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0화 : 빛나는구나, 당양벌의 조운과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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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0화 : 빛나는구나, 당양벌의 조운과 장비


빛나는구나, 당양벌의 조운과 장비

한편 유비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십만이 넘는 백성들을 겨 우 삼천여 군마로 돌보며 느릿느릿 강릉으로 가고 있었다.

장비가 뒤를 막고 조운이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있었지 만 이미 군대의 행진이라기보다는 피난민 행렬에 가까웠다. 유비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던 공명이 문득 걱정스런 얼굴로 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운장이 강하로 간 지 이미 여러 날 되었건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 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군사께서 몸소 한번 가보시지 않으시겠습니 까? 가서 유기를 만나보십시오. 유기는 전에 공의 가르침을 받아 어려움에서 벗어난 적이 있으니, 만약 공께서 몸소 오신 걸 보면 결코 우리가 청하는 걸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일이 잘 풀리게 하 는 길은 오직 그밖에 없는 듯싶습니다.”

유비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공명에게 그렇게 말했다. 공명도 그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이쪽에서 빨리 갈 수 없다면 저쪽 에서 빨리 와 강릉성의 구실을 해주어야만 머지않아 밀어닥칠 조조 의 대군으로부터 유비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명이 승낙하자 유비는 유봉에게 오백 군사를 딸려 강하로 가는 공명을 호 위케 했다.

공명이 유봉과 더불어 강하로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유비가 간 옹, 미축, 미방 등과 가고 있는데 홀연 미친 듯한 바람이 한차례 일 더니 흙먼지를 휘몰고 하늘로 치솟아 붉은 해를 가려버렸다.

“이게 무슨 징조요?”

유비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음양의 이치에 밝은 간옹이 신점을 한판 펴보더니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아주 좋지 못한 징조 같습니다. 오늘밤에 크게 흉한 일이 있을 것 이니 주공께서는 얼른 백성들을 버리고 멀리 피해 가도록 하십시오.” 

“신야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백성들인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릴 수 있겠소? 그럴 수는 없소이다.”

유비가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간옹이 안타까운 듯 유비를 재촉했다.

“만약 주공께서 버리고 가지 않으시면 머지않아 큰 화가 이를 것 입니다. 어서 서두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유비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한동안 묵묵히 앞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앞쪽은 어디요?”

“당양현(陽縣)인데 보이는 산은 경산(景山)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자 유비가 얼른 영을 내렸다.

“저 산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 가자.”

그러고는 간옹이 더 권할 틈도 없이 군사들을 재촉해 백성들을 경산으로 이끌도록 했다. 이에 간옹도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말 았다.

때는 마침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싸늘한 바 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데, 산중에는 의지할 움막 하나 없었다. 해 가 지자 추위와 주림에 떠는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메웠다. 그럭저럭 사경이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홀연 서북쪽에서 크게 함 성이 오르더니 이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게 놀란 유 비가 급히 말에 올라 자신이 이끌던 이천 군마를 이끌고 적을 맞으 러 갔다.

이윽고 조조의 군사들이 거센 기세로 밀려왔다. 가리고 가려 뽑은 군사들인 데다 머릿수도 많아 유비의 이천 군마로는 감당하기 어려 웠다. 유비는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나 곧 위급한 지경에 빠지고 말 았다.

그때 다행히 뒤처져 있던 장비가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에 이르렀 다. 장비는 몰려오는 조조의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겨우 한줄기 길을 열고 유비를 구해 달아났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한참 정신없이 달리는데 문득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조조에게 항복한 옛 형주의 장수 문빙)이 이끄는 군마였다.

“주인을 저버린 역적 놈아! 네 무슨 낯으로 사람의 앞을 가로막느냐?”

유비가 문빙을 알아보고 꾸짖었다. 문빙은 그래도 형주에서는 보 기 드물게 의기로운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 을 띠더니 말없이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버렸다.

그렇지만 문빙이 길을 열어주었다고 해서 유비와 장비가 그대로 적진을 빠져나오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장비는 유비를 보 호하며 수시로 길을 막는 조조의 군사들과 일면 싸우고 일면 달아나 기를 거듭했다.

날이 희끄무레 밝아올 무렵에야 적군의 함성은 점차 멀어졌다. 그 제서야 유비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따르는 것은 겨우 백기 남짓했다. 십만이 넘는 백성들이며 미축, 미방, 간옹과 조운 및 그가 이끌던 일천 기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유비가 좌우를 돌아보며 눈물 섞어 탄식했다.

“십여 만의 목숨이 나를 따르다가 모두 이같이 큰 환난을 맞게 되 었구나. 모든 장수들과 늙고 젊은 숱한 백성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니 비록 나무나 흙으로 빚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슬퍼하지 않을 것인가!”

그 말에 모두 처량한 느낌이 들어 한숨짓고 있는데 홀연 미방이 나타났다. 살맞은 얼굴에 어디를 어떻게 찔리고 베었는지 몹시 절룩거리고 있었다.

“조자룡이 우리를 저버리고 조조에게 항복하러 가버렸습니다.”

미방이 쓰러지듯 유비 앞에 엎드리며 그렇게 알렸다. 고통으로 일 그러진 가운데도 분한 기색이 얼굴에 뚜렷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뜻밖의 소리에 놀랐다. 그러나 유비만은 믿지 않았다. 오히 려 미방에게 꾸짖듯 말했다.

“말을 삼가라! 자룡은 나와 오랜 벗같이 지내온 사이거늘 어찌 나 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세력이 궁하고 힘이 다해 보이니까 혹시 조조에게 항복 해 부귀를 누리려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곁에 있던 장비가 미방을 거들고 나섰다. 그래도 유비는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자룡은 환란 속에서도 나를 따르는 마음이 쇠나 돌처럼 굳고 변 함이 없었다. 부귀 따위에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분명 조조의 본진이 있는 서북쪽으로 말을 달려갔습니다.”

미방이 거듭 우겼다. 장비가 그 말에 얼굴이 시뻘게지며 창을 꼬 나잡았다.

“내가 그를 찾아보겠소. 만나기만 하면 한 창에 꿰어버릴 것이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미방의 말에 조운이 변심한 게 틀림 없다고 단정한 듯했다. 유비가 그런 장비를 달랬다.

“함부로 죄 없는 사람을 의심하지 마라. 너는 둘째 형 운장이 안 량과 문추를 죽인 일을 잊었느냐. 남 보기에는 조조의 사람이 되어 그리한 것 같았지만 결국 운장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자룡이 서북쪽으로 갔다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자룡은 결코 나를 버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심사가 뒤틀린 장비가 어찌 순순히 듣겠는가. 유비의 말을 듣는 둥 만 둥 이십여 기를 이끌고 장판교(長坂橋)란 다리 쪽으 로 갔다. 아무래도 제 눈으로 봐야겠다는 태도였다.

장비가 장판교에 이르러보니 동쪽에 한 무더기 숲이 보였다. 장비 는 문득 한 계교가 떠올라 데리고 간 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말꼬리에 달아 끌고 숲속으로 이리저 리 내닫거라. 되도록 먼지를 높게 치솟게 해서 그것을 본 조조가 숲 속에 대군이 숨어 있는 것으로 믿게 해야 한다.”

단순하고 성급하게만 뵈는 장비가 생각해낸 계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데가 있었다. 군사들이 영을 받고 물러나자 장 비는 홀로 말을 탄 채 장판교 위로 올라갔다.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조조의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서쪽을 쏘아보는 풍이 조금도 싸움 에 져서 쫓기는 무리의 장수 같지가 않았다.

이때 조운은 참으로 위태로운 지경을 치닫고 있었다. 간밤 사경 무렵 조조의 오천 철기가 덮쳤을 때 조운은 거느린 군사들과 더불어 날이 새도록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밝은 뒤에 보니 주인 유비는 간 곳을 모르겠고 그의 늙고 젊은 가솔들도 찾을 길이 없었다. 기막 힌 중에도 조운은 가만히 속으로 뜻을 굳혔다.

‘주공께서는 내게 감(甘), 미糜) 두 부인과 소주인(小人) 아두阿 斗)를 당부하셨다. 그런데 이제 싸움터에서 모두 잃어버렸으니 내

무슨 낯으로 주공을 대하겠는가? 차라리 가서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모(母)와 소주인이 계신 곳을 찾음이 옳으리라!’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니 남은 군사는 겨우 삼사십 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조운은 두려워함이 없이 말을 박차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 다. 미리 유비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버린 탓인지 보이는 것은 다 만 번성과 신야에서 따라온 백성들뿐이었다. 조조의 군사들에게 이 리 베이고 저리 찔리면서 싸움터를 몰려다니는데 그들의 울음소리 가 하늘과 땅을 흔드는 것 같았다. 화살을 맞고 창칼에 상한 채 아내 와 남편이며 아들 딸도 버리고 이리저리 내닫는 게 차마 눈뜨고 보 기 힘든 아비규환이었다.

조운은 그런 백성들 사이를 달려가다 문득 풀숲에 눈에 익은 사 람 하나가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 일으켜보니 간옹이었다.

“두 분 주모를 보지 못하셨소?”

조운은 간옹의 상처도 살펴보지 않은 채 급하게 물었다. 간옹이 괴로운 신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두 분 주모께서 수레를 버리고 아두 아기씨를 품으신 채 걸으시 기에 내가 말을 달려 뒤따르며 호위하려 했소. 그러나 산굽이를 지 나는데 적장 하나가 나타나 한 창에 나를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 고 말은 그가 끌고 가버렸소이다. 내가 싸우려 한들 이 몸에 말도 없 이 무슨 싸움을 하겠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죽은 듯 누워 있었소.”

조운은 그 같은 두 부인의 소식을 듣자 마음이 더욱 급했다. 군사 들이 타고 온 말 한 필을 내 간옹을 태우고 사졸 둘을 붙여 부축해가게 하며 말했다.

“가서 주공께 전해주시오. 나는 하늘 끝과 땅 밑바닥까지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두 분 주모와 소주인을 찾아서 돌아가겠소. 만약 찾아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한다면 내 몸은 죽어 이 모랫벌 위 를 뒹굴 것이오!”

그러고는 그대로 말을 박차 장판파(長坂)란 언덕을 향해 치달았 다. 한참 말을 달리는데 홀연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조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조운이 보니 길섶에 쓰러져 있던 자기편 군사였는데 낮은 익었으 나 누군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유사군(使君) 밑에서 수레를 호송하던 군삽니다. 화살을 맞아 여기 이렇게 쓰러져 있습니다.”

“두 분 주모께서는 어디로 가셨는가?”

“다만 감부인만을 뵈었을 뿐입니다. 감부인께서는 산발에 맨발로 한 무리의 아낙네들 틈에 끼어 남으로 가셨습니다.”

그 군사는 상처가 무거운지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조운은 그를 돌보아줄 틈이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말을 박차 남쪽으로 달렸다.

오래잖아 한 무리의 백성이 황급히 남쪽으로 몰려가는 게 보였다. 남녀 합쳐 수백이나 되니 조운이 얼른 감부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감부인은 안 계십니까?”

조운은 하는 수 없이 아낙네들 쪽을 보며 크게 소리쳐 물었다. 마침 무리 뒤편에 섞여 있던 감부인이 조운을 보고 방성대곡으로 응답을 대신했다. 말에서 내린 조운은 창을 땅바닥에 꽂고 울먹였다. 

“주모를 잃어 이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운의 죄입니다. 미 부인과 작은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나와 미부인은 적군에게 쫓기던 끝에 수레를 버리고 백성들 틈 에 섞여 걸었소. 그런데 한 떼의 조조편 군마가 나타나 함부로 죽 이며 덤벼드는 바람에 모두 흩어져 미부인과 아두는 어디로 갔는 지 모르겠구려. 정신없이 쫓기다 보니 나 혼자 이렇게 살아 있을 뿐이오…….”

감부인도 눈물 섞어 그렇게 대답했다. 조운이 다시 미부인과 아두 가 간 방향이라도 가늠하고자 무얼 물으려는데 문득 백성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한 떼의 조조편 군마들이 또다시 유비를 따른 죄밖 에 없는 백성들을 짓밟으러 온 것이었다. 조운은 얼른 땅에 꽂았던 창을 빼어들고 말에 올랐다.

조운의 눈앞에 한 사람이 묶인 채 말 위에 실려오고 있는데 자세 히 보니 미축이었다. 큰 칼을 빼어들고 천여 명의 군사를 호령하며 뒤따르는 장수는 조인의 부장 순우도(道)였다. 미축을 사로잡고 으쓱해서 본진으로 공을 자랑하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감부인만 지키고 되도록 큰 싸움은 피하려 한 조운이었 으나 한솥밥을 먹던 미축이 사로잡혀 가는 걸 보자 참지 못했다. 한 소리 큰 꾸짖음과 함께 말을 박차 똑바로 순우도를 덮쳐갔다.

순우도도 마주 칼을 휘두르고 나왔으나 원래가 조운의 적수는 못 되었다. 조운은 한 창에 순우도를 찔러 죽인 뒤 미축을 구함과 아울러 말 두 필을 빼앗았다.

빼앗은 말에 감부인을 오르게 한 조운은 앞장서서 적군을 죽이며 길을 열었다. 자기들의 대장이 한 창에 찔려 죽는 걸 본 뒤라 조조의 군사들은 그런 조운을 감히 막지 못했다.

조운이 겨우 에움을 벗어나 장판교에 이르니 다리 위에서 홀로 말을 타고 서 있던 장비가 대뜸 창을 꼬나잡으며 호통을 쳤다. 

“이놈, 조자룡아 너는 무슨 까닭으로 우리 형님을 저버렸느냐?”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하며 감부인을 구해 나온 조운에게는 실로 뜻밖의 소리였다. 기막히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마주 고함을 쳤다. 

“주모와 작은 주인을 찾느라고 뒤처졌을 뿐인데 어찌 주인을 저 버렸다 말하시오?”

그제서야 장비의 기세가 좀 누그러졌다.

“간옹이 먼저 와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네를 보자마자 손을 썼을 것이네. 내 손의 병기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그렇게 말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의심이 남았다는 듯한 투 였다. 그러나 장비를 잘 아는 조운은 굳이 장비를 탓하려 하지 않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주공은 어디 계시오?”

“이 앞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네.”

장비가 다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조운은 여전히 그런 장비에게 마음씀이 없이 미축을 보며 당부했다.

“미자, 미축의 자)은 감부인을 모시고 먼저 가시오. 나는 미부인과 작은 주인을 찾은 뒤에 주공을 뵙겠소.”

그러고는 겨우 몇 기만을 거느린 채 다시 말을 박차 온 길을 되짚어 갔다.

달린 지 얼마 안 돼 조운은 십여 기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오는 적 장 하나와 맞닥뜨렸다. 손에는 철창을 들고 등에는 장검을 멘 젊은 장수였다. 조운은 말을 주고받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창부터 먼저 내밀었다. 상대편 장수도 철창을 들어 맞섰으나 둘의 말이 엇갈리기 무섭게 결판이 나고 말았다. 조운이 한 창으로 그 장수를 찔러 죽이 고 따르던 군사들을 모두 흩어버렸다.

조운의 창에 죽은 자는 조조의 칼을 메고 조조를 따르는 장수인 하후은(夏侯恩)이었다. 조조에게는 의천검(倚天劍)이란 보검과 청홍 검(靑)이란 보검이 있었는데 의천검은 조조 스스로 차고 청홍검 은 하후은에게 주어 그걸 차고 항시 뒤따르게 해왔다. 따라서 하후 은이 등에 메고 있는 것은 쇠를 진흙 베듯 하고 그 끝이 날카롭기가 천하에 비할 데가 없다는 바로 그 청홍검이었다.

그날 하후은이 조운의 한 창에 죽게 된 것은 자신의 용력만 믿고 보검을 등에 멘 채 졸개 약간과 더불어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 있다 가 갑자기 조운과 부닥치게 된 까닭이었다. 벌써 십여 년을 싸움터 를 누벼온 조운은 죽은 적장의 등에 있는 칼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 님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얼른 빼앗아 칼을 살펴보니 칼등에 청홍 (靑)이란 두 글자가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짐작대로 세상에 드문 보검임을 알 수 있었다.

조운은 보검을 거두어 꽂은 뒤 다시 창을 들고 겹겹이 둘러싸인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뒤따르던 몇 기마저 모두 죽고 오직조운 혼자였다. 그러나 조운은 조금도 물러설 마음이 없이 적진속을 누비고 다니며 미부인과 아두를 찾았다. 만나는 백성들마다 길 을 막고 묻는데 문득 한 사람이 가까운 담장을 손가락질하며 일러주 었다.

“한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저쪽 담장 무너진 곳에 앉아 있었는 데 미부인과 공자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왼쪽 허벅지를 창 에 찔려 걷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운은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말을 몰아 담장 있는 곳으로 갔다. 불 탄 집을 두르고 있는 무너져 내리다 만 흙담이었는데, 그 담 곁에 있 는 마른 우물가에서 미부인이 아두를 안은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조운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미부인 앞에 엎드렸다. 미부인이 울음 을 멈추고 말했다.

“이 몸이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은 아두 명이 아직 남은 덕택인가 합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이 아이가 황숙께서 반생을 이리저리 떠돌면서 얻은 한줌 혈육임을 가련하게 여겨주십시오. 장군께서 이 아이를 보호하시어 무사히 그 아버지와 만나게만 해주신다면 이 몸 은 여기서 죽어도 아무 한이 없겠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조운이 펄쩍 뛰며 권했다.

“부인께서 이와 같은 어려움에 빠진 것은 모두 운의 죄입니다. 여 러 말씀 마시고 어서 말에 오르십시오. 저는 걸으면서 죽기로 싸워

부인을 이 에움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조운의 그 같은 말에 미부인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됩니다. 장군은 말도 없이 어쩔 작정이십니까? 이 아이는 오직 장군의 보호하심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상처가 무거 워 죽어도 애석할 게 없으니 바라건대 장군은 얼른 이 아이를 품에 안고 먼저 가십시오. 부디 이 몸이 아두를 살리는 데 어려움을 주었 단 소리는 듣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함성이 가까워집니다. 뒤쫓는 적군이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 서 말에 오르십시오.”

조운이 다시 급한 목소리로 권했으나 소용없었다. 미부인은 오히 려 조운을 재촉하며 아두를 내밀었다.

“이 몸은 참으로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어서 이 아이나 받으십시오. 자칫하면 이일 저일 모두 그르치게 됩니다.”

그래도 조운이 얼른 아두를 받지 않자 더욱 간곡하게 말했다.

“부디 서두르십시오. 이 아이의 목숨은 오직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운이 세 번 네 번 말에 오르기를 간청했으나 미부인은 끝내 들 으려 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다시 함성이 일었다. 조운도 마침내 언 성을 높였다.

“부인께서 제 말을 듣지 않아 뒤쫓는 적군이 예까지 이르렀으니 이제 어쩔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미부인은 아두를 땅에 내려놓고 몸을 뒤집어 마른 우물로 뛰어들었다. 몇 길 우물인 데다 바닥에 물이 없으니 미부인같이 성 치 않은 몸으로 떨어져 살 리 만무였다. 조운이 놀라 내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두는 중이었다. 자기 몸을 죽여 유씨의 후사를 구하려 하였으니 그 용기와 결단은 실로 여장부라 할 만했다.

조운은 부인이 이미 숨진 걸 알자 조조의 군사들이 그 시체를 훔 쳐갈까 두려웠다. 흙담을 밀어 무너뜨려 마른 우물을 덮어버렸다. 그러고는 갑옷끈을 풀어 엄심갑(甲, 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아 두를 품고 단단히 여몄다.

채비를 마친 조운이 창을 들고 말에 막 뛰어올랐을 때 적장 하나 가 한 떼의 보군을 이끌고 다가왔다. 조홍의 부장 안명(晏明)이었다. 안명은 끝이 세 갈래 나고 양쪽으로 날이 있는 칼을 휘두르며 조운 에게 겁없이 덤볐다. 그러나 겨우 삼 합으로 조운의 창에 찔려 넘어 지고 그 졸개들도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조운은 그 틈을 비집고 한 가닥 길을 열어 말을 달렸다. 하지만 오 래잖아 다시 한 떼의 군사들이 앞을 막았다. 앞선 장수는 큰 깃발에 하간 땅의 장합張郃이라 뚜렷이 써서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있 었다. 조운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곧바로 창을 들어 장합 을 찔러 갔다. 장합이 약한 장수가 아니라 싸움은 십여 합이 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조운은 품에 감춘 아두 때문에 싸움을 길게 끌 고 싶지 않았다. 한차례 사나운 공격으로 장합을 주춤하게 한 뒤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합은 그런 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급히 뒤쫓았다. 거푸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던 조운이 갑자기 놀란 외침을 내며 말과 함께 커다 란 흙구덩이로 떨어졌다. 장합은 이때다 싶어 창을 꼬나들고 흙구덩 이 가로 갔다. 장합이 한 창에 조운을 꿰놓을 기세로 창을 내지르려 할 때였다. 홀연 한 줄기 붉은 빛이 흙구덩이 속에서 눈을 찌르듯 솟구치더니 말과 사람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가볍게 구덩이를 벗어나 내닫기 시작했다. 뒷날 제호(帝號)를 쓰게 될 아두가 품에 있어 하늘이 조운을 도운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장합은 크게 놀랐다. 조운을 뒤쫓을 마음을 버리고 군사들과 함께 돌아가버렸다. 장합을 따돌린 조운은 한층 급하게 말 을 몰아 적진을 빠져나가려 애썼다. 한참 정신없이 달리는데 이번에 는 등 뒤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뒤쫓아 왔다.

“조운은 달아나지 마라!”

뿐만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두 사람의 적장이 내달아 창칼을 휘두 르며 길을 막았다. 뒤에서 뒤쫓는 것은 마연과 장의요, 앞에서 막는 것은 초촉과 장남이었다. 모두 원소 밑에 있다가 조조에게 항복한 장수들이었다.

조운은 그들 네 장수를 만나 힘을 다해 싸웠다. 아무리 천하의 조 자룡이라지만 넷이나 되는 적장과 한꺼번에 부딪치니 쉽게 길을 앗 지 못했다. 그사이 조조의 군사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그런 조 운을 열겹 스무 겹 에워쌌다.

조운은 날이 무디어진 창을 버리고 하후은에게서 뺏은 청홍검을 뽑았다. 과연 조조가 자랑할 만한 명검이었다. 조운의 손길이 한번 미치는 곳이면 어김없이 푸른 칼빛과 함께 적군의 갑옷이 쪼개지고 피가 튀었다.

그렇게 되자 조운을 에워싸고 있던 조조의 장졸들은 멈칫했다. 조 운은 그런 적군을 더욱 매섭게 몰아붙이며 한 가닥 길을 열어 겹겹 이 둘러쳐진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때 조조는 경산 꼭대기에서 싸움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적 장이 자기편 군사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데 그가 이르는 곳에는 아 무도 그 위세를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바람에 그 적장을 눈여 겨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적장이 창을 버리고 칼을 뽑는가 싶더니 사람은 안 보이고 한 덩이 희푸른 칼빛만 수만 대군을 대쪽 쪼개듯 하며 빠져나가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적장이라고는 하지만 조조는 그 용맹과 무예에 감탄했다. 

“저 장수는 누군가?”

조조가 좌우를 돌아보며 급히 물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서 그런 지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곁에 있던 조홍이 말배를 차며 말했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듯 말을 달려 산을 내려온 조홍은 소리가 닿을 만한 곳에 이르자 조운을 보고 큰 소리로 물었다.

“지금 거기서 싸우고 있는 장수는 누군가? 이름 없는 졸개가 아닐진대, 어서 이름을 밝혀라!”

“나는 상산 땅의 조자룡이다!”

적장은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 없이 자기 이름을 밝혔다.

조홍은 돌아가 조조에게 알렸다.

“적장은 전에 공손찬 밑에 있다가 유비의 사람이 된 상산 땅의 조자룡이란 장수입니다.”

“정말로 범 같은 장수로구나! 내 마땅히 저를 사로잡아 내 사람으로 만들리라.”

조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비마(飛馬)를 띄워 곳곳의 장졸들에게 알리게 했다.

“조자룡에게 이르더라도 활을 쏘아서는 아니 된다. 반드시 살려서 잡도록 하라.”

그렇게 되자 조조의 군사들은 더욱 조운을 잡을 길이 없었다. 죽 여서 잡기도 어려운 장수를 어떻게 산 채로 잡을 수 있겠는가. 덕분 에 조운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조조군의 포위를 뚫고 나올 수가 있 었다.


그런데 한 가지 까닭 모를 일은 조조가 활을 못 쏘게 하여 조운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대목이 정사에는 없는 점이다. 야사나 구전에 있는 것을 『연의의 작자가 받아들인 것이라면 모르되, 꾸며 낸 이야기라면 앞뒤가 좀 맞지 않는 데가 있다. 조조라면 무조건 낮 추고 헐뜯기를 서슴지 않으면서 유독 이 대목에서는 왜 조조에게 유 리한 이야기를 꾸며넣었을까.

관운장에 대한 조조의 태도로 미루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긴 하 지만, 그것은 결국 조조란 인물의 크기를 더해주는 대신 그토록 힘들 여 과장해둔 조운의 무예는 오히려 빛이 덜해지고 말았지 않는가. 하지만 조조의 군사들이 활을 쏘았건 아니 쏘았건, 그날 조운이 세운 무공은 실로 눈부신 데가 있었다. 후주(後)가 될 아두를 품은 채 겹겹이 둘러친 포위를 뚫으면서 조운이 베어넘긴 대장기(大將旗) 가 둘이요, 자기 창의 날이 문드러져 빼앗아 쓴 큰 창이 셋에다 창으 로 찌르거나 칼로 찍어 죽인 조조편의 이름 있는 장수가 쉰 명남짓이었다. 뒷사람이 그 일을 노래했다.

전포와 갑옷 피로 물들이며 나아갈 제

당양의 누가 감히 그를 맞설 수 있었으리. 

예와 지금을 둘러봐도

적진을 뚫고 위태로운 주인을 구한 

이 오직 상산의 조자룡이 있을 뿐이네.

하지만 조자룡이 에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대로 유비의 진중 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양 장판벌 거의가 조조 의 세력 아래 들어간 뒤라 아직도 남은 길은 멀고 험했다.

적의 피를 뒤집어쓴 듯한 꼴로 간신히 에움을 벗어난 조운이 어 떤 산비탈을 지나갈 때였다. 두 갈래의 군마가 다시 조운의 길을 막 았다.

앞선 두 장수는 하후돈의 부장인 종진(鍾縉), 종신(鍾紳) 두 형제 였다. 하나는 큰 도끼를 휘두르고 하나는 화극을 겨누면서 목소리를 합쳐 소리쳤다.

“조운은 얼른 말에서 내려 포박을 받으라.”

그러나 조운은 조금도 두려워 않고 창을 꼬나쥐며 싸울 채비를 했다. 앞서 덤빈 것은 큰 도끼를 든 종진이었다. 그러나 미처 창과 도끼가 세 번 어우르기도 전에 조운은 종진을 찔러 말 아래로 떨어 뜨리고 길을 앗아 달아났다.

형이 죽는 꼴을 보고 눈이 뒤집힌 종신이 화극으로 그런 조운을 겨누면서 뒤따랐다. 조운의 말 꼬리에 그가 탄 말 머리가 닿을 만큼 바짝 뒤따르자 종신은 번쩍 화극을 들어 조운의 등판을 찌르려 했 다. 그걸 느낀 조운이 급히 말머리를 돌리니 두 사람의 거리는 타고 있는 말이 서로 가슴을 부딪칠 정도로 가까웠다. 조운은 얼른 왼손 에 든 창으로 찔러오는 화극을 쳐내는 한편 오른손으로 청홍검을 뽑 아 종신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쇠를 진흙 베듯 하는 청홍검이라 칼 날은 종신의 투구를 쪼개고도 머리통을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종진에 이어 아우 종신까지 처참한 몰골로 죽자 놀란 군사들은 그대로 흩어져 달아났다. 또 한차례 적군들 속에서 몸을 뺀 조운은 장판교를 바라보며 급히 달렸다.

하지만 미처 장판교에 이르기도 전에 또 한 떼의 군마가 함성과 함께 조운을 뒤쫓았다. 이번에는 유표의 장수였다가 조조에게 항복 한 문빙이 이끄는 군마였다. 어지간한 조운도 그때는 타고 있던 말 과 한가지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문빙과의 싸움 같은 것은 엄두 도 못 내고 앞으로 내닫기에만 바빴다.

간신히 장판교 가에 이르니 저만큼 다리 위에 창을 낀 채 말을 타고 서 있는 장비가 보였다. 조운이 장비를 향해 급한 소리를 내질 렀다.

“익덕은 어서 나를 도와주시오!”

조운의 모습만을 보고도 그때까지의 의심을 깨끗이 푼 장비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자룡은 빨리 가라! 뒤따르는 적군은 내가 맡으리라.”

이에 조운은 뒤를 장비에게 맡기고 급히 다리를 건넜다. 지친 말을 채찍질해 이십여 리쯤 가니 유비가 여럿과 함께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 게 보였다. 조운은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리며 울었다. 유비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조운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미부인께서는 몸 에 무거운 상처를 입으신 채 제가 권해도 끝내 말에 오르지 않고 우 물로 뛰어들어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흙담을 무너뜨려 우물을 봉한 뒤 겨우 공자만 구해 품에 품고 에움을 뚫었습니다. 주공의 홍복(洪 福)에 힘입어 다행히 적진은 빠져나왔으나, 이제는 공자까지 무사하 지 못한 것 같아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품속에서 울 던 공자께서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으십니다.”

조운은 그 말과 함께 급히 갑옷끈을 풀었다. 엄심갑 아래 품고 있 던 아두를 꺼내놓고 보니 한참 달게 자고 있었다. 그사이 잠이 들어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던 것을 조운은 죽은 걸로 지레 짐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공자께서는 아무 탈 없으십니다!”

조운은 기쁜 얼굴로 그렇게 소리치며 잠든 아두를 유비에게 두 손으로 받쳐올렸다. 그러나 유비는 아두를 받자마자 땅에다 내던지 며 소리쳤다.

“이 보잘것없는 것아. 너 때문에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 하나를 잃을 뻔하였구나!”

어찌 보면 비정을 느낄 만큼이나 철저하고 몸에 배인 유비 특유 의 아랫사람에 대한 아낌과 사랑이었다. 동물적인 혈육의 정에 얽매 인 속인들이야 어찌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땅바닥에 간과 뇌를 쏟고 죽은들 운이 어떻게 주공의 은의 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조운이 황망히 몸을 날려 땅에 떨어진 아두를 껴안고 울며 말했다. 어떤 사람에 따르면 뒷날 후주가 이따금씩 보이는 실책은 바로 이때 땅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상한 탓이라고 한다. 원래 어머니 감 부인이 북두칠성을 머금은 꿈을 꾸고 얻어 아이 적 이름을 아두라 했던 후주는 남달리 영특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한편 조운을 쫓던 문빙은 장판교에 이르러 주춤했다. 장비가 머리 칼과 호랑이 수염을 빳빳이 곤두세운 채 손에는 창을 잡고 말 위에 홀로 앉아 있는데 다리 동쪽의 숲 뒤에서는 자욱이 먼지가 일고 있 었다. 마치 수만 복병을 그 숲속에 숨겨놓고 장비 혼자서 조조군을 그리로 유인하려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에 더럭 의심이 든 문빙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감히 장비 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조인, 이전, 하후돈, 우금, 하후연, 악진, 장요, 장합, 허저 등의 맹장들도 각기 군사를 끌고 문 빙 곁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도 문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비 홀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창을 비껴들고 말 등에 앉아 있는 걸 보자 역시 의심이 든 까닭이었다.

조조의 맹장 거의 모두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는데 도 장비 혼자서 눈 한번 깜박 않고 버티는 데서 온 의심이었다. 

‘아무래도 제갈량이 또 무슨 계교를 펼쳐놓고 우리들을 꾀어들이려는 수작 같다.’

그렇게 짐작한 조조의 장수들은 감히 다리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장판교 서쪽에다 진채를 내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급히 사람을 뽑아 나는 듯 조조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후군에 머물러 있다가 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급히 말에 올라 앞

으로 나갔다.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가만히 보니 적군 뒤편에서 푸른 비단 일산이 움직이며 그 뒤를 모월(鉞)과 정기가 뒤따르는 게 눈 에 띄었다. 이는 틀림없이 조조가 의심이 일어 스스로 살펴보려고 오는 것이라 짐작한 장비는 짐짓 기세를 올려 큰소리를 쳤다.

“나는 연 땅 사람 장익덕이다! 누가 나와 한판 죽도록 겨뤄 보겠 느냐?”

일부러 기세를 과장하고자 지르는 소리라 마치 큰 우레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해 덜덜 떨었다. 조조도 까닭 없이 저려오는 오금을 애써 떼며 좌우에 영을 내려 일 산이며 정기를 걷어치우게 했다. 혹시 장비가 그것을 보고 자신이 있는 곳을 짐작하여 덮칠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조조는 또 곁에 있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나직이 일러주었다.

“일찍이 관운장에게 들으니 장비는 백만 대군 가운데 있는 적장 의 머리를 베어오기를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 하는 장수라 했다. 그 장비를 오늘 만났으니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그때 장비가 다시 부릅뜬 눈으로 조조의 장졸들을 내려보며 한층 목청을 높였다.

“연나라 땅의 장익덕이 여기 있다. 누가 나와서 맞붙어 보겠느냐?” 

조조는 장비의 기세가 그처럼 등등한 걸 보자 반드시 믿는 것이 있어서라 여겼다. 섣불리 말려들어 낭패를 당하느니 잠시 군사를 몰려 형세를 살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영을 내려 군사를 물 릴 채비를 하게 했다.

장비가 보니 조조군의 후미가 수런거리며 진채를 뽑는 게 자신의 계책대로 되어가는 것 같았다. 더욱 기세가 올라 창을 휘두르며 또 소리쳤다.

“싸우자고 해도 싸우려들지 않고, 그렇다고 물러나는 것도 아니니 도대체 어찌 된 셈이냐? 내가 가서 모두 죽여주랴?”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라 앞서의 고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소리에 놀라 조조 곁에 있던 하후걸이란 못난 장수 하나가 말 에서 거꾸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공포가 무슨 몹쓸 전염병처럼 삽 시간에 조조군을 사로잡았다. 먼저 조조가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 고, 이어 그때껏 용맹을 뽑내던 장수들도 무엇에 홀린듯 겁에 질 려 서쪽을 바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수들이 그 지경이니 사졸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린아이가 벽력 소리에 놀라고 병든 나무꾼이 호랑이나 표범의 울음에 넋이 빠 진 듯 뒤돌아 내빼는데, 창칼을 내던지고 투구를 떨어뜨린 자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뿐인가, 수십만의 군사가 한꺼 번에 물러서자니 사람은 파도가 밀리는 듯하고 말은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저희끼리 짓밟히고 떼밀려 죽은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조조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장비의 위세에 쫓겨 급히 달아나느라 관이 벗겨지고 머리를 묶어주던 비녀가 빠져나가 산발이 되는 것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아나다가 장요와 허저가 달려와 말고삐를

잡아 세워서야 겨우 달아나기를 멈추었다.

지나친 헤아림의 병이었다. 만약 조조가 단순한 무장이었다면 일 단 군사를 내어 장비와 부딪쳐보았으리라. 그러나 자신에 비추어 남 을 헤아리다가 그처럼 뜻 아니한 낭패를 보게 된 것이었다. 장요가 그걸 깨달은 듯 조조에게 권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장비 한 사람을 무엇 때문에 그토록 두려워하십니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급히 군사를 돌려 들 이칠 때입니다. 반드시 유비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도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른 놀란 모습과 겁먹은 표정을 바로하고 허저와 장요에게 말했다.

“그 말이 옳아. 내가 잠시 무엇에 홀렸던가 보네. 그대들은 다시 장판교로 돌아가서 장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오게.”

한편 장비는 조조군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나는 걸 보자 한층 호 기가 솟구쳤으나 워낙 거느린 군사가 적어 감히 뒤쫓지 못했다. 말 꼬리에 나뭇가지를 매달고 숲속을 내달으며 먼지를 일으키고 있던 이십여 기를 불러 겨우 장판교만 부수어버리고는 유비를 쫓아 뒤돌 아갔다.

“내 아우가 용맹스럽기 그지없이 용맹스러우나 애석하게도 계 책을 베풂이 너무 서툴구나!”

뒤따라온 장비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유비는 기쁜 중에도 그렇게 탄식했다. 먼지를 일으켜 의병을 삼은 일이며 거짓 위세로 조조의 대군을 홀로 물리친 일 따위로 무용뿐만 아니라 계교에서도 스스로 훌륭했다고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던 장비가 그 같은 유비의 탄식을 듣자 이상한 듯 물었다.

“계책을 베푸는 데 서툴다니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우?”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이다. 너는 용케 그를 속였으나 다리를 부 수고 온 게 큰 잘못이었다. 두고 봐라. 조조는 반드시 우리를 뒤쫓아 올 것이다.”

유비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장비는 얼른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못마땅한 말투로 유비에게 대꾸했다.

“조조는 그 고함 소리 한번에 엎어질락 자빠질락 몇 리나 달아났습니다. 어찌 감히 다시 뒤쫓아올 마음이 나겠습니까? 더구나 다리 까지 끊어놨는데…….”

“바로 그 다리를 끊은 일 때문이다. 만약 네가 다리를 끊지 않았 더라면 조조는 여전히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네가 다리를 끊고 왔으니 조조는 우리가 군사 가 없어 겁을 먹고 그랬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고, 따라서 반드시 뒤 쫓아올 것이다. 거기다가 저쪽은 무리가 백만이나 된다. 비록 큰 강 이라도 얼마든지 메우고 건널 수 있을 터인데 까짓 다리 하나쯤 끊 어졌다 해서 무어 꺼릴 게 있겠느냐?”

유비는 그렇게 장비를 깨우쳐줌과 아울러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이제는 샛길로 한진을 거쳐 면양으로 간다. 모두 서두르라!”

이때 장판교에 이른 장요와 허저는 장비가 다리를 끊고 달아난 걸 알았다. 곧 사람을 보내 조조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적이 다리를 끊고 갔다면 이는 틀림없이 거느린 군사가 없어 마

음속으로는 우리를 겁내고 있다는 뜻이다. 얼른 뒤쫓아야 한다.”

조조는 그렇게 말하고 곧 군사 일만을 뽑아 장판교가 끊어진 곳 에다 세 개의 부교를 놓게 했다. 그날 밤으로 대군이 지나갈 수 있게 하라는 엄명과 함께였다. 이전이 그 같은 조조의 서두름을 말렸다. 

“이것은 어쩌면 제갈량의 속임수인지도 모릅니다. 가볍게 군사를 내어서는 아니 됩니다.”

조조가 껄껄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내가 보니 이번 일은 제갈량의 꾀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장비가 꾸민 것임에 틀림없네. 하지만 결국 장비는 한낱 용맹만 믿 는 무장일 뿐일세. 또다시 무슨 속임수를 쓸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다시 영을 내려 더욱 급하게 진병을 재촉했다.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유비를 사로잡고 말겠다고 뜻을 굳힌 것 같았다. 장비 는 결국 한 가지를 잘못 헤아려 모처럼 계교로 이룩한 자신의 공은 물론 조운의 그 눈부신 무용까지 헛수고가 될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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