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8화 : 표류하는 형주
표류하는 형주
공융을 죽인 조조는 다섯 갈래의 군사를 차례로 강남을 향해 진 발시켰다. 허창은 순욱이 약간의 장졸들과 함께 남아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형주의 유표는 병이 더욱 깊어졌다. 스스로 남은 목숨이 길 지 않음을 짐작하고 사람을 시켜 신야의 유비를 불렀다. 뒷일을 당 부하고자 함이었다.
유비는 관, 장 두 아우와 더불어 형주로 와 유표를 보러 들어갔다. 병석에 누워 있던 유표는 유비를 보고 간곡히 말했다.
“내 병은 이미 뼛속 깊이까지 스며 죽을 날이 머지않은 듯하이. 특히 아비 없는 내 자식들을 아우에게 부탁하네. 내 아들들은 재주 가 없어 아비의 기업을 이어받지 못할 것 같으니 아우가 이 형주를 맡아 다스리도록 하게.”
그러자 유비가 울며 엎드려 말했다.
“이 비는 마땅히 힘을 다해 조카들을 도울 것입니다. 어찌 딴 뜻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자신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땅이건만 의리와 인정에 얽매여 차마 받지 못하는 유비였다. 그럴수록 유표의 당부는 더욱 간곡했다. 죽 음을 앞둔 이의 특유한 예감으로 유표는 자신이 오래 다스려온 그 땅이 곧 거센 폭풍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 권하거니 마다거니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조조가 스스로 대병을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비는 길목에 있는 신야가 먼저 걱정이 되었다. 당장 신야를 지키는 일이 급함을 내세워 유표에게 작별하고 신야로 돌아 갔다.
한편 유표는 병이 깊은 중에 그 같은 소식을 들으니 더욱 놀라웠 다. 여럿을 불러 의논 끝에 유비에게 마지막 당부를 써서 남겼다. 맏 아들인 유기(琦)를 세워 형주의 주인으로 삼고 그를 잘 보살펴달 라는 내용이었다.
채부인은 유표가 자신의 소생을 제쳐두고 맏이인 유기를 세우려 한다는 말을 듣자 몹시 성이 났다. 아우 채모와 장수 장윤(張)을 불러 가만히 일렀다.
“너희들은 가서 형주의 외문(門)을 굳게 지키도록 하라. 기(琦) 가 유명(遺命)을 받으러 오더라도 결코 들여보내서는 아니 된다.”
채모와 장윤은 그 말대로 바깥 성문에 군사를 풀고 엄히 지켰다.
과연 오래잖아 공자 유기가 말을 달려 성문으로 들어섰다. 강하를 지키고 있다가 부친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 다. 채모가 그런 유기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강하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 책임이 가볍지 아니한데 어찌 이렇게 오셨습니까? 만약 그사이라도 동오의 군사가 강하에 이른다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공자께서 들어가셔서 주공(主公)을 뵙는다면 주공께서는 진노로 말미암아 병 이 더욱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는 효도가 못 되니 얼른 되돌아가도 록 하십시오.”
말은 그럴듯했으나 군사를 풀어 지키고 있는 품이 억지로 들어가 려 한다 해도 들여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에 유기는 성문 밖에 서 한바탕 크게 곡을 한 뒤에 말에 올라 강하로 되돌아갔다.
그때 유표는 목숨이 다해가면서도 맏아들인 유기가 오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 여럿 앞에서 직접 유기를 내세워 후사로 삼음으로써 아무도 그 일에 딴소리를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채부인이 굳이 유기를 못 오게 막은 것은 바로 유표의 그 같은 속 뜻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유표는 결국 맏아들을 보지 못 한 채 그해 팔월 무신(戊申)일에 몇 소리의 고함과 함께 숨져버렸다. 유표가 끝내 후사 문제를 밝히지 못하고 숨져버리자 채부인은 처 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채모, 장윤에게 거짓으로 유촉(遺囑)을 쓰게 하여 자신이 낳은 유종(劉琮)을 형주의 주인으로 세운 뒤에야 발상(喪)을 했다.
이때 유종의 나이 겨우 열넷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총명하여 비록 그 어머니와 외숙부가 꾸민 일이라고는 해도 자신이 형주의 주인
이 된 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중요한 관원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꾸짖듯 말했다.
“비록 아버님께서는 세상을 버리셨다 하나 내 형님은 지금 강하 에 계시고, 또 숙부인 유현덕은 신야에 있소. 그런데 그대들이 나를 세워 주인으로 삼았으니 만약 형님과 숙부께서 군사를 일으켜 그 죄 를 물으시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어린 소년의 말이라도 조리에 어긋나지 않으니 다른 관원들은 물 론 일을 꾸민 채모와 장윤조차도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문 득 막관(幕官)으로 있던 이규(李)가 일어났다.
“공자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어서 강하로 슬픈 소식을 전 하고 큰 공자님을 모셔와 형주의 주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또 유현 덕에게도 돌아가신 주공의 뜻을 전해 큰 공자님과 함께 일을 처리하 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북으로는 조조를 막을 수 있고 남으로는 손권에게 맞설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전의 계책이 아니고 무엇이 겠습니까?”
그러자 비로소 급해진 채모가 버럭 소리를 질러 이규를 꾸짖었다.
“이미 형주의 주인은 정해졌거늘 너는 어떤 자이기에 어지러운 말로 돌아가신 주공의 유명에 거역하려 드느냐?”
그러나 일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이규도 지지 않았다. 마주 소리 쳐 채모를 꾸짖었다.
“너희들은 안팎으로 무리지어 서로 짜고 거짓으로 유명을 꾸며 맏이를 내치고 둘째를 주인으로 올려세웠다. 정말로 형주, 양주의 아홉 고을이 채씨(蔡氏) 일족의 손에 들어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구나! 죽은 주공의 넋이 계시다면 반드시 너희를 죄주시리라.”
유표 아래 사람이 없다고 해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채모는 이규가 자기들이 몰래 꾸민 일까지 드러내놓고 꾸짖자 더 참 지 못했다. 좌우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 무엄한 놈을 끌어내 목 베지 못할까!”
그러나 이규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채모를 꾸짖어 마지않 았다.
이규가 그렇게 죽자 질린 관원들은 두 번 다시 채모의 뜻을 거스 르지 않았다. 이에 채모는 유종을 세워 주인을 삼고, 형주의 군사는 모두 자기네 채씨들이 나누어 거느렸다.
형주의 주인이 그렇게 정해지니 자리도 바뀌었다. 채모는 치중 등 의(義)와 별가 유선(先)에게 형주를 지키게 한 뒤 자신은 채부 인, 유종과 더불어 양양으로 옮겨 앉았다. 있을지 모르는 유기와 유 비의 공격에 대비하려 함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가장 믿음직한 우군 이 가장 무서운 적으로 변해버린 셈이었다.
유표의 관은 양양성 동쪽 한양벌에 묻혔다. 채모는 형주 백성들의 눈이 무서워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으나 유기와 유비에게는 끝내 부 음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일은 다시 뜻하지 않은 쪽으로 벌어졌다. 유종이 양양에 이르러 잠시 말을 멈추고 있을 때 갑자기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조조가 바로 대군을 양양으로 몰아오고 있습니다.”
당장은 한 발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조조가 먼저 이른 것이었다. 놀란 유종은 채모와 괴월을 비롯한 장수들을 불러 의논했다. 동조연으로 있던 손이 나서서 말했다.
“두려운 것은 조조의 군사가 오고 있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강하에는 큰 공자가 있고 신야에는 유현덕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둘 모두에게 부음조차 전하지 않았으니, 만약 그들이 군사를 일 으켜 그 죄를 물으러 오면 형주와 양양은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제게 한 계책이 있는데 주공께서 써주실는지요. 형, 양의 백성들이 평안할 뿐만 아니라 주공께서도 이름과 벼슬을 고이 보전할 수 있습니다만…….”
“그게 어떤 계책이오?”
유종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형주와 양주 아홉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조조는 반드시 주공을 두텁게 대접할 것입니다.”
엄청나다면 너무도 엄청난 말이었다. 유종이 문득 목소리를 높여 부손을 꾸짖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 아버님의 기업을 물려받은 지 며칠 되지 도 않는데 어찌 남에게 주어버리란 말인가?”
그때 곁에 서 있던 괴월이 부손을 편들어 유종을 달래듯 말했다.
“부손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무릇 무엇에 거스르고 무엇에 따를 까[順]를 정함에는 의지해야 할 큰 줄기[體]가 있는 법이요, 강함 과 약함도 이미 정해진 대세가 있는 법입니다[天逆順有大體 強弱有定 勢]. 결코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조조는 북쪽을 평정하고 남쪽을 치는 데에 한가지로 조정의 이름을 빌려 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항거하시면 바로 조정을 거역하는 것 이 되어 명분에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주공께서는 방금 새로 형주의 주인이 되신 데다 바깥의 근심거리가 아직 없어지지 않 은 터에 또 안의 근심거리가 머지않아 일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바람 에 형주, 양양의 백성들은 조조의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싸워 보지도 않고 겁부터 집어먹고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과 더불어 어떻 게 조조에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괴월은 유표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주에서 으뜸가는 모사를 자처 해온 자였다. 그까지 부손의 편을 들고 나서자 유종도 무턱대고 꾸 짖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유종은 문득 처연한 얼굴이 되어 탄식 하듯 말했다.
“여러 공들의 말씀을 내가 따르기 싫어 이러는 것은 아니다. 다 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기업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내주 자니 천하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울 뿐이오.”
그러는데 또한 사람이 나서더니 앞서의 두 사람을 편들어 크게 말했다.
“부손과 괴월의 말이 매우 옳은데 주공께서는 어찌 따르지 않으십니까?”
그 말이 하도 당돌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그는 바로 왕찬 (粲)이란 사람이었다.
왕찬은 산양 땅 사람으로 자를 중선(仲宣)이라 했는데 얼굴은 수 척하고 키는 작았으나 재주가 놀라웠다. 어렸을 적 당대에 제일가는 문사라 일컫던 채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채옹의 집에는 귀한 손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건만 채옹은 왕찬이 왔다는 말을 듣 자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와 맞아들였다. 그 자리에 있던 손들 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채(蔡)중랑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이 어린아이를 이토록 높이 여기십니까?”
그러자 채옹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 아이는 빼어난 재주가 있어 내가 오히려 미치지 못합니다. 어 찌 소홀하게 대접할 수 있겠소이까?”
또 왕찬은 널리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남달랐다. 일찍이 길가 에선 비석을 한번 훑고 지난 뒤에 그 비문을 그대로 외어 보인 적 이 있으며, 또 한번은 다른 사람이 바둑 두는 걸 구경하다가 그 판을 흩고 다시 놓은 적이 있는데 돌 한 점 틀리게 놓이지 않아 보는 이 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왕찬은 산술에 밝을 뿐 아니라 글도 썩 잘 지어 조정은 그가 겨우 열일곱 살 때 벌써 황문시랑으로 불렀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남쪽으로 피난하여 형주 에 이르게 되었는데 유표가 그를 알고 상빈(上賓)으로 맞아들여 그 곳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그런 왕찬이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의견을 지지하고 나서자 일은 거지반 판가름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종만은 끝내 그 항복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구원을 기다리듯 다른 의견을 기다리 며 좌중을 둘러볼 뿐 얼른 결정을 내리려 들지 않았다. 그런 유종을 다그치듯 왕찬이 물었다.
“주공께서는 스스로를 헤아리기에 조조에 비해 어떻다 보십니까?”
“그만 못할 것이오.”
유종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왕찬은 마치 유종을 깨우쳐주 듯 늘어놓았다.
“조공(公)은 군사가 많고 거느린 장수들이 날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널리 알고 또한 꾀가 많습니다. 하비성에서 여포를 사로잡았 으며, 관도에서는 원소를 꺾었고, 농우에서는 유비를 두들겨 내몰았 으며 백등에서는 오환족(烏丸族)을 깨뜨리는 등 그가 죽여 없앤 자 나 평정한 땅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 조공이 이 제 대군을 몰고 남으로 내려와 형, 양을 노리는데 무슨 수로 맞서겠 습니까? 부손과 괴월 두 사람의 말이 가장 나은 계책이 될 것이니 주공께서는 공연한 의심으로 일을 늦추어 뒷날 후회하는 일이 없도 록 하십시오.”
왕찬의 그 같은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조조에 대한 두려움 에 빠져들게 하는 데마저 있었다. 어린 유종도 마침내 조조에게 항 복하는 쪽으로 뜻이 기울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의 가르침이 옳은 줄 알겠습니다. 다만 어 머님께 이 일을 고해 올린 뒤에 결정짓도록 합시다.”
유종이 그렇게 말하자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채부인이 나타나 말했다.
“이미 중선, 왕찬의 자), 공제(公, 부손의 자), 이도(異, 괴월의 자)세 분이 소견이 같다면 굳이 내게 알릴 게 무엇이냐? 그분들의 말씀대로 따르도록 하여라.”
자신이 해놓은 짓이 있어 당장은 조조보다 큰 공자 유기나 유비 가 더 두려운 채부인이었다. 좁은 소견에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어 아들이 찾기를 기다릴 틈도 없이 내달아 그렇게 몰아갔다.
이에 드디어 뜻을 정한 유종은 급히 조조에게 바치는 항서(書) 를 쓰게 한 뒤 송충(忠)에게 주며 남몰래 조조에게 전하게 했다. 송충은 그 명을 받들어 똑바로 완성으로 달려가 조조를 만나고 항서 를 바쳤다.
한바탕 어려운 싸움을 각오하고 있던 조조는 그 뜻밖의 항서에 몹시 기뻤다.
송충에게 무거운 상을 내린 뒤 일렀다.
“너희 주인 유종더러 성을 나와 나를 맞으라 일러라. 그리하면 나는 유종을 영구히 형주의 주인으로 세워주겠다.”
송충은 조조에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한 뒤 곧 형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런데 막 강을 건너려 할 때였다.
문득 한 떼의 인마가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놀라 바라 보니 앞선 장수는 다름 아닌 관운장이었다. 송충은 피해보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자신을 알아보고 부르는 관운장을 거역하지 못해 하는 수 없이 관운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오?”
관운장이 뚫어질 듯 송충을 살피며 불쑥 물었다. 엄청난 내막까지 는 몰랐지만 까닭 없이 당황하는 송충이 수상쩍어 물어본 것이었다. 송충은 처음 거짓말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관운장이 쉽게 놓아주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자 마침내 앞뒤의 사정을 하나하나 빠짐 없이 털어놓았다.
그 기막힌 내막을 듣자 관운장은 크게 노했다. 그 자리에서 송충 을 묶어 신야의 유비에게로 데려갔다. 관운장으로부터 자세한 전말 을 들은 유비는 문득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유종이나 그를 둘러싼 간사한 무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유표를 위해서였다.
조조에게 쫓겨 갈 곳 없이 된 자신을 따뜻이 받아들여주었을 뿐 만 아니라 채씨 일족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의 참소를 듣고도 끝내 자신을 믿어준 유표였다. 유표가 반생에 걸쳐 힘들여 이룩한 기업이 못난 자식에 의해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어가게 된 일이 애석하고도 분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송충을 목 벤 뒤에 군사를 일으 켜 강을 건너도록 합시다. 양양성을 빼앗고 채씨 일족과 유종을 죽 인 다음 조조와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장비가 울고 있는 유비에게 그렇게 재촉했다. 유비가 울음을 그치 며 장비를 꾸짖었다.
“너는 좀 입을 다물지 못하겠느냐? 나도 헤아리는 바가 있으니 함부로 떠들지 마라.”
그러고는 이어 송충을 소리쳐 꾸짖으며 내쫓았다.
“너는 여럿이서 이 같은 일을 꾸미는 줄 알면서도 어찌 내게 와서 알리지 않았느냐? 이제 너를 목 벨 것이로되, 그래봤자 아무것도 이 로울 일이 없어 살려 보낸다. 어서 가거라!”
꼭 죽는 줄 알았던 송충은 그 같은 처분에 절하여 유비에게 감사한 뒤 머리를 싸 안고 쥐새끼 내빼듯 양양으로 돌아갔다.
송충은 살려 보냈지만 유비의 근심과 고민은 실로 컸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거로 해야 할 형주가 이제는 고스란히 조 조에게 넘어가게 된 까닭이었다. 근거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조조 가 자신을 공격하는 데 알맞은 근거지가 되어버릴 판이었다.
유비가 그 일로 한참 걱정하고 있을 때 홀연 공자 유기가 이적(伊 籍)을 보내왔다는 전갈이 왔다. 유비는 전에 이적이 채모의 흉계로 부터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 이적을 맞 아들였다.
이적은 유비가 지난 일을 두 번 세 번 감사하자 그 말을 겸손하게 가로막으며 자신이 온 뜻을 밝혔다.
“강하에 계신 큰 공자님께서는 근일에야 형주의 주공께서 돌아가 신 일과 채부인이 채모의 무리와 짜고 큰 공자께는 부음조차 전함이 없이 유종을 새 주인으로 세웠다는 소문을 들으셨습니다. 이에 큰 공자께서 사람을 뽑아 양양에 보내 알아보게 하셨던바, 모두가 사실 임을 알고 사군께서 아직 모르고 계실까 봐 특히 저를 보내신 것입 니다. 돌아가신 주공의 부음과 채씨 일족의 흉계를 알림과 아울러 사 군께서도 거느리신 정병을 일으키시어 함께 양양으로 가주시기를 청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할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유기가 보낸 서찰을 내놓았다. 읽기를 마친 유비가 탄식하듯 말했다.
“기백(伯, 이적의 자)은 유종이 형의 자리를 빼앗은 일만 알지 유 종이 이제 형, 양의 아홉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바치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구려!”
“사군께서 그 일은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적이 놀라 물었다. 유비는 관운장이 송충을 사로잡아 온 일로부 터 유종과 조조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대로 일러주었다. 다 듣고 난 이적이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이렇게 해보시지요. 사군께서는 문상(問 喪)을 구실로 양양으로 가셔서 유종으로 하여금 맞으러 나오게 하신 뒤 그를 사로잡으십시오. 그다음 그를 돕는 무리를 모두 주살하시면 형주는 사군의 땅이 될 것입니다.”
“기백의 말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라보십시오.”
공명이 옆에 있다가 그렇게 거들었다. 그러나 유비는 눈물까지 흘 리며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유표 형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내게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셨소. 그런데 이제 그 아들을 사로잡고 그 땅을 빼앗는다면 다음에 죽은 뒤엔들 무슨 낯으로 형님을 뵙겠소?”
“하지만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실로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미 조 조의 대군이 완성에 이르렀다 하는데 무슨 수로 거기에 항거하시겠 습니까?”
공명이 안타까운 듯 다시 한번 유비에게 권했다. 그러나 유비는 마음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번성으로 피해 어찌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차마 양양을 칠 수는 없구려.”
그렇게 이야기를 바꾸어 유종을 치지 않고 조조를 막을 궁리만했다. 공명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나 유비의 성정을 잘 아는 터라
더는 억지로 권하지 않고 유비의 의논에 응했다. 한참 이일 저일을 서로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정탐을 나갔던 군사가 나는 듯 말을 달 려 돌아와 알렸다.
“조조의 군사가 드디어 박망파에 이르렀습니다.”
조조의 그같이 신속한 용병에 유비는 놀라고도 당황했다. 이적을 재촉해 급히 강하로 돌려보낸 뒤 거느리는 군마를 모두 모아 정돈하 는 한편 공명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조조와 맞서야 되겠소?”
“주공께서는 마음을 조금 너그럽게 가지십시오. 지난번에도 불 한 다발로 하후돈의 군마를 태반이나 불살라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번 에 조조의 군사가 또 왔다니 그에게도 반드시 그 같은 계책의 뜨거 운 맛을 가르쳐줘야겠습니다. 다만 신야는 우리가 있어봤자 별로 얻 을 게 없는 곳이니 빨리 번성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명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미 생각해둔 게 있는 듯 말을 마침과 아울러 사람을 보내 네 대문에 방을 써 붙이게 했다.
‘남자 여자 늙고 젊고를 가릴 것 없이 따라가고 싶은 자는 모두 우리를 따라오기 바란다. 우리는 오늘 잠시 번성으로 옮겨 적의 예 봉을 피할 것이니 부디 그릇됨이 없게 하라.’
그런 다음 손건을 물가로 보내 배를 거둬들이게 했다. 따라가려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따로 미축에게는 모든 관원들의 가솔들을 보호해 번성으로 옮기는 일을 맡겼다.
한편으로 공명은 싸움 준비에도 빈틈이 없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 러놓고 영을 내리는데 관운장이 가장 먼저 영을 받았다.
“운장께서는 군사 일천을 이끌고 백하 상류로 가서 매복하도록 하시오. 모두 자루를 준비하여 그걸로 흙과 모래를 퍼 담아 백하의 물을 막고 기다리면 내일 밤 삼경 무렵이 되면 하류에서 사람의 고 함 소리와 말 울음이 들릴 것이니 그때 급히 강을 막은 흙자루를 무 너뜨려 물을 일시에 쏟아지게 하고 군사를 아래로 이끌고 와 싸움을 돕도록 하시오.”
다음은 장비 차례였다. 공명은 소리 높여 영을 내렸다.
“익덕께서는 군사 일천을 거느리고 박릉 나루터에 매복해 있으시 오. 그곳은 물의 흐름이 가장 느린 곳이니 상류에서 운장이 터놓은 물에 쫓긴 조조의 군사는 반드시 그리로 피해 갈 것이오. 그때 승세 를 타고 나아가 조조의 군사를 죽이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또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자룡은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네 대로 나누되 한 대는 스스로 거 느려 동문 밖에 매복하고 나머지 세대는 각기 서문, 남문, 북문 밖 에 매복게 하시오. 그전에 할 일은 유황과 염초를 비롯해 불 붙기 쉬 운 것들을 민가의 지붕에다 재어놓는 일이오. 조조의 군사들은 성안 에 들어오면 반드시 민가에서 쉴 것이기 때문이오. 마침 내일 해질 무렵부터는 거센 바람이 일 것인즉 그때 동서남 세문에 매복해 있 는 군사들로 하여금 불 붙은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 붙이도록 하시 오. 그리하여 성안에 불길이 크게 일거든 성 밖의 군사들로 하여금 함성을 질러 더욱 위세를 돋우게 하시오. 불에 그을고 함성에 놀란 조조의 군사들은 반드시 조용한 동문을 골라 달아나려 할 것이오. 동문 밖에 매복해 있던 자룡은 그때 군사를 내어 그 뒤를 따르며 조 조의 군사들을 죽이다가 날이 밝거든 관, 장 두 장군과 만나 번성으 로 돌아오면 되오.”
미방과 유봉도 그 싸움에서 빠지지 않았다. 공명은 마지막으로 그 들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들 둘은 이천 군사를 거느리되, 반은 붉은 깃발을 지니고 반 은 푸른 깃발을 지니게 하여 신야성 밖 삼십 리에 있는 작미파에 가 있도록 하라. 그러다가 조조의 군사가 이르거든 붉은 기를 든 군사 들은 왼쪽으로 내닫고 푸른 기를 든 군사들은 오른쪽으로 내달아 조 조의 눈을 어지럽게 하라. 조조는 의심이 일어 감히 너희들을 쫓지 못하고 그대로 성에 들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은 군사를 나누어 부 근에 숨어 있다가 성안에 불길이 이는 게 보이거든 뛰쳐나와 쫓기는 조조의 군사들을 뒤따르며 죽인 뒤 백하 상류로 가 싸움을 돕도록 하라.”
마치 손바닥 안에 든 물건을 가지고 노는 듯한 공명의 싸움 준비 였다. 그러나 지난번 싸움에서 공명의 재주를 이미 본 장수들은 조 그만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랐다.
모두 각자 받은 영대로 군사를 이끌고 떠나자 공명은 유비를 사방이 내려다뵈는 높은 산 위로 오르게 하며 말했다.
“이제는 이겼다는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한편 조인과 조홍이 거느린 십만은 전대가 되어 물밀듯 신야로 몰려갔다. 앞에는 허저가 이끄는 삼천의 철갑 두른 군사들이 길을 열고 있어서 그들의 기세는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그날 정오 무렵 하여 그들이 작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언덕 아래 한 떼의 군사들 이 벌여 서 있는 게 보였는데 모두 붉고 푸른 깃발을 들고 있었다. 처음 허저는 적군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음을 보고 군사들을 호령하 여 그대로 밀어붙이려 했다. 그때 유봉과 미방은 군사를 깃발에 따 라 나누어 두었다가 서로서로 자리를 엇바뀌게 했다. 보통의 군사들 이라면 멀리서는 잘 알아볼 수 없는 변화였으나 붉고 푸른 기를 든 군사들의 움직임이라 그 변화는 멀리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제갈량이 계략에 밝다는 걸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는 허저는 그 갑 작스런 변화를 보자 더럭 의심이 났다. 제갈량이 무언가 계략을 펼 쳐놓은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곧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춘 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더 나아가지 말라! 앞에 복병이 있는 것 같다. 이곳에 잠시 멈추 어 알아보도록 하자.”
그러고는 말 탄 군사 하나를 골라 나는 듯 달려가 그 일을 조인에 게 알리게 했다.
“그것은 거짓으로 우리를 혼란케 하려는 군사[兵]들일세. 틀림 없이 매복은 없으니 되도록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나도 군사를 재 촉해 곧 뒤따르도록 하겠네.”
조인의 대답은 그러했다. 이에 허저는 다시 군사를 재촉해 작미파로 덮쳐갔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던 적군은 금세 달아나 허저가 숲에 이르렀을때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허저는 적군을 찾아 쳐부순 뒤에 나 아가고 싶었으나 그사이 해는 서편으로 기울어 숲을 뒤진댔자 찾아 낼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언덕을 넘으려는 데 문득 가까운 산 위에서 북소리 피리소리가 요란했다. 허저는 놀 라 소리나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산꼭대기에 큰 깃발이 하나 꽂혀 있고 그 아래는 일산(日)을 받 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로 유비와 제갈공명 이었다.
유비로 미루어 제갈량까지 알아본 허저는 크게 성이 났다. 너무도 자신을 얕보는 것 같은 유비와 공명의 태도에 무장 특유의 자존심을 상한 것이었다.
허저는 곧 길을 찾아 산 위로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산 위에서 통나무가 구르고 바위가 쏟아지는 바람에 도저 히 오를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또 산 뒤편에서 크게 함성이 일어 허 저는 하는 수 없이 오르기를 그만두었다.
그사이 날은 저물어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군사 들을 이끌고 그곳에 이른 조인이 허저에게 말했다.
“적이 이렇게 나와 있으니 신야성은 지키는 군사가 없을 것이오. 오늘밤은 신야성을 뺏어 군사를 쉬게 한 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유 비를 사로잡도록 합시다.”
허저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들은 곧장 신야성으로 향했다.
조조의 군사들이 성 아래 이르러보니 네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혹시 복병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도 조조의 군사들은 세력만 믿고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안에는 백성들 하나 남아 있지 않았 다. 그야말로 텅텅 빈 성이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세력이 외롭고 계책이 궁한 유비가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달아나버린 때문일 것이오. 우리는 잠시 이 성을 빌어 하룻밤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가 내일 날이 밝거든 적을 뒤쫓도록 합 시다.”
성을 둘러본 조인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지치고 굶주려 있었다. 변변한 싸움 한번 없었지만 하루 종일 이곳저곳에서 나타난 유비의 군사들 때문에 쉬기는커녕 끼니조차 제대로 끓여 먹지 못한 탓이었다.
조인의 그 같은 결정이 전해지자 장졸들은 좋아라 흩어져 쉴 방 을 찾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조인과 조홍도 전에 현청이었던 곳에 자리를 잡고 피로한 몸과 마음을 함께 쉬게 했다.
밤이 되자 일기 시작한 바람은 초경을 지나면서 몹시 거세졌다. 제갈량이 전날 이미 말한 대로였다. 그러나 별 걱정 없이 쉬고 있는 조인에게 군사 하나가 달려와 급하게 알렸다.
“큰일 났습니다! 성안에 불이 났습니다.”
그래도 조인은 일이 급한 걸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 군사의 호들 갑을 나무라듯 말했다.
“이것은 우리 군사들이 밥을 짓다가 잘못하여 난 불일 것이다. 너 무 놀라지 마라.”
그러는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잇달아 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서, 남, 북 세 문에서 모두 불이 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놀란 조인은 여러 장수들에게 급하게 영을 내려 말에 오르게 했다. 그때 이미 성안에는 불길이 가득하여 하늘과 땅이 온 통 시뻘게졌다. 전날 박망파에서 하후돈의 군사들을 삼켜버린 그 불 길보다 더욱 거세고 뜨거운 불길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싸움이고 뭐고 없었다. 조인이 이끈 장수들은 다만 불길을 뚫고 길을 찾아 달아나기 바빴다. 장수들이 그 모양이 니 졸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통에 자 기 편에 짓밟혀 죽은 자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동문은 불길이 없고 또 열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조인에게 그렇게 알려주었다.
조인은 급하게 동문 쪽으로 말을 몰았다. 과연 들은 대로 동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조인은 그리로 뒤따르는 장졸들과 더불어 범의 아가리같이 느껴지는 성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실은 그게 바로 범의 아가리로 뛰어든 격이었다. 겨우 불 길을 벗어났다 싶어 한숨 돌리려는데 문득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덮쳐왔다.
이미 불길에 쫓겨 반나마 넋이 나간 조조의 군사들에게는 삼천의 군사가 오만, 십만으로 보였다. 제대로 창칼 한번 맞대지 못하고 달 아나기 바쁘니 조운은 그 뒤를 따르며 마음껏 죽였다.
조인은 간신히 조운의 추격을 벗어났으나 그걸로 끝난 것은 아니 었다. 한참 정신없이 달리는데 다시 미방이 이끄는 군사들이 조인의 군사들을 두들겼다. 조운과 마찬가지로 싸움이라기보다는 한바탕의 거친 살육이었다.
대패한 조인은 이제 길을 앗아 달아나는 데만 온 힘을 다했다. 그 런데 이번에는 유봉이 이끄는 군사들이 길을 막고 또 한바탕 조인의 군사들을 죽인 뒤에야 물러갔다. 이래저래 사경 무렵이 되었을 때는 처음 조조에게 받은 십만의 군사가 태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것도 대개는 불에 그을리고 데인 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무사히 빠져나온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내닫는데 다시 백하가 앞을 가로막았다. 조인은 아뜩하여 강물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강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물이 깊지 않다. 모두 그대로 내쳐 건너라!”
조인은 그렇게 영을 내리고 앞장서 물속으로 말을 몰았다. 여럿이 한꺼번에 물을 건너니 고요하던 물가가 사람의 고함과 말 울음소리 로 일시에 소란해졌다.
그 소란스러움은 상류에서 물길을 막고 기다리던 관운장의 귀에 도 들렸다. 신야에서 이는 불길을 보고 이미 단단한 채비를 하고 있 던 관운장은 영을 내려 강물을 막고 있던 흙부대를 한꺼번에 무너뜨 리게 했다. 막혀 있던 물길은 거센 기세로 하류를 휩쓸어, 밀고 밀리 며 한창 바쁘게 하류를 건너던 조조군의 인마를 삼켰다. 다시 수많 은 군사와 말이 물속의 외로운 넋이 되었다.
급히 군사를 되돌린 조인은 물 흐름이 느린 곳을 찾아 헤맸다. 다 행히 박릉 나루에 이르니 물이 얕고 흐름이 느린 곳이 눈에 띄었다. 불에 그을고 물에 놀란 조조의 군사들도 이제 살았다 싶었다. 누구 의 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앞다투어 나루 쪽으로 몰려갔다. 그때 또 다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조 이 역적 놈아, 어서 목숨을 바쳐라!”
앞선 장수가 놋그릇 깨지는 소리를 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장비 였다. 조조의 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는 끝장이다 싶어 무기를 내던지고 털썩 주저앉는 졸개들까지 있었다.
그때 허저가 용기를 내어 장비를 맞았다. 허저가 원래 그리 약한 장수가 아니었으나 일이 그 지경이 되니 싸움에 크게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거짓으로 기세를 올려 몇 합 장비와 어울리다가 이내 길 을 앗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는 그런 조조의 군사들을 쫓으며 마음껏 죽이다가 유비와 공 명을 만나 함께 상류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유봉과 미축이 이미 뗏 목과 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자, 이제는 번성으로 간다. 물을 건너도록 하라!”
유비가 뒤이어 모여든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비록 그 싸움에서는 크게 이겼으나 신야는 아무래도 조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너 무 좁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을 받은 장졸들은 곧 배에 올라 번성으로 향했다. 모두 번성에 이른 뒤에 공명이 문득 영을 내렸다.
“뗏목과 배들을 모두 태워버리도록 하라.”
비장한 방어의 결의가 섞인 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두 번이나 조조의 대군 을 깨뜨린 공명의 병법이다. 어느 정도의 과장과 미화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병법의 요체가 지리(地利)에 의지하고 있는 점이다. 공명은 지형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풍토에까지 정통해있었음에 분명하다. 바람이 일 것까지 예측하는 것을 반드시 어떤 신비한 예견 능력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 특별한 경우에는 어떤 지역에서 어떤 바람이 언제쯤 인다는 것쯤은 세밀한 관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유비가 이미 근거를 번성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자 조인은 얼마 안 되는 나머지 군사를 수습해 신야에 진을 쳤다. 그리고 아우 조홍 을 조조에게 보내 그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렸다.
“제갈량 그 촌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성난 조조는 그렇게 이를 갈며 삼군을 재촉해 신야로 갔다. 산과 들을 뒤덮는 대군의 진발이었다.
신야에 이르러서도 조조의 서두름은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군사를 풀어 가까운 산을 뒤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하를 메워 대군이 건널 수 있게 했다. 누구의 명이라 거스르겠는가. 곧 산을 뒤 진 군사들은 유비가 등 뒤에 숨겨둔 군사가 없음을 알려왔고, 백하 로 나간 군사들은 강물을 메워 대군을 건너게 할 준비가 다됐음을 알려왔다.
조조는 대군을 여덟 길로 나누어 일제히 번성으로 밀고 갔다. 그 서두르는 기세를 말리듯 유엽이 가만히 조조를 찾아보고 말했다.
“승상께서 이곳 양양에 오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먼저 백성들 의 관심부터 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비는 지금 신야의 백성들 을 모두 이끌고 번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급히 군사를 내어 번성을 치게 되면 두 현의 백성들을 가루로 만들어 흩은 꼴이니 민심을 얻는 길이 못 됩니다. 먼저 사람을 보내 유비에게 항복하 도록 권해보시지요. 설령 유비가 항복하지 않더라도 승상께서 백성 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마음은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만약 유비 가 항복해 온다면 형주의 땅은 싸우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게 되니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난 중에도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조조는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야겠소?”
“서서는 유비와 친분이 몹시 두텁습니다. 지금 우리 군중(軍中)에 있는데 한번 보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엽이 얼른 대답했다. 조조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를 보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렵소.”
“만약 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세상의 이목에 얽매여 있는 선비를 잘 아는 유엽이 조조를 안심 시켰다. 그제서야 조조도 의심을 거두고 서서를 불러들이게 했다.
“나는 원래 번성을 짓밟아 뭉개버리려 했으나 그 안에 있는 죄 없 는 백성들이 가엾어서 공을 불렀소. 공은 가서 유비를 달래주시오. 만약 유비가 와서 항복한다면 그 죄를 용서하고 벼슬을 내리겠거니 와 어리석은 고집으로 맞선다면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죽일 것이오. 이는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모두 태우는 격이니 백성들까지 죄없 이 죽는 꼴을 어찌 차마 볼 수 있겠소? 공의 충의는 내가 이미 아는 바라 특히 공을 보내니 바라건대 공은 이 뜻을 저버리지 마시오.”
이에 서서는 마지못해 조조의 명을 받들어 번성으로 갔다. 유비와 공명은 서서를 반겨 맞으며 옛정을 되새겼다. 이윽고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다.
“조조는 저를 보내 사군께 항복을 권하게 했습니다. 이는 거짓으 로 민심을 사려는 수작이나 반드시 가볍게 들으실 일은 아닙니다. 지금 조조는 대군을 여덟 길로 나누어 백하를 메우고 번성으로 몰려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번성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으니 알맞은 계책을 세워 행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아직도 서서의 마음이 자기에게로 쏠려 있 음을 알았다. 슬몃 자기 곁에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이 생겨 조조에 게 돌아가는 걸 말려보았다. 그러나 서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것입니 다. 하지만 늙으신 어머님께서 조조로 인해 돌아가셨으니 그 한이 하늘에 사무친 터라 비록 몸은 조조 곁에 있더라도 맹세코 그를 위 해서는 작은 계책도 베풀지 않겠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사군 곁에는 와룡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대업을 이루실 것 이라 믿고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자 유비도 더는 서서를 붙들지 못했다. 표류하는 형주를 닥쳐 올 강풍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서서 같은 인재 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어가면서까지 붙 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