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8화 : 교룡(蛟龍)은 드디어 삼일우(三)를 얻고
교룡(蛟龍)은 드디어 삼일우(三)를 얻고
한편 유비는 형주에다 남군과 양양까지 차지하게 되자 마음속으 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탁군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떠돌기 이 십여 년, 한꺼번에 그만큼의 주군을 거느려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 다. 이에 힘이 솟은 유비는 여럿을 모아놓고 먼 앞날을 위한 계책을 의논했다.
“제가 황숙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문득 한 사람이 새로이 마루 위로 올라오며 소리쳤다. 유비가 보 니 이적이었다. 전에 유표 밑에서 일할 때 유비가 채모에게 죽게 된 것을 구하여준 적이 있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 나타난 것이 었다. 유비는 새삼 그때 일에 고마움을 느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윗자리에 앉힌 뒤 물었다.
“선생께서는 제게 어떤 가르침을 주러 오셨습니까?”
이적이 그 말을 물음으로 받았다.
“공께서는 형주를 오래 지킬 계책을 알고자 하시면서 어찌하여 어진 선비를 구해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그어진 선비가 어디에 있소?”
유비가 반가운 얼굴로 이적에게 다시 물었다.
“형(荊), 양(襄) 땅에서는 마씨(馬氏)의 다섯 형제가 모두 그 재주 로 이름 높습니다. 가장 나이가 적은 이는 마속(馬謖)이며 자가 유상 (幼)이고, 가장 어질고 밝은 이는 마량(馬)인데 눈썹 사이에 흰 터럭이 났으며 자를 계상(季常)이라 합니다. 그 고장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에도 ‘마씨의 상(常)자 돌림으로 자를 쓰는 다섯 사람 중 에 눈썹 흰 사람이 가장 낫다네’란 것이 있을 정도지요. 공께서는 어찌 그 사람을 불러 함께 앞날을 꾀해보지 않으십니까?”
이른바 백미(白眉)란 말이 생겨난 고사이다. 이때부터 백미, 즉 흰 눈썹이란 말이 여럿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또는 부분)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비는 기꺼이 이적의 말을 따랐다. 곧 사람을 보내 마량을 부르 고, 예를 다해 맞이한 뒤 물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이 형, 양 땅을 오래 지켜나갈 계책을 일러주십시오.”
마량이 대답했다.
“형주와 양양은 사방이 틔어 있어 적이 넘나들 수 있는 땅이라 오 래 지키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먼저 공자 유기에게 그 몸의 병을 돌보게 하고, 옛날에 일하던 사람들을 불러 각처를 지키게 하십시 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정에 표를 올려 공자 유기를 형주 자사로 세우게 하시면 전란으로 들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다음 남으로 내려가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네 군을 차지하십시오. 거기서 곡식과 돈을 거두어 쌓는다면 앞날의 큰일에 바탕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일을 멀리 내다보는 계책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몹시 기뻤다. 곧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다시
마량에게 물었다.
“그 네 군 중에서는 어느 곳부터 먼저 차지해야 하겠습니까?”
“상강 서쪽의 영릉이 가장 가까우니 그곳부터 차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다음은 무릉쯤이 되겠지요. 그리하여 영릉과 무릉 을 차지하신 뒤에는 다시 상강 동쪽에 있는 계양을 치시고, 마지막 으로 장사를 얻으시면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한끝에 꿰어보는 듯한 마량의 대답이었다. 이에 유비는 마량을 종사로 삼고 이적을 부종사로 삼았다. 그리고 공명과 의논하 여 공자 유기를 양양으로 보내고 그곳에 있는 관우를 형주로 되돌 아오게 한 다음 군사를 가다듬어 먼저 영릉을 뺏는 일에 손을 댔다.
“익덕이 앞장을 서고 자룡은 뒤를 받치도록 하라. 나는 공명과 더 불어 중군이 되리라.”
유비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일만 오천의 인마와 더불어 영릉으로 떠났다. 형주는 관운장이 남아 지키고, 강릉은 미축과 유봉이 지키 기로 했다.
유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영릉 태수 유도(劉度)에게도 곧 전해졌다. 유도는 걱정이 된 나머지 아들 현(賢)을 불러 의논했다.
“유비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아버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유비가 비록 장비와 조운의 용맹을 앞세우고 있기는 하나, 우리 상장(上將) 형도영(邢道 榮)도 홀로 만 명을 당해낼 만한 힘이 있습니다. 넉넉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현이 자신 있다는 듯 그렇게 큰소리쳤다. 아들의 큰소리에 힘을 얻은 유도는 곧 그 아들 현과 상장 형도영에게 군사 만여 명을 주며 성을 나가 유비를 막게 했다.
유현과 형도영은 성 밖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 산을 등지고 물을 끼게 진을 쳤다. 오래잖아 정탐을 나갔던 군사가 말을 달려 돌 아와 알렸다.
“공명이 스스로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도영은 얼른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나갔다. 두 곳 의 군사들이 둥글게 진을 맞대자 형도영이 먼저 말을 달려 나왔다.
“역적 놈들이 어찌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손에는 산이라도 쪼갤 듯한 큰 도끼를 들고 형도영이 소리 높여 꾸짖었다. 그러나 유비 쪽에서는 말 탄 장수가 나오는 대신 누른 기 하나가 조용히 움직이더니, 진문이 열리며 네 바퀴 달린 수레 한 대 가 천천히 굴러 나왔다. 수레 안에는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는데, 머리에는 윤건(綸巾)이요, 몸에는 학의 깃털 같은 흰 옷에 손에는 깃털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이 깃털 부채로 형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바로 남양의 제갈공명이 이 사람 이니라. 조조는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내가 펼친 계책에 빠져 갑옷 한 조각 제대로 건지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너희 따위가 감히 나와 맞서려 드느냐? 내가 지금 이렇게 온 것은 너희를 타일러 싸우지 않고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려 함이니 내 말뜻을 알아들었거 든 얼른 말에서 내려 항복하도록 하라.”
형도영이 지지 않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맞섰다.
“적벽에서 조승상의 대군을 몰살시킨 것은 주랑의 지모이다. 네놈 이 무얼 거들었다고 감히 와서 나를 속이려 드느냐?”
그렇게 소리치고는 도끼를 휘두르며 곧바로 공명에게 덮쳐 갔다. 그걸 본 공명이 얼른 수레를 돌려 진 속으로 달아나고 열려 있던 진 문이 굳게 닫혔다.
형도영은 그것도 모르는 채 진 속 깊이 뛰어들었다. 문득 진세가 변하며 적이 두 쪽으로 나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형도영은 그 가운 데 있는 누른 기가 공명의 것이라 여겨 그것만 쳐다보며 뒤쫓았다. 한군데 산모퉁이를 돌자 누른 기는 멈추어 섰는데, 갑자기 땅이 쪼개져 그 속으로라도 꺼져버린 듯 네 바퀴 수레는 보이지 않고 난 데없이 한 장수가 뛰쳐나왔다. 호랑이 수염에 고리눈을 하고 사모를 비껴든 채 말을 달려 나오는 그 장수는 바로 장비였다.
장비는 벽력같은 호통과 함께 바로 형도영을 덮쳤다. 형도영이 도 끼를 휘두르며 맞서 보았으나 원래 장비의 맞수가 못 되었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힘이 달리는지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가 그 뒤를 쫓는데, 다시 길 양편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와 형도영을 가로막았다.
형도영은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가로막는 복병을 헤치고 나아갔 다. 그러나 간신히 빠져나왔다 싶을 즈음 문득 한 장수가 길을 막고 크게 소리쳤다.
“이놈, 너는 상산 땅의 조자룡을 알아보겠느냐?”
장비에게 이미 반 넘어 얼이 빠진 형도영은 다시 상산의 조자룡 이란 말을 듣자 맥이 쭉 빠졌다. 싸워봤자 이길 것 같지도 않고 달아 나려 해도 달아날 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항복 을 빌었다.
조자룡은 그런 형도영을 묶어 유비에게로 끌고 갔다. 유비가 성난 기색으로 형도영을 꾸짖더니 이어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여봐라. 저놈을 끌어내 목 베라!”
그때 공명이 나서 유비를 말려놓고 형도영에게 물었다.
“네가 만약 유현을 잡아오면 네 항복을 받아주마. 그리 해보겠느냐?”
“살려만 주신다면 반드시 유현을 산 채로 묶어 바치겠습니다.”
형도영이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이 두 번 세 번 물어도 보내만 달라는 식이었다.
“네가 무슨 방법으로 유현을 사로잡아 오겠느냐?”
이윽고 공명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형도영은 앞서보다 더욱 열을 올리며 떠벌렸다.
“군사께서 저를 놓아주신다면 저는 돌아가 그럴듯한 말로 유현을 속여 마음 놓고 있도록 해놓겠습니다. 다만 군사께서는 오늘밤으로 군사를 이끌고 저희 진채를 급습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안에서 호 응해 유현을 산 채로 잡아다 바치겠습니다. 또 그렇게 유현이 사로 잡히게 되면 그 아비인 유도도 절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그런 형도영에게는 어딘가 못 미더운 데가 있어 보였으나 공명은 왠지 그를 믿어주었다. 곧 유비에게 청하여 형도영을 풀어줌과 아울 러 그의 말과 도끼도 내주었다.
별로 항복할 뜻이 없던 형도영은 공명이 자신을 풀어주자 살았다 싶었다. 나는 듯 말을 달려 저희 진채로 돌아가 유현을 보기 바쁘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다 듣고 난 유현이 걱정스 런 얼굴로 형도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소?”
“저쪽의 계책을 우리가 거꾸로 이용하면 됩니다. 오늘밤 장졸들을 진채 밖에다 매복시키고, 진채에는 거짓으로 기치만 잔뜩 벌여 세워 놓았다가, 공명이 야습을 해오면 오히려 우리가 사로잡아버립시다.”
형도영이 가장 꾀 많은 체 말을 했다. 유현도 들어보니 그럴듯했 다. 곧 형도영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정말로 한 떼의 군사가 유현의 진채로 몰려왔다. 그러나 진채를 급습하지도 않고 저마다 가져온 마른 풀단 에 불을 붙여 진채로 던질 뿐이었다.
미리 채 밖으로 나와 숨어 있던 유현과 형도영은 그걸 보자 양쪽 에서 밀고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공명이 꼼짝없이 자기 들의 계교에 말려든 줄 알았다. 불을 지르던 군사들이 급히 달아나는 것을 보고 기세 좋게 뒤쫓았다.
그런데 한 십리 남짓 갔을까. 문득 앞서 가던 적군이 하나도 보이 지 않았다. 그제야 자기들이 오히려 속은 줄 알고 크게 놀란 유현과 형도영은 급히 자기들의 진채로 돌아갔다. 아직 진채에는 불길이 꺼 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안에서 한 장수가 달려 나왔다.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였다.
“진채 안으로 들어가서는 아니 되오. 오히려 얼른 가서 공명의 진 채를 들이치는 게 낫겠소이다.”
유현이 형도영에게 그렇게 소리치고는 다시 군사를 돌렸다. 그러 나 채 십리도 가기 전에 이번에는 조운이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산 비탈 뒤에서 뛰어나와 한 창에 형도영을 꿰어 말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눈앞에서 형도영이 죽는 걸 보고 놀란 유현은 얼른 말 머리를 돌 려 달아났다. 하지만 그도 멀리는 못 갈 팔자였다. 그때껏 뒤쫓아오 던 장비가 말을 몰아 다가오더니 소리개가 병아리 채가듯 말 등에 있는 유현을 낚아채 사로잡아버렸다.
장비가 유현을 꽁꽁 묶어 공명에게로 가자, 유현이 공명에게 울며 빌었다.
“오늘 일은 형도영이 시켜서 이리 되었습니다. 실로 제 참마음이 아닙니다.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그러자 공명은 선선히 그를 풀어주고 옷을 주어 갈아입게 했다. 뿐만 아니라 술까지 내려 그를 놀라게 한 뒤 사람을 시켜 영릉성까 지 바래다주게 하고 아울러 말했다.
“성안으로 들어가거든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 우리에게 항복하도 록 하게.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성을 두드려 부수고 모두 죽여 없 앨 것이네.”
이에 영릉성으로 돌아간 유현은 그 아비도(度)에게 공명의 너그 러움을 말하고 항복을 권했다. 유도 또한 달리 길이 없음을 알자 아 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곧 성벽 위에 항복을 나타내는 깃발을 세 우게 하고 성문을 활짝 연 뒤, 태수의 인수를 싸들고 유비의 대채로 가 항복했다.
공명은 유도가 그대로 영릉 태수에 머물러 고을을 지키게끔 하고 그 아들 유현은 형주의 수군판사(隨軍事)로 삼아 데려갔다. 한바탕 어려운 싸움을 겪을 것으로 알고 겁에 질려 있던 영릉의 백성들은 싸움이 뜻밖에도 가볍게 끝나버리자 한결같이 기뻐해 마지않았다. 유비는 성안에 들어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사들에게 상을 내 린 뒤 다시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영릉은 이미 차지했으니 다음은 계양이다. 누가 가서 계양군을 얻어 오겠는가?”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유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조운이 나섰다. 그 뒤를 이어 장비가 분연히 나서며 소리쳤다.
“형님, 이번에는 제가 가보겠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니 절로 두 사람 사이에는 다툼이 일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공명이 조운을 편들어 말했다.
“자룡이 먼저 대답했으니 자룡을 가게 하십시오.”
그러나 장비가 기어이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가기를 고집하자 공명은 하는 수 없이 제비를 뽑게 했다. 표시를 한 제비를 뽑은 사람이 가기로 한 것인데 거기서도 조운이 이기고 말았다. 끝내 가 지 못하게 된 장비가 성이 나서 툴툴거렸다.
“나는 다른 아무의 도움도 없이 군사 삼천이면 되겠소. 그걸로 아 무도 모르게 계양성을 빼앗아 오리다!”
그러자 조운이 지지 않고 말했다.
“저도 군사 삼천이면 넉넉합니다. 만약 성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군령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조운의 그같이 씩씩한 말에 공명은 크게 기뻤다. 곧 조운에게 군 령장을 쓰게 한 뒤 군사 삼천을 가려 뽑아주며 계양으로 보냈다. 그 래도 장비는 여전히 툴툴거리다가 유비의 꾸짖음을 듣고야 겨우 입 을 다물었다.
조운은 삼천 인마를 이끌고 지름길로 계양을 바라 떠났다. 오래잖 아 그 소식은 계양 태수 조범(趙範)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범은 급히 무리를 모아놓고 조운을 막을 일을 의논했다. 관군교위로 있던 진웅 (陳應)과 포룡(鮑이 나서서 말했다.
“저희 두 사람이 앞장이 되어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저희에게 군 사 삼천만 딸려주십시오.”
원래 그 두 사람은 계양군 영산향(嶺山鄕)의 사냥꾼 출신이었다. 진응은 비차叉, 가닥진 비녀 같은 데 긴 줄을 단 무기)를 잘 썼고, 포룡 은 일찍이 호랑이 두 마리를 한꺼번에 쏘아 죽인 적이 있을 만큼 활 을 잘 쏘았다. 두 사람은 그 같은 자기들의 힘만 믿고 앞장서기를 자청했다. 조범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듣기로 유현덕은 대한의 황숙이 되는 사람이요, 공명은 꾀 가 많은 데다 관우와 장비는 매우 용맹스런 장수라 하였다. 거기다 가 지금 군사를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는 조자룡은 당양장판에서 조 조의 백만대군 사이를 무인지경 지나듯 휩쓴 장수이다. 우리 계양 에도 약간의 인마가 있기는 하나 그들을 당해 낼 성싶지 않다. 차라 리 일찍 항복함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진응이 더욱 자신 있게 말했다.
“이왕에 저희들이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으니 태수께서는 한번 저 희 뜻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들이 만약 조자룡을 사로잡 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항복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조범은 그런 진응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나가 싸우는 걸 허락했다.
진웅은 군사 삼천을 이끌고 성을 나가 적을 맞이했다. 오래잖아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진웅은 진세를 벌여 세우기 바쁘게 비 차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조운이 창을 끼고 말을 박차 나오며 진응을 꾸짖었다.
“우리 주인 유현덕은 유경승의 아우 되는 분이시다. 이제 공자 유 기를 도와 형주를 다스리면서 특히 이곳 백성들을 어루만져주러 오 셨는데 네 어찌 감히 맞서려 드느냐?”
진응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우리들은 오직 조승상을 받들 뿐이다. 어찌 유비 따위에게 몸을 굽히겠는가?”
그러자 크게 성난 조운이 창을 겨누고 말을 달려 진응에게 덮쳐 갔다. 진응도 비차를 빙빙 돌리며 달려 나와 조운과 맞섰다.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엇갈리기를 너댓 번이나 했을까. 진웅은 벌 써 자신이 조운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 나기 시작했다. 조운이 말을 박차 그런 진응을 바짝 뒤쫓았다.
달아나던 진응이 힐끗 돌아보니 조운이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비차를 쓰기에 알맞은 거리라 본 진응은 갑자기 뒤돌아보며 비차를 조운에게 날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조운이 슬쩍 그 비차를 받아 쥐더니 오히려 진응을 향해 되날렸다. 진응이 급히 몸을 구부려 그 비를 피했으나 어느새 조운의 말이 그의 등 뒤로 바싹 다가와 있었다.
“이놈을 묶어라!”
갑자기 조운이 그같이 외침과 함께 말 위에 있는 진응을 낚아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진웅을 묶어 조운 의 진채로 끌고 가버렸다.
대장이 그 꼴이 되니 진웅의 군사들에게 싸울 마음이 있을 리 없 었다. 거미새끼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진채로 돌아온 조운이 진응을 꾸짖으며 말했다.
“네 어찌 감히 내게 맞서려 하였느냐? 내 마땅히 너를 죽일 것이로 되 이제 놓아 보내줄 것이니 돌아가 조범에게 어서 항복하라 이르라!”
그러고는 진응을 풀어주니 진응은 백번 잘못을 빌며 머리를 싸 쥐고 돌아갔다.
계양성으로 돌아간 진응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고하자 조범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더냐? 애초에 항복하려 하였는데 네가 부득 부득 싸우자고 졸라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구나. 이제는 항복 하기에도 구차스럽게 되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진응을 꾸짖어 내보낸 뒤, 태수의 인수를 싸가지고 조운 의 진채로 찾아가 항복했다.
조범이 수십 기만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하러 오자 조운도 진채 를 나가 맞아들이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했다. 비록 인수는 거둬들 였으나 술을 내어 함께 마시는 품이 항복을 받는 자의 거드름은 조 금도 없었다.
몇 순배 술잔이 오간 뒤 조운의 인품에 반한 조범이 말했다.
“장군도 성이 조(趙)씨이고 저 역시 성이 조가이니 오백 년 전에 는 모두가 한 집안이었던 셈입니다. 또 장군도 진정 사람이고 저도 마찬가지로 진정 사람이니 곧 고향이 같습니다. 장군께서 버리시지 않는다면 형제를 맺어 길이 변함이 없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조운 또한 그걸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기꺼이 응하고 서로의 나 이를 따져보았다. 조운과 조범은 나이가 같았으나 생일로는 조운이 넉 달 빨랐다. 이에 조범은 조운에게 절하고 형으로 삼으니, 같은 고 향에 같은 성에 나이 또한 같아 서로 그럴듯했다. 새로이 형제가 된 둘은 늦도록 마시다가 조범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조범은 조운을 성안으로 맞아들여 백성들을 안심시켜주도록 청했다. 조운은 군사들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에 오십 기만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은 향을 사르며 길바닥에 엎드려 조운을 맞아들였 다. 조운이 그런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나자 조범은 다시 그를 관아 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였다. 술이 반쯤 오른 뒤에 조범이 다시 조운 을 청해 후당 깊숙한 곳으로 들게 하고 잔을 씻어 새로운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 바람에 어지간한 조운도 제법 거나해졌을 무렵이었다. 조범이 문득 한 부인을 불러들여 조운에게 잔을 따르게 했다.
조운이 슬쩍 보니 그 부인은 흰 비단으로 지은 소복을 입고 있었 는데 실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듯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그런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이분은 뉘신가?”
조운이 술잔을 받다 말고 조범에게 물었다. 조범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의 형수님 되는 번씨(樊氏)올시다.”
그 말에 조운은 문득 얼굴빛을 고치며 공경하듯 두 손으로 잔을 받 았다. 그런데도 조범은 눈치 없이 잔을 따르고 난 번씨에게 말했다.
“같이 앉으시지요.”
“아니 되네. 내가 몹시 거북하이.”
조운이 얼른 그렇게 말렸다. 번씨도 함께 자리하는 것은 차마 안되겠다는 듯 조용히 후당으로 물러났다.
“아우는 어찌하여 형수님을 불러내어 잔을 치게 하는가?”
번씨가 자리를 뜨자 조운이 은근히 나무라는 투로 물었다. 그래도 조범은 조운의 속마음을 못 읽고 빙긋거리며 대답했다.
“다 까닭이 있으니 형님은 너무 괴이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까닭이라니?”
조운이 여전히 얼굴빛을 풀지 않고 물었다. 조범이 더욱 은근한 미소를 띠며 까닭을 말했다.
“제 선형(兄)께서 세상을 버리신 지 이미 세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형수님께서는 종내 홀로 외로운 낮과 밤을 보내시기에 제가 개가를 권해보았지요. 그때 형수님께서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만 약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개가를 하 겠습니다. 그 첫째는 이름이 널리 천하에 알려져 있어야 하고, 둘째 는 모습이 당당하고 위엄을 갖추어 여럿 가운데서 빼어나야 하며, 셋째는 돌아가신 형님과 성(姓)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에 그 어떤 사람이 그 셋을 두루 갖출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형수님께서는 개가할 뜻이 없음을 둘러 말한 것이라 여겨왔는데, 이 제 형님을 뵈오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모습과 위풍이 당당하시고, 이름을 사해에 떨쳐 울리고 있으며, 성씨는 또 돌아가 신 제 형님과 같습니다. 바로 형수님께서 말하신 그대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저희 형수님의 얼굴이 못생겼으나 싫지 않으 시다면 혼수를 갖추어 형님께로 개가시켰으면 합니다. 이는 형님과 저뿐만 아니라 아랫대에까지도 가까운 인척이 되는 일이니 또한 아 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갑자기 성난 얼굴로 일어나더 니 조범을 꾸짖었다.
“나와 너는 이미 형제가 되었으니 너에게 형수님이라면 나에게도 형수님이 된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이같이 인륜을 어지럽히는 소리를 하느냐!”
그 말을 듣자 조범은 부끄럽다 못해 불끈 화가 솟았다.
“나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너는 어찌 그리도 무례하냐?”
조운이 너무도 자기 속을 몰라주고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나서 는 바람에 일어난 풍파였다. 조범은 그 같은 맞대꾸뿐만 아니라 곁 에 있던 졸개들에게 조운을 치라는 듯 눈짓까지 보냈다. 조운이 그 걸 깨닫고 한 주먹으로 조범을 때려눕힌 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관아를 빠져나온 조운은 곧 말에 올라 성을 나가버렸다.
걱정이 된 조범은 진응과 포룡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진응이 나서서 말했다.
“저 사람이 성이 나서 달려 나갔으니 일은 잘 되기 글렀습니다. 되든 안 되든 뒤따라가 들이치도록 합시다.”
“글쎄, 그게 그대로 잘 될까.”
조범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받았다. 포룡이 한 꾀를 생 각해 냈다.
“그럼 이렇게 해보시지요. 저희 둘이 거짓으로 조운에게 가서 항 복할 테니 태수께서 곧 군사를 이끌고 따라와 싸움을 돋우십시오. 그럼 저희들은 그 진중에서 때를 보아 그를 사로잡아버리겠습니다.”
진응도 그게 제법 괜찮은 꾀 같아 뵈는 모양이었다. 담박 포룡을 거들며 나섰다.
“그렇게 하려면 약간의 인마를 데려가야 일이 제대로 될 것이오.”
“오백 기면 넉넉할 것입니다.”
포룡이 자신 있게 대답하고 진응도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좋은 수가 있을 리 없는 조범도 둘의 꾀를 따르기로 했다.
그날 밤이었다. 진응과 포룡은 오백 인마를 이끌고 성을 빠져나가 조운에게 항복하러 갔다. 조운은 마음속으로 그들의 항복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두 사람을 불러들 였다. 진응과 포룡은 조운의 장막에 이르자 태연히 꾸며댔다.
“조범은 미인계를 써서 장군을 홀린 뒤 술에 취하면 후당으로 끌 어내 죽이려 했습니다. 장군의 목을 조승상께 바쳐 공을 청하려는 수작이니, 대개 조범의 흉측함이 그와 같습니다. 저희 둘은 장군께 서 조범의 간사한 꾀에 걸려들지 않고 오히려 성을 내시며 나가시는 걸 보자 그 화가 저희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와서 항 복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어여삐 여겨 거두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조운은 짐짓 기뻐하는 체했다. 곧 크게 술상을 차리 게 하고 두 사람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조운이 자기들의 꾀에 속은 줄 알고 마음을 놓은 두 사람은 조운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술을 받 아 마셨다. 오래 안 돼 두 사람이 몹시 취하자 조운이 문득 좌우의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저 두 놈을 얼른 묶어 진중에 가두어라!”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졸개들을 잡아 캐묻기 시작했다. 조운이 을 러대자 졸개들은 곧 벌벌 떨며 털어놓았다.
“진응, 포룡이 실은 거짓으로 항복해 온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영을 어기지 못해 따라왔을 뿐입니다.”
내막을 알게 된 조운은 진응과 포룡이 데려온 오백 군사를 모조리 불러모았다. 그리고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인 뒤에 좋은 말로 달랬다.
“나를 해치려 한 자는 진응과 포룡이었으니 따라온 너희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오히려 너희들은 내가 시킨 대로 따르기만 하면 크 게 상을 내릴 것이다.”
이미 자기들의 거짓 항복이 드러나 무서운 벌을 면하기 어려울 줄 알았던 오백의 군사들은 그 같은 말에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조 운이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을 맹세했다.
이에 조운은 그 자리에서 진응과 포룡을 끌어내 목 베고 그들이 데려온 졸개들을 앞세워 거꾸로 계양성을 뺏으러 나섰다. 거짓으로 항복해 온 오백 군사들로 하여금 길을 잡게 하고 스스로 일천 군마 를 이끌고 뒤따른 조운은 그 밤으로 계양성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열어라. 우리가 왔다.”
성 아래 이른 진웅과 포룡의 졸개들은 조운이 시킨 대로 성문을 향해 소리쳤다. 성 위에 있던 조범의 군사들은 너무 일찍 돌아온 저 희 편 군사가 의심쩍었던지 성문을 여는 대신 돌아온 까닭부터 물었 다. 성 아래서 다시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응과 포룡 두 분 장수께서 이미 조운을 죽이셨다. 태수께 의논 드릴 게 있어 돌아왔으니 어서 문을 열라!”
이에 성 위에서는 횃불을 밝게 하여 아래를 비춰보았다. 정말로 자기편 군마임에 틀림없었다. 조범은 일이 뜻밖으로 쉽게 풀린 걸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성을 달려 나왔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조운이 질풍같이 달려 나오며 좌우의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저놈을 사로잡아라!”
그렇게 되니 조범은 어찌 피해볼 틈도 없이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화살 한 대 쓰지 않고 계양성을 손에 넣은 조운은 백성들을 안심 시킨 뒤 곧 사람을 보내 유비에게 그 일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유비 와 공명은 몸소 계양성으로 달려왔다. 태수 조범이 유비와 공명 앞 에 끌려나오자 공명이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믿고 우리 주공께서 보낸 군사에 맞섰는가?”
그러자 조범이 있는 말 없는 말로 그간의 경위를 알렸다. 개중에 는 정말로 조범이 억울한 구석도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공명이 조운을 보고 물었다.
“조범이 그 형수를 장군께 출가시키려 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장군은 어찌 이렇게 일을 만드셨는가?”
“그건 군사의 말씀이 반드시 옳다 할 수 없겠습니다. 제가 조범을 힘으로 사로잡게 된 데는 세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조범 이 이미 나와 형제가 되었는데 그 형수를 내가 차지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할 것이며 둘째는 그 부인이 다시 출가 를 한다면 이는 죽은 지아비에 대한 절개를 잃게 하는 것이며 그 셋 째는 조범이 먼저 내게 항복해놓고 뒤에 딴마음을 먹었으니 그 속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는 이제 막 한강(漢江)을 평정 하시어 잠자리도 아직 편안하시지 못한 터에 이 운이 어찌 감히 한 낱 아녀자의 일로 주공의 큰일을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어지간한 공명도 감복하여 얼른 대꾸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유비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해도 지금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는가? 그 부인을 그대에게 내릴테니 아내로 삼는 게 어떻겠나?”
그래도 조운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천하에 적지 않은 게 여자올시다. 장부가 두려워할 게 있다면 공 명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지 어찌 처자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자 유비도 웃음을 거두고 감탄의 말을 쏟았다.
“실로 자룡은 군자로다!”
그러나 유비는 조범 또한 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를 그대로 계양 태수로 세우고, 조운에게는 따로 무거운 상을 내렸다. 조운이 무거운 상을 받는 걸 보자 장비가 참지 못하고 나서 씨근거렸다.
“형님은 어째서 자룡만 큰 공을 세우게 하고 이 나는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시오?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내게도 삼천 군마 만 주시오. 가서 무릉을 뺏고 그 태수 김선(金旋)을 산 채로 잡아다 바치겠소!”
그러자 공명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익덕이 가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단지 한 가지 일만 지켜주시오.”
“무엇입니까?”
장비가 자기를 보내만 준다면 목이라도 내걸겠다는 듯 물었다.
“전에 자룡이 계양군을 뺏으러 갈 때 군령장을 써놓고 갔으니 이 제 익덕도 무릉군을 치러 가려면 반드시 군령장을 써야겠소. 그다음 에는 군사를 이끌고 가도 말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장비는 두말 없이 군령장을 써 던진 뒤 신에 뻗친 듯 삼천 군마를 인솔하여 낮밤을 가리지 않고 무릉으로 달려갔다. 무릉 태수 김선도 곧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장비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다는 말을 듣자 장수들을 모으고 날랜 군사를 골라 성을 나왔다. 조 금도 장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맞섬이었다.
종사로 있던 공지(鞏志)가 그런 김선을 말렸다.
“유현덕은 대한의 황숙이 되실 뿐만 아니라 널리 천하에 인의를 베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거기다가 장익덕은 용맹스럽고 날래기 가 남다르니 맞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일찍 항복하는 편이 나을 것 입니다.”
그 말에 김선이 벌컥 화를 냈다.
“너는 역적 놈과 내통하여 안에서 변을 꾸밀 놈이로구나. 이미 군 사를 내어 싸우러 나서려는 마당에 이 무슨 요망한 입놀림이냐?”
그러고는 곧 무사들을 호령하여 공지를 목 베게 했다. 곁에 있던 벼슬아치들이 모두 나서서 말렸다.
“적과 싸우기도 전에 먼저 집안사람을 죽이는 것은 군사를 부리 는 데 이롭지 못합니다.”
이에 김선은 차마 공지를 죽이지 못하고 꾸짖어 물리친 뒤 스스 로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성을 나가 이십 리쯤 갔을 때 김선은 마주 쳐 오는 장비와 만났다.
“이놈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장팔사모를 끼고 말에 올라탄 장비가 김선을 보고 벽력같은 호통을 쳤다. 김선은 움찔하여 좌우의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 저 자와 맞서보겠느냐?”
그러나 모두 장비의 위세에 질렸는지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김 선도 약간은 싸움을 아는 사람이라 사기(氣)를 무겁게 여겼다. 이 를 앙다물고 스스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찼다.
“이놈! 네가 감히?”
마주쳐 오는 김선을 보고 장비가 한 번 더 호통을 쳤다. 오뉴월의 우레 소리라도 그보다 더 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소리에 모처럼 마 음을 다잡고 달려 나오던 김선은 안색이 핼쓱해지며 싸워볼 마음이 싹 가셔버렸다. 한번 창칼을 맞대보지도 않고 그대로 말 머리를 돌 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장비가 군사를 몰아 뒤쫓으며 달아 나는 김선의 군사들을 죽였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싸움이었다.
김선은 이십 리 길을 정신없이 달려 무릉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슨 변괴인가. 열라는 성문은 열리지 않고 성벽 위에서 화살만 비 오듯 쏟아졌다. 김선이 놀라 바라보니 성벽 위에 서서 군사들을 부리는 것은 다름 아닌 공지였다.
“너는 천시(天時)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패망하는 쪽을 택했다. 나 와 성안 백성들은 모두 유황숙께 항복하였으니 그리 알라!”
공지가 그같이 꾸짖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김선의 얼굴에 박히며 김선은 그대로 말 아래로 떨어 졌다. 군사들이 그런 김선의 목을 잘라 장비에게 바치고 이어 공지 가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장비는 공지에게 태수의 인수를 싸 들리고 계양성으로 돌아가 유 비에게 바쳤다. 유비의 기쁨은 컸다. 그러나 아직 또 한 사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야 할 이가 있음을 잊지는 않았다.
“너는 이제 형주로 가서 운장과 바꿔 그곳을 지키고 그를 이리로 보내도록 하라. 남은 장사는 운장으로 하여금 쳐서 빼앗게 해야겠다.” 유비는 장비에게도 무거운 상을 내린 뒤 그렇게 명했다.
멀리서 장비와 조운이 공을 세운 얘기만 듣고 은근히 조바심을 내던 관우는 영을 받기 바쁘게 계양으로 달려왔다. 관우가 들어가 유비를 보자 곁에 있던 공명이 말했다.
“자룡이 계양을 치고 익덕이 무릉을 빼앗는 데 모두 삼천의 군마 만 데리고 갔소. 그렇지만 이번에 장사를 치는 데는 일이 좀 달라질 것 같소. 그 태수 한현(韓)이란 자는 별것이 아니나 그 아래 황충 (黃忠)이란 장수가 있기 때문이오. 황충은 남양 사람으로 자를 한승 (漢)이라 하는데, 원래 유표 아래서 중랑장을 지냈소. 그 뒤 유표 의 조카 유반(磐)과 함께 장사를 지키다가 한현을 섬기게 되었소 이다. 비록 나이는 예순에 가까우나 아직은 홀로 만 명을 당해낼 만 한 용맹이 있으니 결코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따라서 운 장께서는 자룡이나 익덕보다 훨씬 많은 인마를 데려가도록 하시오.”
공명은 관우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으나 관우는 지난번 화용도(華 容)의 일 뒤로 애써 억눌러 왔던 고까움이 울컥 일었다.
“군사께서는 어찌하여 저쪽 편의 날카로운 기세만 추켜세우고 우 리 편의 위풍은 깎아버리시오? 그까짓 늙은 졸개 하나가 무에 그리 대단하단 말씀이오? 이 관아무개에는 삼천 군사도 다 쓸 데가 없소 이다. 지금 내가 거느리고 있는 오백 교도수(校刀, 설화로 전하는 관 우의 직속 호위대. 자루가 긴 대도를 든 부대로 추정됨)만 데리고 가도 황충과 한현의 머리를 베어다 바칠 수 있소!”
관우는 그렇게 씨근거리며 일어났다.
“아니 된다.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니 군 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도록 해라.”
유비가 나서서 말렸으나 이미 격한 관우라 소용이 없었다. 기어이 자신이 본래 거느리고 있는 오백 명만 데리고 장사로 떠났다. 공명 도 걱정이 되는지 유비에게 가만히 말했다.
“운장이 황충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으니 자칫 일을 그르칠까 두 렵습니다. 주공께서 가셔서 뒤를 받쳐주셔야겠습니다.”
이에 유비도 급히 군사를 모아 장사로 떠났다.
한편 장사 태수 한현은 성질이 급하고 사람 죽이기를 가볍게 여 겨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저 늙은 장수 황충 한 사람만 믿 고 그럭저럭 자리를 지켜가는데 문득 관우가 쳐들어온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한현은 급히 황충을 불러 의논했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이 한 자루 칼이 있 고이 한벌 활이 있는 한 천 명이 온다면 천 명이 다 죽고 만 명이 온다 해도 또한 만 명이 다 죽을 뿐입니다.”
황충이 그처럼 한현을 안심시켰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황충은 쌀 두 섬을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야 당길 수 있는 활을 쓰는데 백 번을 쏘면 백 번이 다 과녁을 뚫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충의 그 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만큼 계단 아래에서 한 사 람이 내달으며 소리쳤다.
“그 일이라면 늙으신 장군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제 손에 맡겨주신다면 당장 가서 관아무개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한현이 그 사람을 보니 관군교위로 있는 양령(楊齡)이었다. 황충 의 말을 듣고 한시름 놓은 데다 다시 양령이 그렇게 나오니 한현은 크게 기뻤다. 곧 양령에게 일천 군마를 주어 적을 맞게 했다.
우쭐해진 양령은 나는듯 말을 몰아 성을 나갔다. 한 오십 리쯤 가 다 보니 앞길에 자우룩하게 먼지가 일며 관우의 군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대강 진세를 벌인 양령은 창을 끼고 말을 몰아 진 앞으로 나 갔다.
“어느 겁없는 물건이 감히 남의 땅을 넘보느냐? 목이 성하게 남아 있을 때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양령이 그같이 꾸짖자 관우는 크게 노해 대꾸도 않고 말을 박차 며 칼을 춤추어 나아갔다. 양령도 지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마주쳐 나왔다. 그러나 채 삼 합도 어우르기 전에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하 더니 양령은 두 토막이 나 말 아래로 떨어졌다.
대장이 그 꼴로 죽자 양령의 군사들은 얼이 빠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나기 바빴다. 관우는 그런 적군을 쫓아 곧바로 장사 아래 이르렀다.
쫓겨온 군사들로부터 양령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한현은 크게 놀 랐다. 얼른 황충을 불러 성을 나가 싸우게 하고 자신은 성 위에서 싸 움을 구경했다.
황충은 오백 기를 거느리고 나는 듯 적교를 뛰어넘어 성을 나왔 다. 관우는 앞서 칼을 빼들고 달려 나오는 늙은 장수가 황충일 것이 란 짐작이 갔다. 자신이 데리고 온 오백 군사를 옆으로 길게 늘여 세운 뒤 청룡도를 비껴든 채 말 위에서 물었다.
“오는 장수는 황충이 아닌가?”
“이미 내 이름을 알면서도 어찌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황충이 위엄 있게 꾸짖었다. 그러자 운장이 껄껄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내가 특히 자네 목을 얻어 가려고 왔네.”
그리고 말 배를 박차 나가니 곧 두 마리 말이 부딪고 칼과 칼이 어울렸다. 실로 볼만한 싸움이었다. 용과 호랑이가 뒤엉키듯 싸움은 백합을 넘어섰으나 이기고 짐이 쉽게 판가름나지 않았다.
성 위에서 손에 땀을 쥐고 싸움을 구경하던 한현은 혹 황충이 실 수라도 하게 될까 두려웠다. 한참을 구경하다 징을 울려 군사를 거 두니 황충은 하는 수 없이 성으로 돌아갔다.
관우도 군사를 물려 성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다 진채를 차렸 다. 그리고 황충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가만히 생각했다.
‘황충은 늙었지만 실로 헛되이 이름이 나는 법은 없구나. 오늘 백 합이 넘도록 싸웠으나 조금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었다. 내일은 타도 계(施刀)로 그를 유인하다가 갑작스레 되돌아서 베어버려야겠다.’ 마음을 그렇게 정한 관우는 다음 날 일찍 아침을 먹고 성 아래로 나가 싸움을 걸었다. 한현이 성 위에 앉았다가 관우가 싸움을 거는 걸 보고 황충을 내보냈다.
황충은 다시 수백기를 이끌고 적교를 넘어와 관우와 어울렸다. 전 날처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싸움이 어느새 오십 합에 이르렀다. 양편의 함성과 북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때쯤일까, 관우가 문득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충은 관우가 일부러 달아나는 것도 모르고 말을 박차 바짝 뒤쫓았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져 관우가 막 타도계로 황충을 베어버리려 할 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황충의 말이 발을 헛디딘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장은 얼른 말을 돌려 말 에서 떨어진 황충에게로 다가간 뒤 두 손으로 청룡도를 치켜들어 후 려칠 듯하며 소리쳤다.
“내 너를 죽일 것이로되 잠시 목숨을 붙여준다. 어서 가서 말을 갈아타고 다시 나오너라!”
그러자 황충은 급히 말을 일으켜 세우고 몸을 날려 말 등에 오른 뒤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어찌 된 일인가?”
모든 것을 다 본 한현이 놀라 물었다. 황충이 무안한 듯 대답했다.
“이 말이 오랫동안 싸움터를 닫지 않아 봐서 그 같은 실수가 있었 습니다.”
“그대의 활은 백 번을 쏘면 백 번을 맞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어찌 활을 쏘지 않는가?”
한현이 무언가 미심쩍은 데가 있는지 다시 그렇게 물었다.
“내일 다시 싸울 때 거짓으로 싸움에 진척 도망치다 적교 근처에 이르러 쏘아볼 작정입니다.”
황충이 그렇게 대답하자 한현도 더는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 히려 자신의 푸른빛 도는 털을 가진 말 한 필을 황충에게 내주며 기 세를 돋워주었다. 황충은 아끼는 말을 내준 한현에게 감사하고 물러났으나 마음속은 편하지 못했다. 다름 아닌 관우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실로 운장의 이와 같은 의기는 다시 보기 어렵다. 그는 말에서 떨 어진 나를 차마 죽이지 못했는데 나는 어떻게 내일 싸움에서 그를 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만약 내가 그에게 활을 쏘지 않는다면 군 령을 어기는 것이 되니 그것은 또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쪽 저쪽 망설임으로 그날 밤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날이 밝기 바쁘게 사람이 와서 황충에게 알렸다. “관우가 성 밖에 와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이에 황충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갔다.
한편 관우는 이틀이나 싸워도 황충을 이기지 못해 마음이 몹시 초조해져 있었다. 황충이 나오는 걸 보자 짐짓 위풍을 떨쳐 보이며 말을 몰아 달려 나왔다. 다시 용과 호랑이가 뒤엉키듯 두 사람의 창 칼이 얼크러졌다.
한 삼십 합쯤 싸웠을까. 이번에는 황충이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우는 황충이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는 줄도 모르고 힘을 다해 뒤쫓았다.
원래 황충은 달아나다 되돌아 활을 쏠 작정이었으나 그 전날 관 우가 자기를 죽이지 않은 은혜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칼 을 칼집에 꽂고 활을 꺼내 들었지만 살을 얹지 않고 빈 시위만 당겼 다 놓았다.
시위 소리에 놀란 관우가 급히 몸을 피하며 살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아니했다. 그래도 관우는 황충이 빈 활을 쏜지 모르고 뒤쫓기 를 계속했다.
황충이 다시 빈 활을 들어 한 번 더 관우를 쏘는 시늉을 했다. 시 위 소리에 놀란 관우가 살펴보았으나 이번에도 화살은 보이지 아니 했다.
그제야 관우는 황충이 활을 쏠 마음이 없음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는 적이 괴이쩍게 여기면서도 뒤쫓기를 계속했다. 황충의 말이 적교 에 이르렀을 때였다. 드디어 황충은 화살을 빼어 시위에 얹고 힘껏 당겼다 놓았다. 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관우의 투 구 끈을 맞혀버렸다.
화살이 투구 끈을 끊고 투구에 박히자 관우는 몹시 놀랐다. 비로 소 황충의 활 솜씨가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을 꿰뚫을 만한 것임을 알고 화살을 투구에 꽂은 채 되돌아서 진채로 물러났다. ‘저 사람이 투구 끈을 쏜 것은 어제 내가 저를 죽이지 않은 은혜 를 갚기 위함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한 살에 꿰어놓을 수도 있 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관우는 황충과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곧 군사 를 데리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황충이 성안으로 돌아가 한현을 보러 가니 한현은 대뜸 좌우의 무신들에게 호령했다.
“여봐라, 저놈을 어서 끌어내려 묶어라!”
그 말에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내려와 황충을 묶었다. 황충이 가만히 묶이면서도 입으로는 죄 없음을 외쳤다.
“태수께서는 무슨 일로 이러하십니까?”
한현이 성난 소리로 황충을 꾸짖었다.
“닥쳐라! 내가 이 사흘 동안 네 놈이 싸우는 걸 보니 네 놈은 나를 속이고 있음에 분명하다. 첫날 싸울 때 너는 힘을 다하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딴마음이 있었던 것이고, 어제는 말에서 떨어졌으나 관우 가 너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서로 내통한 까닭이다. 또 오늘은 두 번이나 빈 시위를 당기고 세번째는 겨우 투구 끈을 맞혔을 뿐이니 이게 어찌 안팎으로 관우와 짜고 하는 짓이 아닐 수 있겠느냐? 만약 이제 너를 목 베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고는 도부수를 호령해 황충을 성문 밖으로 끌어내다 목 베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나서서 한현을 말리려 했으나 한현이 매섭게 그들 의 입을 막았다.
“황충을 변명해주려는 자가 있으면 그 또한 황충과 같은 죄로 벌 할 것이니 그리 알라!”
그렇게 되니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리려는 이가 없었다. 이에 도 부수들은 황충을 성문으로 끌어가 목을 베려 했다. 황충도 체념한 듯 순순히 목을 빼 늘였다.
도부수가 칼을 들어 막 황충의 목을 내려치려 할 때였다. 홀연 한 장수가 칼을 빼들고 달려오더니 한칼에 그 도부수를 베어 죽이고 황 충을 구해 일으키며 크게 소리쳤다.
“황한승(漢)은 우리 장사를 지키는 든든한 성벽 같은 분이다. 이제 한승을 죽이는 것은 장사 백성들을 모두 죽이려는 것이나 같다. 한현은 잔폭하고 어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이를 가볍게 여기고 선비를 함부로 대하는 자이니 마땅히 함께 힘을 합쳐 죽여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모두 이리로 오라!”
그 말에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그 장수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잘 익은 대춧빛이요, 눈은 별같이 빛나는 장수였다. 다름 아닌 의양 사람 위연(魏延)으로, 전에 양양에서 유비를 따르려다가 일이 뜻 같지 못하자 한현에게로 가서 몸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한 현은 그가 오만하고 예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무겁게 써주지 않았다. 위연이 황충을 구한 뒤 백성들에게 함께 한현을 죽이자고 외치자 잠깐 사이에 수백이 그 아래로 몰려들었다.
“함께 가시지요. 가서 한현을 죽입시다.”
위연은 황충에게도 그렇게 권했으나 황충은 굳게 마다했다. 이에 위연은 하는 수 없이 백성들만 이끌고 성 위로 올라가 한칼에 한현 을 죽인 뒤 그 목을 잘라 말에 걸고 백성들과 함께 관우에게 항복해 버렸다.
관우는 몹시 기뻐하며 성에 들어가 백성들을 안심시킨 뒤 황충에 게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황충은 병을 핑계로 나와 보기를 마다 했다.
‘황충은 실로 의기 있는 장부다. 내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관우는 곧 무릉으로 사람을 보내 유현덕과 공명을 청했다.
한편 유비는 관우가 겨우 오백 군사를 이끌고 장사를 뺏으러 떠나자 곧 군사를 모아 공명과 더불어 그 뒤를 받쳐주기 위해 무릉을 나섰다. 혹시라도 관우에게 실수가 있을까 하여 군사를 재촉해 가는 데 갑자기 푸른 깃대가 쓰러지며 갈가마귀 한 마리가 북쪽에서 날아 와 세 번 울고 남으로 날아갔다.
“이게 무슨 징조요?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구려.”
유비가 괴이쩍게 여기며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말 위에 앉은 채 점괘를 뽑아보더니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장사가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주공께서는 다시 큰 장수 하나를 얻으셨습니다. 정오가 지나면 자세한 걸 아실 수 있 을 것입니다.”
과연 그대로였다. 오래잖아 관우가 보낸 사람이 나는 듯 달려와 알렸다.
“관장군께서는 이미 장사군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지금 항복한 장 수 황충과 위연을 데리고 주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에 유비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인마를 몰아 장사성 내로 들어 갔다. 관우는 유비를 윗자리로 모셔 들인 뒤 황충의 일을 자세히 말 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몸소 황충의 집을 찾아가 만나기를 청했 다. 그제야 황충도 마지못한 듯 나와 항복했다. 그리고 옛 주인 한현 의 목을 빌어 되찾은 뒤 그 시체를 장사 지내주기를 청했다. 의기뿐 만 아니라 자존심에 있어서도 관우에 못지않은 황충의 행동이었다. 유비는 기꺼이 그 청을 들어주어 한현의 시체를 장사 동쪽에다 장사지내게 했다. 유비가 겨우 황충의 마음을 돌려놓고 있을 때 관 우가 위연을 데리고 유비를 보러 왔다. 유비 곁에 있던 공명이 문득도부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봐라, 저놈을 끌어내다 목을 베어라!”
“위연은 공이 있을지언정 죄는 없는 사람이오. 그런데 군사(軍師)께서는 어찌 그를 죽이려 하시오?”
유비가 놀라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 녹祿)을 먹으면서 그 주인을 죽였으니 이는 불충이요, 그 땅 에 살면서 그 땅을 들어 바쳤으니 이는 불의입니다. 거기다가 이제 제가 위연의 상(相)을 보니 뒤통수에 반골(反骨)이 있습니다. 오랜 뒤에는 반드시 주공을 저버릴 사람이라 미리 죽여 화근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그래도 만약 이 사람을 죽인다면 우리에게 항복한 사람들이 모 두 불안해할 것이오. 바라건대 군사께서는 위연을 살려주시오.”
유비가 다시 그렇게 간곡히 청하자 공명도 마지못한 듯 위연을 손가락질해 꾸짖으며 말했다.
“주공의 말씀도 있고 하니 네 목숨은 살려주마. 너는 마땅히 충성 을 다해 주공의 은혜에 보답하고 딴마음을 품지 말라. 마음을 먹 는 날에는 언제든 네 목을 어깨에서 떼어놓으리라!”
“알겠습니다. 결코 딴마음을 먹는 일이 없겠습니다.”
겁에 질린 위연은 연이어 그렇게 다짐하고 유비와 공명 앞을 물 러났다.
“유경승의 조카 유반(劉磐)이 유현에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고 있 는데 자못 덕망이 있습니다. 그를 불러내 써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위연이 물러난 뒤 황충이 그렇게 권했다. 유비는 그 말에 따라 유반을 불러 장사군을 맡겼다.
네 군을 평정한 뒤 유비는 군사를 돌려 형주로 갔다. 이때부터 곡식과 돈이 넉넉해지고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모여드니 실로 교룡 이 삼일우(三雨)를 얻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