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1화 : 이미 주랑(郞)을 낳았거든 공명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
이미 주랑(郞)을 낳았거든 공명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
주유가 시상으로 되돌아감과 아울러 장흠과 주태도 남서로 돌아 갔다. 그리고 손권에게 끝내 유비를 놓쳐버린 일을 알리자 손권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정보를 도독으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형 주를 치려 했다. 그때 다시 주유가 글을 올려 형주를 칠 것을 권해 왔다. 손권은 더욱 뜻을 굳게 하고 군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장소 가 그런 손권을 말렸다.
“아니 됩니다. 조조가 밤낮으로 적벽에서의 한을 풀어보려 하면서 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손씨와 유씨가 한마음으로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공께서 한때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시어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조조는 반드시 그 빈틈을 타 다시 내려올 것입 니다. 그때에는 이 나라의 형세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니 부디 다시 한번 헤아려주십시오.”
고옹이 그런 장소를 편들어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
“이곳에도 허도(都)에서 풀어놓은 세작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 니다. 만약 손씨와 유씨의 사이가 벌어진 걸 알게 된다면 조조는 반 드시 사람을 시켜 유비와 화친을 맺으려 할 것이며 유비는 또 유비 대로 우리 동오가 두려워 조조에게 붙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는 날이면 우리 강남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 건대 오늘 우리가 취할 계책은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오히려 유비를 형주목으로 삼아달라고 청하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조조 는 우리와 유비가 굳게 맺어져 있는 줄 알고 감히 동남(東南)으로 군 사를 낼 생각을 않을 것이며 유비도 주공께 고마워할지언정 한을 품 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놓은 다음 믿을 만한 사람을 써서 그들 사이를 이간시키는 계책을 쓴다면 이번에는 조조와 유비가 서로 싸 우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틈을 타 형주를 뺏으면 됩니다.” 그러자 한동안 말이 없던 손권은 이윽고 성난 기색이 가신 얼굴 로 말했다.
“원탄의 말씀이 매우 옳소. 그렇지만 누가 사신이 되어가 조조를 달랠 수 있겠소?”
아무리 격해 있는 중이라도 옳은 말을 들으면 곧 스스로의 감정 을 다스리고 그 말을 따를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손권은 확실히 제 왕의 재목이었다. 물음을 받은 고옹이 대답했다.
“여기 있는 분들 가운데 조조가 우러러 사모하는 이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내시면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손권이 급히 물었다. 고옹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화흠)이 있는데 주공께서는 어찌 그를 뽑아 보내지 않습니까?”
이에 손권은 몹시 기뻐하며 화흠을 사신으로 삼아 표문을 가지고 허도로 올라가게 했다.
명을 받은 화흠은 곧 길을 떠나 허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작 만 나보려는 조조는 허도에 없었다. 새로 지은 동작대를 보러 문무 관 원들을 데리고 업군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화흠은 하는 수 없이 조조를 보러 업군으로 떠났다.
그때 조조는 동작대에서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적벽의 싸움 에서 진 이래 늘 원수 갚을 일을 생각해왔으나 유비와 손권이 서로 힘을 합치고 있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조조였다. 동작대가 다 지어졌다는 소식이 오자 그걸 경하한다는 명목으로 업군으로 와 서 크게 잔치를 열고 패전으로 침체된 기세를 씻어보려 했다.
장하가에 자리 잡은 동작대는 좌로 옥룡대(玉龍臺)와 우로 금봉 대(金鳳臺)란 두 대를 거느리고 있는데 모두 높이가 열 길이 넘었다. 가운데의 동작대와 그 두 대는 두 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을 뿐만 아 니라 숱한 문이며 방마다 금과 백옥이 번쩍이고 있었다. 실로 조조 의 위세를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대였다.
그날 조조의 차림도 전에 없이 화려했다. 보석 박은 금관을 쓰고 초록빛 나는 비단옷을 걸친 데다 허리에는 옥띠요, 발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신이었다. 거기다가 조조는 대 위에 높이 올라앉고, 문무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대 아래 시립하니 그대로 군왕과 그 신하들의 모임 같았다.
조조는 마음이 흡족한 중에 문득 무장들의 활 솜씨가 보고 싶어 졌다. 술자리를 벌이기에 앞서 가까이서 시중드는 자를 불러 서천에 서 나는 붉은 비단 전포 한 벌을 뜰에 있는 수양버들의 가지에 걸게 했다. 그리고 한편에다 과녁을 마련케 하고 거기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 금을 그은 뒤 무관들을 두 패로 나누었는데 한 패는 조씨 족중 (中)의 무장들로 모두 붉은 옷을 걸치게 했고, 다른 한 패는 나머 지족외(外)의 장수들로 모두 녹색 옷을 걸치게 했다.
그렇게 패를 나눈 무장들이 각기 좋은 활과 화살을 골라 들고 말 에 올라 기다리자 조조가 다시 영을 내렸다.
“과녁 한가운데의 붉은 동그라미를 맞히는 자에게는 저기 걸린 비단 전포를 내릴 것이요, 못 맞히면 벌로 물 한 사발씩을 내리겠다. 그리 알고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자는 누구든 나서서 쏘아보라.”
그러자 미처 조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붉은 옷을 걸친 패 중에서 한 소년 장수가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조 조의 조카 조휴(休)였다. 조휴는 말을 몰아 서너 차례 미리 그어는 금쪽을 오락가락하더니 문득 살을 활에 얹고 힘껏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은 어김없이 과녁 가운데의 붉은 동그라미에 가 꽂혔다. 북과 징이 울리며 모든 사람들이 갈채를 보 내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천리구駒, 천리마) 같은 아이다!”
조조도 기쁜 얼굴로 그렇게 조휴를 추켜세운 뒤 사람을 시켜 비단 전포를 주려 했다. 그때 녹색 옷을 입은 패 중에서 갑자기 말 한필이 내달으며, 이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승상께서는 마땅히 그 비단 전포를 외의 장수들이 먼저 얻을 수 있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족중의 사람에게 먼저 기회를 주신 것은 옳지 못합니다.”
조조가 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문빙이었다. 조조가 얼른 대꾸 를 않고 있는 데 곁에 있던 관원들이 입을 모아 전했다.
“잠깐 문빙의 활솜씨도 구경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문빙은 조조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역시 한 살에 과녁 가운데의 붉은 동그라미를 꿰뚫었다. 다시 북과 징이 어지럽게 울리고 보고 있던 뭇사람이 갈채를 보냈다.
“빨리 그 비단 전포를 내게로 가져오너라!”
문빙이 큰 소리로 시중드는 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때 다시 붉은 옷을 걸친 패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을 달려 나오며 꾸짖었다.
“이미 휴(休)가 먼저 맞히어 얻은 상을 그대가 어찌하여 뺏으려 드 는가? 이제 내가 쏘아 그대들 둘의 다툼을 없이할 것이니 한번 보라!”
그리고 힘껏 활을 당겼다 놓자 화살은 또한 과녁 한가운데를 꿰 뚫었다. 모두 갈채와 함께 그 장수를 보니 그는 바로 조홍(曺洪)이었 다. 그 조홍이 막 비단 전포를 차지하려 할 때 다시 녹색 옷 입은 패 에서 한 사람이 말을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라. 그대들 세 사람의 솜씨를 가지고 무어 그리 대 단하다 할 게 있겠는가? 내가 쏘는 걸 한번 보라!”
여럿이 보니 그는 장합(張郃)이었다. 장합은 말을 달리며 몸을 뒤집어 등 뒤로 화살 하나를 날렸다. 역시 화살은 어김없이 과녁 한가운데를 뚫어 붉은 동그라미 안에는 모두 네 개의 화살이 박혔다.
“좋은 활 솜씨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장합은 으스대는 듯한 말투로 소리쳤다.
“그 비단 전포는 내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붉은 옷 입은 패 중에서 다시 한 사람이 달려 나오며 장합을 꾸짖었다.
“그대의 번신배사(翻身背射, 몸을 뒤집어 뒤로 쏘는 법)인들 또한 무 어 그리 대단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과녁을 맞히는 걸 보 아라!”
이번에 나온 것은 조조의 생가 쪽 친척인 까닭으로 붉은 옷을 걸 치게 된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은 말을 달려 금이 그어진 곳에 이르 더니 완전히 몸을 반대로 틀어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살은 이미 과 녁에 꽂혀 있는 네 화살의 한가운데에 가서 박혔다. 그 놀라운 활 솜 씨에 북과 징은 전보다 더 요란스레 울리고 갈채도 한층 드높게 터 졌다. 하후연이 말고삐를 잡고 활을 제자리에 걸며 녹색 옷을 입은 패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이만하면 내가 이 전포를 차지해도 되겠소?”
그때 다시 녹색 옷을 입은 패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달려 나오며 외쳤다.
“잠깐 기다리라. 그 전포는 나 서황이 가져야겠다!”
“그대는 어떤 활 솜씨를 지녔길래 내 전포를 뺏으려 드는가?”
하후연도 지지 않고 맞섰다. 서황이 화살을 뽑아 시위에 얹으며 소리쳤다.
“그대가 과녁을 꿰뚫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내가 어떻게 저 비단 전포를 얻는가 보라!”
그러고는 비단 전포가 걸린 버드나무 가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어김없이 그 가지를 맞히자 굵지 않은 가지는 그대로 부러지 고 비단 전포는 땅에 떨어졌다. 서황은 얼른 그 비단 전포를 주워 몸 에 걸치고는 나는 듯 말을 몰아 대 아래로 가더니 조조를 향해 씩씩 하게 말했다.
“승상께서 이토록 좋은 전포를 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자 조조는 물론 그때까지 그 전포를 다투던 사람들까지 도 모두 서황의 활 솜씨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서황도 이제는 어김 없이 그 전포가 자기 것이 되었다 믿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서황이 막 몸을 돌려 나오는데 문득 대 곁에서 녹색 옷을 입은 장수 하나가 달려 나오며 크게 소리쳤다.
“그대가 어찌 그 전포를 차지할 수 있는가? 어서 빨리 내게 넘겨라!”
이제는 활 솜씨 따위도 다 집어치우자는 식의 우격다짐이었다. 모 두 놀라 그 사람을 보니 그는 다름 아닌 허저였다. 활 솜씨는 몰라도 힘으로라면 자신있다는 투의 그 같은 억지에 서황이 불끈 화가 나 꾸짖었다.
“전포는 이미 내가 얻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억지를 써서 뺏으려 하느냐?”
그러나 허저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말을 내달아 서황이 걸치고 있는 전포를 뺏으려 했다. 두 사람의 말이 가까워지자 서황은 급한 김에 활을 들어 허저를 후려쳤다. 허저는 한 손으로 서황이 내려 치는 활을 맞받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황의 안장을 떼어 뒤엎 었다.
견디다 못한 서황이 말에서 뛰어내리자 허저 또한 말에서 뛰어내 렸다. 이번에는 땅바닥에서 서로 치고 받으며 둘은 비단 전포를 다 투었다. 허저는 서황이 걸치고 있는 것을 벗겨 가려 하고 서황은 빼 앗기지 않으려고 뿌리치는 것이었으나 워낙 범 같은 장수들이라 금 세라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무엇들 하는가? 어서 둘을 말려라!”
조조가 급히 영을 내리고 여러 장수가 한꺼번에 달려 나가 서황과 허저를 떼어놓았다. 그러나 그 북새통에 그 비단 전포는 이미 갈가 리 찢겨 있었다.
“둘 다 대 위로 오르라!”
조조가 그런 서황과 허저를 불렀다. 대 위로 올라와서도 두 사람 의 투지는 여전했다. 서황은 찌푸린 미간에 성난 눈을 부릅뜨고 있 었고 허저는 허저대로 무엇이 분한지 이를 북북 갈고 있었다. 조조 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노여움을 거두라. 나는 그대들의 용맹스러움을 본 것만으로도 기껍기 짝이 없다. 까짓 비단옷 한 벌이 무어 아까울 것 인가.”
그러고는 모든 장수들을 대 위로 불러 올린 뒤 각자에게 촉(蜀)에 서 난 좋은 비단 한 필씩을 내려주었다. 뜻밖에 귀한 상을 받게 된 장수들은 한결같이 조조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활 솜씨 겨루기로 일었던 무장들간의 한바탕 북새통이 가라앉은 뒤에야 조조는 술자 리를 벌였다. 문무의 관원을 각기 위계에 따라 자리를 잡게 한 뒤 수 레바퀴 돌리듯 술잔을 내리고 또 돌아오는 잔을 받는 방식이었다. 악기 소리가 뭍과 물에서 자지러질 듯 울려퍼지는 가운데 흥이 오른 조조가 문득 문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장들은 이미 기사(騎射, 말 타고 쏘는 활)로 즐거움을 주었을 뿐 만 아니라 스스로의 위엄과 용맹을 떨쳐 보임에도 넉넉했다. 이제는 그대들 문사)의 차례다. 그대들은 모두 뱃속 가득 배움을 채운 이들로 오늘 이 높은 동작대에 올랐으니 아름다운 글을 지어 올려 이 좋은 한때를 길이 남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내 생각이 어떤가?”
“높으신 뜻에 따르겠습니다.”
모든 문관들이 그 말에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이때 조조의 곁에 는 왕랑(郞), 종요(鍾繇), 왕찬(王粲), 진림(陳琳)을 비롯한 건안(建 安) 문단의 쟁쟁한 명사들이 많았다. 조조의 뜻에 따라 각기 시장(詩 章)을 지어 바치는데, 그중에는 조조의 공덕이 크나큼을 칭송함과 아울러 마땅히 한으로부터 천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이 든 글이 많았다. 조조는 그 글들을 한차례 죽 훑은 뒤에 씁쓸히 웃으며 말 했다.
“여러분의 글은 아름다우나 지나치게 나를 높이 추켰구려. 나는 본래 어리석고 모자라는 자로 효렴(孝廉)에 뽑힘으로써 처음 벼슬길 을 시작했소. 그러나 뒤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초() 땅 동쪽 오십 리 되는 곳에 정사(精舍)를 얽고 봄 여름은 책으로, 가을 겨울은 사냥으로 보내려 했소이다. 천하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벼슬길에 나갈 작정이었던 것이오. 하나 뜻밖에도 조정이 나를 점군교위(點軍 校尉)로 부르매 그때부터 나는 나라를 위해 역적들을 치고 공을 세 우는 일에 매달렸소. 내가 바란 것은 다만 죽은 뒤 묘비에 한고정서 장군(漢故征西將軍)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적히는 것이었을 뿐이 외다.
그리하여 동탁을 치고 황건적을 쓸었으며 원술을 없애고 여포를 죽인 데다 원소를 깨뜨리고 유표를 정벌하여 천하를 평안케 한 지금 내 뜻은 거의 이룬 바나 다름없소. 거기다가 몸은 이미 승상에 이르 러 신하 된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되었으니 이 위에 또 무엇을 더 바라겠소? 만약 나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실로 얼마나 많은 하찮은 것들이 천자를 칭하고 왕을 칭했을지 모르는 일이오. 혹 어떤 사람은 내 권세가 무거운 것을 보고 내가 딴마음을 품고 있 지 않은가를 의심하나 그것은 크게 틀린 생각이오. 나는 항상 공자 께서 문왕(王)의 높은 덕을 칭송하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소. 그럼에도 내가 지금 병권을 내놓고 무평후(武侯)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데는 실로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병권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니,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은 곧 나라가 기울고 위태로워진다는 뜻이오. 따라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빈 이름을 지킴으로써 실제로 닥칠 화를 막고 있 을 뿐이외다. 여러분은 아무래도 그런 내 뜻을 바로 알고 있지 못하 는 듯싶소.”
솔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스스로를 문왕에 비함으로써 자신은 문왕이 은(殷)을 섬긴 것처럼 그대로 한(漢)을 섬기겠지만, 자신의 아들 대(代)에 이르러서는 무왕(武王)이 주 (周)를 세웠던 것처럼 새로운 왕조를 열 수도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암시한 셈이었다.
조조의 말에 감추어진 속뜻도 모르고 그저 충성을 다해 한실(漢 室)을 섬기겠다는 다짐에만 감동된 관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절하며 말했다.
“비록 이윤(伊)이나 주공(周公)이라 할지라도 승상을 따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조조는 더욱 흥이 올랐다. 잇따라 몇 잔을 들이켜더니 자 신도 모르게 취해 좌우를 보고 소리쳤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내 오늘 이 동작대를 노래하는 멋진 를 한 수 지으리라!”
그리고 곧 붓을 들어 시를 써내려 가려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동오에서 화흠을 보내 유비를 형주목으로 삼아달라는 표문을 올 려왔습니다. 또 손권은 그 누이를 유비에게 시집 보냈고 한상(漢) 의 아홉 군도 거의 모두 유비의 것이 되었다 합니다.”
조조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손발 이 어지러워져 들고 있던 붓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걸 본 정 욱(程)이 물었다.
“승상께서는 수많은 군사들 틈에서 돌과 화살이 비 오듯 할 때도 그리 놀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비가 형주를 얻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놀라십니까?”
조조가 술이 확 깬 얼굴로 탄식하듯 대꾸했다.
“유비는 사람 가운데 끼어든 용 같은 인물로 아직껏 그 놀 물을 얻지 못했을 뿐이오. 그런데 이제 형주를 얻었다 하니 이는 고단한 용이 큰 바다로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내가 어찌 놀라지 않 겠소!”
“그럼 승상께서는 화흠이 온 뜻도 알고 계십니까?”
정욱이 조조의 말을 듣고 다시 그렇게 물었다. 조조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소.”
그러자 정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흠이 온 뜻을 알면 승상께서도 그리 낙심하실 까닭은 없을 것 입니다. 원래 손권은 유비를 꺼려하여 군사를 몰아 쳐부수고 싶었으 나 승상께서 그 틈을 타 내려오실까 봐 그러지 못하고 화흠을 먼저 보내게 한 것입니다. 화흠을 통해 유비를 형주목으로 천거하는 표문 을 올림으로써 유비를 마음 놓게 하는 한편 승상께서도 더는 동남 (東南)을 엿보시지 못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곧 유비를 위해 애쓰는 체하면서 유비와 승상을 함께 속이려는 수작이지요.”
그제서야 조조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게 보셨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소?”
“제게 한 계책이 있어 유비와 손권이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습니 다. 승상께서 그 틈을 타 그들을 치신다면 북소리 한번에 그 둘을 모 두 깨뜨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조조가 반색을 하며 급히 정욱에게 물었다. 정욱은 조금도 머뭇거 림 없이 이미 생각해둔 꾀를 쏟아놓았다.
“동오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주유입니다. 이제 승상께서는 표문을 올려 주유를 남군 태수로 삼고 정보를 강하 태수로 세우게 하십시 오. 그러면 남군과 강하는 모두 형주의 턱밑이라 주유는 절로 유비 와 싸워 원수 간이 될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그들이 서로 싸우는 틈 을 타 하나씩 쳐부순다면 이 아니 좋은 계책이겠습니까? 다만 주유 와 정보를 태수로 봉할 때는 화흠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어 조정에 잡아두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유와 정보가 갑작스레 떨어진 태수 자리를 의심하지 않을 뿐더러 화흠이 동오로 돌아가 이곳의 내막을 알리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중덕(德)의 말이 바로 내 뜻과 같소.”
조조도 선뜻 정욱의 말에 찬동하고 곧 화흠을 동작대 위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 유비와 손권의 화친에 위압된 양 꾸미면서 화흠에게 무거운 상을 내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날로 잔치를 끝낸 조조는 다음 날 문무 관원 들과 더불어 허창으로 돌아가기 바쁘게 천자께 표문을 올렸다. 주유 를 남군 태수로 삼고 정보를 강하 태수로 삼으며, 또 화흠은 대리시 경(大理寺卿)으로 삼아 허도에 머물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유비는 유비대로 형주목을 삼게 해달라고 상주했다.
이름뿐인 천자가 두말 없이 조조의 주청을 허락하니 곧 조칙을 받든 사자가 동오로 달려 내려갔다. 갑작스레 조정으로부터 태수의 벼슬을 받은 주유와 정보는 각기 어리둥절한 대로 그 인수를 받았다. 그러나 화흠이 허창에 높은 벼슬을 받고 남아 있어 거기에 특별 히 딴 뜻이 숨겨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욱의 계책이 뜻한 바대로 되어가기 시작한 것은 주유가 남군으 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멀리 시상에 있을 때보다 유비와 경계를 맞 대고 있는 그곳으로 옮겨 앉자 주유는 더욱 지난날 받은 치욕을 참 을 수가 없었다.
주유는 밤낮으로 유비에게 원수 갚을 일만 생각하다가 마침내 손 권에게 글을 올렸다. 어서 노숙을 보내 형주를 쳐서 되찾으라는 재 촉이었다. 자신은 지난번의 실수도 있고 해서 함부로 나서지 못했 다. 주유의 글을 받은 손권은 곧 노숙을 불러 말했다.
“자경(敬)은 전에 유비가 형주를 비는 데 보증이 되었더랬소. 그 런데 아직도 유비는 날만 끌고 형주를 돌려주지 않고 있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릴 작정이시오?”
“문서에 뚜렷이 씌어 있기로는 서천을 얻는 대로 곧 형주를 돌려보낸다 했습니다.”
노숙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손권이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말은 서천을 얻는다 하지만, 여태껏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사람이 늙기라도 기다린단 말이오!”
“그렇다면 제가 한번 유비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노숙이 낯이 없어 스스로 그렇게 나왔다. 손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숙은 그 길로 배를 타고 형주로 갔다.
그 무렵 형주의 유비는 공명과 더불어 널리 곡식과 돈을 거두어 들이고 군사와 말을 열심히 조련하며 힘을 기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원근의 뜻있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드니 날이 갈수록 유비의 세력은 커갈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사람이 와서 유비에게 알렸다.
“동오에서 노숙이 왔습니다.”
“자경이 이번에 오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유비가 곁에 있던 공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공명은 이미 노숙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난날 손권이 주공을 형주목으로 천거한 것은 조조를 두려워한 까닭입니다. 우리 두 집안의 사이가 좋음을 짐짓 과장해 조조로 하 여금 두 번 다시 동남을 엿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지요. 하지만 조 조도 거기에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주유를 남군 태수로 봉하게 했습 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두 집안이 서로 싸우게 해놓고 가운데서 이 득을 얻으려는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노숙이 오고, 또 주유가 이미 남군 태수의 자리를 맡았으니 반드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형 주를 돌려달라는 것일 겝니다.”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겠소?”
“주공께서는 만약 노숙이 형주의 일을 꺼내기만 하면 크게 목놓 아 울도록 하십시오. 울음소리가 한껏 슬픔에 찰 무렵이면 제가 나 와 일을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는 유비에게 그렇게 일러준 뒤 공명은 곧 노숙을 맞아들이러 나갔다.
노숙이 들어와 유비에게 예를 하자 유비도 정중히 답례하고 자리를 권했다. 노숙이 사양하며 말했다.
“이제 황숙께서는 우리 동오의 사위가 되셨으니 곧 이 노숙에게 도 주인이 되십니다. 어찌 감히 마주앉을 수 있겠습니까?”
“자경은 나와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온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 토록 겸손을 떠시오?”
유비가 웃으면서 거듭 권했다. 이에 노숙도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았다. 차가 나오자 잠시 이런저런 얘기로 변죽을 울리던 노숙이 이윽고 찾아온 까닭을 밝혔다.
“오늘 제가 오후(吳侯)의 명을 받고 이리로 온 것은 순전히 형주 의 일 때문입니다. 황숙께서는 이 땅을 빌려가신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계십니다. 이제 양가가 혼인으로 맺어졌으니 서로의 낯을 보더라도 어서 빨리 돌려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문득 유비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저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목놓아 우는 것이었다.
“황숙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슬피 우십니까?”
노숙이 놀라 물었다. 그러나 유비는 대답 대신 더욱 구슬픈 울음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때 공명이 병풍 뒤에서 나오며 조용히 노숙에게 말했다.
“미안하외다. 이 양이 엿들은 지 오래되오. 그런데 자경은 정말로 우리 주공께서 왜 이토록 슬피 우시는지 모르시겠소?”
“나는 실로 알 수가 없소.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노숙이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공명에게 되물었다. 공명이 딱하다는 듯한 투로 노숙의 말을 받았다.
“뻔한 걸 어찌 그리 못 보시오? 처음 우리 주공께서 형주를 빌 때 서천만 얻으면 곧 돌려주기로 하였소.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 시오. 익주의 유장(劉璋)은 우리 주공의 아우뻘이 될 뿐만 아니라 넓 게는 같은 한조(朝)의 골육 간이오. 만약 그런 유장이 다스리는 성 지(池)를 우리 주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빼앗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공을 침 뱉으며 욕할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라도 서천 을 뺏지 않고 형주만 돌려주어 버린다면 우리 주공께서는 대체 어디 에다 몸을 두신단 말이오? 그렇다고 형주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이 번에는 또 장모와 처남을 좋은 낮으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일 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있소이다. 어찌 애가 끊어지고 눈물날 일이 아니겠소?”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처량한 자신의 처지에 유비는 정말로 슬픔 이 복받쳤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목을 놓아 슬피슬피 울었다. 보다 못한 노숙이 말렸다.
“황숙께서는 잠시 걱정을 거두십시오. 제가 공명과 더불어 앞날을 길게 잡고 계책을 의논해보겠습니다.”
공명이 기다렸다는 듯 노숙의 말을 받았다.
“의논이고 뭐고 자경께서 한번만 더 번거로움을 무릅써주시오. 말 한마디 해주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마시고, 오후께 돌아가 우리 주공 께서 이토록 괴로워하시는 정을 전해주시면 될 것이오. 간곡히 말씀 드려 다시 한번 얼마간의 시간을 빌려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겠소이다.”
“만약 오후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그때는 어쩌시겠소?”
노숙이 왠지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에 공명을 경계하며 그렇게 물었다. 공명은 그런 노숙을 달래듯 말했다.
“오후께서는 이미 친누이를 황숙께 출가시켰는데 그쯤이야 어찌 들어주지 않겠소? 바라건대 자경께서는 잘 말씀드려 두 집안 사이 가 전처럼 사이좋게 되돌아가도록 해주시오.”
지난날 유비를 잡기 위해 미끼로 삼았던 손부인이 이제는 도리어 은근히 짐이 되는 인질로 변해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노숙은 관대하 고 어진 사람이었다. 다만 유비가 그토록 슬퍼하는 게 딱해 다른 것 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공명의 말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유비와 공명은 노숙에게 절하여 감사하고 크게 잔치를 열어 대접 한 뒤 보냈다. 형주를 떠난 노숙은 동오로 돌아가는 길에 주유부터 먼저 만났다. 노숙이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하자 주유는 발을 구르며 노숙을 나무랐다.
“자경은 또 제갈량의 꾀에 걸려들었소이다그려. 유비는 전에 유표 에게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형주를 삼킬 뜻을 품고 있었소. 하 물며 서천의 유장 따위겠소? 유장이 아우뻘이 되느니, 다 같이 한조 의 골육이 되느니 하는 소리는 다만 핑계에 지나지 않소. 그 말을 그 대로 오후께 전했다가는 화가 자경에게까지 미치리다. 그러니 내계 책을 따르시오. 이번만은 제갈량도 내 헤아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자경은 다시 한번 다녀오기만 하면 되오.”
“바라건대 그토록 묘한 계책이 어떤 것인지 한번 들려주십시오.”
노숙이 갑작스레 불안해진 얼굴로 주유에게 청했다. 주유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자경께서는 오후를 뵈오러 가실 필요가 없소. 다시 형주로 가서 유비더러 말해보시오. 손씨와 유씨 두 집안은 이미 혼인을 맺어 한 집안이 되었으니 만약 유씨가 골육이 다스리는 서천을 차마 뺏지 못 한다면 손씨인 우리 동오가 군사를 일으켜 대신 뺏으면 어떠냐고. 그리하여 우리가 서천을 얻은 뒤에는 그걸 군주(君, 손부인)의 혼숫 감으로 유씨네에 내주고 형주를 되돌려받으면 어떠하겠느냐고.”
주유의 그 같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노숙이 걱정스레 대꾸했다.
“서천은 땅이 험하고 외져 얻기에 쉽지 않습니다. 도독의 그 계책 은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유가 음침하게 웃으며 깨우쳐주었다.
“자경은 참으로 장자(長)시오. 내가 정말로 서천을 쳐서 그 땅을 유비에게 주리라 믿고 하시는 말씀이오? 하지만 내가 비는 것은 서 천을 친다는 명목뿐이고, 실제로는 형주를 쳐서 뺏을 작정이오. 자 경께서 유비에게 가서 할 일은 다만 그를 마음 놓게 하여 나의 공격 에 대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우리 동오의 군마가 서천을 뺏으 러 가자면 형주를 지나야 하는데 그때 그쪽에다 곡식과 돈을 좀 대 달라고 하면 유비는 반드시 성을 나와 우리 군사들을 위로하러 올 것이오. 나는 그 틈을 타 유비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아 나의 한을 씻 을 뿐만 아니라 자경에게 닥칠 화도 풀어드릴 작정이오.”
실로 교묘하고도 무서운 계책이었다. 노숙의 사람됨이 원래 그리 모질지 않았으나 자신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그 같은 주유의 묘책을 듣자 기쁨부터 일었다. 한마디 물음조차 던지는 법이 없이 곧 형주로 다시 갔다.
노숙이 되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유비는 공명을 불러 이번에는 어 떻게 그를 맞아야 할지를 물었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노숙은 틀림없이 오후를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유를 만나 보고 둘이서 계책을 세워 우리를 꾀러 왔을 뿐입니다. 노숙이 와서 달래는 말을 하거든 주공께서는 그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시면 서 입으로는 무어든 좋다고 응해주십시오.”
이에 유비는 거기에 따르기로 하고 곧 노숙을 불러들이게 했다. 불 려온 노숙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유비에게 주유가 시킨 대로 말했다.
“오후께서는 차마 동종(同宗)의 땅을 뺏지 못하겠노라는 황숙의 말씀을 들으시고 황숙의 크신 덕을 기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 고 여러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황숙을 대신해 군사를 일으켜 서천을 뺏기로 결정을 보셨습니다. 서천을 뺏으면 형주를 돌려받고 대신 그 서천땅을 이번 혼인의 혼숫감으로 황숙께 드리려는 것입니다. 다만 황숙께서는 우리 군마가 이곳을 지나갈 때 약간의 곡식과 돈이나 대 어주셨으면 하는 게 오후의 바람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로 오후같이 마음씨 좋은 분도 드물 것이오. 고맙소이다.”
유비도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뜻을 나타내며 그런 공명의 말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자경께서 잘 말씀드려준 덕분일 것이오. 무어라고 마움을 나타내야 할지 모르겠구려.”
“귀국의 씩씩한 군사가 이곳에 이르는 대로 멀리 나가 맞아들이고 배불리 먹이며 위로하도록 채비하겠습니다. 그거야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명이 다시 유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상하가 이렇게 손뼉이 맞아 돌아가니 노숙은 속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주유의 계책이 맞아 떨어졌다 싶어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술자리에 앉았다가 곧 주유에게로 돌아갔다.
“선생께서는 저들의 속셈이 다른 데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왜 그러셨소?”
노숙이 돌아가기 바쁘게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주랑(郞)이 드디어 죽을 때가 가까워진 모양입니다. 제 딴에는 묘책이라고 이번 일을 꾸민 모양이지만 그것 가지고는 어린아이도 속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유비가 그래도 공명의 속을 짐작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공명이 자르듯 말했다.
“이는 바로 길을 빌리는 체하며 괵(虢,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을 멸한 다는 계책[滅虢之입니다. 거짓으로 이름을 내걸기는 서천을 친다 하고 실제로는 우리 형주를 뺏으려는 수작이지요. 주공께서 성 을 나가 저희 군사를 위로하실 때 틈을 보아 주공을 사로잡고, 그대 로 성안으로 짓쳐들어 방비 없는 성을 뺏으려는 것입니다. 뜻 아니 한때 덮쳐 적을 이긴다는 계책이지만 이 양이 있는 한 아니 될 것 입니다.”
“그래 군사께서는 어떻게 막으실 작정이오?”
“주공께서는 마음 놓으십시오. 다만 큰 활을 마련해 기다리다 사나운 호랑이를 잡으시고, 향기로운 미끼를 달아 자라와 물고기를 낚 으시면 됩니다. 주유가 이번에 와서 비록 죽지는 않는다 해도 기운 은 모조리 뽑히고 말 것입니다.”
공명은 그렇게 유비를 안심시킨 뒤 조운을 불렀다.
조운이 오자 공명은 나직이 계책을 일러주며 덧붙였다.
“그대는 이대로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손을 써두겠다.”
곁에서 듣고 있던 유비는 그제야 공명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 번에도 주유가 꼼짝없이 당하고 말리라 생각하며 비로소 마음을 놓 았다.
한편 주유에게 돌아온 노숙은 유비와 공명이 오히려 기뻐할 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더란 말을 전했다. 그리고 성을 나와 오군을 위로하겠다는 유비의 약조까지 곁들이니 주유는 크게 기뻤다.
“이제야 겨우 내 계책이 맞아떨어졌구나!”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한 다음 노숙에게 일렀다.
“자경께서는 어서 이 일을 오후께 알리시어 정보로 하여금 군사 를 이끌고 함께 호응케 해주시오.”
노숙이 명을 받고 손권에게로 돌아가자 주유는 곧 군사를 일으키 기 시작했다. 감녕이 선봉을 맡고 주유 자신은 서성과 정봉을 데리 고 중군이 되었으며 능통과 여몽은 후대가 되었다. 군사는 물과 뭍 을 합쳐 오만의 대병이었다.
이때 주유는 전에 장요와의 싸움에서 얻은 금창이 거의 나아 몸을 움직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형주로 몰려가는 뱃전에 앉아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공명을 비웃었다.
‘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이번에는 내 계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다가 전군이 하구에 이르렀단 말을 듣자 문득 사람을 불러 물었다.
“형주에서 나와 맞는 사람이 없느냐?”
“유황숙께서 미축을 보내 도독을 뵙도록 했다 합니다.”
질문을 받은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주유는 미축을 불러들이게하고 물었다.
“황숙께서는 어떻게 우리 군사들을 위로한다고 하십니까?”
“주공께서 모두 준비하고 계십니다.”
미축이 그렇게 대답하자 주유가 다시 물었다.
“황숙께서는 어디 계시오?”
그런데 미축의 이번 대답이 좀 미심쩍었다.
“주공께서는 성문 밖에 나와 도독과 함께 술잔을 나눌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비가 성문 밖에 나와 있다고는 하나 멀리까지 올 뜻은 없어 보 였다. 주유가 문득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미축에게 말했다.
“이번 원정은 그대들 집안을 위한 일이오. 군사를 내어 멀리까지 왔으나 그들을 위로함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 이오.”
“알겠습니다.”
미축은 그렇게 대답하고 주유의 뜻을 전한다며 먼저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주유는 그 뒤를 따라 강물 위에 빽빽이 늘어선 싸움배를 몰고 나 아갔다. 공안에 이르도록 아무리 살펴도 배 한 척 떠 있지 않고 사람 하나 나와 맞는 법이 없었다. 형주성 십리 밖에 이르러도 마찬가지 였다. 강물만 거세게 흐를 뿐 배 한 척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먼 저 정탐을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주유에게 알렸다.
“형주성 위에는 백기 둘만 서 있을 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하 나 비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주유도 의심이 일기 시작했다. 얼른 배를 강 언 덕에 대게 하고 몸소 뭍에 올랐다. 그리고 감녕, 서성, 정봉 및 한 떼의 군관들과 날랜 군사 삼천을 거느린 채 형주성으로 달려갔다. 주유가 성 아래 이르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주유 는 군사들을 시켜 문을 열라고 소리치게 했다. 그때서야 성 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누가 문을 열라 소리치느냐?”
“우리는 동오의 군사들이다. 주도독께서 몸소 이리로 오셨으니 어 서 문을 열라!”
동오의 군사들이 소리쳐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딱딱이 소리가 나며 성 위의 군사들이 일제히 창칼을 세웠다. 그들 가운데서 조운 이 나타나더니 비웃듯 물었다.
“도독께서는 한마디로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오셨소?”
주유가 시치미를 떼며 대꾸했다.
“나는 그대의 주인을 대신해 서천을 빼앗으러 가는 길이다. 그대는 아직도 그 일을 모르는가?”
주유의 그 같은 대꾸를 조운이 찬 웃음으로 맞받았다.
“공명 군사께서는 그것이 가도멸괵(假途滅虢)하려는 계책임을 이 미 아시고 이 조운을 여기 있게 하셨소이다. 우리 주공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으시오. 곧 ‘나와 유장은 모두 한실의 종친인데 어찌 차마 의를 저버려가며 서천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들 동오에 서 굳이 그 땅을 뺏으려 한다면 나는 차라리 머리를 풀고 산으로 숨 어 천하에 대한 신의를 지키겠다’ 하셨소이다.”
그 말을 들은 주유는 비로소 또 한번 제갈공명의 꾀에 빠졌음을 깨 달았다. 깜짝 놀라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려는데 ‘영(令)’ 자를 쓴 깃발을 앞세운 군사가 말 앞으로 달려와 알렸다.
“제가 살펴보니 네 갈래 군마가 한꺼번에 이리로 짓쳐오고 있었 습니다. 첫째는 관우가 이끄는데 강릉으로부터 몰려오고, 둘째는 장 비가 이끄는데 자귀에서부터 몰려드는 중입니다. 공안에서 밀고 들 어오는 황충의 군마가 그 셋째요, 이릉에서 치고 들어오는 위연이 그 넷째인데, 그 네 갈래를 다 합치면 얼마가 될지 모를 대군입니다. 인근 백 리를 뒤흔드는 함성 소리는 모두가 주유를 사로잡으란 외침 뿐입니다.”
그 말에 주유는 두려움에 앞서 노기부터 솟구쳤다. 가슴에 불덩이 같은 것이 콱 막히는 듯하며 겨우 아문 옛 상처가 다시 터져 한 소 리 성난 외침과 함께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곁에 있던 장수들이 급히 주유를 구해 배로 옮겼다. 주유가 배위에서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딴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유비와 제갈량이 앞산 꼭대기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습니다.”
눈치 없는 그 소리에 주유는 속이 뒤집힐 듯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내가 서천을 뺏지 못할 줄 알지만 내 맹세코 서천을 손 에 넣으리라!”
그러면서 유비와 공명이 있는 산 위를 노려보고 있는데 문득 사 람이 와서 손권의 아우 손유瑜)가 온 걸 전했다. 주유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하자 손유가 위로하듯 말했다.
“나는 형님의 명을 받들어 도독을 도우러 왔소이다. 도독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군사를 나아가게 하십시오.”
이에 힘을 얻은 주유는 곧 군사를 재촉해 서천으로 나아갔다. 동 오의 군사들이 파구에 이르렀을 때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상류에 유비의 장수 유봉과 관평이 군사를 이끌고 물결을 막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주유는 또다시 노기가 솟구쳤다. 힘을 다해 들이 쳐 길을 열려는데 문득 사람이 와 새로운 전갈을 전해왔다.
“제갈량이 사람을 보내 도독께 글을 바쳐왔습니다.”
제갈량이 보냈다면 결코 반가울 까닭이 없는 글이었으나 주유는 그 글을 받기 바쁘게 뜯어 보았다. 거기에는 대략 이런 뜻이 실려 있 었다.
‘한 군사중랑장(軍師) 제갈량이 동오의 대도독 공근 선생께 보내노라.
시상에서 한번 헤어진 뒤로 늘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다가 이제 그대가 서천을 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몇 자 쓰오. 양이 가만히 헤아 려보니 그 일은 아무래도 될 것 같지가 않소이다. 익주는 그 백성들 이 굳세고 땅이 험해 유장이 비록 어리석고 약하다 해도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넉넉하오. 그대가 하려는 일은 지친 군사로 먼 길을 가 공을 이루려 함이니, 비록 오기(起) 같은 이가 온다 해도 그 규율 을 세우기 어려울 것이요, 손무자 같은 이가 온다 해도 마침내는 그 끝을 잘 맺을 수 없으리다. 거기다가 조조가 비록 적벽에서 졌지만, 그 마음이야 짧은 순간인들 어찌 그때의 원수 갚음을 잊을 리 있겠 소이까? 그대가 군사를 일으켜 먼 곳을 치는 동안 조조가 그 틈을 엿보아 내려오게 되면 강남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니 이 양은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특히 이와 같이 일러주는 바 이오. 부디 밝게 헤아려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시오’
비웃음이나 놀리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 엄숙한 깨우침이었 다. 공명의 글을 다 읽은 주유가 문득 긴 탄식을 내뱉더니 좌우를 불 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했다. 자신의 목숨이 오래지 않음을 깨달 은 듯 오후에게 마지막 글을 남기려 함이었다.
이윽고 종이와 붓이 오자 오후에게 올리는 글을 쓴 주유는 다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천명이 이미 다했으니 어쩌는 수가 없구나. 그대들은 부디 오후를 잘 섬기어 함께 대업을 이루도록 하라.”
그러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중에 다시 한번 정신을 차렸으나 주유가 하늘을 우러르며 뱉은 것은 원망 섞인 한마디 탄식뿐이었다.
“이미 주유를 낳았거든 제갈량은 또 왜 낳으셨던가!”
그런 다음 몇 마디 뜻 모를 외침 뒤에 숨졌는데 그때 주유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 죽음을 노래했다.
적벽 싸움에서는 씩씩하고 매운 기상, 赤壁遺雄烈
젊었을 때는 빼어났다 소리도 많았다. 青年有駿聲
거문고와 노래 높은 뜻 알 만하고 絃歌知雅意
술잔 들어 좋은 벗 사귀기도 했다. 盃酒謝良朋
일찍이 삼천 섬 군량 내게 하고 會謁三千斛
언제나 십만 군사 몰고 다녔다. 常驅十萬兵
파구 그 목숨 다한 땅에서 巴丘終命處
그 죽음 문상하자니 가슴 아프다. 憑弔欲傷情
주유가 죽자 그 아래 장수들은 곧 손권에게 그 소식을 알림과 아 울러 주유가 남긴 글을 전했다. 주유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손권은 목놓아 울며 주유의 마지막 글을 펴보았다.
‘주유는 범용한 재주밖에 없었건만 남다른 살피심을 입어 언제나 가까이서 병마를 거느리는 일을 맡아왔습니다. 어찌 팔다리의 힘을 다해 이 몸을 알아준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 나 삶과 죽음은 헤아릴 길이 없고 주어진 목숨은 짧아 어리석은 뜻 을 펼쳐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게 되었으니, 남은 한(恨) 실로 그 끝을 모르겠습니다. 이제 조조는 북쪽에 자리 잡아 그 땅을 아직 평 정하지 못했고 유비는 우리에게 기대 살아도 또한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다름없어 천하의 일은 아직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바야 흐로 조정의 선비들에게는 일에 바빠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할 가을 같은 때요, 임금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드리워진 나날이라 하겠습니 다. 노숙은 충성스럽고 굳세며 일에 임해서는 거리낌이 없으니 넉넉 히 이 주유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 하였거니와 주공께서 제 이 뜻을 거두어들여 주신다면 저는 죽어서 도 주공의 크신 은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유의 글은 대략 그렇게 끝나 있었다. 유비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서로 달랐음에도 주유는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한 것이었다. 주유의 글을 다 읽은 손권은 다시 목을 놓아 울며 말했다.
“공근은 이 사람을 도와 왕업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 으나 이렇게 갑자기 죽었으니 이제 나는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 가! 하지만 이미 글을 남겨 자경을 추천하였는데 내 어찌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그날로 명을 내려 노숙을 도독으로 삼고 주유가 거느렸 던 병마를 모두 다스리게 하는 한편, 주유의 영구를 옮겨와 후히 장 사 지내게 했다. 어떻게 보면 단명은 동오의 창업에 관계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견이 서른일곱, 손책이 스물여섯에 죽었으며 태사자가 마흔하나에 죽은 데다 이제 또 주유 가 서른여섯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유가 숨질 무렵 형주의 공명은 밤에 천문을 보고 있었다. 장성(將星) 하나가 땅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주유가 죽었구나.”
비록 적이라도 아까운 인물이었으나 아직 공명에게는 주유를 아까워할 여유가 없었다. 힘든 상대를 제거한 후련함만이 우선 그를 지배하는 감정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