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4화 : 큰 불길 속의 작은 불길
큰 불길 속의 작은 불길
다음 날이 되었다. 주유는 아침 일찍 행영(行營)으로 나가 중군장 에 높이 올려진 대도독의 자리에 앉았다. 좌우로는 칼과 도끼를 든 군사들을 벌려 세운 가운데 문관과 무장들을 모아들이고 영을 내리 는데 그 위엄이 자못 크고 무거웠다.
이번 싸움에서 전부 도독을 맞게 된 정보는 원래 주유보다 나이 가 많은 데다 손씨를 섬긴 지도 훨씬 오래인 장수였다. 정보가 아직 손권이 태어나기도 전 그 아비 손견이 황건적을 칠 때 따라나선 것 에 비해 주유는 손견이 죽고도 몇 년 뒤 손책이 원술로부터 자립할 때에야 따라나섰고, 싸움터에서의 공도 정보가 주유보다 위면 위였 지 아래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유가 대도독이 되어 모든 군무를 관장하고 정보는 그 아래서 전부 도독으로 싸우게 되었으니 마음이 즐거울 리 없었다. 아들 같은 주유 앞에 불려가 이래라 저래라 영을 듣는 게 싫어 병을 핑계하고 아들 정자)를 대신 내보냈다.
모든 문무의 관원들이 모이자 주유가 첫 번째 영을 내렸다.
“왕법(法)은 더 친하고 덜 친하고를 살피지 아니하고 공변되니, 여러분은 모두 맡은 바 직분에 각기 힘쓰라. 지금 조조는 나라의 권 세를 희롱하기가 동탁보다 심하여, 천자를 제 근거지 허창에 가두어 두고 포악한 군사를 내어 우리 경계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그를 치고자 하거니와 여러분도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우리 대군이 이르는 곳에 백성들의 어려움이 나 걱정이 더해져서는 아니 된다. 수고로움이 있는 곳에는 상이 따 를 것이요, 죄가 있는 곳에는 벌이 이르리라. 이는 반드시 지켜질 군 령의 큰 줄기인즉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게 하라!”
주유는 먼저 그렇게 행군의 기본이 되는 영을 세운 뒤에 한당과 황개를 전부 선봉으로 삼고 그날로 모든 싸움배를 몰아 삼강구(三江 口)로 내려갔다. 삼강구에 수채水)를 내린 주유는 다시 군령을 내 려 장수들의 자세한 배치를 정했다.
“장흠과 주태는 제이대를 이끌고 능통과 반장은 제삼대가 되며, 태사자와 여몽은 제사대가 되고 육손과 동습은 제오대가 되라. 여범 과 주치는 사방순경사(四方巡警使)가 되어 대군의 경계와 아울러 정 탐을 맡는다.”
그런 다음 여섯 갈래의 군사를 재촉하여 물과 뭍으로 아울러 나아가게 했다.
진군을 위한 배치가 정해지자 모든 장수들은 각기 거느린 배와 군사들을 수습하고 진군할 채비를 시작했다. 아비 대신 나아가 영을 받은 정자는 집으로 돌아가 정보에게 말했다.
“오늘 주유가 군사를 부리는 걸 보니 움직이고 멈추는 데 한가지 로 뚜렷한 법도가 엿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자세히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다 듣고 난 정보가 크게 놀라 말했다.
“나는 평소 주랑(周郞)이 겁많고 약한 줄로 잘못 알아 장수감으로 는 모자란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 네 말대로 그렇게 했다면 실 로 훌륭한 장재(將材)다. 내가 어찌 굽히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고는 몸소 주유의 행영을 찾아가 죄를 빌었다. 주유 또한 정 보가 스스로 찾아와 잘못을 빌자 그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정보의 솔직하고도 당당한 태도를 높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늦게나마 자신 을 인정해준 것에 오히려 감사했다.
그런데 정사의 기록은 주유를 좌도독(都督), 정보를 우도독(都 督)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좌우 도독 사이라면 구태여 위아래를 따질 필요가 없고 따라서 앞서와 같은 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유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는 것만으로도 정보 같은 원로에게는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 요한 것은 싸움과 항복을 두고 문관과 무장의 주장이 엇갈렸던 것처 럼 지휘권에 있어서도 노장층과 소장층의 알력이 있었던 것을 동오 (東吳)가 스스로의 조정 능력으로 해결했다는 점이리라.
군사를 내기 위한 배치가 대강 마무리되자 주유는 곧 제갈량을 동오로 끌어들이는 일에 손을 댔다. 제갈근을 가만히 불러 그 아우 를 달래보도록 권한 것이었다.
“선생의 아우 공명은 왕좌(佐)의 재주를 지녔는데 어찌하여 유 비 같은 자를 몸 굽혀 섬기는지 모르겠구려. 마침 이곳 강동에 와 있 으니 선생께서 번거로우시더라도 한번 그를 찾아 달래보십시오. 아 우를 달래 유비를 버리고 우리 동오를 섬기게만 할 수 있으면 주공 께는 좋은 도움을 드리는 일이요, 또 선생으로 보면 형제가 함께 일 하게 되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부디 공명을 한번 찾아보시 도록 하십시오.”
이미 몇 년째 손권의 막빈으로 있는 제갈근이 주유의 그 같은 권 유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근)이 강동에 온 이래 한치 공도 세운 게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더니 이제 그 부끄러움을 씻을 기회가 온 모양입니다. 장군의 당 부가 아니라 한들 어찌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말에 올라 공명이 묵고 있는 역관으로 갔 다. 어려운 일을 겨우 되도록 돌려놓은 뒤에 한숨 돌리고 있던 공명 은 제갈근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각기 섬기는 주인이 다르나 형제의 정이야 다르겠는가. 공명은 울며 절하고 형을 본 뒤 오래 떨어져 있 어 나누지 못했던 정을 되살렸다. 제갈근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자기가 떠난 뒤의 고향 소식과 친지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갈근은 가슴속에 다른 뜻을 감추고 온 사람이 라 언제까지고 사사로운 정이나 나눌 수만은 없었다. 이윽고 눈물을 거두며 공명에게 말했다.
“너는 백이(伯夷)와 숙제(齊)를 아느냐?”
그 갑작스런 물음에 형제간의 정에만 취해 있던 공명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틀림없이 주유가 형님을 시켜 나를 달래보려고 보냈구나.
속으로 그렇게 헤아리고는 얼른 대답했다.
“백이 숙제라면 옛날의 어진 선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백이와 숙제는 비록 수양산 아래서 굶어 죽었으나 그래 도 형제 두 사람이 한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너와 나는 한 몸에서 나, 같은 젖을 먹고 자랐으면서도 각기 섬기는 주인이 다르니 아침 저녁으로 만나볼 길이 없구나. 저 백이 숙제로 본다면 실로 부끄러 운 일이 아니겠느냐?”
제갈근이 그렇게 말하며 공명을 보았다. 얼른 들어서는 그럴듯하 면서도 실은 억지로 끌어붙인 얘기였다. 공명이 표정을 엄숙히 하여 대답했다.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정이나 제가 지키려 하는 것은 의입 니다. 형님이나 저는 한의 사람이고 유황숙께서는 한실의 종친입니 다. 만약 형님께서 동오를 떠나 저와 함께 유황숙을 섬기신다면 위 로는 한의 신하로서 부끄러울 게 없고 아래로는 골육이 함께 모이게 되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되면 정과 의를 모두 보 전할 수 있게 되는 일이지만 형님 뜻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거꾸로 제갈근더러 유비에게로 오라는 말이었다.
‘내가 저를 달래러 왔는데 오히려 제가 나를 달래려 하는구나. 더 말해봐야 소용없겠다.’
제갈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킨 뒤 아우와 작별했다.
제갈근이 돌아가니 주유가 기다리고 있다가 결과를 물었다. 제갈 근이 공명에게서 들은 대로 전하자 듣고 난 주유가 살피는 눈길로 물었다.
“그래 공의 뜻은 어떠시오? 공명을 따라 유비에게로 가시려오?”
“저는 손장군으로부터 두터운 은의를 입었습니다. 어찌 저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제갈근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유는 짐짓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공이 이미 충성스런 마음으로 주공을 섬기고 계시다면 달리 여 러 말할 필요가 없소. 나도 공을 믿소이다. 공명을 처리할 계책은 따 로 있소.”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다시 공명을 죽일 생각을 굳혔다.
다음 날 모든 장수와 사졸을 점검한 주유는 떠나기에 앞서 손권을 찾았다. 손권은 그런 주유를 맞아 위로와 격려를 거듭한 뒤 말했다.
“경은 먼저 떠나시오. 이 몸도 곧 군사를 모아 뒤를 따르겠소.”
손권 앞을 물러나온 주유는 곧 노숙과 정보를 데리고 군사를 몰 고 나아갔다. 이때 주유는 공명도 함께 가기를 청했는데, 공명은 그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꺼이 따라나섰다. 장이 모두 오른 뒤에 돛을 올리자 배들은 늠름하게 잇대인 채 하구를 바라고 나아갔다. 삼강구를 떠나 오륙십리 되는 곳에 이르러 닻을 내린 주유는 그 곳에다 진채를 세웠다. 물가 서쪽 산에 의지해 군영을 읽고 그곳을 중심으로 빙 둘러 군사를 주둔시키는 형태였다. 이때 공명은 작은 배 안에서 쉬고 있었다.
진채를 세우는 일을 대강 끝낸 주유는 곧 공명을 불러 의논을 시작했다.
“지난달 조조의 군사는 적고 원소의 군사는 많았는데도 오히려 조조가 원소를 이긴 것은 허유가 낸 꾀를 써서 조조가 먼저 오소로 부터 오는 원소군의 양식을 끊어버린 데 있소. 그런데 지금 조조는 군사가 팔십삼만이요, 우리는 겨우 오륙만이니 그때처럼 군사의 머 릿수로는 우리가 조조를 당해낼 길이 없소. 역시 먼저 조조의 군량 이 오는 것을 끊어버려야만 그 군대도 깨뜨릴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이미 조조군의 양식과 말먹이 풀이 모두 취철산에 있음을 정탐해두 었소이다. 선생께서는 오래 한상(上)에 계셨으니 그곳 지리에 밝 으실 것이오. 번거로우시겠지만 선생께서 관우, 장비, 조운 등을 데 리고 밤을 틈타 취철산으로 가서 조조군의 양도糧道)를 끊어주시 오. 나도 군사 천 명을 내어 선생을 도우리다. 나나 선생이나 모두 그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니 행여라도 핑계를 대어 이 일을 마다 하지 않기 바라오.”
시작은 의논조였으나 끝나고 보니 마다할 수 없는 군령이었다. 공 명은 가만히 주유의 속셈을 헤아려보았다.
‘이것은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해놓고 해치려는 계책이로구나. 만 약 내가 핑계를 대어 하지 않겠다면 비웃음을 당할 것이니 그대로 따르니만 같지 못하다. 나를 지킬 계책은 따로 생각해내면 될 것 아닌가’
그러고는 또 기꺼이 그 영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쉽게 공명이 제 꾀에 걸려드는 걸 보고 주유는 속으로 몹시 기뻤다. 그러나 공명 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 주유를 작별하고 자기 배로 돌아가버렸다. 공명이 나간 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노숙이 주유에게 물 었다.
“장군께서 공명을 시켜 조조군의 양식을 빼앗게 하시는 데는 딴 뜻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공명을 죽이고 싶으나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려워 그 리 못하고 있소. 그런데 이제 조조의 손을 빌어 공명을 죽이고 뒷날 의 걱정거리를 없애려 하오. 조조가 어떤 인간인데 대군의 젖줄과도 같은 군량과 마초를 허술히 지키겠소?”
주유가 차갑게 웃으며 까닭을 일러주었다. 노숙 또한 동오의 사람 이라 구태여 그런 주유를 말리고 나설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공명 을 죽이는 게 아까웠다. 그러나 그 아까운 마음 못지않은 것은 공명 이 과연 주유의 그 같은 속셈을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에 대한 궁금 함이었다.
그 바람에 노숙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공명을 찾아가 그 하는 양을 살폈다. 공명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도 어 려운 기색 없이 군사와 말을 점검하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까닭 이었다. 노숙은 죽을 것도 모르고 떠나려는 공명이 몹시 안타까웠다. 참지 못하고 무언가를 넌지시 알려주는 말투로 공명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번에 가서 공을 이룰 수 있으시리라 믿으십니까?”
그런데 공명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빙그레 웃으며 철없는 아이 가르치듯 말했다.
“나는 수전, 보전, 마전, 거전 어느 것도 그 묘리를 알지 못하는 게 없소. 이번 싸움이 무엇이길래 공 이루지 못할까를 걱정하겠소? 공 이나 주랑() 같은 강동 사람들이 한가지 싸움에만 능한 것에 견 주어 생각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공명을 위해 안타까워하던 노숙이었으나 공명이 너무 자기들을 얕보아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불끈했다.
“나와 공근이 어째서 한가지 싸움밖에 할 줄 모른단 말씀이오?”
노숙이 그렇게 묻자 공명은 전에 없이 제법 거드름까지 피우며 대답했다.
“나는 강남의 아이들이 하는 노래를 들은 게 있소.
‘길에 복병을 묻고 관을 지키는 데 뛰어난 것은 자경이고 강에서 수전 잘하기로는 주랑이 있네’라는 노래였소. 이 노래는 다시 말해 공은 육지에서 싸워도 그저 겨우 지켜내기만 할 뿐이요, 주랑은 다 만물에서 하는 싸움뿐 뭍에서의 싸움은 잘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 겠소? 철없는 아이들이 터무니없이 지어낸 노래라고 말한다면 모르나…….”
하지만 공명이 그렇게 철없는 아이들 핑계를 대고 슬몃 물러나 앉아버리니 노숙도 더는 따지고 들 수 없었다. 말없이 돌아서기는 해도 그대로 마음속에서 삭여버리기는 힘들었다. 곧 주유에게로 돌 아가 공명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게 바로 공명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주유는 얼굴이 시뻘겋게 성을 냈다.
“어째서 내가 뭍에서는 싸울 줄 모른단 말인가! 아니 되겠소. 내 스스로 일만 마군을 이끌고 취철산으로 가서 조조군의 군량 나르는 길을 끊어보이리다.”
그렇게 소리치고는 공명에게 시키려던 일을 스스로 떠맡았다. 노 숙은 주유가 그렇게 나서자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얼른 공명에게 돌아가 은근히 주유를 추켜세우듯 들은 말을 전했 다. 주유도 뭍에서 하는 싸움을 이만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 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노숙의 말을 들은 공명은 뜻밖에도 한동안을 껄껄거리더니 말했다.
“공근이 나더러 조조군의 양식 나르는 길을 끊으라고 한 것은 기 실 조조의 손을 빌어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었을 따름이오. 그래서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해본 것뿐인데 공근이 그걸 용납하지 못했구 려. 지금 형세로 보면 오후(吳侯)와 유사군의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 이 되어 일해야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서로가 각기 해칠 것을 꾀한다면 큰일은 그르쳐지고 맙니다.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말 씀드리거니와 조조가 어떤 사람이오? 그는 꾀가 많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싸우면서 남의 군량 나르는 길을 끊는 짓을 버릇처럼 해왔는 데, 어찌 자기 군량 나르는 길을 허술히 대비하겠소이까? 반드시 군 사를 풀어 대비하고 있을 것이니 이번에 가신다면 반드시 조조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오.
가서 공근에게 이르시오. 지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한바탕 수전을 벌여 먼저 북쪽에서 온 군사들의 예기를 꺾어놓는 길이라고.
그다음에 따로 묘책을 찾아 조조군을 완전히 부수어버리는 것이오. 자경께서 잘 말씀하셔서 공근이 그대로만 해준다면 이보다 더 큰 다 행이 없을 것이외다.”
완전히 주유를 손바닥 안에 쥐고 노는 듯한 공명의 헤아림이었다. 노숙은 감탄 못지않게 은근히 부아까지 치밀었으나 더욱 급한 것은 조조와의 싸움에 이기는 일이었다. 그 밤으로 곧 주유를 찾아보고 공명이 한 말을 전했다.
주유는 그제서야 공명에게 놀림을 당했음을 알았다. 분을 못 이겨 머리를 내젓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저 사람의 견식이 나보다 열 갑절은 낫구려. 이제 없애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우리나라에 큰 화가 되겠소!”
노숙이 그런 주유를 말렸다.
“아직도 못 알아들으셨습니까? 지금 사람을 쓰는 데는 오직 나라 를 앞세워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조조의 군사를 깨뜨린 뒤에 그를 죽일 것을 꾀한다 해도 늦지 않습니다.”
공명에 비해 재주가 모자라나 그래도 강동의 큰 그릇인 주유였다. 그 같은 노숙의 말까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아터진 사람은 아니었다.
“알겠소.”
그 한마디로 공명 죽이는 일을 더는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할까, 원래부터 서로 이익이 다른 두 세력이 한데 합쳐 한 강적에게 맞서고 있었으니 내부로는 충돌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외부의 더 큰 불길 때문에 내부의 작은 불길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불길은 그 뒤에도 거듭 피 어나다가 큰 불길이 꺼지자 마침내 새로운 큰 불길로 자라게 된다. 이때 유비는 공자 유기에게 강하를 지키고 있게 한 뒤 자신은 여 러 장수들과 군사를 이끌고 하구로 내려와 초조한 마음으로 공명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명이 떠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조조와 손권이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과연 오와의 동맹이 제대로 이 루어졌는지 걱정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만약 손권이 자신을 받아들 여주지 않는다면 남은 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남의 언덕을 바라보니, 기치들이 희끗희끗 움직 임과 아울러 줄지은 창칼의 숲이 뒤따르고 있었다. 유비는 그것을 보고 동오가 이미 군사를 움직였다는 걸 알았다. 곧 강하의 유기에 게 그 전갈을 보내고 모든 군사를 이끌고 번구로 나와 진치게 했다. 조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면 강하보다는 그쪽으로 옮겨오는 것이 서로 돕고 의지하기에 나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공명의 소식이었다. 동오 와 연결을 맺게 된 자세한 경과도 궁금하려니와 이제 군사를 움직이 게 된 이상 공명은 누구보다도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이에 유비는 여럿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공명은 한번 강동으로 간 뒤로 아무런 기별이 없으니 일이 어떻 게 되어가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소. 누가 다시 강동으로 가서 공명 의 안부와 더불어 그쪽의 허실을 한번 알아오겠소?”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미축이 선뜻 나서며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도 그가 알맞은 인물이 라 여겨 곧 허락하고 고기와 술을 예물로 마련해주었다. 강동의 군 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위로하려 한다는 걸 구실로 삼기 위해서였다. 명을 받은 미축은 그날로 배 한 척을 내어 예물을 실은 뒤 흐르는 물을 타고 내려 주유의 대채에 이르렀다. 군사들이 들어가 미축이 왔음을 알리자 주유는 미축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미축은 두 번 절하며 주유를 보고 현덕의 경의를 전함과 더불어 가져간 술을 올렸다. 주유는 기꺼이 예물을 받고 술자리를 열어 미 축을 대접했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미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명이 이곳에 와 있은 지 오래됩니다.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분 이니 바라건대 이번에 저와 함께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공명은 바야흐로 나와 함께 조조를 칠 계책을 짜고 있는데 어찌 그리 빨리 돌아가실 수 있겠소? 오히려 나는 유예주까지 뵙고 함께 조조를 칠 좋은 계책을 의논하고 싶으나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몸이 라 잠시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구려. 만약 유예주께서 몸소 이곳까 지 와주신다면 그 위에 더 바랄 게 없겠소이다만 그리될 수 있을는 지요?”
주유가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을 보내기는커녕 유비까지 불러들 이겠다는 뜻이었다. 미축은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나 주유로서는 그 렇게 할 수도 있는 말이라 하는 수 없이 응낙했다.
미축이 주유에게 절하고 하구로 돌아간 뒤 노숙이 주유에게 물었다.
“공은 유현덕을 보고자 하시는데, 그를 만나 무엇을 의논하려 하십니까?”
주유가 갑작스레 유비를 불러들이려 하는 게 이상스러웠기 때문 이었다. 주유가 차게 웃으며 말했다.
“현덕은 세상이 알아주는 영웅이라 없애지 아니할 수 없소. 이번 에 틈을 보아 그를 죽여 이 나라의 큰 걱정거리 하나를 미리 덜어두 려는 것이오.”
“아직 서로 힘을 합치기도 전에 유비를 먼저 죽여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노숙이 놀라 다시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주유는 이미 뜻을 굳힌 모양이었다.
“조조는 우리 힘만으로도 막을 수 있소. 다소 힘이 부치더라도 홀 로 조조를 상대하는 편이 병든 호랑이를 고쳐주어 우리에게 덤비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주유는 그렇게 대답하며 노숙이 두 번 세 번 말려도 들으려 하지 않 았다. 오히려 노숙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현덕이 오거든 먼저 벽에 쳐둔 휘장 뒤에 칼과 도끼를 든 군사 쉰 명을 감춰두고 방안으로 맞아들이도록 하라. 군호는 술잔이니, 내가 술잔을 던지거든 얼른 손을 써서 그를 죽여라.”
그렇게 되니 노숙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어쨌든 그도 동오의 사람이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미축은 유비에게 돌아가 주유가 한 말을 전했다.
“주유는 오히려 이마를 맞대고 조조 칠 것을 의논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비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나 그 같은 주유의 청을 마다할 수 없었다. 곧 빠른 배 한 척을 내게 하여 주유에게로 갈 채비를 하게 했다. 운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런 유비에게 말했다.
“주유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공명이 직접 써서 보낸 글이 없으니 어떤 속임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가볍게 갈 일이 아 닌 듯싶습니다.”
“나는 지금 동오와 힘을 합쳐 조조를 치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랑이 그 일로 나를 만나고자 하는데 아니 갈 수 있겠느냐? 그것은 서로 힘을 합치고자 하는 뜻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양쪽이 서 로 의심하고 시기하면 일은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유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주유가 노린 것 도 바로 그런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장은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형님이 굳이 가실 뜻이 있으시다면 아우가 함께 가겠습니다.”
운장이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장비도 덩달아 떠들고 일어났다.
“나도 따라가겠소. 어느 놈이든 형님의 터럭 하나 건드리면 그 자 리에서 박살을 내버리리다.”
그러자 유비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운장만 따라오도록 하라. 익덕은 자룡과 더불어 이곳에 남아 진채를 지키고 간옹은 악현을 지키도록 한다. 나도 갔다가 얼 른 돌아오마.”
그렇게 되자 장비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각기 들은 대로 지켜야 할 곳으로 떠난 뒤 유비는 관운장과 군사 스무남은 명만 거느리고 작은 배에 올랐다.
배는 나는 듯 노를 저어 어느덧 강동에 이르렀다. 유비는 강동의 크고 작은 싸움배들이 위세 좋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이며 기치와 갑 옷 입은 군사가 좌우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조조의 대군이라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강 언덕을 지키던 군사들이 나는 듯 주유에게 달려가 알렸다.
“유예주께서 오셨습니다.”
“끌고 온 배들은 얼마나 되더냐?”
주유는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군사는 본 대로 대답했다.
“겨우 배 한 척에 따르는 이도 스무남은 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주유는 됐다 싶었다. 빙긋 웃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자도 이제는 목숨이 다했구나!’
그러고는 먼저 도부수를 휘장 뒤에 숨긴 후에 진채를 나가 유비 를 맞아들였다.
유비는 관운장과 이십여 명의 종자만 데리고 똑바로 주유가 있는 중군(中軍)의 장막에 이르렀다. 서로 처음 보는 예를 한 뒤에 주유는 유비를 윗자리로 청했다. 유비가 사양했다.
“장군의 이름은 이미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비같이 재주 없는 자가 어찌 감히 장군의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예를 너무 무 겁게 하시면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는 주유와 똑같은 곳에 주인과 손님으로 자리를 나누어 앉 았다. 주유는 미리 짜둔 대로 술자리를 열어 유비를 대접했다.
이때 공명은 우연히 강변을 거닐다가 유비가 와서 주유와 만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주유의 속셈을 짐작한 공명은 그 말에 은근히 놀랐다. 곧 유비가 들어 있다는 중군의 장막으로 가서 가만히 안을 엿보았다.
안에서는 주유가 웃으며 술을 따르고 있으나 그 얼굴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양쪽 벽에 둘러친 휘장 뒤에도 칼과 도끼를 든 군사들이 숨어 있는 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주유의 속셈을 짐작하기는 해도 일이 그토록 엄중하게 벌어진 줄은 몰랐던 공명은 더욱 놀랐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어찌해야 좋은가!’
공명은 속으로 그렇게 탄식하며 유비 있는 쪽을 살펴보았다. 유비 는 자기가 빠져 있는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주유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명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경으로 유비의 주위 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바로 유비의 등 뒤에 한 장수가 늠름한 기세 로 칼을 짚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봉의 눈에 대춧빛 얼굴, 휘날리는 삼각의 수염 – 바로 관운장 그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공명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마음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우리 주인이 위태롭지는 않겠다!’
그러고는 다시 강변을 나아가 전처럼 이리저리 거닐며 지세를 살 피기를 계속했다. 자신까지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 유비를 살리기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한편 술자리에서는 주유가 겉으로는 정답게 술잔을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몇 바퀴 술이 돈 뒤에 주유 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던 술잔을 던져 숨겨놓은 도부수들에게 군호를 보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비의 등 뒤를 보니 한 장수가 칼을 짚고 서 있 는 게 보였다. 그때까지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예사로운 장수 같지가 않았다.
“저 장수는 누구십니까?”
주유가 황망히 잔을 내리며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별다른 생각없이 대답했다.
“내 아우 관운장입니다.”
“그렇다면 전날 안량과 문추를 베어 죽인 그 관운장이란 말입니까?” 주유가 더욱 놀라 거듭 물었다. 유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주유는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만일 멋모르고 잔을 던졌더라면 유비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자 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알아뵙지 못해 죄송스럽소. 늦은 대로 사죄를 대신해 한잔 권하고자 하니 물리치지 마시오.”
주유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던지려던 잔을 오히려 관우에게 권했다. 술자리는 다시 일없이 이어졌다. 얼마 뒤에 노숙이 들어왔다. 차 마 눈앞에서 유비가 죽는 꼴을 보지 못해 자리를 피했다가 오랜 시 간이 흘러도 아무 기척이 없어 들어와본 것이었다.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 유비가 노숙을 반겨 맞으며 물었다.
“공명은 어디 계시오? 번거로우시겠지만 자경께서 한번 만나보게 해주시오.”
“조조를 깨뜨릴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때 가서 공명과 만나 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유가 좋은 낯으로 노숙을 대신해 대답했다. 주유의 그 같은 말 에 유비도 두 번 말하지 못하고 공명 만나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 그 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관운장이 유비에게 눈짓을 보내 왔다. 유비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유비는 떠날까 합니다. 적을 깨뜨리고 공을 거두신 뒤에 다 시 뵙고 경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비가 그렇게 작별을 고하자 주유도 굳이 붙들지 않았다. 이왕 죽이지 못할 바에야 유비가 자신의 속셈을 눈치채기 전에 보내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주유는 몸소 진문 밖까지 유비를 바래다 주었다.
유비는 주유와 헤어진 뒤 운장과 더불어 강변에 이르렀다. 공명이 언제 왔는지 먼저 배 안에서 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비는 오랜 만에 공명을 만나보게 돼 몹시 기뻤다. 그간에 밀린 얘기를 시작하 려는데 공명이 먼저 물었다.
“주공께서는 오늘 얼마나 위태로운 곳을 왔다가 가게 되셨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소. 그게 무슨 말이오?”
생각보다는 별다른 일 없이 떠나게 되어 마음이 느긋해져 있던 유비가 놀라 물었다.
“만약 운장이 없었더라면 주공께서는 오늘 틀림없이 주유에게 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도 마음속에 짚이는 게 있었다. 운장의 눈짓도 그런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데서 온 것임에 분명하였다.
“주유가 이미 나를 해칠 마음을 품었다면 선생이라고 가만히 둘 리 있겠소? 차라리 우리와 함께 돌아가 번구로 가시지요.”
유비가 공명이 걱정되어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공명은 무겁게 고 개를 가로저었다.
“양은 비록 범의 아가리 속에 있으나 안전하기가 태산과 같습니 다. 다만 주공께서 이번에 돌아가시면 군마와 싸움배를 수습해두셨 다가 동짓달 스무날 갑자일에 자룡이나 이 남쪽 언덕으로 보내주십 시오. 자룡과 함께 작은 배 한 척만 보내시면 될 일이지만, 결코 이 날짜를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말투로 보아 공명에게는 이미 자신의 몸을 지킬 계책은 물론 동 오에서 빠져나갈 날짜까지도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른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 유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잊을 리야 있겠소만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선생의 뜻을 자세히 일러주시오.”
“이 자리에서 길게 얘기할 틈이 없습니다. 어쨌든 동남풍이 크게 일면 제갈량은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 유비가 거듭 그 시각을 물었으나 공명은 다만 유비가 얼른 배를 띄우기만을 재촉한 뒤 돌아가버렸다.
유비는 불안한 대로 운장과 이십여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돛을 달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기 몇 리나 되었을까. 문득 상 류에서 오륙십 척의 배가 떼지어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뱃머리에 한 장수가 창을 짚고 서 있었는데 다름 아닌 장비였다. 행여라도 유 비의 일이 잘못되어 관우 혼자로는 견뎌내지 못할까 봐 특히 도우러 달려온 길이었다.
이에 물 위에서 다시 만난 삼형제는 한층 기세를 올리며 진채로 돌아갔다.
한편 닭 쫓던 개 모양이 된 주유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심경으로 유비를 보내고 군막으로 돌아와 앉아 있었다. 노숙이 들어와 그런 주유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이미 유비를 꾀어 들여놓고도 손을 쓰지 않 으셨습니까?”
“관운장은 세상이 다 아는 호랑이 같은 장수요, 현덕이 앉으나 서 나 따라다니니 만약 손을 썼더라면 오히려 내가 저에게 해를 입었을 것이외다.”
그 말을 듣자 노숙도 적이 놀랐다.
이어 주유와 노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홀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조조가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글을 가지고 온 것 같습니다.”
“들라 이르라.”
주유가 선뜻 그렇게 말했다. 유비에게 풀지 못한 살기가 다시 양미간에 어렸다.
조조의 사자가 들어와 글을 올렸다. 봉투 위에 보니 ‘한의 대승상 조조가 주도독(周都督)에게 보내니 뜯어보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불쾌한 기분이던 주유는 그 거만한 글귀를 보자 왈칵 성이 났다.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고 글을 찢어발겨 방바닥에 집어던 졌다. 그리고 사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어서 저놈을 목 베어라!”
유비에게 못 푼 살기가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노숙이 그런 주유를 말렸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우더라도 사자로 온 사람은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고정하십시오.”
그러나 주유는 차게 내뱉었다.
“사자를 목 베 위엄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고는 끝내 사자를 목 베 그가 데리고 온 종자에게 주어 돌려 보냈다. 뿐만 아니었다. 주유는 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한당을 좌익 에, 장흠을 우익에 세운 뒤 스스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조조를 맞 을 채비에 들어갔다.
다음 날이었다. 사경에 장졸들의 밥을 지어 먹이고 오경에 배를 낸 주유는 기세 좋게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갔다.
조조는 조조대로 주유가 자신의 쓴 글을 찢고 사자까지 목 베었 단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곧 채모와 장윤 등 형주의 항장(降將)들 을 앞세우고 스스로는 후군이 되어 전선을 내었다. 스스로 후군이 된 것은 아직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삼강구에 이르자 동오의 배들이 보였다. 아득히 강을 덮고 내려오는데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앞선 뱃머리에 한 장수가 앉아서 크게 소리쳤다.
“나는 감녕이다. 누가 나와 더불어 결판을 내보겠느냐?”
이를 본 조조 쪽의 장수 채모는 아우 채훈을 내보내 감녕과 싸우게 했다.
채훈의 배가 가까워오자 감녕은 활에다 살을 먹여 쏘아대기 시작 했다. 화살이 이르는 곳마다 어김없이 조조편의 군사들이 피를 쏟 으며 나뒹굴었다. 거기서 더욱 기세를 얻은 감녕은 배를 있는 대로 몰아 앞으로 나오며 수만의 쇠뇌를 일제히 쏘아 붙였다.
조조의 군사는 그 기세를 당하지 못해 곧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오의 장수 한당과 장흠은 좌우에서 똑바로 그런 조조군 사이를 들 이쳤다. 이때 조조군은 태반이 청주병(靑州)이었다. 모두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못해 큰 강 위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배가 조금 만 흔들려도 이리저리 내달으며 싸우기는커녕 제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감녕과 장흠 한당이 이끄는 동오의 싸움배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그런 조조군의 배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거기다가 주유가 또 배를 재촉해 달려와 싸움을 도우니 조조군은 화살과 돌에 맞아 죽는 사람 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침나절에 시작된 싸움은 미시(未時, 오후 세시경)까지 계속되었 다. 주유는 싸움이 비록 자기편에게 유리했으나 워낙 조조의 군사가 대군이라 마침내는 머릿수로 당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벌어질까 두 려웠다. 때를 보아 징을 쳐 군사를 거두고 배를 돌렸다.
싸움에 지고 있던 중이어서 비록 동오의 군사들이 물러나도 조조는 쫓을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군사를 돌려 진채로 돌아온 조조는 군사를 정비하는 한편 수전을 도맡은 채모를 불렀다.
“동오의 군사가 많지 않았는데 오히려 우리가 졌으니 이는 그대 들이 마음을 다해 싸우지 않은 까닭이 아닌가?”
그렇게 묻는 조조의 말투에는 나무람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채모 가 몸둘 바를 몰라하며 대답했다.
“형주의 수군은 오래 조련을 하지 못했고, 청주와 서주에서 온 군 사는 원래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우리가 지게 된 까닭입니 다. 지금 급한 것은 먼저 수채부터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형주 군은 수채 밖을 지키고 청주와 서주에서 온 군사는 수채 안에서 매 일 조련을 시킨다면 비로소 수전에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기색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수군을 맡은 도독이다. 조련이 필요하다면 마음 내 키는 대로 시키면 될 것이지 나한테 물어보고 할 까닭이 무엇이냐? 당장이라도 수채를 열고 뜻대로 조련시키도록 하라.”
이어 채모와 장윤은 그 길로 조조군의 수군을 조련할 수채를 열 었다. 강에 이어 스물네 개의 수문을 만들고 큰 배를 밖에 세워 성곽 을 대신하게 한 다음 작은 배는 안에 두어 그 문을 통해 나다니게 했다. 동오의 배들이 갑작스레 쳐들어와도 혼란되지 않고 훈련을 받 을 수 있는 배치였다.
밤이 되어 그 모든 배에 불을 밝히니 등불은 수면으로부터 하늘 가운데까지 붉게 비쳤다. 거기다가 수채가 삼백여 리에 뻗치니 그 길이만큼 연기와 불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주유는 싸움에 이긴 군사를 데리고 진채로 돌아가 술과 밥 을 배불리 먹이고 오후에게도 사람을 보내 첫 싸움에 이긴 걸 알렸 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주유가 높은 곳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불빛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게 무슨 불빛이냐?”
주유가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 북군의 배에 매단 등불입니다.”
곁에 있던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주유는 마음속으로 적지 않이 놀랐다. 생각보다 적의 군세가 너무 큰 것같이 여겨지는 까닭이었다. 다음 날 주유는 몸소 조조군의 수채를 정탐해보기로 했다. 큰 누 선(樓船)한 채를 끌어낸 뒤 북과 징을 가득 싣고 씩씩한 장수 몇만 실었다. 모두 강한 쇠뇌와 굳센 활을 지니게 한 채였다.
조조의 수채 곁에 이른 주유는 닻을 내리게 명함과 아울러 배 위 에서 일제히 북과 징을 울리게 했다. 그리고 조조군이 어리둥절해 있는 틈을 타 가만히 수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