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6화 : 화용도(華容道)를 끊기엔 옛 은의 무거워라
화용도(華容道)를 끊기엔 옛 은의 무거워라
어쨌든 적벽에서 벗어났다 싶자 조조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문
득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피다가 뒤따르는 군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이곳은 오림으로 보면 서쪽이 되고 의도(都)에서는 북쪽이 되 는 땅입니다.”
군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조조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데다 산과 내가 험하고 가파른 주위를 다시 한번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말 위에서 고개를 젖히고 껄껄거렸다. 방금 싸움에 져 형편없이 쫓겨온 사람답지 않게 웃어젖히는 게 이상스러 워 곁에 있던 장수들이 물었다.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토록 웃으십니까?”
“내가 웃은 것은 다만 주유가 꾀가 없고 제갈량이 슬기롭지 못한 점이었다. 만약 내가 군사를 부렸다면 반드시 저 숲속이나 골짜기에 미리 한 떼의 군사들을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대들 생각에는 어떤가.”
조조가 여전이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길 양쪽에서 북소리가 떨쳐울리면서 하 늘을 찌를 듯한 불길이 솟았다. 놀란 조조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 질 뻔했다.
뒤이어 비탈진 언덕 뒤에서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오며 앞선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군사의 명을 받들어 여기서 너희를 기 다린 지 오래다.”
조자룡이란 이름을 듣자 조조는 가슴이 덜컥했다. 지난날 당양 장 판벌에서 흰 칼빛에 싸인 채 천군만마 사이를 무인지경 가듯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황과 장합은 함께 나가 조운을 막으라!”
조조는 그렇게 급한 영을 내린 뒤 자신은 불길과 연기를 무릅쓰 고 방향을 바꿔 내달았다. 다행히도 조운이 애써 조조를 뒤쫓을 생 각은 않고 항복한 군사를 거둬들이는 것과 기치를 빼앗는 일에만 바 빠 조조는 겨우 위급한 지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차차 날이 밝아왔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가득 덮인 하늘에 동남 풍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불었다. 거기다가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 조조와 그를 따르는 장졸들의 머리에 동이로 물을 퍼붓듯 했다. 한 창 추운 동짓달에 옷까지 함빡 젖은 조조와 그 군사들의 고생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조와 그 군사들은 비를 무릅쓰고 앞으로만 내달았다. 한 참을 가다 보니 이번에는 배고픔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밥 뒤에는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 데다 밤새 이리 쫓기고 저 리 몰리며 수십 리 길을 달려온 뒤라 그럴 만도 했다.
조조는 뒤따르는 군사들이 모두 배고파하는 기색을 보고 그곳에 서 밥을 지어먹고 가기로 작정했다. 이제 어지간히 적의 추격에서 벗어난 것 같은 생각도 들었거니와 추위는 내달으며 잊을 수 있어도 배고픔은 달리 어떻게 달래볼 길이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황망히 쫓겨오는 길이라 곡식이며 밥 지을 솥과 불씨 따 위가 갖춰져 있을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조는 군사들을 마을로 내려보내 곡식과 불씨를 빼앗아오게 했다. 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은 되도록 피해 온 그였으나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가까운 마을에서 빼앗아온 곡식으로 한창 밥을 짓고 있 는데 다시 뒤쪽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조조는 놀라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으나 다행히도 앞선 장수는 이전과 허저였다. 어지러 운 중에도 군사 얼마를 긁어모아 여러 모사들을 보호하며 뒤쫓아온 길이었다.
그들이 오자 조조는 크게 기뻤다. 서둘러 지은 밥을 장졸들에게 나누어 먹인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
한참을 가던 조조가 길을 잘 아는 군사에게 물었다. 그 군사가 대 답했다.
“한쪽은 남이릉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오고 한쪽은 북이릉으로 가는 산길로 들게 됩니다.”
“어느 쪽이 남군 강릉으로 가기에 가까운가?”
조조가 다시 물었다.
“남이릉으로 해서 호로구로 빠지면 가장 가깝습니다.”
군사가 그렇게 대답하자 조조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남이릉으 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 회에서 공명은 조조가 북이릉으로 갈 것이 며, 그곳에 호로곡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 회에서 조조는 남이릉으로 가며 거기 서호로곡이 나온다. 『연의』 저자의 혼동이 있었던 듯하다. 또 이름은 강릉보다 훨씬 서북쪽에 있는데 남동쪽에 있던 조조가 강릉으로 가기 위해 이릉을 지나 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리상 비정(比定)에 착오가 있은 듯하 다-평역자 주)
호로구에 이르자 군사들의 얼굴에 다시 주린 기색이 떠돌았다. 그 사이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데다 먼길을 힘들여 달려온 까닭이었 다. 거기다가 지칠 대로 지쳐 사람과 말이 모두 더 움직이기 어려웠 다. 어떤 군사는 그대로 길바닥에 자빠져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잠시 이곳에서 쉬며 밥을 지어 먹기로 한다. 솥을 걸고 가까운 마을에서 곡식을 거둬와 밥을 지으라. 또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모아 불을 피우고 말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움과 아울러 젖은 옷들을 말리 도록 하라.”
보다 못한 조조가 그렇게 영을 내렸다. 그 말을 군사들은 좋아라 따랐다.
밥을 짓고 말고기를 굽는 한편 모두 젖은 옷을 벗어 바람맞이 나뭇가지에 걸거나 불에 쬐어 말렸다. 뿐만 아니라 말들도 안장을 내리고 들판에 풀어놓아 풀뿌리라도 뜯으며 쉬게 했다.
조조도 말에서 내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 았다. 그런데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문득 하늘을 쳐다보며 크 게 웃었다.
“얼마 전 승상께서 주유와 제갈량을 비웃다가 난데없이 조자룡이 뛰어나와 많은 우리 편 인마가 꺾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무슨 까닭으로 웃으십니까?”
곁에 있던 사람들이 까닭없이 불길한 느낌이 일어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조조는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빈정거리 듯 말했다.
“지난 일이야 어쨌건 결국 주유와 제갈량의 지모란 것도 별것은 아니로구나. 만약 내가 그들의 자리에서 군사를 부렸다면 반드시 이 곳에다 한 떼의 군마를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편안히 쉬 면서 지친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치는 격이 되니, 우리들이 비록 목 숨은 건진다 해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도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기에 나는 그걸 웃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뒤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댔다. 적이 나타난 걸 본 것 같았다.
몹시 놀란 조조는 갑옷을 걸칠 틈도 없이 말에 올랐다. 그러나 말 을 들에 풀어놓고 있던 군사들 중에는 미처 말을 붙들지 못해 뛰어 서 달아나는 자가 더 많았다.
오래잖아 사방에서 불길과 연기가 일어 산골짜기를 덮더니 과연 한 떼의 군마가 벌여 서서 조조의 앞을 막았다. 앞선 장수를 보니 바로 장비였다. 장비는 장팔사모를 비스듬히 꼬나 잡고 호통을 쳤다.
“조조 이 역적 놈아, 네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모든 장졸들은 그 같은 장비를 보자 한결같이 간담이 서늘해졌다. 놀랍고 두렵기는 조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문이 막혀 군령 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허저가 안장 없는 말을 타고 나가 장비 를 맞았다. 이어 장요와 서황이 말을 몰아 함께 장비를 들이치고 양 편의 군사들도 서로 어지럽게 뒤엉켰다.
하지만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바나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비록 세 장수가 한꺼번에 장비에게 덤벼들었으나 그들은 밤새 쫓기 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데다 갑작스런 복병을 만난 터라 마음마 저 온전치 못했다. 이에 비해 장비는 먼저 와 푸근히 쉬다가 때를 노 려 들이친 것이라 셋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거기다가 군사들의 균형은 한층 심하게 깨져 있었다. 장비의 군사 는 수도 많고 편안히 쉬어 기세가 올라 있었고, 조조의 군사들은 얼 마 되지 않은 데다 지치고 굶주려 있었다. 먼저 군사들이 밀리니 허 저와 장요, 서황이 아무리 맹장이라 해도 장비와 그 군사들을 셋이 서 다 막아낼 수는 없었다.
조조가 체신도 잊고 말을 박차 달아나고 이어 장수들과 군사들이 어지러이 쫓기며 뒤따랐다. 장비는 그런 조조군을 뒤쫓으며 마음껏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래도 조조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말등에 찰싹 엎드려 앞으 로만 내달았다. 한참을 가다 보니 차차 뒤쫓는 함성 소리가 멀어졌다. 그럭저럭 장비의 추격에서 벗어난 성싶었다.
그제야 조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장수들과 군사들 약간이 뒤따라 오고 있는데 성한 사람이 드물 정도로 다친 사람이 많았다. 조조가 암담한 기분으로 나아가는데 앞서 가던 군사 하나가 달려와 물었다.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나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되겠습니까?”
“어느 쪽 길이 가까우냐?”
조조가 그렇게 되묻자 그 군사가 대답했다.
“큰 길은 비록 넓고 평평하기는 하되 오십여 리가 멀고, 좁은 길 은 화용도(華容道)를 지나게 되는데 오십여 리가 가깝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한 군사에게 영을 내렸다.
“너는 지금 산 위로 올라가 그 두 갈래 길을 각기 살펴보도록 하라. 자세히 살펴 조금이라도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
영을 받은 군사가 한참 뒤에 돌아와 조조에게 알렸다.
“좁은 길 산기슭 몇 곳에 연기가 나고 있으나 큰 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로 들어 화용도로 가도록 하자.”
조조는 대뜸 그렇게 영을 내리고 앞서 말을 몰아갔다. 여러 장수 들이 뒤따라오며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연기가 일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군마가 있을 것입니다. 그 런데도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오히려 그쪽 길로 가려 하십니까?”
조조가 그런 그들을 깨우쳐주듯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병서에 이른 말도 듣지 못했는가? 있는 듯하며 없고[實則虛之] 없는 듯하며 있다[虛則實之]는 게 군사를 부리는 큰 이치가 아닌가? 제갈량은 꾀가 많은 자라 일부러 사람을 시켜 산 기슭에 불을 놓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쪽 산길로 드는 것을 막으 려 하고 있다. 큰 길에다 복병을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그리 로 가면 들이치기 위해서이다. 내가 다 헤아려 결정한 일이니 다른 소리 하지 말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된 꼴이었다. 하지만 조조의 말 을 듣고 보니 장수들도 그게 그럴싸했다. 딴소리는커녕 오히려 조조 의 그 같은 헤아림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승상의 깊고 깊은 헤아림은 실로 따를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군사들을 몰아 화용도로 달려갔다. 그 무렵 군사들도 모 두 너무 주려 쓰러질 듯하고 말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머리가 그슬리고 얼굴이 데인 자들은 서로 부축하며 걷게 하고, 화살에 맞 고창에 찔린 자들은 억지로 내몰 듯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옷과 갑주는 모두 젖어 있는데, 그나마 제대로 차려입은 자는 거 의 없었다. 병장기며 깃발도 제멋대로 쳐들어 가지런하고 위세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사들의 차림이나 몰골이 그 꼴이 난 것은 대개 이릉 길가에서 장비를 만난 탓이었다. 놀란 김에 안장과 옷을 모두 버리고 맨 말등 에 올라 달아나기 바빴다. 때는 한창 추운 겨울이라 그런 차림으로 길을 가기가 얼마나 괴로운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그런 데다 그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화용도로 드는 길이었다. 앞으 로 나아가던 행렬이 갑자기 멈춘 것을 보고 조조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앞 산기슭 좁은 길이 새벽에 온 비로 구덩이가 패고 물이 괴어진뺄 수렁이 되어버렸습니다. 말굽이 진뻘에서 빠지지 않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까지 애를 먹이니 조조는 앞뒤 없이 화가 나서 애꿎은 그 군사만 꾸짖었다.
“군사란 산을 만나면 길을 열고 나가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 건넌다. 어찌 진흙구덩이 따위를 핑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느냐?”
그리고는 모든 장졸들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늙고 병든 자와 싸움에서 다친 자는 뒤에 천천히 오고 젊고 힘 있는 자는 모두 앞서라. 흙을 퍼나르고 싸릿단이며 풀잎과 억새를 묶어 구덩이를 메우도록 한다. 장요, 허저, 서황은 백기를 이끌고 이 들이 일하는 것을 살피되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한칼에 목을 베도록 하라!”
실로 가을 서릿발처럼 매서운 영이었다. 비록 싸움에 져 쫓기는 몸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의 영이라고 거역하겠는가. 곧 그대로 시 행되니 구덩이는 메워지고, 끊어진 길은 나무를 찍어 엮은 다리로 이어졌다. 그럭저럭 인마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나 그동안 에 겪은 군사들의 고초는 컸다. 거기서 얼어죽고 혹은 독려의 칼에 맞아 죽은 자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길 은 열렸다 해도 어려움은 다하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부대끼는 군사 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길을 따라 끊이지 아니했다.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늘이 정한 것인데 어찌하여 울고 짜고 하느냐? 이제 다시 울음소리를 내는 자가 있으면 선 채로 목을 베리라!”
성난 조조가 매섭게 영을 내렸다.
이때 조조의 인마는 그 길을 지나기 전보다 삼분의 일로 줄어 있 었다. 한 무리는 뒤처지고 한 무리는 구덩이와 골짜기를 메우다 잃 어버린 탓이었다. 겨우 험하고 거친 곳을 지나 평탄한 길에 이르러 돌아보니 조조를 뒤따르는 것은 삼백 기 남짓했다. 그나마 갑옷 투 구를 제대로 갖춘 자는 거의 없었다.
“어서 가자!”
조조는 그들을 재촉해 갈 길을 서둘렀다. 뭇 장수들이 나서서 청했다.
“사람은 제쳐놓고라도 말이 너무 지쳐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쉬고 가게 해주십시오.”
“무슨 소리! 쉬는 것은 형주에 이른 뒤에라도 늦지 않다.”
조조는 한마디로 장수들의 청을 물리치고 나아가기만을 재촉했다. 조조가 그렇게 몰아대니 벌벌 기듯 하면서도 인마가 아울러 움직 이기는 했다. 그런데 거기서 몇 리 가기도 전이었다. 조조가 다시 채 찍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껄껄거렸다. 조조의 웃음 뒤에 여러 번 낭패를 당해본 적이 있는지라 장수들이 까닭 모르게 불안해하며 물 었다.
“승상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또 웃으십니까?”
“사람들은 모두 주유와 제갈량이 아는 것이 깊고 꾀가 많다 하지 마는 내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무리들이다. 만약 이곳에다가 일려 (一旅, 오백 명)의 군사만 숨겨놓았더라도 우리는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두들겨 맞고 쫓기는 중에도 끝내 머리싸움에서 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조조의 허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은 곱게 끝나지 않았다.
미처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길양 쪽에서 오백 명 남짓의 군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쏟아져 나왔다. 앞 선 장수는 다름 아닌 관운장 그 사람이었다. 청룡도를 비껴든 채적 토마 위에 올라 길을 막고 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같았다.
관운장을 본 조조의 군사들은 간이 떨어지고 넋이 흩어진 듯 서 로 얼굴만 마주볼 뿐 입 한번 떼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 다. 우두머리다운 기백을 잃지 않고 비장한 결의를 내비쳤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뒤돌아 달아날 수는 없다. 죽기로 한 판 싸워보도록 하자!”
기백은 장해도 어림없는 소리였다. 장수들이 조조에게 그걸 깨우쳐주었다.
“군사들이 겁을 먹지 않고 따른다 해도 말이 이미 힘이 다했습니 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싸워볼 수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조조도 자신을 뒤따르는 인마를 돌아보고 어두운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정욱이 나서서 그런 조조에게 가만히 말했다.
“저는 평소부터 관운장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오만해도 못 한 사람에게는 모질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힘센 자는 우습게 여겨도 약한 자를 짓밟지 않으며, 은혜와 원수를 갚는 데 분명하고 신의를 무엇보다 높이 내세우는 게 바로 관운장 그 사람이지요. 그런데 지난날 승상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이제 몸소 나서시어 그를 말로 달래본다면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도 있 을 것입니다.”
조조 또한 운장의 성품을 잘 아는 터라 정욱의 그 같은 말을 옳게 여겼다. 몸소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간 뒤 관우에게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장군께서는 그동안 별일 없으셨소?”
관우 역시 몸을 구부려 조조의 예에 답하며 말을 받았다.
“이 관아무개는 군사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승상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소이다.”
굳이 조조의 인사말을 못 들은 체 자신이 맡은 일만 밝혀 엄한 기 색을 지었으나 그런 관우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희미한 떨림이 있었 다. 그 낌새를 알아챈 조조가 문득 간곡한 어조로 사정했다.
“이 조조는 싸움에 져 심히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있소. 그래도 용케 예까지는 빠져나왔는데 이제 이곳에 이르러 길이 막히게 되었 구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옛 정을 무겁게 여기시어 한 가닥 살 길 을 열어주시오.”
“지난날 이 아무개가 승상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안량과 문추를 베어 백마 싸움에서의 어려움을 풀어드렸으니 받은 은혜는 이미 보답한 셈이외다. 더구나 오늘의 일은 군명에 따른 것 인데,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공사를 그르칠 수 있겠소이까?”
처음부터 제갈공명에게 다짐을 받고 온 일이라 관우는 여전히 엄한 기색을 지은 채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눈길에는 조조는 물론 한 때는 그와 다정하게 지냈던 서황을 비롯한 몇몇 장수의 지치고 초라 한 모습에 동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조조가 다시 그런 관우의 무른 마음에 매달리듯 말했다.
“하지만 나의 다섯 관(關)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죽인 일은 잊지 는 않으셨을게요. 그래도 나는 장군을 뒤쫓지 않았는데 그 일은 어 쩌시겠소? 무릇 대장부는 신의를 가장 무겁게 여겨야 하는 법이외 다. 장군은 『춘추』를 깊이 읽어 밝게 아시면서 어찌 유공지사
斯)가 자탁유자(濯孺)를 쫓던 일은 모르시오?”
자유자는 정(鄭)나라의 대부로 활을 매우 잘 쏘았다. 어느 해 군 명을 받고 위나라를 치게 되었는데, 위(衛)에서는 대부 유공지사를 보내 막아내게 하였다. 싸움이 불리하게 되어 쫓기면서 자탁유자가 탄식했다.
‘오늘은 내가 병이 나서 활을 들지 못하니 죽는 수밖에 없 구나!’
그리고 그를 따르는 종에게 물었다.
‘나를 뒤쫓는 자가 누구 냐?’
그 종이 대답했다.
‘유공지사란 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자탁유 자는 안심한 듯 말했다.
‘이제 나는 살게 되었다.’
그 종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 ‘유공지사는 위나라에서 활을 가장 잘 쏜다는 사람인데 부자,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오히려 이제 살게 되었다 하십니까? 그러자 자탁유자가 대답했다. ‘유공지사는 활쏘기를 윤공지타(尹公之俺)에게서 배웠고, 윤공지타는 나에게서 활쏘기를 배웠다. 그런데 윤공지타는 마음이 바른 사람이니 그가 가 까이한 사람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어찌 나를 쏠 수 있겠느냐?’ 그 때 유공지사가 뒤쫓아와서 자탁유자에게 물었다. ‘부자께서는 왜 활을 들어 맞서지 않으시오?’
‘나는 오늘 병이 나서 활을 잡을 수가 없 소’
자탁유자가 그렇게 대답하자 유공지사가 말했다.
‘저는 활쏘기 를 윤공지타에게서 배웠고 윤공지타는 활쏘기를 부자께 배웠으니 결국 제 활 솜씨도 부자께로부터 온 셈입니다. 차마 그 솜씨로 부자 를 도리어 해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임군의 명을 받 들고 하는 일이라 또한 감히 어길 수도 없습니다. ‘
그리고 화살을 뽑 아 쇠테를 풀고 화살촉을 빼낸 뒤 활을 몇 대 쏘고 돌아갔다.
대개 이런 얘기가 『맹자』의 「이루(離婁장에 나온다. 조조는 아 마도 그 일과 『춘추』의 양공(公) 십사년 조에 나오는 일을 혼 동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조금 달라도 경우가 비슷하여 관우 가 그 뜻을 알아들을만은 했다.
관우는 의리를 산처럼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난날 조조가 갖가지 은혜를 베푼 일을 떠올린 위에다 그 조조를 떠나오면서는 다 섯 관의 장수를 죽였는데도 조조는 오히려 사람을 보내 그가 떠나는 것을 도와준 일을 더하여 생각하니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조조의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줄줄이 눈물만 흘리고 서 있는 꼴을 보자 차마 모질게 다룰 수가 없었다. 말없이 말머리를 돌 려 이끌고 온 장졸들에게 조용히 명했다.
“모두 흩어져 벌려 서라!”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조조에게 길을 내주라는 말이 나 다름없었다. 조조는 관우의 속뜻을 짐작하고 얼른 장졸들을 재촉 하여 화용도를 지나려 했다.
“이놈들, 너희는 어디로 가려느냐?”
조조가 빠져나가는 걸 못 본 체하고 있던 관우가 문득 벽력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조조 외에는 아무도 보내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 다. 호통 소리에 놀란 조조의 장졸들이 한결같이 말에서 뛰어내려 울고 절하며 목숨을 빌었다. 그 애처로운 광경을 보자 다시 관우의 어진 마음이 흔들렸다. 차마 그들을 사로잡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 었다.
그때 좀 뒤떨어져 있던 장요가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뒤 따라왔다. 장요를 보자 관우는 다시 옛 정이 되살아났다. 마침내 조 조의 장졸들에게까지도 손을 못 쓰고 모조리 놓아주어버렸다.
화용도의 어려움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내닫던 조조는 이윽고 골 짜기가 끝나는 어귀에 이르렀다.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고 있는 장졸 은 겨우 스물일곱 기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면 얼마간은 더 긁어모을 수 있겠지만 조조에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남군을 바라고 말을 채찍질해 내달았다.
저물 무렵 하여 남군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횃불이 밝 혀지며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았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놀란 조조는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망 연히 서 있는데 문득 앞선 장수며 기치가 눈에 익었음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반갑게도 그들은 아우인 조인의 군마였다.
조인이 조조를 맞으며 변명처럼 말했다.
“형님의 대군이 패한 줄은 알았으나 함부로 멀리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아들이게 된 듯하여 죄송스럽습니다.”
“잘 왔다. 하마터면 너를 다시는 못 볼 뻔했다.”
조조는 그렇게 조인의 편찮은 마음을 달래주고 군사들과 함께 남 군에 들어가 쉬었다. 오래잖아 장요도 나머지 장졸들과 더불어 남군 에 이르렀다. 관우가 자기들을 놓아 보내준 일을 말하며 새삼 그 덕 을 기렸다. 조조가 그들을 살펴보니 심하게 다친 사람이 매우 많았 다. 조조는 그들을 쉬게 하고 조인과 더불어 술을 나누며 괴로운 마 음을 달랬다.
그때 방 안에는 조조와 조인 외에도 여러 모사들이 함께 앉아 있 었다. 술을 마시며 그들을 둘러보던 조조가 문득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승상께서는 호랑이 굴같이 위험한 곳을 빠져나오실 때도 전혀 두려워하시거나 겁을 먹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전한 성안 에 이르러 어이 된 일입니까? 군사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 말도 먹이 풀로 주린 배를 채웠거늘, 그들을 정돈하여 원수 갚을 의논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슬피 우시니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 모사들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조조가 눈물을 씻으 며 대답했다.
“나는 죽은 곽봉효를 생각하고 울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내가 이토록 크게 패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여러 모사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띤 채 입을 열지 못했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조인을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잠시 허도로 돌아가겠다. 가서 다시 군마를 모아 반드시 이 원수를 갚으러 돌아오겠다. 너는 여기서 남군을 지키며 기다 리고 있거라.”
그리고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어주며 덧붙였다.
“이 안에 한 가지 계책을 숨겨두었다. 위급할 때가 아니면 열어보 지 말고 위급할 때만 열어보도록 하라. 그 안에 적힌 대로 따르면 동 오는 감히 남군을 엿보지 못할 것이다.”
“합비와 양양은 누가 지키도록 하셨습니까?”
조인이 그런 조조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조조는 이미 거기까지 생 각해둔 듯 대답했다.
“형주는 네가 아울러 맡아 다스리도록 해라. 양양은 내가 이미 하 후돈을 보내 지키게 했다. 합비는 이곳 싸움에서는 가장 긴요한 땅 이라 장요를 주장으로 삼고 악진과 이전을 부장으로 삼아 그곳을 지 키도록 할 작정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거든 즉시 내게 알리는 걸 잊지 말아라.”
자기가 떠난 뒤의 일까지 모두 헤아려 배치를 끝낸 조조는 곧 말 에 올라 허창으로 떠났다. 그를 따르는 것은 원래 데리고 온 사람들 외에도 형주에서 항복한 문무 벼슬아치들이 더 있었다. 항복받은 사 람들을 앞세운 것은 적벽에서의 패전이 가져올 권위의 손상을 조금 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조조의 잔꾀였다. 따라서 얼른 보면 허창으로 돌아오는 조조의 행렬은 무슨 개선 행진과도 같았다.
남군에 남은 조인은 다시 아우 조홍에게 남군과 이릉을 맡겨 주 유를 막게 하고 자신은 형주에서 그 일대를 다스리기로 했다. 적벽 에서의 참담한 패전에 견주어보면 뜻밖으로 재빠른 북군의 수습이었다.
한편 조조를 놓아보낸 관우는 빈손으로 하구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여러 길로 나아갔던 군마는 각기 전리품을 싸들고 이 미 돌아와 있었다. 적에게서 뺏은 말이며 창칼 갑주에다 싸움에 쓰 는 여러 가지 기구들과 돈이며 곡식이 산더미 같았다. 그러나 관운 장만은 적병 한 사람도 사로잡지 못하고 곡식 한 톨, 쇠토막 하나 얻 은 것이 없었다.
이때 공명은 현덕과 더불어 싸움에 이긴 것을 기꺼워하고 있다가 관우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문 밖에서 관우를 맞아들이며 말했다.
“장군께서는 천하에 큰 해가 되는 역적을 죽여 세상을 덮을 만한 공을 세우셨소. 마땅히 멀리 나와 맞으며 경하를 드려야 할 일인데 양(亮)이 좀 소홀했던 것 같소이다.”
마치 관우가 조조의 목을 들고 온 걸 보기라도 한 것 같은 소리였 다. 관우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지 못했다. 공명이 다시 그런 관우 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왜 말이 없으시오? 혹 장군께서는 우리가 멀리 나와서 맞아주지 않아 속이라도 상하시었소?”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꾸짖듯 말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좀더 일찍 장군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느냐?”
관우가 더 참지 못하고 바로 털어놓았다.
“이 관아무개가 돌아온 것은 다만 죽음을 청하기 위해서였소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럼 조조가 화용도로 가지 않기라도 했다 는 것이오?”
공명이 알 수 없다는 듯 관우에게 되물었다. 관우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대춧빛 같은 얼굴이 한층 붉어지며 대답했다.
“아니외다. 군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조는 그쪽으로 왔으나 이 아무개가 무능하여 놓쳐버리고 말았소.”
“조조는 놓쳤다 하더라도 장수와 군사들은 사로잡았을 것 아니 오? 그래, 얼마나 사로잡았소?”
공명은 짓궂을 만큼 낯빛조차 변하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관우는 이제 목소리까지 움츠러들었다.
“장수와 군사들도 전혀 사로잡지 못했소.”
그러자 공명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는 반드시 운장께서 조조가 베풀어준 옛 정을 못 잊어 일부러 놓아준 것임에 틀림이 없소. 하지만 떠날 때 장군께서 쓰고 간 군 령장이 여기 있소. 도리 없이 그대로 군법을 시행하는 수밖에 없소 이다.”
그러고는 관우의 말을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곁에 있는 무사 들에게 호령했다.
“무엇들 하는가? 조조를 일부러 놓아보낸 관우를 어서 끌어내 목베어라!”
실로 서릿발 같은 위엄이 어린 호령이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 던 무사들이었으나 거듭 꾸짖음을 받자 하는 수 없이 관우를 끌어냈 다. 그때 유비가 공명 앞에 나아가 엎드려 빌었다.
“지난날 우리 세 사람이 의로 맺어질 때 죽고 살기를 함께하기로 하였소. 이제 운장이 비록 군법을 어겼으나 나 또한 지난날의 맹세 를 어길 수가 없소. 바라건대 운장을 목 베시면 이 몸도 함께 죽어야 함을 헤아리시어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시오. 오늘의 잘못을 따로 적 어두었다가 뒷날 공을 세워 그 잘못을 씻게 하는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런 유비의 어조는 공손하고도 간곡했다.
공명의 주인 된 사람으로서 굳이 운장을 살리려면 그렇게까지 머 리를 조아려야 할 까닭이 없는 유비였다. 그러나 군령장까지 쓰고 나간 장수가 그걸 어기고 적을 놓아보낸 죄를 공명이 다스리지 못한 다면 앞으로 공명의 군령은 장졸들 사이에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 하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거기서 유비는 공명의 위엄도 세워주고 관 우의 목숨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공명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이었다.
“주공께서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공명이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비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리 고 관우를 다시 끌어들이게 한 뒤 매섭게 꾸짖었다.
“관우는 듣거라. 주공께서 이렇게까지 나오시니 오늘은 차마 군령 을 시행하지 못하여 네 목을 붙여준다. 그러나 이후 다시 군령을 어 기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용서하지 않으리라!”
관우를 살려주면서도 군령의 위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어조요, 태도였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이 사건 을 제갈량과 관우의 서열 다툼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제갈량의 우위가 확보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사실 관우는 제갈량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유비 진영에서는 자타 가 인정하는 이인자였다. 그런데 제갈량이란 새파란서생(生)이 나타나 순식간에 유비 다음가는 서열을 차지해버렸으니 아무리 관 우가 의리의 대장부라 해도 고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남 달리 유별난 관우의 자존심은 그 고까움을 더욱 참지 못하게 만들었 을 것이다.
제갈량 편에서도 관우는 처음부터 그리 탐탁했을 리가 없다. 자신 의 포부를 펴기 위해서는 유비의 군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거 기에 관우가 만만찮은 경력과 능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갈량으로서는 언제든 기회를 엿보아 단번에 굴복시키려 했을 것이고, 그 사건도 가만히 살피면 처음부터 제갈량이 파놓은 함정에 관우가 빠져든 인상이 짙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아직 조조의 운수가 다하지 않았다는 것도, 관우가 끝내는 조조를 놓아보내리란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의와 역사를 혼동한 해석이다. 관 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준 이 그림 같은 광경은 정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무제본기(武帝本紀, 무제는 조조이다)」의 주 (註)에는 조조가 어렵게 화용도를 빠져나가면서 그곳까지 손을 못 쓴 유비를 비웃는 구절만이 보인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연의』를 지은 이의 탁월한 소설적 재능일 뿐 그걸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은 비약 이상의 억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