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2화 : 비상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날개
비상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날개
공명은 날이 밝는 대로 유비를 찾아가 주유가 죽은 것을 알렸다. 어지간하면 공명의 말을 믿는 유비도 그것만은 그냥 믿을 수 없는지 사람을 동오로 보내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주유가 정말로 죽은 게 확인되자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주유가 죽었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소?”
“주유를 대신해 동오의 군사를 거느릴 사람은 반드시 노숙일 것 입니다. 그는 우리와 가까운 사이니 당장은 별일이 없겠지요. 그런 데 어젯밤 제가 천문을 보니 장성(將星)이 동방에 모여들고 있습니 다. 주유를 문상한다는 핑계로 제가 동오에 건너갔다 와야겠습니다. 어진 선비를 찾아 주공을 돕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의 그 같은 대답에 유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동오로 가시는 것은 좋지만 그곳 사람들이 선생을 해치지나 않을까 두렵소.”
그 말에 공명이 빙긋 웃으며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유가 살아 있을 때도 저는 두려워 않고 동오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주유가 죽었는데 또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고는 곧 조운에게 오백 군사를 주어 따르게 한 뒤 제사에 쓸 물건들을 갖추어 배에 올랐다. 파구로 가는 도중에 사람을 놓아 알 아보니 손권은 이미 노숙을 도독으로 삼았고, 주유의 영구는 시상으 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명은 뱃머리를 시상으로 돌렸다. 공명이 시상에 이르니 노숙이 나와 공명을 맞아들였다.
주유 밑에 있던 장수들은 한결같이 공명을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조운이 칼을 찬 채 뒤따르고 있어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명은 태연하기만 했다. 가져간 제물을 주유의 영 전에 차리게 한 뒤 스스로 술을 따르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제문 을 읽어나갔다.
“슬프구나 공근(公瑾)이여, 불행히도 일찍 죽었구려.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하늘에 매인 것이라 하나 사람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 마음 실로 아파 한잔 술을 부어 올리오니 넋이라도 있 거든 부디 이 정성을 거두어주시오.”
공명은 거기까지 읽고 목이 메어 한참을 흐느끼다가 다시 읽어나갔다.
“그대 어릴 적 배움의 때를 생각하고 슬퍼하노니, 그대는 손백부 (孫, 손책)를 사귐에 의(義)를 짚어 재물을 나누어 썼고, 집을 비켜주어 살 곳을 마련해주었소. 그대 젊은 시절을 생각하고 슬퍼하노 니, 그대는 만 리의 대붕(鵬)을 잡듯 패업을 일으켜 강남에 할거하 였고 그대의 장년(壯年)을 생각하고 슬퍼하노니, 그대는 멀리 파구 를 지키며 유경승(劉景升, 유표)을 달래고 역적을 쳐 나라의 걱정거 리를 없이 하였소. 그대의 풍도를 생각하고 슬퍼하노니, 그대는 소 교(小喬)를 배필로 맞아 한나라 신하의 사위로서 조정에 부끄러워할 바가 없었으며, 그대의 기개를 생각하고 슬퍼하노니, 그대는 그른 것을 말리고 옳은 것은 받아들여 처음에는 날개를 펼치지 못했으나 끝에는 크게 떨쳐 솟구쳤소. 파양호에서 장간(蔣幹)이 달래러 찾아 왔을 때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니, 그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를 맞 아들여 넓은 도량과 높은 뜻을 보여주었고, 그대의 큰 재주를 생각 하며 슬퍼하노니, 문무의 주략略)에 두루 능한 그대는 불로 적을 쳐 깨뜨림으로써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도왔소…….”
거기서 공명은 다시 한번 흐느낌으로 읽기를 그쳤다가 이어서 읽 었다.
“그대 살았을 적 씩씩한 모습과 빼어난 기상을 떠올리고 때 아닌 죽음을 슬퍼하며 엎드려 우노라. 그대 비록 서른여섯에 삶을 마쳤으 나[命終三紀] 이름은 백세에 드리우리. 그대의 죽음을 애달퍼하는 정, 시름 가득한 창자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얽힌 듯하고 간담은 슬픔으 로 쪼개지는 듯하구려. 하늘은 빛을 잃은 듯 어둡고 삼군은 쓸쓸한 데, 주군은 슬피 울고 벗들도 눈물을 그칠 줄 모르고 있소…….”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되될 수 없는 말이었다. 듣는 사람들의 흐느낌이 새삼 높아가는데 눈물을 훔친 공명이 다시 읽어나갔다.
“이 양은 재주 없는 사람이라 그대가 죽은 이제 어디 가서 계책을 빌고 꾀를 물을 수 있으리오. 어떻게 동오를 도와 조조에게 맞서게 하며, 무슨 수로 한실을 돕고 유씨를 지킬 수 있겠소. 그대가 살아 있어 서로 돕는 형세를 이루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듯 할 수 만 있다면 흥하든 망하든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리 까…….”
거기서 절정에 이른 공명의 조사는 이윽고 주유에게 영결을 고하 기 시작했다.
“오오, 슬프다, 공근이여. 이렇게 삶과 죽음으로 영영 나뉘는구려. 그대의 곧음 길이 마음에 지니려 하나 그리운 모습은 어느새 아물아 물 사라지는 듯하오. 넋이라도 있으시면 내 마음을 굽어 살피시오. 이제 하늘 아래서는 두 번 다시 그대 같은 벗을 얻지는 못하리라. 다 시는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리……………. 아아, 슬프도다. 다만 엎드려 잔 올리며 그대가 받아주기를 빌 뿐이다.”
공명은 읽기를 마치자 그대로 땅에 엎드려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샘솟듯 흐르는 눈물로 보아 진정으로 슬퍼해 마지않는 사람 같았다. 그런 공명을 보고 있던 장수들도 절로 감동되어 서로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주유와 공명이 서로 화목하지 않다 했지만 이제 공명이 슬퍼하는 걸 보니 그게 오히려 빈말 같소이다. 사람들이 잘 못 알았소.”
노숙 또한 공명이 그토록 슬퍼하는 걸 보자 감동이 되어 홀로 생각했다.
‘공명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인데 주유가 속이 좁아 공연히 스 스로 죽음을 재촉했구나.’
그리고 잔치를 열어 공명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살펴보고 싶은 것은 공명의 그늘에 가리워 실제보다 지나치게 격하된 주유의 사람됨이다. 이미 읽은 바와 같 이, 『연의』에는 주유가 공명에게 철저하게 농락된 끝에 분사(死)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사에서는 거의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만 동오 안의 반유비파(反劉備派)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빠져 있는 『연의』의 저자에게 미 움을 받아 그렇게 왜곡되었을 뿐, 논자에 따라서는 그의 재주나 식 견이 결코 공명에게 뒤지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그의 서천 정벌 구상만 해도 그렇다. 『연의』는 그것이 오직 형주를 암습하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하지만, 정사에는 그걸 암 시하는 구절조차 없다. 그의 서천 정벌은 오히려 오나라가 그 전역 사를 통해 보여준 천하 쟁패의 구상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것이었 으며, 만약 불행히도 그가 중도에 병들어 죽지 않았더라면 제갈량의 천하삼분의 계()는 그 빛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오(吳)는 그 뒤 친유비파(劉備派)의 우두머리 인 노숙에게 대권을 맡겨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길을 열어주고 자신 은 세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소극적이고 언제나 수성에 급급한 세력 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뜻에서 주유의 갑작스런 죽음은 오의 국 운을 바꾸어놓은 것이라 할 만했다.
어쨌든 호랑이 굴 같은 주유의 빈소를 찾아 별일 없이 조문을 한뒤 좋은 대접까지 받고 그곳을 나온 공명은 곧 자기편 배가 있는 강 가로 갔다. 그리고 서둘러 배에 오르려는데 누군가가 공명의 옷깃을 움키며 껄껄 웃었다.
“그대는 주랑(郞)을 격동시켜 죽여놓고 이제는 문상까지 왔구 나. 너무 대담하다. 동오에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는가?”
공명이 놀라 그 사람을 보니 대나무로 얽은 관에 도포를 입고 검 은 띠에 흰 신을 꿴 봉추선생 방통(龐統)이었다. 그를 알아본 공명 역시 크게 웃으며 맞아들이니 두 사람은 곧 손을 잡고 배에 올라 한 동안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공명 이글 한 통을 써주며 방통에게 말했다.
“내 보기에 손권은 틀림없이 자네를 무겁게 쓰지 않을 것이네. 만 약 일이 뜻과 같지 못하거든 형주로 와서 나와 함께 유현덕을 받들 도록 하세. 이 사람은 너그럽고 어질 뿐만 아니라 두터운 덕을 갖춘 이라 반드시 자네가 평생 배운 바를 펼쳐볼 수 있게 해줄 것이네. 혹 내가 곁에 없을 때 자네가 찾아오게 되더라도 이 글을 내보이면 반 갑게 맞을 걸세.”
그러자 방통도 고개를 끄덕여 응낙하고 공명이 써준 글을 거두어 들였다. 오래잖아 공명은 방통과 작별하고 배를 재촉해 형주로 돌아 갔다.
한편 노숙은 제갈량의 조문이 끝나자 주유의 영구를 거두어 가족 에게로 보냈다. 영구가 무호(湖)에 이르렀을 때 거기까지 마중 나 왔던 손권은 영전에 나가 곡을 하고 영을 내려 주유를 그 고향 땅에다 후하게 장사 지내게 했다.
그때 주유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다. 큰아들은 순循)이요, 둘째는 윤(胤)이라 했는데, 손권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따뜻하게 뒤를 돌봐주었다.
주유의 갑작스런 죽음이 몰고온 어수선함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노숙이 손권에게 말했다.
“숙(肅)은 쓸모 없고 재주가 모자라는 데도 주유가 잘못 알고 주 공께 천거했습니다. 실로 맡은 바 대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바라건 대저로 하여금 한 사람을 천거하여 주공을 도울 수 있게 하여주십 시오. 이 사람은 위로는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밝을 뿐만 아니라, 지모와 계략은 관중(管仲) 악의)에 덜하지 않고 군사를 부리는 데는 손자와 오자(吳)에 비길 만합니다. 지난날 주유도 자 주 그의 말을 따랐고 제갈량조차 그의 재주에는 깊이 탄복했을 정도 였지요. 지금 강남에 머물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를 불러 무겁게 쓰 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누구요?”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물었다. 노숙이 얼른 대답했다.
“그 사람은 양양이 고향인데 이름은 방통이며 자는 사원(士元), 도 호(道號)는 봉추선생이라 합니다.”
“그 사람이라면 나도 오래전부터 이름을 들었소. 이미 우리 땅에 와 있다니 되도록이면 빨리 만나볼 수 있도록 해주시오.”
손권이 그렇게 말하자 노숙은 곧 방통을 불러들여 손권을 보게했다.
서로 예를 마친 뒤 손권은 가만히 방통을 살펴보았다. 짙은 눈썹에 들창코요, 시커먼 얼굴에 짧은 수염을 달고 있어 괴이쩍었다. 잘 생긴 주유만 보아온 손권에게는 우선 방통의 생김부터가 탐탁지 않 았다.
“공은 평생토록 어떤 것을 주로 공부하셨소?”
이윽고 손권이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다. 손권의 마음을 읽은 방통 은 심기가 상했다. 처음 만나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자리였으나 별로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배움이란 한 가지에 얽매이고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에 따라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공의 재주와 학문은 죽은 공근에 견주어 어떠하오?”
손권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생김이 그러한 데다 대꾸까지 뻣뻣하 자 손권이 더욱 탐탁잖은 얼굴로 물었다. 네가 과연 주유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라기보다는 빈정댐에 가까운 말이었다. 방통 은 속으로 고까움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고 눙쳤다.
“저의 재주와 학문은 주유와는 크게 다릅니다. 원래 서로 다른 것 을 어찌 견주어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손권에게는 그 대답이 오만스럽게 만 들렸다. 평생 주유만을 으뜸으로 여겨온 그라 방통이 대단찮게 여기는 걸 보자 은근히 속이 틀어진 것이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 가 퉁명스레 말했다.
“공은 잠시 물러가 기다리시오. 공을 써야 할 때가 있으면 다시 사람을 시켜 부르겠소.”
방통도 그런 손권에게 굳이 매달릴 뜻이 없었다. 한마디 긴 탄식과 함께 손권 앞을 물러나왔다.
“주공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방사원(元)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방통이 나가자 노숙이 안타까운 듯 손권에게 물었다. 손권이 불쾌 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잘라 말했다.
“미친 선비외다. 그를 써서 우리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소?”
“적벽에서 조조의 군사를 몰살시킬 때, 이 사람이 조조에게 연환 계(連環)를 올렸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화공(火攻)이 이뤄질 수 있었으니 실로 그가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하겠습니다. 주공께서는 꼭 그 일을 아셔야 합니다.”
노숙이 그렇게 방통의 공을 깨우쳐주었으나 소용없었다. 손권은 더욱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는 조조가 스스로 배에 못질하여 서로 얽어둔 것이니 반드 시저 사람의 공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맹세코 그를 쓰지 않겠소!”
말투로 보아 더 말해봤자 방통을 써줄 손권이 아니었다. 노숙은 하는 수 없이 손권 앞을 물러나와 방통에게로 갔다.
“이 노숙이 천거하지 않은 바 아니나 오후께서 공을 쓰시려 하지 않는구려. 공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오.”
노숙이 그렇게 말하자 방통은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며 길게 탄식 할 뿐이었다. 방통의 태도에서 심상찮은 조짐을 느낀 노숙이 불쑥
물었다.
“공은 혹시 우리 동오에 계시지 않을 뜻이 아니시오?”
그리고 방통이 대답을 않자 거듭 물었다.
“공은 널리 천하를 구제할 재주를 지녔으니 어디를 간들 아니 될것 있겠소이까만 내게라도 바로 일러주시오.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이오?”
“나는 조조를 찾아갈 참이오.”
방통이 마음에 없는 소리로 노숙을 떠보았다. 노숙이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 되오. 그것은 밝은 구슬을 어둠 속에 던져버림과 같소. 차라 리 형주로 가서 유황숙께 의지해보시오. 유황숙께서는 반드시 공을 무겁게 써줄 것이오.”
그 말에 방통도 비로소 속을 드러냈다.
“이 방통의 뜻도 실은 그러했소. 앞서 한 말은 한번 해본 소리외다.”
“그렇다면 제가 글 한 통을 써서 공을 유현덕에게 천거해드리리 다. 공이 유현덕을 곁에서 돕게 되면 반드시 손(孫), 유(劉) 두 집안 이 서로 싸우지 않고 힘을 합쳐 조조를 치게 될 것이오.”
노숙이 반가워하며 방통을 한층 부추겼다. 방통도 이제는 숨김없 이 속을 털어놓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껏 뜻해온 바외다.”
그리고 노숙이 써준 글을 품안에 간직한 뒤 유비를 만나러 형주 로 갔다. 이때 공명은 마침 새로 얻은 네 군을 돌아보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벼슬아치가 혼자 있는 유비에 게 달려와 알렸다.
“강동의 명사 방통이 찾아와 뵙겠다고 합니다.”
유비는 오래전부터 방통의 이름을 들어온 터라 얼른 안으로 맞아 들이게 했다. 그런데 오래잖아 유비 앞에 나타난 방통은 어찌 된 셈 인지 길게 읍(揖)할 뿐 절을 하지 않았다. 유비의 그릇을 알아보기 위하여 짐짓 무례를 한 것이나 유비로서는 적지 않이 괴이쩍었다. 거기다가 눈을 들어 그 모습을 보니 못생기고 꾀죄죄한 게 또한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먼 길을 어렵게 오셨겠소이다. 무슨 일이시오?”
유비가 별로 달갑지 않은 눈길로 물었다. 손권이 한 실수를 그 또 한 거듭하고 있는 셈이었다. 방통은 은근히 실망했다. 이에 한 번 더 유비의 사람됨을 떠볼 양으로 공명과 노숙이 써준 글은 하나도 내놓 지 않고 묻는 말에만 대꾸했다.
“듣기에 황숙께서 어진 이를 찾고 밝은 선비를 받아들이신다기에 이렇게 특히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제가 곧 어질고 밝은 선비라는 뜻이니 듣는 유 비가 그리 즐거울 리 없었다. 더욱 방통이 탐탁지 않았으나 워낙 자 주 들은 이름이요, 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라 박절하게 대 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방통에게 내릴 작은 벼슬자 리를 하나 찾아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초(楚) 땅이 점차 안정되어 비어 있는 자리가 마땅한 게 없 소이다. 다만 여기서 동남쪽으로 수백 리를 가면 뇌양현(陽縣)이란 작은 고을이 하나 있는데 거기 현령 자리가 비어 있을 뿐이오. 그 자 리를 맡길 테니 한번 가보시오. 뒷날 다시 좋은 자리가 비면 공을 불러 무겁게 쓰리다.”
그 말에 방통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겨우 현령감으로밖에 보지않은 유비의 박대에 은근히 부아가 치솟으며 재주와 학문으로 유비 의 마음을 한번 움직여보고 싶은 오기가 났으나, 공명이 없는 걸보 고 억눌러 참았다.
‘두고 보리라. 끝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떠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유비가 내리는 벼슬을 받고 뇌양현으로 갔다.
그런데 일은 방통이 뇌양현에 이르러 더욱 꼬이기 시작했다. 방통 은 고을을 다스릴 생각은 않고 매일 술만 마셔댔기 때문이었다. 고 을의 곡식과 돈을 보살피고 백성들의 다툼을 풀어주는 일을 모두 모 른 체하니 소문이 좋게 날 리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래잖아 그 소문 은 유비의 귀에도 들어갔다.
“뇌양현을 맡은 방통이 전혀 일을 않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고을이 없어질 지경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몹시 노했다.
“이 더벅머리 선비놈이 감히 나의 법도를 어지럽히다니!”
그러고는 곧 장비를 불러 일렀다.
“너는 지금 사람들을 이끌고 형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보도록 하 라. 공평하지 못한 일이 있거나 법을 어기는 자는 모두 잡아 그 죄를 엄히 물어야 한다. 다만 일을 밝게 처리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손건 과 함께 가도록 하라.”
이에 장비는 영을 받들어 손건과 함께 고을을 돌아보러 나섰다.
장비 일행이 몇 군데 고을을 지나 뇌양현에 이르자 고을의 백성들과 벼슬아치들이 모두 성을 나와 맞는데 오직 현령만 보이지 않았다. 금세 눈길이 사나워진 장비가 고을 벼슬아치들에게 물었다.
“현령은 어디 있는가?”
그중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일러바쳤다.
“방() 현령은 부임한 뒤부터 지금까지 백여 일이나 고을 일은 하 나도 보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술만 마시고 취해보 냈지요. 오늘도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 누워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성이 머리끝까지 난 장비는 얼른 방통을 잡아들이라고 호령호령했다. 손건이 그런 장비를 말리며 말했다.
“방사원은 고명한 사람이니 함부로 소홀하게 다뤄서는 아니 됩니 다. 현에 이르러 그 까닭을 물어본 뒤에 대답이 이치에 맞지 않거든 그때 죄를 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장비는 성을 누르고 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청, 정사 를 보는 대청) 윗자리에 앉기 바쁘게 현령을 찾아오게 했다.
이윽고 방통이 장비 앞에 나타났다. 관과 옷은 흐트러지고 언제 마신 술인지 남에게 부축을 받을 만큼이나 취한 채였다. 장비가 두 눈을 부라리며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우리 형님께서는 그래도 너를 사람으로 여겨 이 고을의 현령으 로 삼았거늘 네 어찌 감히 고을 일을 내팽개쳤느냐?”
“장군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내가 고을 일을 모두 내팽개쳤다 하시오?”
방통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장비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 호령했다.
“너는 이 자리를 맡은 지 백 일이 넘도록 매일같이 술에 취해 지 냈다. 이러고도 고을 일을 내팽개친 게 아니란 말이냐?”
“겨우 백 리밖에 안 되는 고을의 작은 시비거리를 분별하는 게 무 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그 일이라면 장군께서는 잠시만 앉아 계 시오. 내가 곧 모든 걸 처결해 보이겠소이다.”
장비의 호령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렇게 대답한 방통은 그 자리에서 고을의 벼슬아치들을 불렀다.
“그동안 밀린 일이 있다면 모두 가져오너라.”
그 말에 고을 벼슬아치들은 이런저런 문서며 백성들의 송사(訟事) 가 적힌 장부들을 모두 정청으로 가지고 나왔다. 방통은 다시 거기 에 관계되는 백성들을 모두 불러들여 마당에 무릎 꿇고 앉게 한 뒤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나갔다. 손으로는 문서나 장부를 뒤적이고 입 으로는 잇대어 판결을 내리는데 귀로 듣기에도 옳고 그름이 뚜렷하 여 터럭만 한 어긋남이 없었다. 판결을 받은 백성들도 하나같이 머 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절하는 게 조금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
채 반나절도 안 돼 백여일이나 밀렸던 일을 모두 처결한 방통이 붓을 던지며 장비에게 말했다.
“자, 이제 내가 내팽개쳐둔 일이 어디 있소이까? 조조와 손권의 일이라도 손바닥에 있는 글(또는 손금)들여다보듯 볼 수 있는데 이 까짓 작은 고을의 일을 무엇 때문에 마음 쓰겠소!”
성미는 급해도 장비 또한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 방통의 그 같은 말에 크게 놀라며 얼른 아랫자리로 내려가 잘못을 빌었다.
“선생의 크신 재주를 몰라뵙고 제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마땅 히 힘을 다해 형님께 선생을 천거해 올리겠습니다.”
그제서야 방통도 허허 웃으며 노숙이 써준 글을 내보였다. 장비가 더욱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왜 진작 이 글을 형님께 내놓지 않았습니까?”
“만약 일찍 이걸 내놓았다면 나는 오직 남의 천거에 의지해 찾아 온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오. 나는 황숙께서 바로 나를 알아봐주 시기를 바랬소.”
방통이 약간 서운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 을 쉬며 손건을 돌아보고 말했다.
“공이 아니었더라면 대현(大)을 한 분 잃을 뻔했소!”
그런 뒤에 곧 방통을 작별하고 형주로 돌아갔다.
유비를 만나본 장비는 곧 그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입에 침 이 마르도록 방통의 재주를 칭찬했다. 듣고 난 유비도 크게 놀라며 뉘우쳤다.
“그토록 큰 현사(賢)를 그릇 대접했으니 이는 모두 나의 허물이다!”
장비는 그런 유비에게 다시 노숙이 써 보낸 글을 전했다. 유비가 뜯어 보니 대략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방사원의 재주는 백리 고을이나 다스릴 작은 재주가 아닙니다. 마땅히 치중(中), 별가(別駕) 같은 자리를 맡기시어 처음부터 마음 껏 그의 뜻을 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만일 황숙께서 외모만을 보시고 그 속에 든 배움은 알아주시지 않아 마침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쓰이게 된다면 실로 그보다 더 애석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읽기를 마친 유비는 더욱 방통을 박하게 대접한 게 후회되었다. 이미 엎지른 물을 어떻게 주워담을까 걱정하며 속으로 한탄하고 있 는데 문득 공명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유비가 달려 나가 공명을 맞아들이자 공명이 먼저 물었다.
“방군사(龐軍師)께서는 별일 없이 잘 계십니까?”
공명이 대뜸 방통을 군사(軍師)라고 부르는 바람에 유비는 찔끔했 다. 공명이 그토록 높이 보는 사람을 자신은 겨우 현령으로 삼은 까 닭이었다.
“요사이 뇌양현을 다스리게 했더니 술만 좋아하고 일은 보지 않는구려.”
유비가 낯없어 하며 그렇게 우물거렸다. 공명이 껄껄 웃다가 다시 물었다.
“사원은 백리 고을이나 다스리고 있을 재주가 아닙니다. 그 가슴 속에 든 배움은 저보다 열 배나 낫지요. 일찍이 제가 그를 천거하는 글을 써준 적이 있는데 주공께서는 아직 받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오늘에야 겨우 자경이 써준 글을 읽었을 뿐이다. 선생이 써주셨다는 글은 아직 보지 못했소.”
유비가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은 방통의 뜻이 짐작 간다는 듯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큰 재주를 가진 사람에게 작은 일자리를 맡기면 술로 지내며 일을 게을리하는 수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너무 괴이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알 듯도 하오. 사실 장비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현을 잃어버릴 뻔했소.”
그제서야 유비는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털어놓고 장비를 불러 일렀다.
“너는 뇌양현으로 가서 방통선생을 형주로 모셔오너라!”
이에 장비는 곧 뇌양현으로 달려가 방통을 데려왔다. 방통이 형주 로 돌아오자 유비는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잘못을 빌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방통은 공명이 전에 그를 위해 써준 글을 내놓았다. 유비가 뜯어보니 봉추가 오거든 그날로 높이 쓰라는 공명의 간곡한 당부가 적혀 있었다. 방통이 곧 봉추라는 걸 알자 유비는 기쁨을 이기지 못 했다.
“지난날 사마덕조(司馬德操)선생이 말하기를 ‘복룡과 봉추 두 사 람 중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이 제 나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얻었다. 한실을 다시 일으키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곧 방통을 부군사(副軍師) 중 랑장(中)으로 삼아 공명과 더불어 방략을 짜내고 군사를 조련하 며 적정을 탐지하는 일을 보게 했다.
그런데 방통과 유비의 이 같은 만남에 대해 정사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유비가 방통에게 뇌양현을 다스리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통이 유비에게로 온 것이 노숙과 제갈량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제갈량과 노숙이 각기 써주었다는 천거의 글도 실은 『연 의』를 지은 이의 윤색에 지나지 않는다. 노숙이 유비에게 방통을 두 둔하는 글을 보낸 것은 유비가 방통을 면직시킨 뒤의 일이며, 제갈 량은 다만 말로써 유비에게 기용(用)을 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방통을 얻은 것은 유비에게 새로운 날개가 하나 더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날개는 이제 유비에게 천하를 향한 힘찬 비상을 재촉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