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9화 : 다시 이는 두 집안 사이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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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9화 : 다시 이는 두 집안 사이의 불길


다시 이는 두 집안 사이의 불길

한편 금창을 다스리고자 시상으로 돌아간 주유는 감녕을 보 내 파릉군을 지키게 하고 능통은 한양군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두 곳 사이에 싸움배를 나누어 벌여 척후와 연락을 겸하게 한 뒤 정보 로 하여금 나머지 장수들을 이끌고 합비로 가게 했다.

합비는 적벽대전 뒤로 손권이 머물러 조조의 군사들과 싸우고 있 는 곳이었다. 그동안 손권은 조조가 그곳에 남긴 장졸들과 열몇 번 의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고 짐이 뚜렷하지 못했다. 그 때 문에 함부로 성 아래까지 다가가 진채를 내리지 못하고 오십 리나 떨어진 곳에다 군사를 둔치고 있는데 문득 정보가 많은 장졸들을 이 끌고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손권은 몹시 기뻐하며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 수고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몸소 영채를 나갔다. 그때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노자경(敬)께서 먼저 이르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말에서 내려 노숙을 기다렸다. 노숙은 손권 이 몸소 나와 서서 자기를 기다리는 걸 보고 황급히 말에서 내려 예 를 표했다. 손권이 그토록 노숙을 두텁게 대하는 걸 본 여러 장수들 은 한결같이 놀라면서도 이상히 여겼다.

손권은 노숙을 청해 말 위에 오르게 한 뒤 자신도 말에 올라 노숙 과 말고삐를 나란히 쥐고 나아가면서 가만히 말했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공을 맞았으니 이만하면 넉넉히 공을 높였다

하겠소?”

농담인 듯하면서도 진심 섞인 물음이었다. 노숙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이 정도로는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으로 공을 높이는 게 되겠소?”

손권이 뜻밖이라는 듯 그렇게 물었다. 노숙이 여전히 정색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위엄과 덕을 사해에 두루 떨치시고 구주를 모두 손아귀에 넣으시어 제업(業)을 성취하심으로써 이 노숙의 이 름을 대나무 껍질과 비단 위[竹帛]에 남기도록 해주십시오. 그때에 야 비로소 저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손권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욕심 치고는 지나칠지 모르나 듣기에 그리 싫은 소리만은 아니었다.

노숙과 더불어 자신의 장막에 이른 손권은 크게 잔치를 열어 적벽대전에서 싸운 장수들을 위로한 뒤 합비를 깨뜨릴 계책을 의논했다.

“장요가 사람을 보내 싸우자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손권이 여럿과 더불어 한창 의논하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그렇게 알렸다. 글을 받아 열어보니 사람을 몹시 격동시키는 내용이 었다. 읽기를 마친 손권이 성난 소리로 말했다.

“장요가 나를 업신여겨 속이려 듦이 너무 심하구나! 정보가 군사 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그전에 싸우려고 짐짓 사람의 부아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좋다. 내일 나는 새로 오는 군사를 쓰지 않고 한바탕 싸울 테다. 어디 두고 보아라!”

그리고 그날 밤으로 영을 내려 오경 무렵에는 삼군을 모두 합비로 몰아갔다.

진시쯤 되어 길을 반쯤 갔을 때 성을 나온 조조의 군사들도 그곳 에 이르렀다. 양군은 마주 보고 진세를 벌였다.

이때 손권은 금투구에 금빛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진 앞으로 나 왔다. 그 뒤에는 송겸(宋)과 가화賈) 두 장수가 방천화극을 들 고 좌우로 벌려 호위해 서 있었다.

북소리가 세 번 크게 울리더니 조군(軍) 쪽에서도 문기가 양편 으로 벌어지며 세 장수가 갑주를 갖춰 입고 나왔다. 가운데 선 것은 장요요 왼쪽에는 이전이며 오른쪽에는 악진이었다.

“손권이 어린것아, 내 칼을 한번 받아보겠느냐?”

장요가 말을 박차 달려 나오며 손권의 부아를 돋우었다. 젊은 손 권은 그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창을 휘두르며 몸소 뛰쳐나가려 했 다. 그때 진문 안에서 한 장수가 달려 나와 손권을 앞질렀다. 손권이 말고삐를 잡고 보니 앞질러간 장수는 다름 아닌 태사자였다.

장요가 칼을 휘둘러 태사자를 맞자 곧 한바탕 맹렬한 싸움이 어 우러졌다. 창과 칼이 부딪고 말과 말이 엇갈리기를 여든 번에 가깝 도록 승부가 정해질 줄 몰랐다.

이를 보고 있던 이전이 악진에게 가만히 말했다.

“앞에 금투구를 쓰고 있는 자가 바로 손권일세. 만약 손권만 사로 잡을 수 있다면 적벽에서 진 우리 편 팔십삼만 대군의 원수 갚음은 넉넉할 것이네.”

그런데 미처 이전의 그 같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악진이 말을 박 차 달려 나갔다. 말 한 필에 칼 한자루만 들고 비스듬한 언덕길을 달려내려가 똑바로 손권 앞을 찔러가는 것이 마치 한 줄기 빠른 빛 과도 같았다.

손권 앞에 이른 악진은 칼을 들어 힘껏 손권을 내려쳤다. 손권을 호위하고 있던 송겸과 가화가 한꺼번에 화극을 내밀었으나 악진의 칼날은 두 자루의 화극을 모두 토막내버렸다. 송겸과 가화는 날이 잘려나간 화극을 들어 악진의 말 머리를 두들겼다.

악진은 하는 수 없이 말 머리를 돌려 자기 진채 쪽으로 닫기 시작 했다. 군사들의 손에서 창 한 자루를 뺏어든 송겸이 그런 악진을 뒤 쫓았다. 멀리서 보고 있던 이전이 가만히 화살 한 대를 뽑아 시위에 먹였다.

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송겸의 가슴 한복판에 박히고 송겸은 구슬픈 외마디 소리와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태사자는 등 뒤에서 한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소리를 듣자 은근히 놀랐다. 더 싸울 마음이 없어 장요를 버리고 자기편 진채로 되돌아섰다. 승세를 탄 장요가 그대로 군사를 몰아 덮쳐가니 오군 (吳軍)은 이내 크게 어지러워졌다.

장요는 사방으로 흩어져 쫓겨가는 오군 사이에 있는 손권을 보고 말을 몰아 뒤쫓았다. 한참을 뒤쫓는데 문득 한 떼의 군사가 언덕 뒤 편에서 쫓아나와 길을 막았다. 앞선 장수를 보니 오(吳)의 대장 정보 였다.

정보는 손권을 쫓는 조군을 힘껏 두들겨 쫓아버린 뒤에 손권을 구해냈다. 장요도 정보의 군사가 이미 이른 걸 보고는 더 덤비지 못 했다. 한바탕 적을 죽인 걸로 만족하며 군사를 거두어 합비성으로 돌아갔다.

정보가 손권을 구해 대채로 돌아가자 뒤이어 쫓기던 오군들도 줄 지어 영채로 돌아왔다. 손권은 송겸을 잃은 것을 생각하고 목을 놓 아 울었다.

장사장이 그런 손권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젊은 혈기만 믿고 큰 적을 가볍게 보아 몸소 삼군 가 운데 뛰어드셨으니 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적장을 목 베고 그 기를 뺏으며 위세를 떨치는 것은 한낱 편장이나 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부디 분육, 맹분과 하육. 둘 다 전국시대의 이름난 용사) 의 용맹을 억누르시고 패왕(王)의 원대한 계책을 품으십시오. 오 늘 송겸이 화살촉에 목숨을 잃은 것도 모두 주공께서 적을 가볍게 보신 탓입니다. 앞으로는 스스로를 보중하시어 결코 함부로 싸움머 리에 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실로 뼈저리게 와닿는 충언이었다.

손권은 크게 깨달은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모든 것이 이 몸의 잘못이오. 앞으로는 마땅히 고치도록 하겠소.”

그러면서 크게 뉘우치고 있는데 문득 태사자가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제 수하에 과정(定)이란 자가 있는데 장요 밑에서 말 기르는 후조(後槽, 하급 군졸의 직책 이름인 듯하다) 하나와 형제간이 됩니다. 그 후조가 장요에게 꾸중 들은 일로 원한을 품고 오늘밤 사람을 보내 알려오기를 불을 질러 신호를 하고 장요를 찔러 죽여 송겸의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저에게 군사 약간을 주시어 합비로 보내주십 시오. 그 후조와 밖에서 호응하여 합비성을 빼앗아 보겠습니다.” “과정은 어디 있소?”

송겸의 원수를 갚고 합비를 빼앗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손권이 물었다.

“이미 적군 사이에 섞여 합비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라건대 제 게 오천 군사만 내려주십시오. 반드시 장요의 목을 얻어 오겠습니다.”

“장요는 꾀가 많은 사람이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을지 모르니 함 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되오.”

태사자가 너무 일을 서두르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있던 제갈근이 그렇게 말렸다. 그런데도 태사자는 굳이 가기를 원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손권 또한 송겸의 죽음을 슬퍼하던 터라 그 원수 갚음이 급했다. 몇 번 말리다가 못 이긴 척 태사자에게 군사 오천을 주어 합비로 보냈다.

한편 태사자 밑에 있던 과정은 그날 잡군들 속에 끼어 합비성에 들어가자마자 말 기르는 후조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만난 두 사람 은 곧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먼저 과정이 그 후조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태사자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었네. 오늘 밤에는 틀림 없이 접웅하러 오실 것인데 자네는 어떻게 일을 해치울 작정인가?”

“이곳은 군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밤중에 급히 장요를 들이 치기는 어렵네. 먼저 내가 풀더미에 불을 지르거든 자네는 성안을 뛰어다니며 모반이 일어났다고 외치게. 그러면 성안의 군사들이 갈 팡질팡하게 될 것인즉, 그 틈을 타 장요를 찔러 죽인다면 나머지 군 사들은 절로 달아날 것이네.”

그 후조가 제법 그럴듯하게 대답했다.

“그 계책이 참으로 묘하이!”

과정도 그렇게 감탄하며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그날 밤이었다.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요는 삼군에게 두루 상 을 내려 낮의 수고로움을 위로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갑옷을 풀고 누워 잠드는 것만은 영을 내려 금했다.

“오늘 싸움에서는 우리가 이겼고, 오병은 멀리 숨어 있는데 장군 께서는 어찌하여 갑옷을 풀고 편히 쉬지 않으십니까?”

좌우의 사람들이 까닭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장요가 무겁게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장수된 자의 도리는 싸움에 이겨도 기뻐하지 않고 져도근심하지 않는 것이라네. 만약에 오병이 나의 방비 없음을 알고 그 틈을 타 쳐들어온다면 무슨 수로 막아내겠나? 오늘 밤의 방비는 오히려 다른 밤보다 더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이네.”

그런데 장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갑자기 진채 뒤에서 불길이 일며 군사들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이어서 또다른 외침이 일었다.

“반란이 일어났다! 모반이다!”

“오병과 내통한 자가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요는 얼른 장막을 나와 말에 올랐다. 그리고 자 기 곁에서 따르는 장교 수십 명을 불러 길가에 세웠다. 곁에 있던 사 람들이 놀란 목소리로 장요에게 말했다.

“함성 소리로 보아 일이 매우 급한 모양입니다. 얼른 가서 살펴보시지요.”

그러나 장요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했다.

“모반이 있다 한들 어찌 성안이 모두 한꺼번에 모반을 일으키겠 느냐? 이는 틀림없이 모반을 꾸민 자가 우리 군사들을 놀라게 하려 고 수선을 떠는 것뿐이다. 거기에 속아 군률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 으면 먼저 그자부터 목 베리라!”

그러고는 조용히 멈춰 서서 일의 움직임만을 살폈다. 과연 오래잖 아 이전이 과정과 후조를 잡아가지고 왔다. 그들에게서 내막을 전해 들은 장요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둘의 목을 쳐버리자 곧 성안은 조용 해졌다.

그때 성 밖에서 징소리 북소리가 요란하며 함성이 크게 울렸다.

장요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오병들이 밖에서 호응하러 온 것일 게다. 오히려 적의 계책을 이용해 적을 깨뜨려야겠다!”

그러고는 이어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성문 안에다 불을 지르고 입을 모아 모반이 일어났다고 외치도 록 하라! 그런 다음 성문을 크게 열고 적교를 내리도록 한다!” 

곧 적을 꾀어 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성 밖에 있는 태사 자가 그런 성안의 사정을 알 까닭이 없었다. 성문이 크게 열린 것을 보고는 내변이 있는 줄 알고 앞장서서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성 위에서 돌 쇠뇌 소리가 한번 나더니 이어 화살이 어지 럽게 쏟아졌다. 태사자는 그제서야 일이 잘못된 걸 알고 급히 말 머 리를 돌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몸에 몇 대의 화살을 맞고 말았다. 뿐 만이 아니었다. 달아나는 태사자의 뒤를 쫓아 이전과 악진이 군사를 몰고 성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고 뭐고가 없었다. 오병은 태반이 꺾인 채 엎어지며 자빠지며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이전과 악진은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오병의 대채 앞까지 따 라왔다. 오병 쪽에서 육손과 동습이 마주쳐 나가 간신히 태사자를 구해냈다. 이전과 악진도 오병의 대채에서 구원군이 쏟아져 나오자 자기편 군사를 거두어 합비성으로 돌아갔다.

손권은 태사자까지 무거운 상처를 입고 돌아오자 한층 마음이 상 했다. 장소가 그런 손권에게 군사를 물려 돌아가기를 권했다. 아무 리 군사가 많다 해도 그토록 예기를 상해서는 더 싸울 수 없다고 여 겨 손권도 장소의 말을 따랐다.

손권은 군사를 수습하여 배에 태운 뒤 남서南)의 윤주로 돌아가 그곳에다 군마를 머물게 했다. 이때 태사자의 상세(傷勢)는 매우 중했다.

손권은 장소를 비롯한 관원들을 보내 태사자의 상세를 알아보게 했다. 태사자는 여럿이 문안을 오자 홀연 몸을 일으키더니 크게 외 쳤다.

“대장부가 난세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석 자 칼로 세상을 뒤덮을 공을 세워야 하리라. 그런데 이제 나는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죽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고는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니 그때 태사자의 나이 아직 마흔 하나였다. 지극한 효성과 신의로 이름났던 맹장의 허망한 최후 였다.

손권은 태사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남서 의 북고산(北山) 아래 후히 장례 지내도록 명하고 그 아들 태사형 (太史亨)을 자신의 부중에 데려다 길렀다.

한편 형주의 유비는 새로이 얻은 네 군을 바탕으로 힘써 군마를 기르고 있다가 손권이 합비에서 싸움에 지고 남서로 돌아갔다는 말 을 들었다. 유비는 그 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공 명을 불러 의논했다. 그러나 불려온 공명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제가 간밤에 천문을 보니 서북의 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반드 시 황족 가운데 하나가 죽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요?”

유비가 어리둥절해 되묻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유기 공자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비는 통곡하여 마지않았다. 생전에 형님처럼 모 시던 유표의 마지막 핏줄이 끊어진 까닭이었다. 공명이 그런 유비를 달래며 권했다.

“살고 죽는 일은 하늘이 이미 나누어 정해놓은 것이니 주공께서 는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공연히 귀한 몸을 상하시게 될까 두렵 습니다. 오히려 지금 생각하실 일은 천하의 대사입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사람을 뽑아 양양으로 보내시어 그곳 성지(池)를 지키게 함 과 아울러 공자를 장사 지내는 일도 맡기도록 하십시오.”

슬픈 중에도 퍼뜩 정신이 나게 하는 말이었다. 유비가 눈물을 씻으며 물었다.

“누구를 그리로 보냈으면 좋겠소?”

“관운장이 아니면 이번 일은 어렵겠습니다.”

이에 유비는 곧 관우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양양을 지키게 했다. 관우를 보내놓고 나니 다음은 지난날에 한동오와의 약조가 걱정 이 되었다. 유비는 다시 제갈공명에게 물었다.

“유기가 이미 죽었으니 동오는 틀림없이 형주를 내놓으라 할 것이오. 그 일은 어찌 대처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공명은 태평스런 얼굴로 유비를 안심시켰다.

“만약 동오에서 사람이 온다면 이 양이 알아서 대답하겠습니다. 주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에 유비도 마음을 놓고 군사를 기르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로부터 한 보름쯤 되었을 때였다. 동오에서 노숙이 공자 유기의 문상을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유비와 공명은 성을 나가 노숙을 맞아들였다. 공해(公, 관아)에서 주인과 손이 각기 예를 끝낸 뒤 노 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는 공자 유기께서 세상을 버리셨단 말을 들으시고 저로 하여금 보잘것없으나마 예물을 갖추고 먼저 가서 제사에 임하라 하 셨습니다. 주(周)도독께서도 두 번 세 번 유황숙과 제갈선생께 간절 한 조의를 표해달라고 하십니다.”

그 말에 유비와 공명도 몸을 일으켜 고마움의 뜻을 나타냈다. 그 리고 가져온 예물을 거둔 뒤 술을 내어 노숙을 대접했다. 술이 몇 잔 돌기도 전에 노숙이 문득 정색을 하며 찾아온 참뜻을 밝혔다. 

“전에 황숙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형주는 우리 동오에게 돌려주겠다 하셨습니다. 이제 공자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형주는 반드시 돌려줘야 합니다. 황숙께서 언제쯤 돌려 주실지 몰라 실로 궁금합니다.”

그 말에 유비는 다만 허허거리며 술잔만 내밀었다.

“공은 우선 술잔이나 비우시오. 나도 상의할 일이 하나 있소이다.”

그러고는 거푸 몇 잔을 권했다. 노숙은 하는 수 없이 몇 잔을 얻어 마신 뒤에 다시 그 일을 채근했다.

“언제 형주를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때 공명이 문득 낯색이 변해 유비의 대답을 대신했다.

“자경은 참으로 일의 이치를 알지 못하시는구려. 어찌 사람을 세 워놓고 그리 졸라댄단 말씀이오! 대한은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 큰 뱀을 베시고 의로써 몸을 일으키신 뒤 나라의 기틀을 열고 제업을 세워 전해 오늘날에 이르렀소. 그런데 불행히도 간웅들이 잇달아 일어나 각기 한 지방씩 차지하니 천도(天道)가 제 길을 찾아 정통으 로 되돌아갈 가망은 매우 적어졌소이다. 하지만 우리 주공께서는 중 산정왕(中)의 후예요, 효경황제(孝景皇帝)의 현손(孫)이 되시 며 지금의 황상 폐하께는 숙부뻘이 되시는 분이시오. 어찌 한 조각 땅을 나누어 차지하지 않으실 수 있겠소이까? 더구나 죽은 유경승 은 우리 주공의 형님이 되시오. 형이 죽어 아우가 그 땅을 물려받는 게 무어 이치에 어긋날 게 있겠소?

거기 비해 그대의 주인은 원래 전당(錢塘) 땅의 하찮은 벼슬아치 아들로 조정에 아무런 공덕도 세운 일이 없건만 세력에 의지해 여섯 군 여든한 고을을 차지하고 있소. 그러고도 오히려 욕심에 차지 않 아 다시 한의 땅을 더 어우르려는 것이오? 천하는 유씨(劉氏)의 것 이건만 내 주인은 유씨면서도 몫이 없고, 그대의 주인은 손씨(孫氏) 이면서도 오히려 어거지로 땅을 다투고 있소. 거기다가 적벽(赤壁) 의 싸움도 그렇소. 우리 주공께서도 수고로움이 적지 않으셨고 여러 장수들도 각기 명을 받아 힘을 다했는데 어찌 그 승리가 그대로 동 오 홀로만의 힘 덕분이라 할 수 있겠소? 또 내가 동남풍을 빌어주지 않았던들 주유가 어찌 반푼어치 공이라도 세울 수 있었겠소? 만약 그 싸움에서 강남이 졌으면 이교(二喬, 손책의 아내와 주유의 아내)가 조조의 동작대銅雀臺)로 끌려갔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대의 가솔들도 마침내 지켜낼 수는 없었을 것이외다.

우리 주공께서 얼른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자경이 고명한 선비라 이 모든 것을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절로 아시려니 해서일 것이오. 그런데 공은 어찌 살피고 헤아리심이 이토록이나 모자란단 말씀이오?”

흐르는 듯한 가운데도 준엄한 추궁까지 들어 있는 말이었다. 공명 이 그렇게 나오자 노숙은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다가 이윽고 민망한 듯 말했다.

“공명의 말씀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노숙의 처 지도 헤아려주시오. 지금 와서 그렇게 나오신다면 제 처지가 몹시 불편해지게 되오이다.”

“이 일 때문에 공이 불편할 게 무엇이오?”

공명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노숙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지난날 황숙께서 당양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실 때 이 노숙이 가 서 공명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 우리 주공을 뵙게 주선했소이다. 또 뒷날 주유가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치자고 할 때도 이 노숙이 와서 공자가 돌아가시면 형주를 돌려주시겠다는 황숙의 말씀을 듣고 전 해 그를 달랬소. 그런데 이제 와서 그리하지 못하시겠다니 이 노숙 이 어떻게 낯을 들고 돌아갈 수 있겠소이까? 내 주인과 주공근은 모 두 내게 그 죄를 물으려 할 것이외다. 내가 그로 인해 죽는 것은 조 금도 한스러울 것이 없으나 다만 걱정되는 것은 성난 동오가 군사를 일으켜 이리로 밀고 오는 일이오. 그리되면 황숙께서는 이 형주에 편안히 앉아 계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연히 천하의 비웃음거리 만 될 것이오.”

사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한 위협이 담긴 말이었다. 공명이 기 다렸다는 듯 노숙의 그 같은 말을 받았다.

“지난날 조조는 백만의 대군을 이끈 데다 천자의 이름까지 앞세우고 왔으나 나는 눈도 깜짝 아니하였소. 그런데 어찌 주유 같은 한낱 어린아이에게 겁을 내겠소? 다만 자경께서 체면을 잃을까 보아 생각해본 것이 있는데, 이건 어떻겠소?”

“어떻게 한단 말씀이오?”

공명의 말투로 보아 일이 순리로 풀어질 것 같지는 않다고 짐작 하고 있던 노숙이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물었다. 공명은 그나마도 노숙에게 큰 선심이라도 베푸는 양 대답했다.

“내가 우리 주공께 권해 문서 한 장을 받아드리겠소. 잠시 형주를 빌려 근거로 삼고 있다가 따로 알맞은 땅을 얻으면 곧 형주를 동오 로 돌려드리겠다는 약조를 적은 문서외다. 그것이면 자경이 낯 없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떻소?”

“공명께서는 어떤 땅을 얻으신 뒤에 형주를 우리 동오에 돌려주 신단 말씀이오? 어디에 그런 땅이 남아 있소?”

노숙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주를 내주 고도 근거로 삼을 만한 땅이 얼른 떠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 나 공명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중원 쪽은 조조가 버티고 앉았으니 아무래도 가까운 날에는 손 에 얻기 어려울 것이지만 서천(西川)이 있지 않소? 그 주인 유장( 璋)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약해 우리 주공께서는 머지않아 그 땅을 도모하실 작정이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서천을 얻는다면 그때는 지 체없이 형주를 돌려드리겠소.”

그렇게 되니 노숙도 하는 수 없었다. 공명의 말을 따라 약조의 문 서라도 받아 가기로 했다.

유비가 몸소 붓을 들어 문서 한 통을 쓰고 도장을 찍자 제갈공명도 보증의 뜻으로 나란히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은 뒤 노숙에게 말 했다.

“이 양은 황숙의 집안 사람이니 어찌 자기 집안 일에 보증이 될 수 있겠소? 번거롭지만 자경선생께서도 저와 나란히 보증인이 되어 도장을 놓으시지요. 그래야만 돌아가 오후께 이 문서를 내놓기에 낯 없이 되지 않을 것 같소이다.”

그러자 이번에도 노숙은 하는 수 없이 그 끝에 이름을 올리며 한 번 더 다짐했다.

“나는 황숙께서 인의의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약조 는 저버리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문서를 거두었다. 오래잖아 술자리가 끝나고 노숙은 동 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유비와 공명은 배까지 나와 노숙을 배웅 했다. 배에 오르는 노숙을 잡고 공명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자경께서는 오후께 돌아가 잘 말씀드려 천에 하나라도 딴생각을 품으시지 않도록 해주시오. 만약 우리가 문서로 약조한 것을 오후께 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안면을 바꾸고 강남 여든한 고을 을 모조리 빼앗아버릴 것이오. 부디 두 집안의 화기(氣)를 상해 조 조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주시오.”

은근한 협박까지 담긴 말이었다. 노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배에 올랐다.

형주를 떠난 노숙은 먼저 시상으로 돌아가 주유부터 만났다. 기다

리고 있던 주유는 노숙이 들어서기 바쁘게 물었다.

“그래, 형주를 되돌려받는 일은 어떻게 되었소?”

“여기 받아온 문서가 있습니다.”

노숙이 까닭 없이 움츠러든 목소리로 유비가 써준 문서를 주유에 게 내놓았다. 얼른 그 문서를 받아 읽기를 마친 주유가 발을 구르며 노숙을 몰아세웠다.

“자경은 또 제갈량의 꾀에 넘어갔구려! 말이 땅을 빌린다는 것이 지 실제로는 그대로 집어삼키겠다는 수작이나 다름이 없소. 그들은 서천을 차지하면 곧 형주를 돌려준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 려야 한단 말이요? 십 년이 걸려도 서천을 차지하지 못하면 십 년이 지나도 형주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따위 문서가 무슨 소용 이겠소? 거기다가 그대는 또 저들과 나란히 보증까지 서셨구려! 만 약 저들이 형주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대까지 얽혀들게 되 었소이다. 주공께서 죄를 물으시면 어쩌시려고 이같이 어리석은 짓 을 하셨소?”

그 말을 듣자 노숙도 뜨끔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 아버린 살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노숙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유현덕은 결코 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자경이야 성실한 사람이지만 유비는 야심이 큰 효웅(梟雄)의 하 나요, 제갈량은 꾀와 속임수가 많은 이외다. 선생의 마음과 같지는 않을 것이니 그게 두려울 뿐이오.”

주유가 안타까운 듯 노숙의 말을 받았다. 노숙도 드디어 뒤가 켕기는지 걱정하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노숙이 그렇게 나오자 주유가 좀 안됐던지 문득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자경은 내게는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이오. 지난날 곡식 낟가리 를 헐어 나누어주시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아니 구해드릴 수 있 겠소이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보시오. 강북에 보낸 세작들이 돌아오는 대로 그들이 탐지해 온 바에 따라 따로 방도를 내어보겠소이다.”

그러나 노숙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 주유와 헤어진 뒤로도 며칠을 다리조차 제대로 뻗고 잘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주유가 풀어 세작이 돌아와 알렸다.

“형주성에는 베로 만든 상기(喪)가 걸리고, 성 밖에서는 따로 무 덤 하나를 새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군사들도 모두 상복을 입고 있 습니다.”

“누가 죽었다던가?”

주유가 얼른 그렇게 물었다. 그 세작이 다시 대답했다.

“유현덕이 감부인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금 한창 극진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감부인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감부인은 유비가 불우할 때 만난 정인(情人)이요, 뒷날 소패에서 맞아 정식으로 부부가 된 뒤에는 하 나뿐인 아들을 낳아준 정실이었다. 거기다가 당양 싸움에서 미부인 을 잃은 뒤로는 유일하게 유비 곁에 남아 있던 여인이고 보면 그녀 를 잃은 슬픔 또한 남다를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주유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문득 무릎을 치며 노숙을 보고 말했다.

“이제 내 뜻은 이루어지게 되었소. 유비로 하여금 두 손을 내밀어 포박을 받게 하고 형주를 되찾을 계책이 있소!”

“어떤 계책입니까?”

노숙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주유가 자랑스레 자신이 마음 먹은 계책을 펼쳐보였다.

“유비는 그 아내를 잃었으니 앞으로 반드시 새 장가를 들 것이오. 그런데 우리 주공께서는 누이 한 분이 계시지 않소? 매우 굳세고 용 감해서 수백의 계집종들에게 언제나 칼을 차고 다니게 하실 뿐만 아 니라 방안에도 병기를 가득 벌여 세워둘 정도로 남자 못지않은 분이 시오. 나는 지금 주공께 글을 올려 형주로 중매설 사람을 보내도록 할 작정이오. 그가 유비를 달래 우리 동오로 오게 한다면 나는 남서 에서 기다리다가 유비가 장가를 들고 자식을 얻게 되기는커녕 잡아 다 옥에 가둬버리고 말겠소. 그리고 사람을 보내 형주와 유비를 바 꾸자고 한다면 저들이 어쩌겠소? 별수 없이 형주의 성들을 내주거 든 그때 가서 할 일은 내가 따로 생각해놓았소. 자경의 신상에는 결 코 아무런 일이 없으리다.”

듣고 보니 자못 그럴듯했다. 노숙은 한 짐던 듯 밝은 얼굴로 주유 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주유는 곧 글 한 통을 써서 노숙에게 주고 빠른 배 한 척을 골라 손권이 머물고 있는 남서로 가도록 했다. 손권을 만난 노숙은 먼저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한차례 말한 뒤에 유비가 써준 문서를 올렸 다. 손권은 그 문서를 펴보려고도 않고 볼멘소리부터 했다.

“그들이 그렇게 되지도 않는 말로 얼버무리려 드는데 이따위 문서가 무슨 소용이란 말씀이오!”

그러자 노숙은 다시 주유가 써준 글을 꺼내 올렸다.

“실은 주공근도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따로 써 올린 글 이 있는데, 주공께서 그 안에 씌어진 대로만 하신다면 형주를 얻으 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제야 손권도 낯빛을 풀고 주유의 글을 펴들었다. 읽기를 마치고 머리를 끄덕이는 품이 주유의 계교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누구를 형주로 보낸다?’

주유가 써놓은 대로 해보기로 작정한 손권은 마음속으로 벌써 중 매를 구실로 유비를 달래 데려올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워낙 중대 한 일이라 얼른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 일은 여범이 아니고서는 안 되겠다.’

손권은 곧 여범을 불러 말했다.

“요사이 듣자니 유현덕이 그 부인을 잃었다는구려. 마침 내게 누 이 하나가 있으니 유현덕과 짝을 지어주고 싶소. 우리 두 집안이 혼 인으로 길이 맺어져 한마음으로 조조를 쳐부수고 한실을 되일으킬 수 있다면 그 아니 아름다운 일이겠소? 그런데 이번 중매는 자형(구 衡, 여범의 자)이 나서지 않으면 일이 될 성싶지 않으니 바라건대 자 형은 곧 형주로 가서 유비에게 한마디 해주시오.”

이에 여범은 그날로 배를 수습해 졸개 몇 명을 거느리고 형주로 떠났다.

그 무렵 유비는 감부인을 잃고 밤낮으로 슬픔에 젖어 있었다. 오 랜 세월 싸움터만 따라다니며 고생을 하다가 이제 겨우 기반을 잡아 간다 싶자 떠나간 아내라 더욱 슬픔이 큰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 는 공명과 마주 앉아 감부인과의 지난날을 쓸쓸하게 되새기고 있는 데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동오에서 여범이란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는 주유의 계교일 것입니다. 반드시 형주 일 때문에 짜낸 것일 테니 저는 병풍 뒤로 가서 엿들어보도록 하지요. 주공께서는 저쪽에 서 무슨 말을 하든지 모두 들어주도록 하십시오. 나머지는 그 사람 을 역관으로 보내 쉬게 한 뒤 따로 의논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풍 뒤로 가서 숨었다. 유비는 곧 사람을 보내 여범을 불 러들이게 했다. 서로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유비 가 물었다.

“자형께서 오신 것은 반드시 제게 할 말이 있어서일 것이오. 어떤 가르치심을 주려 하시오?”

“제가 근래에 들으니 황숙께서 부인을 잃으셨다는 소문이 있었습 니다. 크신 슬픔을 모르는 바 아니나, 마침 좋은 집안의 규수가 있기 에 면구함을 무릅쓰고 특히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존의 어떠하신지요?”

여범이 대뜸 그렇게 물었다. 너무 갑작스런 물음이라 유비가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이윽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이 들어 아내를 잃고 보니 더욱 큰 불행으로 여겨지는구려. 그러나 아직 아내의 뼈와 살이 식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장가들 일을 입에 담을 수 있겠소?”

“사람이 그 배필이 없는 것은 집에 대들보가 없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 같은 인륜을 중도에 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인 오후께 한 누이가 있는데 아리따우면서도 어질어 황숙께 서 부인으로 맞으시기에 모자람이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두 집 안이 옛적 진(秦)과 진(晋)처럼 혼인으로 맺어진다면 조조는 감히 다시는 동남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은 집안과 나라가 한가 지로 편안케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니 부디 황숙께서는 여기에 무슨 딴 뜻이 있는지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우리 국태(國太) 오부인(吳夫人)께서 어린 딸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멀리 시집 보내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황숙께서 동오 로 건너가시어 혼인을 하셔야만 이번 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범은 유비가 장가들 일을 그리 서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단숨에 거기까지 말했다. 신부감이 다름 아닌 손권의 누이동생임을 얼른 밝혀 유비의 구미가 당기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유비도 여범의 말을 듣자 얼굴에 문득 긴장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럼 이 일을 오후께서도 알고 계시오?”

유비가 그렇게 묻자 여범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먼저 오후께 말씀드리지 않고 어찌 감히 와서 이런 소리를 늘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비는 아무래도 그 갑작스런 혼삿말이 미심쩍었다. 슬몃 다른 핑계를 내밀어 여범의 속을 떠보았다.

“내 나이 이미 쉰이라 수염과 머리칼이 희뜩희뜩하외다. 그런데 오후의 누이동생이라면 아직 꽃다운 나이일 터인즉 나는 그 배필감 이 되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여범이 다시 열을 올려 말했다.

“오후의 매씨(妹氏)는 몸은 비록 여자라도 그 뜻은 남아에 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말하기를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나는 그를 남편 으로 섬길 수 없다’ 하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황숙께서는 이름 을 사해에 두루 떨치고 계시니 바로 그분의 배필로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나이가 많고 적음을 꺼려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유비는 공명에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더 잘라 거절 하지 않고 대답을 미루었다.

“공은 일단 돌아가 잠시 쉬시오. 내일 내 뜻을 알려드리리다.” 

유비는 그렇게 말하고 잔치를 열어 여범을 대접한 뒤 역관으로 돌아가 쉬게 했다. 그러나 마음은 아무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날 이 저물기 바쁘게 공명을 불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유비는 여범에게 들은 대로 공명에게 전하고 그렇게 물었다. 공명 이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 말을 받았다.

“여범이 온 뜻은 제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점괘 를 뽑아보았더니 크게 길(吉)하고 이로운 징조가 보였습니다. 주공 께서는 어서 그 일을 허락하시고 먼저 손건을 여범과 함께 동오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오후를 만나보고 그 앞에서 혼인을 정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 다음 날을 뽑아 가시어 혼인을 하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유가 계교를 꾸며놓고 이 유비를 해치고자 하는데 어찌 가볍게 몸을 움직여 위태로운 땅으로 들란 말씀이오?”

유비가 진작부터 마음속으로 떨떠름해하던 것을 물었다. 공명이 무엇 때문인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유가 비록 계교를 잘 쓴다 해도 어찌 이 제갈량의 헤아림을 벗 어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작은 꾀만 내어도 주유는 계교를 반도 펼 치지 못할 것이니 오후의 누이가 주공의 사람이 됨은 물론 우리가 형주를 잃게 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비는 마음을 놓지 못해 얼른 일을 매듭지을 수 없었다. 보다 못한 공명이 나서서 손건을 여범과 함께 강남으로 보 냈다. 손권을 만나면 해야 할 말까지 자세히 일러주고 나서였다.

강남으로 간 손건은 손권을 만나보고 제갈량에게 들은 대로 말을 끌어갔다. 그 바람에 마침내 손권은 여럿 앞에서 이렇게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누이동생을 현덕에게 시집 보내려 하는 데는 조금도 딴마음이 없소!”

그 말을 듣자 손건은 비로소 손권에게 절하며 감사하고 형주로 돌아갔다.

손건이 돌아와 오후가 직접 나서서 그 혼인을 맺으려 한다는 말 을 전했으나 유비는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감히 강남으로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공명이 와서 말했다.

“제가 이미 세 가지 계책을 마련했사오나 조자룡이 아니면 제대로 펼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를 불러 세밀하게 일러줄 터인즉 주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조운을 불러 비단 주머니 셋을 내주며 귀엣말로 일렀다. 

“그대는 주공을 모시고 동오로 가되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비단 주 머니 세 개 안에 적혀 있는 대로 하라. 그 안에는 세 가지 묘책이 들 어 있으니 차례로 따르면 된다.”

이에 조운은 그 비단 주머니들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길 떠날 채 비를 했다. 공명은 다시 사람을 먼저 동오로 보내 혼인에 쓸 예물을 마련하게 한 뒤 유비를 재촉했다.

공명이 앞서서 서두르는 바람에 유비도 할 수 없이 따르니 때는 건안 십사년 겨울인 시월이었다. 유비는 조운, 손건과 오백여 명의 군사를 열 척의 빠른 배에 나누어 태우고 형주를 떠나 남서로 향했 다. 형주의 일은 공명이 모두 알아서 처결하기로 하고 마음에도 없 는 장가를 들러 가는 길이었다.

겉보기는 형주의 유비와 동오의 손권을 더욱 단단히 맺게 되는 혼인 길이었으나 사실 그 뒤에서 이는 것은 진작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두 집안 사이의 불길이었다. 조조의 팔십삼만 군을 태운 적벽의 불길은 이제 두 집안 사이로 옮아 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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