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2화 : 다시 다가오는 초야의 인맥
다시 다가오는 초야의 인맥
채모가 막 말 머리를 돌렸을 때였다. 조운이 거친 기세로 군사들 과 함께 성을 나와 그리로 오는 게 보였다.
원래 조운은 무장들을 위해 따로 꾸몄다는 술자리에 마지못해 끌 려갔다가 몇 잔 마시기도 전에 갑자기 성안의 인마가 움직이는 걸 보았다. 좋지 않은 느낌이 든 조운은 급히 안으로 돌아와 유비가 앉 았던 곳을 살폈다.
정말로 유비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놀란 조운은 관아를 빠져나와 역관으로 달려가보았다. 그곳
에도 유비는 없었으나 어떤 이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다.
“채모가 군사를 이끌고 누군가를 뒤쫓아 서문 쪽으로 갔습니다.”
조운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급했다.
얼른 창을 들고 말 위에 오른 뒤 신야에서 데리고 온 군사 삼백을 이끌고 서문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돼 조운은 방금 유비를 놓치고 돌아서는 채모와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주공께서는 어디 계시오?”
채모를 보자마자 조운이 거칠게 물었다. 조운의 험한 기세에 채모 는 더럭 겁이 나 시치미를 떼었다.
“사군께서 자리를 빠져나가셨단 말을 듣고 뒤쫓아 나왔으나 나도 어디 계신 줄은 모르겠소.”
하지만 조운은 조심스럽고 세밀한 사람이었다. 채모의 말을 듣고 도 못 믿겠다는 듯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깊고 험한 계곡이 앞을 가로막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다시 말을 돌려 돌아온 조운은 채모를 보고 따지듯 물었다.
“그대는 우리 주공을 잔치에 청해놓고 어찌 군사를 이끌고 쫓았소?”
“아홉 군 마흔두 고을의 관원들이 모두 이곳에 와 있으니 내가 상 장으로서 어찌 그들을 방호防護)하는 데 마음 쓰지 않을 수 있겠 소? 이 군사들은 혹 사군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어 데리고 왔을 뿐이외다.”
채모가 또다시 능청스런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래도 조운은 쉽 게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쳤다.
“믿지 못하겠소. 바로 말하시오. 그대는 우리 주공을 핍박하여 어 디로 가도록 만들었소?”
“믿어주지 않으니 실로 답답하구려. 사군께서 홀로 말을 몰아서 문으로 나가셨단 말을 듣고 이곳까지 와보았지만 나 역시 보지 못했 다고 말하지 않았소?”
채모는 여전히 뻗댔다. 조운은 그런 채모가 수상쩍었으나 증거가 없으니 함부로 몰아댈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놀라운 가운데서도 걱 정스러운 것은 유비의 행방이어서 다시 계곡 쪽으로 가보았다. 여전 히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득 건너편 언덕의 흙에 물을 흘린 듯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물에 흠뻑 젖은 인마가 지나가며 남긴 흔적 같았다.
‘그렇다고 주공께서 말을 타고 이 험한 계곡을 건넜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조운은 그 흔적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무사히 단계를 건넜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군사를 풀어 사방을 찾아보게 했다.
역시 계곡 쪽에서는 유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말을 돌린 조운은 다시 채모에게 따져보려 했으나 그 때 이미 채모는 성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이에 조운은 성문을 지 키는 군사 하나를 잡아 다그쳐보았다.
대답은 한결같이 유비가 나는 듯 말을 달려 서문을 나갔다는 것 뿐이었다.
조운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이를 밝혀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성안에 매복이라도 있으면 유비의 생사를 알기 전에 낭패부터 당할 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유비가 무사히 몸을 빼냈기를 빌며 그대로 군사를 돌려 신야로 돌아갔다.
한편 어린 듯 취한 듯한 기분으로 단계를 뛰어넘은 유비는 홀로 생각했다.
‘그토록 넓은 곳을 한 번 뛰어 건너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거기서 힘을 얻어 남장(南漳)을 바라고 말을 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래잖아 해가 서산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한층 급하게 말을 몰아가는데 문득 저만치서 한 목동 이 소를 타고 오는 게 보였다. 입으로 피리를 불고 있는 그 모습이 몹시도 평온하고 한가롭게 비쳤다.
“내 신세가 실로 너만 못하구나!”
유비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탄식을 내뱉으며 말을 세우고 부러운 듯 그 목동을 바라보았다. 소년 또한 무엇 때문인지 소를 세우고 피 리 불기를 그친 뒤 유비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장군께서는 혹시 황건적을 깨뜨리는 데 공이 컸던 유현덕 그분이 아니신지요?”
이윽고 소년이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비가 놀라 되물었다.
“너는 한낱 궁벽한 시골 아이로서 어떻게 내 이름을 알게 되었 느냐?”
“스승님을 모시다 보니 몇 마디 들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일찍이 스승님께서 손님이 오시면 자주 말씀하시기를 유현덕은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요, 손이 길어 무릎을 지나며, 눈은 스스로의 귀를 볼 수 있을 만큼 길게 찢어졌는데 당세의 으뜸가는 영웅이라고 하셨습니 다. 이제 장군을 보니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없으리라 여겼을 뿐입니다.”
소년은 조금도 꾸미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는 그 같은 산골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가워 다시 물었다. “네 스승님은 어떤 사람이냐?”
“저희 스승님은 성이 사마(司馬)씨요 함자는 휘(徽)이며 자는 덕 조(德操)로 쓰십니다. 영천(潁川) 분이신데 도호(道號)는 수경선생(水 鏡先生)이라고 하시지요.”
유비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이에 다시 물었다.
“주로 어떤 이들과 벗하시느냐?”
“양양의 방덕공龐德公)과 방통(龐統)같은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역시 알 듯 말 듯한 이름들이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또
물었다.
“방덕공과 방통은 어떤 분들이시냐?”
“두 분은 숙질간이십니다. 방덕공은 자를 산민(民)이라 쓰시는 데 저희 스승님보다 열 살 위이시고 방통이란 분은 자를 사원(元) 이라 하시는데 저희 스승님보다 다섯 살 아래가 되십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지요. 스승님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뽕잎을 따시는 데 방통이란 분이 마침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무 아래 앉아 나 무 위의 스승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데 하루 종일 말씀을 나누어도 두 분 모두 싫증나 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스승님은 방통이란 분 을 매우 사랑하셔서 언제나 아우라고 부르십니다.”
제자로 보아 그 스승이 예사 아님을 알겠고, 또 그 스승이 아끼는 걸로 보아 방통이란 사람도 대단한 줄은 알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유비에게는 아무래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었다. 숨어 지내는 현사(賢士)들인 듯했다. 그 바람에 유비는 자신의 고단한 처지도 잊고 목동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지금 너희 스승은 어디 계시냐?”
“앞에 보이는 저 숲속에 스승님의 장원이 있습니다.”
소년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제서야 유비는 자신을 밝히며 청했다.
“나는 네 말대로 유현덕이다. 너희 스승님을 뵙고 싶은데 길을 좀 인도해주지 않겠느냐?”
소년은 그 청에 두말 않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두 마장쯤 가 자 과연 숲속에서 한 장원이 나타났다. 유비는 장원 앞에서 말을 내 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지나는데 문득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유비는 소년에게 거문고 소리가 그치거든 자신이 온 것을 알리도록 시켰으나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 없었다. 갑자기 거문고 소 리가 뚝 그치더니 한 사람이 웃으며 나왔다.
“거문고 소리가 맑고 그윽해지며 그중에 문득 높고 굳센 가락이 이 니 반드시 영웅이 엿듣고 있는 것 같구나 밖에 어느 분이 오셨느냐?”
소년이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유비에게 알려주었다.
“이분이 저희 스승님인 수경선생이십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고 살피니 소나무같이 정정하면서도 학처럼 귀 한 풍모의 노인이었다. 유비는 그 범상치 않은 풍모에 끌리듯 앞으 로 나아가 절을 했다. 그때까지도 유비의 옷은 아직 젖은 채였다. 그 걸 보고 짐작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안목에 의해선지 수경선생이 탄식처럼 말했다.
“공께서는 오늘 용케도 큰 위태로움을 피하셨구려.”
유비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소년이 이번에는 제 스승을 보고 유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유현덕 그분이십니다.”
그러자 수경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유비를 초당으로 맞 아들였다. 주인과 손님이 자리를 정하여 앉은 뒤에 유비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렁에는 책이 가득하고 창밖에는 풍류로 기른 소나무와 대나무 가 어우러졌는데, 방 안의 석상 위에는 방금 켜다 놓은 것인 듯 거문 고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모두가 맑은 기운이 서린 듯한 정경이 었다.
“명공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시게 되었소이까?”
한참 뒤에 수경선생이 물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자신의 곤궁을 보이고 싶지 않아 유비가 둘러대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저 아이를 만나 선생께서 이곳에 계심 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존안을 뵙게 되니 실로 큰 행운이 라 여겨집니다.”
그러자 수경선생이 다시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공께서는 제게 숨기실 필요가 없소이다. 공은 틀림없이 어려움을 피하다 이리로 쫓겨오게 되었을 것이오.”
그렇게 꿰뚫어보는 데는 유비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양양에서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나는 이미 명공의 기색을 보고 그런 일이 있었는 줄 알았소이다.”
다 듣고 난 수경선생이 유비의 부끄러움을 덜어주려는 듯 부드러 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유비는 기색으로 뒤에 감춰진 일을 꿰뚫어보는 수경선생의 안목 에 다시 감탄했다. 그런 유비를 살피던 수경선생이 불쑥 물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명공의 크신 이름을 들어왔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도록 놀랍고 어려운 일만 겪고 계시오?”
“제 명줄에 막힘이 많아 이 모양 이 꼴인 모양입니다.”
유비가 탄식 섞어 대답했다. 수경선생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이다. 장군 곁에는 너무도 사람이 없소. 모든 것은 사 람을 얻지 못해 그리된 것이외다.”
“저는 비록 재주 없으나 제 곁에 사람이 없지는 아니합니다. 글하 는 이로는 손건, 미축 등이 있고 싸움을 아는 이로는 관우, 장비, 조 운 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충성을 다해 서로 돕는데 저는 오히 려 그들의 힘에 의지하는 바 큽니다.”
유비는 수경선생의 말을 부인하듯 대답했다. 수경선생은 더욱 무 겁게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관우와 장비, 조운은 홀로 만 명을 상대할 장수들입니다. 그러나 미축이나 손건의 무리는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으니, 천하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릴 재주는 못 됩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수경선생의 말을 알아들었다. 실은 그 자신도 그 무렵 들어 쓸 만한 모사가 없음을 아프게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이미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의 기를 죽이기 싫어 입 밖에 내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언젠가 신야에서 형주의 백성을 올바르게 동원 할 수 있는 길을 일러준 그 젊은이를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떠나보 낸 일도 그 무렵 들어서는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실은 이 유비도 몸을 굽혀가며 산곡(山谷)에 숨은 어진 선비를 찾은 지 오래됩니다만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솔직히 속을 털어놓으며 간곡히 물었다. 수경선생은 나무 라듯 그 말을 받았다.
“명공께서는 공자께서 ‘열 집 정도의 작은 고을에도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한 말도 듣지 못하셨소이까? 어찌하여 사람이 없다고만 말씀하시오?”
“제가 어리석고 막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제 안목을 틔워줄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공께서는 형주, 양양의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지 못하셨소이까?”
무슨 까닭인지 수경선생이 슬쩍 말머리를 바꾸었다.
“어떤 노랩니까?”
팔년 구년에 기울기 시작하고 八九年間始欲衰
십삼년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네. 至十三年無子遺
마침내 천명 돌아오는 바 있어 到頭天命有所歸
흙탕 속에 있던 용은 하늘로 치솟으리. 泥中蟠龍向天飛
“그 노래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유비 또한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노래는 아니었으나 모르는 체물었다. 수경선생은 그런 유비를 한동안 유심히 살피다가 천천히 풀이했다.
“이 노래는 건안 초년부터 돌기 시작한 것인데 첫 구절의 기울기 시작한다[]’는 것은 건안 팔년에 유표의 전처가 죽어 집안이 어지러워짐을 뜻하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無子遺]’는 것은 유표 가 죽으면 문무가 한 가지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리란 뜻이며 ‘천 명이 돌아가고天命有]’ ‘용이 하늘로 치솟는다[龍向天飛]’, 두 구절 은 모두 장군에게 해당되는 말이오.”
“이 비가 어찌 그런 말을 감당해내겠습니까.”
유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겸양했다. 그러나 수경선생은 덮 씌우듯 말했다.
“어쨌거나 지금 천하의 뛰어난 재사(才士)들이 모두 이곳에 있으 니 공은 마땅히 그들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시오. 그 일이 지금 공에 게는 가장 급하오.”
“천하의 기재(奇)란 누굽니까? 과연 어떤 사람을 그러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급히 물었다. 수경선생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복룡(伏龍), 봉추(鳳雛) 두 사람 중 하나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을 것이오.”
“복룡, 봉추는 누구입니까?”
귀가 번쩍 뜨인 유비가 거듭 물었다. 그러나 왠지 수경선생은 손바닥을 쓸며 답해주지 않았다.
“좋지, 좋아!”
한참을 그런 소리와 함께 크게 웃다가 되풀이해서 묻는 유비에게 대답을 다음 날로 미루었다.
“밤이 이미 깊었으니 장군께서는 먼저 잠자리에 드시는 게 좋겠 소이다. 내일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그러고는 소년을 불러 시켰다.
“장군의 말을 후원 외양간에 들여 매고 저녁상을 마련해 올리도 록 해라. 장군께서 주무실 테니 옆방도 치워두는 게 좋겠다.”
유비는 속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수경선생이 그렇게 나오 는데 굳이 졸라댈 수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느긋하게 잡고 다음 날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초당 옆방에 자리를 잡고 누워도 유비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경선생이 말한 복룡, 봉추가 어떤 사람일 까를 생각하면서 늦도록 몸을 뒤척이는데 옆방에서 문득 사람 소리 가 들렸다. 누군가가 수경선생을 찾아온 것 같았다.
“원직이 이 밤에 어찌하여 왔는가?”
수경선생이 상대에게 하는 소리였다. 유비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옆방의 말소리를 엿들었다. 원직이라 불린 사람이 수경선생의 물음 에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유경승(劉景)이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 워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특히 찾아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가서 그 사람을 직접 보니 모두가 헛된 이름뿐이더군요. 선을 좋아하기는 하나 그것을 능히 실천하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기는 해도 또한 없애지는 못하는 위인 같았습니다. 이에 글을 남겨 작별을 대신하고 밤 길을 달려 되돌아왔습니다.”
그 말에서는 헌걸찬 기개가 풍겼다. 수경선생이 나무라듯 받았다.
“그대는 왕업(業)을 도와 일으킬 만한 재주를 지녔으니 마땅히 사람을 가려 섬겨야 할 것이네. 그런데 어찌하여 가볍게 몸을 움직 여 유경승 따위를 찾아갔더란 말인가? 영웅호걸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네.”
뒤의 영웅호걸이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여 유비는 몹시 기 뻤다. 가만히 생각하기를, 찾아온 사람은 틀림없이 복룡이 아니면 봉추일 것이라 여겨 곧 나가보려 했으나 너무 갑작스러울 것 같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젯밤 찾아온 이는 누굽니까?”
이튿날 날이 밝기 바쁘게 유비는 수경선생을 찾아보고 물었다. 수경선생이 별다른 내색 없이 대답했다.
“내 벗이외다.”
“한번 만나볼 수 없겠습니까?”
유비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수경선생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 사람은 좋은 주인을 찾아 몸을 의탁하려 하고 있소. 벌써 다른 곳으로 가버렸소.”
그렇다면 수경선생이 간밤에 말한 눈앞의 영웅호걸은 유비 자신을 가리킨 말이 아닌 셈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유비는 실망을 감추고 수경선생에게 다시 물었다. 수경선생은 복 룡, 봉추를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좋지, 좋고말고…….”
“복룡, 봉추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혹시 어젯밤 그 사람이 그 둘중의 하나가 아닌지요?”
“좋아, 좋지…….”
무슨 까닭인지 수경선생은 끝내 유비의 물음에 뚜렷하게 답해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유비는 그에게 묻기를 단념하고 대신 청했다.
“이 비는 천하의 창생과 한실을 생각하는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이날까지 동서남북을 헤맸으나 쓸데없이 몸만 수고로울 뿐 아무것 도 이룬 바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선생께서 일러주신 대로 사람 을 얻지 못한 까닭인가 합니다. 감히 청하거니와, 선생께서 몸소 산 을 내려가셔서 저와 함께 기우는 한실을 되일으켜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제 간곡한 바람일 뿐만 아니라 천하 만백성의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경선생은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산과 들을 한가롭게 노니는 나 같은 늙은이는 세상일에 쓰기에 는 그리 마땅치 못하외다. 설령 뜻이 장군과 같다 해도 재주와 능력 이 모자라니 무슨 소용이겠소이까?”
그렇게 거절해놓고는 문득 알 듯 말 듯한 소리로 위로했다.
“하지만 오래잖아 나보다 열 배는 나은이가 와서 장군을 돕게 될 것이니 장군은 그 사람이나 한번 찾아보시지요.”
유비는 그 사람이 바로 복룡, 봉추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 으나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터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수경선생에게 매달려 보려는데 문득 집 밖에서 사람과 말이 몰려 내 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달려와 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장원 밖에 한 장수가 수백 명을 이끌고 누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비는 혹 채모가 자신을 뒤쫓아온 게 아닌가 더럭 겁이 났다. 놀라 달려 나가 보니 뜻밖에도 조운이었다.
“어젯밤 현으로 돌아가 주공을 찾았으나 끝내 뵈올 수 없기에 밤 새껏 부근을 뒤지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공께서는 급히 현으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뒤쫓는 자들이 그곳까지 덮쳐올까 두 렵습니다.”
주인을 찾아 기쁨도 잠시 조운은 말에서 내려 예를 끝내기 무섭 게 유비를 재촉했다. 옳은 말이었다. 모두가 유비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져 있을 때 채모가 형주의 군사를 몰아 신야로 덮쳐오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유비는 아쉬움을 남긴 채 수경선생과 작별하고 말에 올랐다. 복룡, 봉추를 찾는 일보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했기 때문이 었다.
조운과 함께 신야를 향해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떼의 인 마를 만났다. 바로 관우와 장비였다. 둘은 유비가 무사히 돌아오는 걸 보자 크게 기뻐했다. 유비가 그들에게 적로마를 타고 단계를 뛰 어넘은 일을 얘기하자 그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야로 돌아온 유비는 곧 여럿을 불러 모아놓고 양양에서 있었던 일의 뒤처리를 의논했다. 손건이 일어나 말했다.
“제가 알기로 이 일은 결코 유표가 시켜서 일어난 게 아닐 것입니 다. 틀림없이 채모가 꾸민 것이니 먼저 유표에게 글을 보내 이 일을 알리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유비가 생각해봐도 유표는 결코 그런 일을 꾸밀 위인이 아니었다. 유비는 손건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그에게 글을 주어 형주로 보 냈다.
신야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자 유표는 손건을 불러들이고 도리어 물었다.
“나는 현덕을 청해 양양의 잔치를 주관하라 했는데 현덕은 무슨 까닭으로 자리에서 빠져 달아났는가?”
그러자 손건은 유비에게서 받아온 글을 올림과 아울러 채모가 유 비를 죽이려고 꾸민 계책과 유비가 단계를 뛰어넘어 간신히 몸을 빼 낸 일을 낱낱이 알렸다.
손건의 말을 들은 유표는 크게 노했다. 유비에게 다소간 의심을 품은 적은 있으나 그런 얕은 꾀로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다. 유표는 그 자리에서 채모를 불러들여 매섭게 꾸짖었다.
“네 감히 나의 아우를 죽이려 하다니?”
그러고는 무사들에게 명하여 채모를 끌어내 목 베게 했다. 놀란 채부인이 달려 나와 울면서 유표에게 매달렸다.
“채모는 제 혈육입니다. 죄가 있더라도 저를 보아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래도 유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거듭 무사들을 재촉해 채모를 끌어내게 했다. 손건이 보다 못해 말렸다.
“만약 채모를 죽이게 되면 우리 황숙께서는 이곳에 편히 머무실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채모의 목숨만은 상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제서야 유표도 조금 화를 가라앉혔다. 한참을 더 꾸짖은 뒤에 채모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맏아들인 유기로 하여금 손건과 더불어 신야로 가서 유비를 찾아보고 잘못을 빌게 했다.
유기가 손건과 함께 신야에 이르자 유비는 오히려 크게 잔치를 열어 환대했다. 그러다 보니 자리의 분위기는 자연 죄를 빌고 용서 하는 딱딱함보다는 숙질간의 우의를 깊게 하는 훈훈함으로 바뀌었 다. 그 때문인지 유기는 술이 오르자마자 갑자기 주르르 눈물을 흘 렸다.
“왜 우느냐?”
유비가 술잔을 들다 말고 놀라 물었다. 유기는 흐르는 눈물을 씻 으려고도 않고 처량하게 말했다.
“계모 채씨는 언제나 저를 해칠 마음을 품고 있으나 이 조카는 그 화를 면할 계책이 없습니다. 그걸 생각하니 처량하고 답답해 자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숙부께서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지만 남의 집안일이라 유비는 선뜻 일러줄 계책이 떠오르지 않 았다. 다만 바른 길을 권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삼가고 효성을 다하여 계모를 섬겨라. 그렇게 되면 절로 화를 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기는 곧 눈물을 거두었으나 이튿날 형주로 돌아가려 하니 또 막막하고 두려운 모양이었다. 성곽 밖까지 배웅하는 유비에게 다시 눈물을 보였다. 유비는 그런 유기의 기분을 돌려보려는 듯 자신이 탄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지만 나는 이 말이 아 니었더라면 지금쯤 죽어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네.”
“그것은 이 말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숙부님의 큰 복이었다 할 수 있겠지요.”
유기가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막막하고 처량한 기분은 가라앉지 않는지 헤어질 때까지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유기를 형주로 돌려보낸 뒤 유비 또한 그리 밝지 못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유비가 막 성안으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저잣거리 쪽에서 갈건에 베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길게 노래를 부르며 오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天地反覆兮
불은 꺼지려 하네. 火欲鉞殂
큰 집 무너지려 함이여 大廈將崩兮
한 기둥으로는 버티기 어려워라.
一木難扶
불은 오행으로 한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 그 노래는 틀림없이 천 하가 어지럽고 한나라가 망하려 함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유비는 방금 작별한 유기의 일도 잊고 뒤를 잇는 그 노랫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산속에 현명한 이 있어 山谷有賢兮
밝은 주인 찾아가려 하네. 欲投明主
밝은 주인 그를 얻으려 한다면서 明主求賢兮
오히려 나를 몰라보는구나. 却不知吾
거기까지 다 듣고 난 유비는 문득 그 사내가 범상치 않은 인물로
느껴졌다.
‘이 사람이 혹시 수경선생이 말한 복룡, 봉추 가운데 한 사람이 아
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유비는 곧 말에서 내려 그에게 예를 표하고 현
청으로 끌어들였다.
“선생은 누구십니까?”
마지못해 끌려온 그 사내와 자리를 정하고 마주앉기 바쁘게 유비 가 물었다. 그제서야 사내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저는 영상(上)이 고향으로 이름은 선복(單福)이라 합니다. 오래 전부터 사군(君)께서 어진 선비를 구하신단 말을 듣고 찾아뵈려 했으나 마땅한 길을 얻지 못해 애태우다가 이제 이렇게 저잣거리에 서 노래를 불러 사군의 이목을 끌게 된 것입니다.”
그 같은 선복의 말을 듣자 유비는 몹시 기뻤다. 그를 귀한 손으로 모시게 하고 대접을 극진히 하도록 했다.
선복도 그 같은 후대에 보답하려는 듯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군께서 타셨던 말을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적로마가 벌써 선복의 눈에 달리 비친 모양이었다. 서로 마음을 터놓자마자 선복은 유비에게 그렇게 청해왔다. 유비는 아무 말 없이 말을 끌어오게 했다.
“이 말은 적로마가 아닙니까? 비록 천리마이긴 하나 도리어 주인 을 해치게 되는 말이니 타셔서는 아니 됩니다.”
선복이 그렇게 적로마를 알아보았다. 유비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미 겪어보았소.”
그리고 유비는 오히려 그 적로마가 단계에서 자신을 구해준 일 을 들려주었다. 선복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일은 주인을 구한 것이지 해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에는 한 주인을 해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물론 그 같은 일을 면하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방법이 무엇이오?”
액땜을 하는 길이 있다는 말에 유비가 무심코 물었다. 선복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명공께서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자에게 이 말을 주십시오. 그랬다 가 이 말이 그 주인을 해친 뒤에 타신다면 명공께는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자 적이 실망스러웠다. 남을 해치는 방법이 너 무도 간교하고 비정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복이 자신의 사람됨을 그 일로 떠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이 내게로 와서 처음 가르치는 일이 정도(正道)가 못 되니 이 어쩐 일이오? 나에게 이롭게 하려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하게 하려 드 니 이 비로서는 차마 그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구려.”
유비는 짐짓 낯색을 바꾸며 꾸짖듯 말했다. 그제서야 선복이 웃으 며 속을 털어놓았다.
“사군께서 너그럽고 덕스럽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얼른 믿을 수가 없어 그런 말로 한번 시험해본 것뿐입니다. 아무쪼록 노여워하지 않 으시기를 빕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홀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그 같은 대답이 지혜에서 나왔다면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 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덕성에서 나왔다면 당신은 더욱 무서운 사람이다.’
한편 유비는 선복이 그렇게 원래의 속마음을 밝히자 이내 부드러 운 얼굴로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며 겸손하게 말했다.
“이 비가 어찌 너그러움과 덕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선생의 가르치심에 의지할 뿐입니다.”
이에 선복은 한층 감동되어 유비를 기렸다.
“제가 영상에서 이리로 오는 길에 신야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들은 게 있습니다.”
신야 고을 원님은 新野牧
다름 아닌 유황숙 劉皇叔
이리로 오신 뒤론 自到此
우리 모두 풍족해 民豐足
대강 그러했는데, 그 노래만으로도 사군의 덕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고 있음을 알 만했습니다.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복이 유비의 사람됨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도 있었다. 만난 지 한나절밖에 되지 않지만 유비 또한 선복의 인품과 재주에 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로 선 복을 군사(軍師)로 삼고 모든 인마를 조련케 했다. 유비의 군사들로 보면 처음으로 머리다운 머리를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유비가 이끄는 집단의 성격은 독립된 세력이라기 보다는 떠돌이 건달패거리]에 가까웠다. 그들은 토지 나 제도에 집착하기보다는 인적 결속과 협객 사회의 의리를 무겁게 여겨왔으며, 합리적인 규율이나 체계보다는 자연 발생적인 동지애 에 의지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들 구성원 상호 간의 오랜 세월에 걸 친친분이나 의리와는 무관하게 오직 지식과 재능만으로 편입된 선 복이란 인물에 의해 합리와 능률을 위주로 하는 규율과 체계가 마련 되게 되었다.
한편 그때 형주에 가까운 번성에는 조인과 이전이 원가(家)에 속해 있다 항복한 장수인 여광, 여상 형제와 더불어 삼만 대군을 이 끌고 와 있었다. 자신은 비록 허도에 머물러 있어도 형주를 아우르 려는 마음은 버리지 않고 있던 조조가 먼저 그들을 보내 형주의 허 실을 살피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항복한 장수가 대개 그렇듯이 여광과 여상 형제도 공명심에 조급해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연신 졸개들을 풀어 형주 일대를 살피는 데 열을 올리더니 어느 날 조인을 찾아와 말했다.
“지금 유비는 신야에 머무르고 있는데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 이며 마초와 군량을 마련하는 데 온갖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 뜻이 결코 작은 데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일찍 도모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희 형제는 승상께 항복한 뒤로 아직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한 바 이번에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에게 날랜 병사 오천만 내리신다 면 반드시 유비의 머리를 얻어 승상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날 한때 세상을 주름 잡은 숱한 영웅들이 한번씩은 대개 노 렸으나 아직껏 얻지 못한 게 유비의 머리건만 여광과 여상은 그걸 무슨 따기 쉬운 호박덩이처럼 여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턱없는 공명심에 들떠 그리 나 서는 데 한술 더 뜨는 것은 조인이었다. 조조의 사촌 아우로서 수십 년 전장을 누빈 범 같은 장수였건만 유비를 보는 눈은 그리 밝지 못 했다. 금세 유비의 목이 굴러들어올 듯 기뻐하며 덜컥 승낙을 했다.
“좋다. 뜻대로 하라.”
그리고 날랜 군사 오천 명을 갈라 주니 더욱 힘이 솟은 여광과 여 상은 그날로 군사를 내어 신야로 밀고 갔다.
그 소식은 나는 듯 신야의 유비에게 전해졌다. 그동안 힘써 기른 다고 길렀으나 신야가 워낙 크지 못한 곳이라 유비에게 큰 힘이 있 을 리 없었다. 더구나 들리는 건 아직 소문뿐이어서 얼마만 한 대군 이 오는지도 모르고 보니 유비의 걱정은 컸다. 곧 선복을 불러놓고 조조의 군사를 막을 의논을 시작했다.
선복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그 자리에서 계책을 올렸다.
“이왕에 적이 온다면 우리 땅 안으로 들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도중에서 막되 관공(公)으로 하여금 일군을 이끌고 왼편에서 나와 적의 가운데 길을 치게 하고 장비는 오른편에서 나와 적의 뒷길을 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명공께서는 조운과 더불어 몸소 군사를 이끄 시고 적의 앞길을 막는다면 넉넉히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두말없이 그에 따랐다. 어떻게 보면 싸움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선복이 짜낸 계책이라 못 미더울 만도 했지만 한번 맡긴 이상 끝까지 믿어주는 게 또한 유비의 남다른 강점이기도 했다.
관우와 장비를 불러 앞서가게 한 뒤 유비도 곧 선복과 조운을 데 리고 군사들과 함께 관을 나왔다.
불과 몇 리 가기도 전에 산 뒤에서 크게 먼지가 일며 여광과 여상 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유비가 진세를 벌이고 기다 리자 여광도, 여상도 비스듬히 진세를 벌이며 밀고 왔다.
“누가 왔느냐? 어떤 자가 감히 내 땅을 범하려 드느냐?”
유비가 문기 아래로 말을 타고 나와 크게 소리쳤다. 여광이 맞서 나오며 겁없이 대꾸했다.
“나는 대장 여광이다. 승상의 명을 받들어 너를 사로잡으러 왔다!”
그 버릇없는 소리에 유비는 크게 노했다. 조운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자룡은 얼른 나가 저놈의 목을 가져오너라!”
조운은 그 같은 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여광도 지지 않고 맞서나오니 곧 양군 사이에서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하지만 싸움은 시작 때의 기세만큼 오래가지는 못했다. 겨우 몇 번창칼이 부딪기도 전에 여광은 조운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 러떨어졌다.
유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를 몰아 나아갔다. 승세를 탄 군 사라 여상이 당해낼 리 없었다. 형의 시체조차 수습 못하고 군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여상이 졸개들과 함께 정신없이 쫓기는데 한군데 길가에서 불쑥 막아서는 한 떼의 군 사들이 있었다.
“이놈,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우레 같은 호통 소리와 함께 앞서 길을 막는 장수를 보니 다름 아 닌 관운장이었다. 그러잖아도 한판 싸움에 크게 져서 쫓기는 여상이 라 그런 관운장과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길을 앗아 달아나기 바쁘니 그사이 그의 군사는 다시 태반 이 꺾이고 말았다.
그래도 한목숨 구한 것이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여상은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갈 팔자는 못 되었다. 십 리도 가기 전에 다시 한 떼의 군마가 여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익덕이 여기 있다. 적장은 머리를 남겨놓고 가라!”
앞선 장수가 놋그릇 깨지는 소리를 내더니 똑바로 여상에게 덮쳐 갔다. 여상은 달아나기는커녕 손발조차 제대로 움직여보지 못하고 장비의 한 창에 찔려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조인에게 큰소리 치고 나설 때에 비해 너무도 한심한 최후였다.
자기편의 두 장수가 차례로 죽는 걸 보자 조조의 군사들은 얼이 빠졌다. 이제는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하고 한목숨 구해 달아나기 바빴다. 뒤따라온 유비는 장비, 관우의 군사들과 함께 그런 조조의 군사들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한 싸움으로 적을 크게 두들겨 부순 유비는 이긴 장졸들을 이끌 고 신야로 개선해 돌아갔다. 전에도 싸워 이긴 적은 여러 번 있었으 나 이번의 승리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장수들의 개별적인 용맹이나 군사들의 단결심에 의지한 즉흥적인 싸움이 아니라 처음으로 모사의 일관된 계책에 따라 진행된 싸움으 로 얻은 승리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