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화 : 슬기와 슬기, 꾀와 꾀
슬기와 슬기, 꾀와 꾀
“이는 수군의 묘체(妙體)를 깊이 아는 자가 차린 것이다.”
주유는 이윽고 놀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지금 조조의 수군을 다스리는 제독은 누구인가?”
“채모와 장윤입니다.”
곁에 있던 졸개 하나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주유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오래 강동에 살아 수전을 깊이 익힌 자들이다. 계책을 써서 그 둘을 반드시 먼저 없애도록 해야겠다. 조조를 깨뜨 리는 일은 그 둘을 없앤 뒤라야 될 것이다.’
그러면서 연신 채모와 장윤이 펼쳐둔 수채(水寨)를 엿보고 있는데, 조조의 군사들이 그것을 알고 조조에게 나는 듯 달려가 알렸다.
“동오의 주유가 우리 진채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조조는 급히 명을 내려 배를 내고 주유를 사로잡으려 했 다. 주유는 조조의 수채 안에서 기치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조조의 속을 짐작했다. 급히 영을 내려 닻을 거두어 올리게 한 뒤 사 방의 노와 삿대를 모조리 젓게 하여 자기 진채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조조는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겨우 배가 수채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주유가 탄 누선(樓)이 수십 리나 달아난 뒤였다. 따라가봤자 잡을 길이 없다고 본 수군들이 조조에게 돌아가 그대로 알리자 조조 가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제는 한바탕 싸움에 져서 우리 군사의 예기가 적지 않이 꺾였 는데 이제는 또 주유가 우리 진채를 엿보고 달아났소. 나는 어떤 계 책으로 적을 깨뜨려야겠소?”
그때 홀연 장하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주유와 함께 학문을 익히고 가까이 사귀어왔 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강동으로 보내주십시오. 가서 저의 세치썩 지 않은 혀로 주유를 달래 승상께 항복하러 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보니 말한 사람은 구강 사람 장간이 었다. 자를 자익(子翼)이라 쓰는데 그런 대로 재주를 쓸 만해 막빈으 로 함께 데리고 있었다. 조조가 장간에게 물었다.
“자익은 주유와 교분이 그렇게 두터운가?”
“그 일은 승상께서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한번 강 저편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입니다.”
장간이 자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꼭 허풍을 떨고 있는 것 같지만도 않은 데다 설령 그의 말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해로울 것도 없 는 터라 조조는 한번 그를 써보고 싶어졌다. 은근히 기대하는 투로 장간에게 물었다.
“그대가 주유를 찾아보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 무엇인가?”
“심부름할 아이 녀석 하나에 배를 저을 사공 둘만 딸려주신다면 그뿐,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더욱 기뻤다. 일이 안 된다고 해도 들인 물자나 수 고가 없으니 낭패될 것은 없고 잘된다면 그야말로 미끼도 없이 잉어 를 낚는 격이었다. 조조는 곧 술자리를 열어 장간을 격려한 뒤 강동 으로 보냈다.
장간은 갈건에 무명 도포 차림으로 작은 배 하나를 얻어타고 강 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잖아 주유의 수채가 나타났다. 장간은 수 채를 지키는 군사를 불러 주유에게 알리게 했다.
“옛 친구 장간이 도독을 뵈러 왔다고 합니다.”
그때 주유는 군막 안에서 여럿과 더불어 앞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장간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 빙그레 웃으며 곁에 있던 장수들에게 말 했다.
“나를 달래러 세객이 왔구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장수들이 할 일을 이것저것 일러주었다. 주유는 장간을 보지 않고도 조조에게서 온 사람이란 걸 알아차리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여러 장수들이 명을 받고 물러나자 주유는 비로소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의관을 가다듬고 수백의 종자를 딸렸는데 그 수백 명이 모두 비단옷에 화려하게 꾸민 모자를 쓰고 있어 행렬이 여간 호사스럽 지 않았다. 주유 자신도 그 어느 때보다 위엄이 돋보이는 차림을 했다. 장간은 푸른 옷을 입은 아이 하나를 딸린 채 고개를 젖히고 거침 없이 들어섰다. 주유가 절하며 마중하자 장간이 말했다.
“공근은 그간 별고 없었는가?”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다는 투의 스스럼없는 목소리였다. 주유 가 한껏 위엄을 갖춰 그 말을 받았다.
“자익이 몹시 고생하며 지낸다는 소리는 듣고 있었네. 멀리 강호 를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는 조씨를 위해 나를 달래러 왔는가?”
주유가 앞질러 그가 온 까닭을 헤아려 말하자 장간은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시치미를 떼며 부인했다.
“나는 자네를 오래 보지 못했기에 특별히 와서 만나 옛정을 풀어 보려 한 것인데 자네는 어째서 나를 세객이라고 의심하는가?”
꽤나 섭섭하다는 투였다. 그제야 주유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비록 사광(師, 춘추시대의 이름난 악사)의 총명에는 미치지 못하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가락의 어울림과 멋을 짐작할 줄은 아네. 그럼 들어가세나.”
“자네가 옛 친구를 이렇게 대할 줄은 몰랐네.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듯하이.”
주유가 의심을 품는 걸 보고 장간이 짐짓 뻗대었다. 주유는 그런 장간의 팔을 끌며 한층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혹시 자네가 조조의 세객이 되어 온 게 아닌가 두려워 그랬 을 뿐이네. 이미 그런 뜻으로 온 게 아니라면 구태여 그렇게 빨리 갈 건 무언가? 안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밀린 얘기라도 나누어보세.”
그러자 장간도 못 이긴 체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 예가 끝난 뒤 서로 자리를 잡고 앉자 주유가 명을 내려 사람들을 불 렀다. 강동의 빼어난 인물들을 모두 장간과 만나게 하려는 뜻이라고 는 하나 그 뒤에는 이미 거꾸로 장간을 이용할 계책이 숨어 있었다. 오래잖아 부름을 받은 무장들이 비단옷을 받쳐 입고 모여들었다. 아랫자리에 모인 편장이나 비장 같은 장교들도 은투구를 갖춰 쓰고 줄을 지어 갈라섰다.
주유는 그들을 모두 장간과 보게 한 뒤 양쪽으로 나누어 앉게 하 고 크게 술자리를 벌였다. 군중에서 싸움에 이겼을 때 쓰는 씩씩한 음을 뜯게 하고 거기에 맞춰 술잔을 돌리게 한 다음 여럿에게 큰 소 리로 말했다.
“여기 이분은 나와 함께 학문을 배운 옛 친구외다. 비록 강북에서 왔으나 결코 조조의 세객은 아니니 부디 여러분은 의심치 마시오.”
그런 다음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태사자에게 주며 문득 엄 한 표정이 되었다.
“공은 이 칼을 받아 술자리를 보살피도록 하시오. 바로 감주(酒) 가 되는 것이오. 오늘 이 자리는 다만 친구 간의 정분을 나누는 것일 뿐이니 조조나 동오의 군사에 대한 얘기를 입에 담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목을 베시오!”
그러자 태사자는 명받은 대로 주유의 칼을 받아 빼든 채 윗자리에 가 앉았다. 그 엄중한 모습이 명을 어긴 자는 얼마든지 목을 칠 것 같았다. 때를 보아 주유를 달래볼 생각이던 장간은 그 기세에 눌 려 감히 여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유가 원래 남의 달램이나 꾐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나 속에 품은 생각이 있어 그렇게 장간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갑작스런 엄명 때문에 술자리가 절로 무거워지자 주유가 다시 여 럿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군을 거느리게 된 뒤로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옛 친구를 만났고 또 그를 의심할 까닭도 없으니 마땅 히 한번 취하리라.”
그러고는 크게 웃으며 거푸 잔을 비웠다. 주유가 그렇게 앞장서 흥을 돋우자 무겁던 술자리는 곧 풀리고 모인 사람들도 흥겹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술이 반쯤 취하자 주유는 장간의 손을 끌고 장막 밖으로 나갔다. 허물없는 옛 친구 사이로 돌아간 듯한 다정함이었다. 밖에는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감춘 군사들이 창칼을 짚고 늘어서 있었다.
주유는 짐짓 그런 군사들 사이로 한동안 장간을 데리고 다니다가 물었다.
“우리 군사가 씩씩하고 날래 보이지 않는가?”
“정말로 범이나 곰 같은 군사들일세.”
장간이 그렇게 대꾸했다.
주유는 또 장간을 데리고 군막 뒤에 있는 말먹이와 군량더미 있는 데로 데려갔다. 말먹이 풀과 군사를 먹일 곡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주유가 다시 장간에게 말했다.
“이게 우리의 마초와 군량일세. 이만하면 넉넉하지 않은가?”
“과연 그러하네. 동오는 군사가 날래고 양식은 넉넉하다더니 정말 로 헛되게 이름이 난 게 아닌 모양일세.”
장간은 마지못해 한 번 더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주유는 거 짓으로 취한 체하며 크게 웃고 말했다.
“이 주유와 자익 자네가 함께 학문을 익힐 때 어찌 오늘 같은 날 이 있을까를 생각이나 했겠나?”
드러내놓고 자신의 벼슬과 지위를 자랑하는 말투였다. 장간은 마 음속으로 아니꼬운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좋게 대답했다.
“자네같이 재주가 높은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나도 지나칠 게 없 네. 당연히 이쯤은 되어야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유를 달래볼 때가 오기만을 노렸다. 그 러나 주유는 끝내 틈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취한 체 떠들어대면 서 장간의 입을 앞질러 막아버렸다.
“대장부가 세상을 사는 데 나를 알아주는 주인을 얻는다는 게 어 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바로 그런 주인을 얻어 섬기 고 있네. 겉으로는 군신의 의리에 묶여 있으면서도 안으로는 골육의 정으로 맺어져 있고, 말을 하면 반드시 지키며 계책을 내면 꼭 그대 로 따를 뿐만 아니라 화와 복을 함께하는 분이니 그렇지 않은가? 설 령 소진, 장의, 육가(陸賈), 생(生)처럼 입은 흐르는 물 같고 혀는 날선 칼 같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어찌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크게 껄껄거리니 장간이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다만
얼굴이 흙색이 되어 섣불리 주유를 달래려 들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다.
주유는 제 할 말만 다하고는 다시 장간을 데리고 장막으로 돌아 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신다기보다는 그 대로 퍼붓는다는 말이 알맞을 정도로 잔을 비워대는 것이었다. 그러 다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둘러앉은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기세 올리는 소리만 해댔다.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강동의 영걸들일세. 오늘 이렇게 한자 리에 모였으니 이 모임은 실로 군영회(群英會)라 이름하는 게 마땅 할 것이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날이 저물어 등불을 밝힐 때가 되자 주유는 몸소 일어나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도 스스로 지은 노 래를 곁들인 기고만장한 칼춤이었다.
대장부 세상을 삶이여 丈夫處世兮
공명을 세우려 함일세. 立功名
공명을 이룸이여 立功名兮
평생의 위로가 되리. 慰平生
평생의 위로가 됨이여 慰平生兮
내 장차 취하리로다. 吾將醉
취하여 어쩌려는가 吾將醉兮
미친 듯 노래 부르리. 發狂吟
주유가 그 노래와 함께 칼춤을 마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흥겹게 웃었다.
마음속의 말을 한마디도 꺼내보지 못하고 애매한 술만 축내고 있던 장간은 밤이 깊어지자 마침내 사양의 말을 꺼냈다.
“나는 그만 마시겠네. 술기운을 이겨낼 수 없네그려.”
그러자 주유도 굳이 마시기를 고집하지 않고 술자리를 끝냈다. 모 든 장수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주유가 불쑥 말했다.
“내가 오래 자네와 한 침상에서 자보지 못했네. 오늘 밤은 함께 자세. 옛날처럼 발바닥을 맞대고 자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동오의 대도독답지 않게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듯한 말투였다. 물론 거짓으로 몹시 취한 체하고 있는 것이지만 장간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못 이긴 체 주유가 끄는 대로 한 장막 안에 들었다.
자기 처소로 쓰는 장막으로 돌아온 주유는 옷을 입은 채로 쓰러 지더니 과하게 마신 술을 토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만취한 사람의 작태였다.
주유는 곧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장간은 제대로 잠 이 올 리 없었다. 조조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쳐놓고 빈손으로 돌아 가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장간이 베개를 벤 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있는 데 밤은 어느새 깊어 이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장간 은 잠이 오지 않아 가만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보았다.
잘 때도 끄지 않는 작은 등불 아래 우레같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주유가 보이고 그 안쪽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탁자 위를 보니 문서들이 더미져 쌓여 있었다. 견물생심이라던가, 장간은 문득 좋지 못한 마음이 들었다. 주유가 대도독이니만큼 그의 장막에 있는 문서라면 하나같이 싸움에 귀중한 기밀일 터였다. 만일 그 기밀을 훔쳐갈 수 있다면 주유를 달래어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조조를 볼 낯 은 있게 될 것 같았다.
장간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탁자 있는 곳으로 갔다. 쌓여 있는 문서들은 대개 여기저기로 오고 간 편지들이었다. 희미한 등불에 지해 장간이 몰래 그것들을 훔쳐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확 띄는 편지 한 통이 나왔다.
‘채모와 장윤이 삼가 올립니다’란 글이 겉봉에 씌어진 것이었다. 장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만히 안에 든 글을 꺼내 읽어보 았다.
‘저희들은 비록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나 벼슬과 봉록을 탐낸 것이 아니라 형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북군(북 쪽에서 내려온 조조의 군대)의 진채 안에서도 이미 북군을 지치게 만드 는 일을 하고 있거니와, 되도록이면 빨리 조조의 목을 잘라 휘하에 바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래잖아 내가 보낸 사람이 이를 것인즉 곧 소식 주시고 만에 하나라도 의심치 마십시오. 먼저 이렇게 답장 을 대신합니다.”
글로 보아서는 어김없이 채모와 장윤이 동오와 내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큰일이라 여겨 장간은 얼른 그 편지를 옷 속에 감추었다. 조조에게 돌아갔을 때 증거로 내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다음 장간이 다시 다른 글들을 살펴보려 하는데 문득 주유가 몸 을 뒤척였다. 장간은 혹시라도 주유가 깰까 두려워 얼른 등불을 끄 고 자리에 누웠다. 주유는 깨어나는 대신 우물우물 잠꼬대를 했다.
“자익…… 내 며칠 안으로 자네에게 조조 그 역적 놈의… 목을 보여줌세.”
장간은 혹시 주유가 잠결에라도 이상하게 여길까 봐 어물쩍 대꾸 했다. 그러자 주유가 다시 중얼거렸다.
“자익, 우선 가서 기다려라…………… 내 꼭 조조의 목을…… 자네에게…………… 보여주겠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장간이 이번에는 얼버무리는 대꾸 대신 슬쩍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주유는 그새 잠에 빠졌는지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장간은 여전히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좀 전과는 달리 자기가 안 사실이 하도 엄청나 그걸 곱씹어 생각하느라 그리된 것이었다. 어느새 사경이 되고 날이 밝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떤 사 람이 장막 안으로 들어와 큰 소리로 물었다.
“도독께서는 이제 깨어나셨습니까?”
몇 번 그렇게 묻자 주유도 꿈속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는 것 같 았다. 문득 장막 안을 둘러보더니 방금 들어온 사람에게 물었다.
“저기 침상에서 자고 있는 이는 누구냐?”
“도독께서는 장간이란 분을 데리고 함께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벌써 잊으셨습니까?”
물음을 받은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 주유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주유는 갑자기 뉘우침과 걱정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평소에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데 어제는 취해 실수를 저질렀구나. 내가 이것저것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다시 상대에게 물었다.
“한데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강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상대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주유가 펄쩍 뛰며 나무랐다.
“목소리를 낮추어라!”
그래 놓고도 못 미더운지 장간 쪽을 보며 나직이 불렀다.
“여보게 자익, 여보게 자익.”
아마도 장간이 자고 있나 자고 있지 않나를 확인해보려는 것 같았다.
장간은 강북에서 왔다는 사람이 바로 채모가 편지에서 보내겠다 고 말한 그 사람임을 짐작하고 짐짓 깊이 잠든 체하며 주유의 부름 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간이 대답하지 않자 주유는 좀 마음이 놓이 는지 더는 찾아온 군사를 나무라지 않고 장막 밖으로 함께 나갔다. 그리고 무어라 은밀한 얘기를 나누는데 장간이 엿들어보니 간간 알 아들을 만했다. 장간이 온 정신을 두 귀에 모으고 있는데 바깥에서 는 문득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어 주유에게 말했다.
“채(), 장(張) 두 도독께서 말씀하시기를 급하게는 손을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유가 어떤 눈짓을 보냈는지 곧 목소리가 낮아져 뒤엣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채, 장 두 도독이란 채모와 장윤을 가리키는 것이고 손을 쓴다는 것은 조조를 죽이는 일이라 짐작한 장간 은 한층 놀랐다. 간밤에 읽을 때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기연가미 연가한 데가 있던 채모와 장윤의 편지가 이제는 더 의심을 할 나위 가 없어졌다.
주유는 한참 뒤에야 장막 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걱정이 되는지 한 번 더 장간을 불렀다.
“자익, 자나?”
장간은 이번에도 이불을 뒤집어쓰며 깊이 잠든 체 대답하지 않았 다. 주유는 몇 번 더 장간을 불러보다가 정말로 잠들어 있는 것으로 알았던지 마음 놓고 자기 침상으로 돌아갔다. 옷 벗는 기척에 이어 다시 주유의 코고는 소리가 높아갔다. 장간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 했다.
‘주유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다. 날이 밝은 뒤 내가 감춘 편 지를 찾아보고 없으면 반드시 내 몸을 뒤질 것이다. 그리되면 큰일이다……..’
장간은 주유 몰래 몸을 빼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어느새 오경 이 되어 날이 훤히 밝아오는 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여보게 공근, 여보게 공근.”
이번에는 장간이 주유를 불러 그가 잠들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보 았다. 다행히도 주유는 깊이 잠들었는지 장간의 부름에 대답이 없 었다. 장간은 가만히 관을 받쳐 쓰고 발걸음을 죽여 장막을 빠져나갔다.
데려온 아이놈을 찾은 장간은 곧 종종걸음을 쳐 진문을 나섰다.
진문을 지키던 군사가 수상쩍다는 눈길로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렇게 일찍 어디로 가십니까?”
장간은 속이 뜨끔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둘러댔다.
“나같이 한가로운 사람이 여기 오래 머물렀다가는 도독의 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아 두렵네. 이렇게 떠나 공근이 자기 일에 힘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어야지 않겠나?”
그러자 그 군사도 더는 장간을 붙들어두려 하지 않았다.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으로 자신이 타고 온 배에 이 른 장간은 곧 사공을 재촉해 나는 듯 배를 저었다. 그리고 조조의 수 채로 돌아가기 바쁘게 조조를 보러 들어갔다.
“자익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장간이 약간 겸연쩍은 듯 대답했다.
“주유는 생각이 넓고 깊어 말로는 그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일은 제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웃음거리만 된 게 아닌가?”
조조가 문득 노여운 얼굴로 말했다. 떠날 때 장간이 치던 큰소리 가 갑자기 밉살맞게 떠오른 듯했다. 그러나 장간은 조금도 움츠러드 는 기색 없이 말을 받았다.
“비록 주유를 달래 항복해 오게 만들지는 못했으나 승상께는 그 일에 못지않게 큰일인 것을 하나 들고 돌아왔습니다. 바라건대 곁에 사람들을 잠시만 물려주십시오.”
눈치 빠른 조조가 장간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곧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장간과 단둘이서만 마주앉았다.
“그래, 큰일이란 게 무엇인가?”
조조가 장간에게 다가들 듯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간은 품 속에 넣어 왔던 편지를 꺼내 조조에게 바치고 이어 주유의 장막에서 보고 들은 일을 모두 빠짐없이 일러바쳤다.
“이 두 도적놈이 어찌 이토록 무례하단 말이냐!”
편지를 다 읽고 난 조조는 꼭뒤까지 성이 올라 소리쳤다. 그리고 곧 사람을 보내 채모와 장윤을 불러들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채모와 장윤이 바로 그 꼴이었다. 아침 밥 잘 먹고 있다 영문 모를 부름을 받고 조조 앞에 선 두 사람에게 조조가 느닷없이 내뱉었다.
“나는 너희 두 사람을 앞세워 당장 군사를 내려 한다. 어떠냐?”
“아직 군사들이 수전에 익숙할 만큼 조련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 볍게 군사를 내서는 아니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모가 나서서 그렇게 말렸다. 그러자 조조가 돌 연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빈정댔다.
“군사가 잘 조련되는 날에는 내 목을 먼저 주유에게 갖다 바치 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 그 같은 조조의 말뜻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무 언가 일이 자기들에게 나쁘게 꼬여들고 있다는 느낌에 놀라고 두려 워하면서도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조는 그것을 자기들이 한 짓이 들킨 두 사람의 당연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 다시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무사들을 향해 매섭게 영을 내렸다.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 두 놈을 끌어내다 목 베어라!”
두 사람은 그제야 애걸하며 까닭을 물었으나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조는 두 사람이 시치미를 떼며 뻗대는 게 더 밉다는 듯 한 층 매섭게 무사들을 재촉했다.
이윽고 무사들에게 끌려나간 채모와 장윤은 두 덩이의 머리만으 로 조조에게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의 목이 조조의 발 아래 바쳐 졌을 때였다. 문득 조조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정말로 죄 없이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 다. 조조는 잠시 그들의 지난 행적과 장간에게서 들은 말들을 돌이 키며 하나하나 맞춰보았다.
‘아뿔싸, 내가 적의 계략에 빠졌구나!’
이윽고 조조는 자기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죽은 목숨을 살려낼 길은 없었다.
조조가 성도 못 내고 속으로만 앓고 있는데, 여러 장수들이 찾아와 물었다.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채모와 장윤을 죽였습니까?”
조조는 차마 자기가 주유의 계략에 빠져 그 두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걸 밝힐 수 없었다. 편지나 장간의 말은 쏙 빼고 둘러댔다
“그 둘은 군법을 태만히 하여 내가 목 베었소.”
그래도 장수들은 채모와 장윤이 수전에 밝던 것을 떠올리고 아까 워해 마지않았다. 조조는 자기 장수들 중에서 모개(毛价)와 우금을 수군 도독으로 세워 채모와 장윤을 대신하기는 했으나 아깝고 한스럽기는 다른 장수들과 다름이 없었다.
조조가 채모와 장윤을 죽인 일은 세작들에 의해 강 건너 동오에 도 전해졌다. 누구보다도 그 소식에 기뻐한 것은 주유였다.
“내가 걱정하던 것은 바로 그 둘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둘이 모두 죽어 없어졌다니 달리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주유가 껄껄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노숙이 맞장구를 쳤다.
“도독께서 군사를 다루는 솜씨가 이 같은데 조조 깨칠 일을 무엇 때문에 근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유는 문득 무얼 생각했는지 얼굴이 흐려지며 노숙에게 말했다.
“내가 헤아리기에 다른 장수들은 이번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나 오직 제갈량만은 다를 것이오. 그는 식견이 나보다 나으니, 만약 내가 그를 상대로 이번 일을 꾸몄다면 결코 속여낼 수 없었을 것 같소이다. 자경께서는 이 일을 넌지시 제갈량에게 비추어 말해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한번 알아봐주시오. 되도록이면 빨리 알아봐 주기 바라오.”
아무래도 공명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노숙은 주유의 그 같은 당 부를 받자 자신도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주유의 말이 떨어지기 바 쁘게 공명이 있는 배로 달려갔다.
공명은 노숙을 반갑게 배 안으로 맞아들였다. 주인과 손님이 각기 자리를 정해 앉은 뒤 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일 군무에 바빠 오래 가르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실은 이 양 또한 도독께 기쁜 일이 있었는 줄 알면서 아직 경하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공명이 대뜸 그렇게 받았다. 공명이 벌써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 아 가슴이 섬뜩하면서도 노숙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기쁜 일이라뇨? 무엇이 기쁜 일입니까?”
“공근께서 선생을 시켜 제가 그 기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떠보 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실로 경하할 만한 기쁜 일입니다.”
제갈공명은 마치 주유와 노숙의 얘기를 곁에서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했다. 노숙은 놀라 얼굴빛이 다 변했다.
“놀랍습니다. 선생께선 어떻게 그 일을 아셨습니까?”
“도독께서는 장간을 데리고 놀듯 하며 계책을 잘 베푸셨습니다. 조조는 한때 속았어도 곧 그 일이 도독의 계책에 떨어져 그리된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만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뿐입니다. 어 쨌든 이제 채모와 장윤 두 사람은 이미 죽고 강동은 걱정거리가 없 어졌으니 어찌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듣기로 조조는 모개와 우금을 수군 도독으로 삼아 채모와 장윤을 대신하게 했다고 합니 다. 이제 그 둘의 손안에서 조조의 많은 수군들이 목숨을 잃게 되겠 지요.”
공명이 차근차근 그렇게 말하자 노숙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해 공명과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로 시 간을 보내다가 슬며시 일어섰다. 공명이 그런 노숙을 바래다주며 당 부했다.
“바라건대 자경께서는 공근에게 제가 이 일을 알고 있더라고 일러주지 마십시오. 공근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 또다시 나를 해칠 궁리를 낼까 두렵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노숙은 그같이 대답하고 떠났으나 주유를 만나자 어쩔 수가 없었 다. 주유가 묻는 대로 공명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그대로 전해버리 고 말았다. 짐작은 했지만 공명이 그토록 훤히 알고 있다는 걸 알자 주유는 크게 놀라 말했다.
“그 사람은 아무래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소. 반드시 목을 베 어야겠소이다.”
“아니 됩니다. 만약 공명을 죽인다면 도독은 조조의 비웃음을 면 키 어려울 것입니다.”
노숙이 주유의 별난 자존심에 기대 그렇게 말렸다. 하지만 주유는 이미 뜻을 완전히 굳힌 사람 같았다. 오히려 그런 노숙을 안심시키 듯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나는 공도(公)에 의지해 그를 목 베 그 자신마저 도 나를 원망할 수 없게 하겠소.”
“어떻게 공도로 공명을 목 벨 수 있겠습니까?”
“그건 묻지 마시오. 내일이면 알게 되리다.”
주유는 어떤 계책을 세워두었는지 거듭 자신 있는 어조로 노숙을 안심시켰다. 이튿날이 되었다. 주유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인 다음 의논할 것이 있다 하여 공명을 불렀다. 공명은 기꺼이 부름에 응했 다. 공명이 와서 각기 자리를 정해 앉자 주유가 말했다.
“오늘 조조와 싸우려고 하는데 물 위에서 싸우는 데는 어떤 병기가 가장 좋겠습니까?”
“큰 강 위에서 하는 싸움이라면 활과 화살이 가장 낫겠지요.”
공명이 주유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 다. 주유가 기다렸다는 듯이나 그 말을 받아 공명에게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바로 내 뜻과 같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군중에 는 화살이 매우 모자랍니다. 번거롭지만 선생께서 감독하시어 화살 십만 개만 만들어주신다면 적을 맞아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 니다. 이 일은 공사(公)이니 선생께서는 부디 마다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주유는 한번 의논해보는 법도 없이 화살 십만 개를 공명에게 떠맡 겼다. 분명 거기에는 화살을 얻는 것 이상의 딴 뜻이 숨어 있어 보이 건만, 어찌 된 셈인지 공명은 별로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도독께서 맡겨주신다면 마땅히 힘을 다해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화살 십만 개가 언제쯤 쓰이겠습니까?”
공명이 담담한 표정으로 주유에게 물었다. 주유가 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흘 안입니다. 그만한 날짜면 다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얼마 딸려줄지는 모르나 열흘 안에 화살 십만 개를 만들 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주유가 공명을 노리고 놓은 덫 이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사람을 넉넉히 딸려줘도, 결국은 모두 가 강동 사람이니 몰래 영을 내려 기한 안에 화살을 다 만들지 못하 게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명이 뜻밖의 반문을 했다.
“오늘이라도 조조의 군사가 올지 모르는데 열흘이나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길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큰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유는 어이가 없었다. 열흘도 너무 짧다고 발뺌을 하려 들 줄 알 았는데 오히려 길다고 하지 않는가. 공명이 제 발로 죽을 곳을 찾아 드는 것 같은 느낌에 주유가 은근히 기뻐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 생각하시기에 며칠이면 되겠습니까?”
“사흘이면 화살 십만 개를 도독께 바칠 수 있겠습니다.”
공명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재주가 빼 어나다 해도 너무 지나친 큰소리 같아 주유가 굳은 얼굴로 공명을 나무라듯 말했다.
“군중에서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법이 없소이다.”
그러자 공명도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제가 어찌 감히 도독께 우스갯소리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군 령장(軍)을 써서 바치도록 해주십시오. 사흘 안으로 다 만들어 대지 못하면 어떤 중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주유가 보기에는 공명이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아 보였다. 공명이 몸을 사리고 들면 우격다짐으로 일을 떠맡기려 했는데 몸을 사리기는커녕 애초부터 짧게 잡은 기한조차 더욱 줄이고도 군령장 까지 써서 바치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에 주유는 크게 기뻐하며 군 정사(政司)를 불러 그 앞에서 공명에게 군령장을 쓰게 했다.
‘이제 너는 죽었다!’
공명이 써준 문서를 군정사에게 맡기면서 주유는 속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술을 내어 공명을 대접하며 가장 생각해주는 체 말했다.
“싸움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이 일에 보답하겠습니다. 오늘은 가볍게 마시고 돌아가 불행히도 군령장에 씌어져 약조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주유가 생각해주는 것도 귀담 아 듣지 않고 귀한 사흘에서 또 하루를 줄여버렸다.
“오늘은 이미 일을 시작하기에는 늦습니다. 내일부터 화살을 만들 도록 하지요. 단 사흘째 되는 날에는 군사 오백 명만 빌려주십시오. 강변에서 화살을 날라오는 데 필요할 듯싶습니다.”
만들지도 못한 화살을 어떻게 나른단 말인가 싶으면서도 주유는 그 같은 공명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러자 공명은 두 번 다시 화살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함이 없이 술만 몇 잔 비우고는 돌아갔다.
“저 사람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은 아닙니까?”
돌아가는 공명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그때껏 말없이 일이 돌아가 는 꼴만 구경하고 있던 노숙이 불쑥 주유에게 물었다. 주유가 싸늘 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야 있소? 죽으려고 무엇에 씌인 것일 게요. 하지만 제가 스스로 죽을 길로 찾아든 것이지 내가 핍박해서 그리된 건 아니오. 여럿 앞에서 문서까지 남겨가며 한 약조이니 비록 양편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는다 해도 살아서 달아날 길은 없을 것이오. 나는 화살 만 드는 군사들과 장인들에게 가만히 영을 내려 일부러 일이 늦어지게 하고, 거기에 쓰일 물건들도 전혀 대지 못하게 할 작정이외다. 그렇 게 되면 그는 반드시 기일을 어기게 되고 기일을 어기면 죄를 물을 수 있으니 설령 그를 죽인다 한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소? 공은 다만 그의 거처에 가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내게 알려주시오.”
이미 일은 다 끝났다는 투까지 섞인 주유의 어조였다.
주유와 공명의 꾀 다툼에 좋은 구경꾼이자 심부름꾼 격인 노숙은 이에 다시 공명을 찾아가 보았다. 공명은 주유 앞에서와 달리 노숙 을 보자 원망 섞어 푸념을 시작했다.
“일찍이 자경에게 내가 말하지 아니했소? 공근에게 내가 채모와 장윤의 일을 알고 있더란 말을 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들 것 이라고. 그런데 자경은 나를 위해 공근에게 그 일을 감추어주지 않 고 말해버려 오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소이다. 우스갯소리에서 비롯 돼 군령장까지 써놓고 왔으니 이제는 내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소. 내가 무슨 수로 사흘 안에 화살 십만 개를 얻는단 말이오? 자경, 부 디 나를 좀 구해주시오!”
노숙은 그런 공명에게 한 가닥 동정이 일었으나 몸이 매인 곳이 달라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자기 발뺌에만 바빴다.
“오늘의 화는 공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 아니오? 공근이 열흘을 준 다 했는데도 사흘이면 된다고 큰소리 쳐놓고 이제 와서 나를 원망하 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설령 내가 도우려 한들 무슨 수로 공을 구 해 낸단 말이오?”
“자경이면 할 수 있소. 힘든 일도 아니오.”
그래도 공명은 거듭 노숙에게 매달렸다. 노숙이 마지못해 물었다.
“무슨 일을 내가 할 수 있단 말이오?”
“바라건대 자경께서는 내게 배 스무 척과 배마다 군사 서른 명만 딸려 빌려주시오. 배들은 모두 푸른 휘장으로 둘러씌우고 그 안에는 묶은 풀 천 다발을 양쪽으로 갈라 쌓아놓으면 되오. 그 배와 군사들 만 있으면 내게도 묘책이 있어 사흘 안에 화살 십만 개를 얻어낼 수 있소이다. 다만 공근에게는 결코 이 일을 알려서는 아니 되오. 만약 이번에 또 그가 알면 내 계책은 실패하고 나는 목을 내주는 수밖에 없소.”
제갈량이 엄살 섞어 그렇게 대답했다. 노숙이 원래 그리 모질지 못한 사람이라 어렵지 않은 그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동오의 녹을 먹고 있어 주유와 함께 그 이익을 지켜야 할 처지이지만 제갈량이 죄 없이 죽는 것까지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공명의 청을 들어주기로 응낙한 노숙은 공명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주유에게 돌아가 알렸다.
“공명은 대나무나 깃털이나 아교 따위를 쓰지 않고도 달리 화살 십만 개를 만들어낼 도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공명의 당부대로 배 빌려주는 일은 전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노숙의 말에 문득 의심이 일었으나 아무래도 공명에 게 다른 방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쨌든 사흘 뒤에 봅시다. 그가 어떤 꼴로 나를 보러 올지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주유와 헤어져 돌아온 노숙은 곧 공명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빠 르고 가벼운 배 스무 척을 사사로이 뽑아 공명이 말한 대로 꾸민 뒤 배마다 군사 서른 명씩을 딸려 공명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명은 배와 군사가 마련돼도 얼른 움직이지 않았다. 첫날 이 그냥 지나가고 다시 둘째 날도 일없이 지나갔다. 가만히 공명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노숙은 애가 탔다. 아까운 인재 하나가 속 절없이 죽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셋째 날 사경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꼼짝 않고 있던 공명 이 몰래 사람을 보내 노숙을 자기 배로 불렀다. 갑작스런 부름에 노 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르셨소?”
“화살을 얻으러 가려 하는 바, 특히 자경과 함께 가고 싶어 번거롭게 했소.”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노숙은 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어디 가서 가지고 온단 말이오?”
“자경은 그만 물으시오. 함께 가보면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오.”
공명은 그렇게 대답을 미뤄놓고 곧 배에 딸린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배 스무 척을 긴 끈으로 모두 잇대어 묶고 북쪽 강 언덕으로 급 히 저어 가라. 다음 일은 다시 내가 영을 내릴 것이다!”
노숙으로서는 도깨비 놀음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날 새벽은 안개가 몹시 짙어 하늘까지 아득히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장강 위에도 짙게 안개가 깔려 마주 선 사람이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옛사람이 「대무수강부(大霧垂江賦)」란 노래에서,
‘….처음에는 보슬비 내리듯 침침하여 겨우 남산의 표범이나 숨
을 만하더니, 차차 짙게 피어올라 북해의 곤 상상의 큰 물고기)이 숨어도 될 듯하다. 그 뒤, 위로는 높이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두렵게 땅에 드리워 아득하기 그지없고 넓기는 끝간데를 모르겠구나. 고래 는 물에서 솟아 파도 위에 뛰어놀고 교룡은 물 깊숙이서 신령한 기 운을 토해낸다. ….동쪽의 시상 기슭도 알 수 없게 되고 남쪽 하구 의 산도 볼 수가 없게 된다………….’
라고 읊어간 바로 그 장강의 짙고 눅눅한 안개였다.
그 같은 안개 속을 헤치고 강을 타고 내려간 공명의 배들은 오경 무렵이 되자 조조의 수채 가까이 이르렀다. 공명은 스무 척의 배를 이물[船首]은 서쪽으로 두고 고물[船尾]은 동쪽으로 두게 하여 한 줄 로 넓게 벌여 세운 뒤 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뱃전으로 올라가 고함을 지르고 북을 두드려라! 되도록이면 크고 요란스러워야 한다.”
그 갑작스런 명에 노숙이 깜짝 놀라 공명을 말렸다.
“조조의 군사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러나 공명은 껄껄 웃으며 노숙을 안심시켰다.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조조가 무슨 간으로 감히 군사를 내겠소?
우리는 술이나 마시며 즐기다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얼른 돌아 가도록 합시다.”
그러고는 미리 마련해 간 술을 내오게 했다.
그때 마침 조조는 수채 안에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함성이 크게 울리자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모개와 우금은 놀라 조조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둘 다 뭍에서의 싸움에서는 한다 하 는 맹장들이지만 물에서의 싸움은 별로 아는 게 없어 먼저 조조에게 알리고 그의 명을 기다린 것이었다.
오래잖아 조조로부터 전갈이 왔다.
“안개가 짙고 강 위가 보이지 않는데 적군이 갑자기 몰려왔으니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결코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다 만 수군 궁노수들로 하여금 어지러이 활과 쇠뇌를 쏘게 하고 적이 물러가거나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역시 수전에는 그리 밝지 못한 조조가 머리를 짜낸 끝에 내린 영 이었다. 조조는 또 뭍에 있는 진채에도 사람을 보내 영을 내렸다.
“장요와 서황은 각기 궁노수 삼천 명을 거느리고 급히 수채가 있 는 강가로 가라. 가서 수군을 도와 강 위로 몰려온 적군에 활과 쇠뇌 를 퍼붓도록 하라.”
그렇지 않아도 동오의 배들이 수채로 뛰어들까 걱정이 된 모개와 우금은 조조의 그 같은 영이 이르기도 전에 이미 궁노수를 있는 대 로 수채 앞에 벌여 세우고 활과 쇠뇌를 고함 소리 나는 쪽으로 퍼붓 는 중이었다. 조조의 영이 이르자 한층 기운을 얻어 화살 아까운 줄 모르고 마음껏 쏘아 붙였다.
오래잖아 장요와 서황이 이끄는 궁노수가 또한 수채가 있는 쪽 강 언덕에 이르렀다. 만 명이 넘는 그들도 수군과 마찬가지로 무턱 대고 고함 소리 요란한 곳으로만 화살을 퍼부었다. 공명이 몰고 간 스무 척의 배 위로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배마다 가득 짚단이며 풀다발을 싣고 있어 날아온 화살들은 촉 하나 상하지 않고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뱃머리를 돌린다. 이물을 동쪽으로 고물을 서쪽으로 가도록 하라!”
공명이 다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한쪽 편 풀더미에 충분한 화살이 박혔다고 생각되자 다른 편 풀더미로 화살을 받으려는 것이 었다.
뱃머리를 돌린 공명은 다시 군사들에게 크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게 했다. 조조군에서는 좀 전과 똑같이 활과 쇠뇌를 퍼부으니 이 쪽 뱃전의 풀더미에도 화살들이 비 오듯 날아와 꽂혔다.
어느덧 해가 높이 솟고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공명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배를 거두고 동오의 수채로 돌아가도 록 했다. 그사이 조조군이 어지럽게 쏘아 붙인 활과 쇠뇌로 스무 척 의 배에 실은 풀더미는 모두 화살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게 바로 대 나무도 깃털도 아교나 옻도 쓰지 않고 화살을 만드는 방도였던 셈 이다.
그러나 공명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조의 수채 앞을 떠나기에 앞서 공명은 군사들에게 목소리를 합쳐 소리치게 했다.
“조승상님, 화살을 주어 고맙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의 군사들은 곧 안에 있는 조조에게 전했다. 조조는 비로소 그날 아침에 있었던 공격이 무슨 뜻에서였는지를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적군의 배는 가볍고 물살은 빨라 어 느새 이십리나 달아난 뒤라 싸움배를 내어 쫓아봤자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를 갈며 자신의 헤아림이 모자라는 것을 분해할 뿐이었다.
한편 돌아오는 배 위에서 공명은 아직도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노숙을 보고 말했다.
“배마다 화살이 오륙천 개는 될 것이니 동오로서는 반 푼의 힘도 들이지 않고 십만 개의 화살을 얻은 셈이오. 내일 이 화살을 조조군 에게 쓸 것이니 그 아니 편리한 일이오?”
그제서야 노숙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잊고 있던 찬탄을 쏟아놓았다.
“선생은 참으로 신인(神人)이십니다! 어떻게 오늘 이처럼 짙은 안 개가 낄 줄 알았습니까?”
“장수 된 사람이 천문에 통하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며, 기문 (奇門, 술수의 일종. 三奇八門)을 모르고 음양을 깨닫지 못하며, 진도(陣 圖)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보잘것없는 재주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양은 이미 사흘 전에 오늘 크게 안개가 낄 것을 헤아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사흘 말미만을 얻었더랬소.
공근은 나더러 열흘을 주었으나 일할 장인들이며 재료로 쓸 물건 들을 제대로 대어주지 않는다면 설령 열흘이 아니라 백일을 준다 한들 무슨 재주로 화살 십만 개를 만들 수 있겠소? 그래서 만약 내 가 기일을 어기면 공근은 그 죄를 물어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들었 을 것이오. 하지만 내 명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공근이 어찌 나를 해 칠 수 있겠소이까?”
공명이 반드시 자기 자랑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말투로 조용히 노숙의 말을 받았다. 노숙은 감동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러졌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배들은 어느덧 동오의 진채에 가 까워지고 있었다. 강가에는 주유가 이미 오백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을 운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빈손으로 돌 아온 공명을 잡아 누구에게도 거리낌없이 군법을 시행하려는 생각 이 앞서 있었다.
“번거로움을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화살은 이 배들에 실려 있습니다.”
공명은 그런 주유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주유가 군사를 시켜 스무 척의 배에 꽂힌 화살을 거두어 세어보니 십만을 채우고도 오히려 남 음이 있었다.
“도대체 공명이 어디서 그 많은 화살을 가지고 왔소?”
화살을 중군장에 거두어들이게 한 뒤 주유가 노숙을 불러 가만히 물었다. 노숙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았 다. 듣고 난 주유가 깜짝 놀라며 탄식했다.
“공명은 실로 하늘이 낸 사람이구려. 그의 빼어난 재주와 놀라운 헤아림을 내가 어찌 따를 수 있겠소!”
결국 주유가 손을 들고 만 셈이었다.
오래잖아 공명이 주유를 보러 들어왔다. 전과는 달리 주유가 장막 밖까지 나와 공명을 맞으며 감복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의 귀신 같은 헤아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선생을 우러르게 만드는 데가 있소.”
“속임수 같은 보잘것없는 계책을 어찌 놀랍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공명이 정색을 하며 겸양의 말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