 보내 군량을 재촉하는 글을 순욱에게 전하게 했 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그리된 것인지 잘되려고 그리된 것인지, 조조의 글을 품고 허도로 가던 사자는 삼십 리도 채 못 가서 원소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군사들은 사자를 묶어 모사 허유에게로 데려갔다. 허유는 원래 조 조와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였다. 조조의 임협(俠)시절은 물론 효 렴에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온 뒤에도 교분은 계속되었으나 어찌 된 셈인지 성년이 되면서부터는 원소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가 원 소가 하북에서 자립한 뒤에는 온전히 그의 사람이 되어 모사로 일하 고 있었던 것이다.
사자의 몸을 뒤져 조조의 글을 찾아낸 허유는 슬며시 욕심이 생 겼다.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긴 하지만 조조가 군량이 달린다는 걸 알게 되자 그걸로 한번 큰 공을 세우고 싶어진 것이었다. 얼른 조조 의 글을 소매에 감추고 원소에게 달려가 말했다.
“조조는 관도에 군사를 내어 우리와 맞선 지 오래이니 허창은 반 드시 비어 있을 것입니다. 한 가닥 군사를 나누어 밤을 틈타 허창을 친다면 허창을 깨뜨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조까지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마침 조조는 군량과 마초가 다해가고 있으니 지금 바로 우리가 틈탈 때입니다. 조조가 허창의 위급을 들으면 반드시 진을 거두어 돌아갈 것인즉, 그때 남은 군사를 들어 조조를 들이친다면, 우리는 허창과 이곳 두 군데서 혼란된 조조의 군사를 치는 격이 됩 니다.”
“조조의 군량과 마초가 다한 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반색을 하고 따라줄 줄 알았던 원소가 뜻밖에도 심드렁한 얼굴로 되물었다. 허유는 적이 실망되었으나 먼저 원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급했다. 별 생색도 내지 못하고 소매 속에 감춰뒀던 조조의 글을 꺼내 보였다. 그러나 원소는 그걸 읽고 난 뒤에도 별로 반가워하 는 기색이 없이 말했다.
“조조는 매우 꾀가 많은 자일세. 이 편지는 아마도 조조가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작일 게야.”
“만약 지금 우리가 허창을 손에 넣지 않으면 나중에 오히려 조조 로부터 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안타까운 허유가 간곡히 권했다. 사람됨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도 모사로서의 식견은 뛰어난 그였다. 그런 그에게는 그 같은 편지가 손에 들어온 것이 조조를 깨뜨릴 둘도 없는 기회가 온 걸로 보였다. 원소와 허유 두 사람이 그 일로 한창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홀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업군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원소가 불러들여 보니 다름 아닌 심배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심배가 사자에게 주어 보낸 글 속에는 군량을 옮겨오는 일 외에 이런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또 아뢸 일은 허유의 행실에 관한 것입니다. 허유는 기주에 있을 때 일찍이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아들이며 조카들이 여전히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 금을 물려 돈과 곡식을 거둬들이기로 잡아다 옥에 가뒀습니다. 허유 가 이 일을 알면 반드시 저에게 앙심을 품을 것인즉, 저는 멀리 업군 에 있고 그는 그곳 명공 곁에 있으니 실로 두렵습니다. 주공께서는 부디 허유의 말을 헤아려 들어주십시오……………..’
허유의 사람됨으로 보아 넉넉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한편으 로 원소 곁에 있는 허유를 멀리서나마 견제해두고자 하는 의도가 심 배에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큰일을 경영함에 인화(人和)의 소 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더욱 일을 그르친 것은 사사로운 감정과 일에서의 능력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원소의 결벽이었다. 글을 다 읽자마자 마 치 거기에 허유의 계책이 엉터리라는 확증이라도 있는 듯 성난 얼굴 로 꾸짖었다.
“함부로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은 하찮은 것이 아직도 감히 내 앞 에 얼굴을 쳐들고 계책을 올린답시고 지껄이는 것이냐? 너는 탐욕 이 심한 데다 또 조조에게는 옛 친구가 된다. 틀림없이 그로부터 뇌 물을 받고 그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부리는 수 작도 나를 속여 조조로 하여금 우리 군사를 그냥 삼키게 하려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내 마땅히 너를 목 베야 할 것이로되 이번에는 잠 시네 목을 그 어깨 위에 남겨둔다. 어서 빨리 물러가라! 그리고 앞 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뒷날의 얘기지만 재주는 있어도 행실이 단정치 못한 곽가를 진군 (陳)이란 대신이 탄핵했을 때, 조조는 진군의 엄정함을 칭찬하면 서도 곽가의 재주는 재주대로 아꼈다. 그런데도 원소는 청렴이란 자 [尺]로 허유의 재주(계략)까지 재고 있다. 물론 평화로운 시대라면 원 소의 태도가 옳을 수도 있겠으나 불행히도 그들의 시대는 난세였고 그것도 베느냐 베이느냐의 전장이었다.
원소에게서 칭찬은커녕 참지 못할 욕만 먹고 쫓겨나온 허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린다더니 바로 그렇구나. 또 더벅머리 아이놈하고는 큰일을 꾀하지 말라고 하더니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이 무에 다르랴. 거기다가 내 아들과 조카까지 모두 심배의 해를 입었 으니 무슨 낯으로 기주의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랴!”
그리고 차고 있던 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 했다. 곁에 두 고 부리던 사람들이 칼을 뺏고 말리며 충동질했다.
“공은 어찌하여 이토록 목숨을 가볍게 여기시오? 원소는 바른말 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뒷날 반드시 조조에게 사로잡히는 꼴이 나고 말 것이오. 공은 조공의 옛 친구였으니 그리로 가보도록 하시오. 이 는 곧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찾는 길이기도 하오.”
아무리 허유와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원소의 진중에 서 그 같은 말이 나오다니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원소의 지나친 말에 거의 자포자기에 빠졌던 허유도 그 같은 권유에 차츰 정신이 들었다. 곧 마음을 돌려먹고 몰래 원소의 진중을 빠져나와 조조의 진중으로 향했다.
원소의 진중은 무사히 빠져나왔으나 조조 쪽은 달랐다. 허유는 미 처 조조의 본채에 이르기도 전에 길가에 숨어 있던 조조의 군사들에 게 붙들리고 말았다.
“나는 조승상의 옛 친구다. 급한 일이 있어 뵙고자 하니 어서 승상께 알려라. 남양의 허유가 왔다고 하면 된다.”
허유가 군사들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중 하나가 조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때 조조는 막 옷을 벗고 드러누워 쉬려는 참이었다. 허유 가 원소로부터 도망쳐 왔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뻤다.
자신을 찾아온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허 유는 원소의 손꼽히는 모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거기다가 불현 듯 떠오르는 옛정도 있어 조조는 신발도 꿰지 못한 채 달려 나갔다. 그리고 멀리서 허유를 보자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다가가서 손 을 끌며 자기의 군막으로 맞아들였다. 그뿐 아니었다. 군막 안에 들 어서기 바쁘게 먼저 엎드려 절한 것은 조조였다.
“자네는 한의 승상이요, 나는 아직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 이네. 어찌 겸손이 이토록 지나치신가?”
허유가 황망히 조조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나 조조는 더욱 겸허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이 조조의 옛 친구가 아닌가? 옛 친구 사이에 어찌 감히 벼슬이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겠나?”
결코 입에 발린 소리 같지가 않았다. 이에 한편으로는 감격하고 한편으로는 떳떳찮음을 이겨낸 허유가 바로 찾아온 까닭을 밝혔다.
“나는 주인을 잘못 골라 원소에게 몸을 굽히고 지냈네. 그런데 원 소는 바른말을 해도 듣지 않고 좋은 계책을 말해도 써주지 않았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를 버리고 옛 친구를 찾아온 것이니 버리지 않 고 써주기를 바라네.”
“자원이 이렇게 왔으니 내 일은 모두 풀린 것이나 다름없네. 자네는 그동안 원소에게 있었으니 그의 허실을 잘 알 테지. 말해주게. 어떻게 하면 원소를 깨뜨릴 수 있겠나?”
조조도 필요 없이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허유에게 물었다. 그러 자 허유는 짐짓 지나가는 말투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일찍이 원소에게 이쯤 해서 경기(輕)를 몰아 허도를 치라 고 권한 일이 있네. 그리고 만약 자네가 급히 허도로 돌아간다면 또 그 뒤를 치자고 했지. 즉 머리와 꼬리를 함께 치자는 계책이었네.” 그 말에 조조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소릴세. 만약 원소가 자네의 말을 들었다면 나는 반드시 패하고 말았을 것이네!”
그러자 허유는 다시 엉뚱한 걸 물었다. 버림받고 도망쳐 나온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숨기기 위한 안간힘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량 남은 게 지금 얼마나 되는가?”
“일 년은 버틸 만하지.”
뜨끔한 가운데도 조조가 그렇게 둘러댔다. 허유가 웃으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반드시 그렇지는 못할 것 같은데.”
“실은 반년 정도일세.”
허유가 빈정대는 걸 보고 조조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돌연 허유 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더니 장막을 헤치고 걸어나가며 탄식하듯 소리쳤다.
“나는 마음을 다해 이리로 몸을 던져 온 것인데 자네가 이토록 나 를 속이니 여기서 내가 무얼 바랄 게 있단 말인가!”
“여보게 자원, 너무 성내지 말게. 내 바로 말함세. 남은 군량은 사실 석 달밖에 견디지 못할 것이네.”
허유가 얼른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조조를 쳐다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맹덕(德)을 간웅이라더니 과연 그러하구나.”
하지만 조조는 아직도 속을 있는 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웃으며 태연하게 허유의 말을 받았다.
“자네는 어찌 군사를 쓰는 데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단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내막을 알려주는 것처럼 허유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사실 군중에는 한 달치 양식밖에 없다네.”
어지간한 허유도 거기서 더는 참지 못했다. 얼굴 가득 성난 기색을 띠며 조조에게 소리쳤다.
“이제는 그만 속이게 양식은 이미 다하지 않았는가?”
그제서야 조조도 허유가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갑자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네가 어찌 그걸 아는가?”
“이 편지를 보게. 이건 누가 쓴 건가?”
허유가 소매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이며 꾸짖듯 물었다. 조조가보니 바로 자신이 순욱에게 보낸 글이었다. 조조가 더욱 놀라며 되물었다.
“어디서 얻었는가?”
이에 허유는 그 편지를 손에 넣게 된 경위를 밝혔다. 마음 한구석에는 허유를 믿지 못하는 데가 있어 끝내 속이려던 조조도 그 얘기 를 듣자 비로소 허유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넘어온 걸 알았다. 그리 고 한편으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소에 대한 어떤 자신까지 느꼈다. 똑같이 상대편의 군량에 대한 기밀을 손에 넣었건만 자신은 그걸로 한맹과의 한판 싸움에 승리를 얻은 반 면, 원소는 그걸 이용하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이 두고 부리던 모사 하나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자원은 옛날의 교분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고 하나 그뿐만 은 아닐 것일세. 무언가 내게 깨우쳐줄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 언가?”
이윽고 조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그러자 허유도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비록 지난날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이미 벼슬의 높 고 낮음이 다르고 주종의 자리가 다르다. 승상의 그 물음을 나를 받아들여준 주인의 물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도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소이다만.”
“아무려면 어떤가? 어서 가르쳐주게.”
좌우를 의식해서 하는 허유의 말을 소탈하게 받으며 조조가 재촉 했다. 그제서야 허유는 주공을 대하는 예로 답했다.
“명공께서는 지금 외로운 군사로 큰 적과 맞서고 있소. 속히 싸워 이길 방도를 찾지 않는 것은 죽을 길로 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 소이다. 이 허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제대로만 된다면 원소 의 백만 대군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질 것이오. 다만 명공께서 듣고 들어주실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어떤 계책이오?”
“원소의 군량과 치중은 모두 오소에 쌓여 있소. 지금 순우경을 뽑 아 지키게 하고 있는데 그자는 술을 좋아하여 제대로 방비하고 있지 못하외다. 명공께서는 날랜 군사를 뽑아 원소의 장수 장기)의 군사라 사칭하고 군량을 호송해 온 것인 양 꾸미면 저들은 별로 의 심 않고 받아들일 것이오. 그때 틈을 보아 성안을 들이치고 거기에 쌓인 군량과 마초를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면 원소의 대군은 사흘도 못 가 저절로 어지러워질 것이외다.”
조조가 들으니 실로 그럴 듯한 계책이었다. 이에 크게 기뻐하며 허유를 두텁게 대접하고 진채에 머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