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9화 : 얻는 자와 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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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9화 : 얻는 자와 사는 자


얻는 자와 사는 자

조조에게로 돌아간 서서는 유비에게는 전혀 항복할 뜻이 없음을 알렸다. 성난 조조는 그날로 군사를 휘몰아 번성으로 나아갔다. 어 차피 치러야 할 싸움이라면 단숨에 결판을 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다시 불안해진 것은 유비였다. 공명을 불러놓고 걱정스레 물었다.

“번성이 비록 신야보다는 크다 하나 아무래도 조조의 대군을 막 아내기에는 미덥지 못합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저도 원직의 말을 듣고 보니 깨우쳐지는 바 있습니다. 되도록이 면 빨리 번성을 버리고 양양을 빼앗아 그곳에서 한숨 돌리는 게 좋 겠습니다.”

양양의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항복해버렸으니 비록 그가 유표의 아들이라고는 해도 그전과 같은 의리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거기

다가 형세가 형세인 만큼 유비도 이번에는 제갈량의 말을 뿌리치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우리는 백성들이 따라오는 걸 허락한 지 오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 그들을 버리고 가겠습니까?”

조조의 군사가 코앞에 와 있는 상태에서 수많은 백성을 데리고 양양으로 옮겨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묻는 말이었다. 제갈량 은 신야 때와 같은 대답을 했다.

“사람을 시켜 두루 백성들에게 알리도록 하십시오. 우리를 따르고 싶은 사람은 함께 가고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남으라고 하시 면 됩니다.”

그러고는 먼저 관운장을 강가로 보내 배를 마련케 한 뒤, 손건과 간옹을 불러 성안의 백성들에게 알리게 했다.


‘이제 머지않아 조조의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외로운 성 하나로 는 지켜낼 수가 없어 강을 건너려 하는 바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은 함께 가도 좋다.’


그러자 신야와 번성의 두 곳 백성들은 한가지로 입을 모아 소리쳤다.

“우리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유황숙을 따르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날로 짐을 꾸려 통곡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것은 업은 채,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줄을 지어 물을 건너는데 강 양쪽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배 위에서 그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유비가 문득 목을 놓아 울며 탄식했다.

“조조가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이 유비지 저들이 아니다. 나한사 람으로 백성들이 이토록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살아가겠는가.”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유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시퍼런 강 물로 뛰어내리려 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옷깃을 잡고 말려 아무 일 없었으나, 그걸 전해 들은 사람치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 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비의 그 같은 행동은 지나치게 과장적이거나 촉한정통론자(蜀漢正統論者)들이 꾸며댄 얘기로 들릴지 모른다. 그 러나 유비가 떨어져 있던 처지로 미루어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것 은 없다. 그때 유비의 나이는 이미 마흔여덟, 오십 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스물넷의 나이로 탁군에서 몸을 일으킨 지 이십여 년, 함께 일어 난 이들 가운데서 조조처럼 살아남은 이는 물론 이미 죽은 이 중에 서조차도 그처럼 빛 없고 불운한 세월을 보낸 이도 드물었다. 손견, 원술, 여포, 공손찬………… 비록 패망하여 죽었을지라도 그들은 한결같 이 천하의 일각(一角)을 차지하고 한 시대를 화려하게 주름잡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유비는 서주에서의 짧은 세월을 빼면 반반한 근거지 한 뙈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객장(아니면 막빈(幕)이란 이름으로 남의 더부살이나 하다가 주인이 패망하여 죽으면 다시 천하를 떠돌며 속절없는 세월만 허비해왔다.

물론 제갈공명을 얻었을 때는 새로운 희망과 야심으로 불타오르 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만남은 너무 늦어 보였고 일치 하는 이상도 현실로 바꾸기에는 너무 낡아 보였다.

격변의 시대를 지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천하는 자신의 대단찮은 기반과 제갈공명의 재주만으로 뒤집기에는 어려워 보였으 며, 광무제(武帝)에 이어 또 한번 되살려보려는 대한)의 이상 도 퇴색한 지 오래였다. 밥과 평화를 확보해주는 조조에게 기울어지 는 백성들 못지않게 당대의 지식인들도 머지않아 새롭게 열릴 왕조 와 그 이상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보였다.

거기다가 비록 강을 건너고는 있지만 그 앞길에 무엇 하나 확실 하고 희망적인 변화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의지하려는 양양성 은 이미 조조에게 항복한 유종과 채모의 무리가 지키고 있고 설령 어렵게 손에 넣는다 해도 그 성 하나에 의지해 조조의 오십만 대군 을 막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천하 형세의 미묘한 변화에 대한 낙 관과 지난날 자신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 준 알지 못할 행운들, 그리고 비록 너무 늦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그 재주만은 당대의 으뜸에 속하는 제갈공명의 보좌만이 그 가품을 수 있는 희망의 전부였다.

그런 유비가 돌연한 비감에 빠져 죽음을 생각했다 한들 이상할 게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잘못되면 함께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줄 알면서도 자신을 따라오는 백성들이 준 감격은 죽음조차 가볍게 여기게 만드는 어떤 정신적인 절정감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럭저럭 유비가 탄 배는 강을 건너 남쪽 언덕에 이르렀다. 유비 는 눈물을 씻으며 강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아직 강을 건너오지 못 한 백성들이 남쪽을 바라보며 구슬피 울고 있었다.

“운장은 급히 배들을 되돌려 남은 백성들을 모두 실어 오도록 하 라.”

유비는 관우에게 그렇게 영을 내리고 자신은 나머지 장졸들과 백 성들을 이끌고 양양성으로 향했다. 달래도 듣지 않아 싸우게 된다 면, 자신이 강을 건넜다는 소문을 들은 유종이 채비를 갖추기 전에 들이치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양양성 동문에 이르자 성벽 위에는 정기가 뒤덮이듯 꽂혀 있었고 성 둘레에 판 웅덩이 가에는 사슴뿔 같은 목책이 세워져 있는 게 보 였다.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나름대로는 싸울 채비를 갖춘 듯했다. 유비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며 성안을 향해 소리쳤다.

“유종 조카는 듣게. 나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마음뿐 딴 뜻은 없네. 어서 성문을 열도록 하게.”

유종은 유비가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으나 두려워서 나오지 않았 다. 대신 채모와 장윤이 성벽 위로 나와 마치 적을 맞이하듯 군사들 을 호령해 유비에게 활을 쏘아 붙이게 했다.

그 같은 광경을 보자 유비를 믿고 따라왔던 번성, 신야 두 곳의 백 성들은 눈앞이 캄캄했다. 모두 양양성의 성벽 위를 바라보며 구슬피 울었다. 그때 성안에서 한 장수가 수백 명을 이끌고 성벽 위로 달려 나오더니 크게 소리내어 채모와 장윤을 꾸짖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 도둑놈들아. 유사군(劉使君)께서는 어질고 덕망높은 분으로 이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의지해 오셨 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감히 맞싸우려 드느냐?”

사람들이 놀라 그 장수를 보니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은 늦딴 대춧 빛이었는데 바로 의양(陽) 사람 위연(魏延)이었다.

위연은 꾸짖기를 다하고는 성문으로 달려가 한칼에 수문장을 베 어 죽였다. 그리고 성문을 열며 적교(吊橋)를 내렸다.

“유황숙께서는 얼른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드십시오. 저도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이 도적들을 죽이겠습니다.”

위연이 그렇게 소리치자 장비가 얼른 말을 박차 성안으로 들어가 려 했다. 유비가 급히 장비를 말렸다.

“가볍게 내닫지 말라. 백성들을 놀라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사이에도 위연은 거듭 유비에게 군마를 이끌고 성으로 들라고 소리쳐 권했다. 그때 성안에서 한 장수가 나는 듯 말을 달려 나오며 위연을 꾸짖었다.

“위연은 이름 없는 졸개로서 어찌 이다지도 간 큰 짓을 하는가? 여기 대장 문빙)이 나간다!”

그 소리에 노한 위연도 창을 비껴들고 말을 박차 나갔다. 두 장수 가 맞부딪치니 그들이 이끌던 졸개들도 한데 엉겨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함성이 크게 일고 사방에서 피가 튀 는 혼전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유비가 탄식했다.

“원래는 백성들을 보존하고자 왔는데 오히려 죄 없는 백성들을 해치게 되었구나. 이렇게 해가면서까지 성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구나.”

그 말을 듣고 있던 공명이 가만히 말했다.

“강릉은 형주의 요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강릉부터 먼저 손에 넣는 게 좋겠습니다.”

유비의 감정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형세를 헤아려 얻은 판단이었다.

우격다짐으로 해보았자 성을 손에 넣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한 공 명의 대답이었으나 유비는 얼른 찬동했다.

“그럽시다. 그게 꼭 내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고는 장졸과 백성들을 모두 이끌고 양양 대로로 나아가 강릉 을 향했다. 그걸 본 양양성 안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북새통을 틈타 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것처럼 유비를 따르는 백성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유비의 사람 끄는 힘이 대개 그와 같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위연은 문빙과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사시부터 미시까지 싸워도 판가름이 나지 않았으나 위연이 끌던 졸개들이 모 두 흩어져버리니 위연도 싸울 마음이 없었다. 슬몃 말을 돌려 문빙 에게서 몸을 뺀 뒤 유비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끝내 유비를 찾지 못 하자 장사태수 한현(韓)에게로 몸을 의지해 갔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없는 것은 정사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위연의 이야기를 이렇게 꾸며놓은 『연의 작자의 의도이다. 뒷날 있을 위연의 배신을 좀더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출신부터 주인을 배반하고 유비에게 온 것으로 꾸몄으리라 짐작되기는 하나, 그 때문에 생긴 유비 쪽의 무리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일껏 양양성을 치러 와놓 고 백성들이 상한다고 멀리 있는 강릉으로 가게 한 것은 아무리 유 비의 인덕을 추켜세우기 위함이라고는 해도 지나친 데가 있다.

어쨌든 그때 유비를 따르는 것은 군사들을 빼고도 백성 십만에 크 고 작은 수레가 천량)이었다. 그것도 걸머지고 등에 업은 늙은이 와 어린아이까지 더하면 백성들의 머릿수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강릉으로 가는 길 가에는 새로 쓴 지 얼마 안 되는 유표의 묘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게 된 유비는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유표의 묘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곡했다.

“욕된 아우 유비는 덕이 모자란 데다 재주까지 없어 형님께서 당 부하신 바를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죄는 오직 제한 몸에 있고 백성 들은 아무것도 걸린 게 없으니 형님의 영령이 계시다면 아무쪼록 이 가엾은 형주 백성들을 구해주십시오.”

그같이 비는 유비의 목소리가 어찌나 슬프고 절실한지 군사들이 건 백성들이건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살피러 나갔던 군사가 나는 듯 말을 달려와 급하게 알렸다.

“조조의 대군은 이미 번성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조조는 사람을 풀어 뗏목과 배를 끌어모으고는 그날로 강을 건너 우리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입을 모아 유비에게 권했다.

“강릉은 요지라 조조에 맞서 지킬 수 있는 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수만의 백성들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하루 십여 리를 가기도 바쁩니다.

이렇게 느릿느릿 가서 언제 강릉에 이르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도중에 조조의 군사가 뒤쫓아오기라도 하면 무슨 수로 막아내시겠 습니까? 아무래도 잠시 백성들을 버려두고 우리만 먼저 가서 강릉 을 지킬 방책을 세우는 게 낫겠습니다.”

사정으로 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옳은 말이었으나 유비는 차마 따르지 못했다. 오히려 장수들을 달래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무릇 큰일을 하려는 이는 반드시 사람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하 는 법이오. 이제 그 바탕 되는 사람이 내게로 몰려오는데 어찌 버리 고 갈 수 있겠소?”

유비의 처세훈이라 할까, 어쨌든 그가 천하경륜의 바탕으로 삼는 어떤 원리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 같은 말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백성들 치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공명 또한 속으로는 다급하기 그지없었으나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되자 유비의 느려빠진 행군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민심도 중요하지만 더 급한 게 당장에 등 뒤를 찌를 창칼이라 보다 못한 공 명이 유비에게 권했다.

“오래잖아 조조의 군사가 뒤쫓아올 것이니 운장을 먼저 강하로 보내 공자 유기에게 도움을 청하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속히 군사 를 일으키고 배를 내어 강릉에서 만나도록 하면 위급을 면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유비의 뜻을 억지로 꺾지 않고도 도움이 될 차선책이었다. 유비도 거기에만은 선뜻 따랐다. 곧 공자 유기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관운장에게 준 뒤 손건과 함께 군사 오백을 거느리고 강하로 가게 했다. 관운장을 떠나보낸 유비는 다시 장비를 불러 영을 내렸다. 

“익덕은 군사를 이끌고 뒤를 막으라!”

뿐만 아니었다. 조운을 불러 늙은이와 어린이를 돌보게 하고 나머 지 관원들도 각기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을 나누어 맡게 했다. 그리 고 매일 십리만 가면 쉬니 군사들을 뒤따르는 백성들이라기보다는 백성들을 돌보고 지키기 위한 군사들이라는 편이 옳았다.

한편 번성에 든 조조는 사람을 양양으로 보내 유종을 불렀다. 이 미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글을 올린 유종이었으나 막상 조조가 강 건 너에서 부르니 두려움부터 일었다. 감히 가서 조조를 만나보지 못하 고 채모와 장윤에게 대신 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떨떠 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리저리 미루기만 하고 있는데 왕위(威) 란이가 가만히 유종을 찾아보고 말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항복을 하셨고 유비 또한 달아났으니 조조는 틀림없이 마음이 느슨해져 위급에 대비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 대 장군께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시어 기병兵)을 한번 내어보 도록 하십시오. 지세가 험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갑자기 들이치면 넉 넉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장군의 위세가 천하를 떨쳐올려 비록 중원이 넓다 해도 장군의 격문 한 장으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니 결코 놓치셔서는 아니 됩니다.”

놀라운 말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전혀 안 될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유종은 먼저 겁부터 났다. 우물우물 대답해 왕위를 보낸 뒤에 채모를 불러 들은 대로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채모는 당장 왕위를 불러들이게 하고 꾸짖었다.

“너는 천명도 모르는 주제에 어찌 감히 그같이 요망스런 소리를 했느냐?”

“나라를 팔아먹은 놈아. 네 감히 나를 욕할 수 있느냐? 네놈의 생 고기를 씹지 못하는 게 다만 한스러울 뿐이다!”

왕위도 지지 않고 성난 소리로 채모를 꾸짖었다. 지난번 이규(李 珪)가 죽은 뒤로 형주에 사람다운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은 줄 알았 더니 아직 왕위가 있었다.

채모는 왕위가 자신을 욕하며 대들자 이규처럼 왕위도 죽여버리 려 했다. 그 자리에서 무사들을 불러 목 베게 하려는데 괴월이 나서 서 말렸다.

“그가 비록 천명에는 어둡다 해도 우리 형주로 보면 충신이라 할 수 있소이다. 장군께서 그를 죽였다가는 충신을 죽였다는 욕을 듣게 될 것이오.”

이에 채모는 치솟는 화를 누르며 왕위를 살려주었다. 그러나 항복 문제를 온전히 매듭 짓지 않고 있다가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장 윤과 더불어 서둘러 번성으로 갔다. 번성에 들어가 조조를 만난 채 모와 장윤은 항복한다는 유종의 뜻을 갖은 아첨과 함께 다시 전했 다. 조조가 그런 둘에게 물었다.

“형주의 군사와 말이며 곡식과 돈은 지금 얼마나 되는가?”

“마군이 오만에다 보군 십오만, 수군 팔만을 합쳐 군사는 모두 이십팔만이 됩니다. 곡식과 돈은 태반이 강릉에 있고 그 나머지는 각 처에 흩어져 있는데 또한 일 년은 넉넉히 견딜 만합니다.”

채모가 조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엮어댔다. 조조가 엷은 웃음

을 띠며 다시 물었다.

“싸움배는 얼마나 되는가? 또 원래는 누가 맡아 거느렸는가?”

“크고 작은 배를 합쳐 모두 칠천 척이 좀 넘는데 제가 맡아 거느 렸습니다.”

이번에도 채모는 말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흡 족한 듯 웃고는 채모를 진남후(鎭南侯)에 수군대도독으로 삼고, 장 윤은 조순후(順侯)에 수군부도독을 삼았다. 뜻밖에도 조조로부터 큰 벼슬을 얻자 두 사람은 몹시 기뻤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조조 에게 절하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조조는 그런 채모와 장윤에게 덧붙 여 일렀다.

“유경승은 이미 죽고 그 아들이 이렇게 와 항복을 했으니 나는 마 땅히 천자께 고해 그로 하여금 영구히 형주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겠 네. 그렇게 전하게나.”

채모와 장윤에게 더욱 기쁜 소식이었다. 자기들만 높은 벼슬을 받 고 돌아가면 반드시 의심을 받게 될 것이지만, 주인까지 원래의 땅 을 보장받게 되었으니 그 짐까지 던 셈이었다.

채모와 장윤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러난 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채모와 장윤은 아첨하는 무리입니다. 그런데도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높은 벼슬을 내리시고 다시 수군까지 도맡아 거느리게 하셨습니까.” 

조조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겠소? 하지만 나를 따라온 북쪽 사람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오. 장차 강남을 평정하려면 수없이 겪어야 할 수전인데 큰일이 아니오? 그래서 잠시 그 두 사람을 쓰 려는 것이오. 그들이 맡은 일을 다한 뒤의 처리는 따로 생각해둔 게 있소.”

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턱없이 기뻐하며 형주로 돌아간 채모와 장 윤은 갖은 말로 조조의 후대를 전했다. 그중에서도 유종을 장군으로 삼아 영구히 형주를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말을 무엇보다 앞세웠음 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기쁘기는 유종도 마찬가지였다. 항복은 해도 조조가 어떻게 대우 할지 몰라 불안해하던 그로서는 조조의 그 같은 보장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종은 다음 날로 인수(印)와 병부(兵符)를 싸들고 어 머니 채부인과 함께 강을 건넜다. 스스로 조조를 찾아보고 그것들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조조는 좋은 말로 유종과 채부인을 어루달랜 뒤 곧 장졸들을 이 끌고 양양으로 갔다. 군사들을 성 밖에 머물게 한 채 약간의 호위하 는 장졸들만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서는 조조를 채모와 장윤을 비롯 한 양양의 백성들은 향을 사르고 절하며 맞아들였다.

갖은 좋은 말로 백성들을 위무하며 성안으로 들어간 조조는 관부 에 자리 잡고 앉아 형주의 관리들을 보았다. 조조가 가장 먼저 부른 것은 괴월이었다. 그 재주를 들어서 알고 있는 조조는 괴월을 가까

이 오게 한 뒤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기쁜 것은 형주를 얻어서가 아니라 이도(異度, 괴월의 자)를 얻은 까닭이오. 부디 내게도 그 재주를 아끼지 마시오.”

그리고 괴월을 강릉 태수에 번성후(樊城侯)로 삼았다. 처음 항복 을 권한 부손傅)이나 그 논의를 매듭지은 왕찬(粲)도 조조는 잊 지 않았다. 모두 관내후(關內侯)로 봉해 그 공에 보답했다.

그런데 정작 엉뚱하게 된 것은 그들의 주인인 유종의 관작이었다. 채모와 장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유종에게 난데없이 청주자사 州刺史)를 내린 것이었다. 그것도 그날로 길을 떠나 청주로 가라는 엄명과 함께였다.

유종이 크게 놀라 사양했다.

“저는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부모가 살던 땅을 지키 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어제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이니 그 말을 듣고 청주로 갔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사양한 것이었다. 조조가 차갑게 대답했다.

“청주는 천자가 계신 도성에 가까운 곳이네. 자네를 그리로 보내 는 것은 조정에 딸린 벼슬아치로 삼으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형 주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뜻도 있네. 여기 있으면 자네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을 것이야.”

그래도 유종은 두번 세번 사양했으나 조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 았다.

이에 유종은 하는 수 없이 그 어머니 채부인과 함께 청주로 떠났 다. 그들 모자를 호위하며 함께 간 것은 지난날 그의 장수였던 왕위 뿐이었고 나머지 관원들은 강어귀까지만 전송한 뒤 모두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 모자가 아직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때였다. 조조가 가 만히 우금을 불러 당부했다.

“그대는 경기(약간을 이끌고 유종 모자를 뒤쫓아 가서 죽여 버려라. 후환을 끊어버리려 함이다.”

이에 우금은 곧 군사들을 모아 유종을 뒤쫓았다. 유종 일행은 오 래잖아 우금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우금이 나서더니 유종 모자 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승상의 명을 받들어 너희를 죽이러 왔다. 어서 목을 바쳐라!”

그 소리에 놀란 채부인은 유종을 껴안고 통곡했다. 유표의 둘째아 들로 머물러 있었던들 그같이 죽지는 않았을 유종이었다. 그런데 여 자의 허영과 투기가 겹쳐 억지로 형주의 주인을 만들었다가 끝내는 한번 꽃피워 보지도 못한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게 만들어버리고 말 았다. 수십 년 싸움터를 누비며 사람 죽이기를 일삼아 온 우금이 그 런 채부인의 어리석은 눈물에 마음이 흔들릴 리 없었다. 군사들을 호령해 유종 모자에게 손쓰기를 재촉했다. 홀로 옛 주인을 뒤따르며 호위하던 왕위가 노해 칼을 빼들고 맞섰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수 많은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다가 끝내는 창칼 아래서 외로운 충신의 넋으로 사라졌다.

왕위를 죽인 군사들은 뒤이어 유종과 채부인도 죽였다. 우금이 돌아가 조조에게 그 일을 알리니 조조는 무거운 상을 내려 우금의 공을 치하했다.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틈 있을 때마다 조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연의 가운데서도 가장 악의에 찬 부분 중의 하나이다. 정사의 기록 어디에도 조조가 유종과 채부인을 그토록 참 혹하게 죽였다는 말은 없다.

오히려 남아 있어 볼 수 있는 것은, 유종을 생각이 높고 뜻이 맑으 [心志]앎이 깊고 헤아림이 넓으며[智深]영화를 가볍게 여기고 의를 무겁게 본다[輕榮重義]는 등으로 추켜세운 뒤 그를 간 의대부(諫議) 동참군사(同參軍事)로 삼아주기를 천자께 비는 조 조의 표문뿐이다. 아마도 『연의』를 지은이는 결과적으로 유비의 자 립을 더디게 만든 유종과 일평생 유비를 괴롭힌 조조에 대한 정신적 인 앙갚음을 그 참혹한 얘기를 꾸며냄으로써 대신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로 조조의 삶 군데군데에서 섬뜩한 빛을 뿜 는 비정과 잔혹의 측면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연의』의 지은이가 미 처 조조를 깎아내리는 데 써먹지 못한 정사의 기록도 있기 때문이 다. 그중에서도 조조가 다른 형주 사람 주불의(周不疑)를 죽인 일은 그것만으로도 유종의 일에 갈음할 만하다.

주불의는 영릉(陵) 사람으로 자를 원직(直)이라 했는데 어려 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그런데 그 재주를 탐낸 조조가 주불 의를 사위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여 먼저 조조의 노여움을 샀다. 또 조조에게는 창서(舒)란 아들이 있어 재주가 또한 주불의 와 짝이 될 만했으나 그 아들이 죽자 조조는 주불의가 살아 있는 것을 더욱 시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조가 그를 죽이려 하니 큰아

들 조비가 그걸 알고 말렸다.

“불의는 하늘이 낸 재주이니 죽여서는 안 됩니다. 살려두어 이 다음에 제가 쓰도록 해주십시오.”

그 말에 조조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놈의 재주는 네 따위가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고는 기어이 자객을 보내 주불의를 죽여버렸다.


얘기가 빗나갔지만 어쨌든 유종을 죽여 후환을 없이 한 조조는 다시 사람을 융중으로 보내 제갈량의 가솔들을 잡아오게 했다. 그들 을 인질 삼아 전에 서서를 불러들였던 것처럼 제갈량을 불러보고 안 되면 그들을 죽여 화풀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군사들이 융중으로 가보니 제갈량의 가솔들은 이미 어디 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리 그럴 줄 안 제갈량이 사람을 보내 삼강 안 깊숙한 곳으로 가솔들을 옮겨버린 까닭이었다. 조조로 보면 몹시 한스러운 일이었다.

양양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순유가 조조를 깨우쳐주듯 말했다.

“강릉은 형, 양 고을에서도 매우 중요한 땅으로 곡식과 돈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유비가 그 땅을 근거로 삼게 된다면 오래잖아 급한 난리가 일 것입니다.”

“내가 어찌 그걸 잊고 있겠나?”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조조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내 양양성 의 옛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그중에 하나를 뽑아 길잡이로 삼기 위해서였다.

조조의 부름을 받자 양양의 옛 장수들이 모두 모였으나 오직 문빙(聘)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조가 사람을 시켜 막 찾으 러 보내려 할 때에야 문빙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대는 왜 늦었는가?”

조조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주인으로 하여금 그 땅을 지키게 하지 못했으 니 실로 부끄럽고 슬픕니다. 무슨 낯으로 일찍 와서 승상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문빙은 그렇게 대답하고 문득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진심에서

우러난 탄식과 눈물이었다.

“참으로 충신이로구나!”

조조는 그렇게 감탄하며 문빙을 강하 태수로 삼음과 아울러 관내 후에 봉했다. 그러고는 한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앞서서 대군이 갈 길을 열라 했다. 그때 유비를 살피러 갔던 군사가 말을 달려와 알 렸다.

“유비는 백성들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하루 종일 십여 리밖에 나 아가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간 길이랬자 겨우 삼백 리를 조금 넘었 을 뿐입니다.”

유비가 이미 가도 멀리 갔으리라 여겼던 조조는 한편 반가우면서 도 한편으로는 새삼 유비가 두렵게 여겨졌다.

‘나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해 제도를 고치고 세금을 덜었다. 무언가를 베풀려고 애쓰고 도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백성들은 고마워하기는 할지언정 나를 좋아하고 따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럼으 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려[買]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오랜 경험으 로 결국 그러한 사고 팔기에서 보다 큰 이득을 보는 것은 사려고 애 쓰는 쪽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비는 다르다. 나는 한번도 그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백 성들에게 베풀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제도를 고쳐 백성들을 편하게 할 만한 안목도 세금을 줄여 그들의 짐을 덜 어줄 만한 재력도 없었다. 그가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껏 원래보 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이다.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부 양을 받고 도움을 입는 것은 언제나 그쪽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 은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는 민심을 사는 게 아니라 얻고 있다……. 나는 처음 그것이 그의 오랜 곤궁과 불운에 대한 백성들의 단순 한 동정이거나 그가 의지하고 있는 한실의 낡은 권위가 발하는 후광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사고팔았던 사람들의 사이 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그 주고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어떤 이득을 위해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 했기 때문에 더 큰 이득에 내몰 리면 그들을 팔아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이득을 주고 사지 않았기에 이득으로 팔아버릴 수가 없다.

내가 유비라면 처음부터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는 일이 없었을 것 이고, 그들이 굳이 따라오더라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지금쯤은 강릉성에 들어 성벽을 높이고 녹각(鹿角)을 둘러세워 다가오는 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비는 코앞에 닥친 싸움에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그들 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직 길위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강릉성을 얻고자 하고 있다.

물론 나도 그와 같은 치세의 원리가 있으며, 때로 그것은 내 자신 이 믿는 원리보다 더 효과적임을 안다. 어쩌면 시절이 지금과 같지 만 않았더라도 나 또한 그 원리를 따랐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은 난세다. 어지럽고 들떠 있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성 하나를 얻는 것보다는 몇 만의 군사를 몰아 땅 위의 성 열 개를 얻는 게 훨씬 쉽 다. 이제 나의 철기(鐵騎)가 태풍처럼 휘몰아가면 그대가 백성들의 마음속에 쌓고 있는 성은 먼지가 되어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유비, 새삼 그대가 두려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조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마음을 다잡아 먹고 거 느린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대들은 각기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 중에서 가장 날래고 굳센 철기만을 골라 뽑아 오천을 만들라. 그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하루 안에 유비를 뒤쫓아 잡게 한다. 나는 남은 대군을 이 끌고 그 뒤를 이어 나아가리라.”

조조의 그 같은 명이 떨어지자 장수들은 곧 거기 따랐다. 오래잖아 가리고 가려 뽑은 오천의 철기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남쪽을 향 해태풍처럼 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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