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4화 : 젊은 범 묵은 용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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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14화 : 젊은 범 묵은 용


젊은 범 묵은 용

마초에 대한 새삼스런 감탄이 크다 해도 역시 그곳은 싸움터였다. 조조는 짐짓 위세를 꾸미며 말을 몰고 나가 마초를 보고 꾸짖었다. 

“너는 한조의 명장 복파장군(伏波將軍)의 자손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모반을 하려 드느냐?”

그러자 마초가 이를 북북 갈며 조조를 욕했다.

“조조 이 역적 놈아. 너는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욕보이니 그 죄 는 죽어 마땅하다. 거기다 너는 또 내 아버님과 아우를 죽였으니 나 와는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다. 내 반드시 너를 사로잡아 그 고 기를 씹으리라!”

그러고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창을 꼬나 잡고 똑바로 조조를 향해 말을 몰아 나갔다. 조조의 등 뒤에 있던 우금이 얼른 말을 박차고 나가 마초를 맞았다. 하지만 우금이 맹장이라 해도 젊은 마초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두 말이 엇갈리며 창칼이 부딪기 여덟아홉 번이나 했을까, 견디지 못한 우금이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조 편에서 다시 장합이 달려 나갔으나 마초를 당해내지 못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겨우 스무 합을 버티다가 역시 꼬리를 사리고 달 아났다. 그 뒤를 받은 것이 이통(李通)이었다. 하지만 이통은 원래가 마초의 적수는 못 되었다. 몇 번 창칼을 부딪기도 전에 위세 좋은 마 초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한 창에 이통을 죽인 마초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창을 휘저었다. 그게 무슨 신호였던지 서량병이 일제히 조조의 군사를 덮치기 시작 했다. 이미 세 장수가 쫓겨온 데다 한 장수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조조군이라 기세가 아니 꺾일려야 아니 꺾일 수가 없었다. 변변히 맞서 보지도 못하고 쫓기니 싸움은 조조의 대패였다.

조조군이 몰릴수록 서량병들은 힘이 더욱 솟구쳤다. 마초를 가운 데로 하고 좌우를 맡은 장수들이 힘을 모아 짓쳐오니 조조의 군사는 여지없이 무너져 갈팡질팡했다.

마초, 방덕, 마대는 수백 기를 이끌고 똑바로 중군을 짓밟으며 조 조를 사로잡으려 했다. 이리저리 쫓기는 군사들 틈에 끼어 정신없이 달아나는 조조의 귀에 문득 서량병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붉은 전포를 입은 놈이 조조다. 붉은 전포 입은 놈을 잡아라!”

그 소리에 놀란 조조는 말 위에서 얼른 붉은 전포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서량병들이 다시 외쳐댔다.

“수염 긴 놈이 조조다. 수염 긴 놈을 잡아라!”

조조는 또 놀랐다. 얼른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긴 수염을 잘라버렸 다. 서량병 중에 조조가 수염을 자르는 걸 본 군사가 있어 곧 그 일을 마초에게 알렸다. 마초가 영을 바꾸었다.

“수염을 잘라 짧아진 놈이 조조다. 수염 짧은 놈을 잡아라!” 

그렇게 되니 이미 자른 수염을 이어댈 재간이 없는 조조는 더욱 놀랐다. 생각 끝에 깃발을 찢어 얼굴을 싸매고 천방지축 달아났다. 조조가 한창 말을 달리고 있는데 문득 등 뒤로 한 장수가 쫓아왔 다. 조조가 돌아보니 바로 마초였다. 이때 조조 곁에는 몇몇 장수들 이 붙어 있었으나 마초를 보자 질겁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사람이 다급해지면 제 목숨이 으뜸이라 주인도 저버리고 살길을 찾 아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혼자 달아나는 조조를 알아본 마초가 태산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조조는 달아나지 말라!”

그 소리에 조조가 어찌나 놀랐던지 들고 있던 말채찍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뒤이어 조조와 마초 간의 쫓고 쫓기는 경주가 벌어졌다. 조조는 정신없이 말 배를 걷어차며 앞으로 내닫고 마초는 창을 휘두르며 그 뒤를 쫓았다. 어디쯤 갔을까. 갑자기 조조 앞에 굵은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조조가 얼른 그 나무를 도는데 뒤쫓던 마초가 창을 내질 렀다.

창은 아슬아슬하게 조조를 스쳐 나무 등걸에 박혔다. 아비와 형제를 잃은 원한이 스민 창질이라 박혀도 여간 깊이 박히지 않았다. 마초가 힘들여 나무 등걸에 깊이 박힌 창날을 빼고 보니 조조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마초는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말을 박차 조조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쫓는데 문득 어떤 산 언덕에서 한 장수가 뛰쳐나오며 소리 쳤다.

“우리 주인을 다치지 말라! 조홍이 여기 있다.”

그러면서 칼을 휘둘러 마초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조조는 그 틈을 타 목숨을 구해 달아나고 조홍과 마초 간에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 다. 어지간한 조홍이었으나 사오십 합이 지나자 차차 칼 쓰는 법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하후연이 수십 기를 이끌고 그곳에 나타났다. 자신은 혼자고 상대는 여럿이라 안 되겠다 여긴 마초는 그제서야 말을 돌려 달아나 기 시작했다. 하후연도 패군을 수습하기에 바빠 마초를 뒤쫓을 생각 까지는 못했다.

조조가 진채로 돌아가보니 조인이 죽을힘을 다해 진채를 지키고 는 있었으나 군사는 적지 않이 꺾여 있었다.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 간 조조는 먼저 조홍의 공부터 추켰다.

“내가 전에 만약 조홍을 죽였더라면 오늘은 틀림없이 마초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조홍을 불러 무거운 상을 내리고 벼슬을 높여주었다. 한번 뜨거운 맛을 본 뒤에 간신히 군마를 수습한 조조는 그날부

터 굳게 진채와 책을 지키기만 했다. 진채를 둘러싼 도랑을 깊게 파고 흙담을 높여 서량병이 함부로 덮칠 수 없도록 할 뿐 누구도 나가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마초가 매일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걸었으나 조조의 영은 한결같았다.

“모두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말라. 함부로 움직이는 자는 목을 베리라!”

보다 못한 장수들이 은근히 조조에게 권해 보았다.

“서량의 군사들은 모두 긴 창을 쓰고 있습니다. 마땅히 궁수를 뽑아 저들을 맞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조는 조금도 싸우려 들지 않았다.

“싸우고 아니 싸우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적에게 달려 있지 않다. 적이 아무리 긴 창을 가지고 있다 한들 채책(柵) 뒤에 있는 우리를 어찌 찌를 수 있겠느냐? 그대들은 모두 굳게 지키며 적이 스 스로 물러가는 꼴이나 구경하라.”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지 않으니 장수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이상하다. 승상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싸움에서 언제나 앞장을 서 셨는데 이제 마초에게 지고 나서는 왜 이리 약해지셨는가?”

하지만 조조의 엄명이라 모두 진채에 박혀 굳게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싸움 없이 며칠이 지났다. 세작이 와서 조조에게 알렸다.

“마초에게는 또 이만의 군사가 늘었습니다. 이는 모두 강인(人) 들의 마을에서 마초를 도우러 온 장정들이라 합니다.”

그냥 이만이라도 예삿일이 아닌데, 날래고 겁 없는 강인들로만 이만이 늘었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기뻐했다. 곁에 있던 장수들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마초의 군사가 늘어났다는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기뻐하십니까?”

“내가 이 싸움에 이기거든 그때 그대들에게 까닭을 밝히겠다. 기 다리라.”

조조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는 까닭을 밝히지 않았다. 사흘 뒤에 또다시 마초의 군사가 불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 다. 조조는 전보다 한층 더 기뻐하며 장막 안에 잔치까지 벌였다. 여러 장수들은 불안해진 조조가 짐짓 허세를 부려보는 것쯤으로 여기고 속으로 그런 조조를 비웃었다. 조조가 그만 눈치를 모를 턱 이 없었다. 술잔을 돌리다 말고 문득 여럿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내가 마초를 깨뜨릴 만한 꾀를 내지 못하는 걸 속 으로 비웃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대들에게는 무슨 좋은 수가 있 는가?”

그러자 서황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지금 승상께서 대군을 이끌고 북쪽에 계신 바람에 마초는 자신의 모든 군사를 동관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따라서 하서 땅은 틀림없이 아무런 준비가 없을 터이니 먼저 한 갈래 군사로 하여금 몰래 포판 진(蒲阪津)을 건너 적이 돌아갈 길을 끊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승상 께서 재빨리 군사를 몰아 하북을 치시면, 적은 양쪽이 서로 호응할 길이 없어 반드시 형세가 몹시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바로 조조의 속셈 그대로였다. 그 때문에 조조는 마초의 군사가 불어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뻐했던 것이다.

“그대의 말이 바로 내 뜻과 같네.”

조조는 그렇게 서황을 추켜세운 뒤, 이어서 영을 내렸다.

“그대는 주령(靈)과 함께 날랜 군사 사천을 가려뽑아 하서를 급 습하도록 하라. 산골짜기에 군사를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내가 하북 으로 건너가거든 동시에 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겨 서황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었다. 영을 받은 서황은 주령과 더불어 군사 사천을 이끌고 몰래 하서로 떠났다.

서황이 떠난 뒤 조조는 다시 조홍을 불러 포판진을 건널 배와 뗏 목을 마련케 했다. 그리고 조인을 남겨 진채를 지키게 한 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위하渭河)를 건넜다.

조조의 그 같은 움직임은 세작들에 의해 마초의 귀에도 오래잖아 들어갔다.

“지금 조조가 이곳 동관을 공격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배와 뗏목 을 마련하는 것은 틀림없이 하북으로 건너가려는 것입니다. 우리 의 돌아갈 길을 막으려는 수작이지요. 내가 먼저 한 갈래 군사를 이 끌고 강북쪽 언덕으로 가서 그걸 막겠습니다. 만약 조조의 군사들이 물을 건너지 못하면 스무 날도 안 돼 하동의 군량이 다할 것이니 반 드시 그 군사들도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때 하남을 들이치면 어렵 지 않게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세작들의 말을 들은 마초가 한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듣고 있던 한수가 한마디 했다.

“그럴 것도 없네. 자네는 병법에서 ‘군사가 물을 반쯤 건너게 한 뒤에 친다[半渡河]’란 말도 듣지 못했는가? 조조가 물을 반쯤 건 너기를 기다렸다가 자네가 강 남쪽 언덕을 치면 조조의 군사들은 모 조리 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네.”

마초가 들어보니 그쪽이 훨씬 그럴듯했다.

“숙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로 따르지요.”

그 한마디와 함께 곧 사람을 놓아 조조가 언제쯤 물을 건널지를 알아보게 했다.

한편 조조는 여러 번 싸움에 져 어수선한 군사들을 정돈한 뒤 크 게 세 부대로 나누어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앞선 인마가 위하를 건 너려고 물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해가 솟고 있었다. 그들이 북쪽 언 덕에 이르러 진채를 마련하는 동안 다음 차례의 인마들이 배에 올 랐다.

조조는 남쪽 언덕에서 백여 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칼을 차고 앉 아 군사들이 물을 건너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 이 술렁거리더니 한 군사가 헐떡이며 달려와 알렸다.

“뒤편에 흰 전포를 입은 장군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흰 전포를 입은 장군[袍將軍]이 바로 마초인 것을 잘 아는 장졸 들은 조조를 지키는 것도 잊고 한 덩어리가 되어 배로 뛰어내렸다. 강변에 있던 군사들도 서로 먼저 배에 오르려고 다니 그들의 욕설 과 고함으로 강변은 악머구리 들끓듯 했다.

조조는 꼼짝도 않고 앉아 칼을 어루만지며 그 소동을 그치게 하 려고 애썼으나 들리는 것은 다만 사람의 아우성과 말의 울부짖음뿐이었다. 마치 벌 떼가 어지럽게 뭉쳐 다투는 것 같은 그 광경에 조조는 맥이 빠졌다.

그때 배에 타고 있던 장수 하나가 도로 강 언덕으로 뛰어오르더니 조조에게 소리쳤다.

“적이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승상께서는 부디 배를 타도록 하십시오!”

조조가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장수는 허저였다. 마음은 다급 했으나 조조는 자신의 약한 꼴을 보이기 싫어 짐짓 뻗대었다. 

“적이 왔으면 왔지,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일은 그때 이미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조조가 허저를 나무라듯 그렇게 말해놓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마초가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급하기는 허저도 마찬가지였다. 허저는 조조를 배로 끌어내리려 했으나 그때 배는 벌써 강 언덕에서 두 길이나 떨어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허저는 조조를 들쳐업고 몸을 날려 배로 뛰어내렸다.

허저가 조조를 업고 배로 뛰어내리는 걸 보자 조조를 뒤따르던 장졸들도 모두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조가 탄 뱃전에 매달려 다투어 배 위로 오르려 했다. 배는 작은데 여럿이서 한꺼번에 기어 오르려 하니 금세라도 배가 뒤집힐 듯 위태로웠다. 허저가 칼을 뽑 아 마구 뱃전을 찍어댔다. 거기 매달렸던 손들이 잘리며 그 손의 임 자들은 모두 괴로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다.

차마 보기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당장 급한 것은 조조를 구하는 일이었다. 허저는 배 위의 군사들을 재촉해 어서 노를 젓게 하는 한편 스스로 뱃전에 서서 삿대를 잡았다. 조조는 그런 허저의 다리 곁에 엎드려 배가 어서 언덕에서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초가 강 언덕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조조가 탄 배는 강물 한가 운데 떠 있었다. 이에 마초는 활을 뽑아 시위에 살을 먹이면서 뒤따 르는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두 활을 쏘아라!”

그 영에 따라 곧 조조의 배에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조조가 다칠까 봐 걱정이 된 허저는 왼손으로 말안장을 잡아 날아오는 화살 을 막았다.

이때 마초도 장졸들 틈에 끼어 활을 쏘고 있었는데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초의 시위 소리가 날 때마다 조조가 탄 배 를 몰던 군사들이 하나씩 물에 떨어졌다. 그렇게 여남은 명이 쓰러 지고 나니 모는 사람이 없는 배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빠른 물살에 휩쓸려 맴돌기 시작했다.

배 위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무서운 위세를 떨쳐 보 이고 있는 것은 오직 허저 하나였다. 그는 두 허벅지 사이에 배의 키 를 끼워 방향을 잡은 다음 한 손으로 삿대를 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말안장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조조를 지켰다.

이때 조조의 군중에는 위남의 현령으로 정비(丁)란 사람이 있었 다. 남쪽의 산 위에서 싸움 구경을 하다가 마초가 매우 급하게 조조 를 쫓는 걸 보고 진채 안에 있는 소와 말을 모두 바깥으로 내몰았다. 들판 가득 임자 없는 소와 말이 뛰어다니자 그걸 본 서량병들은 모 두 몸을 돌려 소와 말을 쫓기에 바빴다. 그들에게는 조조보다는 눈앞의 소와 말이 더욱 탐났다. 따라서 조조가 무사히 마초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허저의 용맹뿐만 아니라 정비의 기지 덕분이기도 했다.

가까스로 북쪽 언덕에 이른 조조는 어서 배와 뗏목을 언덕에 대 게 했다. 그리하여 먼저 물을 건넜던 장수들이 조조가 강물 한가운 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을 때는 조조가 이미 언덕에 오른 뒤였다.

조조와 함께 언덕에 오른 허저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혀 있었으나 다행히 두꺼운 갑옷을 입어 크 게 다친 곳은 없었다.

장수들은 조조를 둘러싸고 들판에 펼쳐둔 진채로 모셔간 뒤 모두 땅에 엎드려 문안을 드렸다. 조조가 문득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별것 아닌 역적 놈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네그려.”

장졸들의 사기를 의식한 조조의 허세였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싸운 허저는 달랐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숨결로 방금 뚫고 온 어 려움을 되새기며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소와 말을 풀어놓아 적병을 꾀지 않았더라면,

적병은 틀림없이 물을 건너면서까지 뒤쫓아왔을 것입니다.” “적병을 그렇게 꾄 사람이 누구인가?”

조조도 그제서야 생각난 듯 물었다. 누군가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위남의 현령 정비입니다.”

그러는데 마침 정비가 조조를 보러 들어왔다. 조조가 그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만약 공의 좋은 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비를 높여 전군교위로 삼았다.

감격한 정비가 다시 조조를 깨우쳐주었다.

“적이 비록 물러갔으나 내일 틀림없이 다시 올 것입니다. 좋은 계책을 세워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건 이미 마련되어 있네.”

조조는 이제 막 적의 칼날을 벗어난 사람답지 않게 밝은 얼굴로 정비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 장수들을 불러놓고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각기 군사를 나누어 강물을 따라 용도(涌道)를 세우도 록 하라. 그 용도는 잠시 우리 진채의 골격으로 쓸 것인 바 만약 적 이 쳐들어오면 우리 군사는 그 바깥에 진을 치게 하고 안에는 기치 만 요란하게 세워 군사가 거기 있는 듯 꾸민다. 그리고 다시 그 용도 뒤에 강물을 따라 길게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다 거짓으로 나무울타 리를 세워 적을 꾀어들이면 적은 급히 몰려오다 반드시 그 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구덩이에 빠진 적을 사로잡기는 어렵지 않으 리라.”

용도란 양쪽에 담을 쌓아 군사들을 보호하며 진(陣)과 진 또는 채 ()와 채를 연결시키는 길이다. 그 담은 말 탄 군사를 위주로 하는 서량병을 막는 진채 구실을 하면서 그 뒤에 판 함정을 감추어줄 수 도 있었는데, 조조는 이제 그 용도를 써보려는 것이다.

한편 조조의 군사들을 한바탕 짓밟고 자기 진채로 돌아간 마초는 한수를 보고 분한 듯 말했다.

“오늘 몇 번이나 조조를 사로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한 용맹스런 장수가 조조를 업고 배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 다. 그 장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한수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들으니, 조조는 매우 힘세고 날랜 장사를 뽑아 자신의 군막 을 지키게 하고는 호위군(虎衛軍)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네. 조조 의 무서운 장수인 전위와 허저가 그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 전 위는 이미 죽었으니 오늘 조조를 구해 간 것은 틀림없이 허저일 것 이네. 허저는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호치 (虎痴)라 부른다네. 다음에 그를 만나거든 결코 가볍게 여기고 맞서 서는 아니 될 것일세.”

“그라면 저도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숙부님의 말씀을 마음에 겨두겠습니다.”

한수의 말을 들은 마초가 자못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가 다시 앞일을 꺼냈다.

“이제 조조가 물을 건넜으니 우리의 등 뒤를 치려 할 것은 뻔하 네. 되도록이면 빨리 조조를 공격해 그가 영채를 세우지 못하게 해 야 하지 않겠나? 만약 조조가 영채를 세우게 되면 가까운 날 그를 없애기는 어렵게 될 것일세.”

그러자 마초가 계책을 내놓았다.

“조카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리가 북쪽 언덕으로 돌아가 조조군이 더는 물을 건널 수 없도록 하는 게 상책인 듯싶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우선 조카는 진채를 지키며 여기 남아 있게. 내가 군사를 이끌고 강을 따라 올라가 조조와 한번 싸워봤으면 싶네. 조 카의 생각은 어떤가?”

한수가 그렇게 마초와는 다른 의견을 말했다. 마초가 들어보니 그것도 그럴듯했다.

“숙부님께서 그렇게 해보시겠다면 방덕(德)을 선봉으로 삼아 숙 부님을 앞서서 보살피게 하겠습니다.”

마초가 그렇게 말하니 한수는 곧 방덕과 더불어 장졸 오만을 이 끌고 위남으로 달려갔다.

조조의 장졸들은 미리 명받은 대로 용도 곁에서 서량병을 꾀어들 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방덕은 철갑 두른 기마대 천여 명을 이끌고 단번에 용도를 허물어버릴 듯 부딪쳐갔다.

그러나 미처 적에게 이르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함성이 일며 사람 과 말이 한꺼번에 조조군이 파둔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흙구덩이에 떨어지기는 방덕도 다른 천여 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 러나 방덕은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훌쩍 몸을 솟구쳐 흙 구덩이를 벗어났다. 어느새 구덩이 밖에는 조조의 군사들이 새까맣 게 에워싸고 있었다. 방덕은 평지로 뛰어나오자마자 서너 명을 베어 죽이고 걸어서 두텁게 에워싼 적군 속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방덕의 눈에 적군 한가운데 떨어져 허덕이는 한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방덕은 한수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곧 그리로 갔다. 겨우 한수를 구 해 나오는데 마침 조인의 부장 조영(曹)이 말을 탄 채 길을 막았다. 방덕이 한칼에 조영을 베고 그 말을 뺏으니 결국 조영은 방덕에게 말을 바치러 온 꼴밖에 되지 않았다.

방덕은 조영의 말을 타고 한줄기 길을 열어 한수를 구한 뒤 동남 쪽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오랜만에 싸움에 이겨 힘이 솟은 조조의 군사들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사이 소식을 들은 마초가 군사 를 이끌고 달려와 뒤쫓는 조조의 군사들을 들이쳐 내쫓고 에워싸여 있던 방덕과 한수의 군마 태반을 구해냈다.

해질 무렵까지 싸운 뒤 마초가 진채로 돌아가 헤아려보니 방덕이 이끈 천여 기 중에서 장수 정은(銀)과 장횡(張橫)이 죽었고 흙구덩 이에 빠져 죽은 군사만도 이백이 넘었다. 마초가 한풀 꺾인 한수를 보고 의논했다.

“이렇게 날을 끌다가는 조조가 하북에 영채를 세우고 말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적을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오늘밤 어둠을 틈타 가볍게 차린 기마대를 이끌고 가서 아직 들판에 임시로 세워져 있는 조조의 영채를 휩쓸어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려면 군사를 한꺼번에 데려가지 말고 앞과 뒤로 나누어 위 급할 때 서로 구할 수 있도록 해야 되네.”

한수가 신중하게 마초의 말을 받았다. 이에 마초는 스스로 앞장이 되고, 방덕과 마대는 뒤에서 호응하기로 하고 군사를 나눈 뒤 그날 밤으로 조조의 진채를 들이치러 갔다.

이때 조조는 군사를 위북에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그날 밤 무슨 느낌이 들었던지 여러 장수를 불러놓고 말했다.

“적은 틀림없이 우리가 영채를 세우지 못하도록 지금 임시로 세워 둔 진채를 급습하러 올 것이다. 군사들을 사방으로 흩어 숨기고 중군은 일부러 비워두도록 하라. 포향이 울릴 때를 기다려 숨겨둔 군사들이 모두 일어나면 북소리 한번으로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이다.”

그 말에 따라 장수들은 모두 군사들을 나누어 진채 사방에 감추 고 중군을 비웠다.

그날 밤이 제법 이슥할 무렵 조조의 진채에 이른 마초는 부장 성 의)에게 서른 기를 주며 먼저 가서 적정을 살펴보게 했다. 성의 가 가서 보니 조조의 진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성 의는 그것이 속임수인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곧바로 중군 쪽을 덮쳐갔다.

하지만 성의 못지않은 실수를 조조군도 저질렀다. 숨어 있던 조조 군은 서량병이 진채로 들어오자 그 머릿수는 헤아려보지도 않고 포 향을 울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사방에서 복병이 일어나 성의가 이 끈 서른 기를 에워쌌다.

하후연이 성의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조조는 자신의 헤아림이 보 기좋게 들어맞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뒤에 남아 있던 마초 가 방덕, 마대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벌 떼처럼 조조의 진채를 덮쳐 왔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혼전뿐이었다. 양쪽 다 계책이 어그러진 셈인 데다 어두운 밤이라 힘과 힘으로 어지럽게 뒤엉킬 수밖에 없었 다. 양군은 날이 밝을 때까지 혼전을 거듭하다가 각기 군사를 거두 었다.

그러나 마초는 자신의 진채로 돌아가지 않고 위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한 뒤 밤낮으로 군사를 내어 조조의 앞뒤를 후려쳤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위하 가에 자리를 잡고, 배와 뗏목을 쇠사슬로 얽어 만 든 부교 셋을 통해 남쪽 언덕과 연결되도록 했다.

이때 조인은 강물 폭이 좁은 곳 부근에다 임시로 진채를 내리고 곡식과 말먹이를 실은 수레를 빙 둘러 세워 방벽으로 삼으려 했다. 그 소문을 들은 마초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각기 마른 풀 한 단과 불씨를 마련하라. 조인의 진채를 치는 데 는 그보다 나은 병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군사들이 시킨 대로 하자 한수와 더불어 조인의 진채 앞 으로 밀고 들어갔다.

“풀더미를 모두 한군데 쌓고 불을 질러라!”

마초가 그렇게 소리치자 군사들은 모두 그대로 따랐다. 곧 무서운 불길이 일어 곡식과 말먹이 풀을 실은 조조군의 수레에 옮아 붙었다. 젊은 마초가 이끄는 서량병의 매서운 기세에다 거센 불길까지 덮 쳐오자 조조의 군사들은 맞서 볼 재간이 없었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진채를 버리고 달아나니 수레며 부교가 모조리 타버렸다. 서량병의 큰 승리였다. 위하는 다시 그들에 의해 잘리고, 강 북쪽 에 영채를 세울 수 없게 된 조조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런 조조에게 순유가 다시 새로운 계책을 내놓았다.

“위하에서 흙과 모래를 퍼다가 토성(土城)을 쌓으면 굳게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조는 군사 삼만을 뽑아 흙으로 성을 쌓게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초가 방덕, 마대와 더불어 오백 마군을 이끌고 와서 짓밟는 데다 흙으로 쌓은 성이 원래 든든하지 못해 쉽게 무너져버려 모두가 헛일이었다.

때는 구월도 다해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날은 매섭게 추워 오 고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두텁게 드리워 걷힐 줄 몰랐다. 군사들이 추위에 떠니 아직 영채를 세우지 못한 조조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어떤 늙은이가 승상을 뵈오러 왔습니다. 진채를 세울 수 있는 계 책을 알려주겠다 합니다.”

그 말에 조조는 귀가 번쩍 띄어 얼른 그 늙은이를 데려오게 했다. 학 같은 모습에 소나무 같은 자태를 한 그 늙은이는 어딘가 옛 선인 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조조가 어디서 온 누구인가를 묻자 그 늙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경조(兆) 사람으로 종남산(南山)에 숨어 사는 누자백(婁 子伯)이란 늙은이외다. 사람들은 흔히 몽매거사(夢梅居士)란 도호(道 號)로 부르기도 하오.”

이에 조조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예로 자백을 대접했다. 자백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승상께서는 위하에 걸터앉아 영채를 세우려 하신 지 오래되시면 서 어찌하여 지금 같은 때를 그냥 보내고 계십니까?”

“땅이 모래흙이라 성을 쌓을 수가 없어 속만 태우고 있습니다. 은 사(隱士)께서는 어떤 좋은 계책을 내려주시려고 오셨습니까?”

조조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자백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깨우쳐주었다.

“승상께서 용병에는 귀신 같으시면서 어찌하여 천시는 모르시오이까? 지금 매일같이 짙은 구름이 덮여 있어 날이 차니 한번 북쪽 찬바람이 휘몰아치면 모든 것은 꽁꽁 얼어붙고 말 것이오. 그 바람 이 일기를 기다려 군사들로 하여금 흙을 날라와 쌓게 하고 물을 뿌 려두면 날이 밝기 전에 굳은 토성이 이루어질 것이외다.”

그 말에 조조도 비로소 찬 날씨를 거꾸로 이롭게 쓸 수 있는 길을 깨달았다.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자백에게 큰 상을 내렸으나 자백은 끝내 상을 받지 않고 제 길을 가버렸다. 조조가 반드시 외로운 사람 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자백의 말이 무슨 예언이었던 것처럼 그날 밤이 되자 갑자기 큰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조조는 모든 군사들에게 흙으로 담을 쌓고 거기에 물을 뿌려두게 했다. 찬바람에 흙담은 물 을 뿌리기 바쁘게 얼어 토성으로 변해갔다.

날이 밝자 굳게 얼어 세워진 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세 작들이 급히 마초에게 가서 알렸다.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조조의 토성을 본 마초는 몹시 놀랐다. 하늘이 조조를 도와 하룻밤 새 튼튼 한 토성을 하나 내려준 듯싶었다.

다음 날 마초는 그 토성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여겨 대군을 몰고 북을 울리며 조조의 진채로 짓쳐들어갔다. 토성 때문에 마음이 든든 해진 조조는 허저 한 사람만 뒤딸린 채 영문(營門)을 나섰다.

“맹덕이 홀로 여기 나와 섰으니 마초는 어서 나와 내 말을 들으라!” 

조조가 말 위에 높이 앉아 채찍으로 마초의 진문을 가리키며 크 게 소리쳤다.

금세 창을 꼬나든 마초가 말을 타고 진문 앞으로 나왔다. 조조는 그런 마초를 놀리듯 더욱 소리를 높였다.

“너는 내가 토성을 못 쌓도록 훼방을 놓았지만 봐라, 하늘이 도와 하룻밤 새 이렇게 훌륭한 토성을 내려주셨다. 이래도 빨리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마초는 이죽거림과도 같은 조조의 외침에 크게 성이 났다. 당장 달려 나가 조조를 사로잡아버리려는데 문득 조조의 등 뒤에 서 있는 장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난 눈을 부릅뜨고 강도(鋼刀)를 손에 든 채 말 위에 덩그렇게 앉은 품이 여느 장수 같지 않았다.

마초는 그 장수가 바로 한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허저인 것 같 아 조조에게 소리쳐 물었다.

“들으니 네 군중(軍中)에 호후(虎侯)란 이가 있다는데, 잘 있느냐?”

호후란 호치를 ‘호랑이 대감’ 정도로 슬쩍 높인 말이었다. 허저가 번쩍 칼을 치켜들며 조조를 대신해 큰 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바로 초군(譙郡)의 허저다. 너는 무슨 일로 찾느냐?”

그런 허저의 두 눈에서는 멀리서도 사람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드 는 빛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천하의 마초도 허저의 그 같은 위풍 에는 은근히 마음이 켕겼던지 감히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슬그머니 말 머리를 돌렸다.

조조도 구태여 싸움을 걸 필요는 없어 허저를 데리고 진채로 돌 아가버렸다. 그 광경을 본 양편의 군사들은 한결같이 놀라워해 마지 않았다. 진채로 돌아온 조조는 흐뭇한 마음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말 했다.

“적도 역시 중강(仲康, 허저의 자)이 호후임을 알아보는구나.”

그러자 조조의 군중에서는 이때부터 모두 허저를 호후라 불렀다.

마초 덕분에 호치에서 호후로 올라간 셈이었다.

조조의 은근한 추켜세움에 으쓱해진 허저가 큰소리를 쳤다.

“내일은 반드시 마초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아닐세. 마초는 뛰어난 장수이니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되네.” 

조조가 그렇게 허저의 지나친 만심을 경계하자 허저가 맹세하듯 소리쳤다.

“죽기로 싸워보겠습니다. 아무려면 그 어린것 하나야 못 당하겠습니까?”

그러고는 곧 마초에게 싸움을 거는 글을 보냈다. 다음 날 단 둘이 서 한번 결판을 내보자는 내용이었다.

허저의 글을 받은 마초는 크게 노했다. 곱게 보아주니 이제는 자 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는 것 같아 이를 갈았다.

“이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 내 맹세코 내일은 이놈 호치 를 죽이리라!”

호후로 추켜세운 게 언제였냐는 듯 다시 허저를 ‘용맹만 믿는 돌 대가리[]’로 깎아내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양군은 영채를 나가 서로 마주보고 진세를 벌 였다. 마초는 방덕을 왼 날개로 삼고 마대에게는 오른 날개를 맡긴 뒤 한수로 하여금 중군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창을 비껴들 고 말에 올라 진 앞으로 나갔다.

“이놈 호치야, 어서 나오너라!”

마초가 조조의 진 쪽을 향해 천지가 무너질 듯한 고함을 질렀다.

문기 아래 있던 조조가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마초의 용맹이 결코 지난날의 여포에 견주어 모자라지 않겠구나!”

그러나 허저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조조의 말 이 끝나기 전에 칼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마초가 창을 비껴들고 마주쳐나와 부딪치니 곧 한바탕 눈부신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백합이 넘도록 싸워도 승부는 드러나지 않고 두 사람의 말 만 지쳐 비틀거렸다.

“말이 지쳤으니 갈아타고 와서 싸우는 게 어떠냐?”

“좋다. 말을 갈고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의견을 맞춘 마초와 허저는 각기 자기편 영채로 돌아가 말을 바꿔타고 나왔다.

다시 범과 용이 뒤엉킨 듯한 싸움이 벌어졌다. 어느덧 백여 합이 나 더 싸웠으나 이번에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조조에게 쳐논 큰소리 때문인지, 싸우다 보니 제 성미를 이기지 못한 탓인지 갑자 기말 머리를 돌려 자기편 진채로 돌아온 허저는 투구와 갑주를 벗 어던지고 울근불근 힘살이 드러난 맨몸에 칼 한자루만 든 채 말에 뛰어올라 다시 마초에게 덤볐다.

그 엄청난 기세에 양군은 모두 놀라워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마초 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법 없이 그런 허저를 맞아 싸움을 계속했다. 다시 무시무시한 싸움이 서른 합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허저가 위세 좋게 칼을 쳐들어 마초를 베려 했다. 마초가 아슬아슬하게 그 칼을 피하며 오히려 들고 있던 창으로 허저의 가슴패기를 찔렀다. 온 힘을 다해 칼질을 한 다음이라 허저는 미처 칼로는 그 창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른 칼을 내던지고 몸을 뒤틀며 마초의 창대를 잡았다.

그렇게 되니 싸움은 이제 두 사람의 창 뺏기로 바뀌었다. 힘이라 면 허저였으나 마초 또한 만만치 않았다. 허저가 용을 쓰며 창대를 잡아당기자 와지끈하며 창대가 부러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각기 반 토막의 창대를 들고 서로를 후려쳤다. 무기도 없는 마구잡이 싸움이 었다.

조조는 혹시라도 나이 든 허저가 젊은 마초와 뒤엉켰다가 실수가 있을까 두려웠다. 하후연과 조홍을 불러 한꺼번에 달려 나가게 했다. 방덕과 마대는 조조 쪽에서 두 장수가 한꺼번에 달려 나오는 걸 보자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마구잡이 싸움이라면 날래고 억센 서량 병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곧 양날개에 벌려세웠던 철기를 휘 몰아 밀물처럼 조조의 군사들을 덮쳐갔다.

마초와 허저의 싸움에 넋을 잃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그 같은 서량 철기의 급습에 크게 어지러워졌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흙담으로 둘러쳐진 영채 속으로 달아났다. 마초는 그런 조조군을 물 가까지 뒤쫓으며 두들기니 조조의 군사는 태반이 죽거나 다쳤다. 그 리고 용맹을 떨치던 허저도 그 어지러움 속에서 팔에 화살을 둘씩이 나 맞고 말았다.

“진채의 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하라. 결코 나가 싸우지 말라!” 

허저만 믿고 싸움을 걸었다가 또 한차례 호된 맛을 본 조조가 급 하게 영을 내렸다. 그 명을 받은 조조군이 돌처럼 굳게 언 토성 뒤에 서 굳게 지키기만 하니 마초도 더는 조조군을 짓밟지 못했다. 그러나 어지간한 마초도 허저에게는 질렸던지 위구로 돌아가 한수를 만나자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모질게 싸우는 놈은 여럿 보았지만 허저 같은 놈은 처음입 니다. 정말로 호치라 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조금씩 조조의 숨겨 진 계책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서황과 주령이 하서(河西)로 건너가 영채를 엮고 마초를 앞뒤에서 칠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데 조조가 초조하게 서황과 주령이 무사히 영채를 세우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토성 위에 올라가 형세를 살피던 조 조의 눈에 마초가 들어왔다. 마초는 겨우 수백 기만 뒤딸린 채 조조 의 대군이 엎드린 진채 앞에 제 집 마당 노닐 듯 오락가락하고 있었 다. 한동안 가만히 보고 있던 조조가 투구를 벗어 팽개치며 노성인 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마초 저 어린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 

곁에서 그 말을 들은 하후연은 불끈 화가 치솟았다. 그러잖아도 적장이 진채 앞을 제집 마당 노닐 듯 휘젓고 다녀도 움츠린 채 구 경만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던 차에 주인의 그 같은 말을 듣자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친 분노였다.

“이 땅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반드시 마초를 없애고야 말리라!” 그 한마디 외침과 함께 자기 밑에 거느리고 있던 천여 명을 이끌 고 진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조조가 급히 말리려 했으나 그때는 이 미 하후연이 마초에게 덮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조는 혹시라도 하후연이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싸우지 않고 굳게 지키리라던 다짐도 잊고 스스로 말 위에 뛰어올라 하후연의 뒤를 밀어주러 나갔다. 그렇게 조조는 또 한번 원하지 않는 싸움에 말려들고 말았다.

마초는 조조의 군사들이 밀려나오는 걸 보자 앞선 군사들은 뒤로 물러나게 하고 뒷선 군사들을 나서게 하여 한 줄로 죽 벌려세웠다. 그리고 하후연이 그곳에 이르기 무섭게 에워싸듯 맞으며 들이쳤다. 진세고 뭐고가 없는 혼전으로 이끌려는 속셈이었다.

마초가 하후연과 어울려 어지럽게 싸우다 보니 저만치 조조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초는 하후연을 버려두고 똑바로 조조에게로 덮쳐갔다. 놀란 조조가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조조군은 금 세 어지러워졌다. 오래 묵은 용이라 할 조조였으나 젊은 범 같은 마 초의 기세를 이겨내지는 못해 또 한번 쫓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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