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3화 : 전야, 그 현란함이여
전야(), 그 현란함이여
그때 감택은 조조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는 틀림없이 채중과 채화로부터 황개가 주유에게 모진 매를 맞 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조조가 그것을 기뻐하는 걸 보니 내 항복도 참인 양 믿겠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조조 가 조금 전보다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롭지만 선생께서 다시 강동으로 돌아가주셨으면 좋겠소. 가 서 황개와 기일을 정하고 먼저 강 건너로 알려주시면 그날 내가 군 사를 내어 맞아들이다.”
떠보는 듯한 기색은 거의 없었지만 감택은 짐짓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강동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따로 사람을 뽑아 몰래 보내시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갔다가 잘못 되면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게 될 것 이오. 아무래도 강동을 잘 아는 선생께서 가주셔야겠소.”
감택이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더욱 그를 믿게 된 조조가 두 번 세 번 감택에게 권했다. 감택은 거듭 마다하다가 오랜 뒤에야 겨우 응낙했다.
“제가 가더라도 그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른 다녀오지요.”
이에 조조는 많은 금과 베를 상으로 내렸으나 감택은 받지 않고 조조의 진채를 떠나 다시 조각배에 올랐다.
다시 강동으로 돌아온 감택은 황개를 만나보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렸다.
“공의 빼어난 말솜씨가 아니었더라면 이 황개는 공연히 고생만했을 뻔했소.”
황개가 기뻐하며 그렇게 치하했다. 그러나 감택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 크게 조조를 낭패시킬 궁리를 내놓았다.
“저는 이제 감녕의 영채로 가서 거기 있는 채중과 채화를 살펴보 고 오겠습니다. 잘하면 한 번 더 조조를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황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감택의 뜻에 찬동했다.
감택이 감녕의 영채에 이르자 감녕이 반갑게 그를 맞아들였다. 감택은 자기가 한 일은 한마디도 밝히지 않고 능청스레 말했다.
“장군께서는 어제 황공복을 구하려다가 주유에게 욕을 당하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소? 나는 그게 몹시 못마땅하오.”
감택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감녕은 그 엉뚱한 소리에 어리둥 절했다. 이미 지나간 일인 데다 주유로부터 느낀 이상한 낌새도 있 어 잊고 있는데 감택이 평소답지 않게 거친 말투로 그 일을 끄집어 낸 까닭이었다. 감녕은 그가 진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려니 여겨 그 저 웃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주유의 욕을 퍼부어댔 다. 감녕도 드디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감택의 표정을 살 필 무렵 채중과 채화가 들어왔다. 그들을 본 감택이 문득 감녕에게 눈짓을 보냈다. 감녕도 그제야 감택의 뜻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주유는 제 재주만 믿고 우리 따위는 사람 대접을 않는구려. 이제 그런 주유에게 욕을 당하고 보니 무엇보다도 강 건너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까 두렵소. 아무리 적병이지만 그들까지 그걸 알면 내 무슨 낮으로 싸움에 앞서겠소!”
그러고는 부드득 이를 갈며 앞에 있는 탁자를 내리쳤다. 뿐만 아 니라 남이 듣는 것도 꺼리지 않고 주유를 큰 소리로 욕해대는 것이 정말로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 같았다.
감택이 놀란 듯 그런 감녕의 입을 막고 무언가를 수군댔다. 감녕 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 에 남은 응어리가 있는지 몇 번이고 길게 탄식했다. 누가 보아도 주 유에게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좋지 못한 음모를 꾸미는 듯한 광경 이었다.
무슨 엿들을 만한 게 없나 싶어 그곳으로 들어왔던 채중과 채화는 그걸 보자 감녕과 감택 두 사람에게 동오를 저버릴 뜻이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이토록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또 선생께서는 무슨 불평이 있으십니까?”
둘은 감녕과 감택을 떠보듯 그렇게 물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괴로움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으며, 안다 한 들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감택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채화는 그런 감택의 말을 듣자 자기들이 옳게 보았다 믿고 불쑥 간 큰 소리를 했다.
“혹시 두 분께서는 동오를 저버리고 조조에게로 투항하시려는 게 아닙니까?”
감택은 짐짓 크게 놀란 듯 안색까지 바꾸었고, 감녕은 느닷없이 칼을 빼들었다.
“우리 일을 너희가 이미 몰래 엿보았으니 할 수 없이 죽여 입을 다물게 해야겠다. 너무 우리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칼을 겨누는 감녕은 정말로 둘을 한칼에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채화가 놀라 두 손을 휘저으며 급한 소리를 냈다.
“두 분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또한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일랑 말고 어서 말해라.”
감녕이 여전히 칼을 겨눈 채 둘을 다그쳤다. 채화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저희들은 조승상께서 시켜 거짓으로 항복을 한 자들입니다. 두분께서 만약 조승상께로 귀순할 뜻이 있다면 저희들이 마땅히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감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길로 물었다. 채화와 채중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장군을 속이겠습니까?”
그제서야 칼을 거둔 감녕은 거짓으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감격에 찬 소리를 냈다.
“일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이는 바로 하늘이 우리를 편케 하려는 뜻이로구나!”
“황개며 장군께서 주유에게 욕을 당한 일은 이미 승상께 전해두었습니다.”
완전히 감택과 감녕에게 속은 두 채가가 그 일까지 뽐내며 알렸다. 그걸 보고 감택은 감녕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을 털어놓듯 말했다.
“나는 이미 황공복을 위해 승상께 항복하는 글을 전하였소. 이번 에는 특히 홍패(興覇, 감녕의 자)를 보고 황공복과 함께 항복할 것을 권하러 왔소. 날을 정해 함께 조승상에게로 가도록 합시다.”
감녕도 그새 마음을 정한 듯 흔연히 대답했다.
“대장부가 밝은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마음이 기울지 않 겠소? 함께 투항하도록 하리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술 한잔이 없을 수 없었다. 네 사람은 술을 내와 늦도록 함께 마시며 있는 말, 없는 말로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채화와 채중은 곧 감녕도 황개와 함께 내응하게 된 것을 적어 조조에게 몰래 보냈다. 감택은 또 감택대로 딴사람을 시켜 조조에게 글을 보냈다.
‘황개는 승상께로 가고 싶은 마음에 하루가 천년 같으나 알맞은 때와 배편을 마련 못해 눌러앉아 있습니다. 다만 뚜렷한 날짜는 아 직 정하지 못한 대로 갈 때의 신호는 약조가 되었기로 그것만이라도 전하고자 합니다. 뱃머리에 푸른 깃발[]을 꽂고 오는 배가 있으 면 그게 바로 황개의 배이오니 승상께서는 유념하여주십시오.’
한편 조조는 연달아 두 통의 글을 받자 다시 의심이 일었다. 일이 너무도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자 본능적인 경계심이 든 탓이 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조조는 곧 여러 모사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동오의 감녕이 주유에게 욕을 본 데 앙심을 먹고 안에서 우리에 게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또 며칠 전에는 황개가 주유에게 벌받는 데 한을 품고 감택이란 자를 보내 항복을 해왔다. 그러나 가 만히 살펴보면 둘 다 깊이 믿지 못할 구석이 많다. 누가 직접 주유의 진채로 들어가 그들 두 사람의 항복이 참으로 믿을 만한지 알아올 사람이 없는가?”
그러자 장간이 나와 말했다.
“제가 저번에 강동에 갔다가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승 상께 해로움만 끼쳐드려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번 저를 보내주십시오. 목숨을 버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일을 잘 살핀 뒤 승상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자못 비장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조조는 지난번에 맛본 쓰라 림도 잊고 기뻐하며 허락했다. 실은 조조 아래서 그나마 주유에게로 오갈 수 있는 이는 장간뿐이기도 했다.
이번에야말로 지난번의 실수를 메울 만한 공을 세우리라는 결심 으로 장간은 다시 배에 올랐다. 배는 빠른 물살을 타고 곧 강남 주유 의 진채에 이르렀다. 장간은 곧 사람을 보내 자기가 온 것을 주유에 게 알리게 했다.
주유는 장간이 다시 자기를 보러 왔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내가 이번에 공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오직 이 사람에게 달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침 함께 있던 노숙에게 가만히 시켰다.
“바라건대 방사원(元)에게 가서 나를 좀 도와달라고 이르시 오. 내가 시킨 대로만 해준다면 우리는 이미 조조에게 이겨놓은 것 이나 다름없을 것이오.”
그런 다음 방사원이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방사원은 양양의 방통龐)으로 수경선생 사마휘가 봉추(鳳雛)라 고 부르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옮겨 살았는 데, 노숙이 일찍부터 주유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그는 어찌 된 셈인 지 주유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주유가 먼저 노숙을 보내 방통에게 묻게 했다.
“조조를 쳐부수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되겠습니까?”
“조조의 군사를 깨뜨리는 데는 불로써 공격하는 수밖에 없을 것 이오. 하지만 넓은 강 위에서 요행 한 척의 배에 불을 지른다 해도 나머지 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소. 따라 서 먼저 연환계(連環)를 베푼 뒤에 화공을 써야 할 것이오.”
방통이 가만히 일러주었다. 노숙이 물었다.
“연환계란 무엇입니까?”
“배와 배를 쇠고리로 연결하게 만드는 계책이오. 조조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달랠 수 있어야 하오.”
노숙은 그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들은 대로 주유 에게 돌아가 전했다. 주유는 그 말을 전해 듣자 방통의 식견에 몹시 감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혼자말처럼 말했다.
“나를 위해 그 연환계를 베풀어줄 사람은 방사원이 아니고는 없으리라.”
“조조의 간사한 꾀는 천하가 다 아는 터인데 방사원이 어떻게 그 로 하여금 제 죽을 짓을 하도록 될 수 있겠습니까?”
듣고 있던 노숙이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러자 주유도 그것까지는 생각해둔 게 없는지 문득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방통을 위해 알맞은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하는 중인데 때맞추어 장간 이 나타난 것이었다.
주유가 장간이 다시 온 것을 그토록 기뻐한 것은 바로 그를 이용 해 방통을 조조에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 편으로는 노숙에게 계책을 주어 방통에게 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막에 높이 앉아 장간을 불러들이게 했다.
장간은 주유가 나와 맞아들이지 않고 군막에 앉아서 불러들이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전에 한 짓 때문에 주유가 아직 성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에 장간은 몸을 빼칠 때에 힘들지 않게 자 신이 타고 온 배를 구석지고 조용한 강 언덕에 매어두게 해놓고 주 유가 있는 군막으로 갔다.
“자익은 무슨 까닭으로 나를 그토록 심하게 속였는가?”
과연 주유는 들어서는 장간을 보고 얼굴빛이 변하도록 성이 나꾸짖었다.
장간이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나는 자네와 내가 지난날 형제처럼 지낸 정을 생각하고 마음속 의 일을 털어놓고자 왔는데, 자네는 어찌 내가 자네를 속였다 말하 는가?”
“자네는 나를 달래 조조에게 항복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바닷물이 다 마르고 차돌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다음에야 될 일이 아니네. 그래도 지난번에는 옛정을 생각해서 한번 흠뻑 마시고 잠자리에까 지 함께 들었는데 자네는 내 사사로운 문서를 훔친 뒤 작별도 않고 조조에게로 돌아가 그걸 바치지 않았는가? 그 바람에 우리 편이 되 기로 했던 채모와 장윤이 죽고 일은 그릇되어 버렸네. 이제 다시 온 것도 틀림없이 좋은 뜻에서는 아닐 테지!”
주유의 목소리는 차고도 매서웠다.
그러고는 장간이 미처 무어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자르듯 말했다.
“옛정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를 한칼에 베어야 마땅하지 만 이번만은 지난 일로 돌리겠네. 그러나 전처럼 자네를 우리 군중에 둘 수 없으니 그리 알게. 이제 하루 이틀이면 조조 그 역적 놈을 깨뜨리게 될 터인데 자네를 여기 그대로 두었다가 또 무슨 기밀을 빼내 갈지 어찌 아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유는 그 자리에서 좌우를 보고 호령했다.
“어서 자익을 서산(西山)에 있는 암자로 보내 쉬게 하라. 내가 조 조를 깨뜨린 뒤에 강을 건너 돌아가도 늦지 않으리라.”
그래도 장간은 다시 무어라고 변명해보려 했으나 주유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장막 뒤로 사라져버렸다.
주유의 명을 받은 군사들은 곧 장간을 말에 태워 서산 뒤편에 있 는 암자로 데려갔다. 말이 쉬게 하라는 것이지 실은 가두어놓는 것 이나 다름없었다.
군사 둘을 남겨 언제나 장간을 지키게 한 까닭이었다.
장간의 마음속이 시름과 불안으로 가득하니 자고 먹는 것 또한 편할 리 없었다. 그럭저럭 한낮을 보내고 밤이 되었으나 잠을 이루 지 못해 방을 나섰다.
장간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이고 홀로 암자 뒤뜰을 거닐었다. 얼마를 그렇게 거닐었을까, 장간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글 읽 는 소리를 들었다.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얼른 듣기에도 예사 사람 의 그것 같지 않았다.
장간은 그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산 속 바위 언덕에 짚으로 이엉을 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방 가운 데 하나에서 등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장간이 가만히 문틈으로 엿 보니 한 사람이 벽에 칼을 걸어놓고 등불 앞에 앉아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읽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산속에 숨어 사는 이인(異人)일 것이다.’
장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보기를 청 했다.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는데 과연 생김이나 몸가짐 이 속되지 아니했다.
“글 읽는 소리가 하도 낭랑해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감히 뵙기를 청했습니다. 선생의 크신 이름을 들려주십시오.”
장간이 물었다. 그 사람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재주는 모자라고 덕도 없어 이렇게 구차스레 지내는 저를 그토 록 높이 보아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하찮은 몸의 성은 방이며 이름은 통)이요 자는 사원(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봉추선생이 아니십니까?”
장간이 놀라 되물었다. 봉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크신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됩니다만 선생께서 이런 궁벽한 곳 에 숨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동오가 어찌 선생 같은 분을 이렇게 썩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그려.”
방통같이 세상이 다 알아주는 재주를 가진 이가 그렇게 지내는 게 이상해 장간이 슬며시 떠보았다. 방통의 얼굴이 문득 굳어지며 노여움이 섞인 말로 받았다.
“주유란 자는 제 재주만 믿고 사람을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실은 제가 이렇게 숨어 사는 까닭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뉘 시오?”
“저는 장간이라고 합니다.”
“제가 세상을 잘 알지 못해 아직 크신 이름을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들어오십시오.”
방통은 전혀 장간을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며 암자 안으로 끌어 들였다.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장간이 문득 한걸음 다가앉으며 방통에게 말했다.
“선생 같은 재주로 어디를 가신들 이롭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차 라리 조조에게로 가보시지요. 만약 선생께서 그리로 가실 뜻이 있다 면 제가 마땅히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은근하기가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방통이 탄식 섞어 대답했다.
“나 또한 강동을 떠날 마음을 먹은 지는 오래되었소이다만 마땅 한 곳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소. 공께서 이왕 나를 이끌어주실 마 음이 있으시다면 당장 떠나도록 합시다. 질질 끌다가 주유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오.”
장간 또한 더 머뭇거려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날 밤으로 방통과 나란히 산을 내려와 원래 타고 온 배가 묶여 있는 강가로 갔다. 일이 되느라고 그런지 주유가 딸려 보낸 군사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가에 이르러 배를 찾아낸 장간과 방통은 나는 듯 배를 띄워 강 북으로 갔다. 조조의 진채에 이르자 장간이 먼저 조조를 찾아보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알렸다. 조조는 그 유명한 봉추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자 몸소 장막을 나와 방통을 맞아들였다.
주인과 손님이 각기 자리를 정해 앉은 뒤에 조조가 간곡하게 말했다.
“주유는 나이가 어린 데다 재주만 믿고 함부로 무리를 다루며 남 의 좋은 계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려. 선생 같 은 이를 불러 쓸 줄 모른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 조조는 선생의 크신 이름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으나 서로 몸을 두고 있는 곳이 달 라 감히 청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소. 그런데 이제 다행히도 이렇게 찾아주셨으니 바라건대 아낌없이 이 몸을 가르치고 깨우쳐주시오.”
그러나 방통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청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승상께서 군사를 부리는 데 법도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먼저 승상의 군용容)을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만…………….” 어떻게 들으면 조조의 용병법을 한번 본 뒤에 주인으로 삼을지 않을지를 정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으나 조조는 개의치 않았다. 그 저 봉추선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만이 기뻐 얼른 말을 준비하게 한 뒤 함께 말 머리를 나란히 하여 진채를 구경시켜주었다. 높은 곳에 올라 조조의 진채를 두루 살펴본 방통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산기슭에서 숲을 의지했으면서도 앞뒤를 고루 헤아리고 있습니 다. 거기다가 들고 나는 데 문(門)이 있고 나아감과 물러남이 한가지 로 합당한 이치에 따랐습니다. 비록 손자와 오자가 되살아나고 사마 양저(司馬穰苴)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이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입 니다.”
병가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칭송이었다. 조조가 도리어 겸손을 보이며 방통의 말을 받았다.
“선생께서는 치켜세움이 지나치십니다. 오히려 모자라는 곳이나 가르쳐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수채로 방통을 이끌었다. 방통이 보니 스물네 개 의진문을 벌여 큰 싸움배를 늘여 세웠는데 마치 든든한 성곽 같았 다. 그리고 중간치와 작은 싸움배는 그사이를 골목 드나들 듯하고 있는데 또한 그 움직임이 앞뒤가 가지런했다.
“승상의 용병이 이 같으니 과연 이름이 헛되이 전하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그려.”
방통이 그렇게 말하더니 홀연 강남을 손가락질하고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주랑(周郞)아, 주랑아, 너는 반드시 망하고 말겠구나!”
그 말을 듣자 조조는 크게 기뻤다. 자신 없는 수채까지도 그토록 칭찬을 듣고 보니 정말로 강남이 이미 자기 손안에 들어와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조조는 다시 방통을 데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가 술을 내오게 하고 함께 마셨다. 얘기는 절로 싸움에 관한 것이 되었는데, 방통은 높은 견식과 뛰어난 말재주로 그야말로 물 흐르듯 조조의 말에 대답 했다. 조조는 더욱 마음속으로 감복했다. 뜻밖으로 훌륭한 인재를 거두게 되었다 싶어 한층 대접이 은근했다.
그럭저럭 여러 순배 술이 돌았다. 방통이 문득 거짓으로 취한 체하며 조조에게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만 군중에 좋은 의자(醫)가 있습니까?”
“갑자기 의자는 왜 찾으시오?”
조조가 까닭을 몰라 물었다. 방통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대답했다.
“수군은 원래가 병이 잦게 마련입니다. 반드시 좋은 의자를 얻어 그 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조조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때마침 조조의 군사들 사이에는 물과 풍토가 맞지 않은 탓인지 토악질하는 병이 나돌아 목 숨을 잃은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그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방통이 그런 소리를 하니 어찌 그대로 흘려들을 수 있겠는가.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오. 좋은 의자를 구하는 일도 급하지만, 더 급한 것은 군사들이 병들지 않게 하는 일이외다. 어떻게 하면 그게 되겠소?”
조조는 간절한 기대로 방통에게 물었다.
“방법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방통은 그렇게 뜸을 들여놓고 넌지시 말했다.
“승상께서 수군을 조련하는 법은 몹시 묘하나 다만 한 가지 애석한 것은 그게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온전해지겠소?”
조조가 바싹 매달리듯 하며 물었다. 그러나 방통은 조조가 한 번 더 묻기를 기다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하신다면 대소의 수군 이 병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 니다.”
역시 물은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조는 묘책이 있 다는 데 우선 기뻤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며 물었다.
“그 묘책이 무엇이오?”
이제 방통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제야 방통은 짐짓 미뤄오던 답을 일러주었다.
“대강은 여느 강과 달라 조수가 들고 나며 풍랑이 그치지 않습니 다. 북쪽에서 온 군사들은 배를 많이 타보지 않은 까닭에 그같이 심 하게 흔들리는 배에서는 멀미를 하게 되고 그 배 멀미가 거듭되면 마침내 병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배를 서른 척이나 쉰 척 을 한 떼로 삼아 뱃머리와 꼬리를 쇠사슬로 든든하게 묶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슬 위로 널빤지를 깔아 두면 배와 배 사이를 사람이 지 나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이 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뿐이 겠습니까? 그렇게 한 배를 타고 나아가면 설령 풍랑이 높이 인다 해 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마치 땅 위에 있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 어 아무리 북쪽에서 온 군사라도 배 멀미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정말로 기가 막힌 묘책이었다. 이에 평소의 위엄 도 잊고 앉은 자리에서 내려앉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선생의 묘책이 아니었던들 제가 어떻게 동오를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얕고 어리석은 소견으로 한번 생각해본 것일 뿐입니다. 승상께서 한 번 더 살펴보시고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방통은 짐짓 그렇게 일러주어 조조를 더욱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조조는 곧 영을 내려 군중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밤낮없이 쇠사슬과 큰 못을 만들게 했다. 모든 배를 서로 얽어놓기 위한 것들이었다. 지긋지긋한 배멀미에 시달리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 한결같이 기뻐했다.
방통은 자기 뜻대로 되었으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조조에게 말했다.
“제가 보니 강좌(江)의 호걸들 가운데는 주유에게 한을 품은 이 들이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제가 세치 혀를 놀려 그들을 달래 모두 승상께 항복해 오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유는 홀로 남겨 져 달리 도움을 빌 데도 없으니 반드시 승상께 사로잡히게 될 것입 니다. 또 주유가 이미 승상께 사로잡힌다면 유비 따위야 무슨 걱정 거리가 되겠습니까?”
자신의 몸을 안전한 곳으로 빼낼 뿐만 아니라 이미 주유가 조조 를 상대로 펼치고 있는 사항계(詐降計)를 은근히 돕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런 방통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감사하기에만 바 빴다.
“선생께서 그렇게 하여 큰 공을 이루시기만 한다면 이 조조는 천자께 상주하여 선생을 삼공의 열에 오르도록 하겠소.”
그 같은 조조를 방통은 비정하리만큼 철저하게 농락했다.
“나는 부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뭇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주유를 사로잡고 강을 건너시더라 도 결코 죄 없는 백성을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되십니다.”
아무리 의심이 많다 한들 이같이 공명정대한 사람을 조조가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조조는 맹세하듯 방통에게 다짐했다.
“나는 하늘을 대신해 이번 일을 하고 있소이다. 어찌 함부로 백성 들을 죽이겠소?”
그때 다시 방통은 주유가 채중, 채화의 거짓 항복을 알아보던 것 에 생각이 미쳤다. 주유는 그 가족이 조조의 진중에 있는 걸로 미루 어 그들의 항복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방통은 자신의 가족이 강남에 있다는 것으로 조조의 의심을 사서는 큰일이라 싶어 선수를 쳤다.
“승상께서 제게 방문 한 장만 내려주십시오.”
조조에게 절하며 물러나던 방통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렇게 청 했다. 조조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방문이라니. 어떤 방문을 말하시오?”
“제 가솔들이며 일가붙이를 안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승 상께 온 줄도 모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주유를 돕게 되면 그 아니 낭패이겠습니까?”
그제야 조조도 방통의 가족에 생각이 미쳐 물었다.
“선생의 가솔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여기저기 강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만 승상의 방문 한 장이 면 모두 보존할 수 있겠습니다.”
방통이 스스로 그렇게 밝히고 나서니 그 가솔이 비록 강남에 있 다 해도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곧 방통의 가솔 및 그 종족들을 안심 시킬 방문 한 통을 써서 방통에게 내주었다. 방통은 다시 한번 절하 여 물러나며 조조에게 당부했다.
“제가 떠난 뒤 되도록이면 빨리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시일을 끌어 주유가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조와 작별한 방통이 강가에 이르러 막 배에 오르려 할 때였다. 홀연 강 언덕에서 도포에 대나무로 얽은 관을 쓴 사람 하나가 나타나 방통의 옷깃을 잡아채며 꾸짖었다.
“너희가 실로 간이 커도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나! 황개는 고육계 를 쓰고 감택은 거짓 항서를 올리더니, 이제 너는 예까지 와 연환계 를 일러주고 가는구나. 모조리 태워 없애려는 수작이지? 하지만 안 된다. 너희들이 비록 모질고 독한 솜씨를 부려 조조는 속였을지언정 나를 속이지는 못하리라!”
동오의 움직임을 마치 손바닥 안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말에 방통은 눈앞이 아뜩하고 넋이 산산이 흩어 지는 느낌이었다. 털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돌아 서서 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서서였다.
방통은 그가 옛 친구임을 알아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해 사 방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네가 내 계책을 조조에게 말해주어 어그러져버리게 한다면 강 남 여든한 고을 백성들이 실로 불쌍하게 되네. 그들의 목숨이 모두 자네에게 달렸으니 알아서 하게!”
겨우 마음을 놓은 방통이 서서에게 매달리듯 말했다. 서서가 약간 웃음기 머금은 얼굴이 되어 대꾸했다.
“이편의 팔십삼만 인마의 목숨은 또 어떻게 하고?”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로 나의 계책을 깨뜨려버릴 작정인가?”
애가 탄 방통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제서야 서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염려 말게. 일찍이 나는 유황숙께 두터운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아닌가? 아직껏 한번도 거기에 보답할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네. 거 기다가 조조는 내 어머니를 핍박하여 돌아가시게 한 원수가 아닌 가? 일찍이 내가 말한 대로 그를 위해서는 평생 단 하나의 계책도 내놓지 않을 것이네! 그런 내가 이제 어찌 자네의 그 좋은 계책을 깨뜨릴 리 있겠는가? 다만 나도 조조의 군중에 있는 만큼 조조가 싸 움에 한번 지고 나면, 동오 쪽 사람들이 돌과 옥을 가리지 않고 이쪽 을 마구 죽일 것인즉 나 또한 면하기 어려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조조에게서 몸을 빼낼 마땅한 계책이나 하나 일러주게.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고 멀리 피해버리겠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방통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살아났다.
“원직() 자네처럼 높은 식견과 긴 안목을 가진 사람이 그만 일을 가지고 어찌 어렵다 하는가?”
이윽고 방통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서서가 궁한 쪽이 되어 매달리듯 말했다.
“정말로 마땅한 계책이 없어 그러네. 바라건대 좋은 가르침을 내려주게.”
“정히 그렇다면 내 한 방도를 일러주지.”
서서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아들은 방통은 그렇게 말한 뒤 서서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일러주었다. 부근에는 아무도 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심을 하느라고 귀엣말을 한 것이었다.
방통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기를 다한 서서는 몹시 기뻐했다. 방 통은 절까지 하며 고마워하는 서서를 뒤로 하고 배에 올랐다. 한시 바삐 호랑이 굴 같은 조조의 진채를 벗어나 강동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한편 조조의 진중으로 돌아온 서서는 그날 밤 가까운 사람 몇을 몰래 불러 진중에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동탁이 죽은 뒤 서량을 근거로 만만찮은 세력을 기른 마등과 한수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그러잖아도 마음이 어수선하던 조조의 군사들이라 그 헛소문은 더욱 기세 좋게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다음 날이 되자 군사들은 두셋만 모이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군사 들의 그런 심상찮은 거동이 조조에게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오 래잖아 그 내용을 알아낸 장수 하나가 조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서량주의 마등과 한수가 모반하여 허도로 군사를 몰고 짓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문이 군사들 사이에 파다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슨 패신(神)에 홀린 것일까. 조조는 평소의 세밀함 에 걸맞지 않게 소문의 진상을 캐보는 대신 놀라기부터 먼저 했다. 곧 여러 모사들을 불러모은 뒤 걱정스레 의논을 시작했다.
“내가 남쪽으로 군사를 내면서 마음속으로 가장 걱정한 게 바로 마등과 한수였소. 군중에 떠도는 말이 비록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길은 없지만 그 둘을 막을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구려.”
어쩌면 방통은 그 같은 조조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고 그 계책을 서서에게 일러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 에 서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며 말했다.
“이 서는 승상의 녹을 먹으면서도 아직껏 한 치 공도 세우지 못해 보답을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제게 삼천 군마만 내려주십시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관(關)으로 달려가 그 험한 목을 지키겠습니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곧 승상께 기별을 올려 남북이 서로 호응 할 수 있게 할 터이니 바라건대 서량의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서서의 그 같은 말에 조조는 기뻤다. 그때껏 입 한번 제대로 열지 않던 서서가 스스로 어려운 일을 맡고 나선 까닭이었다. 이제 서서 의 마음도 돌아서는가 싶어 두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허락했다.
“만약 원직이 가준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소? 산관에도 또한 군사들이 있으니 함께 거느리도록 하고 여기서는 우선 삼천의 마보 군만 이끌고 떠나도록 하시오. 장패를 선봉으로 삼고 밤낮으로 달려 간다면 늦어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게 될 것이오.”
이에 서서는 조조에게 작별하고 장패와 더불어 산관으로 떠나갔 다. 방통이 헤아린 대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조조와 그의 대군이 오래잖아 겪게 될 참화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한편 조조는 서서를 보내자 적이 마음이 놓였다. 북방의 일은 잊 어버린 듯 자신이 거느린 진채를 돌아보는데, 먼저 말에 올라 강가 에 있는 보군의 영채부터 살폈다. 과장은 있다 해도 수십만에 이르 는 대군이 강을 따라 즐비하게 영채를 차리고 있는 광경은 자못 볼 만했다.
조조는 흡족한 마음으로 수채마저 살폈다. 큰 배 한 척을 내어 중 앙에 대장기[旗]를 높이 걸고 양쪽으로 진을 이뤄 벌여 선배들 사이를 지나는데, 때는 건안 십이년 겨울인 동짓달 보름이었다. 수 천의 활과 쇠뇌를 감추어 실은 큰 배 위에 높이 앉아보니 자신의 수 채 또한 위용이 그럴듯했다. 거기다가 날은 맑고 포근한데 바람 한점 없어 물결마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래저래 호기가 솟고 흥이 오른 조조가 문득 영을 내렸다.
“큰 배 위에 술을 내고 풍악을 마련하라. 오늘 밤에는 거기서 모 든 장수들과 함께 흠뻑 마시리라.”
이윽고 해가 지자 동편 산 위로 보름달이 솟았다. 밝기가 마치 해 가 뜬 듯하여 장강 일대에는 흰 비단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조조 는 배 위 높은 곳에 앉아 좌우를 둘러보았다. 수백의 문무 관원이 늘 어섰는데, 문관은 모두가 수놓은 비단옷이요, 무관은 한결같이 칼을 차거나 창을 짚고 있었다.
그들이 각기 차서()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자 조조는 다시 눈 길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았다. 남병산(南山)이 그린 듯 떠 있는 동 쪽으로는 시상 부근이 아련히 눈에 들어왔고 서쪽에는 하구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보였다. 남쪽으로는 번산(山)이 북쪽으로는 오림(烏 林)이 있으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탁 트여 넓기 그지없었다.
그 같은 경색의 아름다움에다 이제 며칠 안으로 그 모두가 자신 의 호령 아래 들어서게 된다는 생각에 조조의 마음은 흥겹고도 즐거 웠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이래 나라를 위해 흉악한 무리를 없 애고 해로움을 뿌리 뽑으며 맹세하고 바란 바는, 사해를 깨끗이 하 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땅이 있으니 바로 이 강남이다. 나는 이제 백만의 대군을 거느린 데 다 내 명을 받들어 일할 그대들까지 내 곁에 있다. 비록 장강이 험하 다 해도 공을 이루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강남을 평정하고 천하가 조용해진 뒤에는 그대들과 더불어 부귀를 누리며 온 누리가 태평함을 즐기리라!”
조조가 그렇게 호기를 부리자 문무의 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맞장구를 쳤다.
“바라건대 하루바삐 개가를 올리도록 하옵소서. 저희들은 죽을 때 까지 승상께 의지해 복덕을 누릴 것입니다.”
그 말에 더욱 흥이 난 조조는 좌우를 재촉해 모두에게 술을 돌리 게 했다. 밤이 깊어지자 조조가 술이 올라 남쪽 언덕을 가리키며 비 웃듯 소리쳤다.
“주유, 노숙아, 어찌 그리도 천시를 모르느냐? 이제 다행히 투항해 온 이들이 있어 너희는 배와 가슴에 큰 병을 품은 꼴이 되었다. 이게 하늘이 나를 돕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순유가 그런 조조를 급히 일깨워주었다.
“승상께서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일이 밖 으로 새어나갈까 두렵습니다.”
“자리에 앉은 그대들이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마음으로 믿는 이들이다. 의심할 게 무어 있겠는가?”
조조는 크게 웃으며 그렇게 순유의 말을 받은 뒤 다시 하구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비하고 제갈량도 들어라. 너희는 어찌 땅강아지나 개미새끼만 도 못한 힘으로 감히 태산을 헐어보려 하느냐?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런 다음 다시 여러 장수를 돌아보며 술주정인지 속마음인지 모 를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내 나이 이제 쉰넷이나 강남을 얻게 되는데 은근히 기쁜 일이 하 나 더 있다. 지난날 교공(公)과 내가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 때, 나 는 그 두 딸이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운 걸 보고 은근히 탐낸 적이 있다. 그런데 뒷날에 이르러 뜻밖에도 그 두 딸은 손책과 주유에게 각기 시집을 가고 말았다. 나는 그걸 늘 애석하게 여겼으나 이번에 장수가에 새로 동작대銅雀臺)를 세우면서 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강남을 얻으면 마땅히 교공의 두 딸을 데려와 그 대 위에다 두 고 노년을 즐기리란 것인 바, 이제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는데 홀연 까마귀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며 울었다. 그게 불길하게 들렸던지 조조 가 문득 웃음를 거두며 물었다.
“저 까마귀가 어찌하여 밤에 우느냐?”
“달이 너무 밝아 날이 샌 줄 알고 둥지를 떠나 날며 운 것 같습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좋게 해석해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무엇 이 좋은지 다시 큰 소리로 계속해 웃는데 몹시 취한 듯했다.
한참 뒤에 갑자기 몸을 일으킨 조조는 날이 크고 긴 창[]을 들 어 뱃머리에 꽂고 술을 강에 부어 제례[]로 삼았다. 하신(神)에 게 머지않은 싸움에서의 승리를 비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석 잔을 거듭 마신 조조는 뱃머리에 꽂았던 창을 뽑아 비껴들고 여러 장수들 에게 말했다.
“나는 이 창으로 황건적을 깨뜨리고 여포를 사로잡았으며 원술을 없애고 원소의 땅을 되찾았다. 위로는 깊이 새북(塞北)이요, 옆으로는 멀리 요동까지 천하를 종횡하는 동안 이 창은 한번도 대장부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아직껏 뜻대로 하지 못한 이 땅과 그 경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강개가 없겠느냐? 내 이제 노래 를 지어 그 뜻을 드러내보고자 하거니와 그대들도 함께 어울려 이 노래를 받아보도록 하라.”
그러고는 소리 높여 노래했다.
술잔은 노래로 마주해야 하리 對酒當歌
우리 살이 길어야 얼마나 되나 人生幾何
견주어 아침이슬에 다름없건만 譬如朝露
가버린 날들이 너무 많구나 去日無多
하염없이 강개에 젖어보지만 慨當以慷
마음속의 걱정 잊을 길 없네 憂思難忘
무엇으로 이 시름 떨쳐버릴까 何以解憂
오직 술이 있을 뿐이로다 惟有杜康
(康, 원래 옛적 술을 잘 담그던 사람)
푸르른 그대의 옷깃 青青子衿
아득히 그리는 이 마음 悠悠我心
오직 그대로 하여 但爲君故
이리 생각에 잠겨 읊조리네 沈吟至今
사슴의 무리 서로를 불러 呦呦鹿鳴
들의 쑥을 뜯는구나 食野之草
나에게 귀한 손님 있어 我有嘉賓
거문고와 피리로 즐기네 鼓瑟吹笙
거기까지 듣고 있던 하후돈의 얼굴에 문득 감개의 빛이 어렸다. 임협의 거칠고 분방한 젊은 날을 청산하고, 효렴에 추천되어 낙양으 로 올라온 청년 조조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어 울분과 좌절을 술로 달래던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조조는 그에 게 그 노래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거기까지만 들려주었는데 이제 그 나머지를 듣게 된 것이 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데서 중단되었던 그 노래가 내일이면 천 하를 모두 움켜지게 될 이 밤, 어떻게 끝을 맺게 될지 하후돈은 궁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장수와 모사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 다. 천하가 모두 평정된 뒤에 조조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는 그들 모 두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의 노래는 계속되 었다.
밝고 밝은 저 달빛 晈晈如月
어느 날에 비추임을 그칠까 何時可輟
그 달빛 따라오듯 이는 시름 憂從中來
끊을 수가 없구나 不可斷絕
논둑길 넘고 밭둑길 건너 越陌度阡
그릇되이 서로 헤어져 있네 枉用相存
헤어짐과 만남 함께 이야기하며 契闊談讜
마음은 옛정을 떠올린다 心念舊恩
달은 밝고 별 드문데 月明星稀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烏鵲南飛
나무를 세 번 둘러봐도 繞樹三匝
의지할 가지 하나 없구나 無枝可依
산은 높음을 싫어하지 않고 山不厭高
물은 깊음을 싫다 않으리 水不厭深
주공은 입에 문 것 뱉어가며 周公吐哺
힘써 천하 인심을 얻었네 天下歸心
노래가 끝나자 모두 즐겁게 따라 불렀다. 조조의 속마음이야 어떠 하든, 적어도 그 노래에서 드러나는 그의 뜻은 손님을 맞기 위해 밥 먹다가 세 번이나 입에 문 것을 뱉고 일어섰다는 주공(周公)에 머물 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신이든 무관이든 오랫동안 이상의 인물로 배워온 주공을 본받으려는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어쨌든 기쁨이 아 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뜻밖의 참사가 일어났다. 문득 거 기 앉아 있던 이들 중에 하나가 일어나 조조에게 이렇게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대군이 싸움을 앞두고 서로 맞서 있는 마당에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불길한 노래를 부르십니까?”
모든 사람이 놀라 보니 오랫동안 조조를 섬겨오며 여러 가지로 공이 많은 유복(劉馥)이란 선비였다. 조조가 여전히 창을 비껴든 채 흥이 싹 가신 얼굴로 되물었다.
“내 노래 중에 어디가 불길하단 말인가?”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나무를 세 번 둘러 봐도 의지할 가지 하나 없구나’란 구절이 바로 불길한 소립니다.”
유복이 눈치 없이 제 곧은 것만 믿고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불같이 노해 들고 있던 창을 유복에게 내지르며 소리 쳤다.
“네 어찌 내 흥을 깨느냐!”
창은 그대로 유복의 가슴을 꿰뚫어 한소리 짤막한 비명과 함께 유복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원래 조조가 노래한 그 구절은 남쪽으로 도망간 유비와 손권을 아울러 비웃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복은 그것을 뜻만으로 따져 거 꾸로 조조 쪽에다 끌어 붙이고 불길한 소리로 해석해버리니 조조가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오를 대로 오른 술기운까지 겹쳐 그처럼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융통성이 좀 모자라긴 해도 유복은 그만 죄로 조조가 마 구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패국 상현 사람으로 자를 원 영)이라썼는데, 그때는 양주 자사(刺史)로 조조를 따르고 있었 다. 합비에서 몸을 일으킨 이래, 난리로 있으나마나 하게 된 양주의 다스림을 바로잡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며 널리 둔전(屯田)을 실시 하여 조조의 세력이 그곳까지 미치게 한 공신 중의 하나였다.
그런 그가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으니 술자리가 제대로 이어질 리 없었다. 모두 술이 확 깬 얼굴로 술렁거 리다가 조조의 눈치를 보아가며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