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0화 : 형주는 못 찾고 미인만 바쳤구나

랜덤 이미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0화 : 형주는 못 찾고 미인만 바쳤구나


형주는 못 찾고 미인만 바쳤구나

배가 남서에 가까워질수록 유비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런 유비를 안심시키려는 듯 배가 언덕에 닿자 조운이 공명에게서 받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묘책이 이 안에 들어 있으므로 때가 이르러 하나씩 차례로 꺼내 보면 된다 하셨습니다. 이제 이곳 에 와 닿았으니 마땅히 첫 번째 비단 주머니를 열어 계책을 알아봐 야겠습니다.”

그리고 비단 주머니를 열어본 조운은 곧 오백의 군사를 모두 불러 모두에게 이러저러한 계책들을 일러주었다.

“주공께서는 먼저 교국로(喬國老)를 찾아뵙도록 하십시오.”

군사들에게 각기 시행할 계책을 일러준 조운이 다시 유비에게 말했다. 교국로는 죽은 손책의 부인인 대교(喬)와 주유의 부인인 소교(小)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남서에 살고 있었다.

제갈공명이 비단 주머니에 써 넣어둔 계책이란 말에 유비는 곧 술과 고기를 갖춰 들고 교국로를 찾아갔다. 그리고 절하며 교국로를 본 뒤 여범이 찾아와 중매를 선 일이며 손권이 혼인을 허락했다는 것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교국로로 보아서는 갑작스러우면서도 놀 라운 소식이었다.

한편 유비를 따라온 군사들은 모두 맡은 일을 잘 해내었다. 울긋 불긋한 옷을 입고 남군으로 들어가서는 혼인에 쓸 예물을 사들인답 시고 유비가 손권 집안으로 장가 들게 된 일을 떠들어댔다. 오백 명 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외듯 떠들고 다니니 순식간에 그 소문은 온 성안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손권은 유비가 자기들의 계책에 말려들 어 몇 안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동오로 들어온 것만이 기뻤다. 유비 가 배를 댔다는 전갈이 오자 곧 여범을 불러 대접하게 한 뒤 잠시 객관(客)에 머물러 쉬도록 했다. 손권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비가 이미 옭아둔 범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은 실로 엉뚱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교국로는 유비가 다 녀가자마자 오국태(吳國太)를 찾아보고 경하의 말을 했다. 손책의 장인이 되니 오국태와는 사돈간인 셈이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교국로가 찾아와 앞도 뒤도 없이 경하의 말을 하자 오국태가 어리둥 절해 물었다.

“경하라니? 제게 무슨 기쁜 일이 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따님을 유현덕의 부인으로 내주기를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신랑감인 유현덕이 이곳에 와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저를 속이 려 하십니까?”

교국로가 오히려 알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오국 태가 놀란 얼굴로 묻기를 거듭했다.

“이 늙은이는 그 일을 알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교국로는 유비에게서 들은 대로 자세히 일러주었다. 오국태는 한 편으로 손권을 불러들이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성안에 풀어 그 일을 알아보게 했다. 저잣거리로 나갔던 사람들이 먼저 돌아와 알 렸다.

“실로 일이 그러했습니다. 사위 되실 분은 이미 역관에 와서 쉬고 계시고, 따라온 오백의 군사들은 돼지와 양이며 떡, 과자 등 혼인 잔 치에 쓸 물품들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중매를 선 사람은 여자 쪽 집 안에서는 여범이고 남자 쪽은 손건인데 모두 역관에 함께 있다고 합 니다.”

그 말에 국태부인은 더욱 놀랐다. 얼마 뒤에 부름을 받은 손권이 어머니를 뵈러 후당으로 왔다.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나 선부 (先父)에게는 또 다른 아내이니 곧 어머니뻘이요, 외가로도 이모인 데다 생모인 오태부인(吳人)의 유언도 있고 해서 손권이 어머니 로 깍듯이 모시는 국태부인이었다. 그 국태부인이 손으로 가슴을 치 며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었다. 놀란 손권이 물었다.

“어머님, 무슨 일로 이토록 슬퍼하십니까?”

“네가 지금 하는 짓을 보니 앞으로는 나를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겠구나! 언니가 돌아가실 때에 너더러 이토록 나를 속이라고 분부하시더냐?”

오국태는 넋두리처럼 그렇게 말해놓고 더욱 넓게 울었다. 손권이 낯빛을 고치며 황망히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까닭을 밝히지 않으시고 어찌 이토록 괴로워만 하 고 계십니까? 무엇 때문인지 그것부터 일러주십시오.”

“남자에게도 장가 드는 것은 크나큰 일이요, 여자에게도 시집을 가는 것은 크나큰 일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치로 나 는 너의 어미가 되니 그런 일이 있으면 마땅히 내게 알리고 내 뜻을 따라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너는 유현덕을 내 사윗감으로 이 곳까지 불러놓고도 나를 속이느냐? 더구나 신부가 될 그 아이는 바 로 내가 낳은 딸이다. 네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

국태부인이 더욱 언성을 높이며 손권을 몰아세웠다. 깜짝 놀란 손 권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어머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알려주기 싫거든 말하지 말아라. 온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만 모르겠느냐? 너는 아직도 나를 속이려 드 느냐?”

국태부인의 그 같은 꾸짖음이 끝나자 곁에 있던 교국로가 거들었다.

“이 늙은이도 그 일을 알게 된 지 오래되오이다. 오늘은 특히 와 서 경하의 예를 올리는 중이오.”

그 말을 듣고서야 손권도 일이 이미 밖으로 새어나간 줄 알고 실토를 했다.

“아닙니다. 모두들 잘못 아셨습니다. 이번 일은 주유의 계교로, 형주를 얻고자 꾸민 것입니다. 혼인이란 이름뿐이고 실은 유비를 이곳 으로 불러들여 잡아가둔 뒤 그와 형주를 바꾸려는 뜻이지요. 만약 저쪽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먼저 유비를 목 베어버릴 작정입니다. 곧 이번 일은 하나의 계책일 뿐 참뜻으로 그와 혼인하려는 것은 아 닙니다.”

그러자 오국태는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큰 소리로 그 자리 에 없는 주유를 욕해댔다.

“주유, 이놈. 너는 여섯 군 여든한 고을의 대도독으로서 형주를 뺏 을 계책이 그리도 없어 내 딸을 미끼로 미인계를 쓰려 드느냐? 네놈 이 유비를 죽이면 내 딸은 시집도 못 가본 과부가 되는 셈인데 뒷날 다시 어떻게 혼인을 시킬 수 있겠느냐? 이제 내 딸의 평생은 망쳐버 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놓고 너희들의 일이 잘 풀릴 것 같으냐!” 

그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교국로가 보기 딱했던지 넌지시 손권에게 말했다.

“만일 이번 계책을 쓰면 형주를 얻기는 편할 것이나 천하의 웃음 거리가 될 것이오. 그런 일을 차마 어떻게 하시려오?”

손권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데 그동안에도 국태부인은 쉴새없이 주유를 향해 욕 을 퍼부어댔다. 곁에 있던 교국로가 다시 국태부인을 도와 손권에게 권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면 달리 도리가 없는 듯싶소이다. 유황숙은 한실의 종친이 되니 정말로 손씨가 사위를 삼는 게 나을 것 같소. 그래야만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게 될 것이외다.”

“그래도 나이가 너무 층이 집니다.”

손권이 펄쩍 뛰며 그렇게 대답했다. 교국로가 다시 유비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유황숙은 당세의 호걸이시오. 이 집안의 사위로 맞아들인다 해서 영매(妹)께 욕될 것은 조금도 없을 거다.”

이때 국태부인이 나서 자르듯 말했다.

“나는 아직도 유황숙이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내일 감로사( 寺)에 나가 한번 만나볼 작정인 바,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거든 너 희들 뜻대로 하거라. 그러나 그가 내 마음에 든다면 나는 딸아이를 그에게 시집보낼 것이니 그리 알라!”

손권은 원래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국태부인이 그렇 게 말하자 더는 그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고 따랐다. 국태부인의 방 을 나오자마자 여범을 불러 일렀다.

“내일 감로사에다 잔치를 차려 어머님께서 유비를 볼 수 있는 자 리를 마련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여범이 가만히 말했다.

“국태부인께서 그리 나오신다 해도 따로 손을 써둘 것이 있습니 다. 가화에게 영을 내려 도부수 삼백을 데리고 양쪽 낭하 뒤에 숨어 있게 하시지요. 만약 국태부인께서 유비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으시 면 한 소리 신호로 양쪽에서 한꺼번에 뛰쳐나와 유비를 사로잡도록 하셔야 됩니다.”

손권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곧 가화를 불러 여범의 말대 로 먼저 감로사로 가서 준비케 했다. 군사들과 더불어 숨어 국태부 인의 거동만 살피다가 때가 오면 일시에 뛰쳐나오도록 한 것이었다. 한편 국태부인과 헤어진 교국로는 돌아가는 길에 유비에게 들러 다음 날 있을 일을 알려주었다.

“오후(吳侯)와 국태부인께서 몸소 장군을 보러 나오실 것이니 나 쁜 일은 아닐 성싶소. 그리 알고 계시오.”

그러나 유비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곧 손건과 조운을 불러 의논하니 조운이 말했다.

“내일의 그 모임은 흉한 일이 많을지언정 길한 일은 별로 없을 것 입니다. 제가 군사 오백을 이끌고 가 주공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손건이 달리 말이 없자 유비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오국태와 교국로가 먼저 감로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이어 손권이 한 떼의 모사들을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다. 손권은 여범을 불러 역관에 쉬고 있는 유비를 청해 오게 했다.

유비는 비단 겉옷 안에 얇은 갑옷을 받쳐입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모두 등에 칼을 메게 한 뒤 말에 오르며 말했다.

“너희들은 언제나 내 곁을 바짝 따르도록 하라!”

그 뒤를 조운이 싸움터로 나가는 장수 모양으로 갑옷과 병기를 갖춘 채 오백 군사를 이끌고 따랐다.

감로사 앞에서 말을 내린 유비는 먼저 손권부터 만나보았다. 손권 은 말로만 듣던 유비를 직접 보게 되자 그 생김과 거동이 범상치 않 음에 마음속으로 은근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손권과 유비는 예를 마친 뒤 방장으로 들어가 국태부인 앞으로 갔다.

국태부인은 유비를 보자마자 크게 기뻐하며 곁에 있는 교국로에게 가만히 말했다.

“훌륭하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 내 사윗감이오.”

교국로도 맞장구를 쳤다.

“현덕은 용이나 봉 같은 생김에다 하늘의 해 같은 위엄이 있습니 다. 아울러 널리 천하에 어짊과 덕을 베풀 사람이니 태께서 이런 사윗감을 얻으시게 된 데에 진심으로 경하를 올립니다.”

거기까지가 제갈공명이 헤아려둔 교국로의 몫이었다. 제갈공명은 유비에게 미리 예물을 갖춰 교국로를 찾아보고 그 환심을 사게 함으 로써, 그 혼사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오국태의 귀에 들어가게 하 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비마다 유비를 편들게 만들었다.

유비는 그런 두 사람에게 절하며 고마움을 나타내고 마련된 자리 에 가 앉았다. 잠시 뒤에 조자룡이 칼을 찬 채 들어와 유비 곁에 가 섰다. 국태부인이 유비에게 조자룡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상산 땅의 조자룡입니다.”

유비가 그렇게 대답하자 국태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양 장판벌에서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의 백만 대군 사이를 무인지경 가듯 했다는 그 사람이 아니오?”

“예. 바로 보셨습니다.”

“참으로 범 같은 장수외다.”

국태부인은 그렇게 감탄하며 조자룡에게 술을 내리게 했다. 술을 받은 조자룡이 가만히 유비에게 속삭였다.

“좀 전에 제가 양쪽 낭하를 순시해보니 방마다 도부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반드시 좋은 뜻으로 그러지는 않았을 듯싶습니다. 국태 부인께 알려주심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유비는 곧 국태부인 앞에 가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

“만약 이 유비를 죽이시려거든 차라리 이 자리를 빌려 죽여주십 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국태부인이 괴이쩍다는 듯 물었다. 유비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 감로사 낭하에 도부수들이 가득 숨어 있습니다. 저를 죽이려 함이 아니면 왜 그들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국태부인은 몹시 성이나 손권을 보고 꾸짖었다.

“오늘 현덕은 이미 내 사위가 되었으니 곧 내 딸과 같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하에 도부수를 숨겨두었느냐?”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곧 알아보겠습니다.”

손권이 궁색하게 발뺌을 하고 여범을 불러 물었다. 여범 또한 자 신은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고 가화에게 덮어씌우니 국태부인은 다 시가화를 불러들이게 했다.

“너는 어찌하여 내 사위를 죽이려 하였느냐?”

불려온 가화를 보고 국태부인이 꾸짖었다. 가화는 속으로 기가 막 혔으나 차마 손권이 시킨 일이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다만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매서운 꾸지람을 듣고만 있었다.

“저놈을 끌어내 목 베어라!”

모든 것이 가화의 흉계로 된 것인 줄로만 안 국태부인이 분을 참 지 못해 큰 소리로 영을 내렸다. 그러자 유비가 나서서 말렸다. 

“만약 저 때문에 큰 장수 하나를 목 베게 된다면 이번 혼인에 좋지 못합니다. 그래 놓고 제가 어찌 오래 슬하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교국로도 곁에서 유비를 거들어 국태부인을 말렸다. 모두 그렇게 말리자 오국태도 굳이 가화를 죽이려고는 않고 다만 호되게 꾸짖어 내쫓았다. 대장인 가화가 그 지경으로 쫓겨나오니 삼백 명의 도부수 들도 더 숨어 있을 수 없었다. 모두 오국태의 눈에 띌까 두려워 머리 를 싸쥐고 물러나버렸다.

숨어 있던 도부수들이 모두 물러나자 유비는 옷을 갈아입으러 밖 으로 나왔다. 안에 받쳐입은 갑옷이 아무래도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잔칫상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문득 감로사 뜰에 놓인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비는 뒤따르는 자들 이 차고 있던 칼을 빌려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가만히 빌 었다.

“만약 유비가 다시 형주로 돌아가 무사히 왕패(王)의 업(業)을 이룩할 수 있다면 한칼질에 이 돌이 둘로 갈라지이다. 만약 여기서 죽어야 한다면 칼은 부러지고 돌은 쪼개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는 번쩍 칼을 쳐들어 그 돌을 내리쳤다. 불똥이 어지럽게 튀며 돌은 그 한칼에 둘로 갈라졌다. 손권이 뒤따라오다가 그 광경 을 보고 유비에게 물었다.

“현덕공께서는 이 돌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비는 나이 쉰이 다 되도록 나라를 위해 역적들을 쓸어 없애지 못한 것이 늘 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국태부인의 부르심을 입어 그 사위가 되게 되었으니 이는 평생에 만나기 어려운 때를 만 난 셈입니다. 흡족한 마음을 못 이겨 하늘에 빌기를, 만약 조조를 깨 뜨리고 한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 돌이 한칼에 갈라지라, 하고 내리 쳤던바 과연 이렇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그렇게 둘러대었다. 그러나 손권은 속으로 생각했다. ‘유비, 네가 어찌 그런 소리로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네가 빈 것은 달리 있을 것이다.’

유비가 큰 힘 들이지 않고 자신이 숨겨둔 삼백 도부수를 내쫓아 버리는 걸 보고 그 깊은 속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손권 시 칼을 빼들며 말했다.

“나 또한 하늘의 뜻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만약 조조를 깨뜨리게 된다면 역시 내 한칼에도 이 돌은 갈라질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권이 가슴속으로 남몰래 빈 것은 달랐다.

‘만약 제가 형주를 되찾고 우리 동오를 왕성하게 일으킬 수 있다 면 이 돌이 갈라지이다!’

그러고는 칼을 들어 그 돌을 내리쳤다. 역시 칼은 부러지지 않고 돌만 쪼개졌다.

각기 속으로 빈 것은 달랐으나 하늘이 한가지로 들어주겠다는 징 조를 보였으니 모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을 던지고 서로 이끌며 잔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몇 순배 술이 돌았을 때 손건이 문득 유비에게 자리를 뜨자는 눈짓을 보냈다. 그걸 알아들은 유비가 곧 몸을 일으켜 국태부인

에게 작별의 말을 올렸다.

“이 비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국태부인이 기꺼이 허락하자 손권은 절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여기가 바로 천하에서 으뜸가는 강산이구려!”

눈앞에 펼쳐진 빼어난 경관을 보고 유비가 감탄했다. 그 뒤 감로 사의 비석에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란 구절이 들게 된 유래 였다.

제가 다스리는 땅을 찬탄해주는 데 싫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손권도 흐뭇한 마음으로 유비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경관을 내려다 보았다. 세찬 강바람에 부서지는 물보라는 눈처럼 휘날리고 흰 물결 은 하늘로 솟구치는 듯했다. 그런데 문득 그 거친 파도 위를 헤치고 나뭇잎 같은 배 한 척이 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치 평지를 가듯 험한 강물 위를 헤쳐가는 걸 보며 유비가 다시 감탄의 소리를 했다. 

“남쪽 사람은 배를 잘 타고 북쪽 사람은 말을 잘 탄다더니 이제 정말 그 말을 믿겠습니다그려.”

하지만 젊은 손권에게는 그 말이 그대로 칭찬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유비의 말은 내가 말을 잘 타지 못함을 놀리는 말이다.’

손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곧 좌우에게 일러 말을 끌어오게 했다. 말이 끌려오자 나는 듯 몸을 날려 말 등에 오른 손권이 그대로 휘몰듯 산을 달려 내려갔다가 다시 채찍질해 산 위로 올라온 뒤 웃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이래도 남쪽 사람들이 말을 잘 타지 못한다고 하시겠습니까?”

비록 나이 쉰에 가까웠으나 호기를 부리는 데는 유비도 손권에 못지않았다. 손권이 말 부리는 재주를 뽐내자 유비도 지지 않고 훌 쩍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손권이 한 것처럼 나는 듯 산 을 내려갔다가 되올라왔다.

둘 모두 한차례 말을 달리고 돌아오자 마음이 후련해지고 호쾌함 이 일었다. 언덕 위에서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그 순간만은 가슴속의 적의와 의심을 잊은 웃음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돌아왔다. 그 광경을 본 남 서)의 백성들은 모두 두 집안의 화친을 경하해 마지않았다. 역관으로 돌아온 유비는 다시 손건과 앞일을 의논했다. 그날의 위 태로움은 겨우 넘겼으나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손건이 가만히 말했다.

“교국로께 사정하시어 되도록이면 빨리 혼인을 마치는 게 좋겠습 니다. 그래야만 달리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튿날로 다시 교국의 집을 찾아 갔다. 이미 유비의 인품에 반해 있는 교국로는 반갑게 유비를 맞아 들였다. 예가 끝나고 차를 마신 뒤에 유비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강남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 유비를 해치려는 자가 많습니다. 아 무래도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혼인을 서둘자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교국로도 거기 감춰진 뜻까지는 알아듣지 못하고 다만 유비의 안전만을 다짐했다.

“현덕은 마음을 놓으시오. 국태부인께 말씀드려 공을 보살피고 지 키도록 영을 내리게 하겠소.”

그 말만으로도 넉넉하다 여긴 유비는 절하며 감사하고 역관으로 돌아갔다. 교국로는 곧 국태부인을 찾아보고 유비가 걱정하는 일을 전했다. 국태부인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 사위를 그 누가 감히 해친단 말이오!”

그러고는 유비를 잠시 자기 집 서원에 들어와 있게 하고 날을 골 라 혼인을 치르도록 서둘렀다. 유비는 그런 국태부인을 찾아보고 다 시청했다.

“조운이 밖에 있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군사는 하나도 들 이지 않더라도 조운만은 저와 함께 있게 해주십시오.”

사위 될 유비에게 이미 흠뻑 반한 국태부인이었다. 조운뿐만 아니 라 군사들까지 모조리 부중으로 불러들여 쉬게 했다. 역관에 머물다 가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유비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기다리는데 며칠 안 돼 혼인날이 되었다. 국태부인은 크게 잔치를 열어 유비와 손부인의 혼인을 치렀 다. 유비를 지켜주는 길은 그뿐이라 여겨 서두를 대로 서두른 덕분 이었다.

밤이 되어 손님들이 모두 흩어진 뒤 유비는 두 줄로 늘어선 붉은 등을 따라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방안 가 득 창칼과 화살이 늘어서 있고, 시중 드는 계집종들도 모두 칼을 찬채 양편으로 갈라 서 있었다. 신방이 아니라 무슨 싸움터 같았다.

유비는 깜짝 놀라 넋이 빠졌다. 자기도 모르게 낯빛이 변해 몸을 떨고 있는데 집을 돌보는 계집종들의 우두머리인 노파가 와서 말 했다.

“귀인께서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부인께서는 어릴 적 부터 무사(事)를 좋아하시어, 계집종들이 칼로 겨루는 것을 보기 즐겨 하시기에 이렇습니다. 결코 누구를 해치고자 창칼을 늘어 세운 것은 아닙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퍼뜩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기 는 마찬가지였다. 점잖게 그 노파에게 타일렀다.

“이 같은 것들은 부인네가 보고 즐길 것들이 아니다. 내 마음이 섬뜩하니 잠시 거두도록 하라.”

노파는 곧 안으로 들어가 손부인에게 유비가 말한 대로 전했다. 손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반평생을 싸움터를 누비며 지내신 분이 아직도 병기를 두려워하신단 말이냐?”

그러고는 명을 내려 모든 병장기를 거두게 하고 계집종들에게도 차고 있던 칼을 풀게 했다.

이윽고 신방에 든 유비는 첫날밤을 손부인과 더불어 치렀다. 나이 차이는 많아도 부부의 금실은 곧 좋아졌다. 유비는 또 금과 비단을 흩어 계집종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며 환심을 사는 한편 손건을 먼 저 형주로 돌려보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했다.

마음속에는 한 가닥 걱정이 남은 대로 유비에게는 오랜만의 즐거운 나날이었다. 연일 잔치와 술 속에서 젊고 예쁜 신부와의 정분을 두터이 해나갔다. 국태부인도 갈수록 그런 사위를 귀하고 사랑스레 여겼다.

일이 뜻밖에도 그렇게 돌아가자 손권은 어찌할 줄 몰랐다. 곧 사 람을 뽑아 보내 주유에게 알렸다.

“내 어머님께서 억지로 우기시어 누이는 유비에게로 시집 가게 되었소. 뜻밖에도 우스갯소리가 참말이 되고[眞]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되돌릴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주유는 몹시 놀랐다. 앉으나서나 마음이 편치 못해 서성이다가 겨우 한 가지 계책을 짜냈다. 주유는 한 통 밀서를 써서 손권이 보낸 사람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손권이 그 밀서를 받아 뜯 어보니 대략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이 주유가 꾀한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뒤집혔으니 실로 기막힙니 다. 이미 우스갯소리가 참말로 되어버린 이상 이제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계책을 써야겠습니다. 유비는 효웅의 자질이 있는 데다 관 우, 장비, 조운 같은 맹장들을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제갈량의 꾀를 쓰고 있습니다. 반드시 남의 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어리 석은 생각에는 그의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해져 오래 동오에 머물게 하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다. 유비에게 화려한 궁실을 지어주어 그 뜻을 잃게 하시고, 아름다운 여인과 즐겨하는 물건들을 보내시어 그 이목을 사로잡아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관우, 장비와의 정 분이 멀어지고 제갈량과의 맺음도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을 각기 다른 곳에 두었다가 군사를 일으켜 쳐부순다면 대사는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만약 유비를 놓아 보낸다면 이는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룡은 끝내 못 속에 남을 물건이 아니니,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깊이 헤아 려 행하십시오.’


그러나 손권은 읽기를 마친 뒤에도 얼른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글을 장소(張昭)에게로 밀어주며 그 뜻을 물었다. 그걸 읽 어본 장소가 말했다.

“공근의 꾀가 바로 제 어리석은 뜻과 같습니다. 유비는 미천한 바 닥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아직 부귀를 누려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으리으리한 궁궐과 큰 집을 지어 주고 아름다운 여인과 많은 재물을 내리시어 마음대로 쓰고 누리게 해준다면 관우, 장비나 공명과는 절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 하여 서로가 각기 원망하는 마음이 일게 한 뒤라야만 형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공근의 계책을 믿으시고 어서 빨리 그대로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제서야 손권의 얼굴에도 기쁜 빛이 떠올랐다. 한 번 더 주유의 계책을 따라보기로 하고 그날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동부(東府)를 깨끗이 수리하게 한 뒤 꽃과 나무를 심어 꾸미 고 살림에 쓸 여러 가지 물건을 고루 갖추게 했다. 그리고 유비를 청 해 그 누이와 함께 살게 하면서 다시 아름다운 여악수십 명과 금옥 비단이며 여러 가지 완호물(玩好物)을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태부인은 손권이 제 누이를 생각해 그러는 줄 알고 기뻐해 마지않았다. 감춰진 손권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기는 유 비도 마찬가지였다. 주유나 장소가 예측한 대로 유비는 과연 오래잖 아 아름다운 음악과 여자에 빠져 형주로 돌아갈 생각은 까마득히 잊 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조운과 그가 거느린 오백 군사는 유비가 살고 있는 동부 앞 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저 성 밖으로 나가 활 을 쏘거나 말을 닫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럭저럭 두 달이 지나 어느새 그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조 운이 문득 공명의 말을 떠올렸다.

‘공명은 내게 비단 주머니 세 개를 주며 말하기를 하나는 남서에 이르거든 열어보고, 하나는 이 해가 다할 무렵이 되거든 열어보며, 나머지는 위급을 당해서도 아무런 계책이 없을 때에 열어보라 했다. 그 안에 귀신도 놀랄 계책이 들어 있어 넉넉히 주공을 보전하여 돌 아갈 수 있다 했는데, 과연 첫 번째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던 계책은 절묘했다. 이제 해가 다해갈 뿐만 아니라 주공께서는 여색에 마음이 앗기시어 얼굴조차 보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두 번째 비단 주머니를 열어보고 거기 있는 계책대로 따라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그러고는 두 번째 비단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방금 유비가 빠져 있는 형편을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공명의 계 책이 씌어 있었다.

읽기를 마친 조운은 뛰듯이 동부로 달려가 유비를 보기를 청했다. 

“조자룡 장군께서 긴급한 일로 귀인을 뵙고자 하고 계십니다.”

계집종이 안으로 들어가 유비에게 알렸다. 유비는 심드렁한 낯빛으로 조운을 불러들여 물었다.

“자룡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조운이 거짓으로 놀란 기색을 지으며 되물었다.

“주공께서는 서실 깊이 들어앉으시어 형주 일은 조금도 생각지 않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기에 그토록 놀랍고 괴이쩍은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제서야 유비가 약간 긴장한 눈길로 조운을 바라보았다. 조운은 더욱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공명께서 사람을 보내 알리시기를 조조가 적벽(赤壁) 에서의 한을 풀고자 오십만 대병을 일으켜 형주로 밀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형세가 몹시 위태로워 주공께 어서 돌아오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전 같으면 펄쩍 뛰고도 남을 급한 소식이었으나 확실히 유비는 달라져 있었다. 얼굴이 어두워지기는 해도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하고 어물어물 말했다.

“먼저 아내와 좀 의논해보아야겠네.”

“아니 되십니다. 부인과 의논하시게 된다면 반드시 주공을 놓아 보내주시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말하지 말고 오늘 밤으로 길을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 늑장을 부리게 되면 반드시 큰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유비는 별로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뚜렷한 답을 피하고 조운을 되돌려 보내려고만 했다.

“자네는 잠시 물러가 있게. 나도 다 생각이 있네.”

모두가 다 제갈공명이 예측하고 있는 대로였다. 조운은 짐짓 위급 함을 과장하며 몇 번이고 유비를 재촉한 뒤에야 물러났다.

아무리 젊은 신부에게 빠져 있는 유비라고는 하지만 조운이 그렇 게까지 하고 물러나니 마음이 아니 흔들릴 수 없었다. 안에 들어가 손부인을 보며 말은 못하고 눈물만 지었다. 손부인이 유비에게 물 었다.

“부군께서는 무슨 일로 그토록 괴로워하고 근심하십니까?”

“내 일신이 기구하여 낯선 땅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고 또 지금은 조상의 제사조 차 받들지 못하고 있소. 이게 바로 대역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제 해가 저물려 하니 그게 생각이 나며 처량함을 이기지 못해 눈 물이 났소.”

유비가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하고 둘러댔다. 손부인이 문득 정색을 하고 꾸짖듯이 말했다.

“황숙께서는 어찌 이 몸을 속이려 하십니까? 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조자룡이 와서 형주가 위급함을 알렸기에 돌아 가시려고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데도 제게 그 같은 말로 핑계 를 대려 드십니까?”

그러자 유비가 문득 손부인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이미 알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더 속이려 들겠소? 이 비는 가고 싶지 않으나 가지 않으면 형주를 잃게 되고 형주를 잃으 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오. 하지만 또한 가려 하면 이번에는 부인을 두고 가야 하니 어찌할 줄 모르겠구려. 실은 그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오.”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당신을 섬겼으니 당신 께서 가시는 곳은 저도 마땅히 따라가야 할 곳입니다.”

손부인이 다시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그러나 유비의 얼굴은 조금 도 밝아지지 않았다.

“설령 부인의 마음이 그러하다 한들 국태부인이며 오후께서 어찌 부인이 떠나기를 허락해주시겠소? 부인께서 만약 이 비를 조금이라 도 불쌍히 여기신다면 차라리 잠시 헤어짐을 참아주시오.”

그러고는 다시 비 오듯 흐르는 눈물을 씻었다. 그토록 괴로워하면 서도 형주로 돌아갈 뜻만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유비는 역시 여느 인물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술과 여자와 음악에 온전히 잠겨버린 줄 알았건만 천하를 향한 큰뜻은 아직 굳건히 살아 있었다. 손부인 이 괴로워하는 유비를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숙께서는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머님께 말씀드려 반드시 저와 함께 황숙께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유비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국태부인께서 허락하신다 해도 오후께서는 틀림없이 우리를 가로막을 것이오.”

손부인이 그만 이치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유비의 그 같은 말 에 그녀 또한 어두운 얼굴이 되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윽고 나 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번 설날 우리가 어머님과 오라버님을 뵙고 경하를 드릴 때 강변에 나가 제사를 드릴 허락을 얻어보 시지요. 조상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데는 아무도 의심치 않을 것 입니다. 그리하여 허락만 받으면 강변에 나가 바로 배를 타고 떠나 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머님과 오라버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떠나 는 게 죄스러우나 지금으로서는 그밖에 다른 방도가 없겠습니다.” 유비에 대한 깊은 정이 아니고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방도였다. 젊은 아내의 그 같은 말에 유비는 다시 한번 무릎을 꿇으며 고마워 했다.

“부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유비는 죽어도 부인의 정을 잊지 아 니하겠소. 다만 한 가지, 이 일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아니 될 것이오.”

손부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둘의 의논은 정해졌다. 다음 날 유비는 몰래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정월 초하룻날 그대는 먼저 군사들을 거느리고 관도(官道)에 나 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조상께 제사 지낼 것을 핑계로 아내와 함 께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알겠습니다.”

조운은 기쁜 마음으로 영을 받고 물러났다.

건안 십오년 정월 초하루가 되었다. 오후는 문무의 관원들을 모두 당상에 모으고 하례를 받았다. 유비와 손부인도 들어가 국태부인에 게 세배를 드렸다. 세배가 끝난 뒤 손부인이 국태부인에게 말했다. 

“저의 지아비는 부모와 조상들의 묘가 모두 탁군에 있어 제사를 드리지 못함을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은 강변으로 나가 북쪽을 바라보며 망제(望祭)라도 올리고자 하오니 어머님께서는 그리 아십시오.”

“그것도 효도이니 어찌 아니 들어줄 수 있겠느냐? 비록 너는 시부 모를 보지 못했으나 남편과 함께 가서 제사를 드리고 며느리의 예를 다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태부인이 선선히 허락했다. 이에 손부인과 유 비는 국태부인께 절하며 감사하고 그 앞을 물러났다. 이때는 손권도 깜박 속았다. 별 생각 없이 두 사람이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손부인은 몸에 지니기 쉬운 진귀한 보물과 비단옷만 챙겨 수레에 오르고 유비는 겨우 몇 기만 거느린 채 말에 올라 성을 빠져나갔다. 오후 앞에서 국태부인의 허락을 받은 일이라 아무도 그들을 가로막 지 않았다.

관도에 이르니 조운이 이미 군사들을 이끌고 나와 있었다. 조운과 오백의 군사들은 유비와 손부인이 이르자 그 앞뒤를 지키며 총총히 남서를 떠났다.

한편 손권은 그날 문무의 관원들과 함께 크게 취했다. 이제 유비 는 꼼짝없이 잡아두었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취하게 한지도 모를 일 이었다. 이윽고 손권이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후당에 들자 문무 벼슬아치들도 모두 흩어졌다.

손권의 벼슬아치들이 유비 부부가 달아난 것을 안 것은 이미 해 가 진 뒤였다. 급히 그 소식을 손권에게 알렸으나 손권이 종내 술에 서 깨어나지 않아 아무런 명을 받을 수 없었다. 손권이 술에서 깬 것 은 이튿날 새벽이 되었을 때였다. 비로소 유비가 달아난 것을 안 손권은 급히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불러모아 그 일을 의논했다.

“오늘 만약 그 사람을 놓아 보낸다면 머지않아 반드시 큰 화란(禍 亂)이 일 것입니다. 급히 뒤쫓아 사로잡아야 합니다.”

장소가 나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마음이 급하던 손권은 곧 진무와 반장에게 오백 기를 뽑아주며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가서 유비를 사로잡아 돌아오라!”

두 장수가 그 명을 받고 물러갔으나 손권은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문득 유비에 대한 미움이 불붙듯 일며, 격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탁자 위에 놓인 옥벼루를 집어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애매한 옥벼루만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곁에서 그걸 보고 있던 정보가 가만히 말했다.

“주공께서는 공연한 노기를 거두시고 좀더 차분히 헤아려주십시 오. 제 생각에는 좀 전 진무와 반장이 가기는 했으나 유비를 묶어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 감히 내 명을 어긴단 말이오?”

손권이 당찮은 소리라는 듯 그렇게 물었다. 정보가 더욱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하며 대답했다.

“군주(君主, 후의 딸을 높인 말. 여기서는 손부인)께서는 어려서부터 무 사(事)를 좋아하시어 성격이 굳세고 엄하신 까닭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비를 따라나서신 걸로 보 아서는 이미 그와 한마음이 되어 우리를 떠난 것임에 분명합니다. 반드시 유비를 지키려 하실 것인즉 뒤쫓는 장수가 어찌 그런 군주를 해쳐가면서까지 유비를 사로잡아 올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손권은 더욱 성이 났다. 유비뿐만 아니라 누이동생에게까지 속은 일이 새삼 노기를 건드린 까닭이었다.

“장흠과 주태는 어디 있는가?”

벽력같은 고함으로 그들 두 장수를 불러들인 손권은 차고 있던 보검을 그들에게 끌러주며 엄한 영을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이 칼로 유비와 내 누이의 목을 잘라 오도록 하라! 명을 어기는 자는 선 채로 목이 베이리라!”

명을 받은 장흠과 주태가 다시 일천 기를 수습하여 유비를 잡으러 떠났다.

한편 그때 유비는 달리는 말에 연신 채찍을 더해가며 길을 재촉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잠시 길가에 쉬고 있는데 시상 쪽 에서 크게 함성이 일어 황망히 몸을 일으켰다.

“뒤쫓는 군사가 이르렀습니다!”

군사 하나가 유비에게 달려와 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유비가 놀라 조운에게 물었다.

“뒤쫓는 군사가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다 하니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운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먼저 가십시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그리고는 창을 꼬나들고 뒤편으로 달려갔다. 유비는 더욱 급히 인 마를 몰아 나아갔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산굽이를 돌 무렵이었다. 갑 자기 한 떼의 군마가 다시 나타나 길을 막아서며 앞선 두 사람의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유비는 어서 말에서 내려 밧줄을 받으라! 우리가 주도독의 명을 받들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그 두 장수는 바로 주유가 미리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한 서성과 정봉이었다.

주유는 유비가 호화로운 생활과 손부인에게 마음이 빼앗겨 형주 를 까맣게 잊고 지낸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서성과 정봉에게 삼천 군마를 주어 형주로 돌아가는 길목에다 영채를 세우 고 지키게 했다. 언제나 군사를 높은 곳에 올려보내 달아나는 유비가 지나갈 만한 길이면 모조리 살피고 있게 할 만큼 철저한 대비였다. 서성과 정봉에게 유비 일행이 오고 있음을 알린 것은 바로 그 망 보기 군사들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들 두 장수는 각기 병장기를 꼬나들고 유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주유의 물샐틈없는 헤아림이 드디어 들어맞은 것이었다.

갑작스레 서성과 정봉이 나타나자 유비는 뒤처져 오던 조운을 소 리쳐 불렀다.

“앞에는 길을 끊으려는 적병이 막아서고 뒤에는 쫓아오는 적병이 있으니,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구나. 이제 어찌해야 되는가?” 

그렇게 묻는 유비의 목소리에는 탄식까지 곁들여 있었다. 조운이 무얼 생각했는지 문득 밝은 얼굴이 되어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공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떠나올 때 군사께서 묘 한 계책을 담은 비단 주머니 셋을 준 게 있습니다. 그중에 둘은 이미 열어보았는 바 하나같이 기막히게 들어맞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 세 번째 비단 주머니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태롭고 어려울때 열어보라고 주신 것으로,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니 마땅히 열 어봐야겠습니다.”

그러고는 곧 비단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글을 유비에게 바쳤다.

읽기를 마친 유비는 곧 손부인이 타고 있는 수레 앞으로 가서 울며 말했다.

“이 비는 가슴속 깊이 숨겨둔 말이 있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두 바로 알릴 수밖에 없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디 숨김없이 제게 일러주십시오.”

손부인이 수레 안에서 그렇게 말을 받았다. 유비가 진정 섞인 목 소리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난날 오후와 주유가 함께 꾸며 이 비를 동오로 불러들인 것은 결코 부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소이다. 다만 혼인을 구실로 나를 꾀 어 들여 잡아가둔 뒤 형주를 빼앗으려 한 것뿐이었소. 그리하여 형 주만 뺏으면 반드시 나를 죽이려 했으니 이는 바로 부인을 향기로운 미끼로 삼아 이 비를 낚으려 함이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리로 온 것은 부인의 가슴속이 남자처럼 넓어 나를 불쌍히 여겨줄 줄 알았기 때문 이오. 하지만 어제 들으니 오후가 드디어 나를 해치고자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형주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돌아갈 계책을 삼은 것이 오. 다행히 부인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 나 마침내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고 말았소. 지금 오후는 사람을 놓 아 뒤에서 우리를 쫓고, 또 주유는 사람을 풀어 앞에서 길을 끊고 있소. 부인께서 나서주지 않으신다면 이 위태로움을 풀 길 없으니 부

인께서는 부디 마다하지 않으시기 바라오. 만약 부인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이 비는 수레 앞에서 죽어 부인이 베푸신 덕에 보답할 뿐이외다.”

여자의 여린 정에 호소하면서도 은근히 남매의 사이를 떼어놓으 려는 데가 있는 말이었다. 손부인은 정에 흔들리기보다는 자기를 미 끼로 쓴 손권에 대한 노기부터 앞세웠다.

“오라버니가 이미 나를 골육으로 여기지 않는데 내가 무슨 낯으 로 다시 그를 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위태로움은 마땅히 내가 나 서서 풀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수레를 똑바로 밀고 나가게 하더니 수레에 친 발을 걷고 몸소 나서서 서성과 정봉을 꾸짖었다.

“너희들 둘은 모반이라도 할 작정이냐?”

그러자 서성과 정봉은 황망히 말에서 뛰어내려 무기를 내던지고 수레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모반을 할 리 있겠습니까? 주도독의 장령(將 令)을 받들어 여기서 군사를 멈추고 오직 유비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손부인이 더욱 성난 듯 소리쳤다.

“그러하다면 주유 그자가 역적이로구나! 우리 동오는 일찍이 저 를 저버린 적이 없고 현덕은 대한의 황숙이며 내 남편이다. 나는 이 미 어머님께 모든 걸 말씀드려 알리고 형주로 돌아가는 길이거늘 어 찌하여 너희 둘이 산기슭에서 군마를 거느리고 길을 막느냐? 너희가 우리 부부의 재물이라도 노략질할 작정이냐?”

“아닙니다.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부인께서는 노 기를 거두시고 저희들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 일은 우리들이 스스 로 나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도독의 장령에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서성과 정봉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연신 주유 핑계를 댔다. 그래도 손부인은 노기를 거두지 않고 한층 매섭게 꾸짖었다.

“너희들은 주유만 두렵고 나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단 말이 냐? 주유가 너희들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어찌 주유를 죽일 수 없 겠느냐?”

그러고는 다시 한바탕 주유를 욕한 뒤에 수레를 모는 유비의 군 사들을 보고 소리쳤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수레를 앞으로 끌고 나가도록 하라!” 서성과 정봉에게 길을 막을 테면 한번 막아보라는 투였다. 서성과 정봉은 가만히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부인의 아랫사람이 된다. 어찌 감히 그 뜻을 어겨가며 다툴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조운을 보니 더욱 길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잔뜩 창을 꼬나 잡고 있는 품이 수틀리면 금세라도 치고 들 기세였다.

“길을 열어드려라!”

이윽고 서성과 정봉이 그렇게 소리치자 오병들은 양쪽으로 갈라 서며 넓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유비 일행이 채 오륙 리도 가지 못했을 때였다. 닭 쫓던 개울 쳐다보기로 유비와 손부인이 떠나는 걸 하릴없이 보고만 있는 서성과 정봉의 등 뒤에서 진무와 반장이 뒤쫓아왔다.

“두 분이 여기 어인 일이시오?”

진무와 반장이 서성과 정봉에게 물었다. 서성과 정봉이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 주자 진무와 반장이 펄쩍 뛰며 말했다. 

“그대들이 저들을 그냥 지나가게 해준 일은 잘못되었소이다. 우리 두 사람은 오후의 뜻을 받들어 저들을 다시 데려가려고 특히 이렇게 왔소.”

이에 네 사람은 군사를 합쳐 급히 유비와 손부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범 아가리를 벗어난 듯한 기분으로 길을 재촉하는 유비는 오래잖 아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이는 소리를 들었다.

“뒤에 다시 추격하는 군사가 이르렀으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유비가 한 번 더 손부인의 수레 앞으로 가서 도움을 빌었다. “황숙께서는 먼저 가십시오. 저와 자룡이 뒤를 맡겠습니다.” 

손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유비는 삼백 군사만 이끌고 먼저 강가로 달려갔다. 조운은 손부인의 수레 곁에 남아 말고삐를 잔뜩 감아쥐고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태세를 취하고 군사들도 한바탕 싸움이 두렵 지 않은 듯 벌여 섰다. 따라오는 적병을 기다리는 양이 조금도 쫓기 는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이윽고 진무, 반장과 서성, 정봉이 이끄는 오병이 이르렀다. 그들 네 장수는 손부인을 보자 하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손을 모으고 섰 다. 손부인이 그런 그들을 보며 물었다.

“진무와 반장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

“주공의 명을 받들어 부인과 현덕을 다시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진무와 반장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손부인이 정색을 하며 그들을 꾸짖었다.

“이 하찮은 것들아, 너희들이 우리 오누이 간을 이간질해 싸움이 라도 시킬 작정이냐? 나는 이미 다른 집안으로 시집을 간 사람이다. 이제 갈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사사로이 정을 통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님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 우리 부부가 형주로 돌아가 는 길이란 말이다. 오히려 오라버님께서 나와 예를 갖춰 우리를 보 내야 할 것인데, 너희들이 창칼 든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 무슨 짓이 냐? 나를 죽이기라도 할 작정이냐?”

반장과 진무, 서성, 정봉 네 사람은 손부인에게서 그 같은 꾸짖음 을 당하자 얼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로 얼굴만 마주 보며 속 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어쨌든 주공과 손부인은 만 년이 가도 변함이 없을 오누이 간이 요, 더구나 이번 일은 국태부인께서 주관하셨다고 한다. 우리 주공 은 효성이 지극하신 분인데 어찌 감히 모친의 명을 거스르겠는가. 내일이라도 생각을 바꾸는 날에는 우리만 몹쓸 짓을 한 게 된다. 차 라리 인정을 베풀어 그냥 보내주는 게 나으리라.’

거기다가 유비는 이미 보이지 않고 조운만 성난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며 금세라도 덤빌 듯할 자세로 말 위에 앉아 있는 걸 보니 더 욱 힘으로 어찌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윽고 네 장수는 연신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어서 빨리 수레를 몰아라!”

그들 네 장수가 길을 내주자 손부인은 군사들을 재촉해 갈 길을 서둘렀다. 그런 손부인의 수레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던 서성이 문 득 무슨 생각을 했던지 다른 세 장수에게 말했다.

“일은 하는 수 없이 이리 되고 말았지만 우리 네 사람은 아무래도 주도독을 먼저 찾아뵙는 게 옳겠소. 가서 이 일을 말씀드립시다.” 그러나 진무와 반장은 원래 손권의 명을 받고 온 터라 얼른 마음 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한 떼의 군마가 회오리바람처럼 몰려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네 사람이 의아한 눈길로 보니 앞선 장수는 다 름 아닌 장흠과 주태였다.

“그대들은 유비를 보지 못했소?”

장흠과 주태가 네 장수 앞에 이르자마자 물었다. 네 장수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침 일찍 이리로 지나갔소. 이미 반날이 되었소이다.”

“그러면 왜 사로잡지 않았소?”

장흠이 나무라듯 물었다. 역시 네 사람이 입을 모아 손부인이 나 서서 한 말을 되뇌었다. 장흠이 서슬 푸르게 말했다.

“오후께서는 일이 바로 이렇게 될 줄 아시고 여기 차고 계시던 칼 을 주어 우리를 보내셨소. 먼저 누이를 죽이고 다시 유비를 목 베란 명이시오. 그 명을 어긴 자는 세운 채로 목 벤다 하셨는데 이제 어찌 하면 좋겠소?”

“이미 멀리 가버렸으니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겠소이까?”

네 장수가 힘없이 되물었다. 장흠이 결단을 내려 말했다.

“유비는 보군을 거느리고 있어 그리 빨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오. 서(徐), 정(丁) 두 분 장군께서는 되도록 빨리 이 일을 도독께 알리 시어 물길을 따라 빠른 배로 유비를 뒤쫓게 하시오. 우리네 사람은 강 언덕을 따라 뭍길로 뒤쫓겠소. 물길이든 뭍길이든 간에 유비를 뒤쫓아 죽여버릴 때까지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들어서는 아니 되오.” 

이에 서성과 정봉은 나는 듯 주유에게 달려가 유비가 빠져나간 일을 알리고 주태와 장흠, 진무, 반장 네 장수는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강언덕 길을 따라 유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이때 유비 일행은 시상에서 멀리 벗어나 유랑에 이르렀다. 일단 위급한 지경은 벗어났다 싶자 겨우 마음을 놓은 유비는 강 언덕으로 가 강물을 건널 곳을 찾게 했다. 그러나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퍼렇 게 출렁이는 강물뿐 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제는 어찌한단 말이냐?”

유비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수그리고 생각에 잠겼 다. 조운이 그런 유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주공께서는 범 아가리 같은 곳을 벗어나시어 이제 우리 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습니다. 군사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해 손을 써두셨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리 걱정하십니까?”

그 말을 듣자 유비도 다시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갑자기 동오에 서의 즐거웠던 나날이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처연한 느낌이 들 어 눈물을 떨구었다.

“그래도 우선 배를 찾아보도록 하라.”

애써 눈물을 억누른 유비가 이윽고 조운에게 영을 내렸다. 그러나 미처 배를 구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먼지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는 전 갈이 먼저 들어왔다. 유비는 급히 높은 곳에 올라가 먼지가 치솟는 쪽을 바라보았다. 강 언덕을 뒤덮듯 하며 한 떼의 군마가 자기들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연일 급하게 달아나야 하는 바람에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쳤는데 이제 또 뒤쫓는 적병이 이르렀구나. 실로 죽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유비가 그렇게 탄식하며 보고 있는 사이에도 함성은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황급해진 유비가 어 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스무남은 척의 배가 물에서 솟은 듯 깃발을 펄럭이며 나타났다.

“하늘이 도와 배가 생겼습니다. 빨리 배에 올라 건너편 언덕으로 피하도록 하십시오. 거기서 다시 방도를 내보는 게 좋겠습니다.” 조운이 그렇게 유비를 재촉했다. 유비는 손부인과 더불어 급하게 배에 올랐다. 조운도 거느리고 있던 오백 군사와 함께 뒤따라 배에 올랐다.

유비가 뱃전에 오르니 선창 안에서 한 사람이 도복 차림에 윤건 을 쓰고 웃음으로 나와 맞으며 말했다.

“먼저 주공께 경하를 드립니다. 제갈량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됩니다.”

그러고 보니 배 안에 사공 차림을 하고 있는 이들도 모두가 형주 의 수군들이었다. 그들을 모두 알아본 유비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멀어져가는 강변을 보며 그간의 일을 공명에게 얘기하려는데 진무, 반장, 주태, 장흠 네 장수가 이끄는 동오의 군사들이 강변에 이르 렀다. 공명이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나는 벌써부터 일이 이리 될 줄 짐작했다. 너희들은 돌아가 주랑 (周郞)에게 다시는 이따위 미인계를 쓰지 말라고 전하라.”

그러자 강 언덕의 오병들은 어지럽게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는 이미 강 가운데로 저어가 화살이 닿지 않으니, 네 장수 는 다만 멀어져가는 유비의 배를 멀거니 바라보고 섰을 뿐이었다. 뭍길로 뒤를 쫓던 적장을 따돌린 유비와 공명은 형주로 가는 뱃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오래잖아 홀연 강물 위에서 크게 함성이 일 며 수많은 싸움배가 나타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유비가 돌아보니 앞선 배에는 ‘수) 자기가 펄럭이고 있는데, 그 아래서는 주유가 왼쪽에는 황개, 오른쪽에는 한당을 거느리고 몸소 수군을 몰아오고 있었다. 그 배들이 달려오는 기세는 나는 말 같고 빠르기는 살별 같 았다.

“배를 북쪽 언덕에 대어라!”

뒤쫓는 동오의 싸움배를 바라보던 공명이 조용히 명을 내렸다. 조 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보아 거기까지도 이미 헤아려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배들이 강의 북쪽 언덕에 닿자 공명이 다시 영을 내렸다. 

“모두 배를 버리고 달아나라. 수레와 말에 의지해 길을 가도록 한다.”

그러자 뒤따라 그곳에 이른 주유도 장졸들에게 모두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유비와 공명을 뒤쫓게 했다. 처음부터 뭍에서의 싸움을 생각한 게 아니어서 동오의 수군은 모두 걸어야 했고 오직 우두머리 군관만이 말이 있을 뿐이었다.

주유가 앞장을 서고 황개, 한당, 서성, 정봉 네 장수가 그 뒤를 바짝 따라 한참을 달리다가 주유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앞이 바로 황주(黃州) 초입이 됩니다.”

한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형주가 멀지 않은 곳이라 위태로웠으나 저만치 유비의 수레와 말이 보이니 주유는 뒤쫓기를 단념할 수 없었다.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힘을 다해 쫓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주유가 한참 정신없이 유비와 공명을 뒤쫓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한 떼의 칼 든 군사가 산골짜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는 바로 관운장이었다.

그제야 주유는 일이 틀린 걸 알고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관운장이 거꾸로 주유를 뒤쫓기 시작했다. 뿐만 이 아니었다. 주유가 한창 쫓기고 있을 때 다시 왼편에서는 황충이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오고 오른편에서는 위연이 덮치니 오병은 제 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

주유가 겨우 몸을 빼내 배에 올랐을 때 언덕 위에 있던 유비의 군 사들이 크게 소리쳐 놀려댔다.

“주랑의 묘한 계책, 천하를 편안케 했네. 부인을 바치고 군사까지 꺾였구나!”

그 말을 듣자 주유는 성이 나 견딜 수 없었다. 문득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 죽기로 싸워보자!”

곁에 있던 황개와 한당이 간신히 그런 주유를 말려 앉히고 배를 띄웠다. 억지로 배에 실려가면서도 주유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내 계책이 이 모양으로 어그러져버렸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돌 아가 오후를 뵙는단 말이냐!”

문득 그 한소리 외침과 함께 그때껏 아물지 않았던 금창이 다시 터지면서 뱃전에 쓰러졌다. 곁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놀라 주유를 업어다 뉘었으나 주유는 좀처럼 깨어날 줄 몰랐다.

한편 공명은 장수들이 주유를 뒤쫓으려 하자 그들을 말린 뒤에 유비와 함께 형주로 돌아갔다. 유비를 맞는 형주성 안은 마치 잔칫 집 같았다. 유비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여러 장수들에게 상을 내 려 그 공을 치하했다.


흔히 『삼국지연의는 ‘일곱 푼의 진실과 세 푼의 허구’로 되어 있 다고 한다. 하지만 적벽대전과 유비, 손권 관련 기사는 그 비율이 뒤 짚혀 있는 듯하다. 이번 유비의 혼인도 그러하다. 손권은 유비에게 스스로 형주 여러 고을을 내주었고 누이를 시집 보냈다. 조조란 공 동의 강적에 대비하기 위한 정략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땅 도 혼인도 『연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적의에 가득 찬 쌍방 간의 뺏 고 빼앗김은 결코 아니었다. 교국로와 오국태의 역할이나 제갈공명 의 신기한 계책 같은 것은 모두 허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같은 허구들이 『연의』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 정교하고 치밀한 사건의 전개와 풍부한 심리 묘사는 저자 의 탁월한 소설 구상 능력과 서술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연 의』는 역사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오히려 찬연한 빛을 뿜어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