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6화 : 높이 이는 장강의 물결
높이 이는 장강의 물결
이때 강동에 자리 잡고 있던 손권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물려받 은 기업을 착실하게 키워가고 있었다. 널리 어진 선비를 받아들이는 데, 오회(吳) 땅에 손님을 맞아들이는 큰 집을 지어 고웅과 장굉으 로 하여금 사방에서 모여드는 인재를 받아들이게 함과 아울러 숨은 인물들을 서로 추천케 했다.
회계 땅의 감택, 팽성의 엄준(嚴畯), 패현의 설종薛), 여남의 정 병(秉), 오군의 주환(桓)과 육적(陸績), 오의 장온(張溫), 회계의 능통(凌), 오정(烏程)의 오찬(吳粲)같은 수많은 인재들이 손권 밑 으로 모여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손권은 그들을 모두 하나같이 두터운 예로 받아들여 공경했다. 그 밖에 또 손권은 좋은 장수까지 여럿 얻게 되었는데 여양 땅에서 온여몽(呂), 오군의 육손(陸), 낭야의 서성(盛), 동군의 반장(璋), 여강의 정봉(丁奉) 같은 빼어난 무장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렇게 모인 문무의 인재들이 한가지로 손권을 도와 힘을 아끼지 않으니 강동의 성세는 드높아졌다. 손견, 손책의 시절과는 이제 비 교도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 같은 강동의 번성이 조조에게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일찍이 건안 칠년 조조는 원소를 깨뜨린 기세에 힘입어 손권에게 사 신을 보내고 그 아들을 조정으로 들여보내 천자의 수레를 따르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마다하면 금세 군사를 동오로 몰고 올 듯한 엄 포와 함께였다.
사신을 통해 조조의 명을 전해 들은 손권은 얼른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들어주자니 그날로 자신의 아들은 인질이 되어 자신까지 조 조에게 매인 몸이 될 것이고, 거절하자니 그토록 강성하던 원소를 꺾은 여세를 몰아 조조가 강동으로 쳐들어올 게 두려웠다.
손권이 이래저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조조가 사자 를 보내 인질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은 손권의 어머니 오태부인(吳 太夫人)의 귀에 들어갔다. 오태부인은 주유와 장소를 불러들여 의견 을 물었다. 장소가 대답했다.
“조조가 우리에게 자식을 조정에 들여보내라고 하는 것은 예로부 터 제후들을 견제하는 법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주군께서 아 드님을 보내지 않는다면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강동으로 내려올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동은 실로 위태로워진다 아니할 수 없습 니다.”
문신이라 그런지 장소의 의견은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무 장인 주유는 달랐다. 장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무라듯 받았다.
“우리 주군께서는 부형의 기업을 물려받아 여섯 군의 백성을 거 느린 데다 군사는 많고 양식은 넉넉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사람을 보내 볼모로 잡히게 한단 말입니까? 한번 인질을 보낸다면 조씨와 화친하지 않을 수 없고, 저쪽에서 명을 내려 부르면 이쪽에서 아니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바로 다른 사람의 억누름과 부 림을 받게 되는 길입니다. 결코 인질을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인질 을 보내지 말고 천천히 저쪽의 변화를 보다가 따로 좋은 계책을 세 워 막는 게 낫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조조와 한바탕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연함 이 엿보이는 의견이었다. 듣고 있던 오태부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공근의 말이 옳다. 결코 인질을 들여보내서는 안 되리라.”
그러고는 곧 손권을 불러 자신의 뜻을 전했다. 맹장 손견의 아내 요, 강동의 소패왕(小王)이라 불리는 손책의 어머니다운 간섭이었 다. 그때껏 뜻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손권도 어머니가 그렇게 권하 자흔연히 따랐다.
조조가 보낸 사자를 겉으로는 융숭히 대접했으나 끝내 아들을 조 정에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그 일로 손권의 결의를 짐작한 조조는 그때부터 강남으로 내려갈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북방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때라 남쪽으로 군사를 낼 틈이 없었다. 원소는 깨뜨렸다 해도 그 아들들이 오랜 기반에 의지해 만만찮게 재기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조조가 군사를 몰고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손권도 조조의 속 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조조가 내려오기 전에 강동의 기반을 더욱 든든히 해둔다는 뜻으로 형주 강하를 지키 는 황조(黃祖)를 토벌하러 나섰다. 건안 팔년 십일월의 일이었다. 손권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대강에서 황조와 싸웠다. 황조는 잇 달아 싸움에 졌으나 곧 손권에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
손권의 부장 중에 능조(操)란 이가 있었다. 손권이 잇달아 싸움 에 이기자 기세가 오른 능조는 가벼운 배로 앞장서서 황조의 군사들 이 지키는 하구로 쳐들어갔다. 이때 하구를 지키던 황조의 장수는 감녕(寧)이란 부장이었는데 능조를 한 화살로 쏘아 죽여버렸다. 장수를 잃은 손권의 군사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능조의 아들 능통이 열여덟의 나이로 아비 곁에 있다가 힘을 다해 싸워 아비의 시체를 빼앗아 돌아왔다.
하지만 손권의 군사는 그 일로 예봉이 꺾인 셈이었다. 거기다가 바람의 방향까지 이롭지 못해 손권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동오로 되돌렸다.
그런데 동오에 돌아와서도 또다시 손권에게 좋지 못한 일이 터졌 다. 다름 아닌 아우 손익)의 일이었다. 손익은 그때 단양의 태 수로 나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모질고 술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술에 취하면 자주 사졸들에게 매질을 해 적잖이 미움을 사고 있었다.
태수 손익이 사졸들로부터 미움받고 있는 걸 본 독장(督將) 규람과 군승(郡) 대원은 슬그머니 마음이 생겼다. 손익을 죽이고 자 기들이 단양을 차지하고 싶어진 것이었다. 이에 규람과 대원은 손익 곁에서 일하는 변홍까지 끌어들여 손익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때마침 고을의 여러 장수와 현령들이 모두 단양으로 모일 일이 있었다. 손익은 크게 잔치를 열고 그들을 대접하려 했다. 태수로서 아랫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질탕히 술이나 즐기려는 속셈 이었다.
그와 같은 손익의 사람됨에 비해 그 아내 서씨는 아름답고도 슬 기로웠다. 거기다가 또 점을 매우 잘 쳤는데 그날도 남편을 위해 점 괘를 빼보니 몹시 불길했다. 이에 서씨는 손익에게 밖에 나가 술자 리를 벌이지 않도록 권했다. 그러나 손익은 그 같은 아내의 말을 들 은 체도 않고 기어이 나가 술자리를 벌였다.
밤이 오래되어 자리가 파할 무렵이었다. 규람, 대원과 한패가 된 변홍이 미리 칼을 품고 문 밖에 나가 숨어 있다가 술이 취해 비틀거 리며 나오는 손익을 한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그러자 규람과 대원은 변홍과 남몰래 했던 약조를 저버리고 변홍 을 묶은 뒤 다음 날 태수를 죽인 죄를 물어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더니, 실로 교활하면서도 비열한 위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규람과 대원은 거기서 한술 더 떠 손익의 재산과 시 첩까지 모두 차지했다.
변홍 혼자 손익을 죽였다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두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중에서도 규람은 손익의 아내 서씨의 아름다움이 탐나 한층 뻔뻔스런 수작을 벌였다.
“나는 그대 남편의 원수를 갚아주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나를 따 라야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일이 돌아가는 것으 로 내막을 대강 어림잡고 있던 서씨는 그 말에 기가 막혔다. 도적이 남편을 흉계로 죽여놓고 이제는 자기까지 욕보이려 들고 있지 아니 한가. 그러나 슬기로운 그녀는 낯색이 변해 규람을 꾸짖는 대신 은 근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지아비를 잃은 지 오래되지 않아 급히 장군을 따를 수가 없습니 다. 삭망이 되기를 기다려 제사를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 장군을 가까이 모셔도 늦지 않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규람이 생각해보니 그럴싸한 말이었다. 거기다가 서씨의 아름다 움에 이미 반이나 얼이 빠져 있던 그라 두말 않고 서씨의 말을 따 랐다.
한편 거짓말로 급한 자리를 면한 서씨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죽 은 남편의 심복인 손고(高)와 부영(傅嬰)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 람이 영문도 모르고 불려오자 서씨는 울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남편께서 살아 계실 때 항상 두 분께서 충성스럽고 의 롭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제 규람과 대원 두 도적이 우리 남 편을 모살(殺)하고 그 죄는 변홍에 덮어씌운 뒤 우리 집의 재산과 노복을 모두 나누어 가지려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디 그뿐이겠습 니까?”
그러면서 손고와 부영을 바라보는 서씨의 눈길에는 푸른 불길이 이는 듯했다.
대강 짐작은 했으나 증거가 없어 일이 돼가는 꼴만 살피고 있던 손고와 부영도 그 말을 듣자 긴장한 얼굴로 서씨를 쳐다보았다. 서 씨는 그런 둘에게 매달리듯 얘기를 계속했다.
“규람 그놈은 또 이 몸까지 차지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첩은 거 짓으로 허락하는 체하며 그놈을 안심시켜 놓았습니다만 첩이 욕을 면하고 선부(先)의 원수를 갚느냐 못 갚느냐는 오직 두 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두 분께서는 오늘밤으로 사람을 뽑아 시아주버님 되는 오후(吳侯)께 두 도적의 일을 알리시는 한편 가만히 계책을 꾸며 두 도적을 죽이도록 하십시오. 이 욕과 한을 씻어주신다면 그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문득 몸을 일으켜 손고와 부영에게 두 번 절을 했다. 두 사람도 함께 울며 맹세하듯 말했다.
“우리들은 평소 돌아가신 태수님의 은의를 두텁게 입었으면서도 오늘까지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그분의 원수를 갚아드리기 위해 서였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이렇게 부인께서 명하시는데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그날 밤으로 믿는 사람을 뽑아 손권에게로 보내는 한편 규람과 대원을 죽일 계책까지 마련했다.
며칠 안 돼 삭망이 되었다. 서씨는 미리 짠 대로 손고와 부영을 불 러 밀실 휘장 뒤에 숨긴 후 남편의 빈소 앞에 제물을 차렸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기 바쁘게 상복을 벗어 던지고는 곧 단장하기 시작했다. 데운 물로 깨끗이 씻은 몸에 고운 옷을 골라 입었는데 얼굴에는 제법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서씨 부근에 숨겨둔 제 사람으로부터 그 같은 소문을 들은 규람 도 몹시 기뻤다. 오늘 밤에는 드디어 아리따운 서씨를 품어보는구나 싶어 황홀하게 기다리는데 오래잖아 서씨에게서 사람이 왔다.
“장군께서 안으로 드시랍니다.”
그 말을 들은 규람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한달음에 달려갔다. 서씨는 이미 술상을 보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곱게 단장한 서씨 에게 넋을 잃은 규람은 서씨가 내미는 대로 넙죽넙죽 술을 받아 마 셨다. 제아무리 장사라 해도 마신 술이 어디 갈까, 규람은 곧 취해 버렸다.
“이제는 밀실로 드시지요.”
서씨는 이미 취한 규람에게 한층 고혹적으로 속살거렸다. 취한 중 에도 규람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비척비척 밀실로 따라 들어갔다.
“손, 부두 장군은 어디 계시오?”
갑자기 서씨가 휘장 쪽을 보며 소리쳤다. 손고와 부영이 휘장 뒤 에서 칼을 빼들고 기다리듯 달려 나왔다. 놀란 규람이 어찌 막아보 려 했으나 손발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두 사람의 칼에 찔려 나동그라졌다. 손고와 부영은 다시 한칼질을 더해 규람의 숨통을 온 전히 끊어버린 뒤에야 칼을 거두었다.
서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원까지 불러들여 죽여버렸다. 함께 손익을 죽인 규람의 부름이라는 말에 의심 없이 왔던 대원 또한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손고와 부영의 칼에 목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서씨는 규람과 대원의 가솔들이며 그들을 따르던 졸개들까지 모조리 죽인 뒤에야 다시 상복을 입고 죽은 남편의 영전에 제사지냈다. 제물은 다름 아닌 규람과 대원의 목이었다. 실로 매서 운 여자였다.
규람과 대원이 손익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이 스스로 군사 를 이끌고 단양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손권 은 손고와 부영의 공을 높이 여겨 아문장(門將)으로 삼은 뒤 단양 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서씨와 아우의 가솔들을 거두어 강동으로 돌 아갔다.
손익이 죽은 일 뒤로 강동은 한동안 조용했다. 손권은 그동안 각 처의 산적들을 뿌리 뽑아 백성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한편 대강에 있는 전선(戰船)칠천여 척을 모두 모아 수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주 유를 대도독(大都督)으로 세워 강동의 수륙) 군마를 모두 거느 리게 했다.
그럭저럭 세월이 가 어느새 건안 십이년이 되었다. 그해 십이월이 되자 전부터 시름시름하던 오태부인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손견의 정실이요 손책과 손권 형제의 친어머니인 만큼 여느 아낙과 는 달라 오태부인은 자신이 다시 일어나기 어려움을 깨닫자 주유와 장소를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원래 오(吳)나라 땅 사람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우 오 경(吳璟)과 더불어 월나라 땅으로 옮겨 살았다. 뒤에 손씨에게 시집 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바로 책(策)이고 둘째가 권(權)이다.
책을 낳을 때는 달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었고 권을 낳을 때는 해 를 품었는 바,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달과 해를 품는 꿈을 꾸면 반드 시 그 자식이 귀하게 되리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책은 일찍 죽고 이제 강동의 기업은 권에게 맡겨졌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마음을 합 쳐 권을 돕도록 하라. 나는 죽어서도 그대들의 은공을 길이 잊지 않 으리라.”
그런 다음 다시 손권을 불러 당부했다.
“너는 자포布, 장소)와 공근(公瑾, 주유)을 스승 섬기는 예로 하 되 결코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또 내 동생은 나와 함께 네 아버지에게로 시집 왔으니 너에게는 바로 어머니가 된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동생을 이어미 섬겼듯 하라. 그리고 그 소생인 네 어린 누이 또한 은혜로 기르고 뒷날 나이가 차거든 좋은 사윗감 을 골라 짝지어주도록 하라.”
오태부인은 그렇게 일일이 죽은 뒤의 일을 당부한 뒤 곧 숨을 거 두었다. 이에 손권은 슬피 울고 정성을 다해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그럭저럭 겨울이 가고 이듬해 봄이 왔다. 어느 정도 안의 일을 수 습한 손권은 다시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조를 칠 일을 의논했다. 여 느 때처럼 매사에 온건한 장소가 나서서 말렸다.
“아직 상을 다 치르기도 전에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나라 무왕(武王)의 옛일이라도 떠올린 것이리라. 주유가 당치 않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원수를 갚고 한을 씻는 데 달리 무슨 때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강온(强穩)이 정면으로 부딪치니 손권은 얼른 뜻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때 북평의 도위로 있던 여몽이 들어와 손권에게 알렸다.
“제가 용추의 수구(水口)를 지키고 있는데 황조의 부장 감녕이 항 복해 왔습니다. 제가 자세히 물으니 감녕은 자를 흥패(興覇)라 하며 파군 임강 땅 사람이었는데, 서사(書史)에 두루 통달했으며 기력도 대단했습니다. 일찍이 협행으로 노닐기를 좋아하다가 쫓기는 무리 를 모아 대강을 휘젓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감녕은 허리에 구리 로 된 방울을 차고 다녔는 바, 사람들은 그 방울 소리만 들어도 모두 몸을 피할 정도였습니다. 또 항상 서천에서 나는 좋은 비단으로 돛 을 만들어 달고 다니니 사람들은 그의 패거리를 ‘금범적(錦帆賊)’이 라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뒤에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을 고쳐 좋은 일을 하고자 무리 를 이끌고 유표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유표가 큰일을 할 만한 인물 이 못됨을 알고 다시 동오로 오려고 하다가 우연히 황조를 만나 하 구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황조의 사람이 되어 우리와 창칼을 맞댔다가 지 금에 와서야 오려는 까닭은 무엇이오?”
한편으로는 감녕이란 인물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아직 의심스런 데가 있는지 손권이 물었다. 여몽이 한층 열을 올려 대답했다.
“전에 우리 동오가 황조를 쳤을 때, 감녕의 힘을 입어 하구를 회 복했음에도 황조는 감녕을 매우 박하게 대접했습니다. 도독인 소비 (蘇飛)가 여러 차례 그런 황조에게 감녕을 천거했지만 그때마다 황 조는 말했습니다. ‘감녕은 원래 강물 위에서 도적질이나 하던 자이다. 어찌 무겁게 쓸 수 있겠는가? 이에 감녕은 황조에게 한을 품게 된 것입니다.
소비는 감녕의 그런 마음을 알고 술을 가지고 감녕의 집을 찾아 와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그대를 천거했으나 우리 주공께서 는 쓰실 마음이 없는 듯하오. 해와 달은 쉬지 않고 뜨고 지니 우리 인생 길어야 얼마이겠소? 그대는 마땅히 먼 앞날을 두고 일을 꾀해 보도록 하는 게 좋겠소. 그대에게 악현의 장(長) 자리를 얻어줄 테니 그리로 가서 스스로 거취를 정해보시오.’ 그래서 소비 덕분에 감녕 은 하구를 벗어나 강동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리로 오지 않고 공에게로 가 있소?”
손권이 다시 물었다. 여몽이 얼른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감녕이 황조를 구해주기 위해 우리 장수 능조를 죽 인 일을 잊으셨습니까? 감녕은 그게 두려워 바로 주공께로 오지 못 하고 먼저 제게로 사람을 보내 물어온 것입니다. 저는 주공께서 어 진 이 찾기를 목마른 자가 물 찾듯 하시며 지난날의 원한을 오래 기 억하지 않음을 일러줌과 아울러 각기 그 주인을 위해 한 일인데 어 찌 노여워하실 리 있겠냐고 감녕을 안심시켜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감녕도 마음이 놓이는지 기꺼이 무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바라기를 주공을 찾아뵙고 한 번 더 뜻을 알아봐달라 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손권도 감녕의 투항이 진심임을 믿을 수 있었다.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홍패를 얻었으니 틀림없이 황조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몽에게 감녕을 데려오라 일렀다. 이윽고 감녕이 와 세번 절하며 예를 마치자 손권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흥패가 이렇게 와 내 마음을 크게 사로잡으니 구태여 지난날의 한을 기억하고 안하고가 무슨 뜻이 있겠소? 바라건대 흥패는 조금 도 의심치 마시고 내게 황조 깨칠 계책이나 좀 가르쳐주시오.”
손권의 그 같은 말에 감녕도 얼굴 가득 감격의 빛을 띠며 대답 했다.
“지금 한실은 날로 위태로우니 조조가 마침내 찬역할 것임에 틀 림없는 까닭입니다. 형남(南)의 땅은 조조가 반드시 차지하려 들 땅으로, 그 주인인 유표는 멀리 헤아릴 줄 모르는 데다 그 아들들 또 한 어리석고 못나 기업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할 것입니다. 명공께서 는 때를 잃지 마시고 일찍 도모하시도록 하십시오. 만일 때를 늦췄 다가는 조조가 먼저 차지하게 될 것이니 지금이 마땅히 황조를 깨뜨 리고 형남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황조는 늙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서도 재물 모으는 데만 힘을 써 심하게 그 백성을 쥐어짜니 그곳의 인심은 모두 황조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거기다가 싸울 무기 도 갖추지 못하고 군사들에게는 지킬 법령도 없으니, 만약 명공께서 가서 들이치신다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황조를 깨뜨린 뒤 에는 북을 치며 서쪽으로 나아가 초관(楚關)에 터를 잡고 파촉을 도 모하도록 하십시오. 그곳마저 손에 넣으신다면 명공께서는 가히 패 업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공명처럼 세밀한 것은 아니나 감녕 또한 천하삼분의 형세를 대강은 짐작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만 각기 섬기는 주인이 달라 하나는 명쾌한 천하삼분책으로 나오는 대신 하나는 쟁패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한 거점으로서만 서촉과 형주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로 금옥같이 귀한 말씀이오.”
손권은 그렇게 감탄하고 그날로 황조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 다. 주유를 대도독으로 세워 수륙의 군사를 모두 다스리게 하고 여 몽은 전부의 선봉에, 동습과 감녕은 부장으로 삼은 뒤 손권 스스로 십만 대군을 이끌고 나선 것이었다.
세작이 그 소문을 듣고 나는 듯 강하(江夏)로 달려가 알렸다. 황조 는 급히 무리를 모아 의논 끝에 소비를 대장으로 삼고 진(陳)와 등룡(鄧龍)을 전부의 선봉으로 앞세운 뒤 강하의 군사를 모조리 끌 고 나가 적을 맞게 했다.
진취와 등룡은 각기 일대의 큰 싸움배[驥瞳]를 이끌고 강을 내려가 면구(口)를 막으러 갔다. 배 위에는 각기 천여 벌의 강한 활과 쇠뇌를 벌려놓고 강물 가운데다 굵은 동아줄로 배들을 묶은 채 띄워 몰려오는 적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동오의 군사들이 면구에 이르렀다. 진취와 등룡의 큰 싸움 배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화살과 쇠뇌살이 한꺼번에 오군 (吳軍)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에 오군은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몇 리나 물러났다. 감녕이 가만히 동습에게 말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더 나아갈 수가 없구려. 달리 꾀를 내야겠소.”
그러고는 작은 배 백여 척을 끌어내 배마다 날랜 군사 쉰 명을 태 웠다. 스무 명은 배를 저을 군사요, 서른 명은 갑옷을 받쳐입고 칼을 든 군사였다.
“가자!”
채비가 다 되자 감녕이 앞장 선 뱃머리에서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거기 따라 백여 척의 작은 배는 개미 떼처럼 진취와 등룡의 큰 싸 움배 쪽으로 몰려갔다. 진취와 등룡은 군사들을 재촉해 전처럼 활과 쇠뇌를 퍼부었으나 소용없었다. 감녕의 작은 배들은 화살을 무릅쓰 고 똑바로 큰 싸움배 곁에 다가가 그들을 얽고 있는 동아줄을 끊어 버렸다.
동아줄이 끊긴 큰 싸움배가 각기 흩어져 기우뚱거리는 걸 보자 감녕은 몸을 날려 뱃전으로 뛰어올랐다. 마침 거기 있던 적장 등룡 이 막아보려 했으나 애초부터 될 일이 아니었다. 등룡이 감녕의 한 칼에 쪼개지니 멀리서 그걸 본 진취는 놀라 배를 갈아타고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진취도 그리 멀리 갈 팔자는 못 됐다. 진취가 배를 몰아 달 아나는 걸 본 여몽이 작은 배에 뛰어내리더니 스스로 노를 저어 진 취의 배로 다가가 불을 질러버렸다. 진취는 급히 배를 버리고 강 언 덕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여몽은 목숨을 내걸고 따라가 마침내 진취를 베어 죽여버렸다.
그 무렵에야 황조의 대장 소비가 군사를 이끌고 강 언덕에 이르 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기세가 오른 오군이 새까맣게 강 언 덕으로 기어오르니 당해내지 못하고 황조의 군사는 크게 패했다. 소 비는 낙담하고 황망해 급히 달아났다. 그러나 그 또한 등룡이나 진 취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동오의 대장 반장(潘)을 만나 몇 합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끄럽게도 사로잡히고 말았다.
소비는 곧 빠른 배에 실려 손권 앞으로 끌려갔다. 적의 대장이니 손권이 그리 곱게 볼 리 없었다. 한번 흘긋 노려보고는 곧 좌우에게 영을 내렸다.
“죄인을 싣는 수레에 가두어두어라. 황조를 사로잡는 날 함께 목베리라!”
그러고는 삼군을 재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황조가 숨어 있는 강하를 들이쳤다.
황조는 암담했다. 믿던 장수들은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히고 군사 들도 모두 꺾여 싸워볼 마음조차 일지 않았다. 어느 날 파수가 없는 걸 틈타 강하를 버리고 형주로 달아날 양으로 성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게 바로 상대방의 계략에 빠져드는 일이 되었다. 감녕은 황조가 형주로 달아날 줄 미리 짐작하고 일부러 성문을 비워둔 채 형주로 가는 길목이 되는 동문 밖에 군사들을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는 채 겨우 수십 기를 이끌고 동문을 빠져나온 황조 는 무턱대고 형주로만 달렸다. 그러나 몇 리 가기도 전에 크게 함성 이 일더니 감녕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황조가 그런 감녕을 보고 사 정하듯 말했다.
“나는 지난날 그대를 가볍게 대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핍박하시오?”
감녕이 그 말을 받아 황조를 꾸짖었다.
“지난날 내가 강하에 있을 때 쌓은 공이 적지 않았건만 너는 나를 한낱 강에서 도적질하는 수적으로만 대했다. 그래 놓고도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그 말을 듣자 황조는 감녕에게 더 빌어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감녕은 앞을 가로막는 황조의 졸개 들을 흩어버리고 똑바로 황조를 뒤쫓았다.
한참을 쫓거니 쫓기거니 하며 달리는데 홀연 감녕의 등 뒤에서 함성이 일었다. 감녕이 돌아보니 자기편인 정보(程)였다. 감녕은 정보가 자기와 공을 다투려 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다 잡은 황조를 정보에게 빼앗기기 싫어 얼른 화살을 빼내 살을 먹였다.
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황조의 등판을 꿰뚫었다. 황조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감녕은 죽은 황조의 목을 베어 정보와 군사를 합친 뒤 뒤따라온 손권에게 그 목을 바쳤다.
“그놈의 목을 나무 상자에 넣어 잘 간수해두어라. 강동으로 돌아 가 선친의 영전(靈)에 제물로 바치리라.”
그러고는 삼군에 두터운 상을 내림과 아울러 감녕을 높여 도위로 삼았다. 공을 논하고 상을 베푸는 일이 대강 끝나자 손권은 다시 새 로 뺏은 강하 지킬 일을 의논했다. 군사를 나누어 남기고, 마땅한 대 장을 세워 강하를 영구히 동오의 땅으로 삼으려 함이었다. 손권의 그 같은 뜻을 안 장소가 일어나 말렸다.
“외로운 성은 지키기 어려우니 우리에게는 바로 강하가 그러합니 다. 차라리 이대로 강동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유표는 우리 가 황조를 깨뜨린 걸 알면 반드시 그 원수 갚음을 하러 달려올 것입 니다. 그때 우리는 강동에 편안히 있으면서 멀리서 오느라 수고로운 그들을 기다려 들이친다면 유표는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니 그 승세
를 타고 공격해 나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형, 양 두 주 를 얻는 일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일껏 빼앗은 땅을 다시 내놓고 돌아서기 아깝기는 했지만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손권은 장소의 말을 따라 강하를 버리고 강동으로 군사를 되돌렸다.
한편 동오에 사로잡힌 바 된 황조의 대장 소비는 함거 안에 갇힌 채 가만히 사람을 보내 감녕에게 구해주기를 빌었다. 감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람에게 말했다.
“설령 소비가 그대를 보내 살려주기를 빌지 않는다 한들 내가 어찌 그를 잊겠는가?”
그러고는 알맞은 때를 기다렸다.
오래잖아 손권의 군사는 오회 땅으로 돌아갔다. 손권은 돌아가기 바쁘게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소비의 목을 자르도록 했다. 황조의 목과 나란히 선부의 영전에 올리고자 함이었다. 그 말을 들은 감녕 은 한달음에 손권에게 달려가 고개를 조아리고 울며 말했다.
“만약 지난날 소비가 없었더라면 제 몸은 벌써 죽어 개골창이나 구덩이를 메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 장군 휘하에 일하는 걸 바 랄 수 있기나 하겠습니까? 이제 소비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지난날 그가 제게 베푼 은혜와 정을 생각하니 차마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 다. 바라건대 제 모든 관작을 돌리겠사오니 부디 소비의 죄를 사하 여주십시오.”
그 말에 손권이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가 이미 그대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를 용서해주겠소. 하지만 만약 그가 달아난다면 어쩌겠소?”
“죽을 목숨이 산 것만으로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는 터에 달아날 까닭이야 있겠습니까? 만약 소비가 달아난다면 제가 그 목을 잘라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감녕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에 손권은 소비를 용서하고 황조의 목만으로 손견의 영전에 제사 지냈다. 손견이 죽은 지 십육 년, 손 책, 손권 두 대에 걸친 복수였다. 그러나 죽은 황조로 보면 일찍이 유표의 사람이 되어 손견과 유표의 싸움에 말려든 죄밖에 없으니 억 울할 수도 있었다.
죽은 아비를 위로하는 제사를 지낸 뒤 손권은 다시 크게 잔치를 열어 문무 관원들을 불러들이고 그 공을 치하했다. 그런데 한창 술 자리가 흥겹게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장수 하나가 돌연 크게 소리내어 울더니 칼을 빼들고 감녕에게 덮쳐갔다. 감녕은 황망히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 그의 칼을 막으려 했다. 손권 이 놀라 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능통)이었다.
감녕이 아직 강하에 있을 때 황조를 위해 죽인 동오의 장수 능조 의 아들인데 감녕과 한자리에 마주 앉게 되자 문득 아비 죽인 원한 이 가슴에 북받쳐왔다. 어쩌면 손권이 아비의 원수 갚음을 위해 차 린 떠들썩한 제사가 능통의 복수심을 더욱 자극했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손권은 얼른 능통에게 달려가 그 손을 잡아끌며 달랬다.
“흥패가 경의 부친을 활로 쏘아 죽이게 된 것은, 그때는 각기 주 인이 달라 그 주인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네. 하지만 이제는 다르네. 홍패는 이미 한 집안 식구가 되었는데 어찌 지난날의 원수를 따질 수 있겠나? 모두 내 얼굴을 보아 덮어두게나.”
그러나 능통은 더욱 슬피 목을 놓으며 말했다.
“아비를 죽인 자와는 함께 하늘을 이지 않는다 하였거늘, 그 원수 를 눈앞에 두고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권과 다른 관원들이 두 번 세 번 좋은 말로 달래도 끝내 성난 눈길로 감녕을 노려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손 권은 그날로 감녕에게 군사 오천과 배 백척을 주어 하구로 가도록 했다. 명목이야 그곳을 지키라는 것이지만 실인즉슨 감녕을 우선 능 통의 눈에 띄지 않을 곳으로 숨긴 셈이었다.
감녕은 손권에게 절하여 감사한 뒤 군사들을 이끌고 하구로 떠났 다. 손권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또 이번에는 능통의 벼슬을 높여 승 렬도위(丞烈都尉)로 삼았다. 그렇게 되자 능통도 한을 품은 채로나마 겉으로는 더 원수 갚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안의 일을 대강 정리한 동오는 곧 형주와 양주를 겨냥한 싸움준 비에 들어갔다. 널리 사람과 재목을 모아 싸움배를 만들게 하고 한 편으로는 군사를 나누어 대강 남쪽 곳곳을 지키게 했다. 뿐만 아니 라 숙부 손정에게는 오회를 맡기고 손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시상 에 머물렀으며, 주유는 파양호(鄱陽湖)에서 수군을 조련하여 곧 있을 싸움에 대비케 했다. 그해가 바로 유비가 공명을 얻은 해였다.
그 무렵 공명과 더불어 신야로 돌아온 유비는 공명을 대하기를 스승처럼 했다. 겨우 스물일곱의 청년에게 오십줄에 접어든 유비가 바치는 정성이니 설령 공명이 철석 같은 심장을 지녔다 해도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인간적인 정을 쏟는 데도 유비는 터럭만 한 소홀함이 없었다. 밥을 먹어도 한 상에서 먹고 잠을 자도 같은 이부자리에 자 니 일찍이 관우와 장비에게 쏟던 정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공명의 마음을 자기 곁에 붙들어맨 유비는 눈만 뜨 면 그와 더불어 천하의 일을 의논했다. 듣느니 놀라운 깨우침이요 이 로운 가르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유비는 당장에 야 할 구체적인 일을 물었다. 공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대답했다.
“조조는 기주에다 현무지(武池)란 못을 만들어 수군을 조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조조가 남쪽을 정벌할 뜻을 가졌다는 표시가 되니 그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을 강동으로 보내 그 허실을 알아보도록 하시지요. 그런 다음에라야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유비는 그날로 사람을 뽑아 강동으로 보냈다. 손권의 동정을 낱낱이 살피고 오라는 밀명과 함께였다.
강동으로 갔던 세작은 오래잖아 그곳의 허실을 자세히 알아 돌아 왔다. 동오는 이미 황조를 공격해 죽였을 뿐만 아니라 시상에 군사 를 머물게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손권이 제 아비의 원수 갚음을 하고도 오히려 멀리 시상까지 대 군을 이끌고 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강동의 소식을 듣고 난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약간 어두운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이는 머지않아 장강에 크게 풍운이 일 징조입니다. 조조가 남쪽에 뜻이 있음과 마찬가지로 손권에는 북으로 형, 양을 다툴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 범이 다투는 틈을 타 형, 양의 사슴을 우리가 잡는 일이지요.”
그렇게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유표에게서 사람이 왔다. 의논할 일이 있으니 유비더러 잠깐 형주로 와달라는 전갈이었 다. 아직 지난번의 죽을 뻔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한 유비가 얼른 대 답을 하지 못하고 공명을 쳐다보았다. 공명이 조용한 목소리로 권 했다.
“이번 부름은 반드시 강동의 군사가 황조를 깨쳐 죽인 일 때문일 것입니다. 주공을 청해 황조의 원수 갚아줄 계책을 의논하려는 뜻이 겠지요. 제가 함께 모시고 갈 것이니 주공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때그때 사정에 맞춰 대처할 좋은 계책이 있습 니다.”
이에 현덕은 공명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관운장을 남겨 신야를 지키게 한 뒤 장비와 오백 인마를 뒤따르게 하여 형주로 갔다. 하지 만 형주로 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게 있는지 말 위에서 넌지시 공명에게 물었다.
“이번에 유경승을 만나면 지난 일에 무어라 대답해주는 게 좋겠 소?”
“마땅히 양양의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셔야 합니다. 채모의 일은 그쪽이 먼저 꺼내지 않거든 그대로 덮어두십시오. 하지만 만약 유표가 주공께 강동을 치라고 할 때는 결코 응낙해서는 아니 됩니다. 다만신야로 돌아가 군마를 정돈하게 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유비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형주로 갔다. 형주에 이른 유 비는 역관에다 짐을 풀고 장비는 군사들과 함께 성 밖에 머물러 있 게 했다.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 쓸데없는 의심을 받거나 말 썽을 일으키는 게 싫어서였다.
유비는 곧 공명과 함께 유표를 보러 들어갔다. 서로 예가 끝나자 오히려 유비가 계하에 엎드려 죄를 빌었다.
양양에서 유표가 이른 대로 그를 대신해 손님 접대를 끝내지 못 하고 중도에 자리를 뜬 데 대한 사죄였다. 그 말에 유표가 문득 민망 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아우가 해를 입은 일을 들어 알고 있네. 그때 당장 채모를 목 베어 그 목을 아우에게 보내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나서서 말리 는 바람에 용서했을 뿐이야. 아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네.”
“아닙니다. 그 일은 채장군이 꾸민 것이 아니라 모두 아랫사람들 이 한 짓으로 생각됩니다.”
유비는 더욱 겸손하게 유표의 어색함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유표 는 비로소 유비를 부른 까닭을 밝혔다.
“이제 강하를 잃은 데다 황조는 손권에게 죽음을 당했네. 그 때문 에 아우를 청해 원수 갚을 계책을 의논해보려 한 것이네.”
“황조가 성정이 거칠고 사람을 쓸 줄 몰라 그 같은 화를 입은 것 입니다. 그런데 만약 군사를 일으켜 남쪽을 치다가 조조가 그 틈을타 북쪽에서 내려온다면 그 일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공명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유비는 대뜸 그렇게 말렸다. 그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던 유표가 문득 처연한 얼 굴로 말했다.
“나는 이제 늙고 병이 잦아 형주 다스리는 일은 제대로 해낼 수가 없네. 강동을 치는 일이야 어쨌건 아우는 이곳으로 옮겨와 나를 좀 도와주게. 내가 죽은 뒤에는 아우가 이 땅의 주인이 되어줘야겠네.”
그러자 유비가 펄쩍 뛰며 사양했다.
“형님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같은 게 어찌 감히 그같이 큰일을 맡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공명이 눈짓으로 현덕을 말렸다. 힘으로라도 빼앗고 싶은 판 에 스스로 넘겨주겠다는 데도 마다하는 유비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그런 공명을 못 본 척하고 서둘러 말을 맺었다.
“지금 형주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다 해도 형님께서 그리 걱정하 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천천히 생각하면 좋은 계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고는 피하듯 유표 앞을 물러나왔다. 역관으로 돌아가자 공명 이 애석한 듯 물었다.
“유경승이 스스로 형주를 주공께 맡기려 하는데도 어찌하여 거절하셨습니까?”
“경승은 나를 은의와 예절로 대해왔소. 어찌 그 위태함을 틈타 이 땅을 뺏을 수 있겠소?”
유비가 그렇게 대답했다. 약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한 그의 성격 그대로였다. 공명이 속으로 탄식하며 말했다.
‘참으로 너그럽고 의로운 주인이로구나!’
그 때문에 자신이 헤쳐가야 할 어려움이 암담하면서도 한편으로 는 그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에서 우러난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떨어진 처지는 그리 한가로운 게 못 되었다. 유표 의 땅이라고는 하지만 그 군권(軍權)을 거머쥐고 있는 채씨 일족이 여전히 유비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데다 강동을 정벌하는 것도 유 표가 굳이 고집한다면 유비로서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 때문에 유비와 공명이 다시 머리를 맞대듯 의논하고 있는데 문득 사 람이 와서 알렸다.
“공자 유기)가 뵈러 왔습니다.”
유비는 그 갑작스런 방문에 의아로우면서도 반갑게 유기를 맞아 들였다. 유기는 방안에 들어오기 바쁘게 울며 엎드려 말했다.
“계모가 끝내 이 몸을 용납지 않으니 목숨이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숙부께서는 저를 가엾이 여겨 구해 주십시오.”
실로 딱한 호소였다. 유기가 역관으로 찾아온 것을 채씨 일족이 본다면 둘 다 이로울 게 없었다. 이에 유비는 짐짓 냉담하게 말했다.
“그 일은 조카의 집안일이네. 내게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자 곁에 있던 공명이 빙긋이 웃었다. 유비가 또 인정에 못 이 겨 집안 싸움에 깊이 말려들까 봐 걱정하다가 뜻밖으로 쉽게 몸을 빼내는 걸 보자 저도 모르게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남 의 속도 모르고 공명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조카에게 줄 만한 계책이 있으십니까?”
공명은 문득 웃음을 거두고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집안일입니다. 이 양이 어찌 감히 참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비는 아무래도 공자 유기가 가여웠다. 잠시 후 돌아가는 유기를 바래주는 체 뒤따라 나갔다가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내일 내가 공명을 네 방문에 대한 답례로 보내마. 그때 이리이리 해보아라. 아마도 공명은 네게 묘한 계책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자 유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사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유비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공명을 대신 공자 유기에게 회사(回辭)하러 보냈다. 유기는 공명이 오자 후당으로 모 셔들인 뒤 차를 비우기 무섭게 매달리듯 말했다.
“이 기는 계모에게 용납받지 못해 곧 죽을 목숨입니다. 다행히 선 생께서 한마디 일러주시면 구함을 받을 길이 있을까 싶어 이렇게 빕 니다. 부디 뿌리치지 마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여전히 냉정했다.
“나는 이곳에서는 손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골육 간의 일에 간섭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일이 밖으로 새나간다면 그로 인한 해가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몸을 떨치고 일어나려 했다. 유기가 그런 공명을 붙들었다.
“기왕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하셨는데 어찌 허술하게 대접해 보낼수 있겠습니까?”
그런 유기의 어조가 어찌나 간곡한지 공명도 마침내는 뿌리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유기는 공명을 한층 외진 방으로 옮기게 한 뒤 술상을 내어 함께 마셨다. 그러나 얘기는 곧 좀 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계모가 저를 용납하지 않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마디만 일러주십시오.”
유기가 다시 그렇게 물었으나 공명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 일은 제가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또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유기는 그 런 공명에게 원망하듯 말했다.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자꾸 가시려 하십니까?”
그래 놓고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제게 오래된 귀한 책이 있는데 선생께서 한번 보아주십시오.”
공명이 원래가 서생(生)이었던지라 오래된 귀한 책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유기가 끄는 대로 작은 누각에 올랐다.
“그 책이 어디 있습니까.”
공명은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물었다. 유기가 대답 대신 다시 울며 말했다.
“계모의 용납을 받지 못해 제 목숨은 아침저녁을 기약하지 못합 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말 한마디면 구해주실 수 있으면서도 못 들은 체하십니까?”
그러자 속은 것을 안 공명은 낯색까지 변하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누각을 내려가려 해도 누군가 사다리를 치워버려 내려갈 수가 없었다. 뒤따라온 유기가 울먹이며 매달렸다.
“저는 목숨을 구할 계책을 얻으려 하건만 선생께서는 이 일이 밖 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워 말씀을 아니하시는군요. 하지만 이곳은 위 로 하늘에 닿지도 않고 아래로 땅에 닿지도 않은 곳이니 선생의 말 씀은 선생의 입에서 바로 제 귀로 들어갈 뿐입니다. 부디 가르쳐주 십시오.”
그러나 공명의 대답은 여전히 냉담했다.
“혈육을 이간시켜서는 아니 되는 법입니다. 양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유기는 마지막 수단을 썼다. 문득 칼을 뽑아 제 목을 겨누며 비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보존하지 못할 목숨일 바에야 차라리 선생께서 보시는 앞에서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래도 끝내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는 없 는지요?”
그러자 공명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급히 유기를 말리며 말했다.
“좋은 계책이 있소.”
“바라건대 가르쳐주십시오.”
유기가 칼을 거두며 다시 애걸했다.
“공자는 신생(生)과 중이(重耳)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신생 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었고 이는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안전했 던 것입니다. 근일 황조가 죽었으니 강하는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어찌 아버님께 말씀을 올려 그곳으로 가지 않습니까? 군사를 이끌고 강하에 머무는 것은 그곳을 지키는 동시에 공자의 화를 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유기는 문득 신생과 중이의 고사가 떠오르며 눈앞 이 환히 밝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생과 중이는 형제로 춘추 시절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정실 소생이었다. 그러나 헌공이 여희(姬)란 여자에게 빠져 아들을 낳 으니 여희는 헌공의 총애를 믿고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그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때 둘째 중이는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 태자 신생은 남아 있었 는데, 끝내는 여희의 참소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했다. 하지만 중 이는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돌아와 마침내 헌공의 뒤를 이으니 그 가 바로 뒷날 춘추의 다섯 패자 가운데 하나가 된 진문공(文 公)이었다.
공명의 깨우침을 통해 자신의 위태로운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뒷날까지 기약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된 유기는 몹시 기뻤다. 다시 공 명에게 절하여 감사한 뒤 사람을 불러 누각에다 사다리를 갖다 놓 게 했다. 애걸과 억지가 잘 어우러진 유비의 계책대로 이루어진 것 이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마음에 없이 꾀를 빌려주게 된 탓인지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온 공명에게 유비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공명이 유기의 집에서 있었 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러자 유비가 호탕한 웃음으로 공명의 못마땅해하는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것 참 잘하셨습니다. 사람은 당장을 잘 처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 앞날을 대비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유기는 이제 선생께 빚을 졌으니 뒷날 때가 오면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기에게 빚을 준 것은 그 자신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유기는 부친인 유표를 찾아가 말했다.
“지금 황조는 죽고 강하는 비어 있습니다. 제게 군사 약간만 나눠주신다면 그곳을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나 유표는 얼른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아들이긴 하지만 후처 채씨의 거듭된 참소로 사이가 멀어진 데다 황조같이 싸움을 많이 해본 노장도 지켜내지 못한 땅을 아들이 잘 지켜낼 성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모처럼의 청이고 또 당장은 아들을 멀리 보냄으로써 후처 채씨를 자극하는 일이 줄게 된다는 점에서는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끝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표 는 유비를 불러 의논했다.
자기가 꾸민 일이건만 유비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공자 유기를 편 들어 말했다.
“강하는 매우 중요한 땅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서는 지키기 어 려우니 공자를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형님은 형주에서, 공자는 강하에서 서로 호응하며 동오의 움직임에 대처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형님 부자 분이 동남의 손권을 막아주신다면 서북의 조조는 이 비가 당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드디어 유표도 마음을 정한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동남의 일은 우리 부자가 맡는다 쳐도………… 걱정은 조조일세. 근 간에 들으니 조조는 업군(鄴郡)에 현무지란 못을 만들어 수군을 조 련하고 있다고 하네. 반드시 남쪽으로 쳐 밀고 내려올 뜻이 있는 것 일세. 막지 아니할 수 없네.”
“그 일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하는 중이니 형님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유비는 그렇게 큰소리를 쳐 유표가 마음을 놓게 하고 신야로 돌아갔다.
유비가 돌아간 뒤 유표는 공자 유기를 불러 군사 삼천을 주며 강 하를 지키게 했다. 유기는 혹시라도 부친의 마음이 변할까 보아 그 날로 군사를 점고하여 강하로 출발했다.
유기는 무엇보다 계모 채씨의 독수(毒手)에서 벗어나는 기쁨으로 떠났으나 그때 이미 지켜야 할 장강은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물결이 높이 일고 있었다.
그 바람의 한쪽 끝은 남쪽의 오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시상까지 올라와 유표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손권은 때가 오면 장강을 뒤집 고 형주를 삼켜버릴 태풍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쪽 끝은 북방에서 불어오는 조조의 바람이었다. 혼일사해(混一四海)를 위해 언젠가는 동오까지 쓸어야 할 그 바람은 반드시 형주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먼저 형주를 휩쓸어온 것은 다름 아닌 북풍 곧 조조의 바 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